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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누가복음-사도행전에 나타난 기도의 특성에 관한 연구?

류성련 2015. 1. 24. 09:03

 

 

 

누가복음-사도행전에 나타난 기도의 특성에 관한 연구

 

 지도교수 : 김 지 철

 

이 논문을 석사학위(M.Div) 논문으로 제출함

 

             1998년 12월 3일

 

        장로회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과정   김 일 남   

 

                           

                   

목   차

 

I. 서론 ------------------------------------------------   1

  1. 문제 제기 ------------------------------------------   1

  2. 연구 범위 및 방법 -----------------------------------   1

II. 누가신학의 기도의 특성에 관한 논쟁사 --------------------   2

  1. 종말론적 해석 ---------------------------------------  3

  2. 교훈적 해석 -----------------------------------------  5

  3. 기독론적 해석 ---------------------------------------  6

III. 기도의 정의 ------------------------------------------- 8

  1. 기도의 일반적 정의 ------------------------------------ 8

  2. 기도의 신학적 근거 ----------------------------------- 10

  3. 구약에서의 기도 ------------------------------------- 12

  4. 신약에서의 기도와 기도란 말의 사용 빈도 수 -------------- 15

IV. 누가의 신학에 나타나는 기도에 대한 강조 ----------------  16

  1. 누가의 편집의도에 나타난 기도에 대한 강조 --------------  16

  2.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기도에 관한 교훈 자료들 ------------- 22

  3. 사도행전에 나타난 기도의 특성 ------------------------- 25

V. 기도와 구속사 ---------------------------------------- 27

  1. 예수의 기도와 구속사 --------------------------------- 28

  2. 사도행전에 나타난 기도와 구속사 ----------------------- 34

VI. 기도와 기독론 ---------------------------------------- 39

  1. 기도를 통한 자기 계시 -------------------------------- 39

  2. 베드로의 신앙보존을 위한 예수의 중보기도 --------------- 45

Ⅶ. 교훈적 기도와 제자도 --------------------------------- 47

  1. 제자도 기도의 모델로서의 겟세마네 기도 ----------------- 48

  2. 예수의 기도방식 ------------------------------------- 49

  3. 예수의 기도 체험 ------------------------------------ 50

  4. 기도의 모델로서의 주기도 ----------------------------  50

  5. 에필로그: 바울의 기도 -------------------------------- 53 

VIII. 결론 ---------------------------------------------- 54

참고 문헌 --------------------------------------------- 58

 

 

 

 

I. 서론

 

1. 문제 제기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자기 이해를 가장 잘 반영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성도 개인이나 전체 교회의 영성에 가장 본질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또 기도에 관한 삶과 기도에 대한 신학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으며 바른 성도의 삶은 바른 기도의 삶에 달려 있고, 바른 기도의 실천은 바른 기도에 관한 신학에 달려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기도의 실천을 위해서는 바른 기도의 신학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바른 기도의 신학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성경에서 기도에 관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특별히 기도의 모범은 예수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성경의 저자 중에서도 누가는 예수의 기도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으므로 예수의 기도생활을 알기 위해서는 누가복음을 연구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누가는 또 사도행전을 통해서 초대교회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기도 생활을 어떻게 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의 기도와 초대교회의 기도를 누가의 문서에서 가장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기도의 바른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의 저작을 연구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아주 중요한 일이다.

 

2. 연구 범위 및 방법

 

  기도에 대한 누가의 특별한 관심은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첫째는 기도에 관련된 어휘의 사용 빈도 수에서이고, 둘째는 자료의 편집과정에서 나타나는 누가의 의도적 편집 손길에서이고, 셋째는 누가만이 소개하고 있는 기도에 관한 특수한 자료들에서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누가의 신학에 나타난 기도에 관한 연구는 주로 구속사적인 측면이나 기독론적 측면, 또는 제자도적인 측면의 어느 한 쪽에만 치우쳐왔다. 이것은 누가의 기도의 자료 가운데서 일부분만 연구했기 때문이며 또 누가의 신학에 있어서의 기도에 관한 연구가 대부분 누가신학의 일반적 신학 연구의 흐름과 맥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누가의 저작에 나타난 기도 자료 중에서 중요한 기록들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면서 누가의 기도에 나타난 신학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려고 한다. 이를 위한 해석방법은 누가의 저작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누가의 통일된 저작이라는 관점에서 누가신학의 통일성과 전체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문학적 해석방법을 사용하며, 누가복음에 있어서는 다른 복음서와의 비교를 통한 편집적 해석방법을 함께 고려하면서 누가의 신학에 나타난 기도의 특성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II. 누가신학의 기도의 특성에 관한 論爭史

 

  누가신학의 기도에 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65년 오트(Wilhelm Ott)의 '기도와 구원: 누가신학에 있어서 기도 자료의 의미'라는 단행본이 출간되면서부터이다. Ott 이전의 누가신학의 기도에 관한 연구는 심리적, 역사적 관점에서 이루어졌으나 Ott의 연구 이후부터 기본적으로 누가 자신의 독특한 관점에서 연구되어 왔다. 특히 기독교인들의 신앙 지도 혹은 영적 훈련의 측면에서 '기도'에 관한 주제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1) Ott의 연구 이래로 누가신학의 기도에 관한 연구는 방법론적으로는 기본적으로 편집비평 방식의 바탕 위에서 연구된다. 다만 누가신학에 있어서 기도에 관한 연구의 가장 중요한 중심이 종말론이냐 아니면 기독론이나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훈이냐, 아니면 이러한 신학적 주제들을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지게 된다.

 

1. 종말론적 해석   

 

  Ott는 주로 누가의 교훈적 자료만을 가지고 연구했고, 이 중에서도 거의 절반 정도를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18:1-8)의 연구에 집중했다.2) Ott는 이와 같은 연구의 결과를 통해서 누가의 기도에 대한 교훈의 핵심은 참된 경건에 대한 관심도 아니고, 신자들의 간구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것도 아니며, 항상 기도하라는 권면에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가 이러한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은 콘첼만(Conzelmann)의 '파루시아 연기'에 대한 종말론적 주장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즉 누가가 당면한 가장 절실한 문제는 주님의 재림 연기로 말미암아 교회가 이 세상의 오랜 기간 동안의 시험에서 살아남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며 이것이 교회가 보전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Ott에게 있어서 기도는 구원의 수단이 되었고 인자의 날에 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3)

  그러나 Ott는 기도가 누가신학의 전체 신학구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밝힌 공로는 인정되지만 자료를 너무나 제한적으로 사용했다는 결정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4) 이러한 방법론적인 결정적 약점 때문에 누가의 기도를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한 면만을 강조하는 경향을 낳게 되었다.

  해리스(Harris)는 Ott처럼 Conzelmann의 구속사와 파루시아의 지연에 따른 누가의 역사화 경향에 대한 견해를 인정한다. 따라서 해리스 또한 기도를 교회가 재림할 때까지 인내하는 필요한 중요한 수단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누가신학에 나타난 기도 주제를 처음으로 종합적으로 분석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기도의 종말론적 의미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Ott와는 구별된다.5)

  Harris의 기본적인 논지는 누가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구속사를 진행시켜 가는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누가의 지배적이고 특징적인 기도에 대한 관점이라고 한다.6) 그의 누가신학에 있어서의 기도의 구속사적 측면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이후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기도의 주제가 누가신학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강조점으로 받아들여져 왔다.7) 그러므로 해리스가 이와 같이 누가신학의 기도와 하나님이 구속사를 진행해 가시는 방법 사이에 아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은 누가신학의 기도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개척자적인 큰 공헌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Harris의 이러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은 몇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다.8)

  첫째, 누가의 저작에 나오는 모든 기도가 구속사의 결정적 전환점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둘째, 기도가 하나님이 구속사를 인도해 가시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주장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셋째, 예수의 기도에 있어서 기독론적인 중요성 및 제자들에 대한 교훈적 측면을 간과함으로써 누가 저작에서 기도가 가지는 전체적 풍부함을 다 나타내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2. 교훈적 해석

 

 몬루부(Monloubou)는 예수의 기도를 기도의 모델로서 이해했다. 그는 누가가 두 종류의 기도 분문 형태를 통해 두 가지 방식으로 예수가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한다.9)   첫째, 누가복음에서 기도의 내용에 대한 언급이 없이 단순히 예수가 기도했다는 것만을 기록한 7개의 본문(즉 3:21, 5:16, 6:12, 9:18,28, 11:1, 22:41)이 있는데,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Monloubou는 누가가 7이라는 완전수를 사용해서 독자로 하여금 예수가 항상 기도하는 분이라는 것을 주목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둘째, 그는 예수의 기도 내용이 언급된 본문(10:21, 22:41-44, 24:34, 46)을 주목한다. 특히 겟세마네동산에서의 예수의 기도 장면을 통하여 누가는 예수를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기도의 모델로 제시하려고 한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누가의 예수의 기도에 대한 유일한 관심은 예수가 기도를 통해서 교회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그는 사도행전의 기도 본문들에 대해서 단지 예수의 기도 습관과 초대교회의 기도 습관 사이의 평행 관계에만 집중한다. 또한 누가의 기도 교훈에 대한 자료의 해석도 결국 Ott와 비슷한 양태를 나타내고 있다. 즉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기도의 교훈은 예수의 모델적 기도에 보완이 된다는 것이다.

  Monloubou는 누가의 저작에서 예수가 교회의 기도의 모델이라는 사실을 가장 철저히 제시한 공로가 있다. 그러나 예수의 기도를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기도의 모델로만 이해하는 것은 예수의 기도가 가지는 종말론적, 기독론적 의미를 간과한 채 누가신학 전체에서 기도가 차지하는 위치를 너무 편협하게 보았다는 약점이 있다.

 

3. 기독론적 해석

 

 펠드캄퍼(Feldkamper)는 누가 저작의 기도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 기독론적 해석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10) 그는 누가의 기도 자료에 있어서 그 동안의 누가 문서에 있어서의 기도 연구에 있어서 무시되어 온 기독론적 의미를 연구했다. 먼저 그는 두 가지 질문을 한다. 첫째, 기도가 예수의 품격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둘째, 기도가 예수의 하나님과의 관계 및 예수의 교회와의 관계에 어떤 중요성을 가지는가?

  그는 이러한 기독론적 관심을 가지고 누가의 기도 자료들을 해석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론을 내린다.11)

  첫째, 예수의 기도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독특한 신분을 보여준다. 이것은 누가의 기도 자료 전체를 통해서 발견되는데 복음서의 전반부에서는 예수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아들'이라고 불려진다(눅 3:22, 9:35). 반면에 후반부에서는 예수가 하나님께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응답하고 있다(10:21, 11:2, 22:42, 23:34,46). 둘째, 예수의 기도는 언제나 두 가지 맥락 속에서 행하여지는데, 하나는 예수의 능력 있는 말씀과 행동의 맥락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미래 고난에 대한 언급의 맥락에서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기도는 누가의 기독론과 구원론이 만나는 자리가 된다. 즉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또한 이를 위해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아들로서 기도를 통해 이를 수행한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의 고난만이 아니라 예수의 전 생애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셋째, 예수의 기도와 초대교회의 기도는 기도와 頻度와 기도의 맥락, 모두 아주 밀접한 평행관계가 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기도는 선행된 예수의 기도에 의존하고 있고, 승천하신 예수에 의해서 보내진 성령을 통해서만이 하나님께 상달될 수 있으며, 또한 예수에게 드려지기도 한다. 즉 교회의 기도는 예수의 기도를 통해서 중보되어야 한다. 성도의 기도는 예수가 아버지를 계시해 주며 또한 자신의 기도의 삶에 의해 구원을 중개해 줄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Feldkamper의 연구는 누가의 기도에 있어서 기도가 기독론적 의미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관련성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큰 공헌이 있다. 그러나 예수의 기도가 신학적으로 어떤 측면의 기독론적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서는 명백히 밝히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크럼프(Crump)는 Feldkamper의 기독론적 해석이 가지는 이러한 한계를 자기 연구의 중심으로 삼아서 예수의 기도가 가지는 기독론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연구를 시도했다. 그는 예수의 기도가 예수의  신분과 예수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예수를 중보 기도자로서 제시한다. 예수가 중보 기도자라는 것은 다음의 내용들을 포함한다.12)

  첫째, 예수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이며, 최후의 종말론적 선지자로서 아버지를 계시하며 특히 자신의 메시야 됨과 아들 됨을 계시한다. 둘째, 예수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선택한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제자들의 영적인 눈을 밝혀주며, 제자들을 시험에서 보존한다. 셋째, 예수의 이러한 지상에서의 중보사역은 승천 후 하늘에서 수행하는 중보사역에 대한 예비적인 것이다. 즉 예수의 중보사역은 승천 후 하늘에서가 아니라 이미 지상에서 시작되었다.

   Crump의 기도와 기독론 연구는 누가신학의 기도 연구에 있어서 예수의 기도가 가지는 기독론적 의미를 충분히 설득력 있게 제시한 공로만이 아니라 누가신학의 기독론 연구에 있어서도 그 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예수의 중보 기도자 됨을 밝혀낸 공헌이 있다.

  그러나 그의 기도 연구는 기도의 기독론적 의미를 밝히기 위해 의도적으로 누가복음의 기도 자료 가운데 교훈적 부분과 사도행전의 기도 본문의 의미를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누가신학의 기도를 총체적으로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누가신학 전체의 기도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연구할 필요성이 제기된다고 본다.     

 

 

III. 기도의 정의

 

1. 기도의 일반적 정의

 

  기도의 정의는 한 마디로 말하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다.13) 즉 인간이 하나님께 말하는 인간의 언어이다.14)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수 있다. 그 관계를 갖는 방법이 기도이며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교의 행위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이다. 또한 기도는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15)

  하나님에게 있어서 기도의 최대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하나님과의 자유로운 친교를 회복하고, 그 길을 여는데 있으며 의무와 봉사의 한가운데서도 하나님과의 생명의 친교가 마치 심장의 고동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가능하게 하는데 있다.16)

  기도가 하나님께 말하는 언어라고 정의할 때, 여러 가지의 언어가 포함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엄과 전능하심을 깨달을 때, 하나님을 경배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때 감사하게 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우리의 죄인 됨을 깨달을 때 우리의 기도는 고백의 기도가 된다.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을 깨달을 때 우리는 순종의 기도를 드리게 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그의 은혜 가운데서의 믿음은 우리를 소생시킨다.

  敬拜, 感謝, 告白, 順從, 委託 그리고 懇請 등의 기도의 형태 가운데서 마지막의 간청은 신학적인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간청이 주기도문에 나타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기도에 관한 대부분의 물음이 간청과 연결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합당한 기도와 기도의 응답은 주로 간청과 관계가 있다.17)

 

2. 기도의 신학적 근거

 

  기도에 관한 교리는 신론과 인간론이 완성된 후에 덧붙여진 부록이 아니다. 기도에 관한 세계와 신, 그리고 신과 인간관계에 대한 견해 속에서 조명되고 있다. 기도는 반드시 탄원이거나 유익에 대한 요청이 아니라 유일신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이다. 태일러(Tayler)는 기도를 "하나님께로 상승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18) 이러한 상승의 모든 형태인 예배, 고백, 감사, 간청 등은 기도라는 포괄적인 용어에 내포된다. 대체로 기도는 인간 영혼과 하나님 사이의 영적 교제이다. 이 영적 교제는 필연적으로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에 대한 내적 의식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내적 이해는 모든 신비적 요소의 진수이다.

  기독교 이전 형태의 유일신론적 기도는 구약에서 최고조에 도달한다.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 사이의 영적 교제를 추측할 수 있는 유일신론적 기도의 모든 형태들이 구약에서 유례없는 숭고함과 장엄한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혼의 외침, 죄의 고백, 중보기도, 감사, 탄원, 간청으로 나타나 영적인 가장 완벽한 헌신으로 언급되고 있다. 구약의 기도를 특징짓는 주된 요소들은 첫째, 살아 계신 인격적 존재로서 그리고 지상의 권력을 소유하신 분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인식이며, 둘째는 오직 도덕적 선만을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케 될 수 있다는 확신과 거룩성을 깨닫는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의로운 생활은 구약의 유일신론의 본질적인 요소이며 구약에 나타난 기도의 내용이다.

  신약에 나타나는 기독교의 기도는 기도에 대한 권고와 바르게 기도하는 자에게 주어질 축복의 약속들로 가득 차 있다. 신약의 교훈들 중에서 기도가 차지하는 위치가 매우 높기 때문에 기도의 효력을 의심하는 것은 바로 기독교의 기반을 뒤흔드는 행위로 인식한다. 기독교 기도의 본질적 요소들을 결정하기 위해서 신약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의 내용이 중요시된다.

  유일하시며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들에게 기도는 생명이다. 기독교의 기도는 그 형식에 있어서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이다. 깔뱅(Calvin)은 기도로서 간구할 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 이상의 것을 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19) 아울러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만이 바르게 기도할 수 있고 그 기도에 응답을 받는다고 하면서 자기에 대한 모든 자신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 때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한다. 그리고 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양심에는 비상한 평안과 안정이 온다고 말하면서 이 훈련을 통해 신앙은 자라고 하나님을 의뢰하게 된다고 한다. 바르트(Barth)는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은총을 베푸시어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고 자신과 영적 교제를 나누게 하셨다고 했다.20) 그러므로 기도는 은총의 질서가 보여주시는 독특한 표지라고 할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을 알 때 주어지는 사랑의 복종을 주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확증이며 또한 은총이다. 웨슬리(Wesley)는 기도란 기독교 생활의 열쇠라고 했다. 그 까닭은 그 생활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생동하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화된 수단이기 때문이다.21) 기도는 확실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틸리히(Tillich)는 하나님과 일체가 되는 경험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이 우리와의 사이의 넘어설 수 없는 거리에 다리를 놓으면서 우리를 통해 기도하신다고 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하신다.22) 브룬너(Brunner)는 기독교의 기도란 우리와 교제를 나누시는 하나님께 행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과의 교제로서의 기도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기도의 신학적 의미에 대한 결론을 내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탄원이나 요청인 것이 사실이지만 더 근원적인 것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라는 점이다. 즉 기도는 인간 영혼과 하나님 사이의 영적 교제이다. 둘째, 기도는 인격적인 존재인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우리의 주인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 뜻을 상달시키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셋째,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연결시키는 끈이다. 그러므로 기도가 항상 있어야만 인간은 하나님과의 연계를 갖고 그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3. 구약에서의 기도

 

  구약에서 기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들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기도에 관해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는 곳이 몇 군데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은 지혜문학 특히 시편에 있고 기도의 실제적인 내용은 거의가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다.23)

  구약에서 "기도한다"를 표현하기 위한 단어로 매우 희귀한 , 그리고 때로는 을 사용한다. 이외에도 은 "부르다" "선언하다" "읽다"의 뜻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거나 기원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부름에 사용되었고(신 4:7, 시 116:2), 은 "묻다" "문의하다" "요구하다"의 뜻으로 장래일이나 모르는 것을 하나님께 물어볼 때 사용되었다(시 27:4, 122:6, 민 27:21, 수 9:14). 는 "만나다" "마주치다" "도달하다" "간청하다"의 뜻으로 원수를 위한 기도를 드릴 때 주로 사용되었다(사 53:12, 59:12,26, 렘 7:16). 는 "완화하다" "달래다" "소원을 간청하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얼굴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화를 진정시키거나(출 32:11), 은혜를 구할 때(시 119:58)에 사용되고 있다. 그 외에 무엇이 필요하여 부르짖을 때에는 가 사용되었고(삿 3:9, 시 22:5), 기쁠 때와 비탄에 잠겼을 때에 크게 부르짖는 외침을 뜻할 때에는 이 사용되었으며(렘 31:12, 에 2:19), 하나님의 은혜를 간곡히 애원하는 의미로 이 사용되었고(왕상 8:33,47,59, 시 30:8), 이 외에도 몇몇 단어들이 기도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24)  의 원래의 의미는 "제사 드리다"란 뜻이었으나,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다" 또는 "구하다"를 의미한다. 도 "기도하다" 또는 "요구하다"를 나타낸다. "바라다, 자신을 바치다, 하나님의 은총을 끌어내다" 등을 지칭하는 용어들이나, "칭찬하다, 찬양하다, 고백하다"를 지칭하는 용어들도 기도의 영역에 속한다.

  존경하는 사람에 대한 문안을 나타내는 용어인 는 기도의 태도뿐만 아니라 성향을 가리킨다. 기도가 뒤따르지 않을 경우에도 이 단어는 종종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나타낸다(레 26:1, 왕하 5:18). 이 단어가 사용된 뒤에는 다른 종류의 기도들이 뒤따른다(창 24:26, 출 34:8, 삼상 1:28). 이 용어가 큰 축제 때에도 사용되었다(대상 29:20, 대하 7:3, 느 8:6). 무릎을 꿇는 것이 유사한 동작으로 언급되며(왕상 8:54), 서서 기도하는 모습으로(삼상 1:26, 렘 18:20), 손을 하나님께 펼치는 동작(사 1:15, 렘 4:31)으로도 사용되었다.25)  

  구약성서에서 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고, 경배하는 통합적인 관계로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기도는 경건한 사람의 '의무'만이 아니고 신자들의 분명한 종교의식의 언어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경건의 일부분이 아니고 경건 그 자체의 표현이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기도는 인간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계약관계에서 인간의 종교의식의 한 표현이다.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들으시는 하나님(시 65:2), 역사의 모든 사건을 조정하시는 하나님(사 44:24, 45:8), 마음대로 활동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시고 약속을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창 18:45), 그의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대하 7:14-15)을 대전제로 한다.26)

  구약성서에 나타난 기도의 내용은 그 내용이 구속사와 계시사에서 첫 자리를 차지한 연고로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의 계시 아래 나타나는 특징을 지니기 때문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한다.27) 무엇보다도 구약성서에 나타난 기도는 개인의 일시적인 이익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과 관련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세적인 축복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타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28) 굶주림, 질병, 적들로부터의 억압 등은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전적 도구이기 때문에 이러한 재앙들로부터 구원받는 기도는 용서의 기도요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는 기도였다. 

 

4. 신약에서의 기도와 기도란 말의 사용 빈도 수

 

  신약에서 '기도' 혹은 '기도하다'란 의미로 사용된 단어는 모두 7가지로, , , , , , , 이다.29) 그런데 누가가 그의 저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기도'에 관한 용어로 중요한 것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간구'란 뜻을 가진 와 그 동사형인 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적으로 '기도'를 가리키는 말인 와 그 동사형인 이다. 그런데 이들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고 그래서 우리의 개역 성경에서도 흔히 아무런 특별한 구별 없이 사용하고 있다.30)

  '간구'란 뜻을 가진 란 명사형은 신약성서에서 모두 12번 사용되고 있는데, 누가에서 3번, 고린도후서와 빌립보에서 각 2번, 그리고 로마서, 디모데후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에서 각각 한 번씩 나타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1:13, 2:37, 5:33의 세 구절에서 나타난다.31)

  동사형 는 신약성서에서 모두 11번 사용되었는데, 사도행전에서 5번, 누가복음에서 3번, 고린도후서에서 2번,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한 번 뿐이다. 누가복음에서는 10:2, 21:36, 22:32,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는 4:31, 8:22,24,34, 10:2에서 사용되었다.32) 이렇게 간구의 기도를 뜻하는 - 와 그 동사형 가 신약성서 저자들 중 누구보다도 누가에게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기도를 가리키는 용어인 명사형 와 그 동사형 - 의 사용 빈도 수는, 가 신약에서 마가복음에서 2번, 마태복음에서 2번, 그리고 바울서신에서 14번이 사용된 데 비해, 누가복음에서 3번, 사도행전에서 9번 등 모두 12번이나 나타난다. 그리고 란 동사형인 경우는 누가복음에서 19번, 사도행전에서 16번, 마태복음에서 15번, 마가복음에서 10번 사용되고 있다.33) 이 두 단어를 합칠 경우, 누가문서에서는 모두 47번이 사용되고 있는데 비해서 마태복음에서는 17번, 마가복음에선 12번 사용되고 있으며 요한복음에서는 한 번도 사용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기도란 용어의 사용 빈도 수만 비교해 보아도 누가가 신약성서 기자들 중 어느 누구보다도 더 기도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기도란 용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IV. 누가의 신학에 나타나는 기도에 대한 강조

 

1. 누가의 편집의도에 나타난 기도에 대한 강조

 

  누가의 기도에 대한 관심이 기도란 단어의 빈번한 사용 빈도 수에서만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누가가 전승 자료들을 편집할 때 자료에는 전혀 없던 기도에 대한 언급들을 새로이 첨가함으로써 자신의 기도에 대한 관심을 분명히 표명하고 있다는 점이다.34) 이점을 공관복음의 다른 복음서들과의 평행본문들을 비교해 봄으로써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1). 예수의 수세사건(막 1:9-11, 마 3:13-11-27, 눅 3:22)35)

  누가의 자료로 생각되는 막 1:9-11과 마태복음의 평행본문에는 예수의 수세장면이 거의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누가의 본문을 마가나 마태의 것과 비교해 보면, 우선 누가의 본문이 가장 짧으며 "기도하실 때에"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이 문구는 다른 평행본문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 문구의 첨가는 분명히 누가에 의한 것이다. 누가는 이 문구를 삽입함으로써 우선 예수께서 공생애에 나서기 전에, 그리고 성령을 받으시기 전에 기도하고 계신 모습을 처음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문구의 첨가를 통해 예수가 공생애에 나서기 전 성령을 받게 된 때가 "기도하실 때"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에 있어서 성령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지는 은사이다.

 

  (2). 문둥병자를 고치심(막 1:40-45, 마 8:1-4, 눅 5:12-16)

  문둥병자를 고치신 이야기를 기술함에 있어서도 누가는 마가나 마태와는 달리 예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신 후 한적한 곳으로 가신 이유를 기도를 하시기 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자료에도 없고 다른 복음서의 저자가 생각지도 못한 기도의 주제를 삽입함으로써 누가는 예수가 한적한 곳에 머무르게 된 이유가, 부정한 문둥병자와 접촉하여 그 자신이 부정해졌고 또 그 사실이 이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 아니라, 물러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36) 마태가 소극적으로 마가의 부정적 표현을 삭제한데 비해서 누가는 그것을 좀 더 적극적으로 긍정적인 장면으로 바꿈으로써 예수를 기도하는 사람으로 부각시켜주며 기도의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누가의 기도에 대한 특별한 관심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하다 하겠다.

 

 (3). 12제자의 선택(막 3:13-19, 마 10:1-4, 눅 6:12-16)

  12제자를 선택하는 예수에 대한 묘사도 누가는 다른 저자와는 다르다. 여기서도 누가는 자료에 없던, 그리고 다른 복음서 저자들이 언급한 바가 없는 기도의 주제를 도입하고 있다. 더구나 여기서 누가는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으며, 예수의 이런 진지한 기도가 열 두 제자를 선택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37) 사도의 선택과 같은 중요한 일이 기도 없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 누가의 의도였다.

 

 (4). 베드로의 신앙고백(막 8:27-33, 마 16:13-23, 눅 9:18-22)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을 향하여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며 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진 사건에 대한 보도가 세 복음서에 모두 나오지만, 상황 설명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런 차이들 중 오직 누가만이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질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태와 마가 본문에 기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데다가 누가에서만 그것이 나타나 있고 기도의 주제가 누가의 주요 관심사란 점에서 기도에 대한 언급이 누가의 편집적 손길에 의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여기서도 누가는 다른 평행 본문에 없는 기도에 대한 언급과 함께 또다시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같은 중요한 사건이 기도 없이 그냥 일어난 사건으로 보지 않으려는 누가의 의도이다.

 

  (5). 변화산에서의 예수(막 9:2-3, 마 17:1-8, 눅 9:28-36)

  변화산 사건에 있어서 누가는 마가나 마태와 세 가지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38) 첫째는 마가와 마태의 "엿새 후"란 문구 대신 "팔일 쯤 되어"란 문구를 쓰고 있는 점이며, 둘째는 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서 산에 올라가신 목적이 기도하기 위한 것임을 밝힌 점이고, 셋째는 예수의 용모가 변화된 것이 기도하실 때였다고 강조하는 점이다. 마가와 마태의 경우에는 예수가 높은 산에 올라가신 이유가 마치 제자들에게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누가에게서는 산에 올라가신 목적이 기도하기 위함이며, 또 산에서 변화된 시기도 기도하실 때였다고 강조한다.39) 여기서도 누가는 평행 본문들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기도란 말을 두 번이나 삽입함으로써 기도에 관한 자신의 관심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으며, 또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다시금 독자들의 눈앞에 부각시키고 있다.

 

  (6). 주기도문(마 6:5-13, 눅 11:1-4)

  마태가 소개하는 주기도문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기도문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들이 있다. 첫째는 호칭에서, 둘째는 마태의 세 번째 간구문이 누가복음에는 없는 점에서, 셋째는 마태의 마지막 간구문이 누가복음에는 없는 점에서, 넷째는 마태의 마지막 송영이 누가복음에는 없다는 점이다.40) 그러나 주기도문의 내용에 있어서의 차이들보다도 주기도문이 주어지게 된 동기에 대한 설명이 마태와 누가에서 아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누가가 마태와 달리 주기도문을 소개하기 직전에 먼저 예수의 기도하는 모습을 언급함으로써 다시금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누가에게 있어서 주기도문은 기도하는 자의 모델이었던 예수가 주신 기도문의 모델인 셈이며, 여기서 예수는 자신이 늘 기도하시는 일을 제자들에게 그대로 가르치고 계신 셈이다.

 

  (7). 감람산의 기도(막 14:32-42, 마 26:36-46, 눅 22:39-46)

  이 기록은 공관복음서에 다 나오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예수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공통점을 드러내주고 있다. 그러나 세 본문을 좀 더 면밀히 비교해 보면 기도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누가의 본문이 기도에 대한 강조에 있어서 마태나 마가의 본문과 크게 다름을 알 수 있다. 첫째, 서론 구절에서 분명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마가와 마태는 서론 구절을 거의 동일한 형태로 나타내고 있으며 관심을 예수의 기도에만 집중하고 있지 제자들의 기도에 대한 명령이나 교훈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다. 그러나 누가는 이 이야기가 제자들에게 주는 기도의 교훈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둘째로는 예수를 기도하는 자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는 점에서도 누가의 본문이 마가나 마태의 본문보다 더욱 돋보인다. 마태는 예수가 세 번 가셔서 세 번 기도하시는데 제자들은 세 번 자고 있었던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잠자고 있는 제자들과 기도하고 있는 예수를 대조시키고 있다.41) 그리고 마가의 경우는 예수의 기도를 두 번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누가는 예수의 기도의 횟수보다는 그 기도의 진지함을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누가는 예수의 기도의 진지함을 강조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22:41) 모습을 언급했고, 또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돕는 모습(22:43)을 첨가했고,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여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 세 가지 표현이 모두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표현이고 누가 자신의 편집 손길에 의해 삽입된 것들로 누가의 의도적 강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의 여러 평행본문들을 비교해 봄으로써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42) 첫째, 누가는 본래 기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던 자료, 혹은 기도와 집적 관련되지 않은 자료를 편집하면서 자신의 기도에 대한 관심 때문에 기도의 주제를 본문에 삽입함으로써 본문을 기도에 관한 교훈으로 만들고 있다. 둘째, 본문들을 편집함에 있어서 누가는 일관성이 있게 기도하는 예수의 모습을 강조함으로써 예수를 기도의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다.43) 이런 점이 모두 누가의 편집 손길에 의해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누가의 기도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그의 교훈적 의도를 엿볼 수 있다.

 

2.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기도에 관한 교훈 자료들

 

  누가만이 소개하고 있는 기도에 관한 교훈자료들은 세 개의 비유들( 밤중에 찾아온 친구, 과부와 재판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과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의 최후의 기도문들이 있다.44) 예수의 많은 비유들 중 기도에 관한 비유에 관심을 가진 복음서 저자는 오직 누가뿐이며, 또 예수의 십자가상의 최후 발언 7개 중 두 개를 기도문 형태로 소개하고 있는 복음서 저자도 오직 누가뿐이라는 사실도 누가가 기도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밤중에 찾아온 친구 비유(눅11:5-8)에서 누가는 주기도문에 이어서 제자들의 기도를 가르쳐달라는 요청에 대한 대답으로 기도할 내용(주기도문)을 가르친 후, 기도할 때는 한 두 번 간구하고 응답이 없으면 포기해 버릴 것이 아니라 응답될 때까지 끈질기게 구하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이 비유에 이어 응답에 대한 확신을 주기 위해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임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는 이 비유를 기도에 관한 일련의 교훈들(11:1-13)의 문맥 가운데서 제자들의 끈질긴 기도를 가르치는 교훈으로 제시하고 있다.45)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눅18:1-8)는 밤중에 찾아온 친구 비유와 흔히 한 쌍으로 이해되고 있다.46) 두 비유 모두 누가복음에만 나오며 두 비유가 하나는 남자, 다른 하나는 여자에 대한 것이다. 누가가 이 비유의 서론으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라는 말로 시작한 것만 보아도 낙망치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 이 비유를 소개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이 비유의 명칭은 "졸라대는 과부의 비유"가 더 적합할 것이다.47) 본래 이 비유의 초점은 졸라대는 과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과부의 부르짖음을 들어 준 재판관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예수의 본래 의도는 청중들로 하여금 이 재판관에게서 하나님을 연상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48) Manson도 이 비유의 요점은 본래 기도해야 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종들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란 점에 있다고 지적했다.49) 그런데 누가는 이 비유의 초점을 재판관에게서 과부로 돌리고, 특히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기도하는 자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다. 결국 누가는 끈질기게 구하는 자의 간구를 하나님은 더욱 잘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교훈을 주는 예수의 비유를 지신의 상황에 맞추어 적용하고 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18:9-14)의 핵심은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대조시키는데 있다. 두 사람 모두 그들의 마음을 성전과 하나님께로 향했고 또 모두 기도를 드렸지만 그 기도의 내용과 태도, 그리고 그 결과도 서로 크게 달랐다. 첫째 사람의 기도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 가운데 관심이 수평적으로 쏠리고 있었으나 두 번째 사람은 수직적으로 하나님께로만 관심이 쏠리고 있었다.50) 바리새인의 기도 내용은 그 자신의 덕의 목록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자랑의 형태로 되어 있었으나,51)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했고 하나님의 자비를 호소했다. 결국 그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고 돌아갔다. 예수께서 맨 처음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공격과 죄인들에 대한 옹호의 비유였을 것으로 보인다.52) 닫힌 마음 때문에 죄인의 회개조차도 용납하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은 절망하며 희망이 없는 죄인을 용납하시고 스스로 의롭다하는 자를 거부하시는 분임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누가는 이 비유를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와 연결시켜 편집함으로써 이 비유를 기도에 대한 교훈의 시리즈로 제시하고 있다.53) 이 두 비유를 연속으로 편집함으로써 누가는 끈질기게 하는 기도도 중요하지만 그 기도는 마땅히 겸손한 기도가 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위에서의 최후의 기도(눅 23:34, 46)는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는 달리 누가만이 2개의 기도의 형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누가만이 소개하고 있는 예수의 최후의 발언, 혹은 최후 기도 중 첫 번째 것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로마 군인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이다(23:34).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나 주기도문에서처럼 이 기도문도 "아버지여"란 호칭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어서 이 말씀이 기도문의 형태임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54) 누가만이 전해주는 예수의 최후의 기도 중 또 하나의 기도는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는 마지막 위탁의 기도이다(23:46). 이 말씀은 시편 31:5의 인용으로 경건한 유대인들의 취침 기도문으로 사용되기도 하는 것55)인데 예수는 그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의 말씀으로 끝내고 있다. 그런데 이 기록은 누가에만 나오고 있기 때문에 누가의 의도적 구성으로 생각되어진다. 누가는 기도에 대한 그의 지극한 관심 때문에 의도적으로 예수의 공생애를 기도로 시작시켰고 또 기도로 끝맺고 있는 것이다.56) 누가에 의하면 예수는 그의 공생애를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치신 분이다.

 

3. 사도행전에 나타난 기도의 특성

 

  사도행전에서 기도는 마치 저자가 누가복음에서처럼 구속사의 결정적 순간들과 긴밀하게 관련된 것으로 제시된다.57) 사도행전에서도 수시로 기도의 주제가 부각되고 있고 특히 사도들이나 제자들이 기도하는 예수의 본을 따라 중요한 순간마다 기도하는 모습이 강조되고 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11제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들과 예수를 따르던 다른 여인들이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한 다락방에 모여 한 마음으로 기도 모임(1:12-14)을 가졌다. 아마도 누가는 기독교의 첫 태동이 이 기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며 예수 승천 후 11제자와 가족 친지들의 첫 모임에서 기도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음을 말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가룟 유다의 자리를 보충하기 위한 기도 모임(1: 15-26)에서 누가는 초대 공동체가 그들의 공식적인 활동에 앞서서 요셉과 맛디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기도한 후에 맛디아를 선택하여 사도의 반열에 들게 했다. 이 기록은 마치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기도하신 후 열 두 제자를 선택하여 세운 일을 상기시켜 준다.58) 더구나 누가는 두 사람 중의 하나를 선택하기 위한 기도문까지 소개하고 있다. 또 누가는 초대 기독교인들의 공동생활에 대해 언급하면서 기도가 공동체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로 소개하고 있다. 이런 관심은 누가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는 시간에 따라 성전에 올라갔음을 언급하는 데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또 누가는 예루살렘 성도들이 기도를 마치자 성령이 임해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이것은 마치 복음서에서 예수가 세례를 받고 기도하시자 성령이 임한 것과도 비슷하다.59) 누가는 기도가 성령을 충만하게 받는 계기요 수단임을 강조한다. 더욱이 누가는 여기서 예루살렘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린 긴 기도문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4:24-30). 누가가 복음서에서 예수의 기도와 그의 기도문들을 모델로 강조했는데, 사도행전에서도 초대 교인들의 기도와 그 기도문을 중요시하고 있다. 초대 기독교인들의 기도 행동만이 아니라 그들의 기도문을 독자들을 위한 일종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스데반은 사도들의 기도와 안수를 받고 뽑힌 초대교회 일곱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60) 그런데 누가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하면서도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강조한다(7:59-60). 이것은 마치 복음서에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기도하시던 모습을 강조했던 것과 비슷하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스데반의 최후 순간을 예수의 최후 순간을 모델로 삼아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61) 이점은 스데반이 죽기 전에 남긴 두 개의 기도문이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기 전에 남겼던 두 기도문과 너무나도 비슷한 형태의 문구로 구성되어 있는 사실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스데반은 예수의 기도의 모범을 다만 기도행동에서만이 아니라 그 기도의 내용에 있어서까지도 철저히 그대로 따랐던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다.62)

  빌립에 의해 사마리아가 복음화된 후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사마리아로 내려와 그곳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여 줌으로써 사마리아 제자들이 성령을 받게 되었다고 누가는 전해준다(8:15-17). 누가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도들이 기도로 성령 충만 받은 것처럼 사마리아 성도들도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되었다. 먼저 것이 예루살렘의 오순절이었다면 이번 것은 사마리아의 오순절에 해당되는데,63) 여기서도 누가는 기도가 성령을 받게 된 결정적 요인이요 수단임을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에서 첫 이방인 개종자인 고넬료가 개종하여 성령을 받게된 것(10:1-11:18)도 누가는 그가 기도의 사람이요 또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그를 개종시키고 성령까지 받게 해준 베드로도 맨 처음에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고 그 지시대로 행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또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안디옥교회가 성령의 지시를 받아 바나바와 바울을 이방인의 전도자로 파송할 때 금식과 기도로 그들을 파송했다(13:1-3).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들고 나갈 일꾼을 떠나보낼 때에도 기도가 있었음을 누가는 지적하고 있다. 예수가 그의 생애 중요한 순간마다 기도하신 것처럼 초대교회의 제자들도 그들의 생애나 활동의 중요한 순간마다 기도했고, 복음서에서 예수가 기도하는 사람으로 나타났듯이 사도행전에서 그의 제자들도 계속 기도하는 자로 나타나고 있다.

 

 

V. 기도와 구속사

 

1. 예수의 기도와 구속사

 

  누가는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마다 예수의 기도가 동반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의 세례(3:21-22), 열두 제자 선택(6:12-18), 베드로의 신앙고백(9:18-27), 변화산 사건(9:28-36), 감람산에서의 기도(22:39-46) 등에서 기도하는 예수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마가복음과 마태복음과 비교해 볼 때 누가복음의 아주 두드러진 특징이다. 누가는 예수의 구속사역의 과정 속에서 주요 사건마다 기도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편집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예수의 기도와 예수의 구속사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의 기도가 나타나 있는 이들 주요 사건들이 예수의 공생애의 구속 사역에 있어서 차지하는 역할과 그 중요성을 살펴야 할 것이다.

  예수의 수세사건(눅 3:21-22)은 누가복음의 문학적 구성상 첫 번째 중요 단락 가운데 요한의 사역과 예수 사역의 분기점으로서 예수의 공생애 사역이 시작되는 출발점에 위치해 있다. 누가의 예수 수세사건에 대한 기록은 마가와 비교해 볼 때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누가의 기사에 기도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누가는 예수가 세례를 받고 난 이후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강림하였으며 하늘로서 음성이 들렸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사실 세례 자체의 무게 중심이 예수의 수세에 있다기보다는 예수의 기도에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세례 사건에 따른 영적 체험도 예수의 세례보다는 예수의 기도와 더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64) 따라서 누가는 예수의 수세사건에서 예수가 경험한 자신의 신분에 대한 확증과 이러한 자신의 신분에 맞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능력을 공급받는 성령을 받는 사건이 예수의 기도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의 신분은 다음과 같은 하늘 음성이 밝혀주고 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3:22)". 예수의 수세 시 관련되어 있는 예수의 기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러한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는 통로가 되었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의 기도와 예수의 신분 확인을 확증 받은 것으로 직접적으로 연관시키지는 않는다. 즉 예수가 기도를 하면서 나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가르쳐달라고 구체적으로 기도한 직접적인 결과로 하늘의 음성을 통한 예수의 신분 확증이 이루어졌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누가는 예수의 기도와 예수의 사명 성취를 위한 능력 받음이 예수의 기도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으로서 이루어진 것으로 제시하려 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예수가 성령을 달라고 구체적으로 기도했다는 내용에 대한 언급이 없이 단순히 예수가 기도할 때 성령이 임했다는 언급을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의 체험은 예수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자신을 열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가 강조하는 예수의 수세사건 때 일어난 기도와 예수의 영적 체험과의 관계는 하나님은 예수의 기도를 통해 만들어진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의 통로를 통해서 예수에게 사명을 확인시켜주고 또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 주었다고 하는 점이다. 예수의 기도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통로가 되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선택해서 사도로 삼으신 사건(눅 6:12-16)은 예수의 공생애에 있어서 새로운 전환점을 이루는 중요한 사건이다. 누가는 큰 제자 그룹과 열 두 제자를 구별한다. 그리고 열 두 제자를 사도라고 부른다(눅 6:13). 이러한 열 두 사도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상징성에 놓여있다. 고펠트(Goppelt)는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선택한 사건을 모형론적으로 해석할 때 예수께서 하나님의 새 백성, 새로운 열 두 지파인 교회를 세우신 것으로 이해한다.65)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야곱의 열 두 아들에게서 시작된 것처럼 새 이스라엘인 기독교는 열 두 제자에 의한 복음 선포로 시작된다.

  누가의 이 기록은 마가와 비교해 볼 때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가장 큰 특징은 누가가 이 사건에 기도 주제를 도입한다는 점이다. 누가는 이 사건을 누가복음 전체에서 가장 기도가 강조되어 있는 사건으로 보도하고 있다. 기도가 두 번씩이나 언급되어 있으며 특히 밤새도록 기도했다는 기도의 기간을 언급함으로써 이 사건이 가지고 있는 기도와의 관련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또한 누가는 예수의 이 기도가 하나님께 직접 드려진 것이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열 두 사도의 선택은 예수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66) 예수께서 이러한 구속사적 중요성을 가지는 열 두 제자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보여주신 기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예수의 기도를 사용해서 예수께서 사도로 뽑아야 할 자들을 알려주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신다. 즉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매체로서 자신의 기도를 사용하신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의미는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구속사적 사역을 이루어 가시는데 있어서 바로 이러한 예수의 기도를 사용하셨다는 점이다. 예수의 기도가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어 가는 통로가 되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예수의 세례사건이 가지는 구속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 세례사건 때 동반된 하늘의 음성을 통해서 예수의 신분이 다윗과 같은 왕 메시야(사2:7)인 동시에 이사야적 종말론적 예언자인 종(사 42:1)임을 확인받은 사건이다. 둘째, 성령의 임함을 통해서 예수는 단순히 자신의 왕적 메시야와 선지자적 종의 신분을 확인받는 것만이 아니라 이러한 자신의 사명을 시작하기 위한 능력을 공급받은 사건이다. 셋째, 이것은 오순절 제자들의 성령 받음과 비교해 볼 때 각기 사명을 위한 능력 받음이라는 점에서는 평행성을 가지나 예수의 성령 받음은 메시야로서의 성령 받음이라고 하는 점에서 구속사적 의미의 독특성을 가진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사건(눅 9:18-22)은 누가복음의 문학적 구조상 예수의 갈릴리 사역 중에서 열 두 제자의 사역이라는 주제로 연결된 누가복음 9장의 사건 가운데 두 번째에 해당된다. 이 사건은 예수의 사역에 동참하는 제자도의 진행 과정에 있어서 제자들의 예수 인식에 새로운 전환점을 이룬 중요한 사건이다.67) 이 사건은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구속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서 몇 가지 의미를 가진다.68) 첫째,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누가의 저작에 나타난 제자도에 있어서 최초로 예수의 메시야됨에 대한 고백이 이루어진 사건으로서 예수의 신분에 대한 새롭게 발전된 이해임을 보여준다. 둘째,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수의 사명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계기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메시야로서의 사역이 고난과 거절과 죽음을 포함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새롭게 계시했다. 누가의 베드로 신앙고백 사건을 마가복음의 평행본문과 비교해 볼 때 가장 큰 차이점은 이 사건의 첫 부분에서 예수는 제자들이 있는 가운데서 기도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누가는 여행 도중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 근처에서 벌어진 사건이라고 서술하는 마가의 도입 장면을 완전히 바꾸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예수가 기도한 후에 예수의 질문과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누가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사건과 예수의 기도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사건이 가지는 의미는 이미 살펴본 것처럼 누가 저작의 문맥 속에 나타난 제자도에 있어서 예수의 메시야 됨에 대한 최초의 신앙고백이라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계기로 예수의 고난받는 메시야 됨의 의미에 대한 계시를 시작하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누가는 예수의 메시야 됨에 대한 제자들의 인식과 예수의 새로운 자기 계시가 이루어진 이러한 예수의 공생애의 중요한 사건이 우연히 일어나거나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예수의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밝힌다.

  변화산 사건(눅 9:28-36)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사건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양자 사이의 이러한 긴밀한 관계는 변화산 사건을 서술하는 첫 문장에서부터 잘 나타나고 있다. 태니힐(Tannehill)은 이러한 상관관계에 대한 근거를 세 가지 정도 지적한다.69) 첫째, 9:31의 예수의 별세에 대한 언급은 9:22에 나오는 예수의 다가올 죽음에 대한 언급과 연결되어 있다. 둘째, 9:35의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것은 9:22-27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확증이다. 셋째, 변화산에서의 변모는 9:27에 나오는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는 말씀에 대한 부분적인 성취이다.

  이 사건에서 나타난 하늘의 음성이 예수의 신분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로 "나의 아들"이라는 아들 됨에 대한 언급은 세례 때의 아들 됨에 대한 칭호와 마찬가지로 시편 2:7에서 온 것으로 왕적인 메시야에 대한 것이다. 둘째로 "택함을 받은 자"라는 언급은 사 42:1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곧 하나님의 선택된 도구로서의 종에 대한 것이다. 셋째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라는 언급은 신 18:15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를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서 말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에 동의한다.70) 따라서 변화산에서의 예수의 신분에 대한 하늘의 음성은 예수가 왕적인 메시야, 종,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는 것을 확증해 준다.  

  이 사건이 주는 기독론과 제자도에 함축된 구속사적 의미를 정리하면, 첫째로 예수에게 있어서는 예수의 자기 사명 이해에 대한 확증인 동시에 격려였고, 둘째로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계시였다. 즉 예수는 메시야, 종, 모세와 같은 선지자이다. 셋째로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함께 동참해야 한다. 변화산에서의 이러한 예수의 기도는 예수 자신의 영적인 체험과 제자들의 영적인 체험 모두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수가 변모된 모세와 엘리야의 출현을 결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통로를 예수는 기도를 통해서 준비했던 것이다.

  누가는 예수가 세 명의 제자들을 동반하고 함께 기도하러 갔다는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예수의 이러한 기도가 제자들과도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즉 예수의 변화산 사건은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수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통찰력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가 세 명의 제자들을 함께 데리고 간 것은 제자들의 영적인 체험을 위해서이고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보고들은 것은 예수의 기도와 관계가 있다. 이런 면에서 예수의 기도는 제자들에게 자기를 계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2. 사도행전에 나타난 기도와 구속사

 

  누가의 오순절 사건(행 2:1-41)에 대한 설명은 크게 오순절 사건 자체에 대한 묘사(2:1-13)와 베드로의 설교를 통한 오순절 사건의 의미에 대한 설명(2:14-41)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71) 이것은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수세 시 성령강림 사건 자체에 대한 묘사와 예수의 나사렛 설교를 통한 세례 사건의 의미에 대한 설명의 구조와 평행을 이루고 있다. 이 사건이 주는 의미는, 첫째로 기독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승귀하신 예수의 주권을 보여주는 사건이며 동시에 성령의 강림은 곧 예수의 주권을 증명해 주는 사건이다. 승귀하신 예수는 주로 성령을 통해서 교회를 통치하시고 교회와 교제하시고 교회를 인도하신다. 둘째로 교회론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다. 오순절 사건은 먼저 교회자체를 위한 것이다. 오순절에 예수께서 부어주신 예언의 영은 교회를 깨끗케 하고 교회를 회복시키고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작용한다.72) 오순절 사건은 또한 교회가 땅끝까지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능력을 공급받은 사건이다. 따라서 오순절 사건은 세계 선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오순절에 일어난 사건은 행 1:14을 통해서 기도와 연결되어 있다. 1:14의 사도들과 여자들과 예수의 아우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하는 것은 한 번의 특별한 기도 모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초기 오순절 이전 공동체의 지속적인 태도를 묘사해 주는 요약구절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전에 제자들의 기도가 있었다는 사실은 예수의 세례 사건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 기도가 예수의 성령강림에 배경을 이루고 있듯이 기도가 역시 오순절 성령강림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양자 모두 기도의 직접적인 간구로 성령이 임한 것은 아니다. 요단강에서의 수세 시 예수가 성령을 달라고 직접 간구하지 않았듯이 제자들의 기도가 직접 성령을 달라고 간구한 것은 아니다. 오순절 성령강림과 기도에서 누가가 강조하고 있는, 제자들이 구체적으로 성령을 달라고 가구했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성령강림이 있기 전에 제자들이 예수의 명령을 기다리고 순종하는 가운데 기도하는 모습은 제자들의 스승 되시는 예수께서 중요한 사건이 있기 전에 항상 기도를 통해 모범을 보여주신 것과 평행관계에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즉 예수의 기도가 요단강 성령강림 사건의 직접적인 조건이라기보다는 간접적인 배경을 형성했듯이 오순절 이전 제자들의 기도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직접적인 조건이 아니라 배경을 형성한다. 이것은 제자들의 기도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기보다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있어서 오순절 이전 제자들의 기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통로로서 기도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마리아 지역의 선교(행 8:4-24)는 사도행전의 선교 프로그램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다. 이 사건은 최초의 유대 울타리를 벗어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러한 사마리아 선교가 사도들이 아니라 빌립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파견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의 선교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기는 하였으나 아직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사람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했고 이 결과 사마리아 성령강림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하여 사마리아 선교에 대한 공적 인준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사건은 복음이 예루살렘 외부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내부에 선포된 첫 번째 경우로써의 구속사적 중요성을 가진다.

  빌립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구체적으로 어떤 도시를 福音化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오히려 누가는 그 도시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를 관심 있게 보도해 주고 있다. 빌립은 사마리아인들에게 예수를 전파하고 표적을 행하면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를 고쳐주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특히 이 중에는 그 도시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마술사 시몬이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는 일들이 생기기도 했다. 이러한 사마리아 성령강림 사건에 있어서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가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사울의 회심(행 9:10-18)은 사마리아에서 이방 선교로 넘어가는 전환점에 있어서 도 한 번의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는 사건이다. 누가는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이야기를 사도행전에서 세 번씩(9:1-30, 22:3-21, 26:2-23)이나 반복하고 있다. 사울의 회심이야기가 사도행전에서 이토록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은 이후 사울을 통해서 전개될 이방 선교 때문이다. 사울은 본격적인 세계 선교를 시작한 이방인의 사도로서 중요성을 가진다.73) 사울의 회심이야기에는 기도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아나니아는 새롭게 회심한 사울에게 가서 사역하라는 명령을 받으면서 "지금 기도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누가는 사울이 회심한 이후의 최초의 모습을 "저가 기도하는 중이라(11절)"고 묘사한다. 또한 사울의 회심이야기 가운데 두 곳에서 기도는 계시적인 역할을 한다.74) 사울의 회심 자체가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이루어진 것처럼 바울의 이방 선교에 대한 사명도 바울의 회심 이후 바울의 기도가 원인이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이 바울의 기도를 통해서 바울에게 전달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속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사건인 바울의 회심 사건 가운데 특히 바울의 기도 장면과 더불어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쓰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이 언급되고 있음을 누가의 바울 회심 사건의 되풀이되는 묘사에서 볼 수 있다.

  사도행전 9:10-18은 베드로에 의한 최초의 이방인 고넬료의 회심 사건을 다루는 부분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승인으로 인한 최초의 이방인 선교의 절정을 이루고 있으며 사도행전 전체에서 하나로 된 가장 긴 이야기이다.75) 초대교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었다.76) 최초의 이방인 회심자 고넬료의 사건은 바로 이 이방인 선교 문제의 전환점을 이루는 사건이다. 누가는 구속사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고넬료의 회심 사건이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77) 기도하는 중에 고넬료가 환상을 보고 베드로를 초청하라는 계시를 받는다. 또한 기도하는 중에 베드로가 환상을 보고 고넬료의 집으로 가라는 계시를 받는다. 이와 같이 기도하는 고넬료와 베드로가 이 사건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헨첸은 고넬료 회심 사건을 통해서 누가가 전하고자 하는 전체적 의도를 누가가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 어구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한다.78) 첫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는 일에 저항했다는 사실이 반복된다. 둘째,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사실이 반복된다. 이와 같이 최초의 이방인 회심자인 고넬료의 회심 사건에 있어서 가장 큰 특징은 이 사건이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과 주도에 의해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최초의 이방 선교를 주도하신 분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기도는 이러한 최초의 이방인 선교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동참하는 도구가 된 것이다. 기도하는 고넬료와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다.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의 제1차 선교 여행(행 13:1-3)은 사도행전의 역사에 있어서 이방인들에 대한 타문화 선교의 시작을 나타낸다. 지금가지는 이방인에 대한 선교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지만 이제 안디옥교회로 말미암아 1세기 이방인 세계 선교에 대한 조직적이고 본격적인 선교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렇게 안디옥교회가 세계 선교의 중심지가 된 것은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들이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고 또한 기도함으로써 선교사를 파송했다는 사실이다. 누가는 이렇게 안디옥 교회가 세계 선교의 시작이 되는 사건에 있어서 기도와의 관련성을 보여줌으로 기도가 구속사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교회가 주체가 된 최초의 세계 선교사 파송이라는 구속사의 중요한 전환점에 기도하는 교회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가 기도를 통해서 세계 선교를 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거나 세계 선교사로 바울과 바나바를 보내 달라고 먼저 하나님께 요구한 결과가 아니다. 세계 선교의 첫 시작이라고 하는 구속사의 중요한 전환점의 주도권과 시작은 하나님께 있었다. 기도하는 안디옥교회는 성령의 주권적 역사에 민감하게 되어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수 있었다. 기도로 하나님의 듯을 발견하고 기도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세계 선교의 시작이라는 중요한 구속사의 전환점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도로 시작되었다.

 

 

VI. 기도와 기독론

 

  예수의 기도와 관련하여 누가는 예수를 중보기도자로 제시한다. 제자들을 위한 예수의 중보기도가 제자도에 따르는 모든 것을 성공적으로 성취하는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도를 통하여 예수는 자기를 계시하며 또한 기도를 통하여 제자들이 자기가 누구인가를 깨닫는 영적인 통찰력을 주신다.

 

1. 기도를 통한 자기 계시

 

  예수는 자신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말과 행동으로 알리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의 설교를 듣고 예수가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신앙하며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누가는 이러한 제자들의 신앙고백이 바로 예수의 중보기도로 인한 예수의 자기 계시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암시해 준다.

 

  (1).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예수의 중보기도(눅 9:18-27)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수의 기도와 베드로의 신앙고백 사건에 있어서 예수의 기도가 일차적으로 자신의 사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위한 것으로 해석한다. 즉 예수의 세례가 예수의 메시야 의식의 출발점인 것과 같이 베드로의 신앙고백 사건과 관련된 예수의 이 기도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포함하는 예수의 메시야 사역의 새로운 이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79)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당시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민족적, 정치적, 군사적 메시야관을 표현한 것으로서 기독교 메시야관으로 볼 때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에 의해서 교정을 받고 예수 자신이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첨가시켜 주었는데 어떻게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계시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것 자체로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이고 이 계시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것이라는 것을 다음 몇 가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첫째, 누가는 베드로 신앙고백과 평행 본문인 마태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하나님이 주신 계시임을 말하고 있다(마 16:17). 둘째,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무리들의 예수관과 비교해 볼 때 분명히 발전된 예수 이해를 보여준다. 비록 베드로가 예수를 메시야라고 고백할 때 전통적인 유대인의 메시야관의 범주에서 고백을 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기독교적 고난받는 메시야관의 이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예수가 바로 메시야라고 한 그 점에 있어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계시적 성격이 들어있는 것이다. 셋째, 누가의 강조점은 바로 예수의 메시야 신분을 아는 것은 전적으로 초자연적 지식이라는 것이다.80)

  누가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사건에 앞서 예수가 기도했다는 사실을 말할 뿐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누가가 문맥상 보여주는 단서들은 예수의 기도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계시를 받는 것과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받게 된 새로운 계시와 관련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누가가 예수의 기도 문맥에서 보여주기를 원하는 것은 제자들이 새롭게 발견한 예수의 신분에 대한 지식이다. 예수의 기도 때문에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을 이제 보고 듣게 된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모델이다. 예수에 대해서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예수가 그들을 위해서 먼저 기도했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예수는 자신에 대한 제자들의 신앙이 생기는데 있어서 제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보기도자로서 제시되고 있다.

 

  (2). 변화산 사건과 예수의 중보기도(눅 9:28-36)

  누가는 보는 것과 듣는 것에 관한 언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해서 초자연적 실재를 이해하는 통로로 삼는 경향이 있다.81) 누가는 이미 예수의 기도에 대해서 베드로와 헤롯 사이의 병립관계를 통해서 헤롯의 무지와 베드로의 영적 이해를 나타내는데 이러한 언어적 용법을 사용한 적이 있다. 하나님의 계시로서 나타난 영적 실재에 대한 통찰력을 나타내는 이러한 시각과 청각의 언어적 용법이 변화산 사건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변화산에서 제자들이 보고 들은 것은 하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계시이다. 따라서 변화산 사건에서 제자들이 체험한 계시의 통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는 시각체험을 통한 계시이고 후자는 청각체험을 통한 계시 이해이다. 예수의 기도는 자신의 변모를 위한 기도로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예수의 신분에 대한 계시를 동반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누가는 분명히 예수가 산으로 기도하려고 갈 때 제자들을 함께 동반했다는 것을 관련시킨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봄과 들음은 기도하는 예수와 그들이 함께 있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방식으로 기도와 예수에 대한 계시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제시되어 있다. 예수가 무슨 내용으로 기도했다는 것은 나오지 않지만 누가가 제공하는 문맥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사건에서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더 깊이 아는 것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기도의 내용이 없다는 것이 예수의 기도와 제자들이 받은 계시와의 관련성을 약화시키지 못한다.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기도하고 기도하는 예수와 함께 있던 제자들은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된다.

 

  (3).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 중보기도(눅 23:32-49)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과 둘째 부분은 평행적 관계로 되어 있으며 각각 예수의 기도와 신앙고백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예수의 중보기도로 말미암아 사형수와 백부장의 신앙고백이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각각 두 부분은 다시 4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진다.82)

 

  a. 도입 ; 두 명의 죄수(32절 이하)           도입 ; 표적(44절 이하)

  b. 예수의 기도(34상반절)                    예수의 기도(46)

  c. 관중들의 조롱(35-39)                     회심(47)

  d. 회심(40-43)                              관중들(회개)(48이하)

 

   이 두 부분을 연결해주는 또 다른 평행관계가 있다. 전자의 세 부류의 조롱자들은 후자의 세 부류의 조롱하지 않은 자와 대조되면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조롱자                                  조롱하지 않은 자

  a. 관원들(35하)                           a'. 백성들(35상, 48)

  b. 군병들(36)                             b'. 백부장(47)

  c. 한 죄수(39)                            c'. 한 죄수(40-43)    

    

  백성들은 관원들과 분리되어 있다. 또한 백부장은 군병들로부터, 회개한 죄수는 그렇지 않은 죄수와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서로 예수의 기도에 뒤따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수가 기도할 때 다른 사람들의 태도가 변하고 있다. 용서를 구하는 예수의 기도는 구조적으로는 바로 다음의 회개한 사형수의 신앙고백과 연결되어 있고 주제적으로는 그 다음의 백부장의 신앙고백 양자 모두와 관계가 있다. 누가가 십자가 이야기 속에서 두 개의 기도를 두 개의 신앙고백과 나란히 병렬시켜 놓은 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의미를 느끼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비록 두 번째 기도는 중보기도가 아니지만 분명하게 첫 번째 기도는 중보기도다. 이 첫 번째 기도는 십자가 장면 전체에 주제적으로 도입 역할을 한다. 반면에 두 번째 기도는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뿐만 아니라 구조적으로 기도와 계시 주제를 제공해 준다. 예수는 지금 자신의 십자가 앞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죄인들을 위해서 간구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중보기도자로서 제시된다. 이러한 내용은 누가가 다른 곳에서 예수의 기도에 대해서 말한 것과 함께 예수의 이 두 기도와 이어지는 두 명의 회개한 죄인들의 신앙고백을 직접적으로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두 번째 기도는 막 15:37에 나오는 "큰 소리"에 대한 누가의 해석을 보여준다. 마가에서 백부장의 신앙고백은 성소의 휘장이 둘로 찢어진 다음에 이루어지지만, 누가는 예수의 죽음 즉시로 백부장의 신앙고백을 위치시킴으로 예수의 기도와 백부장의 신앙고백을 아주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이로써 누가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사형수를 위한 중보기도와 한 사형수의 신앙고백을 밀접하게 연결시킨 것처럼, 여기서 다시 예수의 기도와 백부장의 신앙고백을 의도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예수가 기도하는 것을 보고 백부장은 예수의 참된 신분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게 된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문자적이고 은유적인 양면성을 가진 의미로 함께 사용된다. 백부장은 예수가 기도하는 것을 자신의 육신의 눈으로 본다.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백부장은 예수의 신분을 바로 보고 신앙을 고백하게 된다. 누가는 백부장의 신앙고백을 가져오게 한 요인으로 단순히 예수의 죽음이 아니라 예수의 기도와의 관련성을 주목해 보도록 한다. 십자가 사건 전체의 구조와 예수의 첫 번째 기도 내용이 이러한 관련성을 지지해 준다. 백부장이 신앙고백을 했다는 증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표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누가는 백부장의 고백을 이 특별한 표현으로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백부장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으로 신앙고백을 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특기할 점은 백부장의 신앙고백이 사도행전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된 경우에 사용된 전례를 형성하는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83) 그러므로 누가는 십자가 사건을 두 개의 장면으로 구분하고 의도적으로 이를 평행시킴으로써 예수의 기도와 이어지는 신앙고백 사건의 연관성을 나타내고 있다. 특별히 수난기사에 기록된 예수의 기도와 계시에 도입된 새로운 내용은 예수의 신분을 참되게 이해하는 것이 개인의 구원으로 연결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예수의 기도는 예수 자신의 계시를 통해서 또한 하나님의 구원을 중계하고 있다.

 

  (4). 예수의 기도와 성령(눅 10:21, 11:11-13)

  누가는 예수가 "성령으로 기뻐하사"로 시작하는, 공관복음서에 전해오는 유일한 예수의 감사기도문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시 예수가 성령 안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에 대한 누가의 관심은 'Q'자료를 변경해서 사용하는 그의 의도에서도 드러나는데, 누가복음 11:11-13에서 누가는 마태의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7:11)"를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로 바꾸고 있다. 따라서 누가는 성령의 은사를 인간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기본적인 응답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로써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영은 완전히 재현되었으며, 그의 전체 생애와 행위는 성령의 활동 양식을 구성한다. 예수는 그 앞의 어떤 선지자보다 훨씬 더 밀접한 유대관계 속에서 성령과 합일되어 진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비교적으로 외적인 요인에 의해서, 때로는 돌발적으로 성령을 부여받은 반면에, 말씀과 사역에 있어서 예수는 실제 성령 그 자체와 동일한 분이기 때문이다.   

 

2. 베드로의 신앙보존을 위한 예수의 중보기도(눅 22:31-33)

 

  이 구절에 나타난 예수의 말씀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하다. 첫째로 이것은 누가복음에서 예수가 자신의 기도 내용을 제자들과 관련시키는 유일한 것이다. 둘째로 누가의 문서에서 구체적 기도의 간구가 직접적으로 명백하게 하나님께로부터 응답 받은 것을 기록한 唯一의 경우이다. 셋째로 이 구절은 예수의 기도의 중보기도적인 특성이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예수의 기도를 통해서 드러나는 예수의 중보자적 특성이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이 구절에서 나타나는 탁월한 중보자로서의 예수의 사역은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를 제자들에게 전달해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필요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 전달해 주기도 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 두 가지 중보사역을 모두 효과적으로 수행한다.

  예수의 이러한 중보사역은 이중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누가는 이 기도를 통해서 예수의 중보사역을 예수의 지상사역의 일부로 제시하고 있다. 둘째, 누가는 이 기도를 승귀하신 예수의 계속적인 중보사역의 모델로도 제시하고 있다.84)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승귀하신 예수의 계속적인 중보사역의 시작은 부활과 승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지상사역에 있다는 것이다.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31)란 말은 사탄이 단순히 제자들을 시험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제자들의 믿음을 파멸시켜서 背敎하게 하고 구원을 상실하게 하려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학계의 관심을 끌어왔다.85)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께서 사탄의 목표가 제자들의 믿음을 궁극적으로 파멸시키는 것임을 알고 계셨다는 점이다.86) 예수는 자기의 중보기도의 결과로 베드로의 믿음이 파멸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으므로 사탄의 청구는 단순히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정도가 아니라 제자들의 믿음을 파멸시키려는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제자들의 믿음이 파멸된다는 것은 일시적으로 예수를 부인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背敎하여 구원을 상실하는 것으로 이해된다.87) 결국 제자들을 공격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배교하게 하고 제자들의 구원을 궁극적으로 상실하게 하려는 사탄의 의도는 예수의 제자들에 대한 중보기도 때문에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예수의 중보기도 사역은 예수의 부활, 승천,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지상사역 때 이미 시작되었다. 본문에 따르면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청구한 대상은 복수인 "너희"로 되어있지만 예수는 단지 베드로만을 위하여 기도한 것으로 나타나있다. 이에 대한 답으로 Crump는 다음과 같이 논증하고 있다.88) 베드로는 사도들의 대표자였다. 따라서 예수가 사도 전체에 실제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주제를 특히 베드로와 이야기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또한 예수가 대표인 베드로에게 말한 것이 실제로 사도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다. 예수가 명백하게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했다고 하는 사실이 예수가 실제로 모든 사도를 위해 기도했다고 하는 강력한 암시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예수가 모든 제자를 위해 기도했다면 물론 베드로를 위해서도 기도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가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했다는 언급은 예수가 다른 제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했다는 것을 반드시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VII. 교훈적 기도와 제자도

 

  기도는 제자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제자도의 본질이 하나님과의 교제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신뢰와 복종이라고 본다면 기도는 중보자로서의 특징만이 아니라 제자도 모델로서의 역할도 한다. 예수의 기도가 이러한 제자들을 위한 기도의 모델로서의 가능성을 가지는 부분은 예수가 삶의 모든 영역과 모든 시기에 기도의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생활에서 보여진다.89) 이러한 제자도 기도의 특징은 예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1. 제자도 기도의 모델로서의 겟세마네 기도(눅 22:39-46)

 

  누가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본문은 마가나 마태와 비교해 볼 때 많은 차이가 있다. 누가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사를 기록하는데 있어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신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는 기도에 대한 勸勉이 이 사건의 처음(40)과 마지막(46)을 감싸도록 하는 포괄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도에 대한 권면을 배경으로 하여 시험에 직면하여 기도하는 예수와 시험에 직면하였으나 기도하지 않고 잠든 제자들의 모습이 평행을 이루고 있다. 결과적으로 예수는 시험을 이겨내고 십자가로 나아간 반면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시험에 실패해서 예수를 부인하게 된다. 예수는 기도로 승리했으나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음으로써 실패했다. 누가는 기도하는 예수와 기도하지 않은 제자들을 대조한다. 그리고 이것은 제자도에 대한 중요한 모델을 제공해준다. 기도하는 예수는 제자도의 긍정적 모델로 그리고 기도하지 않은 제자들은 제자도의 부정적 모델로 제시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기도와 제자도에 대한 아주 중요한 결론을 우리에게 준다. 시험을 이기는 길은 오직 기도를 통해 얻은 하나님의 능력밖에 없다. 따라서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는 기도에 대한 중요한 교훈은 예수 자신과 제자들에서처럼 누가 당시의 교회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모든 교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2. 예수의 기도방식

 

  누가는 예수의 기도방식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지 않다. 그러나 누가의 저작에서 최소한 몇 가지를 찾아볼 수 있다.90) 첫째, 예수는 식사 때마다 떡을 떼시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신 것을 볼 수 있다(눅 9:16, 22:19, 24:30). 이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기도 습관으로 예수께서 이러한 전통과 규례를 충실히 지키신 것으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기도는 규칙적이고 습관적인 것을 알 수 있다. 누가는 예수께서 감람산에 기도하러 가신 것은 일회적이 아닌 규칙적이라는 의미에서 습관적이었다고 말해준다(눅 22:39). 이러한 예수의 기도생활이 얼마나 규칙적이었는가는 바쁜 사역 가운데서도 기도하기 위해 시간을 따로 떼어놓으신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눅 4:42, 5:16). 또한 이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에 있어서 기도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가를 보여준다. 긴급한 사역을 중단하고 기도로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할 시간을 반드시 확보했다는 것은 예수의 사역이 기도를 통해서 공급받은 하나님의 임재 체험과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때로 예수는 오랜 시간 동안 진지하게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열 두 제자를 선택하기 전에는 기도로 밤을 새우시기도 하셨다. 또 예수께서는 40일 동안 금식하시면서 기도하신 경우도 있었다(눅 4:2).

  또 누가는 예수의 기도하신 장소에 대해서는 자주 한적한 곳에서 따로 기도하셨다고 전해준다(눅 5:16, 4:42). 특히 예수는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는데(눅 6:12, 9:28, 22:39, 24:50), 감람산은 예수께서 습관적으로 가서 기도하시던 장소였다. 그리고 예수께서 기도하신 태도와 열정은 특별히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모습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 서서 기도하던 것(눅 18:11)과는 달리 예수는 무릎을 꿇고(22:41) 애써 간절히 기도하셨다(22:44). 예수의 간절한 기도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될 정도였다(22:44). 이러한 모습은 예수의 기도 자세와 열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고 하겠다.  

 

3. 예수의 기도 체험의 특징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기도 체험의 특이한 점 하나는 초자연적 현상의 영적 체험이다. 즉 세례시(3:21-22)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함을 보는 것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남(9:28-36), 겟세마네 동산에서 천사가 나타남(22:36-49) 등이다. 이러한 영적 체험은 기도 때마다 나타났다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는 점이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측면에서 예수의 기도 체험은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기도할 때 영적 체험을 경험하는 것과 공통점을 이루고 있다.91)  이러한 예수의 기도는 초대교회로 이어져, 초대교회에서도 예수가 식사 전에 기도하신 것처럼 식사 전에 기도하는 습관을 계속 유지했고(행 27:35), 또한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가곤 했으며(행 3:1),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2:42). 안디옥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하면서 금식하였고(행 13:3), 남부 갈라디아교회의 장로를 세울 때의 진지함(행 14:23)은 초대교회의 기도 분위기를 엿보게 한다.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드로아에 초청하여 무릎을 꿇고 눈물로 기도하는 모습은 기도의 열정을 보여준다(행 20:36).

          

4. 기도의 모델로서의 주기도(눅 11:1-4)

 

  주기도문은 종말론적 기도이자 또한 교회의 매일의 삶 가운데서 반복해서 드려져야 할 실존적 기도이기도 하다. 주기도문은 이와 같이 미래적 종말론과 현재적 종말론의 양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종말이 완성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드려져야 할 종말론적 기도이자 또한 제자도의 모델, 제자들의 기도 모델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이 기도의 명칭을 흔히 '주기도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제자들의 기도' 혹은 '교회의 기도'라고 부르는 것이 더 잘 어울린다. 왜냐하면 이 기도문은 예수께서 자신에게 사용하신 흔적은 없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는 기도의 모델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92)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마태복음(6:9-13)의 긴 본문 형태와 비교하여 공통점과 많은 차이점이 있다. 공통점으로는 양자가 모두 예수의 기도에 관한 교훈 중에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제자도의 기도에 대한 모델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차이점은 첫째로 마태복음은 산상수훈에 포함시켜 이를 언급하고 있으나 누가는 평지수훈(6:17-49)과는 관계없이 이를 언급하고 있다. 둘째, 마태는 주기도문이 주어지게 된 상황에 대하여는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으나 누가는 제자들의 요청에 의하여 기도에 대해 교훈하신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셋째, 기도의 내용에서도 차이가 난다. 호칭에서 그리고 마태의 세 번째 간구문이 누가에는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마지막 송영이 누가에는 없다는 점이다. 주기도문의 길이에 관해서는 누가의 것이, 표현 형태에 있어서는 마태의 것이 원형에 가깝다는 것이 일반적인 결론이다.93)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주기도문의 형식의 차이들보다는 내용과 의미를 살피는 일이다. 주기도는 전체적으로 보아 두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 관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인간에 관한 것이다. Barth는 주기도 안에 두 가지 국면이 들어있다고 보면서 그것은 첫째는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승인하는 것이요, 둘째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라 했다.94)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부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도하는 모든 인간의 연합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낸다. "우리 아버지"는 인간을 낳으신 분, 말씀으로 양육하시는 분, 인류에게 희망과 힘을 주시는 분이심을 승인하는 것이다. 인간은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지만 그 가능성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지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은 자비가 무한하신 인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95) 주기도의 처음 세 가지 기원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과 승리를 시인하며, 후반부에 나오는 청원은 인간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한 문제들이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고 따라서 하나님과 사랑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기도하기 전에 미리 다 아시고 모든 것을 채워주신다.

  주기도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가장 귀한 기도의 모형이다. 그 안에는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승인과 영광돌림, 하나님의 뜻과 나라의 실현에 대한 확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나가기 위한 인간의 진지한 간청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에 있어서 주기도는 기도하는 자의 모델이었던 예수가 주신 모범적 기도문인 것이며, 여기서 예수는 자신이 늘 하시는 일을 그대로 가르치고 계신다. 예수는 열심히 기도하셨고 제자들은 기도의 분위기에서 주기도문을 받았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다섯 가지 간구의 내용들은 모두 제자들이 현재 경험하고 있는 구원의 경험들을 더 충만하게 구하는 것이다.96) 또한 제자도적 기도에 있어서 기도해야 할 제자들의 책임과 하나님의 주권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5. 에필로그: 바울의 기도

   

  사도행전에는 많은 사도들의 기도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사도 바울의 기도이다.97) 바울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회심한 바울의 처음 모습이 바로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저가 기도하는 중이라(행 9:11)". 그것은 마치 그의 다음 삶의 표지와 같은 것이었다. 그의 끊임없는 기도의 모습은 그가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계속되었다. 바울은 기도하는 크리스천의 모델이다. 그는 서신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기도할 것을 권면하며, 그러한 기도가 있을 것을 전제로 글을 쓰고 있다(롬 1:8-9, 고전 1:4, 빌 1:3-4). 그의 기도가 복음서에 나타난 기도와 다른 점은, 그의 기도에는 그의 삶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기도는 충실히 기도의 모범이신 예수의 기도를 따르고 있다. 그의 기도하는 모습과 열심과 진지함과 간결성에서 예수의 기도와 방불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예수처럼 그의 양떼들을 위한 사역자로서의 기도를 드린다. 그것은 마치 그의 의무와 같다. 그의 기도는 신자들에게 끊임없이 기도할 것을 권유하는 기도요, 감사와 간구가 이어지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와 약속, 능력과 성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롬 15:13, 빌 1:9-11). 또 신앙에 근거한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구하고 신자들의 위로와 소망과 인내를 구하고 있다. 이 목적을 위해 바울은 기도한다.  

 

 

VIII. 결론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기도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자유로운 친교를 회복하고 하나님과의 생명의 친교가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이유는 시험을 이기고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얻기 위해서, 삶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이런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성경 저자는 누가이며, 누가의 저작을 통해서 기도가 예수의 생애와 초대 교회에서 어떤 사역을 감당해 왔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누가가 그의 저작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기도의 특성에는 크게 기도의 구속사적 측면, 기독론적 측면, 제자도적 측면의 세 가지 주요 요소가 있다. 지금까지 누가신학의 기도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여러 측면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강조해 왔으나 누가신학의 기도에 대한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세 가지 측면을 종합적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첫 번째 요소는 기도의 구속사적 측면이다. 누가는 마태나 마가와는 달리 예수의 공생애의 중요한 사건마다 예수의 기도가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중요한 선교사건마다 반드시 기도가 동반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때 기도는 하나님께서 구속사를 이끌어 가시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지만 중요한 하나의 통로가 된다. 그러나 기도라는 수단을 사용해서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구속사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구속사를 이루어 가시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두 번째 요소는 기도의 기독론적 측면이다. 이것은 예수의 기도에 나타나 있는 독특한 면으로 제자들의 기도와는 구별되는 점이다. 예수는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계시하며 또한 자신의 기도를 통하여 제자들이 이를 알게 하신다. 더 나아가서 예수의 기도는 제자들의 신앙을 보전하는 중보 역할을 감당한다. 예수의 기도가 가지는 이러한 기독론적 측면은 예수의 중보자되심이라는 독특한 신분과 사명을 잘 드러내어 준다. 세 번째 요소는 기도의 제자도적 측면이다. 이것은 기도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교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기도는 사람들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와 순종의 바탕으로서의 필수적인 의무인 동시에 하나님과의 교제로 인한 하나님의 임재와 영적 체험을 가지게 되는 통로로서의 영광스러운 특권이기도 하다.

  누가의 신학에 강조되어 있는 이러한 세 가지 중요한 기도의 관점으로 예수의 기도와 초대교회의 기도를 비교해 보면 양자 사이에는 차이점과 공통점이 있다. 대표적인 차이점으로는 먼저, 예수의 기도는 예수의 중보자로서의 독특한 신분과 사명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예수의 기도를 통해서 드러나는 기독론의 가장 중요한 점은 예수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독특한 중보자라는 것이다. 예수의 이러한 중보자로서의 중보기도 사역은 예수만의 독특한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중보기도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자기 계시를 하신다. 그러나 교회의 중보기도는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중보기도의 대상에서 예수에 대한 계시를 갖다주지는 않는다. 이 점에 있어서 예수의 중보기도와 교회의 중보기도는 차이점이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하는 기도의 형식은 동일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예수의 중보기도는 예수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는 의미에서의 중보기도이며, 교회의 중보기도는 단지 자신을 위한 간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간구의 내용이라는 의미에서의 중보기도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또 누가는 예수의 중보기도 사역은 예수의 부활과 승귀 이후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의 사역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예수의 중보기도 사역이 승귀 이후의 독특한 사역이 아니라 지상 사역시에 행해진 중보기도 사역의 연장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의 중보기도 사역을 너무나 기계적인 이분법적 구조로 보아 천상의 사역으로만 한정시키려는 기독론에 대한 지표가 된다.

  예수의 기도는 제자들에게 대한 모델적 기도로서 제자들의 기도와 평행관계 속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공통점은 구속사와 개인적 삶의 관점에서 볼 때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요, 교제의 통로라고 하는 점이다. 기도는 제자도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만남이요, 교제의 통로이다. 따라서 기도는 독백이 아닌 대화요,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통행이다. 기도라는 대화를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에게 말한다. 그러나 반대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기도 한다. 기도할 때 기도하는 사람이 체험하는 영적 체험은 기도하는 사람과 응답하시는 하나님 양자 모두와 관련된다. 이 때 이러한 영적 체험의 내용은 기도하는 사람의 매 순간 처해있는 특수한 형편에 따라 행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서 역동적으로 결정된다. 그러므로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수단에 따라 원하는 목적의 체험을 이루는 도구가 아니라 주권을 가지고 행하시는 하나님께 대해 자신을 개방하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기도는 구속사가 전개되는 통로이다. 그래서 예수의 공생애 사역과 초대교회의 역사는 구속사의 중요한 전환점마다 기도의 문맥 속에서 전개됨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람의 기도가 구속사를 이끌어 가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도를 통해서 구속사를 이끌어 가신다. 하나님은 자신이 정한 구속사의 전개과정에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동참시키신다. 따라서 기도와 구속사의 관계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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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해 

 

1). 김득중, 누가의 신학, (서울: 컨콜디아사, 1997), p.266.

2). D. M. Crump, Jesus the Intercessor: Prayer and Christology in Luke-Acts, (Tubingen: JCB Mohr (Paul Siebeck), 1992), p.4.

3). Ibid., pp. 2-4. 요약.

4). S. T. Plymale, Luke's Theology of Prayer, (SBLSP, 1990), pp.531-532.

5). D. M. Crump, op. cit., p.5.

6). Plymale, op. cit., p.532.

7).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는 학자들로는 Smalley, O'Brien, Trites, Pitzmyer 등이 있다.

8). Crump, op. cit., pp.7-8.

9). Ibid., p.8.

10). Ibid., p.10.

11). Ibid., pp.9-10. 요약.

12). Ibid., pp.11-14. 요약.

13). 제네이까, 많은 기도 많은 능력, 김영국 역, (서울: 소망사, 1984), p.16.

14). 웨인 R. 스피어, 기도의 신학, 지인성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0),p.15.

15). B. 밥, 기도의 시작과 계속하는 방법, 임성택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1982), p.14.

16). R. A. 토레이, 어떻게 기도할까, 장동수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1982), p.76.

17). Ibid., p.17.

18). 기독교대백과사전 제2권,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편, (서울: 교문사,1980), p.204.

19). J. Calvin, 기독교강요 제3권, (서울: 세종문화사, 1987), p.602.

20). Karl Barth, TDNT I, p.697. 성서대백과사전에서 재인용.

21). J. Wesley, 존 웨슬리 총서 4권, (서울: 선교출판사, 1977), p.143.

22). 성서대백과사전, p.238.

23). 웨인 R. 스피어, op. cit., pp.20-21.

24). Gerhard Kittel and Gerhard Friedrich, op. cit., p.323.

25). TDNT II, p.785.

26). TDNT II, p.790.

27). Selma L. Bishop, Isaac Watts, Hymns and Spiritual Songs 1707-1748, (London: The Faith Press, 1962), p.1.

28). 웨인 R. 스피어, op. cit., p.25.

29). Gerhard Kittel and Gerhard Friedrich, op. cit., p.327.

30). 김득중, op. cit., p.268.

31). Gerhard Kittel and Gerhard Friedrich, op. cit., p.327.

32). William F. Arndt, F. W. Gingrich,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Tr. Walter Bauers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1979), p.713.

33). Allison A. Trites, The Prayer Motif in Luke-Acts, Perspectives on Luke-Acts, (Edinburgh: T. & T. Clarke, 1978), p.169.

34). 김득중, op. cit., p.268.

35). 이들 평행본문들은 성종현, 공관복음서대조연구,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8)를 참조하였음.

36). 김득중, op. cit., p.269.

37). Ibid., p.270.

38). Ibid., p.271.

39). Ibid.

40). J. Jeremias, The Lord's Prayer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64), pp.10-15.

41). R. E. Brown, John and the Synoptic Gospels: A Comparison, New Tes-tament Essay, (New York: Doubleday Press, 1968), pp.247-249. 요약.

42). 김득중, op. cit., p.275.

43). Phillip van Linden, The Gospel of Luke & Acts, (Michael Glazier, 1986),p.49.

44). 성종현, 신약성경연구,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4), p.111.

45). Ibid., pp.276-277 요약.

46). T. W. Manson, The Sayings of Jesus, (London: SCM Press, 1977),p.267.

47). A. M. Hunter, Interpreting the Parables, (London: SCM Press, 1972), p.69.

48). 김득중, op. cit., p.278.

49). T. W. Manson, op. cit., p.269.

50). E. Schweitzer, The Good News According to Luke, (Atlanta: John Knox Press, 1984), p.281.

51).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p.1184: Manson, op. cit., p.310 에서 재인용.

52). 김득중, op. cit., p.279.

53). Ibid.

54). Ibid., p.281.

55).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p.1519.: K. H. Rengstorf, Das Evangelium nach Lukas, (NTD, 1965), p.275 에서 재인용.

56). 김득중, op. cit., p.280.

57). A. A. Trites, op. cit., p.184.

58). 김득중, op. cit., p.283.

59). 유상현, 사도행전연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6), p.118.

60). 스데반과 함께 선택된 7명은 집사가 아니라 이방 기독교인들을 대표하는 첫 이방 기독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James Dunn, 신약성서의 통일성과 다양성, 김득중 이광훈 역, (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1995), p.270. 

61). 김득중, op. cit., p.284.

62). C. H. Talbert, Literary Partners, Theological Themes, and The Genre of Luke-Acts, (Missoula: Scholars Press, 1974), p.97.

63). 김득중, op. cit., p.284.

64). Crump, op. cit., p.110.

65). Leonhard Goppelt, 신약신학 I, 박문재 역,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7), p.285. 

66). Crump, op. cit., p.142.

67). R. C. Tannehill, The Narrative Unity of Luke-Acts,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86), p.214.

68). Ibid., p.221.

69). Ibid, p.223.

70). D. L. Bock, Luke, Vol.1; 1:1-9:50, Grand Rapids, (Michigan: Baker Books, 1994), p.874. 

71). M. M. Turner, Prayer in the Gospel and Acts, (London: Baker Paternoster, 1990), p.20.

72). Ibid., p.431.

73). John B. Polhill, The New American Commentary Vol. 26. Acts, (Nash-ville: Broadman Press, 1992), pp.231-232.

74). R. A. Mobley, Structure and Theological Significance in the Lukan Co-ncept of Prayer, (Texas: Fortworth Press, 1983), p.164.

75). 피터 와그너, 세계를 밝혀라, 홍용표 역, (서울: 예찬사, 1997), p.79.

76). I. H. Marshall, Luke, (Michigan: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0), p.181.

77). Mobley, op. cit., pp.164-165.

78). 헨첸, 사도행전 I, 박경미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9), p.527.

79). C. H. Talbert, Reading Luke, A New Commentary for Preachers, (London: SPCK, 1982), p.291.

80). Fitzmyer, op. cit., p.771.

81). Crump, op. cit., pp.34-39.

82). Ibid., pp.77-78.

83). Ibid., pp.89-91.

84). Marshall, op. cit., p.619.

85). Ibid., p.618.

86). Crump, op. cit., pp.155-157.

87). Marshall, op. cit., p.620.

88). Crump, op. cit., pp.158-162.

89). D. M. Sweetland, New Views on Luke and Acts, (Minnesota: The Litu-rgical Press, 1990), pp.221-224.

90). Turner, op. cit., pp.59-61. 

91). Crump, p.116.

92). Turner, op. cit., p.64.

93). J. Jeremias, The Lord's Prayer, (Philadelphia, PA: Fortress Press, 1964), pp.10-15. 

94). Karl Barth, Prayer,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85), p.18.

95). Ibid., p.48.

96). Plymale, op. cit., p.55.

97). Arrhur W. Pink, 바울의 기도 연구, 서문강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1983), p.9.

 

<출처: 총회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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