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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구약성경에 나타난 부활의 희망

류성련 2010. 7. 30.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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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에 나타난 부활의 희망 
 

 


구약성경에 내세와 부활에 대한 관념이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문제에 대해 학자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가스터(T. H. Gaster) 등은 구약성경에 내세와 부활에 관한 사상이 나타나지 않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이들은 헬라시대가 되기까지 이스라엘에서 부활 사상이 발전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스케프(J. A. Schep) 등은 구약성경에 내세와 부활에 관한 사상이 나타난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들은 구약성경 속에 조금 모호한 것으로부터 매우 명료한 구절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것이 다양하게 들어있다고 주장한다. 이 글에서 필자는 후자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스케프의 저서 <부활체의 본질> 제2장 '구약에서 본 부활체'(김종태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91, pp. 55-96)를 발췌 요약하면서 구약성경에 나타난 부활의 희망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

창세기 5:22-24과 열왕기하 2:11 이하는 각각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을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로,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은 스올과 죽음에 의하여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해 주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악의 세력에 의해 희생되었던 사람들을 다시 소생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로 데려오기 원하는 사람을 스올과 죽음이 만지는 것조차도 하지 못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의미는, 육체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원과 생명에 합당치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에녹과 엘리야는 육체적인 사람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았고 파괴적인 죽음을 맛보지도 않았다. 그들이 더 이상 육체적인 사람들이 아니라고 추정할 만한 어떤 근거도 찾을 수 없다.

 

2. 사무엘상 2:6

사무엘상 2:6에서 한나는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라고 찬양한다. 오래된 여러 주석가들과 함께 고스링거(C. J. Goslinga)는 이것을 무덤 속에 있는 죽은 자들을 살리시고 끌어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여기서 ‘스올’이 ‘무덤’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고 파악한다. 만일 이 해석이 타당하다면, 우리는 이 구절에서 인간이 육체적인 몸으로 부활할 수 있다는 강력한 주장을 보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여호와는 죽음과 죽음의 위험에 내던지기도 하시고, 위험에 처한 사람의 생명을 건져 죽지 않도록 구할 수도 있다”고 비유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이들은 스올을 죽음과 동의어로 파악한다.

 

3. 욥기 19:25-27

욥이 친구들에게 하는 말 가운데에서 우리는 부활 관념을 찾아볼 수 있다.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욥 19:25-27).

대부분의 현대 주석가들은 욥이 여기서 그 자신의 육체적인 몸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러나 욥이 자신의 육체적인 몸의 부활에 대하여 암시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인상은 피할 수 없다. 26절 하반절의 히브리어 전치사 ‘민(min)’은 영어의 ‘from’처럼 두 가지 번역이 가능하다: “~로부터 멀리”(away form) 혹은 “~로부터”(from, out of, in). 그러므로 26절 하반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육체로부터(내 육체 안에서) 내가 하나님을 보리라.” 이렇게 해석한다면, 이 본문은 인간의 육체적인 몸의 부활을 증거하는 구절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4. 시편 16:9-11

시편 16:9-11에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9-11).

이 구절에는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이 전인 즉 “마음”, “영혼”, “육체”를 파멸되지 않는 영광스러운 “생명”이라고 하는 표현 속에 부활 사상이 암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5. 이사야 25:8a과 26:19

‘이사야의 묵시’라고 부르는 이사야 24-27장 가운데 25:8a과 26:19은 특별히 관찰해 볼 만한 구절이다.

“사망을 영원히 멸할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사 25:8a).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사 26:19).

이사야 25:8a은 문자 그대로의 표현인 육체적인 부활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용된 언어는 육체적인 부활에 대한 암시를 확실히 담고 있다. 죽음이 없고, 슬픔과 애통이 없는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신체들이 닫힌 무덤 안에서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그런 것일 수 없다. 죽은 모든 성도들이 그들의 무덤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고, 사망이 장악했던 것과 똑같은 몸으로 다시 부활할 그 때만이 사망은 영원히 삼킨 바 될 것이다.

이사야 26:19은 개인의 종말론적, 육체적 부활에 관하여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 구절은 신실한 자들의 부활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이사야 25:8a과 더불어 일반적인 부활신앙을 전제로 하고 있다.

 

6. 에스겔의 환상

골짜기의 마른 뼈 환상인 에스겔 37:1-10은 비록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환상이 특별한 상태로 주어진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만일 선지자와 그 백성이 하나의 종말론적인 사건으로서 죽은 자의 부활 개념에 익숙하다는 것을 가정하지 않으면, 이 상징적인 언어는 납득할 수 없는 것이 된다. 환상을 이해할 수 있는 전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면 언제라도 죽은 자를 일으킬 수 있으시다’는 믿음이다. 그렇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은 이 구절, 특히 3절에 분명히 전제되어 있다. 3절에서 마른 뼈들이 살아날 수 있는지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질문에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하는 선지자의 대답은 그러한 부활이 하나님에게 가능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에스겔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활 관념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7. 다니엘 12:2-3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2-3).

이 본문은 특수한 그룹, 즉 “많은 사람”(2절)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많은 사람”은 두 그룹으로 구별되는데, 하나는 영원한 생명으로 깨어나는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한 부끄러움으로 깨어나는 그룹이다. 환난 기간 동안에 죽은 많은 사람들에게 부활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땅의 티끌 가운데 있는 그들의 사망의 잠, 즉 그들의 무덤에서 깨어나 자신들의 환난 기간 동안의 행동에 따라서 하나님께 복이나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부끄러움으로 깨어날 것이다.

한편, 다니엘 12:2-3은 이스라엘 백성의 부활만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다니엘서에서 일반적인 부활을 부인한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다니엘서의 저자는 일반적인 부활 교리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죽음을 당했던 이스라엘 역사의 정황에서 위로의 말씀을 쓰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죽은 자만이 언급되었다고 하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나오는 말

구약성경에는 종말론적인 부활 희망에 대하여 명백한 증거를 제시해 주는 구절이 많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부활의 희망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신 32:39)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몸뿐만 아니라 영을 위하여 이생의 삶보다 더 큰 것을 마련하셨을 것이라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 11:19)고 말한다. 또한 히브리서 11:8-16에서는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가나안보다 “더 나은 본향”을 염원하면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대망하다가 “이들 모두가 믿음 안에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구절들은 구약시대에도 비록 모호한 형태이긴 하지만 부활에 대한 희망이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구약성경에서는 부활에 대하여 점진적인 명료성을 가르친다고 할 수 있으며, 부활신앙이 이국적인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라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은 동의하기 어렵다. 부활신앙은 이스라엘 내부에서 기원했으며, 이 신앙의 깊은 뿌리를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구약성경에 들어있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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