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서론
전통적으로 조직신학은 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의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져 설명된다. 엄밀히 말하자면 서론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론”들이 조직신학이라고 할 수 있고, 이 여섯 가지 문제에 들어가기 위해서 미리 다루어야 하는 내용이 서론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학문에서나 서론에서는 연구의 대상(What)과 연구의 방법(How)의 문제를 다루게 마련이다. 특히 신학에서는 연구의 의의(Why)의 문제가 꽤 중요하게 다루어지며, 연구자(Who)의 문제와 연구기간(When)의 문제도 상당히 중요하게 언급되곤 한다. 연구 장소(Where)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주로 그것은 How의 문제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이 문제들을 아주 간략하게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여기서 다루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거나, 대부분의 개관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적어도 다음에 소개되는 책들 중에 한두 권이라도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는 기회가 있기 바란다.
1. 연구의 의의
많은 조직신학 책들이 “종교(Religion)”라는 장으로 서론을 시작한다. 조직신학 개요서로서 많이 읽히는 Louis Berkhof의 기독교 신학 개론 역시 “종교”로 시작하고, Herman Bavinck의 하나님의 큰 일은 “최고선”을 논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이는 모두 신학의 의의를 밝히기 위함이다. “왜 사람들은 신학을 하는가?” 이는 “왜 사람들은 종교를 가지며 신을 찾는가?”의 문제이다. 인간이 “불가피하게 종교적”이라는 사실을 바라볼 때 우리는 신학 역시 인간에게는 불가피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Bavinck는 인간이 생리적인 욕구를 넘어서 “이성과 양심에 의해서 높고 다른 선한 것에 이르고자 하는 의지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여하튼,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주위에 있는 것을 초월한 대상, 가치, 숭고함 등을 추구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생리적인 욕구를 해결하는 수준에서 끝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대부분의 전통적인 신학자들은 인간이 이러한 모습을 가진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전제로 하여 지음을 받았으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상황에 처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렇게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상황을 견딜 수가 없게 되어 있으며, 그럼으로 인해서 나름대로의 가치를 찾아 헤메게 된다. 아주 넓은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이 바로 “신학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신학이란 결코 사치스러운 것이 아닌,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또한 인간이 인간되기 위한 행동인 것이다.
2. 연구의 대상
신학은 무엇을 연구하는가? 이 문제는 그리 단순한 질문이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서 신학의 “ism”이 갈라지게 된다. F. Schleiermacher(1768-1834) 이전에는 신학이란 “신지식”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Schleiermacher는 신학의 방향을 급선회하여, 신학은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생활, 신앙활동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그는 “자유주의 신학”의 문을 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Schleiermacher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으며, 신학은 하나님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들 외에도 신학의 대상에 대한 규정은 매우 다양하다. Daniel L. Migliore는 신학을 “질문을 던지는 신앙”으로 규정한다. 그에게 있어서는 신학의 대상이 반드시 하나님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아마도 전통적인 입장과 자유주의적 입장을 함께 포괄하는 입장에 서려고 하는 것 같다.
Migliore의 생각이(그만의 생각은 물론 아니겠지만)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는 것은, 현재 소위 보수주의 신학교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전통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성경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에 대한 입장은 상당히 열려 있는 편이다. 성경신학, 또는 성경학이라함은 하나님을 그 연구의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성경을 그 연구의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신학, 즉 교회사는 하나님을 그 연구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실천신학 역시 하나님을 연구 대상으로 두고 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설교학, 목회학 등으로 대변되는 실천신학은 분명 Schleiermacher가 주장한 바대로 인간의 종교생활을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구의 대상이 무엇이냐를 구체적으로 지적하기보다는, 그 방향성이 어디로 잡혀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학은 성경을 그 직접적인 연구대상으로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교회사 역시 교회의 역사를 다루지만, 그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밝힘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 하는 태도이다. 실천신학 역시 마찬가지로, 사람의 활동을 연구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게 된다. 만약 그러한 방향성을 잃게 된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신학이라 할 수 없고 종교학, 또는 철학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대상을 규정한 언급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신학은 하나님을 연구하는 학문, 또는 행위, 삶이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3. 연구의 방법
대상과 방법은 신학서론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부분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기 위해 신학한다. 그러나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칼뱅이 말한 바대로, 만약 우리의 이성이 하나님의 존재를 직접 수용한다면, 아마 우리의 이성과 존재까지도 모두 불타버릴 것이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실험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며, 관찰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우리의 오감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하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며, 그러한 것을 했다고 주장하며 그것에 근거하여 신학하는 것은 이단적인 행동이다.
그렇다면 신학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셨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었으며, 신학이란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창조하신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자신을 인간에게, 인간이 수납할 수 있는 방법으로 드러내 보이셨는데, 우리는 이것을 “계시”라고 부른다. 신학은 오직 계시에 근거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이 계시를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 왔다. 어떤 사람들은 “초자연계시”와 “자연계시”로 나누기도 하는데, 이는 자연주의, 즉 과학주의의 세계관의 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서,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있는 시각이라고 생각된다. 계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나뉜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에 분명한 경계선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대략 범주화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 있고, 하나님께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구분하셔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오직 우리에게 “계시”를 주셨을 뿐이다. 그런데 그 중에 우리가 특별하게 느끼는 계시가 있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특별계시이다.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창조를 유지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라고 하면, 특별계시는 그 중에서도 인간의 구원, 구속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계시는 그 대상을 보편적인 사람들로 하고 있지만, 특별계시는 하나님의 택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조금 모호하긴 하다.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택자들이 아닌 경우에도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들은 그 특별계시를 수납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특별계시인가, 일반계시인가? 이렇게 생각하면 일반과 특별의 구분이 그리 분명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언급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를 주신 것이며, 특별과 일반의 구분은 인간의 편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여하튼 우리는 계시가 있기에 신학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계시에 근거해서만 신학해야 한다.
4. 성경
아직 연구의 방법이 끝나지 않았다. 계시에 대해서 논한 후에는 반드시 성경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계시에 의해서 신학한다”고 말할 수가 없다. “무엇이 계시인가?”의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분명 우리는 일반, 특별 계시를 받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하지 못한다. 벌레 한 마리, 풀 한 포기에는 하나님의 솜씨가 들어있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즉 계시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성은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부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적인 소경이기에 만물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은 우리의 죄성이 계시를 거부한다. “cannot”의 문제라기보다 “will not”의 문제이다. 우리의 죄성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하나님의 계시를 피하고, 거부하고, 막으려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한계상황을 치유하시기 위해 성경을 주셨다. 그런데 성경에 대한 이해도 매우 다양하다. H. Bavinck는 “성경은 계시 자체는 아니고 계시가 알려질 수 있는 기록이요, 도해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계시와 성경을 구별하거나 분리, 단절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가 있고, 성경은 그 계시를 그대로, 무오하게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기록된 계시”이다. 그에 비해서, 성경은 계시를 보기 위한 계시라는 입장도 있다. 그 자체가 계시이면서 또 그것을 통해서 계시를 받을 수 있다. 칼뱅의 표현대로, 우리는 성경의 안경을 쓰고 하나님의 계시를 보게 된다. 성경을 통해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수납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성경은 기록된 계시로서, 계시를 검증하기 위한 잣대임과 동시에 그 자체가 계시임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그 어떠한 계시보다도 분명하게 우리에게 제공한다. 비슷한 입장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를 통해서 성경의 해석과 이해는 상당히 달라지게 된다.
성경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성경의 영감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성경이 “영감되었다”고 믿는다. “성경의 영감은 성경의 저자들이 계시를 정확히 기록할 수 있게 하고, 그 결과로서 그들이 기록한 것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성경의 저자들이게 미친 초자연적인 영향력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을 위하여 그의 계시를 반복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어떤 방식이 있어야 한다.” 계시를 보존하기 위한 가장 유효한 방식은 기록이었다. 그 기록을 함에 있어서 계시가 왜곡되지 않고 그대로 기록될 수 있도록 하는 초자연적인 힘이 바로 영감이다. 그런데, 이러한 영감에 대한 개념은 일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영감설에는 그 성질에 따라 기계적 영감설, 직관적 영감설, 역동적(조명적) 영감설, 유기적 영감설 등이 있고, 그 범위에 따라 사상 영감설, 부분 영감설, 완전축자 영감설이 있다. 기계적 영감이란 성경저자가 자신의 언어로 쓴 것이 아니라 마치 타이프라이터와 같이 기계적으로 받아적었다는 주장이다. 직관적 영감이란 사람이 이미 가지고 있던 고등한 사상, 이성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발달하게 되어서 기록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며, 역동적 영감이란 기록이 영감된 것이 아니라 기록자들이 영감되었기 때문에 본문에는 하나님의 뜻의 깊이가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며, 유기적 영감이란 성령께서 저자를 완전히 유기적으로 영감하셔서 저자의 의도대로 기록한 것이면서도 그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었다는 주장이다. 사상 영감설이란 성경의 중요 사상만이 영감되었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전통적인 주장인 유기적 영감과 완전축자 영감을 주장한다. 논의의 방향이 바뀌지만, 만약 이 두 가지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성경적인 신학이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4. 연구자
연구자의 문제는 그리 중요하게 논의되지는 않지만, 잠시 다루기는 해야 할 것 같다. 신학은 누가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전통적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만이 신학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인간의 본성상 가치와 절대자에 대한 추구를 하는 사람들은 구원받지 않은 자들 중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다 신학할 수 있다는 말도 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 넓은 시각으로 본다면 그들 역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신학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신학을 통해서는 전혀 구원에 이를만한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신학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이방 종교들은 모두 하나님의 일반 계시에 의해서 성립된 것들이지만, 성경이라는 규범을 통하지 않은 채로는 계시를 접한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지 못한다. 그들이 발견한 지식이란 모두 왜곡되고 틀린 것들로서, 그러한 지식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참 지식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구원받은 자들이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5. 연구 기간
연구 기간은 개인적으로는 사망하기 이전까지요, 우주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까지이다. 개인적 종말이나 우주적인 종말을 맞을 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존전에서 직접 그분을 뵙게 될 것이다. 그것이 신학의 완성이다. 이 땅에서는 궁극적인 신학의 완성을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받는데 필요한 계시를 성경을 통해 주셨을 뿐 모든 지식을 우리에게 나타내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죄와 한계성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될 그 때에만이 신학은 완성된다. 그 때에는 더 이상 신학은 필요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신학은 개인적, 우주적 종말 이전까지 유효하다.
6. 연구의 목적
“연구의 의의”와도 통하는 것이지만, 앞에서 다룬 것이 “신학의 동기”라고 한다면, 여기서는 신학의 목적을 다루게 된다. 신학의 목적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 신학자들이 많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우리가 신학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거룩해져야 한다. 곧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 역시 신학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또 다른 표현을 사용한다면, 생명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학은 영적인 생명을 얻고,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목적 이외에 다른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목적을 가지고 신학할 수 없다. 만약 그러한 목적으로 신학한다면 그것을 통해서는 참 지식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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