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3·6교실/구약이해 교실

[스크랩] 예루살렘 성전 - 솔로몬성전(제1성전)/스룹바벨의성전(제2성전)/헤롯성전

류성련 2015. 5. 9. 15:58

예루살렘 성전 - 솔로몬성전(제1성전)/스룹바벨의성전(제2성전)/헤롯성전

 

 
















 예루살렘에는, 성서시대를 통하여, 세 성전이 있었다. 제1은 솔로몬의 성전(Solomon's Temple)으로서, 이른바 [제1성전] (First Temple)으로 말해진다. 제2는 스룹바벨의 성전(Zerubbable's Temple)으로서, 이른바 [제2성전](Second Temple)으로 말해진다. 제3은 헤롯의 성전(Herod's Temple)으로서, 이것은 헤롯이 제2성전을 증수(增修)한 성전이다. 이들은 모두 같은 장소에 세워졌다. 성전의 기본적인 개념은, [하나님의 주거(거처)]라는 것인데, 하나님은 장소적 제약을 넘은 영적 존재로 생각되기에 이르러, 성전은 하나님의 지상적 임재의 상징으로 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 있어서,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그 국민생활, 종교생활의 중심이었다. 그들은 멀리 세계의 각지에 이산(離散)되는 운명에 처하면서도, 계속 그 심령은 강하게 성전에 연결되어져 있었다.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은사면초가로 에워싸인 상태에 있어서도, 다니엘처럼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는 것이다. 성전은 [여호와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겔 48:35)라는 하나님의 언약적 은총이 구현되는 장소이고, 하늘과 땅이 접하는 곳, 즉 야곱이 말하는 [하늘의 문]이었다(창 28:17). 이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밀족의 성쇠와 깊이 관련되어 있는데서, 그기록은 비교적 자세하다.


1. 솔로몬 성전(제1성전)(Solomon's Temple, First Temple). 성서에 의하면, 솔로몬의 성전은 먼저 다윗이건설을 하고자 했는데(삼하 7장,왕상5:3-5,8:17,대상 22:14), 하나님께서 허락치 않아, 솔로몬의 손에 의해 실현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치세의 제5년(기원전 959년)에 예루살렘의 모리아산(구릉) 위에서 성전 건축에 착공, 7년의 세월을 거쳐, 제11년에 준공을 보았다(왕상 6:37,38,952년 완성). 손로몬은 두로왕 히람에게서 베니게(페니키아)의 기술의 원조를 받고, 또한 계약에 의해 레바논산의 목재의 공급을 히람에게서 받았다. 이스라엘 사람은일반 노무자로서 징용되었는데, 기술 담당자는 베니게 사람이었다(대하 2:7-14). 건축재료의어떤 것이든, 특히 성스런 기물을 만들기 위해 쓴 금의 지금(地金)등은 다윗에 의해 준비되어 있었다. (대상 22장).전체의묘사에서보아, 성전은 장방형의 구조로서, 현관, 성소, 지성소의 3부로 이룩되고, 넓이 10.5m, 길이 31.5m, 높이 15.8m로, 그 앞에 낭실이 있었다(왕상 6:3,7:19,21). 지성소에는 [언약궤], [제단], [두 그룹]이 두어지고, 안뜰에는 놋바다, 물구멍, 대제단이 놓여있다. 성전의 정면, 현관의 좌우에는 야긴과 보아스로 불리우는 두 개 청동제의 놋기둘이 독립하여 서 있었다(왕상 7:15-22). 그것은 높이 각각 18규빗(약 8.2m),주위각각12규빗(약 5.5m),기둥머리를만들어 기둥꼭대기에 둔 것의 높이 5규빗(약 2.3m),기둥머리에는구상(球狀)의 부문을 만들어 바둑판 모양의 조각을 하고, 그 상부는 백합화 꽃을 피운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같은 모양의 기둥머리는 므깃도에서 출토되어 있다. 이 제1성전은 전587(6)년,예루살렘이함락됨과 함께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놋 바다,물두멍의 받침 및 성전내의 집기는, 모두 바벨론으로 가져간 바 되었다(왕하 25:13-17,렘52:13,17-23).

 

2. 스룹바벨의 성전(제2성전)(Zerubbabel's Temple, Second Temple) 바사왕 고레스는 바벨론을 점령한 때, 그는 유대인에게 예루살렘의 파괴된 성전 재축을 허락해 주었다(전 538).이때포로에서귀환하여 스룹바벨의 지휘하에 재건된 성전이 제2성전인데, 곤란한 상황중에서 신지자 학개, 스가랴의 격려에 의해 전 515년완성되었는데,그것은 제1성전에 비하면 규모도 적고, 볼품도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팔레스티나 및 디아스포라에 있어서의 전유대인의 종교적 중심이 되었다는 의미에 있어서 국민생활의 가장 중대한 위치를 차지한 것이고, 세계 각지에서 떼를 지어 순레하기에 이르렀다. 예배의 장소로서 차츰 발전된 회당도 성전의 우월적 위치를 저하시키는 일 없이, 성서 후의 문헌에도 제2성전은 더욱 증대하는 존경심으로서 인용되어 있다. 탈무드에 의하면 이 성전에는 솔로몬 성전에 있던 것이, 다성이나 결여되어 있었다고 한ㄷ. 그것은 언약궤, 성화(聖火), 셰키나(→), 성령, 우림과 둠밈(→)이다. 지성소 안은 비어 있었다. 이 제2성전에 있어서는 예배는 의식화되고, 이 제2성전에 있어서는 예배는 의식화되고, 회생 제사가 중시되기에 이르렀는데, 전 169년시리아(수리아)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에 의해 약탈되고, 그는 더구나 우상예배로 성전을 더럽혔다(I 마카 1:21 이하,4:38, II 마카 6:2 이하. 그러나 마카비가의 유다 마카바이오스에 의해 재흥되었다. (I 마카4:36 이하). 그는 또한 장래의 공격에 대비하여 외측의 방어공사를 했다(6:7). 후에 이 성전은 로마군에 3개월 동안 포위된 후, 대속죄일에 로마의 폼페이우스 ([라] Pompeius Magnus전 106-48. 로마의 장군)에 의해, 전 63/62년지성소까지유린되었다.

 

3. 헤롯성전(Herod's Temple)-제2성전은 전1세기까지는 볼품 없는, 전쟁으로 상한 성소로서 남아 있었다. 이것을 한시대의 가장 장려(壯麗)한 건축물의 하나로서 완성한 것은, 헤롯대왕 때였다. 수축계획은 제20년(헤롯의 치세의 제 17, 또는 18년)에 개시되었다. 수축의 대부분은 10년 이내에 완성했는데, 추가 공사는 그 후도 오래 계속되었다. 헤롯 성전은 원래의 소규모 성전위에 또 주위에 추가 증축한 것이었다. 그것은 높은 대지 위에 세워지고, 주위는 원주와 아름다운 문으로써 둘러싸이고, 그리고 빛나는 대리석의 아름다움은 멀리 수 km의 땅에서도 바라볼 수가 있었다. 헤롯은 성전의 본전의 크기는 그대로 하여, 솔로몬 성전의 복원으로서 세워진 포로귀환 후의 성전 그대로하고, 또 그 전반적인 것도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성전 뜰의 남동의 사면(斜面)을 묻고(솔로몬 시대에도 이미 착수되어 있었는데), 튜로페온(Tyropoeon-valley of the cheesmaker)의 골짜기와 성전 구릉과의 사이를 메우고, 동과 서로 높은 돌담을 쌓아, 성전뜰의 넓이를 솔로몬시대의 2배로 확장했다. 이것은 지금의 하람에쉬 샤리프로서, 남북 500m, 동서 300m의 약간 남측의 좁은 불규칙한 장방형을 하고,면적 14ha, 이것은 예루살렘 구시가의 약 1/6의면적을차지하는것으로 되어, 시민생활 중에 성전이 차지한 비중의 무게를 알 수가 있다. 성전뜰 남동쪽의 거대한 돌담과(지금의 통곡의 벽)은 오늘도 볼 수가 있어서, 커다란 석재를 쓴 하부구조는 경탄할 만한 것이었다. 헤롯시대 후는, 성전의 거의 외국 지배하에 놓여졌다. 대체사장은 문관적(文官的)으로 취급되고, 중앙정권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들은 로마와 동조하고, 타협 내지는 심히 세속화했다. 로마 총독의 통치하에 있어서 성전들은 종종 3대 순례제(巡禮祭)등을 기회로 터진 폭동 때문에 유혈의 무대로 되었다. 로마에 대한 반대 행동 중 하나는 로마황제 위해 날마다 드려지는 희생제물의 중지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 행동은 대반란의 전주곡이기도 했다. 로마군은 열심당(셀롯당)의 거점으로 되어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장기에 걸친 고전과 대 손해후, 마침내 성전을 점령하고, 기원 70년 성전을 불살라 버렸다. 일곱가지의 촛대, 기타의 성스런 기물들은 승리품으로 로마에 옮겨지고, 그것들은 디도(티투스 [라] Titus, Flavius Vespasianus 39-81,로마황제, 79-81 재위)의 개선문의 부조(浮彫)로 되어있다. 헤홋 성전의 멸망일은 기이하게도아빕월의 9일로서, 이것은 제1성전 멸망과 같은 날이고, 그때 이래, 이것을 슬퍼하는 금식의날로서 각지의 유대인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 성전이 다시 재흥한다는 종말적 신앙은 세세에 걸쳐 정통파 유대인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것은 다윗가의 메시야의 내림의 신앙과  관계되어 있다. 예루살렘 성전 자취에는  하드리아누스([라] Hadrianus,Publius Aelius 76-138, 로마황제, 117-138 재위)에 의해 로마식의 신전이 건설되고, 아라비아 시대(기원 7세기)이래, 이슬람의 사원인 [암석의 돔]이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에스겔이 묘사한 이상적 성전(Ezekiel's Temple). 겔 40-48장에는,선지자에스겔의 이상적인 성전의 청사진과 거기에 있어서의 제의가 그려져 있다. 이 해석은 옛부터 곤란함이 지적되어 오고, 오늘도 계속되고있다. 그러면 어떠한 이해가 타당할까. 어디에 있어서나 그러하듯이 겔 40-48장도성서전체,특히 기타의 묵시적 내용을 가진곳과의 관련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 요망된다. 겔 1:1-3에 기록되어 있는대로, 에스겔의 예언은 바벨론포로의 사람들 사이에서 말해진 것으로서, 이 40-48장의 부분도 에스겔서의 다른 부분과의 일관성 있는 일부로서, 희망과 힘을 주기 위한 유다적(제사장직)인 극히 구체성 있는 표현이다. 특히 그것은 당시의 포로된 사람들에게 [현실의 지금]이라는 의미에서도 희망이고, 위로이며, 힘이었다. 동시에 귀환에 대한 기대와 그것에 따르는 그것 이후의 걸음 또는 생활에 대한 신앙적 결단을 구하는 예언적 내용이기도 했음에 틀림없다. 오랫동안 성전을 볼 수 없었던 포로의 동료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평안과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과, 그것에 따르는 제의적 행사를 구체적으로 표시하는 것은 극히 필요했을 것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에스겔은 본래, 이것이 포로 귀환 후에 예루살렘에서 실제로 세워지는 성전의 설계가 될 것으로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J. 오어<<구약성서의 문제>>, 1906,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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