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트만의 삼위일체론
2014년 9월 29일
박사과정 이종인
들어가며
몰트만의 삼위일체론 2.1. 이전 삼위일체론의 극복 2.1.1. 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 비판 2.1.2. 칼 라너의 삼위일체론 비판 2.2. 파토스적 하나님 2.3. 사회적 삼위일체론 2.4. 형성되어가는 하나님 2.5. 종말론적 단일신론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의 공헌과 한계 3.1. 공헌 3.2. 한계
나가며
* 참고문헌 |
들어가며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을 한 마디로 말하라면, 열린 삼위일체론이다. 달리말해 개방되어 있고 교제 속에 형성되어가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정형화되어 있고, 끝나버린 형태가 아니라 삼위간의 교제와 인간과의 교제가운데서 아직도 진행되는 열린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정태적이고 초월적인 분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현실에서 발생하는 끔찍한 악의 문제 즉, 신정론의 문제의 벽에 막힌다. 하나님은 교통 속에서 파토스적 열정과 사랑을 지니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성경의 증거는 무감정의 하나님이 아니라 열정과 애끓은 감성을 지닌 하나님을 전제한다. 전통교리에서 다루는 절대타자로 분리된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 숨 쉬고 소통하고 교감하는 파토스의 하나님을 그의 삼위일체론에서 담아내고자 했다.
몰트만은 삼위일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들을 그의 책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루고 있다. 삼위일체론이 관념적인 이론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미래를 열어내는 희망의 근거로 파악한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는 연결되어 있고, 인간역사와 세계에 대한 희망은 삼위하나님의 나라로 구체화 된다. 몰트만은 요아킴 피오레가 갑바도키아 교부들에게서 차용한 삼위의 나라 즉, 아버지의 나라에서 아들의 나라로, 아들의 나라에서 성령의 나라인 영광의 나라 발전시키는 연대기적 이해를 변형시킨다. 세 시대로 나누는 요아킴의 양태론적 이해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를 삼위일체론적으로 파악한다.
2. 몰트만의 삼위일체론
2.1. 일신론적 삼위일체론의 극복시도
몰트만은 서방교회사에서 지속되어 왔던 단일신론적 삼위일체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는 서구교회가 양태론과 사벨리안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이전 의 삼위일체론 신학이 일신론적이고 양태론적으로 이루었다고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시도했다. 그는 서방전통의 일신론적 삼위일체론을 극복하기 위해서 동방 신학적 전통과의 조화를 시도했다. 아들의 십자가에 매달린 역사적 사건들과 같은 구체적인 역사를 통해서 자신을 스스로 변화시키고 형성되어져가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논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삼위일체론을 전개하고자 시도한다.
‘절대타자’로 세계와 무관하게 독자적인 무감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벗어나 세상과 관계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나간다. 십자가의 사건을 단지 인간의 구속을 위한 속죄의 사역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재적인 연대와 함께 세계의 고통의 경험에 동참하시는 사건으로 파악한다.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조화를 시도하고, 종말에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미래를 향해 형성되어져가는 개방된 삼위일체론을 전개한다.
개혁신학의 대표 주자였던 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을 일신론적이라고 비판하고, 더불어 칼 라너의 삼위일체론을 사벨리안주의적인 양태론이라고 비판한다. 전통적인 하나님의 불변성을 벗어나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세계와 관계하시고 영향을 주고 받으시는 사귐의 하나님, 변동과 변화, 열린 삼위일체 하나님의 논의를 전개시키기 위해 칼 바르트와 칼 라너를 비판한다.
2.1.1. 칼 바르트 삼위일체론 비판
몰트만은 정치적인 맥락에서 일신론적 삼위일체론의 폐해가 크다고 보았다. 군주론적인 삼위일체론은 이전의 교황체제와 제왕적인 군주체제를 지지하는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고 보았다. 바르트의 일신론적 기술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모든 사역들을 일신론적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라고, “행동과 수용의 주체성이 신적인 세 인격으로부터 하나의 신적 주체로 환원될 경우, 세 인격은 하나의 동일한 주체의 존재 양식 내지 존립 양식으로 전락될 수 있다. 신학적으로 볼 때 이것은 초대 교회가 배격한 사벨리안주의적 양태론의 개선행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주권의 주체가 누구에게 한 분에게 귀속되어 있는지? 아니면 삼위일체로 모두에게 속해 있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보고 있다. 세 인격의 주체가 한 분을 위해 폐기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주권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삼위일체로부터 출발하는가? 아니면 거꾸로 하나님의 주권을 삼위일체론을 통하여 한 분 하나님의 주권으로 확립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출발하는가의 문제는 신론(神論)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은 그의 주권의 동일한 주체로 전제된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적 일신론”으로 기술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은 주(主)이시다는 앎을 전개하는 것에 불과하다.
몰트만은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을 ‘삼위일체론적 단일군주론’이라고 비판한다. 몰트만이 바르프의 삼위일체론을 파악할 때, ‘하나님의 세 존재방식’인 사벨리안주의의 양태론과 유사하게 파악되었다. 바르트는 삼위의 위격들을 강조하지만, 성령의 경우에는 성부와 성자를 연결하는 ‘사랑의 끈’ 정도 밖에는 파악하지 않는다. 실상은 삼위일체가 아니라 ‘이위일체’라고 비판한다. 실상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보는 셈이다.
세 가지 존재 양식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은 그의 계시의 능력, 곧 성령에 있어서의 주체성을 증명할 수 없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결합시키는 사랑의 공통적인 끈에 불과하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의 자기 개방의 능력”이다. 그러나 이 끈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대한 아버지의 관계 안에, 또 사랑하는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관계 안에 이미 주어져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들 상호간의 관계 속에서, 영원한 태동과 영원한 희생 안에서 이미 하나이다. 그들의 상호 관계를 사랑으로 생각하기 위하여 삼위일체의 제 3의 인격은 불필요하다. 성령이 단지 분리된 것은 동일성에 불과하다면, 그는 행위의 중심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렇다면 그는 에너지이지 인격은 아니다. 그는 하나의 관계이지 주체는 아니다. 절대 주체의 반영의 “삼위일체”에 있어서는 사실상 이위일체(二位一體)가 지배하고 있다.
몰트만은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이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하는데로 나아가고, 결국에는 성자의 인격까지 성부에게 귀속되는 ‘관념주의적 양태론’으로 회귀한다는 비판은 옳다. 결국에는 위격적으로 단 하나의 하나님 즉, 성부의 인격만 남게 된다. 결국 양태론이나 역동적 단일신론의 형태가 되는 셈이다. 결국 ‘하나님의 세 존재방식 안에 있는 한 분’으로 바르트의 주장은 ‘세 번의 반복으로 존재하는 한 분’에 다름 아니게 된다. 몰트만은 개혁신학의 거두로 인정받고 있는 바르트의 ‘일신론적 삼위일체론’을 바르게 파악했다. 갑바도키아 교부들과 칼뱅의 전통적인 위격들의 상호소통과 페리코레시스적 원리에도 충실하지 못한 논리전개인 셈이다.
2.1.2. 칼 라너 삼위일체론 비판
몰트만은 『삼위일체와 하나님나라』에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 비판과 더불어 칼 라너의 삼위일체론의 비판을 위해서 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 라너의 삼위일체론의 전개는 바르트와 대동소이해 보인다. 몰트만은 “칼 라너(Karl Rahner)는 깜짝 놀랄 만큼 칼 바르트와 비슷하고 거의 동일한 전제를 가지고 그의 삼위일체론을 전개한다. 그리하여 바르트에 상응하는 결과에 도달한다.”고 말한다. 몰트만은 라너의 삼위일체론을 삼신론적이며, 디캄프의 신 크롤라주의적 명제의 반복이라고 비판한다.
라너의 견해에 의하며, 하나님 안에 세 인격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 안에 세 가지 상이한 의식, 정신적 활동성, 행동의 중심 등이 있다는 오해를 오늘날 거의 불가피하게 초래한다. 삼위일체의 세 인격을 상이한 행동의 중심을 가진 세 가지 상이한 ‘인격성’으로 생각하는 것은 삼신론적이며 따라서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세 ‘주체성’이 의미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인격의 개념으로부터 멀리해야 한다. … 라너는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의 본성, 하나의 인식, 하나의 의식”에 대한 디캄프의 신 스콜라주의적 명제를 반복한다. 이 명제를 바르트도 추종하고 있다.
몰트만은 칼 라너가 삼심론을 피하기 위해서 양태론에 빠졌다고 보았다. 라너의 ‘세 존립방식’이란 세 가지의 비인격적 존재방식이기 때문이다. 삼위가 서로 구분되는 의식과 행동의 주체적 중심을 가지고 있지 못한 까닭이다. 결국 라너의 삼위일체론에는 실질적으로 위격상의 구분이 지워지는 셈이다. 바르트와 함께 라너 역시 하나의 주체된 하나님으로 환원된다. 주체는 한 분 즉, 성부 하나님이다. ‘세 존립방식’은 ‘삼중의 자기전달’의 반복일 뿐이다. 칼 바르트와 칼 라너 모두가 삼신론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양태론에 빠져버린 것이다. 달리말해, 군주론적 일신론의 주장에 다름 아닌 셈이라고 비판했다. 김석환은 말한다.
라너에게 있어 단 하나의 유일한 하나님, 주체는 아버지이시다.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자기전달의 수단이실 뿐이고, ‘우리 안에 있는’ 성령께서는 그 장소이실 뿐이다. 만일 그렇다면 아들의 자기 전달과 자기희생에 대하여 어떻게 말해질 수 있겠는가? 구원의 역사가 ‘아버지의 자기전달’로 환원될 경우, 아들의 역사는 더 이상 인식 될 수 없다. 몰트만에 의하면 신적인 본질은 ‘아버지의 자기전달’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적인 자기전달 과정에 있다. 몰트만은 바르트가 하나님의 주권의 계시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를 강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라너가 ‘하나님의 자기전달의 절대적 비의무성’을 강조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이 하나님의 실체이고 또 하나님의 실체가 그 자신의 자기전달이라면,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구분이 포기될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세계의 구분성마저 상실될 염려가 있다는 것이다.
2.2. 파토스적 하나님
몰트만의 저서『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은 고통당하는 이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자유적 주권에 따라 우리의 고통에 함께 가담하시고, 묶이는 연대다. 몰트만이 이해한 하나님은 칼 바르트의 규정처럼 “절대타자”로 규정되어 있어 인간의 어떤 고통과 아픔에도 무감각한 존재로 계시지 않는다. 전통적인 신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조금도 결핍됨이나 부족함이 없는 존재다. 스스로 영광으로 충만하고 완전한 만족의 상태로 계신 초월자이다.
몰트만은 정형화된 하나님으로 존재하지 않고, 아들을 이 땅에 파송하시며, 내어버리시는 고통당하는 아버지로 이해한다. 아들은 성육하여 낮아지고, 고통의 세상 한복판에서 죄를 걸머메고 십자가의 고통에로 올라갔다. 아버지는 버림당한 채 고통으로 신음하는 아들로 인해 고통 한다. 십자가가 인간의 고통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고통하고 신음하는 자들에게 십자가로 응답하는 사건으로 파악한다. 하나님은 무감각의 존재가 아니라 파토스적 하나님으로 파악한다.
몰트만은 과거에 인간적인 측면에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만을 강조한 기독론을 비판한다. 그는 예수의 십자가와 고난을 삼위일체론적인 접근을 제안한다. 하나님의 무감각에 대한 이해는 플라톤적인 영향으로 파악한다. 몰트만이 하나님의 고난 받으심에 대한 근거는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에서 찾는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시고 어떤 운명에도 붙들리거나 예속되지 않는다. 대신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의 파토스로 인해 언약을 맺고, 스스로를 언약에 묶으신다. 그리스도의 인성만이 아니라 신적인격도 고난을 받았다는 점에서 루터의 ‘속성교류’적 측면을 수납하는 것처럼 보인다.
몰트만은 에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성부 수난설’이나 아버지의 직접적인 죽음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십자가 사건은 삼위일체론전 관점에서 파악할 때, 아들을 내어준 아버지의 고통으로서 가담한다고 본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신데, 부활을 통해서 죽은 이가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라고 이해될 수밖에 없다. 비로소 그의 부활의 빛 속에서 그의 죽음은 특별하고 일회적인 구원의 의미를 얻게 된다. 그렇지 아니할 경우 그의 죽음은 이 의미를 얻을 수 없으며 그가 영위한 삶의 빛 속에서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은 십자가를 지나가 버린 날짜나 혹은 하늘의 영광에 이르는 도상에 있어서의 통과과정으로 상대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종말론적인 구원의 사건으로 승화시킨다. 왜냐하면 부활만이 누가 여기서 본래 고난당하였고 죽었는가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리스도의 인격은 분리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위격적 전달’을 통해 속성전달이 이루어지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과 똑같은 의미에서 속성이 전달받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역시 파토스적 하나님의 자유가 그 원인이다. 하나님의 고난의 신학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16)라는 성경의 기본명제에 근거한다. 사랑은 선의 자기전달이다. 사랑은 다른 존재 안에 들어가며, 참여하고, 다른 존재를 위하여 자신을 바칠 수 있는 선의 능력이다. 사랑은 살고자하고 삶을 주고자 한다. 몰트만은 “하나님은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사랑 존재 자체이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그는 사랑하는 자이며, 동시에 사랑을 받으며 또한 사랑 자체이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고난의 근거가 바로 파토스적 하나님의 자유, 사랑하시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창조적인 사랑은 고난을 당하는 사랑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고난을 통하여 사랑받는 자의 자유를 위해서, 창조적으로 그리고 구제하면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 세계와 함께 당하는 고난, 이 세계로 인한 하나님의 고난, 이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고난은 그의 창조적인 사랑의 최고의 형식이며, 이 사랑은 세계와의 자유로운 사귐과 이 세계 안에서의 자유로운 답변을 원한다.”
교부신학은 하나님이 오직 성육신 안에서만 고통을 당하셨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이 수난을 당하는 것의 불가능에 대한 이해가 너무도 강력했던 탓이다. 씨릴의 주장처럼 ‘고통당할 수 없는 존재로서 고통당하셨다.’는 표현은 고통당하는 것의 불가능한 존재의 고통당하심에 대한 어렵고도 애매한 표현이다. 논리적으로도 만족할 만하지 않다. 고통당하는 주제가 존재하지 않은 고통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몰트만은 칼케돈 전통에서 십자가에서의 하나님의 고통에 대한 부분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한다.
논리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 안에 단일한 신적 주체만을 인정하는 칼케돈 정통은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 어떤 고통이든 고통이 발생했다는 주장과 하나님은 전적으로 고통당할 수 없는 존재라는 주장 가운데 반드시 하나를 부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오직 성육신 안에서만, 즉 예수의 인간적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경험함으로써만 고통당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매우 일관성 있는 주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먹지도, 주무시지도, 두려워하지도, 의심하지도, 죽지도 않으시는 분이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슬퍼하시고, 분노하시고, 열망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자신의 얼굴을 숨기신다. 몰트만은 “하나님은 우리처럼 변화와 고통에 매인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 하나님은 결코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할 수 있고, 고통당할 수도 없다는 뜻까지 내포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적 한계들을 초월하신다는 말이 그분이 성육신을 통해 모든 인간적 한계들을 스스로 취할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배제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적절하게 말하기 위해서는 신인동형론적 언어와 부정의 언어가 모두 필요하다. 하지만 그 두 가지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몰트만은 신정론의 문제에 있어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파토스적 사랑을 언급한다. 그가 말하는 희망 속에는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위로만이 아니다. 고통에 맞서는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저항도 발견된다. 십자가와 부활의 모순은 현실과 하나님의 약속의 사이의 차이에서 발견된다. “십자가와 부활의 변증법으로부터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변증법적 개념이 출현한다. 약속의 하나님은 세상과 모순됨으로써, 그러한 모순을 초월함으로써 세상을 구속”하시는 까닭이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개념을 고통당하는 자들과 함께 고통당하시는 파토스적 사랑으로 본다. 고통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ㅍ됨의 사랑, 사랑의 연대 말이다.
2.3. 사회적 삼위일체론
몰트만은 그의 저서 『신학의 방법과 형식』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에서 세 가지의 주요한 관점이 열렸다고 고백하고 있다. 첫째가 <정치신학>이다. 군주론적인 단일신론적인 형태가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의 출현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다고 보았다. 둘째는 <십자가의 신학>이다. 전통적으로 십자가는 인간의 구원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물어왔다. 하지만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십자가가 하나님께는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신학적 질문으로 전환시켰다.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의 십자가란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아버지의 고통’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만들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사건이기 전에,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는 내재적인 사건이다.
셋째는 <정교회 신학>에 대한 부분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으로 서방신학과 동방신학은 갈라섰다. 핵심 쟁점은 필리오케(Filioque)문제이다. 몰트만은 서방신학과 동방신학과의 화해를 시도한다. 그는 필리오케라는 용어는 불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동‧서방을 묶으려 했다. 그는 말한다.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나온다면, “아들”은 이미 항상 현존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삼위일체론적으로 볼 때 “아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Filioqe의 첨가물이 없을 때, 아들은 아버지는 물론 성령으로부터 나올 수 있으며, 이로 인하여 기독론은 성령론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더 풍요롭게 된다.
몰트만은 세계의 역사를 삼위일체적 역사로 파악한다. 세계의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완성에 이르기까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세계를 영원한 삶 속으로 이끄신다고 말한다.
성부가 성자를 통하여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세계를 창조하며 그의 나라의 오심을 위하여 세계를 유지할 때, 성자가 성부에 의하여 성령을 통하여 세계를 향하여 파송되고 자기편에서 성령을 성부로부터 세계 속으로 파송할 때, 또한 성령이 성자와 성부를 밝게 변용하며 세계를 삼위일체의 영원한 삶 속으로 이끌어 들일 때, 삼위일체의 모든 세 신적 품격들은 참여되어 있다.
기독론의 핵심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 배경에 해당된다. 상호간의 내주로 일컬어지는 용어 ‘페리코레시스’는 이미 그리스 교부들로부터 유래한 개념이다. 삼위일체론에서 페리코레시스는 성부, 성자, 성령의 동질적이며 신적인 품격들의 상호 내주를 나타낸다. 요한네스 다마스체누스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요 14:11). “나를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요 14:9)라는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성부와 성자의 통일성을 개념으로 나타내고자 하였다. 예수와 아버지 하나님은 일자(einer)가 아니라, 상호간의 내주 속에서 하나(eins)이다.
페리코레시스적 차원에서의 사귐은 계급적인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성부가 더 우위이거나 성령이 하위라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 사귐이다. 페리코레시스적 삼위일체는 비계급적인 사귐이다. 성령은 단지 아버지와 아들을 연결하는 이위일체를 이루는 도구가 아니다. 페리코레시스적 사귐 안에서의 삼위일체는 한 위격이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삼위모두가 함께 상호주체성을 지니게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은 삼위일체 내적 사귐으로 머물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에로 우리를 이끈다. 몰트만은 ‘세례’를 언급하면서 그분 안에서 사는 삶으로 묘사한다.
세계와 하나님의 역사, 곧 세계의 창조와 구원과 변용의 삼위일체적 역사 속으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를 통하여 받아들여진다. 최초의 삼위일체적 신앙고백 문서는 세례 고백서들이다(마 28:19). 세례를 통하여 상징화되는, 성령과 그리스도의 뒤따름 가운데 있는 삶은 삼위일체론의 실천이다. 이 점에서 삼위일체론은 삶에 대하여 아무 연관성을 갖지 못한 사변적 사치의 신학이 결코 아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는 사람은, “그분 안에서” 살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우리 안에서 경험한다(요일 4:16). 이것이 새로운, 참된 삶이다.
몰트만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이 군주론적이고 양태론적이기에 이위일체론의 한계가 명백하다고 보았다. 그의 성령론은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삼위일체론이나 성령론이 아니라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경륜적 관계에서 삼위일체론을 살핀다. 십자가 사건에서 삼위일체를 읽어내는가 하면, 무정념적이고 무감각적인 그리스적 철학의 영향 속에 있는 삼위일체론을 반대했다. 세상의 고통에 동참하고 아파하며,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그려낸다. “그의 고난의 원인은 우리의 죄요, 그의 고난의 목적은 우리의 속죄이며, 그의 고난의 근거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십자가 사건의 근거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찾는다.
몰트만은 바르트보다 명확하게 성령의 독자성을 확보했다. 서방의 군주론적인 삼위일체론에 반대하는 대신에 동방신학의 삼위일체론을 수용하여 사랑의 관계로서의 삼위일체론을 정립하고자 했다. 서방의 정치체제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여 계층적, 계급적 질서인 것과 달리 동방이 지역주교들의 대등한 관계를 인정한 것을 수납한다. 몰트만은 성령에 대한 이해를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서 설명한다. “우리가 성령의 형태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 향함에 있어서,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성령에게로 향함에 있어서 나타나는 그의 얼굴을 의미한다. 그것은 내재적 삼위일체의 영광 가운데에 나타나는 성령이다.”
2.4. 형성되어가는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성은 전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페리코레시스적 상호내주를 통하여 형성된다. 삼위 상호간의 조금의 위축이나 한 편의 확대 없이 서로를 결합하기 때문에 ‘삼신론’의 위험이나 ‘양태론’의 문제를 극복해 낸다. 예수는 요한복음 17:21절에서 “그들도 우리 안에 있도록” 아버지께 간구한다. 인간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내주할 수 있는 데로의 초청이다. 아버지께서 사랑하시고, 우리 역시 아버지 안에 거하게 될 것이다(요 14:23). 삼위일체간의 상호 사귐과 내주 안에 인간도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몰트만은 요한과 바울, 아타나시우스의 견해를 따라서 형성되어져가는 열린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논한다.
요한복음의 신학에 의하면, 사랑 안에 있는 하나님과 인간 상호 간의 내주가 있다. “사랑 가운데 머무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머물며, 하나님이 그 안에 머문다”(요일 4:16).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고전 15:28)이 되실 것이라는 말로써, 바울은 궁극적인 종말론적 전망을 하나님의 우주 쉐히나로 나타낸다. 정교회 신학이 아타나시우스의 견해를 따라 말하는 것처럼, 모든 피조물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 속에서 “신성화 될”것이다. 다시 말하여, 모든 피조물들이 “그 안에 더 이상 고통이 없는 넓은 공간”(욥 36:16)을 하나님의 열려 있는 영원한 삶 속에서 발견할 것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은 밝게 변용된 새 창조 안에서 그의 영원한 처소와 안식과 그의 열락에 이를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초대하며, 통합시키며, 연합시키는 사귐을 나는 “열린 삼위일체”라 불렀으며, “원”이나 “삼각형”의 폐쇄된 삼위일체의 상들로부터 구분하였다. 삼위일체는 결핍이나 불완전 때문에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들에게 그들의 생동성을 위한 삶의 공간과, 그들의 전개를 위한 자유로운 공간을 주는 사랑의 넘침 가운데서 열려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완전한 자기전달이다. 자신을 낮추시고 고난을 받으시며, 왜곡되고 타락한 인생을 수납하신다. 성육신을 통해 아들은 자신과 형제의 관계 속에서 아버지를 발견하고, 노예 된 창조를 구원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 중에서 태어난 자가 되었다. 몰트만은 예수의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이 인류의 아버지가 되는 데로 나아간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성육신을 통하여 자기의 사랑의 두 가지 대상을 얻게 된다. 곧 아들과 형상을 얻게 된다. 이 점에서 그는 그의 사랑에 대한 두 가지 응답을 경험한다. 곧 아들의 자명적인 응답과 형상의 자유로운 응답, 아들의 유일한 응답과 아들의 형제자매들의 다양한 응답을 경험한다. … 아들의 성육신을 통하여 삼위일체는 흡사 “자신을 개방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들의 아버지는 새롭고, 자유롭고 연대적인 인류의 아버지가 된다. 아들의 형제 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들과 아버지와 성령의 삼위일체적 관계 속으로 포괄된다. 인간으로서 그들은 세계 안에 존재하는 동시에 “하나님 안에” 존재하며 “하나님은 그들 안에” 계신다.
몰트만은 삼위일체 하나님은 내재적으로 관계할 뿐 아니라 세계와도 관계하며,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고 말한다. 초월자로 무감각에 머물러 있지 않고 세상을 경험한다. 세상의 경험의 변화는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의 변화를 불러오고, 하나님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계속해서 발전된 몰트만의 신론은 역동적 관계성이란 개념에 정초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몰트만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서로 사랑하는 관계 속에 있는 세 신적 주체들로서 이해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세상을 향한 사랑 안에서 세상에 영향을 줄 뿐 아니라, 또한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삼위일체로서 세상과 관계하시며, 자신의 삼위일체적 경험 안에서 세상을 경험하신다. 따라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경험이 변화한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경험이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과 함께 행동하는 인격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종말에로 개방되어 있는 존재다. 성도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받는다. 세례는 삼위일체론의 실천이다. 세례를 통하여 신앙고백을 한 성도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에 통합된다. 하나님 나라의 종말에로의 진행은 삼위일체론적으로 개방되어져 있다. 세계의 역사,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가 되는 방식으로 열려 있는 삼위일체론을 주장한다.
제자들 상호간의 사귐은 아들과 아버지가 일치성과 같아야 한다. 그러나 이 사귐은 삼위일체적인 일치성과 같아야 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넘어서 이 일치성 가운데에 있는 일치성이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이요 나아가서 하나님 안에서의 사귐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의 사실을 전제한다. 즉 삼위일체는 모든 창조가 그것과 결합될 수 있고 그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을 만큼 넓게 열려 있다는 것이다. 신적인 삼위일체의 일치성은 모든 창조와 자기와의 그리고 자기 안에서의 결합에 대하여 열려 있다. 삼위일체의 단일성은 하나의 신학적인 개념일 뿐만 아니라 이와 동시에 근본적으로 하나의 구원론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2.5. 종말론적 단일신론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종말론적인 문제에 와서 경륜적 삼위일체론을 폐기하고 종말론적 단일신론으로 회귀한다.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면서 그는 요아킴 피오레(Joachim von Fiore)의 견해를 수용한다. 블로흐는 인간의 자유를 확보하고 자유의 나라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신론적 즉, 하나님 없는 하나님나라를 희망해야한다고 보았다. 하나님을 주권을 부인하는 것이 인간자유의 전제로 본 것이다. 몰트만은 요아킴의 3시대 구분론이 일곱시대 종말론과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의 결합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요아킴은 이것과 다른 종말론을 카파도키아 신학자들로부터 받아들인다. 부수적이지만 이들 신학자들은 아버지의 나라, 아들의 나라, 성령의 나라를 구분하였으며, 하나님의 통치는 역사를 이러한 순서에 따라 파악하였다. 여기에 있어서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서로 구분된 계시의 시대와 계시의 방법을 생각하였다. 이에 대한 근거는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보혜사의 약속에 있었다. … 그것은 단 하나인 하나님의 나라이지만 각기 상이한 방법으로 아버지에 의하여 아들에 의하여 그리고 성령에 의하여 형성된다. 물론 성령과 아들은 아버지가 아들과 성령의 나라로부터 배제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나라로부터 배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통치의 주체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그리고 성령으로 바꾸어진다.
몰트만은 요아킴의 3시대 론에 비하면 전통신학에서는 ‘성령의 나라’를 탈락시켰거나 ‘아들의 나라’속에 ‘은혜의 나라’라는 방식으로 축소시켰다고 보았다. 그는 요아킴을 비평적으로 수용하면서 양태론적인 내용을 제거하고자 했다. 몰트만은 말하기를 “물론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연결되는 세 시대로 나누어 버리는 요아킴의 양태론적 시도를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삼위일체론적으로 이해해야 하겠다.”고 말한다.
몰트만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일한 인격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인격의 개념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성령은 아들과 같은 의미에서의 인격이 아니며, 아들의 성령은 아버지와 동일한 의미에서 인격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세 인격들이 서로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모순적인 주장을 편다.
여기의 세 인격들은 서로 동일하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 안에서, 상대방을 통하여 사록 또 나타난다. 상호관계 속에 있는 삼위일체의 인격들을 통하여 일어나는 신적인 삶의 순환과 비슷하게 또한 신적인 영광 가운데에서 그들의 관계를 통하여 일어나는 인격들의 상호표출(Manifestation)의 과정이 있다. 신적인 삶에는 그 자신의 고유한 영광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그의 표현과 기술도 속한다. 삼위일체의 인격들은 서로 상대방 안에서 존재하고 살뿐만 아니라 신적인 영광 가운데에서 서로 자신을 표현하기도 한다. 영원한 신적 영광은 인격들의 삼위일체적 표출을 통하여 표현된다. … 성령은 아버지 안에 있는 아들을 영원히 밝게 비추며 아들 안에 있는 아버지를 밝힌다. 성령은 아버지가 그 안에서 아들을 인식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인식하는 영원한 빛이다. 성령 가운데에서 영원한 신적인 삶은 그 자신을 의식하게 되며 이리하여 그의 완전한 형태를 반사하다.
김재진은 몰트만에게 있어서 ‘내재적 삼위일체론’와 ‘경륜적 삼위일체론’은 종말에 가서는 일신론으로 회귀하는 결과로 진행된다고 파악한다. 더불어 주장의 이면에 헤겔의 변증법이 자리하고 있음을 의심한다.
그는 아버지를 ‘아들’과 ‘성령’의 ‘신성의 원천’으로 주장함으로써 아버지, 아들 성령의 세 인격의 상이성(相異性)을 주장했으면서도, 구원역사의 종말에 가서는 모든 것이 ‘신성의 원천’인 아버지에게로 회귀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론을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제기된다. 몰트만의 주장대로 아버지는 ‘아들’과 ‘성령’의 ‘신성의 근원’으로서, 서로 인격이 다르다면, 주체의 인격이 서로 ‘아버지의 나라’, ‘아들의 나라’ 그리고 ‘성령’의 나라로 내용상 연결될 수 있는가? 일보 양보하여 단지 ‘경륜적’ 역사에 따라서 형식적으로만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의 나라가 연속성을 갖는 것이라면, 결국 종말에 이루어질 영광의 나라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위일체적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만일 요아킴이 이해한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의 삼위일체의 역사를 발전하고 성장하는 인간의 자유의 역사로 이해”한다면, 헤겔의 하나님의, 곧 절대정신의 변증법적 발전과 하나님에게로의 회귀와 무엇이 다른가? 그럴 경우 이 지상의 나라가 영광의 나라로 ‘신격화’되는 것이 아닌가?
몰트만은 성령과 아들의 모든 것을 아버지의 발아래 둔다고 말한다. 부활의 능력으로 모든 폭력과 주권과 죽음 자체를 폐지시키고 자유로운 사랑과 생명의 완성된 나라가 이루어지는 종말에 이 나라를 아버지께 바친다고 말한다. 종말로 모든 것은 아버지께로 귀속된다고 보고 있다. 종말론적 과정에 있어 삼위일체의 형태를 설명하기를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아들의 발아래 둔다. 아들은 완성된 나라를 아버지에게 넘겨준다. 아들은 그 자신을 아버지의 발아래 둔다.”
3.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의 공헌과 한계
3.1. 공헌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에서만이 아니라 그의 신학은 신앙과 현대의 세계를 연결할 수 있는 해석학적 구조를 열어 낸 일이다. 변증법적이고 종말론적인 기독론을 통해 세상에 대한 개방성을 획득했다는 점이다. 삼위일체론이 사변적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성경적인 토대에서 기독론과 교회론, 성령론은 물론이고 종말론까지 신학전반을 새롭게 삼위일체론적으로 재구성 하고자 했다. 이전 신학에서 기독론은 인간의 구원과 관련한 관점에서 다루어졌으나, 몰트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점에서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의 의미를 살핀다. 단지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사건으로서만 머물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서 십자가는 무엇이었는지 물었다.
서방의 군주론적인 삼위일체신학을 극복하고자 페레코레시스 즉, 상호내주하시는 사귐으로 세상을 향해 열려있고 품을 수 있는 하나 됨을 이룬 분으로 대안을 제시한다. 지배와 종속을 정당화하는 유일신론적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벗어나 삼위안팎의 자유와 평등의 관계의 토대를 마련했다. 개혁신학자로 불리우는 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비판한 점도 공헌에서 뺄 수 없다. 그는 유일신론적이고 양태론적으로 회귀하는 삼위일체신학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변화하는 세계의 요청에 용기 있게 응답하려했다.
몰트만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연구는 정치신학의 문제와 함께 신정론의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구원의 경륜속에서 경험되는 ‘경륜적 삼위일체’로부터 ‘내재적 삼위일체’를 유추해내고, 형이상학적인 하나님을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내고자 했다.
‘절대타자’로 머무는 칼 바르트적 유일신론적 하나님으로서는 인간과의 교제와 사귐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관계된다 하더라도 노예적 관계에서는 사귐을 벗어나지 못한다. 양립불가능 해 보이는 하나님의 통치와 인간의 자유를 삼위일체의 내재적 사귐과 함께, 인간과 세상과 더불어 쌍방적 사귐으로 관계하시는 하나님으로 전개했다. 삼위일체하나님은 세 인격 사이에 이루어지는 사랑의 관계의 역사이며, 스스를 열어 세상을 자신 안에 포함하는 역사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로 인간의 자유가 양립을 시도했다.
3.2. 한계
몰트만의 개방적 삼위일체론은 인간의 고통과 세계의 변화에 깊이 개입한다는 면에서 장점이 될 수 있으나, 변화하는 하나님이라는 면에서 하나님의 신적 속성에 어려움을 안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고 파악함에 있어 계시 의존적인 방식이 아니라 인간의 입장에서 풀어내려함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성경적 이해에 균열을 야기할 수 있다. 성경에 매이기보다 형성되어가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로 인해서 말씀과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어려움을 제공할 수 있다. 인간과 세계역사의 변화에 영향을 받고, 함께 형성되어간다는 면에서는 전통적 하나님에 대한 개념에서 지나친 이탈을 줄 우려가 있다.
서방과 동방의 신학을 함께 묶으려 시도한 점에서는 크게 공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전통적 신학에서 멀어진 것은 물론이고 실질적인 면에서 본인의 삼위일체론 또한 종국적으로는 단일신론적인 한계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역사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아버지 하나님만이 근원으로 파악하는 까닭이다. 서방과 동방의 조화로운 화해를 시도했으나 결국에는 동방교회 전통에로 기우는 종속론적 내재적 삼위일체론으로 나아갔다.
나가며
몰트만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을 조화시키려 시도했다. 열린 삼위일체론을 강조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동방신학에로 기울어졌다. 정태화 되고 관념적으로 이해되던 삼위일체론을 보다 깊이 있게 경륜적인 방식으로 그려냄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성이 현저하게 드러났다. 초월로 신비 속에 두고, 접근 불가의 영역으로 고정되어왔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발전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역사적 만유재신론으로 세계와 더불어 형성되어가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과 전통적 하나님과의 간격에서 멀어진 것이다.
군주론적 삼위일체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했으나 다시금 환원된 모습으로 회귀된 점 역시 아쉬운 일이다. 성부에게로 모든 것이 기울어지는 방식이 아니라, 성경적인 방식을 따라 성부와 성자, 성령의 동등하신 하나님에 대한 토대위에서 세 위격의 관계성과 사귐, 상호교제를 강조했으면 어땠을까? 세 위격의 구별에 방점을 두어서 일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통일성을 깨뜨리거나, 통일성에 강조를 두어 삼위의 위격들을 망각내지 혼동하는 일이 없이 삼위의 위격 간에 차별과 분리가 없는 성경적 이해안에서의 사귐을 강조했으면 좋았으리라. 몰트만이 교회가 381년에 고백한 콘스탄티노플신조의 토대위에서 삼위일체론을 전개했다면 어땠을까?
* 참고문헌
김석환. “몰트만의 삼위일체론 분석”. 『칼빈논단』 경기: 칼빈대학교, 2000.
김재진.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의 비판적 이해” 『희망과 희망사이』. 한국조직신학회 편. 2005.
리처드 버캠. 『몰트만의 신학』. 김도훈‧김정형 공역. 서울: 크리스천헤럴드, 2008
위르겐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김균진 역(서울: 기독교서회, 2014)
위르겐 몰트만. 『신학의 방법과 형식』. 김균진 역(서울: 기독교서회, 2007)
위르겐 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김균진 역.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9.
유태화. 『삼위일체론적 성령론』. (서울: 대서, 2006),
'목회신학대학원2·6교실 > 삼위일체론교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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