신약성서/사도행전

[스크랩] 사도 바울 / 생애와 신학

류성련 2010. 7. 4. 01:18

 

 


                  렘브란트 / 감옥 안의 바울, 1627

 

 

사도 파울로스(그리스어: Παυλος)

 

초기 기독교의 포교와 신학에 주춧돌을 놓은 사도이다. 개신교에서는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파울로스는 초대교회를 이끈 뛰어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려는 열정 하나로 아프리카(북아프리카) 지역을 제외한 로마 제국의 주요도시를 돌아다녔다.

무려 20,000km에 이르는 거리를 돌아다닌 그의 선교여행과,

신약성서 27개의 문서 중 13편에 달하는 그의 이름으로 된 서신서들은, 초대 교회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업적이다.

그는 자신이 선교여행 중에 여러 번 죽을 위기를 맞았다고 말한다.

유대인에게 다섯 번 매를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배가 파선되었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1:23-28)

그렇게 그는 그리스도교회를 세웠고, 그 교회는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름

파울로스는 그리스세계에서 흔하게 사용된 그리스 이름이며, 그의 히브리어 이름은 ‘사울’(Saul) 또는 ‘샤울’이다.

재미교포들이 한국어 이름과 영어 이름을 모두 사용하는 것처럼 해외파유대인(디아스포라)들도

히브리어 이름과 그리스어 이름을 모두 사용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로도 그리스어 이름인 바울로와 히브리어 이름인 사울을 모두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사울이 바울로로 개명했다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주장은 사도 바울로 시대의 문화에 대해서 몰라서 생긴 오해이다.[1]

 

한국어 성서 번역본의 음역 차이

개역한글판(대한성서공회)에서는 ‘바울’(Paul), 공동번역성서(대한성서공회)에서는 ‘바울로',

천주교 성경(2005년,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는 바오로라고 한다.

그외 ‘바우로’라고도 음역되는데, 1965년성공회 공동기도문과 성공회 소성인전에는 바우로로 음역되어 있으며,

현재도 한국 성공회에서는 바우로를 신명(信名)즉, 세례받은 신자에게 붙여주는 이름으로 사용한다.

기독교성인. 축일은 베드로와 똑같은 6월 29일이며 흔히 귀족적인 용모에 머리숱이 적고 길고 검은 수염을 기른

남성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1세기 이후에 등장한 성화에서 발견된다.

 

생애

사도행전(22,3)에 따르면 파울로스는 소아시아의 키리키아 지방(길리기아, 현재의 터키)의 중심도시 타르소스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출생년대는 신약성서학계에서 기원후 5년 즈음으로 추측하고 있으며[2], 출생 지역과 년대로 미루어 보아 파울로스는

로마 제국의 시민권을 가졌으리라 보고 있으며, 이에 관한 간접적인 기록으로 사도행전(22,25-29)에서 파울로스가

선교 활동 중에 로마군에 체포 되었을 때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고 말한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파울로스는 사도행전 21장 39절에서 자신이 타르소스의 시민권을 갖고 있다는 엇갈린 말을 하고 있으며,

또한 사도행전을 쓴 사람이 바울로 자신이 아니라, 그가 죽은뒤 사도행전을 쓴 성 루가이기 때문에 여기에 관한 확실한

단정을 내리기가 어렵다.

여하튼 파울로스는 자신의 유대 혈통을 부정한 적이 없으며, 더군다나 그가 이른바 다마스쿠스(사도 9,1-19)에서

회심하기까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에 앞장 섰다는 점으로 미루어 그의 유대인 혈통에 관해서는 더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2코린 11,22; 로마 11,1).

파울로스의 서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석할 때 그는 아마 흠이 없는 교육을 두루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어디서 그리고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의 고향이 고대 그리스 문명의 영향 밑에 있었던 관계로 당시의 일반적인 고전 교육 및 유대교적 율법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사도행전 22장 3절에 따르면 그는 존경받는 율법학자 가말리엘에게서 율법 공부를 받았는데, 유대 전통에 따라

구약성서(율법, 예언서), 율법 해석(미드라시), 수사학을 공부했을 것이다.[3]

이러한 체계적 신학교육은 사도 바울로를 유대 전통인 율법을 비판할만큼 뛰어난 신학자로 자라게 해 주었다.

사도 파울로스가 가말리엘의 제자였다는 사도행전의 설명을 바탕으로 회심하기 전까지 그가 바리사이 파에 적극 협조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파울로스의 출생과 유대교의 율법을 추종하였던 젊은 시절의 활동은 자신의 사목방향이나 신학적인 견해에

맞지 않을 경우 타협하지 않았던 그의 곧은 성품에서 잘 반영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요 연대

R.Jewett이 바울 서신과 사도행전, 비그리스도교적 자료를 기초로 파울로스의 연대기를 재구성한 내용[4]

  • 다마스쿠스 사건 34년
  • 제1차 예루살렘 방문 41년
  • 소아시아와 그리스에서의 선교, 제2차 예루살렘 방문 51년
  • 로마로의 송환 59년-60년
  • 사망 62년

성공회 신학자 박태식 신부가 제작한 바울로 연대기[5]

다마스쿠스에서의 회심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회심, 카라바조

 

사도 파울로스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다마스쿠스에 가던중 예수의 나타남을 보고 그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예수의 제자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스도교인이 된후 성 바르나바의 중재로 사도들과 교제하였다. 하지만 성 바울로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그리스도교

독립종교가 아니라, 나자렛사람으로 불리던 즉, 나자렛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유대교 소종파였기 때문에, 개종으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선교활동

파울로스는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에서 선교 활동을 했는데, 도중에 이들은 결별을 했다.

마르코라는 헬라식 이름을 가진 유대 청년 요한이 도중에 선교 활동을 중단한 적이 있는데, 바르나바가 그를 전도여행에

다시 데려가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고지식한 성격의 파울로스는 이를 거절했고 결국 심한 언쟁(직역하면 엄청난 분노와 성냄)끝에 서로 헤어졌다.

사도행전에서는 이들의 논쟁이 벌어진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며칠 뒤에 바울로는 바르나바에게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한 모든 도시를 두루 찾아다니며 교우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하고 제언하였다. 그 때 바르나바는 마르코라는 요한도 같이 데려

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바울로는 자기들과 함께 가서 일하지 않고 밤필리아에서 떨어져 나갔던 사람을

데리고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심한 언쟁 끝에 서로 헤어졌는데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 를 타고 키프로스로 떠나가 버렸다.(사도행전 15:36-39)

여기서 심한 언쟁으로 번역된 헬라어 파록쉬스모스는 엄청난 분노와 성냄을 포함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파울로스와 바르나바간의 언쟁은 서로 견해를 주고받으며 최선의 결론을 내는 토론이 아니라, 서로에게 엄청난

적대감을 드러내며 벌인 감정다툼이었던 것이다.,[8]

이들의 분쟁에 대해 성공회 신학자인 톰 라이트 주교(Bishop Tom Wright)는 사도들이 '위로의 아들'이라고 불러줄만큼

성격이 유순한 바르나바와 성격이 불같고 급한 바울로가 서로 원만하게 지내기는 힘들었기 때문으로 이해한다.

파울로스는 아테네, 테살로니키, 코린토스, 에페소스 등에서 선교활동을 했으며, 특히 고린토스에서는 브리스킬라와

아퀼라라는 유대인 천막업자 부부와 같이 일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다.

나중에는 마케도니아 지방에서도 선교활동을 할 정도로 활약하지만, 64년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로 순교하였다.

탈 율법적인 신학을 가진 그의 선교활동은 나사렛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유대교 소종파로 남아 있던 기독교를 세계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종교로 발전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또한 영국 성공회 사제인 매슈 폭스 신부의 《순교자》에 따르면, 사도 성 바울로의 선교활동은 에페소스교회의 주교

디모테오에게 계승되었다.

 

다른 사도들과 불편한 관계

베드로와 파울로스-엘 그레코
  • 사도권을 둘러 싼 갈등

사도(apostle)는 희랍어 'απόστολος'를 음역한 것이다.

'απο'는 접두어이며, 'στολ'은 '파송하다'는 동사의 어간 'στελ'이 변형된 것이다.

따라서 사도 라는 뜻이 희랍어 원어는, 어떤 임무를 이룩하기 위해 누군가를 앞에 보낸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사도'란 기독교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기독교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공동체의 지도자 역할을 맡긴

사람을 뜻한다.[9]

사도로서 임명 될 자격 중 하나는 에수의 행적을 직접 본 사람이어야 했다.

파울로스는 환상 중에 예수를 만나 뵙고 그에게 사도로서의 임명과 그 분에 대한 지식을 전수 받았다고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이는 쉽게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임명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과연 '사도'인지를 둘러 싼 논쟁이 있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르나바의 중재로 그의 진신설이 교회에서

받아들여진 것으로 나타나 있다.[10]

  • 유대 기독교인들과의 신학갈등

신약성서학자 김득중(전 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은 초대교회의 기독교인들을 유대교와 기독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해석하여 즉,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종파로 이해하여 율법, 할례 등의 유대교 전통을 강조한 유대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와

기독교간의 단절을 주장하여,유대교 전통을 거부한 이방 기독교인으로 구분했는데, 바울로는 이방 기독교의 지도자였다고

주장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 야고보등의 기존 사도들은 베드로와 바울로가 충돌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이었고, 순교자 스데파노(스데반)를 비롯한 일곱 부제(Diakonos)들은 이방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은 일치하지 못하고 신학적인 갈등을 겪었는데, 이방기독교 지도자 파울로스는 유대 기독교인들을 다른 복음을

전한다느니(갈라디아 1:7), 거짓 형제(갈라디아서 2:4)라느니 하는 격렬한 말로 비난했고, 유대 기독교 공동체였던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파울로스를 유대교 전통을 파괴하는 인물로 보았다.(사도행전 20:22)

 

파울로스의 사회 문화적 정황

바울 후 그리스도교 선교활동은 기원후 35년에서 60년 사이 정도에 이루어졌다.[11]

당시 로마제국은 지중해 전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군사적인 힘을 바탕으로 지중해 주변을 장악한 로마는, 기술 및 정치 조직에서 다른 지중해 주변의 나라들보다 우위에 있었다.

거기에 그리스(헬라)의 예술적이고 지적인 유산이 합쳐져서, 지중해 세계는 하나의 공통된 도시문명으로 통합되었다.[12]

이 부분의 본문은 역사적 예수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우주관은 오늘날의 입장에서는 신화적이었다.

그들은 천상이 세 가지 층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13]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교회에 보낸 서신서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자랑해서 이로울 것은 없지만 나는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신비로운

            영상과 계시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내가 잘 아는 그리스도 교인 하나가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까지

            붙들려 올라간 일이 있었습니다. -몸째 올라갔는지 몸을 떠나서 올라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나는 이 사람을 잘 압니다. -몸째 올라갔는지 몸을 떠나서 올라갔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그는 낙원으로 붙들려 올라가서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을 자랑하려고 하며 나 자신에 관해서는 나의 약점밖에 자랑하지 않겠습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고린도후서12:1-5)


 

파울로스의 신학

파울로스의 예수상과 교회

예수상

신약성서학자 박태식에 따르면, 파울로스는 역사적 예수를 만난 적은 없으며,그리스도복음을 전달받아서 전한다는

파울로스 서신서속의 언급들도[14]도 문서나 구전으로 전승된 그리스도의 말씀(예수전승)을 전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파울로스 서신서도 교회에서 문서나 구전으로 전승된 그리스도의 말씀들을 저자의 신학에 따라 해석된

신학문서인 것이다.[15]

물론 파울로스가 고린도전서 11:23에서 언급한 성찬례(Holy Communion=성만찬)설명도 교회를 통해 전승되던 그리스도의

성찬례 제정이야기를 언급한 것이다.[16]

 

교회관

파울로스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기초요 머리로 해석했으며(고린도전서 3:11,로마서 12:4-5,고린도전서 12) ,

파울로스의 제자들이 선생의 이름을 빌려서 쓴 에페소서에서는 교회그리스도,사도들과 예언자들을 기초로

하며(에페소 2:20), 민족의 구분이 없는 보편교회(에페소 2:14-16)로 해석하고 있다.

 

신약성서의 해석

구원론

이방기독교 지도자 파울로스는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칭의를 주장했으며,

이러한 구원관은 유대교 전통을 강조한 유대 기독교와 갈등을 겪게 하였다.

그래서 신약성서학자 김득중은 마태오 복음서에서 믿음의 실천을 강조하는 이유를 파울로스의 칭의교리가 실천을 소홀히

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으로 추정한다.[17]

 

파울로스의 편지

편지의 작성자 문제

신약성서에서 실제 파울로스의 편지가 몇 개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존재한다.

전통적인 교회의 견해에 따르면, 바울로 서신서는 14개에 달한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은 바울로 서신서에서 사용된 언어와 내용을 살펴서 다음과 같이 구분하려 한다.

1. 확실히 파울로스가 작성한 편지: 로마서, 고린도 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 전서, 빌레몬서
2. 파울로스가 썼을 가능성이 있으나 증거가 부족한 편지: 데살로니가후서
3. 파울로스가 쓰지 않았으나 그의 사상이 담긴 편지: 골로새서, 에베소서[18]
4. 파울로스의 이름이 나오나, 그와는 다른 시대, 다른 상황에서 기록된 편지: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5. 파울로스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그와는 전혀 다른 사상과 문체로 기록된 편지: 히브리서[19]

파울로스의 신학 사상이 집대성 된 서신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교부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종교 개혁의 주역인 마르틴 루터, 감리교의 창시자이자 영국 성공회 사제존 웨슬리 신부

교회사의 쟁쟁한 인물들에게 영향을 준, 파울로스의 대표적인 서신이다.

주석

  1. 《타르수스의 바오로》/박태식 지음/바오로딸
  2. 《타르수스의 바오로》/박태식 지음/바오로딸
  3. 《타르수스의 바오로》-바오로의 생애/박태식 지음/바오로딸p.37
  4. R.Jewett, A Chronology of Paul's Life,(Philadelphia:Fortress Press, 1979), pp. 96-104, 하워드 클락 키이,
  5. 《신약성서 이해》, 서중석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1990, pp. 306-308에서 재인용
  6. 《타르수스의 바오로》/박태식 지음/바오로딸 p.3
  7. 성 바르나바와 성 파울로스가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공동사목했다는 내용은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성직자 오경준
  8. 목사가 쓴 《우리가 아는 것들 성경에는 없다》'완벽한 성인 바울은 없다'/오경준 지음/홍성사를 근거로 한다.
  9. 《이야기 세계사》/김경묵외 공저/청아출판사
  10. 《우리가 아는 것들, 성경에는 없다.》'완벽한 성인 바울은 없다.'/오경준 지음/홍성사
  11. 하워드 클락 키이,[신약성서 이해], 서중석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1990, p.349
  12. 사도행전 9장 26,27절
  13. P. J. 악트마이어, J. B. 그린, M. M. 톰슨, [현대적인 방법을 적용한 새로운 신약성서개론], 소기천, 윤철원,
  14. 이달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4, p. 351
  15. 캐롤라인 오시에크, [신약의 사회적 상황], 김경진 옮김, 기독교문서선교회, 1996, p. 76
  16. 정승우 (2005).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책세상, 79-80쪽. ISBN 9788970134888.
  17. 갈라디아서 1:12,고린도전서 7:10,9:14,11:25,데살로니가전서 4:15
  18. 《타르수스의 바오로》/박태식 지음/바오로딸 p.64
  19. 《타르수스의 바오로》/박태식 지음/바오로딸 p.66
  20. 복음서 신학》/김득중 지음/컨콜디아
  21. 신약성서학자이자 성공회 사제인 박태식(요한)신부는 바울로 서신서중에서 에베소서를 바울로학파의 작품 즉,
  22. 바울로의 제자들이 쓴 작품으로 보고 있으며, 성서신학자 르네 지라르는 골로새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를 바울로의
  23. 제자들이 교회의 요청에 따라 쓴 작품으로 보고 있다. 《타르수스의 바오로》/박태식 지음/바오로딸p.173,
  24. 《성경, 세계최고의 베스트셀러》/르네 지라르 저/김주경 옮김/시공사 p.104
  25. 파울로스의 편지 분류는 하워드 클락 키이의 것이다. 하워드 클락 키이, [신약성서 이해], 서중석 옮김,
  26. 한국신학연구소, 1990, pp.304-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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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Two Old Men Disputing (St Peter and St Paul)
1628, oil on wood, 72.3 x 59.5 cm. / National Gallery of Victoria, Melbourne

 

그리고 삼년 후에 나는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보름동안을 지냈다.( 갈라디아서 1장 18절)

그림에서 바울은 약간 높은 의자에 앉아 권위있는 선생처럼(그러나 당시 바울이 이렇게 늙었을리 없다) 손가락으로 성서의

한 부분을 가리킨다. 반면 베드로는 측면 뒷모습을 보인채 바울의 주장을 듣는다.

 

 

바울 신학  / 이배식목사

 

사도 바울은 한 때 예수님의 제자를 핍박하던 자였으나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후 예수님을 강력히
증거하였고, 전도여행을 통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는 로마시민이자 율법학자로 복음을 체계화 해 여러 서신서를 통해 우리에게 남겨준 학자적 사도입니다.

 

 * 목차

 

Ⅰ. 서 론

 

Ⅱ. 사울이 바울된 신학적 배경과 소명

 

  1. 유대종교와 예수 그리스도

    A. 유대종교와 사울

    B. 예수와 그의 제자들

  2. 바울의 성장 과정

    A. 출     생

    B. 가     족

    C. 교     육

    D. 성     격

  3. 다메섹도상에서의 바울의 회심

    A. 바울의 회심 사건

    B. 회심의 신학적 의의

    C. 부활에 대한 바울의 확신

  4. 소     명

      A. 사도로서의 사명 의식

      B. 선교에 대한 바울의 자각

      C. 선교대상

        ① 유대인

         ② 이방인

      D. 선교의 주제(메시지)

        ① 그리스도의 인격과 업적

         ② 인간에 대한 구속의 칭의

         ③ 하나님의 계획의 완성

 

Ⅲ. 바울의 신학 사상

  1. 바울 신학의 특색

    A. 체험 중심 신학

    B. 그리스도 중심 신학

    C. 중생 중심 신학

    D. 선교 중심 신학

  2. 바울 신학의 요소

    A. 유대교적 요소

    B. 율법적 요소

    C. 신비적 요소

  3. 바울의 율법 개념

    A. 율법의 유래

    B. 율법의 본성

    C. 율법의 역사

  4. 바울의 인간론

    A. 인간의 주조적 양면성

    B. 인간의 육신과 영

  5. 바울의 기독론

    A.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B.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

    C. 부활하신 그리스도

  6. 바울의 성령론

    A. 성령의 인격성

    B. 성령의 신성

    C. 성령의 동등성

  7. 바울의 구원론

    A. 구원의 필요성과 죄

    B. 구원의 도구(복음)

    C. 구원의 방법(칭의)

    D. 구원의 수단(신앙, 믿음)

    E. 구원의 결국(성화)

  8. 바울의 교회론

    A. 교회의 개념

    B. 교회의 정의

    C. 교인에 대한 호칭

    D. 교회의 근원

    E. 온전한 교회

9. 바울의 종말론(그리스도의 재림)

 

Ⅳ. 결 론

 

 

< 바울 신학 >

 

Ⅰ. 서 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예수의 제자들은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충만하게 받아 기적과 이적을 행하며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믿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단시하여 십자가에 못 박은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도를 쫒는 사람들에게 대한 핍박은
날로 더욱 심화되어 갔다.

하지만, 성령이 충만한 예수의 제자들은 굴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의 복음 전도의 범위는 이방 지역에 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당시 사울은 헬라문화권에서 성장한 유대인(디아스포라)으로서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으며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예수의 도를 좇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하여 조상의 유전인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켰던 자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강권적인 역사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처하던 율법주이자 사울을 택하여
복음으로 새롭게 거듭난 사람 복음의 사도 바울되게 하시고 이방 지역에 복음을 증거할 사도로 택하셨다.
다시 말해서 율법주의자 사울이 복음의 사도 바울이 된 경위는 주님의 일방적인 강권 역사로 시작되었다.

조상들의 유전인 율법을 열심히 믿고 지켰던 사울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자처하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이단시
하였으며,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의 도를 좇는 자들은 남여불문하고 투옥하기 위하여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대제사장에게 청하여 가지고, 예수의 도를 좇는자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홀연히 빛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며, 또한 그의 음성을 듣고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되었고, 더욱이 아나니아라 하는 예수의 제자에게 안수를 받고 그를 통하여 예수님이 분부하신 말씀을 들을 때 멀었던
눈이 다시 보게 되었으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율법주의자 사울이 복음의 사도 바울로 변하여 주님께서 주신 사명
이방의 사도로서 복음선교에 전 생애를 바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변한 사도 바울의 회심의 동기와 소명 그리고 그의 신앙과 사상을 신학적 차원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Ⅱ. 사울이 바울된 신학적 배경과 소명

 

사울은 예수와 같은 시대(로마제국 통치하)에 살았으며, 종교적으로는 엄한 율법아래에서 교육받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나님을 공경한 철두철미한 율법사상의 소유자였으며, 사회적으로는 헬라문화권인 길리기아 다소에서 성장하여
어려서부터 이방문명 속에서 보고 배워 이방 문화에 박식하였으며, 특히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울은 두세계의 사람 즉, 유대인세계와 헬라인세계의 사람이었다.
그는 내적으로는 철저한 유대적인 기질을 가졌으며, 그뿐 아니라 사울은 유대인들이 거의 알지 못했던 로마와 헬라를
잘 알고 있었다.

사울이야말로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앞에 복음을 전하기에 최적합한 자로 인정 택함받아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도행전 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 유대종교와 예수 그리스도

    A. 유대종교와 사울

 

유대인들의 종교관은 여호와만이 유일한 신으로 믿어왔다.
만물을 창조하신 분도 여호와이시며, 다스리는 분도, 명령하시는 분도, 심판하시는 분도, 구원하시는 분도, 여호와
한 분으로 믿어 왔으며 특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이스라엘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수많은 민족중에서
그의 후손을 택하시고,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신 4:20, 10:14-15)고 믿어왔다.

이스라엘 백성의 특권은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신 6:14-15) 하나님의 뜻을 체험하고, 그 뜻을 이루어 나가는 백성으로
선택되었다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주신 율법(게명)이 이스라엘 역사상 항상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에 언약이며, 축복의
약속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때 이 백성을 축복하였으며 불순종할 때 벌을 내렸다.(
신 11:26-28)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관은 제물인 소나 양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드림으로 죄사함 받으며 깨끗해 지는 줄만 알아왔다.
고로 항상 외적인 의식에만 치중하여 왔다.
이러한 율법적인 신앙관에 굳어버린 그들이지만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함으로 산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종말론에 기대가 눈에 보이는 현실과 육신적인 면에만 치우치다보니, 그들의 미래에 대한 소망관도
항상 세상적인 눈에 보이는 희망에 치중하였다.
즉, 메시야의 오심과 잃어버린 국토의 회복, 그리고 모든 이종교자들의 침해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 줄 것과
이미 예정하신 다윗의 혈통에 주어진 약속이 속히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메시야 바로 구세주로 오신 예수를 믿지 않고, 도리어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다.
그들은 오리라 한 메시야는 영광된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 권세자들을 심판하고 통치할 줄만 알아 왔다.
율법주의적 종교관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에게는 목수의 아들인 예수가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야로 믿어지지가
않았다.

유대인들의 기대는 반드시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시면, 육신으로 영원히 계시어서 통치하실 줄로 믿고 있었다.
(
사9:6-7; 겔37:25; 시89:4; 단2:44; 막11:10; 눅1:33; 요12:34.)

그런데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예수는 죽을 것을 말하며, 또한 많은 이적과 표적을 행하였으나 로마 식민지
노예에서의 해방에 대한 주권 회복의 말은 없고, 도리어 유대인인 율법주의자들의 신앙의 모순된 점을 지적 개혁을
주장함으로 하나님의 유일한 택한 백성으로 자부하던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 아닐수 없었다.

성경에서 마지막 율법의 예언자인 세례 요한도(마 11:13) 오실 메시야가 바로 예수임을 예언하고(마 3:11-17,요 1:33-34)
세례까지 베풀고도 믿어지지 않아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에게 확인하였다.(
마 11:3)
율법안에서 택한 백성임을 자부하는 유대인들은 택함받은 유대인외에 다른 민족은 버림받는 자들로만 알아왔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순종치 않는 백성이 바로 유대인들이었다.(
마 23:14, 롬 10:3)

예수님께서는 이 그릇된 신앙을 복음으로 개혁하시었다.
유대인들은 이 복음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유대교 종교가정에서 자라난 사울 역시 혈통으로는 유대인이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철저한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 라고 자부하였으며,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열심있는자로 예수의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여를 결박하여 옥에
넘기기까지 하였다.(
행 22:3-4, 빌 3:5-6)

 

    B. 예수와 그의 제자들

 

예수에 대하여 유년시절 과정을 기록한 문헌은 별로 없다.
이교적인 멸시를 받고 있었던 갈릴리의 나사렛이 그의 고향이고, 그의 부친 요셉은 목수였으며, 그의 모친은
마리아이고 그리고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는 그의 형제였다.

그 형제들은 예수의 권능을 믿지 않았으며, 도리어 예수를 배척하였다.(막 6:1-3, 마 13:55)
이들 형제중 야고보는 나중에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일하였으며, 그의 누이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복음서에 자주
나온다.(
막 6:3, 마 13:56)

예수의 모국어는 갈릴리어와 아랍어였으며 히브리어는 종교적 특수 용어로만 사용되었었다.
그리고 예수의 복음 전파 활동은 세례 요한보다 좀 늦게 시작되었다.
예수의 공적 활동은 30세가량 되었을 때부터였으며, 그가 3년동안 천국 복음을 온 백성에게 담대히 전하였다.(
눅 3:23)
또한 예수는 그의 제자를 택함에 있어 열 두 제자를 택하여 하나님 나라(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훈련시켰다.(마 10:1-3)

예수는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였으며, 율법주의자들에 모순점을 변론하고 병든 자를 고쳐주며, 많은 기적을 나타내어
사람들의 죄를 회개케 하였다.
고로 백성들은 그를 권능자 또는 메시야로 믿었으며, 오직 예수만이 죄를 심판하며,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구세주" 로
확신하였다.

즉 이스라엘이 대망하고 있는 구약선지자들이 예연한 메시야로 믿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받은 고난으로 그들의 신앙에 동요가 생기고 무력해졌으나, 예수님의 죽음에서 부활로
인해 믿음에 확증을 얻어 새로운 힘(성령)을 얻어 담대히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다.

성령의 충만함 입은 제자들은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오리라던 메시야 즉 "구세주"라는
사실을 증거하여, 예루살렘을 중심으로하여 유다와 사마리아에 있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
행2:1-11, 40-43, 5:41-42.)

이에 정통 유대교에서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은 날로 더하여 갔다.
사울(바울)도 바로 유대교 정토를 부르짖는 열열한 사람 중 한 사람으로 사도들을 핍박하였다.

 

  2. 바울의 성장 과정

    A. 출  생

 

사도행전 22장 3절에 바울은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하였다.
연대는 주후 1년경이라고 한다.(
The Life and Letters of St. Paul, p.22; 도양술저. [사도바울의 신학].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p.21.
)

다소는 역사적인 도시였다.
주전 800년경 앗수리아의 샬만넷셀이 정복한 도시 중에 다소의 이름이 기술된 것을 보면 매우 일찍이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 같다.(
Wiliam Barclay. The Mind of St. Paul. 서기간역. {바울의 인간과 사상}, 서울:기독교문사, p.18.)

다소는 길리기아에 있으며 다소 중심으로 흐르는 시드너스강은 지중해와 다소 중간에서 넓은 호수 "레그마" 호를 이룬다.
다소 사람들은 호수 기슭에 배들이 정착할 수 있는 선착장을 건조하여 지중해를 항해하는 배들을 이곳으로 정착하도록
했으며 그뿐 아니라 그들은 길리기아 내륙지방으로 통하는 길을 만들어 가바도기아와 갈라디아 대륙과도 빈번한 왕래가
있게 하였다.

그러므로 다소는 대륙과 해상의 교통을 연결하는 동서교통의 요충지이며 무역이 활발하였다.
또한 다소는 학문의 도시이기도 했다.
이곳에는 많은 학자들이 있어 다른도시에 비하여 학구열이 컸었다.
특히 "스도이고" 학파 철학자들로 유명하였다.
그러므로 다소에는 "스도아" 철학자들에 대한 존경심이 컸고, 그들의 사상적 영향은 일반시민에게 까지 미쳤다.

감수성이 예민한 바울은 이러한 학문적 풍토속에서 넓은 시야로 인류의 세계를 보았으며 세계의 끝까지 진출하려는
꿈을 키웠을 것이라고 본다.
그는 유대주의나 율법에 국한된 사고를 벗어나 당시 세계를 풍미했던 "노스틱" 철학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며, 후에 그가
선교활동을 하기전 다소에 머물러 있을 때 이러한 사상과 기독교 내지는 유대교의 사상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런 자기 출생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가 예루살렘에서 잡혔을 때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
행 21:39)고 하였다.
이런 곳에서 자라난 바울의 설교도 매우 도시적이다.(
바울의 설교; ① 도시건축 (고전3:11) ② 군대의 행진 (고후10:3-5,
고전14:8) ③ 노예 시장 광경 (고전6:20, 7:23) ④ 체육장의 형편(고전9:24-25)

 

    B. 가  족

 

빌립보서 3장 5절에 바울은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라고 하였다.
길리기아 지방의 다소에서 출생한 그의 집안에 대하여는 알려진바가 거의 없지만 "제롬" 이 전해준 전승에 보면 바울의
부모는 본래 갈릴리의 마을인 "기사랄" 에서 로마군이 팔레스타인을 폐허로 만들때 다소로 피난했다고 한다.
그는 로마 시민으로 태어날 수 있을 정도로 부요한 사회적 배경을 갖고 있었다.

베냐민 지파의 혈통을 가졌고, 그 이름을 사울이라 함은 베냐민 지파에서 출생한 최초의 왕인 사울을 따라서 명명한
듯 하다.
바울은 이와 같이 부요한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나,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후에는 다 분토와 같이 버리고, 셋집에
유하며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
행 28:30-31)
특히 바울의 생질은 유대인 40명이 결사대를 조직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할때에 그는 바울을 도와 구원하였다.(
행 23:16-24)

바울이 다소에서 얻은 로마 시민권은 그가 전도 여행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런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을 수 있는 조건은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당시 로마제국의 지배자들은 자기 영토내에 거주민을 크게 두 부류로 구별하였다.

① 이탈리아의 원주민을 위시하여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로마에 공을 세운 자,
② 금전 또는 정복민과 함께 온 노예들이다.

전자에게는 로마 시민권을 부여해서 특수한 인권과 권리를 허락하였다.
이것이 어떤 명예나 지위는 아니라 하더라도 로마법에는 그들에게 체포, 구금, 매질이나, 십자가에 처형할 수 없도록
규제하고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전도여행 중에 반대자들에 의하여 빌립보 옥중에 투옥되었을 때,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소유한 자임을
밝히자 즉시 석방되었고(
행 22:24-30), 예루살렘에서는 유대인의 난동으로 가이사랴에서 구금되었을 때, 억울함을
황제에게 호소하여 정당한 재판을 받기 위해 고소했던 것이다.(
행 25:9-12)

고대 세계에서는 로마 시민은 영예스러운 칭호였으며 땅 끝까지 통하는 완전 통행증 이었다.
바울은 그러한 시민권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또 그것을 자랑하였다. (
William, Barclay, The Mind of St. Paul. 서기간역,
[바울의 인간과 사상], 서울:기독교문사, p.30.
)

 

    C. 교  육

 

바울의 가정은 대표적인 바리새인의 가정으로 엄격한 가정교육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유대 법으로는 다섯 살이되면 성경 공부를 시작하고, 열 살이 되면 율법 전승들을 공부해야 한다고 규정짓고 있다.
바울도 이 규례를 따라 다섯 살 때부터 성경을 배웠으며, 열 살 때에 유대교의 중요한 문헌들을 암송하였으며 또한 천막
만드는 기술도 함께 익히게 되었다.

유대교의 사상은 생각과 행동을 함께 할 수 있는 교육 지표를 갖고 있다.
이러한 유대교육의 목표를 본다할지라도, 이념과 실천 즉 생활 교육의 병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이 선교사역 과정에서 학창 시절의 직업교육은 그의 선교생활에 크게 기여했던 것을 잘 알 수 있다.
(
행 18:3, 살후 3:8)

바울은 율법을 더 배우기 위해 "가말리엘"에게 보내졌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자기 내력을 이야기한 것을 보면(
행 22:3), 예루살렘에 오랫동안 거주한 것으로 말했다.

그가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바울의 스승은 아들 "시몬 가말리엘"이 아니고, 그의 아버지인 "가말리엘 1세"였다.
그는 베냐민 출신으로 바리새주의자의 거두였고, 특히 그는 개종자에게 후대함으로 그 이름이 높아졌다.
(
전경연외, [신약성서신학]. 서울:대한기독교서회, p.171.)
바울은 고향을 떠나 유대 예루살렘에서 율법교리의 교육을 엄하게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행22:3; 빌3:5-6; 갈1:14.)

이것만 보아도 바울은 완전한 교육을 받은 율법자이며 인정 받은 법관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항상 자기 자신을 뛰어난 유대인임을 자랑하였다.
바울을 출생 8일만에 할례를 받았다.(
빌 3:5)
즉 그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표시로서 선민의 표시를 자신의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의 일원이라는 것과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선택받은 민족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로마서 11장 1절에서도 재삼 강조하였다.
또한 바울은 혈통적으로 볼 때 단순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그는 이스라엘의 귀족인 바리새인이었다.
즉 그는 충실한 유대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성별된 사람"중에 한사람었다.(
갈 1:15)

오직 율법에 따라 살고 사고하는 것이 그의 생활이었다.
비록 그가 헬라문화권에 살고있었지만 일반 "디아스포라"처럼 헬라리즘에 동화되지는 않았다.
(
William Barclay. The Mind of St.Paul 박문재역. [바울신학개론]. 서울:크리스찬 다이제스트. pp.14,16.)

 

    D. 성  격

 

바울의 성격은 강직하고 열정적이었다.
그가 노한즉 추상같고 평시에는 온화한 봄날같았다 한다.
이런 성격은 회심 전이나 회심 후에나 변치않았다.
회심 전에는 이런 성격으로 기독교인을 박해했고, 회심 후에는 또한 이런 성격으로 전도하였다.

그는 이런 성격으로 회심 전에는 스데반을 박해하였고, 또한 회심 후에는 베드로를 면책하였다.(행 8:1,갈 2:12)
그리고 교회 안의 교인이라도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거짓 사도요","저주를 받은 자들이요","개"들이니 삼가하라고
했다. (
고후11:4, 13-15, 갈1:8; 빌3:2)

이런 일은 그의 성격이 악해서가 아니라 열정적이고, 강직한 데서 오는 것이다.
이 강직한 성격과 인격은 결국 십자가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다.
바울의 힘있는 말한마디 한마디는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서 유대인의 죄를 회개시키고, 이방인의 마음을 감화시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하였다.

그이 이 강직한 성격은 전도 여행시 당한 많은 박해와 환난을 이길수 있었다.
그가 말한바와 같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니라,"(고후 4:8-10)
바울은 고난을 받으면서도 예수의 생명이 그 몸에 있어서 넘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희랍인 이상으로 조직적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같은 치밀한 조직이나, 로마서와 같은 당당한 논설은 도저히 그시대사람으로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겸손함과 사랑을 소유하고 있었다.

자신을 가리켜 "죄인의 괴수", "사도중에 지극히 작은자라" 또한 "믿음, 소망, 사랑, 이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하였으며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였다. (
딤전1:15; 고전15:9, 13:13; 롬8:39; 고전15:31)

결국 그에게는 풍부한 지, 정, 의가 믿음 안에서 하나를 이루어 훌륭한 사도로서 신학자도 되고, 전도자가 되어,
동서남북으로 좇아다니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음의 사도가 되었다.

 

  3. 다메섹도상에서의 바울의 회심

    A. 바울의 회심 사건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있는 사울은 예수가 바로 다윗이 예언한 구세주이며,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리스도 즉 메시야라고(
행2:25-28, 시16:8-11, 눅24:27) 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격분하였으며, 더욱이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고 십자가에 죽인 예수 즉 메시야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삼일만에 다시 부활케 하셨다 하며, 유대인들이
이러한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여 주실 것이라고 하는 말에 분노하여,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거룩한 성전과
율법을 거스리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모독한다하고 특히 스데반을 신문할 때 증인으로 섰고, 돌에 맞을 때에는 그가
사형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행 7:55-58, 8:1) 주장하였으며, 또한 다메섹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옥에
넣기 위해 산헤드린에서 발급한 정식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게 되었다.

그가 다메섹에 가까이 왔을 때 갑자기 강한빛을 보매 그는 땅에 엎드러졌다.
이 때 그는 눈을 뜰수 없었으며 홀연히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그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나이까" 하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자가 있느니라" 하셨다.

동행인들은 그 소리만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고 서 있기만 하였다.(행 9:6-9)
바울과 함께한 사람들에 손에 이끌려 다메섹에 들어가 아나니야를 만나 아나니야의 인도에 따라 시력을 회복하였으며,
그에게 세례받고 모든 사람 앞에서 다메섹 도상에서 보고들은 하나님의 섭리의 증인이 될 것을 지시받았다고 증언하였다.

바울의 다메섹 도사에서 회심의 사건은 사도행전에 삼회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회심의 표현이 각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 9장 7절에는 동행인이 소리는 들었으나 보지는 못하고, 사도행전 22장 9절에는 빛은 보았으나 소리는 듣지
못하고,
사도행전 26장 13절과 14절에는 밝은 빛이 내려와 함께 가던 사람들은 두루 비추었다 하였다.

문제는 표현하는 글에 뜻있는 것은 아닌 줄로 안다.
바울은 분명히 고린도전서 15장 8절에 "맨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같은 나에게도 보이셨느니라" 증거하였다.
그리스도인의 박해자였던 사울은 그를 복음전하는 사도로 부르시는 소명에 대한 분명한 체험을 나타내고 있다.

 

    B. 회심의 신학적 의의

 

바울의 회심에 대한 의의는 전술한 바와 같이, 사도행전에 기록과 바울 자신이 쓴 서신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은 전설적이고 객관적인데 비해, 바울 자신이 쓴 서신(
갈1:15-16; 고전9:1-2; 고후4:5-6.)
에는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그리스도 안에서 체험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실상 바울의 회개의 계기는 바로 바울 자신의 주관 상태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이방에 복음을 전파할
주의 사도로 쓰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역사였다고 하는 편이 올바른 해석이 될 것이다.
(행22:21, 고전15:8-10, 엡3:7, 갈1:1, 엡1:1, 딤후1:1)

그리고 바울의 신앙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자기의 잘못된 신앙관을 깨닫고 회심한 후
그의 신앙은 180도로 변한 철저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말하기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믿었다.(
빌 3:7-9)

바울은 회심 전에 하나님을 섬기던 율법적인 신앙관을 바꾸어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도됨을 확신하였다.
이러한 확신을 그는 그리스도가 그에게 나타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택정하셨다고 하였다.(
갈 1:15-16)
하나님은 바울의 전 생애를 영광가운데 인도하셨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오심과 자기의 성별은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라 했다.(
엡 3:7-9)

바울의 이같은 확실한 신앙은 마침내 자신을 이방인들을 구하는 복음의 사도라는 불같은 사명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
골 1:25, 딤후 1:9-11)

 

    C. 부활에 대한 바울의 확신

 

바울 자신도 회심 이전에는 일반 유대인과 같은 사고 방식으로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기독교인들이 유포한 한낱
유언비언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기존 유대 종교를 혼란시키는 이단자로 간주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에서 회심한 후 예수가 부활하셔서 살아계시다는 확증을 얻게된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1-11절에 보면 그가 극적인 내적 각성을 설명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생애가 전환케
된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의 신앙의 핵심이요 또한 바울의 신앙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
전경연, [신학성서 신학서설]. 서울:사상계사. 1955, p.132)

바울은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자신이 쓴 서신에서 여러번 언급하고(고전15:1-21; 롬1:4; 고후5:15; 빌3:10-11; 롬6:5-10.)
있으며, 고린도후서 5장1절에서 21절에는 예수의 부활의 역사성을 다루고 있고 기독론의 기초가 되어 있다.
예수 부활의 사상이 바울에게 있어서 얼마만큼 '핵심적인 것' 이었는지는 데살로니가 후서와 빌레몬서를 제외하고는
모든 그의 서신에서 언급하고 있다. (
롬6:47:4; 고전6:14; 고후13:4; 갈1:12:20; 고전15:21-22; 엡1:20; 빌3:10-11; 골3:1-3;
살전1:105:10; 딤전2:5-6; 딤후2:8; 딛2:14.)

바울은 부활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단호하게 선언한 것은 고린도전서 15장 15절에서 19절에 잘나타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도 신학적인 교리도 아니다.
그것은 바울이 직접 체험한 경험에서 얻은 최대의 사건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의 사건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으며, 그의 모든 생활의 초점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의 현존 안에서의 삶에 맞추었다. (
갈2:19-20; 고후5:13-15; 빌1:20-21 3:7-9, 10-14)

 

  4. 소     명

 

사도행전 1장 8절에 예수의 선교명령이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그리고 이방 지역으로 점차 확대하여 나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이방인에 전도를 위하여 하나님은 바울을 택하시고 부르셨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소명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를 단계별로 살펴 보려고 한다.

① 하나님께서 그를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모태에 있을 때 이미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택정하였다 한다.
(
갈1:15-16; 롬1:1)

② 다메섹 도상에서다.
예수는 바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고 명령하셨다.(
행9:4-6 22:10 26:16)

③ 아나니아의 예언이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강한 빛을 본후 실명하여 있을 때 아나니아의 방문을 받았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나니아에게 예언하신대로 바울이 "이방인과 임글들과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택한 나의
그릇이라"라는 것을 알았다.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주님의 지시대로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하여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소명받음이 기록되어 있다.(
행9:15-16 22:14-15)

④ 이러한 사명받은 바울은 3년 후에 다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때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행22:17-21)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이 사실은 그에게 이방인의 사도로서 확실한 메시지였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 "이방인의 사도"(갈2:8.)라고
하였다.
다메섹에서 받은 계시로 그의 신앙의 길을 혈육과 의논하지 않고, 또한 다른 먼저된 사도들과도 의논하지 않고 오직
받은 계시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서만 충성하였다. (
갈1:16-17)

 

      A. 사도로서의 사명 의식

 

초대교회의 사도에 대한 관념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준 이름이며(녹 6:13) 예수를 배신한 가롯유다 대신 한 사람을
세우고저 두 사람 유스도라하는 요셉과 맛디아를 천거하고, 11제자들이 합심기도하고 제비뽑아 맛디아를 사도의 수에
가입케 하였다.(
행1:16-26.)

바울도 자기를 가르켜 "나는 사도중에 지극히 작은자"라고 하였다.(고전 15:9)
그에게 있어서는 사도는 예수의 부활의 증인으로 충분하였다.(
롬1:1 11:13 15:16, 갈1:1 2:8, 고전9:1-2, 딤후1:1 1:11-12)
이러한 바울의 새로운 사도의 개념은 누구나가 가질수 없는 성령의 입증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적 권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영에게 귀결시켰다.(
고전6:17; 롬8:9; 고후3:17; 행1:8 요6:63)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다 하였다.(롬8:11 13-14)
영이신 그리스도의 모든 것은 영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에게 소급된다. (
고후3:17)

아들의 영을 믿는 자들에게 보여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그의 성령을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매개로 하여 풍성히 주신다고 한다.
(
갈4:6; 행2:33; 고후1:21-22; 엡2:17-18; 딛3:4-7)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성령을 받아 새로운 생으로 전환하는 생활을 말하고 있다.(
고전6:10-11; 고후5:13-15; 갈2:20.)

즉 바울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힌 생활이며, 그가 산 것은 자신의 삶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생활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은 바로 성령안에 생활이며, 생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또한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한다.(롬6:4-5 8-9; 빌3:10-11)
이러한 성령 안에서의 소망은 그의 사도로서의 사명 의식을 더욱 강하게 하였다.(
롬8:23-25 5:1-5, 15:13.)

 

      B. 선교에 대한 바울의 자각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으로 예수의 부활과 그가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특히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바울의 이방인과 유대인에 대한 선교의 필연성을
로마서 9장과 11장에 잘 나타내고 있다.

바울은 회심 후 복음 전도의 사명감을 맡은 사도로서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전도해야 할 의무감을 절실하게 느꼈다.
바울은 복음 전도만이 유일한 사명인 줄 알고 복음 전도에 전 생애를 바쳐 충성하였다.

 

      C. 선교대상

 

바울은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대로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즉 이방지역을 선교 대상으로 삼고 1, 2, 3차에 걸친
대 전도여행을 실시하였다.
1차전도여행(행13:1-14:28) 수리아-안디옥-실루비아구부로-비시디아-안디옥-이고니온-루스드랴-데베-앗달리아
2차전도여행(
행15:36-18:23) 안디옥-데베-브리기아와갈라디아-부시아-빌립보-데살로니가-베뢰아-아덴-고린도-안디옥
3차전도여행(
행18:23-21:16) 갈라디아-브루기아-에베소

 

         ① 유대인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율법에 열심있는 사람이며 동족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인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행 21:39, 롬 11:1)
그가 비록 이방인의 사도로 이방 지역에서 선교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는 언제나 자기동족들에 구원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방선교시 언제나 먼저 자기 동족을 찾아 전도했고, 때로는 이로 인해 수난받기도 했다.
(
행13:50 14:5-6, 19,23: 12-13; 고후11:24-27)

이것은 그가 자기 동족이 이방인보다 먼저 구원 얻기를 열망했으며, 그러므로 자기자신이 자기동족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 끊어질지라도 원하였다.(
롬 9:3)
본래 유대인들은 하나님앞에 택함받은 성별된 민족이다.
"그들은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었다."(
롬 9:4)

즉,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기적적으로 탄생한 이삭으로 말미암은 민족이고, 구약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과 보호로 약속받은 민족이었다.(
롬9:4-8; 갈3:16 (참고 창22:16-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았다."라고 로마서 10장 3절에 말하였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미화 또는 자랑하는 대에 그쳤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
하나님의 의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義)이다.(
빌3:9)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를 믿음으로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다.(롬3:23-26 1:17)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는 먼저 이스라엘을 통하여 예비되고 약속되었다.
그러나 메시야이신 그리스도가 구원을 성취하러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거부하고 마침내 구원의 섭리는 이방인에게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때가 이르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구원에 참여하게 될 것을 바울은 믿었다.
이것은 바로 바울이 이방인들을 순교정신으로 전도하여 그 결과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이스라엘이 보고
"질투심을 불러 일으켜" 마침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사명을
끝까지 감수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롬11:7-14 25-27)

그러므로 바울이 이방인의 전도자가 된 것은 이방인을 구원하려는 데에도 있지만 더 나아가서 자기민족의 구원이
하루 속히 성취될 것을 원하였다.(
바울의 심정 롬9:1-3.)

 

          ② 이방인

바울은 디아스포라(유대인)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고 회심 전 오래동안 고향에서 지냈기 때문에 이방 지역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함을 자연을 통하여 알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각이 허망하여
미련한 마음이 동하여 불신과 죄로 말미암아 올바른 인식을 하지 못하고, 인위적인 우상에 맹종하였다다.

이러한 불의로 인한 죄악성은 결국에 가서는 성적 부도덕을 야기시켰고, 이로서 모든 죄악이 편만 하게 되었다.
(
롬1:18-26 29-31; 딛1:15-16; 약4:7-8.)

이러한 현상은 그당시 세계의 부패와 타락성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강요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죄에 대한 필연적인 보응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바울에게 있어서 절실한 문제였다. (
조선출, 로마서(선교70주년기념 신약성서주석 제6권) p.67.)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보음을 전할 때 이들은 복음을 받아드려 복음의 의를 발견하여 복음을 믿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다. (
롬9:30)

이것은 일찍이 예수께서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 가리라"고 하신 말씀과 같다.
(
마21:30; 막10:31; 롬11:7.)

이러한 이방인들에 대한 바울의 전도는 초기에는 큰 성과를 얻어 소아시아와 마게도니아, 그리고 헬라지방에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반면 기독교 교회내에는 불신앙적인 요소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다시 말해서 유대적 사상, 또는 이교도들의 습관이 교회내에 침투되어 윤리관의 혼란이 야기되었으며, 이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게 되었다. (
유대적사상, 골2:1622, 이교들의 습관, 골2:8; 딤전6:3-5 4:1-2.)

이에 순수한 기독교적 신앙에서 이탈하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도 불신앙 때문에 버리셨는데, 하물며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떠난 생활을 할 때 버리시지 않겠는가?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서 참감람나무의 진액을 받아 살지만 만약 그렇지 못하였다면 원감람나무도
베어버리시는 하나님께서 너희 돌갈람나무 가지를 안 베겠느냐?" 하고 경고 하였다. (
롬11:17-22.)
그러므로 이방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하는 믿음의 생활을 끝까지 하라고
경고하였다.

 

      D. 선교의 주제(메시지)

 

바울은 이방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복음을 전할 때 중심되는 사상을 그의 서신을 통해서 혹은 사도행전을 통해서
항상 명확히 말하고 있다.
바울은 "내가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왔다고 강조해서 주장한다.
(
롬16:25-26; 갈1:112; 엡3:2-10.)

실은 그의 선교 주제(메시지)는 아주 독창적인 것이어서 그는 꾸밈없이 "나의 복음"이라고 그것을 언급한다.
(
고후4:3; 살후1:5 2:14.)
그런데 바울은 그의 설교가 다른 사도들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그는 주장한다. (
고전15:11; 갈2:6-10.)

그리고 계시에 의해서 주어진 바울의 복음은 초대교회의 그것과 선포의 본질적 내용에 있어서 다른 복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이방인에 대한 직접 선교의 합법성과 하나님앞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권인정을 포함해서 말세에
구속사의 모형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대한 메시지였다. (
롬16:25-26; 엡3:2-10; 골1:25-27.)

바울은 요한복음 15장 26 27절과 사도행정 1장 21,22절에 나타나 있는 그대로의 통용된 사도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그의 서신이 솔직히 인정한 것처럼 그는 기독교 전통에 많은 것을 그의 선배들에게 의존하였다.
그러나 그는 부활승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가 직접적으로 그를 사도로 임명하고 현 세대의 구속사의 모형을
아는 열쇠를 주었다.

예루살렘 사도들은 선지자적 신비의 열쇠를 가졌고 복음 선포에 있어서 자료로 살아있는 경전이었으나, 바울은 계시를
통해서 직접 주님께 받았다는데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의 충만함을 위해서 서로 연합했다.
(
Richard N. Longenecker. The Ministry and Message of Paul, 노상국역, 바울의 선교와 메시지, pp.138,139.)

 

         ① 그리스도의 인격과 업적

바울의 메시지의 중심적 동기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업적에 있어서 인류역사 에서 그 초점을
갖는다는 것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바울은 선언한다. (
갈4:4-5.)

바울의 가르침에서 그리스도의 업적은 무엇보다도 율법과의 관계에서 제시된다.
"율법 아래에서" 오심에 있어서 걸머질 수 없는 자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아버지께 화목케 함으로 그리스도는 율법의
저주와 의무를 자신이 걸머졋다.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라고 한 것처럼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에 있어서 우리를 위해서 죄가 되사" 우리로 하여금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며"(
고후 5:21)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 2:14)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하사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신"(
골 1:22)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율법의 저주를 도말하고, 그래서 개인을 하나님께 중립적으로 제시하는 구속을 선포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리스도는 모세의 계명에서 설치된 계약적 의무의 합법적 요구를 성취했다고 주장하며, "그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을 위한 적극적인 의를 아버지 앞에 제시한다. (
롬3:19-24)

그리스도의 복종에 대한 이해는 그의 희생의 속에 내포되어 있지만(빌 2:8), 그 행위(희생)의 교리에서 속속들이
규명되지는 않는다.
예수의 잘 알려진 목적 중에는 율법의 완성이 포함되어 있으며(마 5:17) 바울은 이 명제를 아담의 불순종을 그리스도의
복종과 대조하면서
로마서 5장 18절, 19절에서 거론한다.

"한사람의 범죄"는 "한사람의 행위"로 간주될 뿐만 아니라, "한사람의 불복종"이 "한사람의 복종"에 의해서 교정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사상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에 기초한 "의"에 대한 바울의 반복되는 강조에
포함된 것 같으며, 그래서 믿음으로 그에게 응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 (
롬3:22; 갈2:16; 3:22; 엡3:12; 빌3:9.)

율법의 계약적 의무가 요구하는 것을 그리스도가 마련했다.
그는 완전한 의를 제공함에 있어서 온 인류를 대표했으며 그래서 "그 안에"선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의가 아니라 그 안에서
옷 입음으로 아버지 앞에 선다.(
롬13:12-14; 갈3:25-27.)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서 그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시고, 그의 완전한 복종으로 율법의 의무를 완성했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 10:4)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복종은 바울의 마음속에서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필연적 결과이며, 그의 부활과 살아서 역사하는
성령의 임재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설교할 때 그들의 종교적 관념에 속해 있던 언어를 복음적인 차원에서 표현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그리스도의 호칭인 "주"와 " 하나님의 아들"의 사상이다.
이러한 말은 바울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이미 헬레니즘계의 기독교인들이 사용했던 그리스도에 대한 호칭이지만 바울은 이것을 자각해서 사용했다.

이방인들의 "주"에 대한 관념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주"라 불렀고, 유대인들의 "주"사상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으며, "초월자"를 호칭할 때에 정중하고 존경하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이 "주"란 말은 종교적으로 예배의 대상을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했다.
그는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했다.(
고전12:2-3; 롬10:9-10.)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뿐 아니라 세계 모든 민족에게 예수가 "주" 되신 것을 믿고 그를 섬기라고 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가 "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거듭거듭 거의 모든 서신의 첫머리에서 강조했으며, 그것은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데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구약에서의 "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뜻은 하나님의 백성을 형성하는 선택받은 자를 말하고 있다.
(
출4:22; 호11:1; 렘3:19; 신14:2; 시73:15.)

그러나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가 " 하나님의 아들"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위임받는 아들이라고 했다.(하나님의 아들-
롬1:4; 고후1:19; 갈2:20; 엡4:13; 히4:14, 아들-롬1:3, 5:10, 8:3,29,32; 고전1:9 15:28; 갈1:16, 4:4, 6; 살전1:10.)
바울은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말하고 있다.(
고전15:45-48.)

그는 복음에서의 "인자"에 대응하여 인류의 시조 아담에게 유래한 인류가 죄와 죽음을 계승받았으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과 의가 회복되었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모든 권세가 맡기워진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관계를 유지하게 하였고, 하나님께 대한 인간들의 새로운 아들로서의 관계를 유일하게 하였고,
또한 하나님 앞에 유업을 이을 자라 하였다.(
갈4:5-7; 롬8:14-16; 갈3:25-26 29)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택함받은 백성이라 자부할 것이 아니라, 각자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음으로 참된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과 권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고전1:18-31.)라고 하였다.

 

          ② 인간에 대한 구속의 칭의

인간은 날 때부터 악한 것이 아니다.
성장해 가면서 보고, 듣고, 배운것이 악한 것이기 때문에 악해진다.
바울은 죄의 개념을 육신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한다.

육은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신체를 말한다.
이 육의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 또는 육의 정욕대로 하는 것이 "죄"라한다.
또한 성경에서는 인간은 "아담"의 자손으로서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 한다.(
롬3:9-18, 5:12-14.)

바울은 그의 죄론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로마서 5장에서 특히 12절에서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으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음으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느니라"고 한다.
바울은 분명히 사람의 죄를 아담의 범죄와 관련시킨다.
한 사람을 통해서 죄와 죽음이 비참한 결과와 더불어 전인류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고전15:21 22.)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고 초기의 랍비처럼 사람의 개인적인 책임을 계속 주장한다.
그러므로 바울의 가르침에는 두 강조가 있다.
즉,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그 타락의 표현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성이다.(
롬5:16.)

또는 그가 로마서 7장에 기록한 것처럼

① 인간의 역사는 돌이킬 수 없게 아담에 뿌리박고 있어서 그는 요컨대 "나는 육신에(아담 안에)속하여 죄아래
팔렸도다"(
롬7:14) 라고 외칠수 밖에 없으며,

② 사람의 경험은 아주 명백하게 하나님께 반대함으로 그는 사실상 "죄의 근원인 아담이 내안에 있다."(롬7:23)이다.

③ 이런 사실들은 "나는 내 자신에게 비롯했다."
즉, 사람은 그 본성과 실천에 있어서 하나님을 반역하며 그를 기쁘게 할 수 없다.(
롬 7:24)
(
Richard N.Longenecker, The Ministry and Message of Paul. 노상국역, 바울의 선교와 메시지 p.145.)

확실히 사람의 죄는 하나님이 전혀 예상을 불허했던 일은 아니며, 바울은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은 세상의 창조이전에
창조주에 의해서 사뢰되었으며,(
엡1:4 3:9.)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업적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기회를
준것이 죄라고 주장한다.(
노상국역, 바울의 선교와 메시지, 서울:대한기독 교서회 p.145.)

이러한 죄가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울은 "그러나 성경이 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에게 주려 함이니라" 하였으며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갈3:22; 롬11:32.)라고 말하였다.

모든 정죄권과 사죄권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롬6:23)라고 했다.
바울은 율법을 흠이 없이 지켜왔지만 하나님 앞에 와보니 그것이 죄였다.

로마서 14장 23절 하반절에 바울은 "믿음으로 쫓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고 말하였다.
죄인이 선한 사람 되는 길은 율법에서 복음으로 성장해야 한다.

로마서 7장 7절 상반절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또한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는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으며, 로마서 1장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라"고
바울은 말한다.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라 한다.(
롬5:8, 4:23-24)

하나님의 "의"는 바울신학의 주제이다.
"의"란 말은 바울서신에 자주 사용되어 왔다.
(
"義"에 대해 로마서,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에베소서에서 많이 사용됨.)
바울은 "의"란 말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이라 하였다. (
빌3:7-9.)

구약시대 사람들은 이 " 의(義) "를 찾는 길은 율법 안에서만 가능한 줄 알았고, 율법의 노예가 되어 항상 두려움을
가지고 생활하였다.
바울 자신도 바리새인으로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되려고 노력하였으나, 회심 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깨닫게 되었다.

바울은 율법(律法)이 하나님의 기준의 표현으로서 사람의 본성과 양심속에 선언된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불가피적(不可避的)이고 어길수 없는 표현이다.(
롬1:19 1:20 2:14,15)
그것은 사람이 최초에 그런 지식이 필요했던 인류 역사의 시초에 주어졌으며(
롬5:14), 당시 모세의 법전에서 민족의
새로운 상황에 적용되었다.

모세의 입법이 구체적인 규칙의 형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지를 표현하면서, 또한 삶의 지침을 제공하고 사람이
거기에 미치지 못했을 때 심판의 기준을 마련했다.
그러나 율법의 이런 양상을 부인하지 않고, 바울은 또한 모세의 계약의 다른 기능을 주장한다.
즉 일종의 계약적 의무 밑에 사람을 두는 제도로서의 율법이다.

이 후자(後者)의 의미에 있어서

①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430년 후에 왔다.
그러므로 율법은 이와 같은 약속을 무효로 할 수 없다.(
갈3:17)

② 일찍이 주어진 하나님의 계약 약속의 계약의 재성명으로써가 아니라(갈3:1819), 사람의 완고와 고집 때문에
구속사의 과정에서 율법이 부과되었다.

③ 하나님의 메시야의 도래에서 율법의 종착이 왔으며,(갈3:19)

④ 그리고 천사와 사람의 대행을 통해서 중재되었던 율법의 그 본성이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보다 그 자체가 열등함을
나타낸다.(
갈3:19 20)
소극적으로 그것은 죄를 "심히 죄되게"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약속을 받아들이는 준비를 했다.
(
롬7:13 (참고 3:19,20))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범죄를 선동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반역하는 범위를 깨닫게 했다.(롬5:20 (참고 7:5,7-11))
적극적으로는 율법은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 하나님의 선민을 지킨 일종의 관리인 역을 행했다.(
갈3:10 5:3)

모세를 통해서 행위의 체계로서 주어진 율법이 생명과 의의 틀림없는 약속과 더불어 왔으나(롬7:10), 그 의무를 이행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때문에 약속을 받을 수 없었다.(
롬8:3)
그것은 완전한 복종을 요구했으나(
갈3:10 5:3), 그렇게 함에 있어서 사람은 그것에 따라 살 수 없으므로 율법은 사람을
저주밑에 두게 되었다.(
갈 3:10)

이렇게 바울은 "율법 아래" 있는 것으로서의 그리스도 이전의 사람의 경험을 "율법 밖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제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대조한다.(
롬3:19-21; 고전9:20; 갈3:23-25 5:18.)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는 의와의 관게에 있어서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롬 10:4)라고 주장하였다.
율법은 그 계약 형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에 아주 크게 이바지 했으나, 바울에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고상함"에 비하면 "해로 여김받는"것이었다.(
고전3:7-18; 빌3:7-11)

역사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안목에서 볼 때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사람을 준비시켜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해 주어졌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도 의를 위해 그것으로 돌아가는 것은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
갈4:39; 골2:20)

바울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 1:17)는 새로운 것을 찾았다.
바울은 죄의 반대 개념이 "의"라 확신하였다.
"의"는 생명을 얻게 한다.(
롬5:18.)
이 생명이란 구속받는 것이 아니고 "의"로 인정받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
롬5:9 (참고 롬3:24; 엡2:8).)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율법에 대한 많은 기술의 목적은 나의 복음(롬2:16; 갈1:8; 딤후2:8; 롬16:25)을 강조하여 말하기
위함이다.
율법의 관계된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완성되고, 그것으로 인간의 구원이 성취되었다고
바울은 선언하였다.

바울은 주님의 사랑만이 율법을 다 이룬다고 말하였다. (롬13:8 10)
다시 말해서 복음은 율법의 완성이므로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갈3:5-6 2:16.)
고로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문자 그대로 읽지 않고 "영"으로 읽는다고 하였다.(
갈5:16-18.)

 

          ③ 하나님의 계획의 완성

바울의 종말론은 구약에 뿌리박고 당대의 구상적 표현법을 사용했으나 근본적으로는 독특한 특징과 초점에 있어서 그의

기독론의 연장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때가 차매"(갈 4:4)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셔서 메시야 시대를 시작하고,

마지막 날이 그 정점에 도달할 일련의 사건들은 행동으로 표시했다. 죽은 자로부터 그의 부활과 신도의 삶 안에 성령의

임재는 전 구속 과정을 성화시키고 최후의 완성을 확증하는 "첫번째 열매"이라.( 롬8:23; 고전15:2023.)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선언과 신도들이 그들의 주님을 마중하기 위해서 공중으로 끌어올림을 받는 것은

"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으며,( 살전4:15.) 바울은 그 본질을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절에서 인용한 것 같다. 그리고 미래에

관한 바울의 사상은 그리스도의 재림종말에 중심을 두고 있으며, 그 밖의 모든 것은 그것에 관련되어 있다.

바울의 종말론은 그의 목회의 과정에서 미래의 종말에 전적(全的)인 강조를 두는 미숙한 묵시로부터 현재에로의 성취와,

사후의 생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세련(洗鍊) 되고, 실존적 이해로 완숙된 변화를 경험했다고 흔히들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발전을 증명하기 위해서 바울서신에서 매우 자주 인용된 요인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의 저술을

통해서 대조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연립(聯立) 해 왔다는 것을 유의(留意) 하는 것이 이(利)롭다.

이상과 같이 초기의 서신에서 그의 개종자들에게 복음주의적 설교를 통해서 미래적인 내용을 상기시켜주고( 살전1:10.),

유대의 묵시론의 그것과 아주 흡사한 비유적 표현으로 종말을 소개하나( 살전4:13-5:11; 살후2:1-12. ), 바울은 믿는 자 안에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특정지어질 수 있는 기독교인의 행위에 관해서 말한다.(갈 2:20)

( Richard N.Longenecker, The Ministry and Message of Paul. 노상국 역, 바울의 선교와 메시지. pp.160-161.)

고린도와 로마에 보낸 편지에는 죽음으로 산자는 육체를 떠나 주님과 함께 산다는 것을 말하면서( 고후5:1-7.),

바울은 종말에 완전한 완성을 강하게 강조하였다.( 롬8:18-25; 고전15:12-28.)

그의 로마 옥중에서 쓰여진 서신에는 반복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있음과 "그리스도의 몸"을 언급하지만 그는 또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갈3:2021.)라고 썼다.

그리고 또한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딛2:13.)

라는 짧은 내용의 말이 있다. 바울은 그의 기독교 체험과 사역을 통해서 미래에 관한 그의 사상에 있어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종말이었다. 그리고 바울의 가르침에 있어서 종말은 맨 먼저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와의 연속적

결합과( 살전4:17.), 믿는 자의 몸의 부활 "그의 영광의 몸처럼 되기 위해서"( 롬8:22; 고전15:12-58; 빌3:21.)

믿는 자가 몸의 변화를 통해서 아들됨이 완성을 뜻한다. 기독교인에게는 긍극적 보상은 이미 선언되었지만,(롬 8:1)

그것은 또한 심판을 뜻한다. 그러나 그 무엇을 의미하던 그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구원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 고전3:13-155:5; 고후5:10.)

그러나 그리스도와 아무 관계가 없는 자에게는 "급작스러운 파괴," "진노"와 "정죄"이다.

( 살전1:10후반절,5:3,9후반절; 살후2:10-12.)

바울의 종말에 기대는

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는 것이" 완성되며( 롬11:25 하반절)

② 이스라엘에게의 하나님의 약속이 마지막으로 이루어지며( 롬11:26-31.),

③ 창조가 사람의 죄의 결과로서 부가된 굴레로부터 풀리며( 롬8:19-22 (참고 고전7:31후반절).),

④ 모든 통치와 권위가 먼저 아들에게 종속되며 아들에 의해서 아버지에게 바쳐지며( 고전15:2427.),

⑤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인 죽음이 사망하며( 고전15:26.), 그리고

⑥ "만물을 저에게 복종케 하신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고전15:28.)

예수의 역사적 성취는 완성된 일이지만 그의 적용은 전진적이며 그 정점(크라이막스)는 그리스도의 재림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부활의 삶과 "그리스도 안에" 삶을 경험하지만 육신의 장막을 떠날 때 한층 더 그의

아들 됨의 완전한 실현을 알게 되며,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의 완성인 종말을 사모하며 기다린다. 이것을 위해서 바울은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하면서 기대하였다.(빌 3:14)

 

 

Ⅲ. 바울의 신학 사상

 

바울 신학이란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로 자처하던 율법주의자 유대인 사울이 예수의 추종자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메석으로 가던 도중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고 회심한 후 복음의 사도로서의 바울의 신앙과 그의 주장을
신학적으로 정립 표현함을 말한다.

바울은 선교 활동을 위해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교회를 세우고 이들 새로운 교회들과 많은 서신으로 문안, 권면, 격려,
지도를 하였다.
바울의 많은 서신들은 신약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사도행전은 그 내용의 절반 이상을 바울의 행적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그는 복음의 교리와 복음의 윤리적인 내용들을 명확하게 제시한 개척 신학자이다.
고로 바울 사도의 서신들은 그가 신학적으로 조직적으로 기록함을 알 수 있다.
바울의 메시지인 바울서신을 각자 자신이 받은 사명적 배경 속에서 바라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진술한 교훈과
그의 세부적 권면들을 꿰뚫고 흐르는 진리의 원칙들이 오늘 날에도 신앙과 실천에 대하여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처음 바울에게 영감을 주셨던 성령께서 동일한 역사로 오늘의 성도들의 마음을 지켜주고 역사하고 계시다.
오늘날 우리가 바울 신학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의 사상 속에서 찾아야 한다.
(
바울신학을 이해하는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의 사 상속에서 찾아야 한다. 바울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그의 종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며, 또한 주님께 응답을 받으며 사는 삶이다. 또한 바울 신학은
원칙적으로 구원론이나, 교회론이나, 종말론이나, 이모든것을 그의 사상의 중심 테마인 "그리스도 안에"(구원론),
"그리스도의몸"(교회론), "그리스도 안에"(종말론)에 있는 한점에다 뿌리를 내리고 거기에서 새로 출발점을 이루고 있다.
(
롬14:7-9, 빌1:20-22, 골3:1-4).)

바울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바울의 종교관은(갈2:20; 고전15:31; 갈6:14 17) 자기를 부르신 주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며, 또한 그리스도에게 죽기까지 순종하면서 사는 삶이다.
특히 바울의 신학은 인간학적으로 해석하려는 현대의 종교적 실존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반대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빌1:20-21; 고전2:1-5 2:13-14; 빌3:7-9.)

 

  1. 바울 신학의 특색

    A. 체험 중심 신학

 

바울은 처음부터 신학자로 출발함이 아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남 에서부터 시작했다.
그의 모든 사상은 여기에서부터 발전한다.

바울이 말하는 체험이란 인간자신의 자의적인 힘에 의한 체험이 아니라, 바울의 체험은 그와 정반대로 예수가 나타나서
바울을 책망하고 넘어뜨리고 회개케하는 불가항력인 강권적 외적의 힘에 의한 체험이기 때문에 그 요소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체험은 인간중심인 인본주의이며, 바울의 체험은 하나님이신 예수님 중심의 신본주의이다.
이렇게 본질상 다른 체험을 하였기 때문에 언제나 거기에 나타난 예수를 말하며 자기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이체험 중에서 완전히 죽는 체험을 했기 때문에 자기를 말할 때에도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1:21; 갈2:20; 롬14:7-8.) 라고 하면서 그리스도는 살고 자기는 죽는 것을 항상 체험하면서,
다메섹의 체험을 생활의 필수조건으로 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의 체험은 사람들이 흔히 명상하는 가운데 무슨 비젼을 봤다는 그런 것이 아니고 전 인생이 뒤집어지는
정확하게 말해서 죽었다가 살아나는 체험이다.
그러므로 그의 체험은 다른 종류와 비교할 바 아니다.

전 인생이 개조되었다는 이런 체험은 부활하신 예수가 거기에 나타나서 이런 사건이, 발생하였음으로 체험의 주동자는
그리스도이며 바울은 피동적으로 이런 엄청난 일을 당했을 뿐이다.

* 바울의 이 엄청난 사건 기록이 사도행전에 있는데 그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때는 정오였고(행 22:6, 26:13)
  • 해보다 더 밝은 빛이 그를 비추었고 (행 9:3, 22:6, 26:13)
  • 소리가 있었는데(행9:4, 22:7,26:14)
  • 히브리 방언으로(행26:14))
  •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 하느냐" 하기에(행9:4 22:4 26:14))
  • 사울이 "주여 뉘시니까" 라고 했다. (행9:5 22:8, 26:15)

여기에 이 사건을 살펴보면 이 사건의 전체를 예수가 지배하고 있고, 바울은 다만 "주여 뉘시니까"라고 한마디 했을
뿐이다.
여기서 바울의 체험의 성질은 하나님측이 주동이 된 예수 중심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체험한 내용은 빛을 본 것이며 예수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이 체험이 물리적, 감각적, 객관적인 것이냐? 혹은 신비적, 초감각적, 주관적인 것이냐? 또는 "환상이냐?
실제냐? 하는 문제인 동시에 "예수가 환상으로 나타났느냐? 실제적 부활의 몸으로 나타났느냐?"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문제를 결정하기 전에 바울은 다른 서신에 쓴 내용을 보면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내가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고전15:89:1)는 모두 감각적으로
실제로 본 것으로 원전(原典)에서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감각적으로 본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바울의 고린도전서 15장의 부활론에 무형적 부활체를 말하고, 유형적
예수를 보았을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체험한 부활은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니...육에 몸으로 심고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적인 몸이 있느니라"(
고전15:40-41)는 유형적 부활체를 말하고 있어
자기가 본 예수는 유형적, 외부적으로 볼 수 있다고 쓰고 있어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물론 바울이 이끌려 삼층천에까지 갔다고(고후12:1.)하는 체험은 그것과는 사정이 다르다.
원전(原典)(
원전 : 희랍어 원문 성경.)주석가는 바울의 체험을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으로 구분하여 다메섹 체험은
외적인 체험으로 돌리고 있다.(
도양술저, [사도바울의 신학], 기독교문서선교회, p.33.)

 

    B. 그리스도 중심 신학

 

바울의 체험중심 신학은 자연히 그리스도 중심 신학과 맥을 같이 한다.
그의 체험의 내용이 예수의 빛으 보고, 또 그를 직접 만나고, 그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체험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스도와 떨어질 수 없었다.

실로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내던지고,(빌3:8.) 그리스도만 알기로 작정하고, 일편단심 그를
위하여 염려하고, 그리스도만 자랑하면서, 살든지 죽든지 그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 위하여 힘을 다하고,
사나 죽으나 예수의 것으로 그 생애를 일관했다.(
고전2:2 1:7 1:31; 빌1:20; 롬14:8.)

예수를 위하여 옥에 갇히기도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 했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사십의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여행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여러번 자지도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면서 예수를 전했다.(
고후11:23-27.)

이와 같이 바울은 예수를 떠나지 않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면서도,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8:38-39 1-2, 14:7-8.)고 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확신하고 있다.

* 바울의 이와같은 예수 집착의 이유는

① 다메섹의 체험이 너무도 강권적이며, 거기에 나타난 예수가 바울에게 돌이킬 수 없는 확신을 주었으며,

② 바울 자신이 예수를 이단시 할 때, 진실한 기독교인 "스데반"집사를 죽이고, 또한 예수를 핍박했던 일을 생각할 때에
무지했던 자신을 자책하므로, 바울이 예수에게 집착한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자기몸에 매질을 하면서까지 오직 예수에게만 복종코자 하였다.(고전9:116; 빌1:20-21.)
그리고 바울은 회심 전에 이미 예수의 교훈이나 그가 한 일들을 듣고 알고 있었다고 본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의 서신에서 찾아 볼수 있다.
예수님이 만찬을 잡수신 일이나, 부활에 대한 일이나, 기타 예수님의 교훈이 많이 써있음을 볼 수 있다.
(
고전15:12-21,7:17,9:14; 행20:35; 갈3:1-2)

그러나 그가 예수를 알았다고 할지라도 회심 전에는 "육체대로"만 알았고 회심 후에는 "신령하게"만을 알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후5:15-16; 갈2:19-20)

결국 바울은 회심 전에 기독교도를 열심으로 핍박한 점에서 볼 때에, 그는 예수에 대한 말을 많이 듣고 있었으나,
예수가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고, 메시야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열심으로 박해했을 것이다.
바로 이점이 보통 사람들이 넘어지게 되는 하나님의 숨겨진 비밀이다.

즉 예수님이 이세상에 오실 때에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치 않았던 모양으로 오셨기 때문에,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단지 세례 요한이 예고하기는 했지만,(
마3:11-12; 요1:32-34.) 그를 믿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고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한 세례 요한 자신도, 믿어지지 않아 제자들을 시켜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 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고 확인케 하였다.(
마11:2-5)

바울은 회심 후에야 이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가 핍박하던 예수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오실 메시야로 안후에는 그분만 붙들고, 살든지 죽든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으로
산다고 하면서 평생을 일관하였다.

그는 실로 그리스도만 중심하는 그리스도의 봉사자요, 그리스도와 합한 자였던 것이다.
(
빌1:20-21; 딤후1:11-12; 갈2:20)

 

    C. 중생 중심 신학

 

바울 신학의 또 하나의 특색은 그의 체험에서 오는 중생을 역설하는 데에 있다.
육체적으로만 예수를 알았던 사울이 영광의 빛 가운데 나타난 예수를 보고는, 눈이 어둡게 되었고 그러나 그의 심령의
눈이 뜨면서 새사람이 되었다.
그 후 바울은 3년간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사는 동안 주님의 계시를 받아 율법주의자 사울은 완전히 죽고,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에는 새사람 사도 바울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중생치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을 알지도 못할 뿐더러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며,
오히려 미련하게 여겨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고로, 진노를 받을 자식이니, 이러한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심령을 새롭게 하는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다.
(
고전2:14; 롬8:7; 엡2:3; 갈5:24; 고후5:17; 엡4:22-24)

중생한 새사람은 의와 진리로 지으심 받아서 그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 있고, 위의 것을 찾고, 땅의 것을 생각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인간은 반드시 자기가 다메섹에서 넘어짐같이 넘어져야 하고, 큰 회개와 중생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중생전의 사울은 예수가 한낱 목수의 아들로 보았으나, 중생 후의 바울은 그 목수의 아들이었던 예수안에 능력이 있고,
복과 부요함이 충만함을 보고 세상의 구주로 섬기게 되었다.(
고후12:9; 롬15:29; 엡3:8; 엡4:13; 갈3:16.)
그러므로 중생은 바울과 예수를 관계지어준 큰 계기가 된 것이다.(
갈2:20; 고후5:17; 딛3:5.)

바울은 이 중생에 대하여 자신이 쓴 서신 중에 여러번 언급하고 있다.(갈1:13-16; 고전15:3-10; 빌3:5-11; 딤전1:12-16.)
초대교회도 바울의 중생문제를 중대시했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기자인 누가도 여러번 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
행9:1-18 22:3-15,26: 4-18.)
그래서 그가 중생을 말할 때에 그것없이는 예수가 없고 하나님이 없을 만큼 크게 취급한 것을 알 수 있다.

 

    D. 선교 중심 신학

 

바울은 자기가 받은 체험과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선교 문제가 나온다.
그리고 그 선교의 내용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
고전2:1-5; 롬1:16; 고전15:9-10; 엡3:7-9; 딤1:3.)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함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말함이라 하고, 자기는 나타내지 않았다.
(
롬1:16; 고전1:18 2:1-2; 고후4:5.)

선교는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났을 때에 예수에게 직접 받은 사명이요, 오히려 이 사명 때문에 예수가 다메섹에서
바울을 붙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후일에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으리니"(
고전9:16.)라고 하였고, 그의 3회에 걸친 전도여행은
당시의 세계판도로서는 최대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며 새 교회를 세웠고, 남이 세운 터 위에는 일하지 아니했다.(
롬15:20.)

그의 전도 대상은 유대인과 이방인이였으며, 앉은 뱅이를 고쳤고, 무녀에게도 옥졸에게도 아데네의 철학자들에게도
상선의 선객들에게도 로마의 옥 중에서도 전도했다.(
행13:42-46 14:8 16:16 29-32, 17:18, 27:22-25, 28:23, 30-31.)
그는 전형적 전도자로서, 그 사명을 위해 담대하였고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선한 뜻으로 생명조차 아끼지
아니하면서 전도에만 열정을 다바쳤다.(
빌1:20; 딤후4:2; 빌1:15; 살전2:8; 골1:28-29.)

그리하여 그의 선교중심 신학은 자연히 교회중심 신학과 연결된다.
선교하면서 교회를 세웠고, 교회를 위하여 서신을 썼다.
바울은 그가 세운 교회들을 흠이나 티가 없는 영화로운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보고(
엡5:26.) 사랑하였다.

그래서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에는 찾아가기도 하고 편지를 썼다.
그의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이었고, 그가 쓴 서신들은 자기가 전한 예수의 몸인 교회를 돌보는
일이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전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하면서(고후6:16; 딤전3:15.) 교리를 지키고, 권징을 하면서,
(
딤후2:15; 고전5:13; 빌4:9; 딤4:2.) 덕을 세우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라고 한다.
(
엡4:29; 롬12:5; 고전12:12; 엡4:15-16 4:1-3.)
이러한 바울의 교회관은 그가 진실로 일생토록 선교를 위하여 몸바친 모범적 전도자임을 알게한다.

 

  2. 바울 신학의 요소

    A. 유대교적 요소

 

바울사상에 어떤 요소가 있느냐 하는 문제는 또 하나의 문제가 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에게는 유대적 요소가 있다는 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대인으로 랍비교육을 받았다.
(
랍비..유대인들이 교사를 부르는 존경의 칭호이다.(선생의 칭호), (참고. 마23:1-8).)

그래서 그의 서신중에는 랍비들이 잘 쓰는 어투와 논리의 방식이 들어있다.
즉 개념과 개념을 대립시키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래서 사상과 사상을 엄밀히 구분시키려는 것이다.

죽음과 생명, 옛 사람과 새 사람, 율법과 복음, 육과 영, 멸망과 구원, 아담과 마지막 아담(예수), 등과 같이
문제를 대립시키면서 결국에는 모든 문제를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즉 바울은 자기의 다메섹 체험을 분기점으로 삼고 대조적 방식으로 표시했다.
로마서 7장의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을, 대조하면서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2장에는, 세상 지식과 십자가의 도를, 대조시켰다.

이 대조의 개념은 고린도전서 15장 40-44절에서는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죽은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한 영적인
몸이 있느니라" 하였다.

고린도후서 4장 8-10절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다 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림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 함은 그의 대조 개념을
능숙한 수사문장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바울의 문장에서 그의 독특한 인생 체험을 기초로 하면서도 유대적 요소로 희랍적 어떤 문학에 못지 않는
글을 쓰고 있다.
바울의 문장에는 희랍적 문학서와 달라서 질적으로 상반되는 것들이 서로 교차하고 있어서, 이 세상문학에 비교할 수 없다.

희랍문학은 세상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만을 말하고 있지만, 바울의 서신은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세상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논리적인 것과 비논리적인 것이, 섞여 있어서 실로 황홀하고 생명력 있는 입체적인 파노라마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서신을 단순한 서적과 같이 철학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격하 시키면,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중요한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진리를 놓치게 된다.

바울의 편지는 교회 앞에서 낭독되었고,(살전5:27) 교회에 문제가 있어서 시끄러울 때에 그 문제의 해결과 교회의
통일을 위하여 썼기 때문에 설교적이고 권면적이다.
때로는 지나친 표현의 경우도 있으나, 그것은 신앙의 열정과 감정의 표현이며 신앙을 가지고 보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지장이 안된다.
신앙 있는 사람에게는 이론보다 은혜를 더욱 많이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서신 중에 부활사상이 강하게 강조되고 있는데, 바울에게 있어서 이 부활사상은 잊을 수 없는 그의
다메섹에서의 경험때문에 그에게는 지워버릴 수 없는 것이고, 또한 부활사상은 그 당시 유대민족들 사이에 보편적
사상이라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종종 부활문제로 논쟁한 것이 성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잘 알 수 있다.
(
마16:21 20:19 22:23-30; 막8:31 14:28; 눅14:14 20:27-36; 행23:6-8.)

 

    B. 율법적 요소

 

바울은 어렸을 때부터 율법의 교육을 받고 다메섹에 이를 때까지 그것 하나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회심
후에는 율법에서 벗어났으나, 그 교육의 흔적은 전서신 중에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을 강조하나 오히려 그 율법을 포함한 구약 성경은 전부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다고 했다.
(
롬1:1-4, 3:21, 4:18-24, 15:4-6; 고전9:9-10, 10:1-4; 행26:21-23.)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창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다."(고전 2:7)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로 하여금 예언되었고, 때가 차매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것이다.(
갈3:4-5.)

그런고로 율법을 쓴 모세라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준비된 자에 불과하고, 또한 그리스도는 전 생애를 통하여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은 것이나, 삼일만에 다시 사신 것도 성경대로 성취된 것이고, 기독론의 근본
문제와 믿음으로 구원 받는 구원의 대교리와 율법의 효용도 다 구약 가운데 있다고 한다.(
율법의 완성 -마5:17; 성경대로
성취 -
고전15:3-4; 기독론의 근본 -고후5:14; 이신득구(以信得救) -롬1:17, 갈3:16; 율법의 효용 -롬3:20-21.)

많은 곳에서 바울은 "기록하였는데"라고 하면서 구약(율법을 포함)을 자유롭게 응용하며, 유대교의 율법을 기독교의
복음으로 재생하였다.
동시에 구약 중의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신약교회의 신앙의 조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갈3:26-19.)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22절 이하에서 아브라함의 처 사라의 아들과 그첩 하갈의 아들을 구별하여 전자를 자유의 아들,
영의 아들, 새 예루살렘의 아들로, 비유하고 후자 하갈의 아들을 노예의 아들, 율법의 아들로, 비유하고 있다.
이러한 비유법은 율법 배후에 숨어있는 그 깊은 뜻을 찾아 내려고 하는 바울에게 필요한 방법이었다.

 

    C. 신비적 요소

 

칼빈은 구원받은 자가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이 없으면 헛된 것이라고 역설했다고 한다.
바울은 어디서 신비적 요소를 얻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의 신비적 요소는 다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면 신비적이라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슈바이쩌 박사는 신비주의를 정의하여 "인간이 지상적인 것과 초지상적인 것,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것 사이에 격리를
극복하게 되는 것을 보고 스스로 지상적인 것 가운데 있으면서, 초시간적인 것 속에 들어가 있다고 체험하는 경우
거기에 신비주의가 있다."고 말했다.

바울이 신비적 요소를 제일 잘 나타내는 말로서 "그리스도 안에" 이말은 그리스도와 바울의 밀착을 한마디로 잘
나타내는 말로서 서신중에 164회나 사용되고 있다한다.

그러면 서신 가운데 바울이 신비적 요소를 나타내는 말을 예를들면,

그러나 보다 더욱 신비적인 말은 "세례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산다"는 것이다.( 다시산다.) "
그 밖에도 "만일 너희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나니와.....주와 합한 자는 한
영이라.....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심으로 산다"라고 한 것들이다. (
영에 있나니 롬8:9, 한 몸이라 롬12:5;
고전12:12, 성령이 우리 안에 고전3:16, 한 영 고전6:17, 내 안에계신 그리스도 갈2:20.)

이상의 모든 말씀들은 요약하면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죽었고,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해서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관용과 인내와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3. 바울의 율법 개념

 

회심 전의 바울의 신앙은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다.
어려서부터 대표적인 바리새인의 가정에서 엄한 유대교 사상을 교육받고 성장한 그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택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언약이며, 축복의 약속으로 믿었다.

그의 칭의관(稱義觀)은 하나님의 약속인 율법을 지키므로 의로와지는 줄 알았다.
그는 항상 자기자신을 하나님앞에 선택받은 뛰어난 유대인 임을 자랑했다.
따라서 그의 메시야관도 다른 유대인들과 다를바 없었다.

오리라하신 "메시야"는 반드시 영광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땅에 오셔서, 세상 권세자들을 심판하고, 영원히 통치하실
줄만 알았다.(
사9:6-7; 시89:3-4; 곌37:25; 단2:44; 눅1:32-34.)

하물며 목수의 아들인 예수가 구약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로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예수는 죽을 것을 말하며,(
요12:34) 율법주의 자들의 모순점을 지적 개혁을
주장함으로, 하나님앞에 유일한 택한 백성으로 자부하던 유대인들의 심정을 상하게 하였다.
결국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복음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유대교 종교가정에서 율법으로 성장한 그는 빌립보서 3장 5절에 "내가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하였다.
또,
사도행전 22장 3-4절에는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다.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옥에 넘겼노니" 하였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남으로, 오리라 한 "메시야"가 예수이심을 믿게 되었으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하던 그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
했다.(
롬3:20-24; 빌3:9.)

이와 같이 그는 복음이 율법의 완성임을 믿었다.(마 5:17)

 

    A. 율법의 유래

 

율법의 유래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친히 기록하여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행동의 체계로서, 율법은 인간의 삶과 하나님의 의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약속으로 주셨다.(
출24:12; 34:28-29.)

그러나 인간이 그 율법의 의무를 다 이행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은 인간편에서 보면 수용
불가능하였다.(
롬3:10-12; 약2:10.)
율법은 인간에게 완전복종을 요구하였다.(
갈 3:10)

허나 인간은 율법대로 살 수 없으므로,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시고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롬8:3-14 10:2-4.)고 바울은 서신에 기록하였다.

 

    B. 율법의 본성

 

모세가 전한 율법의 본성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친히 써주신 십계명이다.
다윗은 시편 19편 7-8절에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생케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모세가 전한 율법이 613이나 된다고 신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의 본성에 대하여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또한 "율법은 영적인 줄 알거니와" 하였다.(
롬7:1214.)

하지만 사람으로서는 이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하였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죄한 자가 되나니..."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하였다.(
약2:10; 갈3:10.)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율법을 온전히 이루었다고 믿었다.(히 12:2)

 

    C. 율법의 역사

 

회심 후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의 율법관은 180도 변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이 본 율법의 역사는

    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함 (롬3:19)
    ②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아래 있다 함 (
    갈3:10)
    ③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자 됨 (
    약2:10)
    ④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며 (
    롬7:1)
    ⑤ 율법은 죄의 권능이 되며 (
    고전15:56)
    ⑥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으며 (
    갈3:16)
    ⑦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할 수 없으며 (
    히7:19 10:1)
    ⑧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만 하며 (
    롬3:20)
    ⑨ 율법은 믿음이 오기까지 우리를 율법 아래 매여 갇혀 있게 하며 (
    갈3:23)
    ⑩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된다 (
    갈3:24) 하였다.

이와 같이 율법의 역사는 예수가 오기까지 필요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율법 아래 매여있는 모든
자들을 율법에서 해방 자유케 하였다 했다.(
갈3:21-23; 롬8:1-2; 히7:17-19 10:9-10,14.)

 

  4. 바울의 인간론

 

바울의 인간론은 그의 사상의 일부분이며, 그의 기독론에 부속되는 것이다.
이유인즉 바울의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만이 인생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기독교 사상은 형이상학적 사변이나 철학적 논증이 아니라,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위에서
거기에 기초를 두고, 모든 일을 하면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고전 15:10) 라고 하였다.
바울의 기독론은 다른 사도들과 같지 않다.

다른 사도들은 유대교적인 메시야로서의 그리스도를 말하지만 바울의 것은 다메석에서 본 그리스도를 중심하면서,
오직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속에 정립되어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입증하기 위해 인간의 창조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A. 인간의 주조적 양면성

 

바울은 인간의 내적인 성질과 외적인 성질을 말함으로 일종의 인간론적 이원론을 보여 주고 있다.
예를 들면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되" 또는 "겉 사람은 부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하였으며 "그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하였다.
(
롬7:22; 고후4:16; 엡3:16.)

이러한 바울의 사고 방식은 헬라주의적 사상의 영향을 받은 증거라고 혹자는 역설하고 있으나, 그러나 엄격히
히브리적 문맥 속에도 나타나 있다.
예를 들면

①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하였으며,
②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창2:7; 욥33:4.)

바울은 이와같이 인간의 구조적 이분설을 인정하면서도 구조적 요소의 내적 본질에서 하나를 구성하는 인간의 인격의
근본적 통일성을 강조하고 있다. (
엡1:9-10, 4:4-6; 고전6:17, 15:44)

 

    B. 인간의 육신과 영

 

바울은 인간의 육신에 관하여 말할 때 그는 단순히 보편적인 인간의 경험의 견지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몸은 가장 고귀하고 위대하고 순결한 일들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또 그러한 일들을 위해서 지어졌다했다.
(
롬1:19-20 (참고 창1:28) 윌리암 바클레이, [바울신학개론], 박문재 옮김, p.168.)

그러나 인간의 몸은 경험적으로나 실제 생활에서나 죄로 인도하며 죄에 매인 생활을 하게 한다.
이러한 약한 것들은 그리스도 없는 인간의 성품에 타고난 것이며, 이렇게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는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얼마나 오류를 범하기 쉽고, 또 얼마나 죄스러운가를 말해준다.

유혹 앞에서 아무런 힘도 못 쓰고 넘어지고 마는 것이 그리스도 없는 인간의 성품이다.
유혹이 올 때 그 앞에서 무기력하게 넘어질 뿐 아니라 죄에게도 복종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했다.
(
William Barclay. The Mind of St. 박문재역, [바울신학 개론],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pp.168-169.)

또한 바울은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 했다.(
롬8:12-13.)

그의 말대로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들은 육체대로 살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 우리는 옛 사람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새 사람에 대하여는
산 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육체를 가지고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육체를 따라 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며, 따라서 우리가 이제는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기
때문이다.(
고후5:13-16; 갈5:16-17 24-25 (참고 벧전4:1-2).)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갈2:20; 빌1:2021; 롬14:7-8.)
우리의 인간적인 능력에 의해 지배를 받을 때는 죄의 재료였던 본능, 열정, 감정, 욕구들이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게 될
때는 선을 위한 재료들이 된다. (
롬8:28.)

바울은 이와 같이 인간의 육적 부분과 영적 부분의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 구조적 두 측면이 완전한 연합을 이루는
완성을 바라고 또한 믿었다.
그는 이 구조적 두 부분의 완전 연합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만이 가능함을 말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6:4 5:10-11.)

또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하였으며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고후5:17; 고전6:17.) 하였다.

바울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여 생각하지 않았으며, 인간은 본질적으로 육과 영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속에 창조되어 한 인격을 이루도록 되어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피조물인 것이다.
(
엡1:3-6; 고전3:16 6:19 (참고 창1:27-28 2:7).)

그러므로 인간의 육과 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바쳐져야 한다.(롬15:5-6; 고전6:20 10:31; 빌1:20.)
인간은 전 생애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와 사랑을 보다 완전히 체험하게 된다.
(
롬8:20-25; 고전15:35-49; 살전5:19-24.)

이와같이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또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지어져 간다."고 한다.
바로 인간의 몸은 "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바 성령의 전이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신다" 하였다.(
엡2:21-22; 고전6:19-20 3:17.)

다시 말해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 사랑하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헤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 데 있다." 하였다.(
엡1:4 1:6)

이와같이 바울의 인간에 대한 신학사상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받으시기 원하는 하나님의 예정 섭리임을 강조하였다.

 

  5. 바울의 기독론(그리스도론)

 

바울의 메시지의 기본 요지인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인간사 속에서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안에 두고 있다.
 

    A.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인간의 삶을
취하셨다는 것이다.(
갈4:4 (참고 요1:14-18))
이것이 우리가 성육신이라고 부르는 교리이다.
바울은 성육신을 두가지 면에서 인식했다.

      1) 성부 편에서의 성육신 인식

바울에게 성육신은 문자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한 행동이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모든 사람이 입고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롬8:3; 갈4:4-5 (참고 요1:14))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사랑이시며,(
롬5:8, 8:39 (참고 요일4:9).)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다.(
고후5:19; 골1:19-20 (참고 요일4:10).)

그의 은사는 말할 수 없는 은사이다.(엡2:4-5 (참고 요1:16-18; 약1:17).)
그와 같은 사랑의 행동 즉, 성육신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본질상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행동이었다.

      2) 성자 편에서의 성육신 인식

여기서 바울은 그만이 볼 수 있는 독특한 면에서 성육신을 이해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땅에서 비로소 시작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영원 전에 시작된 것으로 보았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시기 위해 무엇인가 고귀한 것을 포기했다고 믿었다.

"그는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고후 9:8) 이라고 말함은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세상이 있기 전부터 예정되었으며, 그 출발이 영원 전에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엡1:4-5; 딤후1:9.)

바울의 이러한 사상이 빌립보서 2장 5-15절에 완전하게 나타나 있다.
거기서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하며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권한을 갖고 계시면서도 그 권한을 포기하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인간이 되신 점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바울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복종에 대해 말한다.
예수는 권세와 능력과 만물을 다스릴 왕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그러나 그는 왕이 아니라 종으로 세상에 왔다.
그는 명령하러 온것이 아니라 도리어 순종하려 왔다.

그는 죽음에 복종하였다.(롬5:19; 히5:8 (참고 마20:28).)
그의 죽음이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빌2:8 (참고 마27:38-50; 막15:25-37).)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인간들을 위해서 즉 우리를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 포기해야 했던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바울은 이 성육신의 실제성을 여러번에 걸쳐서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빌립보서 2장 5-11절에서 바울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완전성을 강조하고 있는가를 보았다.
또한
로마서 1장 3절에서 예수께서 어떻게 육신으로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게 되었는가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이와같이 예수께서 실제로 육신을 입으심으로 후손이 되었다는 사실이 로마서 맨 처음에 나온다.
또한 바울은
로마서 8장 3절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세상에 보낸 사실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성육신의 실제성에 대한 기록은 복음서와 요한서신에서도 볼 수 있다.(눅1:26-31 2:10-12; 요일4:2-3.)
바울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로 보았다.
또 그는 성육신을 창세전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엡1:3-12.)

바울에게 예수님의 인성은 대단히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의해서만큼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얻게 되는 구원의 내용이 많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볼 때, 그리스도의 삶은 구원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만큼이나 아주 중요하고 필요한 요소였다.
왜냐하면 이는 바울이 쓴 가장 어려운 내용들 중 이를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구원의 사역에서 예수님의 생명의 능력이라고 하는 이 사상은 바울의 서신가운데 주로 두 곳에 나온다.
고린도전서 15장 21-22절에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는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하였다.

그러나 생명의 능력사상이 가장 충만하게 나타난 곳은 로마서 5장 12-21절이다.
이 두서신의 구절들의 기본 사상은
로마서 5장 19절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 구절의 요지는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바는 모든 사람들이 아담이 범한 동일한 형태의 죄를 범했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아담으로부터 어떤 죄를 짓는 성향을 물려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바는, 모든 인간이 아담 안에서 문자 그대로 실제로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아담이 죄를 범했다는 그 사실이 모든 사람들을 죄인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아담안에서 범죄했다는 이 사상으로 시작한다.
모든 사람들이 아담의 죄와 관련되어 있다.
즉 아담이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아담의 모든 후손들도 죄인이 되었다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를 증거하였다.

바울의 논증 가운데는 확실한 기본적인 단계들이 있다.

① 바울의 논증의 기본은 '죽음은' 죄의 결과라는 주장이다.
죽음은 죄로 인해 왔다는 것이다.(
롬 5:12 6:20-21,23.)
죄가 없었다면 죽음도 결코 없었을 것이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② 아담은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 곧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
그것으로 아담은 하나님 앞에 범죄했고, 또 그 때문에 죽어야 할 존재가 되었다.
(
롬5:12 6:23 (참고 창2:16-17 3:17-19, 히9:27))

③ 그러나, 바울은 아담의 이 특별한 죄 안에서 모든 사람들도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세 이전에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죽었다."고 하여
로마서 5장 13-14절에 논증하였다.

④ 그러면 왜 율법도 없었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는데 사람이 죽어야 했나, 하는 것이다.
그 답변은 그들이 아담 안에서 범죄했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담의 죄에 연류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노릇했다 하였다.(
롬5:17-21 6:12.)

바울의 논증의 요지는 율법이 존재하기 전, 따라서 죄가 성립될 수 있기 전에도 사람들이 계속해서 죽어야 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사실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죄인으로 인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께 온전한 의와 온전한 순종을 드렸다.
그래서 아담의 죄안에 연관되여 있던 인간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온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악하고 끝없이 계속되는
죄와 죽음의 결박 속에서 해방케하였다.(
롬8:1-2; 히5:8-9.)

즉 모든 사람들이 아담의 죄 안에서 죄인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안에서 의로운 자 되게 하였다.
이와같은 바울의 논증 가운데는 영원한 진리가 내재해 있다.

즉 인간은 스스로 자유로이 될 수 없는 상황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죄로 인한 사망과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인이 의인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
롬3:23-24; 갈3:16; 빌3:9.)

이로 볼 때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이 인간을 거룩하게 만들며,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의인됨을 강조하였다.

 

    B.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의 끊임없이 계속되는 주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본질적인 중심성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고린도교인들에게 편지하기를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내가 너희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했으며, 또 갈리디아 교인들에게도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했다.(
고전1:23 2:2; 갈6:14.)
이와 같이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확실한 능력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지혜의 아름다운 말로 가르치지 않았으며," 또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가 그들 보는 앞에 밝히 계시되었는데도 어찌하여 그들이 실족하였는지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고전1:17 2:1; 갈3:1.)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자체에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놓인 장벽들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고 확신했다.(
고전1:18; 엡2:13-14; 골2:14-15.)

바울은 자신의 사명의 최우선적인 임무는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대해서 어떤 꾸미는 말 없이 그냥 사실을 전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와 같은 확신을 가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서 어떤 진리를 발견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에 관해서" 기록했다.
또한 그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살전 5:10; 엡5:25.)

십자가의 사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그리고 구속의 사상은 바울의 신학 사상 가운데 긴밀하고 깊게 연관되어 있다.
그 사실은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빌3:20.) 그가 말한 한 간략한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인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으심으로 인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준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5절에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했다.

이 말씀 속에는 두개의 사상이 함께 들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① 하나님의 사람들을 율법주의적인 안목에서 건지시고 삶을 전적으로 지배하는 세력은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함을 보이시려고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상이 함축되어 있다.

② 하나님은 율법 아래 있는 그들이 당해야 할 형벌들에서 구하시려고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 7절에서 유사한 것처럼 보이는 이 두개의 요소를 함께 묶어서 묘사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여기서 구속이란 인생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별에서 용서와 은혜를 입는 것을 말한다.
이와같은 자유함을 성취한 것은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었다.
바울은 거듭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죄와 연관시킨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이다.(
고전15:3.)

또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서두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또 그는 로마서에서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신 우리 주 예수에 관하여 이야기했으며"
또한 바울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이야기 하였으며,
그리고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한다.(
갈1:4; 롬4:25, 5:6,8.)

이로 볼 때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위하여 행하신 크고 기본적인 사역은 인간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일이었다는
사실과, 또 그 결과 그의 공생애와 특히 그의 죽으심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잃었던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가 바울의 사상을 생각하는 데에 한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희생"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으며,
또 에베소서 5장 2절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와 같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했다.

이 보다 더 바울사상 전체에 대한 열쇠이자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한 구절을 바울이 쓴 서신들 가운데 찾을 수 있다.
고린도전서 5장 7절이 바로 그 구절인데 거기서 바울은 이와 같이 말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이다.
유월절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속박에서 구출받은 것을 기념한 아주 유명한 이스라엘의 절기였다. 유월절
이야기의 진수는 그 이름 자체에 있다. 영원토록 간직될 유월절의 진수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그 집의 가족들을
죽음의 형벌로부터 구출한 것을 영원히 기억하는 것이다.

바울의 사상 가운데 이와같은 사상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간들을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받게 될 죽음에서 구원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바울에게도 과연 그랬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가장 실제적인 의미에서 인간들을 위한 하나의
희생물이 된다. 이 희생이야말로, 인간들을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영혼의 죽음에서 건지시는 희생이었다.
바울은 이 사상을 뒷받침하며 강조하는 진술을 두차례 이상 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는 진술과

고린도후서 5장 21절의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인간들의 죄와 또한 바울 자신의 죄를 위한 최상의 희생제물이 됨을 알았다.
이제 바울이 사용한 모든 표상들을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① 법앞에서 취한 표상으로 "칭의"가 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그가 마치 선인이었던 것처럼 대하신다. 그러나 죄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렇지 않으면 거기에 도덕적인 혼란이 생긴다. 따라서 마땅히
받아야 할 그 죄에 대한 형벌을 누군가가 치러야 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바울이 말한 대로 "이제
우리가 그의 피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을 얻었다."는 것이다.(
롬3:25-26 5:9; 고후5:21.)

② 우정에서 취한 표상으로 "화목"이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행실이 깨끗하거나 마음이 청결한 자가 아닌 한, 아무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가까이 나아갈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본래 속성상 흠없이 정결하고 거룩하여
죄인으로서는 가까이 갈 수 없다. 그러면 누군가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 바울은 말한다.(
롬5:10-11; 딤전2:5; 골1:21-22.)

③ 노예에게서 취한 표상으로 "구속, 해방"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죄의 속박으로부터 구출받아야 한다. 그러나 노예의
세계에서 노예인 본인이 몸값을 치르지 않고는 해방될 수 없다. 혹 자비가 많은 사람이 그를 대신해서 몸값을 치르면 된다.
인간의 노예 해방은 반드시 그의 몸값을 치러야만 한다. 죄많은 인간이 그 죄에서 해방되려면, 누군가가 그 죄값을 치르기
위하여 희생을 해야 하는 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고 바울은 말한다.(
갈3:13; 롬5:8; 고전7:23-24; 롬14:8.)

④ 가정에서 취한 표상 중 "양자"삼음이라는 것이 있다. 세상 법에서도 양자로 입적하려면 정해진 절차를 거쳐야 한다.
즉 새로운 아버지를 모시기 위한 절차를 갖추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누군가가 자격을 갖추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바울은 말한다.(
롬8:15; 갈4:53:25.)

⑤ 희생으로부터 취한 표상으로 "속죄"라는 것이 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죄를 지으면 참회의 표시이자 증거를 하기
위해 소나 양을 희생시켰다. 그러나 바울의 경험으로는 소나 양같은 짐승을 희생시켜 죄를 대속할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러한 희생을 마땅히 찾아야 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한 희생이 되어서 그러한 희생으로 인간의 죄를 속죄하셨다고 바울은 말한다.
(
엡1:7; 히9:12 (참고 벨전1:18-19).)

⑥ 바울이 사용한 마지막 표상이 있다. 그것은 바울의 마음에 매우 가깝게 있던 표상이다. 그것은 "회계(계산)"을 통한
표상이다. 바울의 사상은 자기 계산에 하나님과 균형을 맞출만한 사람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도저히 지불 능력이 없을 정도의 빚을 하나님께 지고 있으나,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안에서 그의 빚은 면제되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빚의 댓가로 그에게 돌려진다. 이로서 그는 자신의 것이 아닌 의로 옷입게 된다 한다. 이와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환영을 받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어떤 힘이나 혹은 우리가 노력함으로 해낼 수 있는 자신의
자격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 앞과 그분의 가족 앞으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라는 사건 속에서 하나님이 친히 행하신 역사를 보았다.
또 바울이 본 이 하나님의 역사란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인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일을 가능케
하셨다고 말했다.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도는 바울신학의 중심이라고도 할 수 있고 또한 바울의 복음이기도 하다.
그런고로 십자가의 도는 화목하는 도요, 하나님의 아들되는 도요, 구원받는 도요, 복음이다.
(
고전1:18; 롬1:16 (하나님의 능력은 그리스도이심 - 고전1:24).)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우리가 자든지 깨든지 함께 살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
살전5:10; 갈2:20 5:24; 고후5:15.)

 

    C. 부활하신 그리스도

 

바울이 쓴 서신과 사상에서 그의 강조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희생적인 죽으심과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다.
부활사상이 어떻게 바울 사상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는가는, 그가 데살로니가후서와 빌레몬서를 제외한 그의 모든
서신서에서 부활에 대해 특별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하기를,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했고, 또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 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하는 그의 말 첫마디도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였다.

또 그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롬6:4 (참고 7:4); 고전6:14 (참고 고후13:4); 갈1:1; 엡1:20.)

바울은 또한 골로새 교인들에게도 이와 같이 전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
골2:12.) 이라고 했으며, 또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관한
가장 풍부한 교훈을 하고 있다.

그는 우선 무엇보다 부활에 관한 사실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시작했다.
그의 첫 마디 말은 이러하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노니,"(
고전 15:3)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그는 교회의 표준이 되는 가르침에 관해서 전했다.
이는 중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는 그리스도인들의 터무니없는 전개나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 교회의 초창기부터 교회 안에 구체적으로 있었던 것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이러한 전승에 대한 증거와 관련해서 바울은 몇 가지 사실을 더욱 첨가해서 전하고 있다.
그것은 바울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내놓은 증거이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보이신 실례들을 명단으로 나열한 뒤에 이렇게 말한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전15:4-8.)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간접적으로 전해듣고 받아드려야 했던 다른 사람들의 증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직접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경험이 있는 사건이었으며, 또 그가 목격자로서 증언할 수 있는 사건이었으며,
또한 그의 증거는 직접적인 것이었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행위였다 한다.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예수를 일으키셨다는 것이었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의 산물이었으며, 하나님이 친히 하신 행위였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14절에서 "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했다.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불멸의 능력에 대한 완벽한 증거였다.

또한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증거하는 최종적인 증거였다.
그는
로마서 1장 4절에서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말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오실 메시야는 영광과 권세와 능력으로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할 왕으로 오실 분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메시야와 마주 대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이 생각했던 메시야관과는 모든 면에서 거리가 먼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택하신 그 메시야라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역사가 필요했다.
그들에게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확신시키는 한 가지 일이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들이 꿈꾸던 사상을 초월한 승리요 영광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부활하신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강조하였다.
실례를 보면
사도행전 13장 14-43절에 바울이 바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 회랑에서 설교한 내용에 대해서 누구가
진술하고 있는 기사가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거기에서 바울이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을 들면서 예수의 메시야 되심에 관해서 유대인들을 확신시키려고
애쓰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메시야이심을 증거하기 위하여 쓴 서신이 바로 히브리서이다.
부활의 그리스도를 온전한 대제사장으로 여기는 사상은 히브리서의 특징이 되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들에게는 그 사상을 최소한 한번 사용했다.
로마서 8장 27절에서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중재 곧 중보의 기도를 하시는
것에 대해서 기록했다.
또한
로마서 8장 34절에서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우리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하고 계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했다.

바울 사상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사상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재판장으로 보는 사상이라 하겠다.
그 사상은
로마서 14장 9, 10절에서 볼 수 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앞에 서리라."

한 때 인간들이 재판석에 앉아서 신문을 하고 또 인간들에게 정죄를 받으신 바 있는 바로 그 예수님이 모든 사람이
나아가 그의 심판석 앞에서야 할 부활하신 그리스도시라 했다.
바울의 사상중에 매우 깊게 뿌리박혀 있고 그가 소중이 여기는 사상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부활의 능력이라는
사상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자신의 삶의 최종 목표들 가운데 하나를 밝히면서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알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에베소서 1장 19-20절에서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하심에 관해 말하기를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에
역사하신 그 능력을 믿는다고 말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리스도인이 영위할 새생활과 연관시키며 또 그리스도인을 옷입히는 새로운 선행과
연관시켰다.
로마서 6장 4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했다.

로마서 7장 4절에서도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골로새서 2장 12절에서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자들 가운데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하였으며,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인간적인면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희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하였다.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 현존하는 능력이었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철저한 필연성에 관하여
고린도전서 15장 14-19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였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이와 같이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만이 그리스도인을 보증하고 보호하는 위대한 진리로 믿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아래와 같은 네가지 위대한 진리들의 보증이 된다.

① 그리스도의 부활은 진리가 거짓보다 강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들에게
이르렀다. 인간들은 그 진리를 무시하고, 말살하고 파괴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진리를
파괴할 수 없는 것임을 증거하는 최종적인 증거가 되고 있다.

② 또 그것은 선이 악보다 강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 하신 선이셨다. 인간의 죄는
그 선을 파괴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선이 결국에는 그것을 대항하고 있는 모든 악을 반드시 정복하고야
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③ 또 그것은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단지 한번만에 멸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생명을 멸할 수 없는 것임을 증거하는 증거가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④ 또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랑이 미움보다 강함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영원토록 파멸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들의 모든
미움보다 강하다는 것을 입증하였으며, 또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미움에 대항을 모두 좌절시킨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상 있었던 단순한 사건이 아니며, 하나의 신학적 교리도 아니다. 그 사건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사실이다. 이 사실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 체험한 사실을 입증한다. 바울의
이러한 윤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살아계셔서 현존하는 주님의 역사인 성령을 통해서 입증되어 있다.(
롬6:1-9 8:1-2.)

 

  6. 바울의 성령론

 

성령에 대하여 바울은 다른 사도들이 오순절에 성령으로 권능을 받았던 것처럼 그도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할 때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였다.
이는 주께서 택한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며, 실증이였다.
(
성령은 주님의 약속, 고후1:20-22 (참고 눅24:49, 행1:4-5).)

또한 바울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성령은 하나님의 선물, 행2:38; 롬3:15 (참고 약1:17, 요4:10).) 확신한다.
또한 성령은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이 생기게 하는 기독교 복음의 전파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임하신다고 하였다.
바울은 이를 입증하여
로마서 10장 17절에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였으며,
갈라디아서 3장 2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이와같이 바울은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서 성령을 받음을 입증했다.

그러므로 성령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가 보내신 복음의 메시지에 대하여 사람들이 믿음으로 받아
드릴때 그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신다 하였다.(
믿음으로 성령받음 엡1:13; 갈3:2 (참고 롬1:16, 고전1:18).)
이러한 성령의 실상에 대해서 바울은 성령이란 하나님의 대언자로 알았고, 또한 성령은 교회의 영적 평안과 발전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았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자신의 약속에 따라 성령은 그리스도의 승천 후 영원한 대언자로서 몸된 교회의 상징이 되었다.
(
성령은 몸된 교회 상징 엡2:22 (참고 요14:26 15:26, 요일2:1).)
그러므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능력) 롬8:9-11;
고후3:17 (참고 요6:63, 3:24); 고전1:24.)

이와같이 복음안에서 바울과 같이 성령의 본질과 임재 및 그 직분에 대해서 완전히 파악한 사람은 없다.
바울은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에 대하여 잘 보여주고 있다.
 

    A. 성령의 인격성

 

성령의 인격성은 믿는 자에게 구원의 축복을 주는 역사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즉 성령은 택함 받은 자가 소유해야 할 필연적인 인격이다.
성령은 모든 때와 모든 방법으로 보혜사로 역사하신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 "보혜사는 진리의 영이라" 하였으며, 요한일서 2장 1절에는 "보혜사는 대언자라" 하였다.
이로 볼 때 성령은 계시하는 데에 하나님의 대행자라는 사실이다.
즉 성령은 외견상으로는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하시는 대행자이며 내면적으로 성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를 시키는 인격자요 능력이 되며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알게 하고, 이해하도록 마음을 밝히는
하나님의 중보자이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깨달아 알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며, 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참 아들 되도록
인도하는 분도 성령이시다.(
성령의 인도 롬5:5 8:14 8:27.)

뿐만 아니라,이와같이 성령은 허락한 자를 가르치며, 하나님의 깊은 것도 통달하게 하신다.(성령의 가르침 고전2:1310.)
또한 성령은 택하신 자의 행할것을 지시하신다.(
성령의 지시 행9:3-613:2-3,16:6-7.)

또한 성령은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거하며,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다.
(
성령의 증거 롬8:26-27 8:16; 갈4:6.)

이와같은 바울의 많은 서신들을 통해 볼 때, 바울은 성령을 온전히 하나님의 인격으로 받아 드리고 있으며, 또한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소유해야 할 인격임을 주장하였다.
(
성령은 하나님의 인격 고전6:17; 고후1:21-22; 엡4:30; 갈6:8.)

 

    B. 성령의 신성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여 바울은 성령의 신성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이란
구절들을 성령으로 설명하였다.(
성령의 신성 행28:25 (참고 사6:5-10).)
고린도후서 3:17 에서 "주는 영이시니" 그 본질, 목적, 권능에 있어 성령은 그리스도와 동일시 되고 있다.
(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롬8:9-11 (참고 요6:63 12:49-50, 요일5:7, 요17:17).)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설립 자체가 성령의 신성임을 증명하고 가르쳤다.
(
성령과 교회 고전3:16 6:19, 엡3:10-11; 딤전3:15.)
이러한 성령의 신성은 성령의 인격성을 주관 역사하신다고 믿었다.
(
성령의 역사는 고전12:4-7; 롬8:9-10; 고전2:10, 12-14; 갈5:22-23; 고후3:17-18; 엡2:22 3:16.)

 

    C. 성령의 동등성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동등성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삼위로 구별되고 있다.
그러나 이 삼위는 일체임을 강조하고 있다.(
삼위일체인 성령 엡4:4-6; 고후13:13.)

이와같이 바울의 주장은 그이 교리와 신학적 기초를 그리스도 안에 형성하고 있으며, 그의 교리가 인간을 죄에서
구속시키는 게획과 개념을 주관하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20-22절에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여 성전이 되어가며, 또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예수 안에서 지어져 감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연합은

① 영적 연합이며 한 성령의 머리와 지체의 연합이며, 실재적인 것으로 우리는 예수의 몸에 지체인 것이다.
(
영적 연합 고전12:12-13 롬12:5; 엡4:15-16.)

② 신비적인 관계이며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전이요, 또한 성령의 전이다.(성령의 전 고전3:16 6:19.)
항상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를 믿고,(
내 안에 예수 갈2:20; 롬8:1-29; 고후13:5.) 우리의 생활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되어,(
그리스도로 옷 입음 롬13:14; 갈3:27; 골3:10.)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
새로운 피조물 고후5:17; 엡4:23-24, 영적인 몸 고전15:44-49.)

③ 영원한 관계이다. 한마디로 이 영원한 관계는 생명의 원천을 이루는 연합으로서,(영원한 관계 롬8:38-39; 히5:8-9
(참고
요일2:24-25).)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의해 보호된 모든 은혜에 동참하여 영광스러운 부활에까지
동참할 수 있는 연합 관계이다.(
연합 관계 롬6:2-10; 고후4:10-11.)
이 연합관계는 하나님의 말씀의 인간의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를 이루어 계속 역사할 때
구원의 성취를 얻게된다.(
구원의 성취 엡2:8-10 3:16-19 (참고 요1:12-14, 마10:22 24:13).)

 

  7. 바울의 구원론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구원의 교리를 제시하고 있다.
죄악 속에 사는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구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A. 구원의 필요성과 죄

 

바울 신학사상에 있어서 죄의 정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의 진화 과정의 결핍, 주위 환경의 영향, 교육, 기타 지상에 어떠한 방법으로도 죄악의 만연과 그 위력 및 도덕적
비열성을 설명할 수 없다.

선을 알지 못하고는 악을 설명할 수 없다.
즉 선의 반대가 악이며 죄이다.

바울은 죄에 대한 실체와 본성을 정의하여 그 기준을 만물의 창조 주이신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을 불순종할
때 이를 죄라 정의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는 어떠한 죄도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
(
죄는 심판 대상 롬2:6-9 3:19; 살후 2:12 (참고 요8:31-32).)

바울 신학사상에 있어서 죄의 권능은 율법이며, 죄의 삯은 사망이라 했다.
(
죄의 권능은 율법 롬3:20 4:15 7:7; 고전15:56, 죄의 삯은 사망 롬5:12 6:20; 고전15:56.)

이와 같이 바울이 율법과 죄를 긴밀하게 연관시켜야 했던 것은 율법이 죄를 만들어 낸다는 두가지 관념에서였다.
즉 율법은 죄를 규정짓는다.
따라서 율법이 없는 곳에는 죄가 성립될 수 없다.

성경에는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했으며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율법이 없을 때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율법으로 죄 깨달음 롬3:20; 갈3:22; 롬5:13-20.)
율법이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율법을 범한 사람은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런 의미에서 율법은 죄를 만들어 낸것이 된다.

바울은 로마서 7장 7-11절에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죄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기회를 탔다" 하였으며, "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이라 전에 내가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을 얻게 하려고 마련된 계명이 죽음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되었다.
죄가 바울을 속여 그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도록 한 것은 율법을 통해서였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와같이 율법은 죄를 규정하고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죄를 만들어 낸다.
율법은 어떤 것을 금함으로서 그것을 하려는 일에 대한 욕구(호기심)를 일으킨다.
바울이 주장한 대로 율법이 없으면 죄가 있을 수 없다.

죄와 율법은 그처럼 긴밀하게 뒤얽혀 있기 때문에, 죄는 불순종인것이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규정이 되는 것은 그 사람의 불순종 때문이다.(
롬 5:19)
이러한 불순종은 자기만족 즉 육신의 욕심을 성취하기위해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게 되며 그결과는 "욕심이 인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참고
약1:17)했다.

바울이 보았던대로 죄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죽음을 낳는다.
즉 그것은 도덕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에서 죽음을 낳는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또한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하였다.(
죄가 사람 죽임 롬7:11 8:10.)

죄에는 죽이는 능력이 있다.
그것은 선을 죽이며, 또 인간의 사랑과 친교를 죽이며, 양심과 인격을 죽인다.
이와 같이 죄는 도덕적인 죽음과 영적인 죽음을 낳을 뿐만 아니라, 죄는 또한 육체의 죽음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바울은 말하기를 만일 죄가 없었다면 사망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망은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다."
"죄는 사망 위에서 왕노릇했다."
인간이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게 될 수 있다."
즉 "죄의 대가는 사망이다"고 한다.(
죄의 대가는 사망 롬5:12 5:20 6:16-23.)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죄 짓고 불순종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떠나, 죄의 권세 아래 속하여 타락하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데 바울은 이러한 죄와
타락의 근원을 아담으로 기인하였음을 강조하였다.(
죄는 아담으로 왔음 롬5:12-14 1:21-25,32.)

즉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누구든지 하나님의 법 아래 있지 않는 자들은 (불순종하는 자들) 죄에 매인 종들이며 억제할 수 없는 정욕의 희생물이
되어 죄와 악으로 타락하여 사망을 면치 못하게 되며, 불완전한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 받을 길이 없게 된다.
여기에는 반드시 죄에서 인간을 구속할 절대적 능력을 가진 능력자, 즉 구세주를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B. 구원의 도구(복음)

 

죄악된 세상에서 인간이 구원되는 도구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으로서 이것은 구약시대에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서
약속되었으며,(
구약 시대 예언 창22:17-18 (참고 롬1:2-4, 16:25-26, 갈3:15-16); 사11:1-2 (참고 마3:16; 눅3:21-22); 사7:14
(참고
마1:23).) 신약시대에는 사도들을 통해서 선포되었다.(신약 시대 선포 행2:29-32 4:10-12; 롬1:16; 고전1:18 1:24
15:3-8; 빌2:6-11; 엡2:1-5 (참고 마1:21-23, 눅2:10-14, 요3:16-17).)

이 복음이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 하심과 독생자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행하신 초자연적인 소식을
말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8절에 "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람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했다.

이로 볼 때 복음은 이미 아브라함을 통하여 계시되었고 또한 약속되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계시하고 약속하신 복음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하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가르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였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되시는 그리스도이심 롬1:16; 고전1:24.) 하였으며 로마서 1장 2-3절에는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 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의 혈통(씨)에서 육신의몸(성육신)으로 태어나심을 강조했다.
또한
갈라디아서 3장 4-5절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를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다시 말해서 로마서 8장 3-4절에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한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죄있는 인간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그는
빌립보서 2장에서 말했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복음)이라" 강조하였으며 더욱이 에베소서 1장 20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기록하였고,
로마서 1장 4절에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라고 증거하였다.

그는 또한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희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했다.
죄 많은 인간이 구원 받아 새 생명 얻는 길은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하였다.(
그리스도와 연합 엡6:39 13:14; 갈3:27-29.)

다시 말해서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마지막 아담 고전15:45 (참고 요5:21 6:33).) 이와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 롬1:2-4 1:16; 고전4:15; 엡1:12-14; 딤후3:14-17.)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의 능력을 행하시는 도구 및 수단이므로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시며 절대 불가항력인 하나님의
능력이다.

 

    C. 구원의 방법(칭의)

 

복음에서 계시된 인간 구원의 방법은 하나님의 의에 "의"한 것이다.(칭의 롬1:17 3:21-26, 갈2:16; 엡4:23-24; 고후5:21;
롬10:10; 행13:37-39.)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였으며, 그는
디도서 3장 5절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으니" 했다.

또한 바울은 로마서 3장 23-26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하였다.

로마서 10장 9-10절에 "네가 만일 네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하였다.
이는 바울이 자신의 과거의 경험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바울의 의한 체험 고전15:3-8; 딤전1:13-16; 빌3:5-9; 행13:27-29.)

그는 빌립보서 3장 5-9절에 "내가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하였다.

사도행전 13장 38-39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했다.

고린도전서 15장 56절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하였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과거에 자신이 사망에 속하였던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으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 자처하던 자신의 잘못을 자인하였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하였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이며, 이 의는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의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키며
인간의 소망을 완전히 채워 주신다.

이렇게 인간의 소망을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켜 에베소서 2장 7-8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서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한다.
바로 이 의는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인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로와 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 롬3:21-26 4:25 고전1:30; 고후5:21; 갈2:16 3:11; 빌3:9
(참고
벧전3:18; 요일2:1-2) 하나님의 선물 롬5:17-19 10:4; 엡2:7-8 (참고 요3:16 4:10).)

바울의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말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도 하나님 앞에 의로 여김을 받는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의로 여김 받은 우리들에게 바울은 로마서 6장 13절에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지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로마서 8장 30절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의로 여김 받은자가 받을 은혜에 대해 말했다.

 

    D. 구원의 수단(신앙, 믿음)

 

바울은 인간이 구원을 얻는 유일한 보증적 수단은 오직 예수를 유일한 구세주(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에 두고 있다.
회심 후 바울은 구원관의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맞추었다.
이러한 철저한 믿음의 확신은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살아계신 예수를 직접 만남에 기인한다.
그는 오직 예수만을 유일한 구세주(그리스도)로 믿게 되었다. 바울의 이러한 믿음 사상은 그의 서신들에서 증명된다.


      1) 예수의 성육신에 대한 바울의 신앙사상

바울은 예수의 성육신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4장 4-5절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했으며,
로마서 8장 3-4절에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여,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죄있는 인간의 몸으로 보내셨다 하였다.

또한 그는 디모데전서 2장 4-5절에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는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 하신 오직 한 분이신 예수를 지적하였으며, 인간이 구원을 얻는
유일한 수단은 오직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에 있다고 말한다.
 

      2) 보혈로 이룬 구속에 대한 바울의 신앙사상

바울은 갈라디아 1장 4절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하여 구세주로 오신 예수는 인간들을 죄악 세상에서 건지기 위하여 자기 몸을
희생하였다 하였으며,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 받았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 하였다.

뿐만 아니라 로마서 3장 24-25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 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의 피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음을 확신하고(화목제물 롬3:25; 엡2:16;
(참고 요일2:1-24:10; 마20:28).) 바울 자신을 완전히 그리스도에게 내어 맡기었다.
(바울의 확신 롬8:38, 14:7-8; 고후5:13-14; 갈2:20, 6:17; 빌1:20.)

이로 볼 때 오직 바울의 직접적인 신앙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궁극적인 대상은 하나님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이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3)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바울의 신앙사상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4-8절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들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이와 같이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누구보다도 자신있게 확신하였다.
이는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사건에 기인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5장 17-21절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하였다.

또한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0-11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그의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갈라디아서 2/20
에 말했다.
그는
갈라디아서 3장에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받는 세례로 표현하였다.

바울은 이를 설명하여 로마서 6장 3-5절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하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으며,(하나님과 화목
엡2:8-10 롬5:10-11; 고후5:18-20; 골1:19-15.) 또한 우리들의 믿음은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연합 롬6:5; 고전1:10 6:17; 엡2:20-22; 갈3:27; 고후5:17.)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고난을 받음으로 그와 연합하여 부활함을 확신하고 실천하였다.(부활을 본받아 연합
롬6:5; 고후4:11; 갈2:20; 빌3:10-11.) 바울은 인간이 죄에서 구원받는 유일한 수단으로 오직 확고한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E. 구원의 결국(성화)

 

바울의 구원 사상에 있어서의 핵심은 "주 안에" 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죄가 사해지고 의롭게 되며 죄 많던 인간이 그의 은혜로 거룩하게 되고 성화(
성화 고전6:9-11
3:16
-17; 살후2:13; 엡2:22 요17:17;)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되기 위해서는 에베소서 4:24에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였으며 골로새서 3:12-14에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한다.

또한 이를 지키는 자는 에베소서 2:23에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했다.
다시 말해서 로마서 6장 11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자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지니라," 표현하였다.

이 성화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신자가 도덕적으로 정결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안에서 거룩해짐을 성화 또는
거듭난 성도라 표현하고 있다.(
성화의 표현 롬6:11 6:22; 고전3:16-17 엡4:23-24; 고후5:17; 골3:9-10. 성도 롬1:6-7;
고전1:2; 엡2:19; 골3:12.)

그러므로 단순히 하나님께 성별되어 택한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믿어져 그 은혜가 우리 마음에
들어옴으로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은혜 롬3:24; 엡2:7: 딛3:4-7; 살후2:16-7 (참고 요1:14-17).) 이로 인하여 신자들이
마음의 악한 생각과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된다 하였다.(
해방 고후3:17; 갈5:113 (참고 요8:31-32).)

바울은 로마서 8장 1-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에 법에서 너희를 해방하였음이라" 하였으며, 갈라다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죄의 종)의 멍에를 메지말라"
하였고, 또한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는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신 은혜와 진리 안에서 거듭난자 되어 그 안에서 지혜를 얻어 의와 거룩함으로 날로 새로와 지게 된다.
(
새로와짐 엡4:24; 고후5:17; 골3:10; 롬12:2.)

그러므로 성화는 하나의 은혜의 역사과정으로서 그 출발이 중생과 함께 시작되지만 죽음에 이르러서야 완성되는 것이다.
바울은 디도서 3장 4-5절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시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하였다.
즉 중생을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형성되지만 모든 부분에서의 완전성은 아직 부족한 상태이다.
(
부족한 상태 롬7:22-24; 빌3:10-12; 히5:12-14.)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0-12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 하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러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 하여 자기의 부족함을 말했다.

그러나 성화를 통해 모든 부분에서 거듭나 성장하며 활기와 적극성을 얻게 되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완전한
인간상태로 온전하여 지게 된다.(
완전한 인간이 되기까지 엡5:15-17 4:13-16; 고후7:1; 골3:12-14;)

바울은 디도서 3장 6-8절에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우리로 저희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에게 유익하니라" 하였다.

또 에베소서 4장 1-3절에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하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였고, 에베소서 4장 29-30절에는 "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하였다.

그러므로 성화는 믿는 자에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동시에 믿는 자로서 하나님께 대한 의무이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7장 15-19절과 24절에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니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함이니이다."

이어서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니다" 하여, 제자들에게 성화(거룩하게됨)하도록 기도를 중재하셨다.

바울도 에베소서 3장 14-19절에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그는 기도했다.

또한 골로새서 1장 4-5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하여, 이 성화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깨달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 하였다.
(
행하시는 하나님 빌2:12-14; 고전3:7 (참고 잠16:9).)

구체적으로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믿는 자들의 지혜와 계시의 영에 의해 점차 마음의 눈이 밝아지게 되며,(마음의 눈
밝아짐
엡1:17-19; 행26:16-18; 히10:32 (참고 눅11:34-36).) 또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소망을 가지게 되며,(하나님의
뜻 분별
롬12:2; 엡5:10 1:8-10; 살전4:3 (참고 요일2:17).)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며 거룩하여지게 된다.
(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엡1:4-6 골3:12-14; 롬5:8 살후2:13; 살전4:9 (참고 요3:16; 요일4:9-10).)

예수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해서 보다 분명하고 온전히 깨닫게 되며 생명력이 있는 믿음 안에서 장성하게 된다 하였다.
(
온전한 신앙으로 장성 엡4:13 히5:13-14; 골1:27-29; 롬12:1; 고후13:5; 고전14:20; 딤후3:15-17 성령을 힘입어
성화됨
고전3:16-17 고후1:21-22; 롬8:27,살전5:19-23; 엡4:29-30.)

또한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6-29절에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하였다.

바울은 이러한 영광의 소망을 주를 믿는 신자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 따라 힘을 다해 수고한다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완전한 자 골1:25-29; 살전5:23 (참고 요17:23).)

또한 그는 고린도후서 1장 21-22절에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하였으며,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하였고
로마서 12장 4-5절에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니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하였다.

바울은 이러한 거듭남의 역사(성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령의 역사로 증언하고 있다.
(
성령의 역사 고전2:10-14 6:10-11; 고후1:21-22; 롬8:26-27; 갈5:22-23; 엡4:30; 살후2:13-14; 딛3:4-7 (참고 요14:25-26).)

뿐만 아니라, 바울은 주 안에서 우리의 몸도 거룩하게 됨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요, 그리스도의 지체로 표현하고 있다.
(
몸이 성령의 전, 예수의 지체, 고전3:16-17 6:19 12:12-13, 롬12:4-5; 엡5:29-30.)

그러므로 성령의 전이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고 봉사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였다.
모든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하게 연합되고, 따라서 서로서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아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
그리스도와 연합된 공동체 엡2:20-22; 고전6:17 12:27; 롬6:5; 갈2:20.)하였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44절에 "육의 몸으로 심고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적인 몸이 있느니라"
했고 고린도전서 2장 12-14절에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친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야 분변함이니라"
하였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우리의 몸도 영광스러운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삶을 선포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썩을 몸을
자신의 영적인몸, 영원한 영광의 몸에 동참하도록 변화시킨 것이다.
(
영적인 몸 고전15:42-49; 빌3:21.) 하였으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라(
만물을 복종케 함 고전15:28; 빌2:6-8 3:21; 엡1:20-22.) 하였으며 이것이 성화의 과정에서의 영광스런
결실이라 하였다.

또한 그는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했으며 로마서 8장 1-2절에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되면 새로운 피조물(새로운 피조물 고후5:17; 고전15:44 골3:10; 롬8:1-2.)
즉 죄로 말미암아 썩어질 몸이 해방되어 영적인 몸으로 변화하여 완전한 새 것으로 성화된다고 한다.

 

  8. 바울의 교회론

    A. 교회의 개념

 

교회에 대한 개념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베드로를 통하여, 완전한 교회상을 예언하였으며
이 예언은 오순절에 모였던 제자들을 통하여 실현되었다.(
교회에 대한 예언과 실현 마16:16-19; 행1:4-5:)

회심이후 교회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실제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에 대하여 높은 차원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디모데전서 3장 15절에서 표현되었듯이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가르침으로 교회를 소중한 것으로 존경하도록 하였다.
또한 바울의 서신들을 통하여 진정한 교회의 정의는 정립되었다.(
교회의 정의 엡1:21-23 2:20-22, 딤전3:15.)

 

    B. 교회의 정의

 

바울의 서신들은 우리들에게 교회에 관한 바울의 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었는가를 파악할 수 있도록 풍부한
재료들을 제공해준다.
바울의 서신들 가운데 "에클레시아" 곧 교회라는 말이 60회 가량 기록 되어 있다.

바울은 이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예배와 신앙 교육을 위하여 어떠한 특정한 장소에 함께 모인 지역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묘사하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교회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 예배하는 백성들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백성들을 묘사한다.

결국 바울은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교회 곧 모든 지역 모든 나라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 전체모임을
가르키는 말로 사용했다.
그는 교회를 통하여 보게 될 하나님의 다양한 지혜에 관해서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에
관해서 말했으며(
엡 3:10-21)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주셨으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였다.
(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엡1:22-23; 골1:18.)

바울은 교회라는 말을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고 삶을 바친 사람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단어로 사용하고 있다.
신약성경 가운데 교회라는 말을 하나의 건물을 뜻하는 말로 사용하고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신약성경에서 교회란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을 드리고 삶을 바칠 것을 서약하며 예배하는 사람들의 회합을 가리킨다.

 

    C. 교인에 대한 호칭

 

바울은 교회형성의 기본이 되는 교회의 교인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말들 가운데 나오는 교회의 교인들을
가르키는 세 가지의 호칭들이 바울의 서신들 가운데 끊임없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호칭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성도들": 서신들 중 가장 잦은 호칭

바울 서신에서 교회의 교우들을 가리켜 성도들이라는(성도들 롬1:7 8:27 12:13, 고전1:26: 14:34 16:1; 고후1:1 엡1:1;
빌1:1; 골1:24, 살전3:13; 살후1:10; 히6:10,) 말로 40회 가량 불렀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 16-17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을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하였다.

이로 볼 때 교회의 교인들도 거룩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도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믿지 않는 일반 사람들과는 구별되어 있음을 뜻한다.
비록 세상 사람들과 같이 세상에 살지만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성도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명령들을 끊임없이 신중하게 듣고 그 명령들을 지키려고 애쓰며 사는 삶을 말한다.
그의 삶은 여전히 세상안에서 사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의 전체 생활은 세상을 기준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삼고 사는 삶이다.

성도들이라는 말은 실제로 그리스도께 헌신한 사람이란 뜻이다.
교회의 속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친사람들이다.
 

 2) "형제"들: 그리스도인들을 가르키는 호칭

바울은 서신들에 마지막에 형제들 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였다.(형제들 롬1:13; 고전1:1 고후1:1; 갈1:2; 엡6:21;
빌1:121; 골1:1; 살전1:4; 살후1:3; 딤전4:6; 딤후4:21; 히2:11.)
여기에는 교회는 형제들의 무리가 됨을 뜻하는 위대한 진리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테두리안에서 성도들이 서로 형제가 됨을 뜻한다.

만일 어떤 교회가 영적으로 내적으로 분열되어 있다면, 그러한 교회는 교회로서의 존재가 중단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형제의 관계가 아니라면 그러한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형제들의 무리가 되도록 계획하셨다.

      
      3) "신자들": 믿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호칭

다시 말해서 교회의 회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을 사실로 받아 들이는 자요, 또 그 말씀이 참되도다라는
확고한 전제 위에 삶을 영위하는 자이다.(
신자 또는 믿는 자: 행10:45; 롬1:6, 고전1:21; 갈3:22; 살전2:10; 살후1:10.)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혼의 구세주가 되심을 확신하며, 또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생의 주님으로
삼는 자이다.

이와같이 호칭받은 자는

① 세상과 관련해서; 교회 성도는 그가 그리스도의 기준들 앞에서, 그 기준들을 따라서 산다는 점에서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다.

②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관련해서; 교회의 회원들은 형제애를 가지고 교제하며 생활하는 사람을 말한다.

③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교회의 회원은 그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베푸신 그리스도의 희생과 또 그의 생을 위해서
명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아 들인 사람을 말한다.

이와같이 바울의 서신들에는 교회의 교인을 가르켜 "성도들,형제들,신자들, 또는 믿는 자들"이라 호칭하였다.

 

    D. 교회의 근원

 

바울은 그의 서신들중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는 그의 몸이라 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모든 권위와 영적 역사의 근원이 된다 하였으며,(
교회의 근원 엡1:22-23; 골1:15-18) 또한 그는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일체성을 새롭게 이해하게 하였다.

그는 로마서 12: 4-5 에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하였으며, 고린도전서 12장 27절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부분이라" 또한 고린도전서 6장 17절에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의 신학적 사상으로 보면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와 절실하게 연관되는 개인으로서 구성되며, 또한 교회에
속한 각 신자들은 서로를 한 연결체와도 같이 분리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같은 몸의 지체인 그리스도인들은 형제간에 서로 죄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형제간에 죄짓지
말것
고전8:13; 갈6:1-2, (참고 요일2:1-2 4:20)) 서로가 서로를 자기몸과 같이 생각하며 상부상조 유무상통하는 모임이
바로 교회이며,(
상부상조, 유무상통, 행2:44-47 4:32.) 또한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적 사랑의 목적이 교회인 것이다.
(
희생적 사랑 엡5:1-2; 고후5:14-14 (참고 요일3:16).)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신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다.(하나님의 권속 엡2:19-22; 빌3:20.)

또한 바울은 고린도후서 9장 12절에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이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하였으며 에베소서 5장 26-27절에 "이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하심이니라"

이와같이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해 봉사의 직분을 마련했으며,(교회의 봉사 엡4:11-12 (참고 벧전4:10-11).) 또한
교회를 흠 없게 하시어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고저 하신다 하였다.

또한 그는 디모데전서 3장 15절에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 하고, 에베소서 3장 10절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심이니" 하였다.
교회는 구원의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하나님 자신의 공동체이시며,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는 교회에 의해서 알려지게
되며 교회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지게 된다.(
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교회 엡3:10-12 고전6:19-20.)

또한 바울은 에베소서 2장 20-22절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위에 세움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하였으며 고린도전서 6장 17절에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하였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교회란 외적으로는 구원받은 무리들의 모임이며, 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인류 인종차별
없이 주 안에서 연결되여, 성령으로 한 몸되어 완전한 하나를 이루는 것이 바로 교회이며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본체이다.(
하나님의 기본체 엡4:4-6; 고전3:16-17.)

 

    E. 온전한 교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완전한 교회란, 아담과 이브가 타락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에덴의 재창조이며 바로
완전한 교회인 지상천국을 말한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19-20절에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하였으며
로마서 5장 10절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또한 에베소서 1장 7-12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했다.

뿐만아니라 그는 디모데전서 2장 4-5절에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하였으며
갈라다아서 3장 20절에는 "중보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하였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피조물인 저주받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코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인간들의 죄와 사망에서 구원시켜 하나님과 화목시키려는 중보자의 역활을 담당하게 하였다.
중보자로 오신 예수가 자신을 집자가 상의 제물로 받쳐 그의 흘린 피로 타락한 인간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였다.
(
화목 제물 롬3:23-26; 엡2:13-18; 히10:10-14.)

예수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인간은 다시 창조 당시의 본 모습인 그 아름다운 조화로 회복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화목의 역사는 바로 하늘과 땅이 하나되는 완전하 교회상이다.
(
하나되는 완전한 교회 엡1:7-13 고전12:12-13.)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5-29절에 "내가 교회의 일군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옮으로 감추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니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내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하였다.

또 골로새서 1장 24절에는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하였다.

바울의 이러한 확고한 교회관은 그로 하여금 더욱 선교에 대한 의식을 굳게 하고 주어진 사명에 더욱 충성하게 하였다.
바울은 이 복음의 사명을 땅 끝까지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자기의 육체에 채운다고
하였다.(
몸된 교회 골1:18 1:24; 엡1:22-23.)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관은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지상명령으로 알고
사명에 충성하였다.

 

9. 바울의 종말론(그리스도의 재림)

 

바울의 종말관 사상은 구약성서에 뿌리 내리고 있으며, 그 당시의 어법을 사용하고 있다.
(
이사야 선지자의 경고 사13:6-10; 살전5:3.)
바울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그는 그가 배운 유대 학문과 유대교적인 교육을 통해서 얻은
언어를 종종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특히 이사야 26장과 27장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우리는 그 구절들 간에 뚜렷한 병행적인 성격을 볼 수 있다.

1. 주의 오심: 사26:21; 살후2:1

2. 심판의 임함: 사26:21; 살후1:9 2:8

3. 죽은자의 부활: 사26:19; 살전4:16

4. 나팔소리: 사27:13; 살전4:16

5.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불러 모으고 회집할 것, 이는 마지막 날에 관한 유대사상의 필수적인 요소였다.:
사27:12; 살전4:17

또한 기본적으로 독특한 특징과 초점에서 전개시킨 바울의 기독론의 연장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
기독론의 연장 갈4:4-5; 엡1:4-5, 빌2:13-16 (참고 요1:10-12))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하나님의 정한 때에 인간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셨으며, 하나님의 예정하신 대역사를 진행하셨다.
(
사람의 몸으로 오셔 빌2:6; 딤전2:4-5; 롬1:1-4 (참고 사8:14 11:1-5; 마1:23) 죽으심과 부활 롬1:4; 고전15:3-4 엡1:20-21
(참고
눅24:5-9).)

즉 예수의 탄생, 천국 복음 전파, 십자가에 죽음, 부활, 그리고 신도들(그리스도인들) 속에 있는 성령의 역사는 전체 구속
과정을 성화시켜주는 "첫열매"이요 마지막 완성에 대한 확증이라 하였으며(
처음 익은 열매 예수:고전15:22, 성도:롬8:23
마지막 완성
히12:1-2 10:9-10.)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들과의 휴거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
예수가 말한 휴거 요14:1-3 5:25-29.) 그리스도의 재림 곧 휴거에 대한 바울의 사상은 오직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복음에 근거한 재림 고전15:51-54; 마24:30-31; 살전4:15-17; 마24:30-31; 살후1:5-10; 눅17:29-30; 살전5:23;
요17:17.)

바울의 종말론은 그가 목회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변천을 보이고 있다고들 주장하고 있다.
미래의 휴거를 크게 강조하는 묵시주의로부터 현재 속의 완전과 죽음에 임했을 때의 불멸성을 강조하며 보다 세련된
이해로 성숙해 간다는 것이다.(
현재의 자신 확증 롬8:9-11 고후1:21-22 13:5; 갈2:19-20; 빌1:20-21.)

그러나 바울에게서 발전의 증거로 인용되는 여러 요인들은 사실상 시종 그의 서신들 속에 함께 나오는 것이지 서로
대조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바울의 종말관이 초기에 기록한 서신들과 말기에 기록한 서신들 간에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이 그 사상을 탈피하거나 혹은 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바울의 종말관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사상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있었다.
바울의 서신들 중에서 가장 먼저 쓰여진 서신은 데살로니가전후이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고민거리의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이미 죽은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문제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5절에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 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하여 바울은 그들에게 답변하면서
그들을 확신시켰다.

또한 바울은 자신의 생애 동안에와 자기가 전한 서신의 내용을 읽는 모든 사람들의 생애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 하였다.

이 서신가운데 주의하여 볼것은 몸에 대한 언급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들이 몸을 갖고 있는 상태로 살아서 있을 것을 기대했던 점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성도들과 자신의 생애 동안에 있게 되기를 기대했다.
따라서 그의 초기의 서신들에 보면 그의 전도 설교가 개종자들에게 미래주의적 색채를 담고 있다.
(
예수 재림 살전1:10 3:13 살후1:8-10.)

그러나 바울의 중반기 서신들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는 신자들 마음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에 의해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역설하고 있다.(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삶 롬6:6-9 고전3:16-17 6:19-20; 고후13:5; 갈2:20; 빌1:20-21)
고린도전서 및 고린도 후서와 로마서에 인간의 죽을 때 체험할 육체와의 분리, 그리고 주와의 공존을 말하면서도
(
영적 구원 고후5:1-10; 고전15:44 (참고 벨전1:9).) 그리스도의 재림때에 이루어질 완성, 온전을 강조하고 있으며,
주의 강림을 고대하는 성도의 교회생활을 바라고 있다.
(
재림 기대하는 생활 고전15:51-53; 고후4:16-18 5:1 (참고 살전5:22-24).)

하지만 로마 옥중에서 쓴 후기 서신들을 보면 끊임없이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의 몸"을 주장하면서도 주님의 재림의
날을 고대하며 비천한 우리 몸을 변화시켜 주님의 영광스런 몸과 같이 만들어 주실것을 믿고 있다.
(
영광의 몸으로 고전15:43; 고후4:14-16; 빌3:20-21.)

목회서신에서도 현실에 관한 교회적 관심을 강조하고 있으면서도, 또한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으로 오실 복된 소망의 날을 기다리게 한다.(
영광으로 오시는 날 딛2:12-13; 딤후4:6-8.)
그의 기독교 신앙 경험과 목회를 일괄해서 변함없는 것은 미래에 대한 바울의 신앙 사상의 중심점은 바로 재림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신앙사상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의 영원한
연합을 의미하며 성도의 몸의 부활을 의미한다.
이로서 성도의 죽을 몸이 "그의 영화로운 몸처럼 되도록" 변화(성화)를 받게 되며 이는 성도들이 부름받은 아들로
완성됨을 뜻하며(
그리스도와 연합한 영화로운 몸 롬8:28-30; 고전15:42-49 6:7; 빌3:21; 살후1:11-12; 엡2:20-22;
고전12:12-13.) 뿐만 아니라 휴거는 심판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 구원에는 심판이 영향을 끼칠 수가 없다.(믿는 성도는 심판에 영향 안받음 롬8:1-2;
고전3:13-15; 롬8:38-39; 살전5:4-6 (참고 벧전4:5-6; 요일5:18; 계20:6).)
따라서 그리스도를 떠난 자들에게는 휴거가 심판으로 임한다.(
심판 대상자 롬3:29; 고전16:22; 살후1:8-9 2:12
(참고
벧후2:9; 계20:12; 요5:27-29).)

이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에는

    ① 이방인의 완전한 수가 달성됨 ; 롬11:25, (참고 계6:11)
    ②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최종적으로 실현됨 ;
    롬11:26-27
    ③ 피조물이 인간의 죄로 인해 받던 운명의 쇠사슬에서 해방됨 ;
    롬8:19-21 (참고 계21:3-4)
    ④ 모든 권세가 예수께 굴복함
    고전15:27; 엡1:21-22; 빌3:21
    ⑤ 죽음 곧 마지막 원수가 파멸된다. ;
    고전15:24-25 (참고 계20:14)
    ⑥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굴복당하게 될 때 아들자신도 당신에게 모든 것을 굴복시켜주신
    하나님께 굴복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게 됨.
    고전15:28; 엡4:5-6

주께서 죄악 세상에 구세주로 오신 그리스도의 역사적 성취는 이미 완성된 일이다.
그러나 주님의 역사는 지금도 살아서 계속 우리들에게 성령으로 도우시고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소망을 견고케하시며
믿음의 결실을 이루게 하신다.
그의 정점(클라이막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종결 짓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지금도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새 생명 가운데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체험하고 있다.
따라서 성도들의 하나님의 참 아들로 완성되며, 구원의 계획의 완전 성취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바울은 이것을 열망하며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렸다.
(
바울의 심정 롬8:24; 빌3:10-14; 딛2:11-13; 살전5:23-24; 히3:13-14 12:1-2; 고후4:16-18;)

  

 

 Ⅳ. 결 론

철저한 율법주의자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권적인 역사로 인하여 복음의 사도된 바울의 신앙사상 중심을 흐르고
있는 그의 독특한 윤리관을 끝으로 고찰하여 "바울신학"을 결론 짓고자 한다.

바울의 신앙사상 중심을 흐르고 있는 그의 윤리관은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한 그 안에서
"바울신학"이 정립되고 있다.
이와같이 바울은 철두철미한 신앙사앙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A. "그리스도 안에" 있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에 기초하고있다.

인간이 하나님앞에 구원받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새피조물 롬8:1-2; 고후5:17)
이같은 기반을 떠나서는 바울의 신앙윤리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하였다.
(
바울의 신앙 기반 롬6:3-6 14:7-8; 고전6:17 고후5:14-17; 갈1:11-12 엡4:21-24; 빌3:7-9)  

B. "그리스도의 법"과 "그리스도의 정신"의 상관 관계를 통하여 인도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표는 "그리스도의 법"과 "그리스도의 정신" 양자의 관계속에서 진행된다고 한다.
(
그리스도의 법 갈6:1-2; 히10:16 (참고 요13:34; 요일3:16)) "그리스도의 법"은 예수의 교훈이 " 하나님의 법"을 성취하는데
참된 방법론이며(
하나님의 법 성취 방법 행13:37-38; 고전2:10-11; 롬6:13 엡5:1-2; 살전5:14-18) 또한 예수 자신이 친히
본이되어 " 하나님의 법"을 실현하였다.

고로 "그리스도의 법"은 바로 " 하나님의 법" 안에 성취됨을 강조하고 있으며,(그리스도를 본받자 롬15:5-6; 고전11:1;
엡5:2; 갈3:27; 빌3:10-14; 골3:1-3; 살전1:6-7.) 그리스도를 본 받는 성도에게 있어 모세의 율법은 불필요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모세의 율법 필요없다. 롬7:5-6 10:4; 갈2:16 3:23; 히10:1 12: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는 예수의 새계명(그리스도의 법)은 모세의 율법과의 연속성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다
확실히 입증하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원칙들 의외적 표현이라 하였다.(
그리스도의 법은 율법의 완성
롬10:4 13:8 히10:9-10 (참고 마5:17).)

그리고 우리들의 삶에 대한 길과 방향을 지시해 주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정신"인 성령께서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식별할 수 있게 하며,(
고전 2:10-14) 각각 윤리적 판단을 갖추도록 한다 하였다.
(
윤리적인 판단 롬12:2 고후5:8-10 7:1; 엡4:29-32 5:15-17; 살전5:19-22.)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정신"과 "그리스도의 법"은 조화를 이루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향이 정해진다고 하였다.
  

C.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법" 자체이며,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향을 결정 지어주며 이를 실천하도록 인도 하신다 하며,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자비하심과
참사랑을 알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신다 하였다.
(
참사랑 알게 하심 롬5:8 12:9 엡2:3-5 (참고 요일3:16 )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케 함 롬15:5-6; 엡1:3-6 빌1:11; 골3:16-17;
히13:15.)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윤리적 근거를 계시하고 있다 하였다.
  

D. "그리스도의 영" 역시 그리스도인의 삶에 소망과 용기를 제공한다.

"그리스도의 영" 역시 "그리스도의 사랑"이 성도들의 윤리적 삶의 근거와 맥락을 제시해 주듯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께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소망과 용기르 제공해 준다 하였다.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또한 성령을 통해서 우리 죽을 몸들에게 생명을 주신다
하였다.(
하나님의 영(성령) 즉 그리스도의 영임 롬8:9-14, 고전2:10-12, 고후1:21-22; 엡1:13, (참고 요4:24 6:63 14:16).)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영"을 힘입어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적 근본을 이룸을 강조하고 있다.  

E. 이와같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적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여사적 성취를 통해 이미 이루어졌으며 그리고 아직 이루어져야할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완성을 위한
긴장 속에 전개되고 있으며, 이같은 긴장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살고 있다.

그러므로 "첫사람 아담 안에서" 죄인되었던 우리들은 또한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속죄받음을 늘
자각하며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의 현재에 대한 승리와 전망과 그리고 궁극적 하나님 나라에 자녀되는 대망을 품고
소망 가운데 모든 환난을 믿음으로 감수하며(
소망으로 환난 감수 롬5:1-4 8:24-25, 딤전6:11-12; 히10:34-36
(참고
약1:2-4 벧전 3:17 ).)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어 간다 하였다.-

 

 

 참고 문헌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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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Barclay, Willam,The Mind of St.Paul, 서기간역, [바울의 인간과 사상], 서울:기독교문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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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영혼의 비밀>

출처 : 믿음의 문학
글쓴이 : 靑野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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