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묵시록 일곱 교회
요한 묵시록은
도미시아누스(81-96년 재위) 치세 말기에 씌어진 것으로 본다.
도미시아누스황제는 치세 말기에
'주님이요 하느님'(Dominus et Deus)으로 자처하면서 황제 숭배를 강요했고,
이를 배척하는 유대교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
특히 로마와 에페소에는 웅장한 황제 신전을 짓고 참배를 강요했다.
베르가모에 있던 "사탄의 권좌'(묵시2,13)도 황제의 신전을 가르키는 것 같다.
이런 박해상황 속에서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에페소 일대 아시아 속주 일곱 교회로 편지를 보내어
그리스도의 신앙을 온전히, 그리고 굳세게 지키라고 촉구했다. 여기서 일곱이란 숫자는 아세아의 일곱 교회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고,
온 세상 교회를 뜻하는 것일 것이다.
원래 7이란 숫자는 전부를 가르키는 충만한 숫자(묵시4,6) 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1. 에페소 (Ephesus) (현재 지명 셀쥬크 Selcuk)
에페소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고대에 활약한 작가들이 작품이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얻어진
수천 점의 비문에 의존하지만,
도시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알 수 없다.
역사에서 에페소의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기원전 13세기경의 히타이트 성경의 헷 족속 비문에서인데
그 비문에 Apasas라고 불리었던 도시가 바로 이 지역으로 추정된다.
기원후 1세기에 에페소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가 되었다
. AD 37∼42년 사이에 전교에 주력하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사도 바오로는
그의 2차와 3차 전도 여행 때 에페소를 방문하여
선교를 하고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또한 사도 요한도 그리스도로부터 성모 마리아를 돌볼 임무를 부여받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에페소에 와서 살면서 말년을 보내기도 했다.
에페소는 스미르나(오늘날 Izmir)로부터
74km 거리에 위치한 도시로서,
바오로 시대만 해도 번창한 항구였으나,
카이스트로스(Kaystros)강을 타고 흙이 씻겨 내려와
지금은 배가 드나들지 못하고 바다와 에페소 사이에는
큰 거리가 생겼다. 에페소는 BC 334년까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알렉산더 대왕의 입성으로 해방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그 수하에 있던 희라브이 장군 Lysimachos가
에페소에 경기장, 체육관, 원형극장 등을 세우면서
에페소는 날로 번성하여 소아시아 서부지역의 수도가 되었고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가 되어 정치적, 경제적 번성기를 맞이하였다. BC 88년 시민들이 로마의 압제에 항거하여
라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무차별 죽이자,
로마의 실라(Sylla) 장군은 에페소를 완전 초토화 시켰다.
아우구스투스 황제(BC 27∼AD 14 치세) 때부터 다시 재건된 이 도시는
아시아 속주의 정치, 상업,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금의 에페소는 오스트리아 고고학자들의 노고로 발굴된 것이다.
오늘날 발굴되는 에페소의 모습은 로마시대의 것이다.
4세기경에 에페소는
소아시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AD 431년 에페소 종교회의(Council of Ephesus)에는
200여 명의 주교들이 모여 마리아의 신학적인 위치에 관한
중대한 결정을 내려 Nestorian 분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 에페소 종교회의에서 마리아는 "Mother of God"으로 확인되었고
정통교리인 니케아 신경이 재확인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구분하였던
네스토리아파는 파문을 당하였다.
● 성모 마리아의 집
431년 에페소에서 열린 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은
성모께서 이곳으로 이사 와서 성모성당터에 사셨다는 전설을 그대로 인정했는데
오늘날 순례객이 에페소를 찾아가면
에페소 앞산 남서쪽 능선 아래 지점(속칭 피나야 카풀루)에
성모 마리아의 집이라는 곳을 찾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모께서 이곳에서 사시다가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고 믿고 있다.
● 사도 요한 성당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당신이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 사도 요한에게
성모 마리아를 부탁했다(요한 19:26-27).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위험한 예루살렘을 피해 에페소로 피신한
성 요한은 에페소에서 복음 말씀을 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의 성모 성당터에서 살다가 죽어서는
에페소 뒷산에 묻혔다고 하는데,
요한이 묻힌 곳에 4세기에 목조성당을 지었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527-565년) 돌과 붉은 벽돌로
거대한 대성당을 세웠다.
현재는 대부분의 건물이 유실되었지만,
십자형 성당 한 복판, 대리석 기둥 네 개가 서 있는 곳이
요한 사도의 무덤이라고 한다.
1966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곳을 방문하고
공식 성지로 선포하기도 하였다.
● 셀수스 도서관 (Celsus Library)
에페소 유적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 중 하나로 손꼽히는 셀수스 도서관은
최근에 재건되었다.
높은 초석 위에 세워진 이 건축물은 넓은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셀수스 도서관은 서기 135년, C. Aquila에 의해
아시아 지역의 통치자였던 그의 아버지,
셀수스 폴레마이아누스(Celsus Polemaeanus)를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
이 도서관에는
세개의 문이 있는데 각각의 상단은 지혜, 운명, 지식을 상징하는
정결한 여성상들로 장식되어 있다.
셀수스의 무덤은 중앙 적소 아래 지하에 위치해 있다.
도서관 터에 남겨져 있는 비문에 의하면 도서관을 지으라고 명한 C.Aquila는
이 건축물이 완성하기 전에 숨을 거두었고
이에 그의 후계자에 의해 건축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Aquila는 도서관에 소장될 서적 구입비로 2만5천 디나르를
남겨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 원형 극장 (Amphi Theater)
유적지에 들어가면
입구에서 마지막 부분에 거대한 엠피 극장이 나타난다.
이 극장은 지금도 2만4천여명을 수용 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원형 극장으로, 현재에는 에페스 문화예술 축제 기간 중에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바다 부분을 바라보고 있어 음향 공명학적으로 현대의 음향시설을 능가하는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 성모 성당
성모 성당은 431년
제3차 공의회가 개최되었던 곳이며
네스토리우스(Nestorius)는 안디오키아 교회에 있을 때부터
'동정녀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인간인 예수의 어머니'라는 이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약 200명의 권위자들이 3개월간 토론 끝에
네스토리우스의 견해는 이단으로 결정되었으며,
이 회의록에는 성모 마리아께서 에페소에 왔으며
그 곳에서 살다가 그 곳에서 묻혔다는 문구가 남아 있어서
사실을 확인시키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관련 성서 구절 : 요한 묵시록 2장 1-5절 1. 에페소 교회 천사에게 이 글을 써서 보내어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시고 일곱 황금등경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 말씀하신다. 2. '나는 네가 한 일과 네 수고와 인내를 잘 알고 있다.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할 수 없었으며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를 사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의 허위를 가려 낸 일도 잘 알고 있다. 3. 너는 잘 참고 내 이름을 위해서 견디어 냈으며 낙심하는 일이 없었다. 4.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버린 것이다. 5.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빗나갔는지를 생각하여 뉘우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만일 그렇지 않고 뉘우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너의 등경을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리겠다.
2. 스미르나(Smyrna) (현재 지명 이즈미르 Izmir)
BC 3,000년부터 형성된
항구도시로서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에 주둔하였고,
산 위에 성채를 건설하였다. 스미르나는
BC 3∼2세기 희랍시대에 크게 번성하였고 항구 상업도시로서
유대인들이 이곳에 많이 살게 되었다. 지금 이즈미르라고 하는 이 도시는
이스탄불 약 631킬로미터의 거리에 있다.
B.C 3,000년부터 형성된 이 항구도시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명을 받들어
라시마쿠스 장군이 파고스 산에는 요새를, 해안에는 항구를 건설하였다.
이 성채는 지금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이즈미르는 위대한 서사시인 호머가 태어난 곳으로
이스탄불, 앙카라에 이은 터키 제3의 도시이다.
에페소, 파묵칼레, 셀주크 등으로 연결되는
에게해 연안 교통의 요충지이다.
고대에는 스미르나(Smyrna)로 불리우며 무역항구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2년에는 그리스와 벌였던 독립전쟁에서
화재로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도시는 곧 바로 재건되었고 지금은 아주 아름답고
현대적인 도시로 바뀌었다. 스미르나는 기원 전27년 로마와 합병되면서 크게 번성하였다.
이곳은 항구 상업도시였으며 Diaspora Jew들이 이곳에 살았다.
묵시록의 저자는 스미르나의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박해를 당하리라고 예고 하면서,
그럴 때 일수록 신앙에 충실해서 구원을 받으라고
훈계를 했다(묵시 2,8-11}.
스미르나 교회는
사도 요한의 수제자 폴리카르푸스 주교가
시무(施務)한 곳으로 폴리카르푸스 교회라고도 한다.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카르푸스(Polycarp 69-155년 생존)의
순교록에 보면 2세기에 실지로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박해가 있었다.
폴리카르푸스는 예수의 직제자들과 교부들 사이에 연결고리 구실을 한
중요한 교부이다(이레니우스 "반이단론" 3.3.4).
그는 마르치온계 밀 발렌티누스계 영지 주의자들과 설전을 벌이곤 했다. 순교록에 보면 총독이 주교에게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놓아 주겠노라고 하자 주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분을 섬긴지가 86년이나 되었소.
그분이 제게 단 한가지도 잘못하신 일이 없었소.
그러니 저를 구원하신 제 임금님을 어떻게 저주할 수 있겠소"
이즈미르에는 주교님의 순교 기념 대주교좌 성당이 있다.
관련 성서 구절 : 요한 묵시록 2장 8-11절 8. 또 스미르나 교회의 천사에게 이 글을 써서 보내어라.
처음이고 마지막이며 죽었었지만 살아 계신 분이 말씀하신다. 9.'나는 네가 겪은 환난과 궁핍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너는 부요하다. 네가 유다인으로 자칭하는 자들에게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유다인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이다. 10. 네가 장차 당할 고통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 악마가 너희를 시험하기 위하여 너희 중
몇 사람을 감옥에 가두려 하고 있다.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는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월계관을 너에게 씌워 주겠다. 11.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 승리하는 자는 결코 두 번째 죽음의 화를 입지 않을 것이다.'
3. 페르가몬 (Pergamun) (현재 지명 베르가마 Bergama)
묵시록 2장 12-17절에 나오는 이곳은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랜 선사시대부터 도시가 형성된 곳이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그의 막료 러시마쿠스(Lysimachus) 장군이 페르가몬 일대를 통치하다가
기원전 281년 시리아의 셀레우코스왕과의 싸움에서 패하자
러시마쿠스의 부하 필레타리우스가 페르가몬을 수도로 삼아
페르가몬 왕국을 세웠다.
페르가몬은 독립된 왕국의 중심이 되어 높은 문화를 이루었다.
기원전 133년 마지막 왕 앗달로스 3세가 죽으면서
왕국을 로마 공화국에 헌납하게 되고,
페르가몬은 아시아 속주에 편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에 세력이 커진 에페소로 수도가 옮겨지게 된다.
이곳의 부의 근거는 농업과 은광, 가축, 양털직조
그리고 글씨 쓰는 양피지(parchment)였다.
페르가몬에 가면
시가지 동북쪽 높은 산꼭대기에 자리 잡은
천년 요세(Acropolis)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에는 페르가몬 왕궁, 멀리서 식수를 끌어들여 저장한 저수장,
Enmenes 2세(BC 197-159)가 지은 큰 도서관이 있고,
가파른 언덕에 만들어진 노천극장을 볼수 있다.
또 이곳 시가지 서쪽 외곽지대에는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117-138년 재위) 때 지은
방대한 종합의료시설(Asclepieum)이 있다.
이곳은 BC 4세기부터, 그후 A.D 400년대까지 약 800년간
소아시아에서 의료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로마 황제 Caracalla (A.D. 211 217)도 이곳에 와서 치료를 받았다.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황제는 거의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야외 원형극장을 세워주었다.
이곳의 치료방법은 약물요법 이외에 정신요법, 일광욕, 운동요법,
맨발걷기요법, 음악요법 등을 사용했다고 한다.
로마 황제 도미시아누스(81-96년 재위)의 신전과 함께
묵시록 2장 13절에서 말하는 '사탄의 권좌'로 추정되는
하드리아누스 신전이 이곳에 있다.
붉은 벽돌로 지은 이 건축물은, 밑으로 Selinus 강이 흐르도록 설계되었다.
본래 희랍-이집트 신인 Serapis를 위한 신전이었는데.
비쟌틴 시대에 내벽을 쌓아 성당으로 개조하여 사도 요한 성당이 된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비쟌틴 시대에 사도 요한이 거둔 성과는
매우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이 교회의 유적이 남아있다. 옛 성채 한 모퉁이에 남아있는 교회로 이 건물은
본래 이집트의 세라피스신전으로 사용되던 것을 비잔틴 제국 당시
베르가모 교회로 사용하였다.
관련 성서 구절 : 요한 묵시록 2장 12-17절 12. 페르가몬 교회의 천사에게 이 글을 써서 보내어라.
날카로운 쌍날칼을 가지신 분이 말씀하신다. 13. '나는 네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 곳은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너는 내 이름을 굳건히 믿고 있다.
또 나의 진실한 증인 안디바스가 사탄이 살고 있는 그 곳에서
죽임을 당하던 날에도 너는 나에 대한 14. 그러나 나는 너에게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
너희 중에는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발람은 발락을 사주해서 이스라엘 자손을 죄짓게 하였고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게 하였으며 음란한 짓을 하게 하였던 자다. 15. 또 너희 중에도 니골라오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16. 그러므로 뉘우쳐라. 만일 뉘우치지 않으면
내가 속히 너에게 가서 내 입에서 나오는 칼을 가지고
그들과 싸우겠다. 17.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감추어 둔 만나를 주겠고 또 흰돌도 주겠다.
그 돌 위에는 새로운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 이름은 그 돌을 받는 사람밖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4. 티아디라 (Thyatira) (현재 지명 아키사르 Akhisar)
베르가모에서 동남쪽으로
85키로미터 떨어진 평원 한 가운데 현대 도시 아키사르가 있다,
이즈미르(스미르나) 북동쪽으로 105km 악세르 호수 남쪽에 있는 교회 터에는
석축 기둥과 담장만 남아 있다. 기원전 680년경의 리디아 인들이
티아디라와 사르티스 일대에 리디아 왕국을 건설하여 위세를 떨쳤으나
기원전 190년 페르가몬 왕국이 이곳을 통치하기까지
여러 왕국들이 번갈아가며 이곳을 점령 했다.
사도 바오로가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입교 시킨 사람이 이곳 출신이고,
특히 옛 조상의 왕국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다는 사실과,
물욕 때문에 전도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고
교우들로 부터의 어떤 물질적 도움을 거부하던 바오로 일행이
리디아의 집에 머물렀다는 사실과 묵시록의 7교회에 보낸 편지중
티아디라에 보낸 편지가 가장 길다 (묵시 2:18-29)는 것은,
많은 것을 묵상케 한다
사도행전 16:11-15에 의하면
사도 바오로는 제2차 전도여행 때 빌립비에서 맨 먼저 입교한 사람이 바로
티아디라 출신으로 자색 옷감 장사 리디아라는 여인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티아디라는 자색 옷감 생산지로 유명 했다.
이 비단은 꼭두서니 뿌리에서 추출한 물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매우 고가품이어서 부호들이나 입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교회가 기둥이 부서진 상태로 그냥 방치되어 있다.
관련 성서 구절 : 요한 묵시록 2장 18-29절 18. 티아디라 교회의 천사에게 이 글을 써서 보내어라.
불꽃 같은 눈과 놋쇠 같은 발을 가지신 분,
곧 하느님의 아들이 말씀하신다. 19. '나는 네가 한 일들을 잘 알고 있고
네 사랑과 믿음과 봉사와 인내를 알고 있다.
또 네가 처음보다 나중에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20.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용납하고 있다.
그 여자는 예언자로 자처하며 내 종들을 잘못 가르쳐서 미혹하게 했고
음란한 짓을 하게 했으며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게 하였다. 21. 나는 그 여자에게 뉘우칠 시간을 주었지만
그 여자는 자기의 음행을 뉘우치려고 하지 않는다. 22. 이제 나는 그 여자를 고통의 침상에 던지겠다.
그리고 그 여자와 간음하는 자들도 뉘우치지 않고
그와 같은 음란한 행위를 계속한다면 큰 환난 속에 던져 버리겠다. 23. 그리고 그 여자의 자녀들을 죽여 버리겠다.
그러면 모든 교회는 내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가 각각 행한 대로 갚아 주겠다. 24. 그러나 티아디라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 여자의 가르침을 받아 들이지 않은 사람들,
곧 사탄의 비밀을 배우지 않은 나머지 사람 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으니 25. 다만 내가 올 때까지 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단단히 간직하고 있어라. 26. 승리하는 자, 곧 나의 일을 끝까지 수행하는 자에게는,
여러 민족을 다스릴 권세를 주겠다. 27. 그는 쇠지팡이로 질그릇을 부수듯이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 28. 이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권세로 다스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승리하는 자에게는 내가 샛별을 주겠다. 귀 있는 29.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5. 사르디스 (Sardis) (현재 지명 사르티스 Sart)
주전 3세기경 Sardis 왕가에 의해서 이 도시가 세워지게 되었다.
로마시대에 이곳은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14년 프린스턴 대학팀의 발굴로 시작하여 지금도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비잔틴시대에 교회로 사용되었던 신전은
BC 335년 Alexander대왕에 의하여 재건되었는데
이 신전은 희랍시대에 가장 큰 신전중의 하나로 크기가 약 100m×50m였다.
지금 신전 후면에 교회의 유적이 남아있다. 아키사르(티아디라)에서 남쪽으로 70키로미터 지점에
리디아 왕국(기원전 680-546년경)의 수도였던 사르티스 페허가 있다.
티아디라에서 62키로미터 지점에 있는 살리흘리(salihli) 읍내를 거쳐
사르디스에 도착하면 국도 오른편애 웅장한 체육관이 보인다.
서기 193-235년에 세운 체육관인데 다 무너진 것을
하버드대학과 코넬대학 고고학 팀이 1985년-1973년 사이에 발굴 복원했다.
체육관 옆에 있는 4세기 말엽의 유대교 회당은 유대인들의
경제적인 도움으로 역시 같은 팀들이 복원 했다.
무엇보다도 트몰루스(해발 2,137미터) 산 아래 자리 잡은
아르데미스 신전이 장관이다.
에페소의 아르메데스 신전이
더 크다고 하지만 초석은 늪 속에 묻혀 있고,
형체는 거의 살아져버린 데 비해 이곳은 제대로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이 신전은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의 명으로 짓기 시작하여
끝내 마치지 못한 미완성 신전이다.
큰 돌 기둥 78개가 숲을 이루는 이 엄청난 석조물들
오른쪽 귀퉁이에 비쟌틴 시대에 세운 작은 성당이 붙어 있다.
사르디스 주교로 가장 알려진 주교는
부활론을 집필한 엘리토(190년경 사망)이다.
그는 유대월력에 따라 나산달 15일에 부활 축일을 지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일요일에 예수 부활 축일을 지낸 서방교회와 오랫동안
전례상의 논쟁거리가 되었다.
멜리토는 예수께서
"본성으로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시다"(Physei thcos on anthropos)라는
정통 그리스도론을 주장했다
. 멜리토 성인의 축일은 4월1일 이다. 관련 성서 구절은
요한 묵시록 3장 1-6절이다.
현재 둥근담과 아치형 창문이 교회,
뒷쪽에 거대한 돌기둥만 남아 있는 것은 아르테미스 신전의 폐허이다.
사르디스 지역에서는 금이 많이 생산되어 최초의 주화인 금화가 만들어진 곳이다.
사르디스교회의 신자들은 물질문화에 빠져
도무지 신앙이 자라지 않으므로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는 책망을 받은 교회였다.
관련 성서 구절 : 요한 묵시록 3장 1-6절 1. 사르디스 교회의 천사에게 이 글을 써서 보내어라.
하느님의 일곱 영신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잘 알고 있다.
네가 살아 있다는 말이 있지만 실상 너는 죽었다. 2. 그러므로 깨어나거라.
너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완전히 숨지기 전에 힘을 북돋아 주어라.
나는 네가 하는 일이 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완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3. 그러므로 네가 그 가르침을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되새겨 그것을 굳게 지켜라.
그리고 네 잘못을 뉘우쳐라.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않으면
내가 도둑처럼 너에게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가 어느 때에 너에게 나타날지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4. 그러나 사르디스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있다.
그들은 하얀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5. 승리하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며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결코 지워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6.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6. 필라델피아 (Philadelphia) (현재 지명 알라쉐히르 Alasehir)
사르디스(지금의 사르트마을)에서
동남쪽으로 45키로미터 떨어진 곳에 옛날의 필라델피아.
지금의 알라쉐히르 읍내가 있다.
요한 묵시록의 그리스도는 일곱교회 가운데서
오직 스미르나 교회와 더불어 필라델피아 교회만은 나무라시지 않았다.
필라델피아 교회만은 오히려 칭찬하셨다.
14세기경 주변이 죄다 오스만 부르크군에게 점령 당했으나
필라델피아만은 그리스도교 도시로 자체 방어를 하더니
1379년 비쟌틴 황제 요한 5세와 오스만 브르크 슘탄 뮤라트1세 간에
정치적 거레로 오스만 제국에 편입 되었다. BC 159-138년
페르가몬(Pergamum)의 왕 Attalus 2세, Philadelphus에 의해
이 도시가 세워졌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는 Philadelphia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다. 이곳은 사르디스(Sardis)와 페르가몬 그리고
라오디게아(Laodicoa)와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이들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이곳은 농업과 가죽제품, 직조업이 주요 산업이며
농산물로는 포도를 재배하였다.
그래서 필라델피아 교회에서는 소아시아 내의 300여개 교회에
성찬식때 쓸 포도주를 무료로 공급하였기 때문에 형제 사랑을 실천한
교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AD 17년과 23년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이 도시가 대파되었다.
로마 황제 디베리우수(Tiberius)는 이 도시를 건설하는데 크게 도와주었다.
이 도시의 주민들은 이에 감사하며 로마 황제를 위한 신전을 세웠다.
그 크기는 약 100m×50m 이고. 신전 둘레는 56개의 석주가 들어있다.
이 신전은 비잔틴 시대에는 교회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로마 황제 숭배의 도시에 초대 교회가 세워졌고
비잔틴시대에는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지진이 자주 발생하고 화산으로 인해
두개의 육중한 돌기둥과 주초만 앙상하게 남아있다.
지진이 자주 일어났던 필라델피아는 1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사도시대에 살고 있었다.
폴리갑이 순교할 때 필라델피아의 신자 10명이 순교하였고
자주 일어나는 지진으로 이곳 신자들은 불안했으며
이 불안은 이들의 신앙을 뜨겁게 했다. 오늘날 비잔틴 시대에 세운 교회터가 남아있는데
3개의 큰 기둥과 거기에 그려진 벽화가 비바람에 마모되어가고 있다.
관련 성서 구절 : 요한 묵시록 3장 7-13절 7. 필라델피아 교회의 천사에게 이 글을 써서 보내어라.
거룩하신 분, 참되신 분,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
여시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시면 열 자가 없는 분이 말씀하신다. 8. '나는 네가 한 일을 잘 알고 있다.
네 힘은 비록 미약하지만 너는 내 말을 잘 지켰으며
나를 모른다고 부인한 일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너를 위해서 문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아무도 그 문을 닫을 수 없다. 9. 사탄의 무리에 속하는 자들이 자칭 유다인이라고 떠들어 대지만,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로 하여금 너에게 나와서
네 발 앞에 엎드려 너를 경배하게 하겠으며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하겠다. 10. 참고 견디라는 내 명령을 너는 잘 지켰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시험하기 위해서
앞으로 온 세계에 환난이 닥쳐 올 때에 나는 너를 보호해 주겠다. 11. 내가 곧 갈 터이니 너는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지켜
아무에게도 네 월계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여라. 12. 나는 승리하는 자를 내 하느님의 성전기둥으로 삼을 것이며,
그가 다시는 그 성전을 떠나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내 하느님의 이름과 내 하느님의 도성의 이름,
곧 하늘에서 내 하느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로운 이름을 그 이기는 자 위에 새기겠다. 13.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7. 라우디게이아 (Laodikeia) (현재 지명 라오디케이다 Laodikya)
에페소에서 동쪽 내륙으로 17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인구 20여만 명의 테니즐리가 있고
이곳에서 북쪽으로 8키로미터 정도의 거리에
리오디게이아 페허인 나지막한 언덕이 있다.
리커스 계곡에 위치한 부유한 상업도시로서 알렉산더가 죽은 후
셀레우코스(Seleucid) 왕조의 안티오쿠스(Antiochus)
2세(기원전 261-252년 재위)가 이 지역의 전략적 요소 때문에
도시를 창건하고 왕비 Laodice의 이름을 따서 라오디게이아라고 명명했다.
이곳에서 6.5km떨어진 히에라볼리의 온천물이 수로를 통해
라오디게아로 흘러 들어오게 하였다.
라오디게아의 온천물은 이곳에 도착하면 식어서
덥지도 차지도 않은 물이 되었다.
요한 계시록 3장 14절 이하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믿음이
덥지도 차지도 않음을 책망하고 있다.
이곳의 교우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으나 영적으로는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는 현재 로마식 야외 운동장과 원형 극장터가 발견되었다.
사도 바오로가 제3차 전도 여행중(53-58년경)
에페소에서 27개월 가까이 머물 때 그의 제자 골로사이 출신
에바프라는 에페소에서 동쪽으로 450여리 떨어진 곳에
골로사이 교회(골로1,6-7)와, 히에라폴리스와 리오디게이아 교회들도
세운 것 같다(골로 4,12-16). 비쟌틴 제국은 13세기까지 이곳을 방어하다가
셀주크 투루크족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1710년과 1899년에 지진으로 심하게 파괴된 이곳을
1961-1963년 케나다 퀘백시의 라빌대학교 고고학팀이 발굴작업으로,
로마식 야외 운동장(Stadium)과 두 개의 큰 야외 원형극장 터가 발견 되었다.
아직도 유적 대부분이 땅속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한다.
관련 성서 구절 : 요한 묵시록 3장 14-22절 14. 라오디게이아 교회의 천사에게 이 글을 써서 보내어라.
아멘이시며 진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시며 하느님의 창조의
시작이신 분이 말씀하신다. 15. '나는 네가 한 일을 잘 알고 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차라리 네가 차든지, 아니면 뜨겁든지 하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16. 그러나 너는 이렇게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기만 하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17. 너는 스스로 부자라고 하며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네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18. 그러므로 나는 너에게 권고한다.
너는 나에게서 불로 단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나에게서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우고
또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눈을 떠라. 19.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히 노력하고 네 잘못을 뉘우쳐라. 20.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 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21. 승리하는 자는 마치 내가 승리한 후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옥좌에 앉은 것같이
나와 함께 내 옥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 22.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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