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신대 신학 교수 교실/송성진 교수 교실

사랑의 영성과 그 실현에로의 길

류성련 2014. 11. 6. 17:02

사랑의 영성과 그 실현에로의 길

 

송 성 진 (감리교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I. 사랑의 영성

 

1.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과의 사이적 통일적 사귐을 이루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과의 관련성 가운데 만유와 더불어 사이적 통일적 사귐을 실현하는 것이다. 사이적 통일적 사귐은 곧 사랑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생의 목적은 결국 사랑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모든 동료 피조물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의 요체는 사귐이요, 사랑인 사귐은 사이성과 통일성의 두가지 특성을 지닌다. 우선 사랑은 모름지기 통일성을 지닌다. 통일성은 요컨대 하나됨을 말한다. 사랑은 거기에 참여하는 존재들이 서로에게 나아가고 서로 만나고, 서로 어울리어, 마침내 소외를 극복하고, 어떤 의미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랑의 통일성은 사랑에서의 하나됨을 말하다. 그 다음 사랑은 사이성을 지니다. 사랑이 지니는 통일성은 사랑에 참여하는 존재자들의 개별성과 다양성을 무시하거나 없애는 그런 종류의 획일주의적 전체주의적 통일성이 아니다. 사랑은 개별성과 다양성을 지닌 존재자들이 만나서 하나가 되는 사건이지만, 그러나 하나가 된 그 때에도 개별성과 다양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그 사랑을 거친 후의 개별성의 구체적인 모습은 변화하지만 (만물은 상호 관계를 통해서 끝없이 변한다), 그러나 개별성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은 서로에 대하여 사이를 갖는 구별되는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사이성을 지닌다. 사랑은 그 사이성에서 불일적(不一的)이며, 그 통일성에서 불이적(不二的)이다.

사이적 통일적 사귐으로서의 사랑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상호내재적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랑을 상호내재적 사실로 이해한 성서적 증거의 대표적인 경우는 요한복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 15: 20).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17:21).

 

상호내재적 사실로서의 사랑을 가리키는 바 교회 전통이 애용해 온 말을 하나 지적하자면, 그것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이다. 페리코레시스는 자신의 존재에 타자를 위한 공간을 만들고 그 타자와 사귀는 것을 의미한다 (송성진: 164). 십자가의 성 요한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사랑의 연합이 있을 때에는....사랑받는 이는 사랑하는 이 안에 살고, 사랑하는 이는 사랑받은 이 안에 산다” (St. John of the Cross: 455).

 

2. 인간이 페리코레시스 즉 사이적 통일적 사귐으로서의 사랑을 가능성인 동시에 책임으로 받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영성으로써 표현된다. 인간은 우선 그 영에서 영성을 지닌다. 영을 가리키는 구약성서적 용어는 루아흐(ruach)이고, 신약성서적 용어는 프뉴마(pneuma)이다. 루아흐나 푸뉴마나 공히 그 기본적이고 일차적인 의미는 바람 내지 숨이다. 성서 기자들이 루아흐나 프뉴마 즉 바람이라는 말을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사용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결국 성서기자들은 하나님과 인간 존재의 어떤 본질적 사실을 가리키는 메타포로 바람이라는 말을 쓰이고 있는 데, 이 바람이라는 메타포가 가리키는 실재는 무엇일까?

바람은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는 법이 없다. 바람은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바람은 자기초월적으로 내달린다. 바람은 그 내달리는 길에서 많은 존재들과 만나고, 만나는 것과 어울려 사이적 통일적 사귐을 이루어낸다. 성서에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하여 적용된 바람이라는 메타포는 결국 하나님과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을 수 없고 오히려 다른 존재를 향하여 나아가서 어울리는 존재, 즉 본질적으로 사이적 통일적 사귐의 존재임을 가리킨다. 이러한 점에서 존 매쿼리가 영을 “자신의 밖으로 나감,” “자기 초월” 등으로 정의한 것은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Macquarrie: 67).

인간의 영성이 나타나는 장소는 우선 인간의 영(spirit)이다. 인간의 마음(mind)이나 인간의 몸(body)도 본질적으로 사이적 통일적 사귐의 존재이고, 따라서 인간의 마음도 영성을 지니고 인간의 몸도 영성을 지니지만, 특별히 인간의 영에 대하여 우선적으로 영성을 말하게 되는 이유는 한 인간 존재 전체를 한 통일적 단위로 보았을 때, 그 전체적 통일적 인간이 하나님 및 만유와 더불어 본래적인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있 것은 그 영의 차원을 중심으로 해서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은 그 본질적 성격에서 항상 하나님 및 만유와 페리코레시스적 사귐을 나누고 있다고 판단되며,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영은 본래적 사랑 사건이다. 본래적 사랑 사건으로서의 영에 대한 바울과 어거스틴의 용어는 “내적 인간 (속 사람 inner man)”이다 (송성진: 176). 본래적 사랑 사건으로서의 속 사람, 즉 영이 그 자신의 사랑의 교제에로 마음과 몸을 또한 부른다. 속 사람인 영은 마음과 몸에 대하여 사랑에의 초청, 사랑의 계시, 사랑의 능력의 의미를 지닌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게서 근원된 사랑의 진리와 사랑의 능력이 영을 통해서 마음과 몸에 전해지고 있다.

하나님 자신의 진리이며 영성의 본질이 되는 사랑은 인간의 영에서 같이 또한 마음에서 그리고 몸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마음과 몸이 지니는 사랑의 영성은 가능성인 동시에 책임적으로 실현해야 할 과제이다. 사랑을 행동적으로 실천하는 몸은 영성을 실현하는 신령한 몸이며, 사랑으로 가득찬 마음도 영성을 실현하는 신령한 마음이다. 하나님 자신의 진리인 동시에 우주의 궁극적 진리인 사랑은 인간의 영과 마음과 몸의 각 차원에서, 그리하여 인간 존재 전체에서 실현되어져야 한다.

 

3.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자의 영성 실현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기독교 신앙이 이해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의 인간되심과 인간의 말씀되심의 일치이다 (참고, 요 1:14)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 되심 즉 성육신(incarnation) 사건과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 됨 즉 신화(deification) 사건의 일치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의 동시적 사건이다 (참고, 칼케돈공의회 신앙고백). 이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과 사람의 아들간의 사이적 통일적 사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사건의 진실 즉 하나님과 인자 나사렛 예수 간의 사이적 통일적 사귐이라는 진실을 주목하면서, 이 진실이 우리의 영성 실현에 대하여 갖는 관련적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사이적 통일적 사귐의 관계를 맺고 그와 하나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의 사랑의 사실은 곧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사실이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심은 곧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재하심이 되며, 또 그리스도가 하나님 안에 내재하심은 곧 우리가 하나님 안에 내재함이 된다. 이러한 사실을 종교개혁자 루터의 말로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imputed) 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자의 영성 실현에 매우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이적 통일적 사귐을 이루고 그와 연합함은 기독자의 영성 실현의 열쇠이다.

신자와 그리스도간의 사이적 통일적 사귐에 대한 성서적 증거는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 그리고 바울과 그의 학파에 나타나는 몸의 비유 등에서 찾아 볼수 있다. 고린도전서 의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가 된다 (고전 12:27). 골로새서는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고 증거한다. (골 1:18).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그리고 각 신자 안에 거하시고, 교회와 각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 교회 및 각 신자는 그리스도와 상호 내재적인 사랑의 사귐을 갖는다.

하나님 사이의 사이적 통일적 사귐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마음에 참여하게 되고, 나사렛 예수와의 사이적 통일적 사귐에서 하나님의 마음은 예수에게 성육신하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 사건의 요체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곧 우주적 사랑의 마음이므로, 그리스도의 마음은 곧 우주적 사랑의 마음이다. 우주적 사랑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마음을 중심해서 보면, 우주 만물 전체가 이미 그리고 항상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주 만물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역장 안에 놓여 있어 그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 만물 그 자체를 중심해서 보면, 우리는 그것이 원만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화하기를 아직 기다려야 한다. 우주 내의 어떤 존재자들, 특히 인생들 중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통치, 아니 사랑의 섬김에 아직 순복하지 않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4. 인간의 영성은 우선적으로 궁극적 실재이신 하나님과 상관된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항상 만유와 사이적 통일적 사귐을 갖고 계시고 그리하여 하나님이 항상 만유 안에 내재하시고 또 만유가 또한 항상 하나님 안에 내재하므로, 그 우선적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인 영성은 동시에 만유와의 사귐을 필연적으로 내포할 수 밖에 없다. 만유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대신할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항상 만유에 대한 사랑을 내포한다.

 

 

II. 사랑의 영성 실현에로의 길

 

영성의 실현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교회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가르쳐준 모든 은총이 수단들, 예컨대 성서, 설교, 성례전, 예배, 기도 등을 잘 활용하여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동료 인간을 위하며 동료 인간과 함께 하는 사랑의 수고와 기쁨, 자연과의 친교 등도 절실히 요청된다.

 

1. 이웃 사람들의 정의와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수고하는 일은 기독교적 영성 실현의 필수 요건이다. 이 점은 마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과정신학이 말하듯이, 만인 안에 하나님이 사랑으로 내재하시고, 또 만인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내포되어 있으므로, 사람에 대한 사랑은 단지 사람에 대한 사랑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류 사회의 정의와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일하는 모든 수고는 그 자체로 영성 실현의 의미를 지닌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다음과 같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읽으시고, 그 말씀으로 당신의 삶의 의미와 특성을 요약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눅 4:18-19).

 

예수 그리스도는 또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셨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 5:7,9-10).

 

이러한 말씀들은 기독교적 영성이 이웃을 위한 우리의 사랑의 수고를 불가피하게 필수적으로 내포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우리 이웃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우리의 수고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우리의 이웃과 더불어서 삶의 여러 차원의 기쁨과 감동을 함께 나누는 일도 기독교적 영성 실현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된다. 우리가 올바른 이해의 눈을 갖고 있는 한, 우리가 이웃과 더불어 우리의 삶의 기쁨과 감동을 누릴 그 때에, 우리는 그와 동시에 그 기쁨과 감동의 원초적 근원이시며 또 그 궁극적 귀결처이신 하나님을 동시에 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삶의 환희는 영성적 의미를 지닌다.

 

2. 기독교적 영성이 이웃 사랑을 필연적으로 내포한다 할 때에, 우리의 이웃은 동료 인간에 국한될 수 없다. 만유가 곧 하나님은 아니지만(범신론을 거부함), 그러나 만유재신론이 주장하듯이, 만유와 하나님은 불가분리적 관계에 있어 하나님은 만유를 통해 당신 자신을 표현하시고 또 만유를 당신의 현실적 존재 안에 받아들이신다. 하나님은 만유의 창조주이시고 만유의 궁극적 귀결처이시니,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이 길에서 만유는 우리의 동료가 된다. 달을 자매라고 부르고, 태양과 풀, 벌레, 매미, 새, 짐승 등을 형제라고 부른 성 프란시스의 자연 친화적이고 우주적인 영성은(정등운: 111-129)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오늘날 마땅히 회복되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인은 만유 안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능력과 그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또 만유가 하나님 안에서 항상 그 마땅한 자리를 얻고 있음에 대하여, 그것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 다음과 같이 말한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은 이 이치에 대하여 그의 눈이 열려져 있었음에 틀림없다.

 

오, 내 님의 손으로 심겨진 숲과 덤불들이여,

꽃으로 환히 뒤덮인 푸른 초장이여,

내 님이 너희들 곁을 지나가셨는지 말해다오.

일천의 은총을 흩뿌리시며,

그분이 신속히 이 숲을 지나가셨도다.

그분은 지나시면서 그들을 쳐다보셨으니

그렇게 얼핏 쳐다보심만으로도

저들을 아름다움으로 옷 입히셨도다....

내 님은 산들이시어라,

또 숲이 우거진 고독한 계곡들,

낯선 섬들,

그 소리 울려 퍼지는 강들,

사랑을 불러 일으키는 미풍의 속삭임,

새벽이 솟아오를 무렵의 고요한 밤,

소리 없는 음악,

우렁찬 고독,

사랑을 새롭게 만들고 그것을 심화시키는 만찬 (St. John of the Cross: 410, 412).

 

그러므로 때때로 물러나서 혹은 자연 속을 거닐거나, 혹은 자연 속 깊은 곳에 들어가 앉아서,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자연과 친교하고 공명하면서, 자연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연과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함은 우리 영성 실현의 좋은 방법이다.

 

3. 만유와 상관하여 만유와 함께 하나님과의 사랑의 사귐을 갖는 일이 기독교 영성 실현에 항상 있어야 하겠거니와,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빼어나신 주체와 보다 직접적으로 만나는 일이 있어야 하고 있게 마련이다. 하나님과 보다 직접적으로 만나는 한 중요한 형식은 기도이다. 기도는 모든 크리스챤들이 익히 알고 실행하는 방법으로서 이에 대하여 길게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느낌, 소원 등이 어떤 형태의 에너지로, 즉 발성된 말의 형식이나 혹은 마음의 내적인 말의 형식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발송되고, 하나님이 그 의미찬 에너지를 수신하시고 그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은 매우 복된 일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주위 환경과 자신의 현재의 실존적 상태가 요청하는 대로, 혹은 큰 소리로 혹은 작은 소리로 혹은 마음의 속말로 기도하게 된다. 회중과 함께 또는 몇몇 동료 크리스챤들과 함께 기도할 때가 있을 것이요, 홀로 기도할 때가 있을 것이다.

다른 모든 형태의 기도에서와 마찬가지로 발성 기도에서도 우리가 명심해야할 점은 기도는 비단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사건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모시는 사건이어야 한다. 기도에서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일이 대개 있거니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모시는 일이 마땅히 있어야 한다. 기도는 일방적 사건이 아니라, 쌍방적 사건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기도자에게 말씀하신다. 혹은 내적인 언어로, 혹은 우리가 읽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혹은 설교자의 선포된 말씀을 통하여, 혹은 우리 이웃 사람들과의 대화의 말을 통하여, 혹은 우리의 느낌 내지 영감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분별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거나,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된다. 여기에 분별의 능력이 요청되는 바, 이를 위하여 평소에 성실한 신학적 훈련을 통하여 원만한 신학적 통찰을 지님이 매우 중요하다.

 

 

4. 명상도 영성의 실현을 위하여 중요하다. 명상은 하나님과 세계와 인생의 근본적 진리를 매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어떤 사실, 이야기, 메타포, 개념, 사상 등을 깊이 묵상하면서 이를 통하여 진리를 내면화하는 것이다. 명상에서는 흔히 상상력이 활용된다. 인간의 상상력은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도 자주 사용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항상 그럴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귀중한 능력인 상상력을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사랑의 사귐을 위하여 바람직하게 사용할 수 있으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 상상으로서의 기도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진실한 생각과 느낌을 우리의 마음의 화판 위에 상상력의 붓으로 그려서 하나님께 보여 드리는 것이다. 참고로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상상적 기도 하나를 소개하면, 그것은 시편 23편의 장면을 마음의 화판에 그려서 하나님께 보여 드리는 것이다.

앤소니 드 멜로는 그의 저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에서 기도 방법에 대한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많은 가르침을 우리에게 베풀고 있는데, 특히 제 2부 “공상하기”에서는 상상력을 활용한 기도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 중에서 빈 의자를 이용한 한 환자의 상상적 기도 이야기는 매우 감동적이다. 그 환자는 자신의 병상 옆에 놓인 빈 의자의 의미를 묻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는 몇 년 동안 기도하는 것이 퍽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와서 기도란 예수님께 그저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해 주기 전까지는요. 그 친구는 나에게 빈 의자를 옆에 놓고 거기 예수님이 앉아 계신다고 상상하고서 그분께 이야기를 하고 또 뭐라고 말씀해 주시는지를 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기도하는 데에 아무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드 멜로: 163).

 

그 남자가 임종했을 때의 상황을 그의 딸이 다음과 같이 전해주었다고 한다.

 

전 아버지가 혼자 계시도록 몇 시간 동안 자리를 비웠어요. 아버지는 매우 평화로워 보이셨어요. 그러나 제가 다시 방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는 이미 숨을 거두셨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요. 글쎄, 아버지의 머리가 침대 위에 놓여 있지 않고 그 옆에 있는 의자 위에 놓여 있지 않겠어요? (드 멜로: 153 f.).

 

이 사람은 비록 병으로 말미암아 많은 고통의 시간들을 보냈지만, 그러나 그는 그러한 중에도 상상적 기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의 복된 친교를 나눈 것이다. 임종시에 그 사람의 머리가 빈 의자 위에 놓여져 있었다는 것은 평상시 상상으로 그리던 예수 그리스도를 그가 그의 임종시에 보다 여실하게 체험하였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하나님께서 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에 또는 곁에 지금 계신다고 상상하는 방식의 기도는 너무 임의적이고 주관적이며, 심지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주제넘은 일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존재 성격과 존재 방식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기초하여 다음과 같이 주어질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16). 하나님은 사랑으로서 모든 존재와 함께 하시고, 모든 인생들과 함께 하시거니와, 특히 그를 갈망하고 간구하는 자들에게 기꺼이 함께 하신다 (시 91:15). 그리스도는 바로 그러한 사랑의 하나님의 성육신이시고, 늘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주님이시다. 사랑의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리고 항상 모든 생명체들과 함께 하시고, 특별히 연약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신다 (마 21:31-46). 그렇다면 고통의 병상에서 상상이라는 형상적 에너지의 형식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갈망과 간구를 드린 이에게 어찌 그가 기꺼이 함께 하시지 않겠는가? 예컨대, 위에 언급한 저 환자의 상상적 그림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갈망적 부르짖음의 표현이라는 의미를 지닐뿐 아니라 이와 동시에 또한 그 환자에 대하여 이미 그리고 항상 함께 계신 그리스도의 임마누엘적 사실의 형상화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의 믿음의 그림은 실로 주님이 용납하시는 그 사람의 기도가 될 뿐 만 아니라, 또한 주님이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임재하시는 주님의 성례전적 사건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의 상상적 그림은 요컨대 믿음의 간구 사실과 은총의 현존 사실의 일치이다. 세계내적인 어떤 소리, 형상, 개념 등은 실로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가 될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이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임하시는 성례전적 도구가 될 수 있다.

 

5. 한편으로 어떤 소리와 형상과 개념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전달하시는 하나님은 다른 한편으로 모든 소리와 형상과 개념을 초월하시는 절대적 신비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세계내적인 소리와 형상과 개념은 신비이신 하나님 존재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다 전할 수 없는 법이다. 이러한 절대적 신비의 하나님에 직면하여 우리의 음성을 잠잠케 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전도서 기자의 말처럼 천하만사에 때가 있으니, 말씀을 드릴 때가 있고 잠잠해야 할 때가 있으며(전3:7), 소리와 형상과 개념을 사용해야 할 때가 있고 또 그것을 내려 놓아야 할 때가 있다. 명상에 처할 때가 있고, 명상을 넘어서야 할 때가 있다. 그 때가 되었을 때는 초월적 신비이신 하나님과의 보다 여실한 만남을 위해서는 우리는 인간의 이성과 상상력이 빚어낸 상상적 그림과 메타포, 개념 등을 내려놓아야 한다. 물론 그 “때가 되기 전에 상상의 묵상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 1971: 159).

하나님의 절대적 신비를 강조하면서 이와 상응하여 우리에게 어두움과 무지에 의하여 상징되는 어떤 실존적 태도가 요청하는 신학 전통이 기독교 역사 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 오고 있다. 부정의 신학(apophatic theology)이라고 불리우는 이 신학은 고대의 캅파도기아 교부들 및 위 디오니시우스(Pseudo Dionysius)로부터 근래의 블라디미르 로스키(Vladmir Lossky), 존 메옌도르프(John Meyendorf) 등에게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는 동방신학 전통에서 현저히 보이며, 또 《무지의 구름》을 쓴 익명의 신학자와 십자가의 성 요한 (St. John of the Cross) 등 서방 신학의 신비주의 전통에서 현저히 보인다.

하나님의 불가지성 신비성을 강조하고 이와 상응하여 인간의 무지성을 강조하는 부정의 신학은 그러나 절망과 체념의 신학은 아니다. 신비적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인간은 인간 자신과 상관하여서는 혹시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겠지마는, 그러나 인간과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상관해서는 희망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신비의 하나님은 그러나 멀리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이요, 우리에게 계시와 합일의 은총을 내리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와 무지는 인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서만 오직 초월된다. 하나님은 이러한 은총을 우리에게 기꺼이 주시려고 하신다. 이러한 맥락에서 블라디미르 로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가지성은 불가지론을 의미하지 않으며 또는 하나님을 아는 일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은 지식으로 인도하는 길에서 얻어지지 아니하고 합일(union) 즉 신화(deification)에 이르는 길에서 얻어진다”(Lossky: 43). 하나님이 우리와 합일하시고 우리를 신화 즉 성화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신적인 실재들의 높이까지 들어 올리셔서 다른 길로는 알 수 없는 진리를 알게 되는 현실을 가리키는 말은 관상(contemplation)이다. 엄밀한 의미의 관상은 우리가 자의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고 들어가시는 신적 상황이다. “신비 신학”이라고도 불리우는 관상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어떤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우리는 거기에 수동적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되는 은총적 사건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 의하면 은총적 사건으로서의 관상은 수동적으로 주어지며, “신적인 빛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관상은 그것이 주어진 이에게 놀라운 사랑과 깨달음을 부여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 1971:137; 1973: 134).

하나님은 당신의 지혜로우심이 판단하시고 정하신 때에 우리 중 어떤 사람을 명상의 단계를 넘어서 관상의 단계에로 이끄신다. 그 때를 분별하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도상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되므로, 십자가의 성 요한이 가르쳐 준 바 그 때를 알리는 징표 세가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첫째, 상상력을 가지고 묵상이나 추리를 도저히 할 수 없고, 그전처럼 통 맛이 없음을 발견한다. 전 같으면 으레 감성이 뿌리를 내리고 단물을 빨던 것이 이젠 도리어 아무런 맛이 없다. 그러나 묵상을 하는 중에 아직도 재미가 있고 추리도 할 수 있으면, 그 동안은 묵상을 놓을 때가 아니다. 영혼이 평화와 고요 속에 안정될 수 있는 그때라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셋째 징표에 가서 이야기할 것이다.

둘째, 마음의 안팎을 가릴 것 없이 개별적인 어느 일에 상상력이나 감정을 두기가 딱 싫어짐을 본다. 오가는 상상마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정신 집중이 잘된 때라도 상상력은 묶여 있지 않다.) 다만 그런 일들에 부러 재미를 붙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셋째야말로 가장 확실한 표인데 영혼은 하느님을 사랑으로 우러러보면서 혼자 있기가 좋아진다. 이런저런 생각도 없이 그윽한 평화와 고요와 안식 속에서, 기억 이성 의지의 작용이나 이리 저리 오가는 추리의 움직임도 없이 오직 하나 우리가 사랑겹다 일컫는 공번된 지견이 있을 따름, 그 밖의 여남은 것들이야 무엇이건 알려하지 않는 법이다 (십자가의 성요한, 1971: 159 f.).

 

위 징표와 상관하여 오해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혼자 있기를 좋아할 때에는 마땅히 혼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때에 항상 혼자 있기만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뜻에도 맞지 않고 기독교 신앙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때가 되면 혼자 있음으로부터 세상 속으로 나오는 일이 또한 있어야 한다. 윌리엄 존스턴의 말을 빌리면, “시장으로 돌아옴”이 있어야 한다 (존스턴: 121-137). 주님과 함께 높은 산에서 황홀한 체험을 한 제자들은 산 아래로, 세상 속으로 내려가야 한다(마 17:1-9). 우리의 기억 이성 의지가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잠잠히 쉬고 주시는 은혜를 수동적으로 받는 때가 마땅히 있어야 하지만, 그러나 또 때가 되면 “시장”을 위해서, 즉 하나님께서 그처럼 사랑하시어 독생자도 내어 주신 이 세상을 위해서 (요 3:16) 우리의 기억과 이성과 의지를 활용하여야 한다. 물론 관상의 단계를 거친 사람의 기억과 이성과 의지는 그렇지 않은 기억, 이성, 의지와는 다르다. 관상의 은혜는 그 사람의 이성과 의지와 기억을 신령한 것으로 변화시키고 (St. John of the Cross: 608 f.), 따라서 이제 그것들은 하나님의 뜻을 세상 안에서 이루는 그 일에 가장 적절하고도 효과적으로 활용되게 된다. 요컨대, 우리의 영성적 삶은 리듬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삶에서 보이듯이 세상에서 물러남과 세상 속으로 들어감의 리듬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 앞에 홀로 있음과 세상 사람들과 함께 있음의 리듬이 있어야 한다. 내가 지금 어떤 리듬을 타야 할 때인가는 성령의 감동 가운데서 각자가 결정할 문제다.

 

6.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관상 그 자체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친히 이루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관상의 은혜를 내리시고자 하실 때에 수단을 초월하여 내리식도 하고, 또 은총의 수단들을 활용하시기도 하신다. 관상의 은혜를 사모하는 우리는 순종함으로 그 은총의 수단들을 활용함이 마땅할 것이다. 활용 가능한 많은 은총의 수단들이 있는 중에 나는 우선 다음 세가지 방법을 권하고 싶다.

 

(1) 성만찬

성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매우 귀한 축복이다. 성만찬은 그 자체로 영성의 실현이다. 지극한 신비이다. 성만찬에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사이적 통일적 사귐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는 인간과 자연 간의 사이적 통일적 사귐이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공동체적 사귐이 있다. 성만찬에는 소위 영도 물질성을 지니고, 소위 물질도 영성을 지닌다는 진리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소위 물질과 영에 대한 이원론적 이해를 거부한다. 우리는 성만찬에 참여함으로 거기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 사이적 통일적 사귐을 누리게 된다.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이 하나님 및 온 우주와의 사이적 통일적 사귐이시므로, 우리는 성만찬에서 만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와 동시에 하나님 및 온 우주와 사이적 통일적 사귐을 누리게 된다. 이러한 축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감사할 수 밖에 없다.

이 축복이 우리에게 허락되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이 축복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현재 한국의 많은 교회들에서는 성만찬을 행하는 횟수가 적은 경향이 있고 이로 말미암아 성만찬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그 만큼 줄어들게 되므로 나는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리 형제들은 기독자의 삶에 대한 성만찬의 중요성을 깊이 확신하고 있었다. 이 점에 대하여 권위 있는 웨슬리 신학자인 알버트 아우틀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웨슬리 형제들은 성례전의 은총을 예배드리는 신자들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해하였다. 주님의 성만찬은 모든 “은총의 수단들”의 전형이다. 성만찬은 현실적인 은총에 대한 현실적인 수단의 으뜸(the chief actual means of actual grace)이다. 성만찬은 바로 이러한 것으로 기독자의 삶에 문자 그대로 필수불가결하다 (Outler: 333).

 

이러한 이해 위에 웨슬리 형제는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자주 성만찬의 신비와 축복에 참여하도록 목회적인 배려를 하였다. 데오도어 런년(Theodore Runyon)에 의하면 존 웨슬리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일주일에 평균 2-3회 성만찬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런년: 192). 웨슬리는 성만찬을 세례받은 이들에게만 제한하지 아니하였다. 웨슬리가 행한 성만찬은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진 성만찬이었다 (런년: 188 f.). 웨슬리가 행한 열려진 성만찬은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행하신 바 세리와 죄인 등 은혜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베풀어 주신 열린 공동 식사와 상응한다. 하나님의 은총의 수단으로서의 설교 말씀이 세례 받은 자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고 있으며, 또 그 말씀이 가능한 한 자주 선포되고있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말씀이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말씀인 성만찬도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주 베풀어져야 할 것이다. 성만찬은 이처럼 기독교 신앙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신앙의 길을 이미 한참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 그 사람이 어느 단계에 있든지, 예컨대 명상의 단계에 있든 또는 관상의 단계에 있든 불문하고 - 거기에 참여할 때마다 더욱 더 깊은 은혜를 누리게 하고 그들의 영성이 보다 충만하게 실현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귀중한 주의 성만찬은 마땅히 자주 베풀어져야 하며, 마땅히 우리가 거기에 자주 참여하여야 한다.

 

(2) 니세포러스가 가르친 바 심장으로 마음을 내리는 명상 및 예수 기도

두 번째로 나는 고독한 수도자 니세포러스(Nichephorus the Solitary)가 가르쳐준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니세포러스의 가르침은 동방기독교 전통의 영적 스승들의 글을 모아 만든 책 《필로칼리아(Philokalia)》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의 호흡은 공기를 들이쉬고 내쉼이다. 이러한 일을 위하여 섬기는 기관은 폐이고, 폐는 심장을 둘러 있다. 폐로 들어가는 공기는 따라서 심장을 감싸게 된다. 그러므로 호흡은 심장에 이르는 자연스런 방법이다. 당신의 마음을 내면에서 한데 모은 후에 그 마음을 공기가 심장에 이르는 숨길로 인도하라. 그리고 들이신 공기와 함께 당신의 마음으로 하여금 심장 속으로 내려가서 거기 머물게 하라. 형제여, 그 마음이 심장으로부터 너무 신속히 나오는 일이 없도록 길들여야 하는데, 이는 마음이 처음에는 저 내적인 고립과 유폐 속에서 매우 외롭다고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마음이 그것에 익숙해지면, 오히려 밖에서 하릴없이 배회하는 것을 싫어하기 시작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마음은 더 이상 그 안에 머무는 것을 싫어하거나 귀찮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집에서 멀리 떠나 있던 사람이 돌아와서 그의 자녀와 아내를 보았을 때 미칠 정도로 기뻐하면서 그들을 포옹하고 말도 채 잇지 못하는 것처럼, 그와 같이 마음도 심장과 연합되면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하늘 나라가 참으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된다. 하늘 나라가 지금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보았으므로, 그는 순수한 기도로써 그것을 거기에 보존하고 강화한다. 그는 그밖의 모든 외적인 것들은 주목할 가치가 없는 것, 전혀 매력이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내가 그대에게 가르쳐준 대로 그대가 심장 장소에 들어가게 되거든 하나님에게 감사드려라. 하나님의 자비에 감사하면서 항상 그 일 하기를 힘쓰라. 그러면 그것은 당신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줄 것인 바, 이것들은 그밖의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다. 더욱이 그대가 알아야 할 것은 그대의 마음이 심장 안에 굳게 자리를 잡게 되었을 때에 그 마음은 거기서 단지 묵묵(黙黙) 무위(無爲)의 상태로 있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 저에게 (Lord, Jesus Christ, Son of God, have mercy on me)’라는 기도를 항상 반복해 드리되, 그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실행하는 일은 마음으로 하여금 몽상에서 벗어나 미묘 자유하게 하고, 원수가 불러일으킨 사념이 마음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마음을 인도하여 날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더 갈망하게 한다 (Kadloubovsky and Palmer: 33).

 

위에 소개된 니세포러스의 가르침의 요지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마음을 심장 안으로 내리우라는 것이고, 둘째는 심장 안에 내리워진 마음으로 끝없이 예수 기도(Jesus Prayer)를 드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한한 생각을 넘어서 계신 분이므로, 이러한 하나님과의 가장 깊고도 여실한 사귐과 연합을 위해서는 때때로 우리의 사고 활동을 쉬고, 우리의 유한한 생각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우리의 사고 활동을 쉬고 우리의 유한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고 활동의 중심 장소인 두뇌에 집중되어 있는 의식 상태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와 상관하여 우리의 마음을 아래로 심장에로 내리라고 한 니세포러스의 가르침은 인간의 유한한 사고를 벗어나는 한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을 심장에로 내리움은 단지 유한한 사고의 초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을 가슴에로 내리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심장을 중심으로 한 가슴 부분에서 하나님의 현존과 그분의 무언의 말씀과 묘한 능력을 보다 직접적으로 느끼고 체험하게 한다.

위에 소개된 니세포러스의 가르침의 두 번째 부분은 예수 기도이다. 예수 기도도 우리로 하여금 유한한 사고 활동을 벗어나게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 및 하나님과의 사이적 통일적 만남을 이루게 한다. 예수 기도의 특징은 짧고 단순하다는 것이다. 이 짦음과 단순함은 강점을 지닌다. 예수 기도처럼 짧고 단순한 기도는 그것을 반복하는 자에게 잡념과 사량분별심을 넘어 무념의 상태에 거하게 한다. 예수 기도에 나타난 바와 같이, 예수의 자비에 대한 단순하고도 끝없는 간구는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사귐에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예수 기도는 본문 상에 약간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예를 들면 기도문의 중간에 ‘하나님의 아들’이 들어 있는 본문도 있고 없는 본문이 있으며, 또 긑이 ‘저에게’로 끝나는 본문도 있고, 또는 ‘죄인인 저에게’로 끝나는 본문도 있다), 그것을 드리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19세기 중엽을 산 한 익명의 러시아 정교회 신자가 자신의 체험을 기록한 The Way of a Pilgrim and the Pilgrim Continues His Way라는 책에 들어 있는 방법, 즉 심장 박동이나 혹은 호흡에 맞추어서 예수 기도 드리는 방법을 하나 소개드리니, 독자들은 이것도 참고로 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생각해서 실행하기 바란다.

 

첫 번 심장 박동에 ‘주’를 말하거나 생각하라. 그와 같이 두 번째 박동에 ‘예수,’ 세 번째 박동에 ‘그리스도,’ 네 번째 박동에 ‘자비를 베푸소서,’ 다섯 번째 박동에 ‘저에게’를 말하거나 생각하라. 이것을 거듭해서 반복하라....나중에, 즉 내가 지금 가르쳐준 것에 익숙한 때가 되거든, 교부들이 가르쳐주신 대로 예수 기도 전체를 너의 호흡에 맞추어 심장 안으로 넣었다 뺏다 하라. 그리하여 숨을 들여 쉴 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거나 혹은 말한다고 생상하여라. 다시 숨을 내쉴 때는 ‘자비를 베푸소서 저에게’를 말하거나 말하거나 말한다고 상상하여라 (French: 102).

 

예수 기도는 위 심장 박동에 맞추는 법 외에 호흡에 맞추는 법도 있다. 이것은 앤소니 드 멜로가 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에 잘 설명되어 있는데, 그 요지는 숨을 들이 쉬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님”하고 부르고, 다음으로 숨을 내쉬면서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말씀드리라는 것이다 (엔소니 드 멜로: 232).

 

(3) 십자가의 성 요한의 가르침에 기초한 어둠과 빛의 명상법

십자가의 성 요한의 저작 《가르멜의 산길》과《어둔 밤》은 “영혼의 노래(Stanzas of the Soul)”라는 한 공통된 시의 해석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다. “영혼의 노래”의 첫째 연은 다음과 같다.

 

한 어두운 밤

사랑의 간절한 열망으로 불붙어

- 아, 순전한 은총이여 -

나는 아무도 몰래 나갔어라

내 집은 이제 고요해지고 (St. John of the Cross: 68, 295).

 

“어둔 밤(dark night)”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 신학의 한 중심적 메타포다. 어둔 밤은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기에 앞서서 거쳐야 되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어둔 밤은 정화의 밤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서 정화의 어둔 밤은 적어도 두가지 중요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들에 대한 탐욕과 탐착을 버리는 것, 탐욕과 탐착에서 “떨어져 나옴(detachment)” 즉 초연함이다. 하나님 이외의 어떤 것이 우리의 “애념과 애집”의 대상이 될 때에 그것은 “다른 신” 즉 우상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요한, 971: 53). 우리가 초연해야 할 대상 중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행한 모든 선행도 포함된다. 존 웨슬리도 지적한 바와 같이 만약 우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행한 선행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고 우리 스스로가 취하면 결국 우리 영혼에 좋지 않은 결과가 초래 된다 (웨슬리: 204). 토마스 하트의 표현을 빌리면, “선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선에 의해 멸망할 위험에 있다” (하트: 169 f.). 우리가 초연해야 할 또 다른 대상 중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많은 특별한 은사도 포함된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도 하나님 자신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은사에 대한 애착과 집착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에 해가 된다. 하나님 한 분에 대한 “사랑의 간절한 열망으로 불 붙어”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탐욕과 탐착을 떨쳐 내버린 사람의 존재의 집은 고요하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거하실 만한 깨끗한 집이다. “떨어져 나옴”의 어둔 밤은 실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에 다름 아니다.

정화의 어둔 밤의 둘째 부분은 하나님과의 연합이 인간의 이성과 의지와 기억의 타고난 능력을 초월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하여 자신의 능력을 의지할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어둔 밤의 정화를 거쳐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하게 되는 자는 전에 그가 그것에 대한 탐착을 떨쳐버린 땅과 하늘의 모든 선들을 참된 자유 가운데에 온전히 누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것을 선용하게 된다. “초연”과 “비움”의 어둔밤을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은 다음 글에서 잘 요약되고 있다.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르는 것에 네가 다다르려면, 모르는 거기를 거쳐서 가라.

가지지 못한 것에 다다르려면, 가지지 않은 데를 거쳐서 가라.

너 있지 않은 것에 다다르려면, 너 있지 않은 데를 거쳐서 가라 (십자가의 성 요한, 1971: 91).

 

나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어둔 밤” 사상에 기초해서 다음과 같은 명상 방법을 시도할 수 있다고 본다. 먼저 우리의 상상력을 활용하여 “초연”과 “비움”의 어둔 밤이 우리의 존재 내부에 깃들게 한다. 탐욕과 탐착의 불을 꺼버리고, 고요와 어두움이 나의 존재내부에 내리게 한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이성의 빛과 그밖의 나의 모든 능력의 빛을 물리고, 어두움과 빔이 나의 존재의 내부에 내리게 한다. 어두움을 어둡다고 생각할 자아마저도 그러한 생각과 함께 어두움 속에 묻어 버린다. 웨슬리도 우리 영혼이 “무(nothingness)” 내지 “일종의 죽음(a kind of death)”으로 되돌아 가서 “빈탕(void),” 내지 “허공(air)”과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였다 (웨슬리: 205; Wesley: 441). “내 집은 이제 고요해졌다.” 내 존재의 내면에 고요함이 깃들고 무념, 무욕, 무아의 어두움이 가득찰 때까지 어두움의 명상을 한다. 웨슬리은 “텅빈 어두운 허공이 태양 빛으로 가득 찰 수 있게 되듯이” 그처럼 “빈탕(void)”이 된 영혼은 “당신[하나님]으로 채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웨슬리: 205; Wesley: 441).

그러므로 빔과 어둠의 명상 다음으로는 빛의 명상이 이어지는 것이 합당하다. 빛에 관한 다음과 같은 성서의 말씀을 묵상하기 바란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일 1:5).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사 9:2).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사60:1).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8:12).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빛은 세상의 어떤 빛과도 비길 수 없는 빛이다. 하나님의 빛과 그리스도의 빛은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간절한 열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영화롭고 사랑찬 빛을 그려보기로 하자. 어두움의 명상에서 우리의 몸은 어두움뿐이다. 그런데 이제 어두운 우리의 몸 위로, 특별히 우리의 머리 위로 하나님의 빛 곧 그의 영광이 임하시는 것을 상상한다. 흑암에 있는 나에게 큰 빛이 임하는 것을 상한다. 나의 머리 위에 머믈던 그 빛은 이내 나의 정수리를 통해서 나의 머리 전체를 적시고 다시 어깨와 몸통을 거쳐 나의 발끝까지 적신다. 나의 존재는 이제 하나님의 빛, 그리스도의 생명과 영광의 빛으로 가득차 있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몸 안에 충만한 그 빛이 우리의 몸을 통해서 우주의 끝까지 뻗쳐나가는 것을 상상한다. 우주의 끝까지 나간 그 빛은 또 다시 돌아서 우리의 몸 안으로 들어오고, 우리의 몸 안으로 들어 온 빛은 또 다시 우주의 끝까지 나간다. 이것을 호흡에 맞추어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들이키는 숨과 함께 하나님의 빛이 나의 정수리를 통하여 나의 온 몸에 가득 차는 것을 상상한다. 다음 내쉬는 숨과 함께 그 빛이 우주 가장자리까지 나아가는 것을 상상한다. 다시 들이쉬는 숨과 함께 그 빛이 나의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상상한다. 동일한 방식의 상상을 자기 마음에 원하는 만큼 여러번 행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빛이 자신의 정수리 위에 머물러 있음을 잠시 상상한 후 명상을 마친다.

어둠과 빛의 명상에 대하여 관련적 의미를 주고 있다고 생각되어 그에 대한 묵상을 권하고 싶은 성서 본문은 다음의 창세기 서두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 1: 1-3).

 

내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신학적 통찰에 의지하여 제안하는 바 어두움과 빛의 명상은 창세기에 나타난 우주적 규모의 창조 사건이 개인 차원에서 재현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의도한다. 자기 자랑과 자기 의지의 소아(小我)를 흑암 곧 자기 부정의 어두움에 묻어버리고, 그 어두움 위에 하나님의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이 빛으로 임할실 때, 우리의 어두운 존재는 빛의 존재가 된다.

교회사 속에서 빛의 체험으로 유명한 분은 신신학자 성 시메온(St. Symeon the New Theologian, 949-1022)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종종 그 빛을 보았다. 나의 영혼이 고요하고 평화로울 때 때때로 그 빛은 나의 내면에 나타났다. 또 때때로 그 빛은 멀리서 나타났으며, 숨기까지 하였다. 그럴 때면 나는 무한한 슬픔을 느꼈다. 또 다시 그 빛을 못볼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울면서 모든 것들로부터의 완전한 초연함과 또 절대적인 겸손과 순종을 고백드리면, 그 빛은 마치 구름을 쫓아 버리고 서서히 자신을 드러내면서 기쁨을 가져다 주는 태양처럼 또 나타났다 (Lossky: 226).

 

이 어두움과 빛의 명상을 하는 모든 이들이 성 시메온이 누린 은혜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이 명상에서 특기할 점은 빛을 매개로 명상자가 온 우주와 더불어 사이적 통일적 사귐을 갖고, 우주적 사랑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주적 사랑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실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철학자 찰스 핫스혼이 이해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우주를 그 몸으로 삼고 계신 우주적 존재이시니(Hartshorne: 51-63), 즉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적 사랑인 것이다. 존 웨슬리가 강조한 바와 같이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께서 완전하심같이 우리도 완전하게” 되고자 할찐대는 (웨슬리: 119 f), 하나님의 사랑의 우주성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 인간의 모든 문제의 핵심은 우리의 사랑이 너무 좁고 너무 사사화(私事化)되어서, 흔히 나, 내 가족, 내 교회, 내 교파, 내 지역에 제한되거나 내 나라를 넘기 힘들다는데 있다. 나와 내편에 대한 사랑은 흔히 상대방과 상대방 편에 대한 적대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땅끝까지 우주끝까지 창조하신 하나님은 땅끝까지 우주끝까지 그의 사랑이 미치며, 우리에게 우주적인 사랑을 기대하신다. 만유가 우주적인 사이적 통일적 사귐을 향하여 나아가고 우리에게 우주적인 영성의 실현이 요청되는 이 때에, 하나님의 우주적 사랑을 본받는 명상을 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참고로, 동양에서 맹자와 그의 후계자들이 추구한 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지닌 사람이란 결국 우주적 사랑을 체현하여 우주를 내 몸으로 여기는 사람, 하나님의 우주적 사랑을 본받아 체현하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참고, 풍우란: 115 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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