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교실

[스크랩] 오토 클렘페러 - 느림의 미학

류성련 2011. 1. 31. 23:53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 1885-1973)



극단적으로 무뚝뚝하면서도 고집스런 지휘자 클렘페러. 그의 인생도 격하기 이를 데 없었다. 1885년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난 그는 이미 20대에 그 재능이 말러의 눈에 들어 지휘자의 길에 접어들었다. 프라하 도이치 오페라의 지휘자로 추천된 그는 비타협적인 성격으로 물러났고, 1910년에는 역시 말러의 추천으로 함부르크 오페라와 계약했으나 유부녀였던 엘리자베트 슈만과 염문을 일으켜 오래 가지 못했다. 이외에 바르멘·스트라스부르·쾰른·비스바덴 등지에서도 오랫동안 버티지 못했다. 1927년 베를린 크롤 오페라극장 지휘자로 발탁되어 이듬해 예술감독이 된 클렘페러는 당시에 전위였던 힌데미트·야나체크·스트라빈스키·바일·쇤베르크 등을 무대에 올렸고 연출도 현대적인 것을 종용했다. 이 때문에 오페라극장은 재정난으로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하지만 그의 재능은 그를 다시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으로 불러들였다. 기쁨도 잠깐. 나치에 의해 활동을 금지당한 그는 1935년, 독일을 영원히 떠날 수밖에 없었다.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LA 필의 상임으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뉴욕 필도 지휘하며 새로운 지휘인생을 시작하는 듯했다. 하지만 1939년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수술 뒤 반신마비가 된 그는 한동안 폐인이었다. 딸 로테가 공장에 나가서 번 돈으로 연명하던 그는 1947년 유럽으로 돌아가 부다페스트 국립오페라극장에서 극적으로 재기했다. 1951년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인연을 맺은 클렘페러는 EMI의 명프로듀서 월터 레그의 후원으로 비상의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그는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다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다. 허리를 심하게 다쳐 앉아서 지휘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던 그는 '돈 조반니' 지휘중에 기적적으로 벌떡 일어섰다. 푸르트벵글러·토스카니니가 지휘대를 떠난 54년에 필하모니아의 상임이 된 클렘페러는 당대 최고 거장의 반열에 올라섰다. 58년에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잠들어 전신에 화상을 입었고 63년에 고혈압으로 쓰러졌지만 그는 다시 일어서서 음악을 다듬어냈다.

그가 73년 타계하기까지 불굴의 의지로 연주와 녹음을 병행한 것은 오늘날의 음악팬들에겐 커다란 행운이라 할 수 있다. 말년에 이르러 모든 곡에서 지극히 느려진 템포가 '악취미' 라는 평도 있지만 그의 음반을 들어보면 그 가공할 흡인력에 할말을 잊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힘든 벼랑을 기어 오르는 등반가같이' 만들어낸 음악은 정상에 올라선 순간의 환희를 준다. 클렘페러의 연주가 그렇다. 첫 화음이 열리는 순간부터 마지막 화음이 스러질 때까지 전체의 구도는 하나로 잡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광활한 정신의 환희가 느껴지는 것이다.

바흐의 마태 수난곡. 미사 B단조(EMI), 베토벤, 브루크너, 말러의 교향곡 등 그의 음반 중에는 절대적인 완성도를 가진 것이 수두룩하다.


출처 : 클래식의 세상
글쓴이 : 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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