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웨슬리(John. Wesley)는 영국에서 지금부터 300년전인 1703년 6월 28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할아버지도 목사였고 증조할아버지도 목사였다. 이런 뼈대있는 집안에서 19명의 자녀 중에 15번째 아이요 아들로는 두 번째로 태어났지만 그의 가정은 급속도로 늘어나는 아이들로 인하여 항상 빈곤에 시달렸다. 어느 해에는 통털어 6실링밖에 없는 판국에 쌍둥이가 태어나기도 했다.
요한 웨슬리 웹워스(Epworth)의 생가
요한 웨슬리가 태어날 당시 영국은 청교도 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또한 합리주의의 물결이 계몽주의 형태로 표출되고 있었다.
또한 성공회와 청교도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뒤숭숭하였고, 산업혁명으로 인한 사회혼란 등으로 술 취함, 싸움질, 도박, 도적질, 자살 등이 마치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었다.
이러한 여파로 신앙은 도리어 미신처럼 여겨지고 각처에서 웃음거리가 되어갔다.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설교는 냉랭하고 대부분의 도덕적인 내용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교회의 지도자들까지도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도리어 사람들에게서 재물을 빼앗아다가 자기들 배를 채우는 일에만 바빴다. 더구나 토마스 페인에 의하여 불신앙의 사상이 영국 전역을 강타하고 있었다.
시대는 희망이 안 보였고, 더욱 암울해져 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복음진리를 전파할 시대의 등불로 요한 웨슬리를 예비하고 준비시키고 계셨다.
요한 웨슬리는 사무엘(Samuel)과 수잔나(Susannah) 사이에서 19남매 중의 15번째로 1703년에 영국 엡워스(Epworth) 지방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설교자였으며 교회에서 충성된 봉사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요한 웨슬리는 어렸을 적에 그의 어머니인 수잔나로부터 여러 가지의 교육을 받았다. 수잔나는 그에게 글씨를 쓰는 법, 논문 쓰는 법 등을 어릴 적부터 철저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웨슬레의 가정은 넉넉하지 못했다. 항상 빈곤에 시달리는 생활을 하였고, 그의 아버지인 사무엘 마저도 주위의 인심을 잃어 그의 가정 생활은 어려웠다.
웨슬리 하우스의 거실과 식당 그리고 웨슬리의 침실
요한 웨슬리는 10살 때 런던에 있던 챠터 하우스 학교에 입학했지만 엄격하게 다스려주시던 부모님이 계시지 않자 신앙생활이 나태해져갔다. 이때가 그의 생애 중에 가장 신앙이 잠들어 있던 시기였다고 그는 후에 고백했다. 그는 차터 하우스에 들어갈 때는 하나님의 자녀였으나 나올 때는 세상 사람과 다를 봐 없는 죄인이 되어 있었다.
그는 1720년 초여름 챠터 하우스 학교를 마치고 옥스퍼드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도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숨이 막힐 지경으로 코피가 쏟아져 나왔다. 얼마 후에는 목구멍에서도 직접 입으로 피를 계워내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밤마다 지속되었다.
웨슬리는 점점 육신이 쇠약해져가는 극심한 궁핍을 겪는 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의 징계임을 깨닫고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훌륭한 목사가 되겠다는 그의 어릴 적 다짐을 기억하게 되었다.
1725년 웨슬리의 나이 22세 되는 원기 왕성하고 발랄할 때 그의 생애에 커다란 전환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이때에 자신의 장래에 대하여 번민하고 되었고, 심사숙고한 끝에 성직을 맡기로 결심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웨슬리의 가슴속에는 아직 성령의 불꽃이 희미했고 영적 경험을 사모하는 마음또한 적었다.
요한 웨슬리 기념교회 예배실의 강단과 스테인드 글라스
율법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에 사로잡혀 있던 옥스포드 신학생 시절에 웨슬리는 신성클럽(holy club) 활동을 통해 “나는 이제부터 흠없이 거룩하게 살겠다”는 절대 헌신을 다짐하는 소위 ‘옥스포드 회심’을 하였다.
신성클럽은 문자 그대로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는 몇몇 신학생이 의기투합해서 만든 단체였다. 1729년부터 시작된 이 클럽은 원래는 경전 연구를 목적으로 출발했는데 점차 종교적인 훈련을 위한 모임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회원 수는 적을 때는 5-6명에서 많을 때는 25명 가량 되었으니 결코 큰 규모는 아니었다.
웨슬리는 탁월한 학문적 역량과 조교라는 신분 때문에 이 모임의 지도자로 발탁되었다. 이 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몫을 차지한 것은 성서연구였다. 여기에 대해 그는 훗날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 네 사람이 처음 모였을 때에, 우리의 손에는 다만 한 권의 책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 책은 우리의 사상과 행동의 유일한 지침이었다. 그래서 우리를 비웃는 사람들은 우리를 ‘성경벌레’라고까지 불렀다.”
이 모임의 성서연구의 첫 열매는 구제사업으로 나타났다. 회원들은 감옥에 갇힌 죄수들과 병자를 방문하여 위로하고 그밖에도 다양한 봉사활동을 했다. 그리고 회원들 모두 꼭 필요한 지출을 제외하고는 모두 구제비에 쓰기로 약속했다. 웨슬리도 어려운 경제사정 속에서 돈을 아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돕는 일에 쓰는 걸 큰 기쁨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 모임의 회원들의 생활이 너무도 규칙적인 것에 대해 주변 학생들이 많은 비난과 조롱을 했다. 감리교의 어원이 된 “메소디스트/규칙주의자”(methodist)라는 말도 이 모임에서 스스로 만든 게 아니라 다른 학생들의 비웃음으로 시작된 말이었다. 이 시절에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웨슬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옥스포드에서는 우리의 시간과 금전 사용 방법이 남다르다 하여 우리를 싫어합니다. 우리 신성클럽 회원들은 분초를 다투어 종교적 훈련에 열중하고 모든 불필요한 경비를 절약하고 종교심이 없는 벗들을 피하므로, 우리는 다른 학생들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웨슬리는 메소디스트라는 비난을 오히려 큰 자랑으로 여겼다. 훗날 자신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교회개혁 운동에 메소디스트(감리교회)라는 이름을 그대로 갖다 쓸 만큼 엄격한 규칙을 따라 사는 삶을 귀하게 여겼다.
그러나 신성클럼 모임만이 그의 생활의 모든 것은 아니었다. 그는 때로 각혈을 할 정도로 건강을 해치면서도 학업에 열중함은 물론 엄청난 분량의 독서를 했다. 그가 얼마나 분주하게 살았는지는 이 당시 어머니에게 “한가한 것과 저는 이제 멀리 떠났습니다”라고 고백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흔히 우리는 웨슬리를 ‘한 권의 책의 사람’ 곧 평생 성경에만 매달린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청년 시절의 대단한 분량의 독서가 성경과 함께 그의 사상을 형성하는 튼튼한 기초가 되었다.
그는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하게 살고 거룩하게 죽는 규율과 훈련]이라는 책을 통해 올바른 종교생활에 있어서 내적 동기의 순수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나님께 흠없는 제물로 드릴 것을 결심했다. 그는 후일 [기독자의 완전]이란 저서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의 생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고 싶다. 그분께 대한 제물이 아니면 결국 내 자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며, 이것은 곧 마귀에게 바치는 것이다.”
이보다 1년 후인 1726년에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고 내적 종교의 본질이 뭔지, 또 참된 기독자의 삶은 주 예수를 따라 닮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삶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후 그는 예수의 마음을 갖고 예수처럼 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신성클럽 활동도 이런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또 윌리암 로의 [그리스도의 안전]과 [경건하고 거룩한 삶에의 부름]이란 책도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 책들을 읽은 후 “내 생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또 기독자의 완전이란 것도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종교적, 도덕적으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을 만큼 바르게 살려는 노력 가운데 서서히 완성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성경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1729년부터는 전보다 더욱 진지하게 성경을 연구했다. 이 과정에서 성경이야말로 진리에 대한 유일한 표준이며 순수한 종교의 비할 데 없는 규범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까지 읽은 방대한 분량의 책이 성경 내용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도 느꼈다.
1735년 4월 25일 웨슬레의 부친인 사무엘은 72세의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사무엘이 죽은 이후 엡윗교회의 목사직을 웨슬레가 맡았으나 끝까지 하지 못하고 더욱더 큰 꿈을 안고 옥스포드로 돌아오게 되었다. 옥스포드로 돌아와 웨슬레는 동생 찰스 웨슬레와 휫필드(1714∼1770)와 함께 또다시 강력한 신앙의 불꽃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별세한 지 6개월 가량 후인 1735년 10월, 32살이 된 웨슬리는 15년간의 옥스포드 신학교 시절을 마감하고 이제 주님을 위해 더 크고 희생적인 활동을 하리라는 각오 아래 북미 조오지州의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여행에 오른다. 웨슬리 집안과 이전부터 친분이 있던 사람이 그 주의 총감으로 임명되었는데, 웨슬리라면 척박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데 적격이라는 판단이 들어 그를 추천했던 것이다.
동생이자 신성클럽 회원이기도 한 찰스 웨슬리는 처음에는 형의 모험적인 해외선교에 반대했다. 장래가 촉망되는 형이 모든 유리한 조건을 내팽개치고 미지의 땅으로 고생하러 가는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웨슬리의 결심은 아주 단호했다. 그는 자신의 결정에 우려를 나타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성경 말씀이 진리가 아니라면, 나는 그대들이 말하는 것처럼 미련한 사람이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 님의 말씀이라면 내게 아무런 두려움이 없으니, 성경에도 이르기를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태 19:29)라고 하지 않았는가?”
깊은 신앙을 갖고 있던 수산나 부인도 아들의 고뇌에 찬 결정을 지지했다. 남편과 사별하고 이제 남은 세 아들 중 요한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가 떠나면 오직 한 아들만이 영국에 남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아들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20명의 아들을 가져 모두 선교사로 미국에 건너가서 비록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이 없을 것이다.”
넉넉치 못한 살림살이에도 매사에 신앙으로 임하는 어머니의 격려를 등에 업고 웨슬리는 1735년 10월 14일 동생인 찰스 웨슬리, 그리고 다른 신앙의 동지 한 명과 함께 배를 타고 북미 선교의 긴 여행길에 올랐다. 무려 57일에 걸친 거칠고 힘든 항해였다. 그는 평생을 두고 이 항해를 잊지 못했다. 자칭 흠잡을 데 없는 믿음의 용사라고 자부하던 자기네가 거친 폭풍우에 흔들리는 배 때문에 무서워 떨고 있을 때도 그 배에 같이 타고 있던 모라비안 교도들은 조금도 침착성을 잃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심지어는 찬송까지 하는 모습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모든 것을 주님께 의지하는 그들의 깊은 믿음에 큰 충격을 받았던 그 날의 깨달음을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날은 내 일생 중 가장 복된 날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북미 선교는 그야말로 난관의 연속이었다. 그는 미국 토착민인 인디언들은 죄도 없고 순수한 인간성을 가졌으리라고 기대했었는데, 그들과 접촉하고 사귀는 가운데 그들 역시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낙관적으로 보았던 인간의 본성에 깊은 회의가 들었다. 물론 모라비안 교도들 특히 뵐러 목사와의 영적 사귐을 통해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임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지만, 이 정도 갖고서는 어린 시절부터 가슴에 품고 있던 알 수 없는 내적 불안과 번민을 완전히 해결할 수가 없었다.
웨슬리를 바로 이해함에 있어서 이 점이 참으로 중요하다. 어린 시절부터의 철저한 종교교육과 경건한 신앙의 훈련을 통해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믿음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꿰뚫어 파악하고 있었고, 더 나아가 예수님을 본받아 흠없이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세상 부귀영화 다 버리고 이곳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찾아 왔지만, 이 시절의 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믿음과 인간의 주체적 노력으로서의 행함이 하나로 통일되지 못한 채 깊은 분열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청년 시절의 웨슬리의 회심은 인간중심적인 믿음이었다. 곧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을 실존적으로-머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체험으로-깨달은 1738년의 소위 올더스게이트 회심 이전까지는 그는 사람은 선행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믿고, 자신의 의를 세우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신성클럽 운동이나 북미 선교여행, 이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내심으로는 이기주의적인’ 생각에서 나온 노력들이었다.
흠없이 살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강박관념 속의 믿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유한 신앙이 아니라 어딘가 모르게 율법에 얽매인 노예의 신앙, 이 왜곡된 믿음 안에서 그는 구원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지 못한 채 불안하고 절망했던 것이다.” (조종남, [요한 웨슬리의 신학], 대한기독교출판사, 24쪽.)
이렇듯 2년 동안의 북미 선교는 웨슬리 자신의 깊은 내적 성찰의 계기를 마련한 점에서는 큰 소득이 있었지만 선교 자체는 별로 눈에 띠는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선교사로서의 자질이 부족했다거나 아무런 소득도 거두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생활수준에 비해 사치가 심하던 마을 주민들과 교인들이 그의 힘찬 설교와 청빈의 모범을 보이는 삶을 통해 검소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주간학교를 설립하여 아이들 교육에도 상당한 발전을 보였으며, 음악에 재능이 있던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성가집을 발행하여 대중예배 의식의 발전에 공헌하는 등 적지 않은 결실을 거두었다.
그러나 엄격한 규칙주의자로서의 그의 율법주의적 믿음은 때로는 지나친 교회주의와 금욕주의로 흘러 마을 주민들의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다. 영국 교회에서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성찬과 장례식을 거절하고 세례는 반드시 침례로 할 것을 주장하는 등의 태도에서, 우리는 아직 웨슬리가 복음의 자유를 깨닫지 못한 채 더러는 왜곡된 교리주의와 편협한 태도를 갖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결국 1737년 12월 2일 그는 북미 선교를 떠날 때의 야심에 찬 태도와는 달리 무겁고 답답한 심정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은 기독자의 완전을 열렬히 추구했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구원의 불확실성으로 고뇌하던 당시 심정을 그는 귀국 항해 도중의 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미국인을 회개시키려고 거기에 갔다. 그러나 나를 회개시킬 자는 과연 누구인가? 나를 이 불신앙의 죄악된 마음에서 건질 자는 과연 누구인가? 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훌륭한 교인이다. 위험이 없을 때는 설교도 잘 하고 믿음도 좋다. 그러나 죽음이 무서운 입을 벌리고 엄습해 올 때면, 나는 불안과 공포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죽는 것도 내게 유익함이 된다’는 담대한 고백을 감히 할 수가 없다.... 그동안 과연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올더스게이트 회심과 감리교 운동의 시작(1738-1740년)
북미 선교의 쓰라린 실패의 경험을 통해 웨슬리는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려는 인간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했다. 아버지인 사무엘 목사가 1735년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치면서 사랑하는 아들 웨슬리를 향해 “성령의 내적 증거, 아들아, 성령의 내적 증거, 이것이 기독교의 유일한 실재란다”라고 말씀하셨던 것, 다시 말해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성령께서 내적으로 확증해 주셔야만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무거운 도덕적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헌신과 감사의 마음에서 이웃사랑이 샘솟는 게 참된 기독교인의 모습인데, 그는 아직 이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17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한 모라비안 교도들의 집회에서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면서 웨슬리는 그 유명한 ‘올더스게이트 회심’을 체험하게 된다. 이 날의 뜨거운 체험을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계속 마음이 슬프고 무거웠다.
5월 24일, 수요일, 새벽 5시경 성경을 펴서 읽었다. ‘여러분을 위하여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도 않는 분깃을 하늘에 마련해 두셨습니다(벧후 1:4). 외출할 때 다시 성경을 펴서 읽은 곳은 다음 구절이었다. ’너는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 오후에는 성 바울 성당에 초대 받았는데 그곳에서 부른 송가는 ’주여 내가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사오니 주여 내 목소리를 들으시옵소서.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옵소서. 주여, 만일 주께서 모든 불의를 주시하시면 누가 감히 주 앞에 서리이까. 그러나 주께는 자비가 있으매 사람들은 주를 경외하나이다‘였다.
저녁에 나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열린 한 집회에 갔다. 거기에서는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경,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변화에 대하여 그가 설명하고 있을 때,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나의 구원을 위하여 다만 그리스도 한 분만을 믿는다고 생각하였다. 이어서 그분이 나의 모든 죄를 제거하셨고, 그래서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들었다....
집에 돌아온 후 여러 가지 유혹이 나를 위협했다. 그러나 소리를 치니까 모두 달아났다. 그 유혹들은 다시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하자 그분으로부터 도움이 왔다. 여기에서 나는 나의 과거와 현재의 상태가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전에는 은혜 아래 있으면서도 율법에 속하였기에 온힘을 다해 싸워도 패한 때가 많았지만, 지금은 죄의 유혹에 대한 확고한 승리자가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서 살펴보았던 ‘옥스프드 회심’과 이 ‘올더스게이트 회심’,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웨슬리 회심을 말할 때 흔히 교회에서는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경 그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는 것만을 상투적으로 강조하는 일이 많은데, 사실 이것은 그의 중생체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올더스게이트 회심 이전에도 웨슬리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한 원리인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열렬히 설교했으며, 여기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 이전에도 유능한 전도자요 사회사업가요 탁월한 조직가로서 별로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일생을 통해 단 몇 차례만 이 회심을 언급했다.
그러면 이 회심, 이 거듭남의 체험은 그의 생애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위에 인용한 긴 일기문 가운데 “나의 구원”이라는 대목을 주목하는 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의 열쇠일 것 같다.
그는 청중들을 향해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열심히 선포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과연 내가 구원을 받았는가?”하는 구원의 불확실성 때문에 긴 세월 몸부림치고 있었는데, 크고 작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흠없이 거룩한 삶을 살고자 발버둥치면서도 그분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는 자신의 죄로 절망하고 있었는데, 인간의 참된 구원은 선행을 행하는 인간 자신의 업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으로써 온다는 것을 단순히 신학적/이론적으로가 아니라 실존적으로 체험함으로써 “바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올더스게이트 집회에서 깊이 깨닫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올더스게이트 회심은 그가 지금까지 설교하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메시지를 그 자신이 실존적으로 체험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바로 웨슬리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소스라치게 발견하고, 이 은총의 체험 가운데서 오랜 세월 그를 집요하게 괴롭히던 죄의식에서 해방된 것이다.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구원의 확신이란 그저 심리적, 주관적인 내면적 평안의 문제가 아니라 죄악의 권세로부터의 실제적인 해방이라는 점이다. 회심의 일기 중에 “지금은 죄의 유혹에 대한 확고한 승리자가 되었다”는 웨슬리의 확신에 찬 고백이 이 점을 잘 말해 준다.
믿음과 은혜를 통해 거듭난 사람은 죄의 권세에서 해방된 참된 자유인으로서 이전보다 이웃을 더욱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게 웨슬리의 아래 설교들에서 충분히 드러난다:
“참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내적인 변화이다.”
“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로 깨달아지자 마음의 무거운 짐이 다 풀리고, 특히 전에 나를 핍박하던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다.”
“우리가 영적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지 않는다면 우리 형제들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은 사람은 자기 형제를 사랑할 수 없다.”
“예속의 관계에서 자유의 관계로 옮겨진 삶, 곧 하나님에 대한 공포심이 아니라 신뢰감으로 사는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다.”
이렇듯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함으로써 이전보다 더욱 확고부동한 삶의 뿌리, 사랑의 뿌리를 갖게 되는 “믿음으로 거듭난 삶”을 웨슬리는 곧바로 기독자의 완전을 추구하는 “성화(聖化)의 삶”으로 연결시켰다.
“우리의 중요한 교리는 셋이니 회개, 믿음, 그리고 성결(성화)이다. 회개는 종교의 문간이요, 믿음은 종교의 문이요, 성결은 종교 그 자체이다....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이다.” (‘감리교인의 중요한 교리’)
여기에서 우리는 웨슬리의 이런 신학적 개념들이 구체적 인간들의 구체적 삶의 현실을 외면한 채 안락한 서재에서 나온 관념적 논리의 신학의 산물이 아니라 주로 목회현장에서의 실제적인 삶의 경험과 요구들에서 나온 실천적 신학의 산물이며, 이 기독자의 완전을 추구하는 성화사상 역시 그 점에서 예외가 아님을 주시해야 한다.
“기독자의 완전이란 무지도, 실수도, 유혹도 일체 없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는 것이 기독자의 완전한 상태이다.” (‘기독자의 완전’)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구원은 두 개의 거대한 물줄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의인(믿음으로 의롭게 됨)과 성화입니다. 의인에 의하여 우리는 죄책감으로부터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성화에 의하여 우리는 죄의 세력과 뿌리에서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란 ‘여러분은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정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더러운 일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겼으나 이제는 온몸을 정의의 종으로 바쳐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로마 6:18-19)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이 성화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결과입니다. 죄가 사함을 받으면 죄의 쇠사슬은 자연히 우리의 손에서 벗어지게 되듯,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죄사함을 받음과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성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구원을 선취하는 일에 관하여’)
웨슬리의 이런 발언들에서 우리는 몇 가지 소중한 교훈을 얻는다. 믿음으로 거듭나고 구원받는 중생체험을 했다고 너무 자만에 빠지지 말고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면서 기독자의 완전과 성화의 삶을 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기독자의 완전이란 내적 동기의 순수성을 말하는 것이지 조그마한 죄 하나라도 짓지 않고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사는 기독자의 완전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
요한 웨슬리의 설교
다음으로, 감리교회 운동의 시작과 그 역사적 의의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 보자. 웨슬리는 [감리교 역사 개관]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1738년 나와 내 동역자들은 한마음과 같은 판단을 갖고 모든 일에 있어서 성서적인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있는 힘을 다하여 분명하고 오랜 전통을 가진 성서적 기독교에 대해 설교하기로 결심하였다.”
성서적 기독교? 그렇다. 감리교 운동의 구호는 뭔가 새롭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다만 “성서적 기독교”로 돌아가자는 것이었고, 바로 이 운동이 18세기 영국 사회에 여러 모양으로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18세기 당시의 영국교회는 도덕적, 영적으로 무능했다. 사회의 고위층은 종교에 대해 냉소적이었으며, 대중은 교회의 영향권 밖에 있었다. 또한 국가의 지도층은 부패했다. 각종 사회적 범죄가 성행했고 백성들은 난폭했다. 감옥은 늘 만원이었다.
그래서 웨슬리는 이사회를 도덕적으로 회복시키며 교회의 갱신을 가져와야 하겠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그와 그의 동역자들의 설교의 기조는 하나님의 의(정의)의 추구, 그리고 사람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의 곧 성결이었다.
이 감리교 운동은 개인 영혼을 구할 뿐만 아니라 당시의 영국사회를 갱신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새로운 이상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성서적 기독교의 불을 거의 소멸시키고 있었던 교권적이고 율법주의적이고 형식주의적인 교회에 대항하여 마음의 종교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소생시켰다.“ (조종남, [요한 웨슬리의 신학], p.28.)
부흥운동의 산실이었던 웨슬리의 기도실
1738년 올더스게이트 회심 이래 1791년 임종 때까지 웨슬리는 항상 말을 타고 여행하며 기회가 닿는 대로 복음을 전했다. 이 53년 동안 그는 매주 평균 15회 설교했고 3-4백리를 여행했는데, 교회를 얻어 쓸 수가 없어서 옥외나 감리교인의 집이나 집회소에서 전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당한 고초와 핍박은 엄청났다. 한 예로, 교회 밖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만으로도 웨슬리 일행은 제도교회 목사들과 고위층 사람들로부터 갖은 비방과 고초를 당했다.
그는 한 곳에서 전도집회를 마치고 쫓겨나면 다른 곳을 향해 쉬임없이 떠나는, 그야말로 말 위에서 일생의 반을 보낸 떠돌이 목회자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밤에 설교하고 다음 날 아침 그곳을 떠나기 전 새벽 5시에 설교하는 게 보통이었다. 때로는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지역까지 가기도 했지만 대개는 런던에서 브리스톨까지, 거기서 북쪽으로 뉴-케슬까지, 다시 런던으로 삼각형을 그리며 다녔다. 그는 다음 집회 장소에 언제까지 가겠다는 약속을 미리 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약속을 지키려고 애썼다. 이를 위해서는 아무리 험악한 날씨라도 거의 쉴새없이 그야말로 행진에 행진을 계속해야 했다.
그는 53년의 목회활동 중 적어도 30년 이상을 온갖 방해와 비방과 때로는 폭행을 당하며 살았다. 그에게는 민중의 사기꾼, 무례한 전도자, 목사직의 모독자, 위증자, 모함하는 자, 순진한 백성을 선동하는 자, 폭도의 괴수, 영국 최대의 위선자 등 온갖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우리는 도처에서 미친 개 취급을 받았다. 자칭 목사라는 사람들이 설교에서 우리를 이 세상 최대의 악마처럼 묘사하고 있다니, 이것은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언론도 가만 있지 않았다. 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목사들은 언론을 매수하거나 언론과 결탁하여 웨슬리의 복음전도를 비방하는 기사를 계속 터뜨렸다. 그런 기사들 중 두 군데만 인용해 보자.
“웨슬리는 모든 불화와 다툼의 발단자요 거두이다. 옥스포드, 런던, 브리스톨 등 그가 전도한 곳마다 불화와 다툼이 생겼다.”
“웨슬리는 민중을 선동하여 다른 목사들에 대해 반감을 일으키고 사방으로 다니며 목사들의 행위를 규탄하고, 저들 자신은 목사들에게 애매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려서 민심을 들뜨게 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당대의 시인들, 심지어는 찬송가 작사가들 가운데도 웨슬리를 비방하는 시나 노래를 만든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악마의 젖으로 자란 자”, “황무지에 본부를 둔 사탄의 심부름꾼” 등 갖은 비방과 조롱이 빗발쳤다.
무대에서도 그를 경멸하는 작품들이 심심치 않게 공연되었다. 특히 몇몇 극작가는 웨슬리를 주인공으로 한 ‘희극 메소디스트’나 ‘희극 위선자’ 등을 여러 극장에서 상연하여 감리교인들을 공공연히 조롱했다.
이렇듯 제도교회와 언론계와 연극계가 총동원된 감리교 박멸 작전으로 군중심리에 동요되어 아무런 생각 없이 웨슬리와 그의 감리교 운동에 적개심을 품은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웨슬리 일행은 종종 폭도들에게 협박과 폭행을 당했다. 동생인 찰스 웨슬리 목사의 얘기는 참으로 암시적이다.
“어디를 가든지 감리교인의 집은 찾기 쉬웠다. 헐리고 부서졌기 때문이다.”
사실 그랬다. 어떤 지역에서는 폭도들이 감리교인의 집을 습격하여 폐허로 만들고, 가족들을 무차별 구타하고, 의복과 이불을 갈기갈기 찢고, 그야말로 난장판을 만들었다. 다시는 감리교인이 되지 않고, 감리교인의 설교를 듣지 않고, 감리교인과 같이 모여 기도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면 용서해 주겠다는 폭도들의 위협에 일부 신자들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지만, 대다수 신자들은 이에 불응했다.
“너희들이 이미 우리의 소유를 다 파괴했다. 이제는 생명만 남았다. 우리는 생명마저 잃을지라도 신앙의 양심을 굽힐 수는 없다.”
이런 만행을 보면서도 지방장관이나 경찰은 아무런 공권력을 행사하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엄청난 핍박과 만행 앞에서도 웨슬리 일행은 철저한 비폭력 저항으로 맞섰다. “폭도는 정면으로 대하라”는 것이 웨슬리의 표어였는데, 이 말 밑바닥에는 그 어떤 고난도 평화적인 방법으로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이 깔려 있었다. 예수께서 나사렛 폭도들 가운데로 당당하게 걸어가신 것처럼(누가 4:30) 웨슬리 역시 그랬다. 그는 한 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성난 군중들 틈으로 곧장 걸어가면서 그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쏘아 보았다. 그들은 좌우로 비켜 나를 통과하게 했다.”
웨슬리의 비폭력 저항은 나름대로 좋은 결실을 거두었다. 폭도의 우두머리들 중에도 훗날 회개하여 감리교인, 심지어 전도자가 된 예도 더러 있다. 또 처음에는 멋모르고 감리교인을 박해하던 사람들 중에도 핍박받으면서도 평화롭고 침착하고 착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감리교인들의 굳세고 아름다운 삶에 감동하여 회개한 이들이 적지 않다.
이제, 웨슬리의 목회활동 중의 중요한 사건들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1744년.6.25. 파운더러에서 제1회 감리교 ‘연회’가 열림(참석자는 웨슬리 형제와 다른 목사 4명, 전도자 4명 등 모두 10명이었음).
*1751년.2.18. 48세에 바질리 부인과 늦결혼을 함(불행한 결혼이었음).
*1755.1. 신약성서 약주 발간.
*1755.5.6. 영국 국교회로부터의 분리 문제를 리즈에서 토의함.
*1759.2.16. 프랑스의 영국 침략을 우려하는 단체 금식.
*1766. “기독자의 완전(에 대한 평이한 해설)” 발간.
*1767.8.18. 런던에서 연회 개최.
*1767. 미국 뉴욕에 감리회 창설.
*1769. 리즈 회의에서 미국에 선교사 파송할 것을 결의.
*1770.9.13. 믿음의 동역자 조지 휘트필드 별세.
*1771.1.23. 바질리 부인이 집을 나감.
*1771. 플레처의 도덕무용론에 대해 “도덕무용론에 대한 비판”(1, 2권) 발간.
“웨슬리 전집”(1-5권) 발간.
*1772. “도덕무용론에 대한 비판”(3, 4권) 발간.
“웨슬리 전집”(11-16권) 발간.
*1773.12. “웨슬리 전집”(17-25권) 발간.
*1774.6.4. 에딘버러에서 체포됨.
*1778.8.5. 아프리카 선교에 대한 토의.
*1779. “천주교 제도에 대한 조용한 고찰” 발간.
*1784.2.28. 감리교회를 하나의 독립된 조직체로 만들겠다는 ‘선언문’ 작성.
*1787.1.8. 런던 빈민을 위해 200파운드 모금운동 벌임.
*1788.3.29 동생 찰스 웨슬리 별세.
*1790.3. 찰스의 어린이 찬송가에서 발췌하여 “어린이 찬송가” 발간.
*1790.10.6. 마지막 야외 설교.
*1790.10.24. 그의 일기에 마지막 손길을 가함.
*1791.2.22. 마지막 설교.
웨슬리의 무덤
웨슬리는 원래 타고난 건강 체질이 아니었지만 엄청난 일에 시달리면서도 늘 건강에 유의했다. 그리고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는 단순한 마음과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깊은 책임감을 바탕으로 무수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감리교 운동의 발전이라는 큰 일을 활동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오늘로 나의 72세의 삶이 시작된다. 30년 전보다 시력도 좋아지고 청년 시절의 잔병들도 없어졌다. 그 방법은 40년 동안 계속해 새벽 4시에 일어나고 대개 5시에 설교한 것이니, 이것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건강법이다.” (1774.6.28. 일기)
“오늘 나는 82세 줄에 들어섰다. 그러나 40세 때 못지 않다. 이는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이의 은혜이니, 그분은 생명의 태양도 장악하고 계신다. 나는 젊었을 때에도 두통, 치통, 육체적인 피로감이 없었으나 지금은 그때보다 오히려 건강한 편이다. 주께서 만물을 다스리시니, 우리는 사는 동안에 그분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 (1784.6.28. 일기)
“하나님의 섭리로 82세를 무사히 마쳤다. 그분께는 능치 못한 일이 없다. 내가 피로를 느껴본 지 11년이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1785.6.28. 일기)
그러나 죽음의 그림자를 피할 수는 없는 법. 이제 웨슬리도 생을 마감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하기 시작한다.
“오늘로 85세! 이처럼 나를 붙들어 주신 하나님께 뭐라고 찬송을 드릴까? 전처럼 쾌활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시력도 약해지고 오른쪽 어깨와 발도 류마치스로 괴롭다. 또 기억력이 흐려져서 최근의 일은 쉽사리 망각한다. 그러나 여행과 설교 때는 피로하지 않으며 설교도 예전과 같이 속히 쓸 수 있다.” (1788.6.28. 일기)
1790년 가을과 겨울에 걸쳐 “주여, 이 종으로 하여금 무익한 생을 살지 않게 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면서 그는 여전히 런던과 그 근방 교회에서 전도했다. 임종을 전후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신앙의 고백들을 남겼다:
“나같은 죄인 괴수를 위해 예수께서 돌아가셨다.”
“내 숨이 끊길 때까지 주를 찬미하리라.”
“모든 것 중에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라.”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라.”
1791년 3월 2일 오전 10시 조금 못 되어 “잘 있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오직 복음 전도와 이웃사랑의 실천에 헌신했던 기나긴 목회생활을 마감했다. 웨슬리 형제 기념비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졌다.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
“하나님은 그 일꾼은 장사하시나 그 사역은 계속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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