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리우스의 수도원을 방문하면서, 나는 다시 한 번 그의 거룩한 생애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압바 안토니의 제자요 벗이었던 압바 대 마카리우스 성인은 특히 우리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를 감동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그가 쓴 것으로 전해 내려오는 <오십 편의 신령한 설교>를 웨슬리는 매우 경모하여, 자신이 편집한 <기독교 문고> 1권속에 실어 감리교도들이 애독하도록 하였다. 거기서 웨슬리는 마카리우스를 ‘거룩한 자비의 그릇’이라고 불렀다. 신적 은총의 천상적인 향기로 맛 들여진 영성의 큰 스승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 4세기의 콥틱 수도사에게서 웨슬리는 풍부하고 지고하며 고매한 경건의 맥을 찾을 수 있었음에 틀림없다.
주후 300년 경 이집트의 프티나폴에서 태어난 마카리우스는 소년 시절에 목동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아마 모세나 다윗처럼 고독하게 명상에 잠기는 시간을 많이 가졌을 것이다. 친구들이 그를 노인의 지혜를 부여받은 청년(파이다리오게론)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그는 높은 지혜를 지닌 비범한 젊은이였던 것 같다. 그는 후에 예언의 영을 부여받은 ‘성령의 담지자’(프뉴마토포로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어거스틴의 생애에서와 같이, 그는 어릴 때 친구들과 함께 남의 무화과를 훔쳐 먹은 것을 일생 동안 통회했다고 할 정도로 예민한 양심의 소유자였다. 비록 부모의 뜻에 따라 결혼하긴 했지만 마카리우스에겐 다른 삶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그의 젊은 아내가 얼마 후 세상을 떠나자, 그는 곧 수도 고행의 삶을 시작한다.
은거 생활의 초기에 마카리우스에게 어려운 곤궁이 닥쳐왔다. 그가 수도하던 근처의 마을에 어떤 처녀가 부정하게 임신한 것이 드러나자 그녀는 수도사가 자기 아기의 아버지라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마카리우스를 조롱하면서 치고 때리며 끌고 다녔다. 그러나 그는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신비한 웃음을 머금고 침묵을 지켰다. 나아가서 그는 자기가 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그녀를 도와주기까지 하는 온유와 자비를 베풀었다. 이 처녀가 해산이 닥쳐 진통할 때 며칠이 지나도 아기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자기의 죄 때문인 줄 깨닫고 아기의 아버지가 마카리우스가 아니라고 고백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마카리우스를 찾아 용서를 구하러 오는 동안, 그는 자신이 기꺼이 모욕과 수치를 받아들였던 것처럼 영예와 영광을 거부하고 몰래 그곳을 떠났다. 니트리아 산을 거쳐 스케테(스케티스) 사막에 간 그는 동굴을 찾아 광야의 생활을 시작한다.
광야의 고독과 투쟁, 역경 속에서 극한의 상황을 뚫고 마카리우스는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를 추구했다. 안토니의 제자로 수도생활을 배우던 그를 수많은 악마들이 공격하였고, 굶주림과 목마름 속에서 그는 투쟁하였다. 강 같은 눈물과 통회의 기도로 이집트 사막을 적신 이 수도사는 마귀를 정복하였는데, 그 위대한 힘은 겸손과 자기 낮춤에서 나왔다. 하나님과의 일치된 기도와 자기 부인의 극기를 통해 이기심을 초탈한 마카리우스. 그 결과 고요와 평정(무정욕)의 자유와 빛은 이 거룩한 그릇으로 하여금 사랑과 자비를 낳는 영혼의 단순, 마음의 순결(순전하고 깨끗한 눈)을 지니게 하였다. 마카리우스는 죄 많고 연약한 인간을 볼 때 있는 그대로 보았고,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죄인들을 자비롭게 사랑하고 용서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하나님과 닮은 ‘지상의 신’이라고 불렀다.
이후정 교수(감신대 교수)
출처- 기독교 타임즈
'목회신학대학원2·6교실 > 교회사2 교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노리치의 줄리안의 靈性 (0) | 2014.09.10 |
---|---|
[스크랩] 10월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0) | 2014.09.10 |
[스크랩] 사막교부들의 세계/콜룸바 스튜어트 (0) | 2014.09.09 |
[스크랩] 수도원 운동의 시작 (0) | 2014.09.09 |
[스크랩] 루터 (독일 성직자·종교개혁가) [Luther, Martin]에 대하여 (0) | 2014.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