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신대 신학 교수 교실/이은재 교수 교실

교회와 이스라엘- 이은재(감신대교수)

류성련 2014. 11. 21. 02:02

교회와 이스라엘


이 은재(감신대)

들어가는 글.

 현대세계는 개인주의적인 동시에 철저히 대중적이다. 이 말이 함축하는 바는 우리 세계가 보다 역설적인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본질과 의미를 바르게 성찰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성경과 신학 및 역사적인 전개과정을 살펴보아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다원화된 세계 내에서 전-지구화 과정을 겪어야하는 교회의 장래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 ‘교회와 이스라엘’은 종교적,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심지어는 정치적인 크기를 갖는다.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우선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난 뒤, 성경-역사-신학의 순서로 접근하고자 한다.

 다음의 네 가지 원칙은 위의 주제를 다루는 적절한 틀을 제공해준다.

1. 교회의 선택과 이스라엘의 선택 사이에는 나누일 수 없는 연관성이 존재한다. 성경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는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한다.

2.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자신들의 신앙의 근거를 묻고자 할 때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벗어     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3.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와 회당의 삶에서 다양성과 일치성을 찾아냄으로써 현재의 신앙적인     증거, 즉 영성의 자리를 발견하게 된다.

4. 결국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의 만남과 대화는 자신들의 신앙이 경험한 진리의 증거가     올바른 것인지를 확인해주고, 성경의 약속이 성취해가는 과정에 동참하도록 요청한다.


I. 성경의 전승에서 본 교회와 이스라엘.

 교회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기독교의 시작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성경의 증언은 교회의 역사적인 기원만이 아니라 모든 신학적인 성찰을 가능하도록 출발점과 비평적인 기준점(fons et iudex)을 제공해준다. 이스라엘의 성경인 Tenach는 창조주이신 하나님,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선택과 역사를 통해 인도하시는 과정을 담고 있다. 신약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하나님의 역사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과 나사렛 예수의 삶과 사역으로 전개된다. 예수는 도래하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선포하였으며, 이 땅에서 유대인으로 존재했다. 예수의 생애가 유대인으로 규정되었다는 것은 동시대의 토라 해석을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이해했다는 것을 밝혀주며, 따라서 예수가 당시의 종교-정치적인 권위와 갈등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예수의 죽음은 그의 삶과 선포에 대한 결과이다. 다음의 예들을 살펴보라. 막2;23-28/ 7;1-23/ 10;2-12/ 눅6;20/ 10;9 등등.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선포하는데 달려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죽음)는 이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부활)과 관계한다.(눅24;34/ 롬10;9) 부활하신 예수는 성경에서 유대의 칭호인 주(主), 메시아, 그리스도로 인식되며, 그의 죽음은 죄인인 인간을 위한 대속의 희생물(롬3;25)로, “성경대로”(고전15;3) 이루어진 사건이다. 여기에서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들에 대한 소식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관점으로 연결된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동일하신 하나님이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최후의 심판과 새 창조를 대망했던 자들이다. 그들에게 예수의 부활은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예수의 부활과 이 사건을 통해 경험하는 하나님의 영의 임재에 대한 신뢰는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길을 가도록 이끌었다.(행2장, 6-7장) 그들은 자신들을 이스라엘 백성의 일부라고 분명히 이해하였다. 그것은 사해 근교에서 활동했던 쿰란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유대인들은 특별히 “공동체 또는 교회”라는 의미로 에클레시아(ecclesia, 행8;3)로 불렸다. 이 단어는 개별공동체를 뜻하기도 하며 동시에 전체교회를 나타내기도 한다. 엄밀한 의미로 “이스라엘의 종교공동체”이지만, 그리스어 용법은 정치적인 집합체라는 일상적인 표현이다. 그래서 교회는 구약성경의 어법에 맞추어 “하나님의 공동체”라고 기술한다.(갈1;13/ 롬16;16)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공동체가 자신의 결단에 따른 구성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감사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공동체에 대한 고대의 주된 사용법 가운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공동체를 “몸”으로 불렀다.(고전12장/ 롬12;4-8) ‘몸’이라는 표현에는 교회가 어떻게 살고 어디에 근거하는지를 명확히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진술은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서 몸과 머리의 관계로 발전한다. 몸으로서 ‘하나님의 교회’라는 관점은 이스라엘 민족과 분리될 수 없다. 그리스도 신앙은 유대인들에게 존속한다. 물론 유대인들 가운데 하나님을 통해 십자가에 달리신 이가 살아났다는 사실을 믿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간에 갈등이 존재하지만 그들 모두가 여전히 하나님의 다스림을 대망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파괴함으로써(갈1;13-14/ 고전15;9) 예수운동의 종국을 꾀하였던 바리새인이요, 박해자였으나 복음의 선포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로써 부활에 대한 복음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의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즉 이방인에게도 선포되었다. 바울을 통해 백부장 고넬료와 그의 가정이 전도된 내용은(행10장) ‘순결’과 ‘불순’,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전통적인 차별에 대한 의미심장한 전환을 나타낸다.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선포자로 부름 받는다는 것(갈1;15-17)은 “한 하나님이 유대인의 하나님인 동시에 이방인의 하나님이 되신다.”(롬3;29/ 15;8-11)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는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며”(롬6;1-11), 동시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하나이다.”(갈3;28)

 그러나 1세기 후반부에 이방인-기독교인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토라의 의무를 준수했던 유대-기독교인들은 교회에서 점차 주변으로 밀려났고, 교회는 언제나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이 잊혀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교회는 성경과 당시의 이스라엘과 연속성을 갖는다는 점을 무시하고 오히려 이스라엘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히브리서(8;6-13)와 마태복음(21;43/ 22;7)에서 발견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이런 차이는 성경을 대하는 입장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유대-로마 전쟁이후(66-70/73) 유다와 갈릴리 주변의 기독교 공동체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그리스어 성경인 Septuaginta를 사용한 반면 랍비 유대교는 히브리어와 아람어 성경을 인정했다.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 시락서와 솔로몬의 지혜, 마카비 문헌을 성경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하였으나, 유대교는 오히려 시내산의 모세에 집중하여 “구전 토라”를 발전시켰다. 뿐만 아니라 라틴어 성경 Vulgata는 기독교 공동체와 유대교의 간격을 더욱 벌려놓았다. 마찬가지로 종교개혁자 루터는 원문에로 돌아가야 한다(ad fontes)는 성경번역의 원리에 충실하였으나 신학적인 근거로 인하여 더 이상 정경의 일치는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기독교 공동체와 유대교는 정경의 배열순서에서도 차이를 가져왔다.(비교: 말4;5-6// 대하36;23)


II. 역사적 발전과정으로 본 교회와 이스라엘

 우리는 앞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성경의 개념이 예수 부활을 믿는 자들의 공동체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벧전2;9-10/ 딛2;14/ 롬9;25) 동시에 초대기독교는 자신을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통해 예수 부활을 믿는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성원으로 초대를 받은 것이라고 인식함으로써 초대기독교는 자신들의 공동체가 하나님 사역의 지속적이고도 갱신된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이스라엘 민족 간의 關係史는 일찍부터 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요한복음은 예수를 아는 유대인들은 회당으로부터 출교당한다고 지적했다.(요9;22/ 16;2) 이런 결과로 적대적 증오와 신체적인 압박이 제기되었다. 그 첫 징후는 반-유대적 진술에서 발견된다.(살전2;14-16/ 마21;33-44/ 27;25/ 요8;44f) 기실 바울과 마태 그리고 요한은 유대인들이다. 그들이 논쟁적인 한계를 설정한 것은 유대 전통의 연속성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속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이다. 따라서 반-유대적 논쟁은 유대 내적인 갈등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2세기에 접어들면서 교회와 이스라엘 민족 간에 격렬한 논쟁이 심화되는바, 바울의 동반자였던 “바나바서신”을 들 수 있다. 비록 속사도교부들의 문집이 정경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후의 세기는 서로 무관한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랍비 유대교는 3세기까지 교회와 기독교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한편으로 “유대인에 반대하는” 기독교 문헌들이 쏟아져 나왔고, 다른 한편으로 현존하는 유대교를 역사적으로 실존하며 신학적으로 의미 있는 크기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4세기가 경과하면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로마제국의 박해가 마감하고 381년 이후 기독교가 국가종교로 거듭나게 되자, 유대인들에 대한 부당한 동맹이 형성된 것은 자연스런 결과였다. 438년 Codex Theodosius는 유대인들에게 처음으로 법적인 조건을 달고 있는바, 즉 그들의 시민법이 제한되었으며, 공적인 직책들로부터 제외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교도들이나 기독교 이단들과 달리 유대인들은 로마제국 내에서 주거권을 유지했다.

 다음 세기에 유럽에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은 상당기간 평화 상태를 유지했다. 유럽의 통치자들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관심사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거래와 사업의 자유를 허락했으며, 궁정에서의 활동과 시민권도 허용했다. 이때에 많은 유대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마인츠, 보름스, 트로야에 유대 문화와 학문의 중심인 탈무드 학교가 세워졌다. 잠정적인 평화는 1096년의 제1차 십자군 전쟁 때까지 지속되었다.

 십자군 전쟁 기간에 유대인들은 실존적으로 위협을 받았다. 얼마나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하고 회당이 파괴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당시 기독교인들은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으로 유대인들을 굴복시켜야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여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삶을 보호해주었는바, 그 이유는 유대인들의 비참한 실존을 통해 신적인 저주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기독교인들에게 교육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직업금지, 게토형성, 땅의 소유금지, 의복의 제한 같은 법적 억압이 강력하게 작동되었다. 더구나 종교재판소의 운영을 통해 강제로 세례 받은(실은 관습에 의한 것이지만) 유대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했다. 그래서 중세 후기에 유대인들은 중-서부 유럽의 대다수 국가와 도시들에서 추방되었다. 여기에는 고리대금업 같은 경제적인 이유, 종교적인 증오, 걸식수사들의 설교 등이 한 몫을 감당했다. 중세기 유대인들에 대한 두 감정의 병존은 확연했다. 공존과 관용에 맞서 적대감, 제한과 박해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중세기가 기독교 공화국의 시대라 해서 유대교에 일방적으로 대립각을 세웠으리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교황과 신학자들 가운데는 유대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대화를 시도한 이들도 적지 않으나 다만 신학적으로 성찰할 만큼 긍정적인 이해에 도달하지는 못한 것 같다. 이는 십자군 전쟁을 통해 기독교가 이슬람에 대해 보여준 것과 유사하다.

 종교개혁 시기는 유대교에 대해 다양한 관점의 가능성을 보여준 경우이다. 마르틴 루터의 경우 1523년의 저작 “Dass Jesus Christus ein geborener Jude sei”에서 유대교에 대한 개방성을 나타내고 있다. 초기 루터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에게로 회심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사회-정치-종교적인 위험성이 제기되자 입장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의 반-유대적 첫 작품은 “Wider die Sabbater”(1538)이다. 1543년에는 “Von den Juden und ihren Luegen”을 썼는데, 여기에서 유대인들의 회당과 학교가 ‘거짓의 온상’이라고 밝힌 후에 그들의 집들을 파괴하고 책들을 불태우며, 랍비들의 가르침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과격하게 주장하였다. 그에게 유대인을 위한 선교는 더 이상 가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몇몇의 개혁자들은 루터의 태도와 입장에 거리를 두었다. 뉴른베르크 개혁자인 안드레아스 오시안더(Andreas Osiander)는 유대 학자 엘리아스 레비타(Elias Levita)에게 보낸 서신에서 루터의 논증은 객관성이 결여되었다고 기술했다. 츠빙글리의 후계자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는 유대교에 대한 루터의 작품에서 중세의 종교재판소가 마녀사냥을 저지른 것과 유사한 열정을 보았다. 칼빈의 경우 근본적인 입장은 루터와 흡사하나 유대인들과 종종 논쟁을 벌였고, 구약성경을 주석함에 있어 상당수의 유대 문헌들을 활용하였다. 그는 루터와 달리 구약성경의 진술이 오직 그리스도만을 지향하고 있다는 입장에서 물러서고 있다.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신학자들로는 슈트라스부르크 개혁자 볼프강 카피토(Wolfgang Capito)와 바젤 신학교수 마르틴 보어하우스(Martin Borrhaus)를 들 수 있으며, 바젤에서 활동했던 기독교 인문주의자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Sebastian Castellio)는 종교적인 관용을 부르짖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중세 후기와는 다른 입장에서 유대교를 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개신교의 경우 프랑크푸르트와 퓨르트 같은 제한된 지역에서 유대인 공동체가 존속했으나, 카톨릭 통치자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보다 관용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무엇보다 유럽에서는 네덜란드와 체코의 프라하 그리고 폴란드 등지에서 유대인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16-7세기를 지나며 종교적인 관용이 점차 강조되었고, 교파분열의 시대를 맞아 개신교 정통주의에서는 유대교에 대한 기독교 통치자들의 입장에 대해 빈번한 토론이 전개되었다. 유대인들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 압도적이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개신교 예배에 참여하도록 강요해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거나 선교적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 영국에서는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치하에 유대인들이 재정착하도록 허용되었고, 네덜란드에서는 개혁주의 계약신학의 대세로 이스라엘에 대한 입장이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무엇보다 경건주의는 초기 루터(1526년까지)의 입장을 취하며 유대인들에 대한 관계가 보다 적극적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그들을 회심(개종)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철저히 종말론에 근거한 성경해석에 따른 것이다.(롬11장) 할레와 헤른후트는 유대인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들의 언어와 종교적인 관습을 배우고 이해하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7세기 말경 헤센-다름슈타트는 유대인들이 기센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회당을 건축하는 것도 허용하였다. 18세기 초에는 헤센-카셀에서 랍비들이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대다수 지역에서 여전히 유대인들은 사회적 소수자였으며,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 지역에 수용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유대인 해방의 동인은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었는데, 이는 교회에 적대적인 계몽주의의 일환이었다. 그럼에도 프랑스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근대적인 반-셈족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독일에서는 경건주의의 뒤를 이은 각성운동(부흥운동)의 결과로 19세기에 들어서야 유대인들에 대한 해방이 본격화되었다. 개신교 목회자들이 유대교 예배를 참석했으며, 1837년에는 짧은 기간이지만 개신교-카톨릭-유대교가 연합으로 신문을 발간했다. 19세기가 지나가며 인종상의 반-셈족주의가 기승을 부리게 되자 다시금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감이 등장했다.

 20세기 초 프란츠 로젠츠바이크(Franz Rosenzweig)와 레오 벡(Leo Baeck) 같은 걸출한 유대 지성인들이 신학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요제프 클라우스너(Joseph Klausner)는 예수의 생애를 기술한 위대한 첫 번째 유대저술가이다.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1928-33년에 정기적으로 슈투트가르트에서 비-유대철학자들 및 신학자들과 대화를 나누었으며, 영국에서는 유대 학자 클로드 몽테피오레(Claude Montefiore)가 신약성경을 연구하고 주석 작업을 하였다.

 히틀러와 나치 치하에서 독일 제국교회와 고백교회는 상반된 입장을 보였으며, 인종청소 차원에서 유대인 학살이 감행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세계교회회의는 인종차별주의와 반-셈족주의(유대주의)에 대한 결별을 선언하였다. 현재까지 이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보완을 필요로 한다. 즉 정경에 대한 이해, 기독론을 포함한 신론, 구체적인 신앙에 대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입장을 명확히 하기 전까지는 교회와 이스라엘의 문제에 대해 여전히 불완전하고 어정쩡한 태도가 지배적일뿐이다.


III. 현재의 상황

 유럽의 교회들은 1945년이 지나서야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공식적인 만남의 지평을 열기 시작했다. 왜 기독교가 유대교에 대하여 거리를 두게 되었는지, 적대적 관계의 원인들은 무엇인지, 이스라엘에 맞섰던 교회의 자기이해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들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과정이 나라별로 다르게 진행되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폴란드에서는 1920-30년대에 “Barbican” 선교가 진행되었는데, 이는 유대인들을 기독교인으로 회심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수년 동안 폴란드 개혁교회는 바르샤바에서 유대인 게토 근처에 공동체를 세웠다. 또한 잡지 “Jednota”(일치)는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 간에 종교적인 대화가 가능한가? 라는 물음을 토론하기도 했다.

노르웨이는 1814-51년까지 거주권을 제외하고 유대인을 철저히 외면했다. 2차 대전 후에야 비로소 유대인들과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연대성이 고조되었다. 이런 관심사로 인해 유대인 선교가 진행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유대 공동체는 미미하지만 문화-종교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지난 1996년 모세 공동체와의 지속적인 대화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덴마크에서는 17세기 말경 첫 회당이 세워졌는데, 그 이후로 19세기까지는 철저히 반-유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정부가 관용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하면서 1814년 동일한 시민권을 획득하고 일반적인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과 양심에 근거하여 유대인을 박해해야 한다는 규정이 내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떠나게 되었는데, 8000명 덴마크 유대인들 가운데 94%가 스웨덴으로 피신했다. 2차 대전 이후 형편은 나아졌지만 여전히 공식적인 대화채널은 열리지 않고 있다.

네덜란드교회는 17세기 도르트레히트 종교회의를 통해 랍비들과 긴밀하고도 직접적인 대화를 열어놓았다. 특히 구약성경과 예배에 대한 관심사는 19세기 말까지 유럽에서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1940년대 “유대교; 교회에 대한 질문”과 “에다와 토라”(Edda-고대 아이슬란드의 신화, 영웅 전설 및 詩法을 담은 두 권의 책) 같은 주제에 대한 연구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기독교의 관계는 여타 타종교에 대한 관계와 다르다는 점과 기독교가 유대교의 유산을 상속했다는 사실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오랫동안 유대인과 발도파(Waldenser)가 종교적 소수로 존재했듯이 개신교 역시 어려움을 겪었다. 1848년 개신교와 유대교는 비로소 종교의 자유를 제공받았고, 때문에 양자 간에 친근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접촉은 2차 대전 이후에야 가능했으며, 여전히 다원화된 사회 분위기에서 소수의 권리를 방어하고 보호하는 차원에 머물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박해와 추방의 역사가 생생한 곳이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구약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를 따라 유대교에 친근하다. 1942년 바르트 신학의 영향으로 개혁교회는 정부의 인종차별주의에 맞서 유대인들과 연합전선을 폈다. 2차 대전 후에 위원회가 발족되어 유대교와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하고자 노력하였으며, 1990년 “기독교 신앙의 유대적 뿌리”라는 주제로 종교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1941년 스위스에서는 요4;22절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이 고통스럽게 진행되었다. 문제는 시제에 대한 번역인데, “구원이 유대인으로부터 왔다(kam)/ 온다(kommt).”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위원회는 현재시제로 결정하고, 그 의미는 기독교 공동체에 반-셈족주의는 일치(해당)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체코 공화국은 보헤미아 형제단의 형향으로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을 기울여왔다. 종교개혁의 뿌리를 소중히 여기는 보헤미아 형제단은 성경번역과 주석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독일에서는 1961년 베를린에서 열린 교회주간(Kirchentag) 행사에 유대인들과의 대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 이후 1975, 1991, 2000년 세 차례에 걸쳐 “기독교인과 유대인”이라는 주제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반-셈족주의 청산,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책임과 책무, 유대교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불가피한 연합, 이스라엘 국가의 의미, 이스라엘의 남겨진 선택 등과 같은 심도 깊은 논의들이 연구물로 나왔다.

오스트리아에서는 1998년 “방향전환의 시기”라는 종교회의를 열고 교회의 책임과 의무를 선포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약은 순전한 은혜로써 세상 끝 날까지 지속된다.”

 그 밖의 나라들에서 유대인들의 숫자는 미미하다. 살펴본 대로 나치와 2차 세계대전은 유럽사회에서 유대인들에게 참담한 시련을 가져다주었고, 이후에야 화해와 용서의 관계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열려있다. 1948년 독립한 이스라엘 국가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에 대한 신학적인 진술은 유대인-기독교인의 관계를 넘어 모슬렘까지도 평화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물음이 이제까지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다는 것도 시인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지난 2000년 11월 독일에서 개최된 종교회의가 “신약성경은 유대인-기독교인들과 이방인-기독교인들로 구성된 교회를 증언하고 있다”고 확인해 준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하나님이 세상과 화해하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증거를 어느 정도까지, 어떤 방법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는 이스라엘을 떠나서는 결코 완전하게 다루어질 수 없다.


나가는 글.

 이 글을 마치기에 앞서 주어진 결론은 다음과 같다. “교회는 이스라엘의 유산상속으로부터 자유롭지도 않고 때문에 이스라엘로부터 분리 역시 불가능하다.” 그리스도 사건과 교회의 선택이라는 기독교 신앙은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신실하신 증거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에 두 길이 있다; 이스라엘의 길과 기독교의 길. 하나님의 계시와 구속사역이라는 관점에서는 두 개의 길을 논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양자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라면, 즉 성경(신-구약)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구속사의 관점에서 기독교와 유대교의 연관성을 묻는다면 가능하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관점에서 말이다.

 새 계약과 옛 계약의 문제 - 렘31;31ff// 고전11;25/ 히9;15/12;24

 민족들이 시온으로 순례의 길 - 사2;3f/ 미4;2// 롬9;4f/ 10;4

 하나님의 한 백성 - 롬9-11장/ 고전15;28              


부록: 유대인들에 대한 경건주의의 입장

 독일 경건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필립 야콥 슈페너는 1675년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 PD)을 통해 유대인에 관한 언급을 했다. 슈페너는 교회의 타락한 상황이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더욱 부채질한다고 경고하면서(PD. 36,38-37,7)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불경한 것에 대하여 거센 항의를 하고 있다.(PD. 41,11f) 이는 이미 루터가 유대인들에 대하여 비난하였던 내용과 다름없다. 물론 슈페너가 유대인 선교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이나 단체를 설립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교회의 미래를 긍정하면서 성경에 입각한 희망을 논하고 있다.

 여기에서 제시된 두 가지 사실은 로마-카톨릭 교회(바벨 또는 적그리스도)의 몰락과 유대인의 회복이다. 후기 경건주의가 계20장의 천년왕국설을 주장한 반면, 슈페너는 계18-19장의 바벨의 몰락과 롬11;25f/ 호3;4f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을 논하고 있다.(PD. 44,24-45,7ff) 바로 이 점이 루터와 정통주의로부터 경건주의를 구별하는 차이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슈페너가 이런 주장의 창시자는 아니다. 30년 전쟁 후에 요한 게오르크 도르세(J. G. Dorsche, 1597-1659)는 롬11;25ff를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주장한 바 있다. 다만 관점의 차이는 도르세가 종말의 표지로 이스라엘의 돌아섬을 말한 반면에 슈페너는 천년왕국이 도래하기 전에 교회의 더 나은 상태가 올 것임을 밝히면서 유대인들의 회복을 주장한 것이다.

 이후 슈페너의 견해는 경건주의의 대표적인 입장이 되었고, 이로써 유대인들에 대한 관용과 선교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할레 경건주의자 요한 로더(J. Loder, 1687-1775), 요한 하인리히 칼렌베르크(J. H. Callenberg, 1694-1760), 요한 뮬러(J. Mueller, 1649-1727)에 의해 유대선교 프로젝트(Institutum Judaicum)가 형성되었다. 그 후 요한 게오르크 비드만(J. G. Widmann, 1693-1753), 요한 안드레아스 마니티우스(J. A. Manitius, 1707-1758), 슈테판 슐츠(S. Schultz, 1714-1776)가 차례로 유대인 선교에 착수하여 독일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걸쳐 유대인 공동체를 방문하고 그들과 접촉하며 문서사역을 통해 회심을 위해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