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헝가리 전투
일단 민중 십자군이라고 해서 은자 피에르에 의해 구성된 일사분란한 조직은 아니란 것은 앞에서 언급했다.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본대에 해당하는 민중 십자군 이외에도 몇개의 독립적인 조직들이 존재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다시 콘스탄티노플에서 만나서 합쳐지기도 했다. 이들 그룹들을 출발 순서에 따라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1. 무일푼의 발터 (Walter Penniless or Walter Sans Avoir)
: 그는 프랑스의 Boissy-sans-Avoir 의 영주였다고 하며, 고티에 생자 부아가 실제 프랑스에서의 이름이다. 비교적 수천에 이르는 적은 수의 민중 십자군을 이끌고 프랑스에서 독일을 거쳐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이들은 피에르의 본대를 기다리지 않고 이들보다 먼저 출발한 그룹이다.
2. 은자 피에르의 본대
3. 볼크마르 (Folkmar or Volkmar) 의 부대
: 독일인 기사 볼크마르가 이끄는 부대이다.
4. 고트샬크(Gottschalk's) 의 부대
: 독일 수도승 고트샬크가 이끄는 부대
5. 라이닝겐의 백작 에미코의 부대
: 이들은 따로 설명을 할 것이다. 볼크마르와 고트샬크의 부대와 함께 이들은 독일 십자군으로 불리기도 한다.
6. 목수 윌리엄(William the Carpenter )의 부대
: 이 인물은 프랑스 귀족으로 1차 십자군에도 참가했다. 이 목수란 별명은 그가 목수일에 재능이 있어 불린 별명이 아니었다. 대개 전투력이 별볼일 없는 부랑민에 불과한 민중 십자군에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그는 강력한 전사였다.
스페인에서 레콩지스타에서 명성을 떨친 이 전사는 적진에서 싸움을 하는게 아니라 목수가 목재를 베는 것 처럼 압도적인 전력으로 도끼를 휘둘러 적을 베어 쓰러뜨렸기 때문에 이 별명을 얻었다. 1차 십자군의 거구의 노르만 전사 보에몽 조차도 그 전투력은 극찬했으며 전쟁터의 백정 (battlefield butcher) 으로 불리운 전사였다. 그러나 2차례의 수치스런 탈영에 연루된 전력이 있다.
이들 민중 십자군은 프랑스에서 부터 시작해 독일로 들어오면서 세력을 불렸기 때문에 대개 프랑스인들을 중심으로 독일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다른 지역에서도 일부 참가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기록에 의하면 은자 피에르는 퀼른에 4월 12일 들어왔고, 그 세력을 더 불려서 4월 20일 이 도시를 떠나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전진했다. 그런데 이들이 비잔티움 제국을 가려면 그 사이에 있는 헝가리 왕국을 지나야 했다.
당시 헝가리의 국왕은 콜로만이었는데, 그 역시 기독교인 이었으므로 이 미심적은 무리들을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먼저 출발한 척후 부대라 할 수 있는 무일푼의 발터가 이끄는 부대는 이미 1096년 5월 8일에 헝가리 국경에 도달했다. 일단 이 선두 그룹은 큰 분란 없이 비잔티움 제국의 국경까지 전진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도나우강과 그 지류 사베강 (Save) 에 위치한 헝가리 국경도시 셈린(Semlin - 지금은 Zemun) 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다뉴브 강변의 헝가리 국경도시 셈린과 비잔티움 의 국경도시 벨그라드. This image comes from the 4th edition of Meyers Konversationslexikon (1885-90). The copyrights have expired and this image is in the public domain )
민중 십자군들은 이 도시에 보트를 타고 비잔티움 국경 방변으로 들어가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당시 이 가난한 군대는 많은 식량을 가지지 않고 출발했다. 그래서 그들은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를테면 장터에서 식량을 구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여의치 않은 경우 민중 십자군들은 주변 지역을 약탈하거나 도둑질을 했다.
민중 십자군들은 대부분 자신이 걸친 옷이 가장 큰 재산인 가난한 민중들이었다. 그러니 이들이 가진 돈과 식량이 금방 바닥나고 말았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여기에 그들의 리더인 무일푼의 발터는 이름값 (?)을 하는 지휘관이었다.
셈린에서 강이라는 자연의 장벽에 의해 진군이 지체된 민중 십자군은 결국 먹고 살기 위해 약탈을 시도했다. 그러나 헝가리인들도 이 부랑자들에게 가만히 당할 이유는 없었다. 그들은 이 도적떼 (?)를 신속하게 응징했다. 같은 기독교도인 헝가리인들을 대상으로 한 십자군의 첫번째 교전은 참패로 끝났다. 헝가리 인들은 그들을 조롱할 목적으로 빼앗은 16개의 무장과 옷을 성벽에 걸어두었다.
그러나 불행한 셈린 시민들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상대한 무리가 민중 십자군의 척후병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더 무질서한 거대한 군중의 무리가 은자 피에르와 함께 셈린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그 수는 4만에 달했다. 그들은 마침내 6월 20일에 셈린에 도달했다.
이들이 물품을 구입하기 위해 셈린의 장터에 도달했을 때 양측의 감정이 폭발했다. 폭동의 시작은 신발 한켤레의 가격을 흥정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 신발의 가격은 정말 비쌌다. 폭동을 일으킨 분노한 십자군의 무리가 닥치는 대로 셈린의 시민들을 살해해서 무려 4천명의 시민이 학살된 것이다. 대개는 무고한 시민들이었다.
일단 민중 십자군의 첫번째 승리이긴 했지만 그들은 이 승리 후에 자신들이 한 일을 생각하고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것은 죄책감 보다는 헝가리 군대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잠시 헝가리인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넘어가겠다. 헝가리를 건설한 마자르 족들은 본래 볼가강에서 유래한 민족이다. 이들은 오랜 세월 전란과 이주로 단련된 강인한 민족으로 주변의 여러 국가를 침입하기도 하고 또 다른 민족에 침입을 받기도 하면서 지금의 헝가리로 10세기 경에 이주 한후엔 정착생활을 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민족이다.
이들은 그 복잡한 이주와 침공의 역사로 투르크/타타르/게르만/슬라브족의 혈통에 영향을 받았다. 헝가리란 명칭은 이들과 관계가 깊은 투르크계 민족인 오노구르 족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런 긴 설명을 하는 이유는 헝가리가 훈족이라는 명칭에서 나왔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헝가리가 훈 이라는 이름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해도 이들은 그들 만큼 용감한 민족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왕인 콜로만 (Coloman) 은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기에 앞서 자신의 국민들을 학살한 십자군들을 응징할 것이 분명했다.
(콜로만 왕 :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이런 생각을 하자 피에르가 이끄는 민중 십자군 본대는 바빠졌다. 어서 사베강을 도하해 비잔티움 제국으로 가야하는 절박한 이유가 생겼다. 그들은 서두른 덕에 운좋게 헝가리인들의 분노의 칼을 피해 도망칠 수 있었다. 셀림을 약탈한 지 수일 후, 은자 피에르의 본대는 6월 26일 사베강을 도하해 비잔티움 제국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피에르의 본대를 따라오던 볼로마크와 고트살크의 부대는 앞서간 피에르만큼 운이 좋지 못했다. 이들은 앞선 민중 십자군의 행동을 본받아 기독교를 믿는 헝가리의 도시와 마을을 약탈했고, 또 뒤에 설명할 에미코의 영향을 받아 유대인을 학살하고 재산을 탈취하려 했으나 결국 헝가리왕의 군대에 격파되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나중에 설명할 라이닝겐의 에미코와 목수 윌리엄이 이끄는 민중 십자군의 후위부대가 다시 등장했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이들을 신뢰할 이유가 없는 헝가리 왕은 이들의 국경 진입을 불허했다. 사실 이들이 그전에 한 행위를 생각하면 당연한 조치였다.
그러나 십자군의 무리들은 여기에 순순히 응하지 않고 모손 (Moson - 독일어로는 바이셀부르크) 의 헝가리 요새를 공격하고 공성전을 벌였다. 피에르가 이끄는 민중 십자군 본대와는 달리 에미코가 이끄는 군대는 만만치 않은 세력이었고 여기에 목수 윌리엄도 있었기 때문에 헝가리 군은 무려 6주간이나 격렬한 공성전을 벌인 끝에 에미코의 부대를 격파할 수 있었다.
이렇게 민중 십자군의 침공으로 부터 조국 헝가리를 지킨 기독교 군주 콜로만은 이후 1차 십자군과는 우선 협정을 맺어 이들을 통과시켰다. 다행히 잔인성에 있어서는 민중 십자군을 능가하는 1차 십자군은 소아시아와 팔레스타인 지역과는 달리 헝가리에선 큰 문제는 일으키진 않았다.
5. 라이닝겐의 에미코 (Emicho of Leiningen or Emich of Flonheim)
비잔티움 제국 안으로 무사히 도망친 민중 십자군의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잠시 이 민중 십자군의 후위 부대였던 라이닝겐의 에미코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에미코 백작 - 진짜 라인란트의 백작이란 이야기도 있고, 진짜 백작은 아니란 이야기도 있다 - 은 중세 유대인 학살의 원조로 생각되는 인물이며, 유럽 반 유대주의의 선구자 (?)로도 여겨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만든 원흉이자 가증스런 이도교이긴 했지만 기독교도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러저럭 생활을 영위에 나갔다. 십자군이 나타나기 전까진 말이다.
당시 중세 기독교 사회에선 빌려주는 돈에 대해서 이자를 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규칙에서 예외가 되었으므로 수익이 괜찮긴 하지만 중세 시대 평판이 좋지 않은 직업인 고리 대금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중세시대 유대인 하면 수전노라는 인상이 더 커졌고, 따라서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도 커져갔다.
민중 십자군이 조직되었을 때 뿐 아니라 다른 정규 십자군이 조직되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이들 유태인들로 부터 돈을 빌릴 수 밖에 없었는데, 따라서 사람들의 유대인에 대한 반감은 더 커졌다. 민중 십자군들 중에는 은자 피에르처럼 사실상 강압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돈을 갈취한 인물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한 행위는 그래도 양반이었다.
독일 십자군, 그중에서도 라이닝겐의 백작 에미코의 행위는 중세의 기준으로 보아도 잔인성의 극치를 보여준 사례였다.
에미코와 그 부하들의 생각은 아주 간단했다. 이교도와 싸우는 성스러운 전쟁에서 - 이미 비잔티움 제국을 돕는다는 생각은 저 멀리 사라졌다 - 수천 킬로 미터 떨어진 곳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바로 옆에도 이교도는 있지 않은가 ? 이교도를 살해하려면 멀리 갈 필요가 없었다. 바로 옆에 유대인이 있었다.
이런 기발한 (?) 발상이 들자 에미코와 그의 부하들은 1096년 5월 3일 우선 라인강 근방의 독일 도시인 스피어 (Speyer)에서 유대인을 공격했다. 여기서는 주교들의 중재로 그 성과가 크진 않았지만 이들은 보름스, 마인츠, 퀼른, 트리에, 메츠등으로 가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보름스에서는 적어도 800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이곳에서 독일 십자군은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쉽게 일을 진행했다. 다급해진 유대인들은 주교관저로 피했으나 십자군들은 이들을 모두 학살했다. 여자, 노인, 어린아이 할 것 없이 이교도들은 그 댓가를 치뤄야 했다.
마인츠에선 주교 로타르트가 처음에는 성문을 굳게 닫고 이들의 십자군의 행동에 반대했다. 그러나 마인츠의 성문은 이교도를 학살하고자 하는 십자군들의 열망을 가두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보름스와 마찬가지로 주민들의 협조를 얻은 민중 십자군들은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이 마인츠의 학살에는 뒤늦게 민중 십자군에 참여하기로 한 목수 윌리엄의 부대도 참가했다.
(유대인을 학살하는 십자군들 - 유대인 특유의 모자로 이들이 유대인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1250년 프랑스 성경에 실린 삽화로 당시 중세시대에 유대인 학살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그런데 종교적 열정만이 이들의 행동의 동기는 아니었다. 에미코를 비롯한 그의 부하들이 유대인들을 공격한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이교도여서만은 아니었다. 이들이 고리 대금업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 어쩌면 사실 그게 더 중요한 이유였을 수도 있다 -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그 재산을 가로채 많은 이득을 본 에미코와 부하들은 일부는 전리품에 만족해서 집으로 돌아갔지만, 에미코는 나머지 부하들을 이끌고 헝가리를 향해 전진했다. 그러나 이들은 유대인 학살과 약탈 때문에 늦어진 상태였으므로 이미 헝가리 국왕이 민중 십자군의 국경 진입을 차단한 상태였다.
에미코가 이끄는 부대는 모손에서 6주간의 공성전을 벌인 끝에 결국 패배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천벌을 받아 마땅한 에미코 본인은 무사히 탈출하여 전리품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다른 민중 십자군의 말로를 생각할 때 에미코는 야비하긴 하지만 그래도 운이 좋은 셈이다.
한편 에미코의 부대에 참가했던 목수 윌리엄은 헝가리에서의 패배이후 다시 정식 십자군에 참가했다. 아마 강력한 전투력 때문에 다시 1차 십자군에 스카웃 된 듯 하다.
그리고 앞서 설명했듯이 에미코의 부대보다 앞서 전진하던 다른 두 독일 십자군인 볼로마크와 코트살크의 부대는 에미코의 이야기에 고무되어 헝가리 영토에서 유대인을 학살하고 그 재산을 훔치려고 했다. (그전에 볼로마크의 부대는 프라하에서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헝가리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전에 헝가리 군대의 공격을 받아 괴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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