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서 교실

[스크랩] 델피

류성련 2010. 6. 14. 23:11

 

 

 

 

 


델피 전경


델포이 유적은 코린트 만이 보이는 파르나소스 산허리에 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 덕분에 이 곳은 매력적인 유적지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델포이는 고대 그리스 세계의 문화 중심지로서 3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첫째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아폴론 신전이 있다는 점, 둘째 올림피아와 마찬가지로 범그리스 제전인 피티아제가 4년마다 열렸던 점, 셋째 고대 세계 구석구석까지 널리 알려진 아폴론 신탁소가 있었다는 점이다. 1893년 발굴 조사를 몇 단계로 나누어 천천히 진행하자, 신전과 극장의 고대 유적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발굴과 함께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1902년, 그리스인 은행가 싱그로스의 협력으로 세워진 델포이 미술관에 유물의 일부가 소장, 전시되고 있다. 오늘날 델포이 유적은 프랑스 고고학 연구소를 중심으로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가이아 신전 (치오스 제단)


기원전 15세기경부터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모신 신전이 있었다. 가이아 신전은 가이아 여신의 시중꾼인 피톤이라는 용의 보호를 받으며 점술을 행하고 있었는데, 제우스의 아들 아폴론이 용을 죽이고 이 일대를 자신의 성역으로 만들었다. 이 때부터 델포이에서는 아폴론을 아폴론 피티오스로서 섬기게 되었다고 한다.



아테네 프로나이아 신전


1987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 이다. 아폴로 신탁이 있는 델피(델포이)의 신전으로, '세계의 중심'이라는 Omphalos(아폴로신전에 있는 원뿔꼴의 돌)가 있다. 이곳은 그리스의 종교 및 국민적 통합의 상징이었던 중요한 곳이다. 델포이 유적 아래쪽 지역에 있는 아테나프로나이아의 신역에는 토로스라는 원형 건조물이 있다. 현재 위쪽 지역을 형성하고 있는 아폴론 신역으로 가기 전에 이 곳을 본다. 포키아 출신의 건축가 테오도로스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이 건조물은 기원전 390년부터 10년 동안 건설되었다고 한다. 신화에 따르면, 지구가 원반 모양이라고 여겼던 시대에 신들의 지도자 제우스는 자신이 지배하는 세계의 중심이 어디인지 알아보기 위해 세계의 양쪽 끝에서 각각 독수리를 날려 보냈다. 독수리는 고대 시인이 ‘빛나는 2개의 정상을 가진’이라고 표현한 델포이의 바위산, 파르나소스 산 공중에서 만나 산 꼭대기로 날아가 앉았다고 한다. 이 전설에 따라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곳을 ‘세계의 배꼽(옴파로스Omphalos)’이라고 불렀고, 그 후로 델포이는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졌다

 

아테네 프로나이아 신전

 


아테네신전 복원도

 


아폴론 신전


아폴론 신전은 델포이 성역의 중심 건물로, ‘최초의 신전은 월계수 가지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고, 전설상의 네 번째 신전은 ‘보로스 산의 돌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지만, 실제로 최초의 신전은 기원전 650년경에 건립되어 후에 소실되었다. 기원전 510년경에 세워진 두 번째 신전도 기원전 4세기 초에 일어난 지진으로 불에 타서 붕괴되었다. 현존하는 유적은 기원전 330년에 완성된 세 번째 석조 신전이다. 유적은 신전의 토대, 원주 몇 개, 원주의 토대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었지만, 최근 원주 몇 개가 복원되어, 페리스튀리움(안뜰을 둘러싸는 열주랑)이 곁들여진 정면에 6개, 측면에 13개, 총 38개의 도리아식 열주로 둘러싸인 직사각형 신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신전의 전실에서 순례자를 맞이한 것은 벽에 새겨진 고대 그리스 일곱 현자의 격언이었다. 거기에는 지금도 “너 자신을 알라.” “절도가 최상이다.” “참고 견디며 겸손하라.”와 같은 현자의 가르침을 연상시키는 명문이 남아 있다. 이 성역이 가장 번성했던 시대에 아폴론은 인간에게 관용과 덕행을 권장하는 광명의 신으로 칭송받았다. 사람들은 신탁이 미래를 예언해 준다고 믿었다. 신전터에서는 여러 개의 원주가 복원되어, 기원전 4세기에 만들어진 당시의 전체적인 윤곽을 보여준다. 아폴론 신전 내부는 3부분으로 나뉘며, 신탁이 이루어지던 가장 안쪽의 지성소는 2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층 중앙 부분은 황금으로 만든 거대한 아폴론 상이 놓이고, 지하 성당(내진의 밀실)에는 ‘대지의 배꼽’이라고 불리는 대리석이 놓여 있었다. 오랫동안 델포이의 신관을 지냈던 철학자 플루타르코스는 “대지의 갈라진 틈에서 안개 같은 가스가 분출하고 있다.”는 말을 남겼지만, 지금 그 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곳에는 무녀(피티아)가 있어, 광기어린 혼수상태에서 신탁을 전했다고 한다. 신탁 받을 사람은 카스탈리아의 신천에서 정화 의식을 마친 다음 무녀 앞으로 나갔다. 무녀가 전하는 신의 말은 불명료한 소리로 이어졌고, 여기에 함께 참석한 신관이 신의 말을 ‘통역’해 사람들에게 전했다

 

 아폴론신전

 

아폴론신전 

 


델피 극장


극장의 기원은 기원전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존하는 극장 유적은 기원전 2세기에 로마인들이 복원한 것이다. 35단의 석조 계단 관람석은 약 5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보물창고 

 

보물창고


‘아테네인의 보물 창고’는 파로스 산 흰 대리석으로 만든 도리아식 건물이다. 현존하는 건물은 20세기 초에 프랑스 고고학 연구소가 재건한 것이다. 이 보물 창고는 기원전 490년에서 기원전 480년경에 만들어진 도리아식 건물로, 기원전 490년의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인이 페르시아인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의 일부로 세워진 것이다. 보물 창고의 벽에는 헌사가 800개가 넘게 새겨져 있으며 아테네인이 줄겨 썼던 테마, 예를 들어 그리스인과 여전사 아마조네스와의 전투 장면이나 테세우스와 헤라클레스의 전설이 담긴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그 중에는 신전의 주인인 아폴론에게 바친 찬가도 2개 있다

 


 

경기장


아폴론에게 바친 운동 경기인 피티아제는 성역 서북쪽 언덕에 펼쳐진 침엽수림 안에 있는 경기장에서 열렸다. 지금도 남아 있는 출발선에서 골인 지점까지의 거리는 177.53m이다. 기원전 3세기에 경기장이 만들어졌을 무렵 관람객들은 다각형 돌을 층층이 쌓아올린 벽으로 둘러싸인 맨바닥에 앉아야 했지만, 2세기 로마 시대에 헤로데스 아티코스가 돌로 만든 관람석과 입구 문을 기증했다. 이 유적은 지금까지 남아 있으며, 경주로 동쪽 끝에 놓여 있던 돌기둥도 복원되었다. 트랙은 그 길이가 178m, 폭 25.50m로 양쪽으로 길게 좌석이 놓여 있다. 북쪽의 12계단은 거의 완전한 상태로 복원되었으나 남쪽의 6계단은 완전히 부서진 채로 남아 있다. 북쪽 계단의 중간 지점에 심판원이나 고위층이 앉았던 긴 벤치가 놓여 있었다. 양쪽 객석에 약 7,000명의 관중을 수용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델피 미술관 소장 유적


‘시프노스인의 보물 창고’ 북쪽 프리즈의 부조 부분. 보물 창고는 기원전 525년경, 금 채굴로 부를 쌓은 키클라데스 제도의 시프노스 섬 주민들이 건립했다. 조각이 완성된 당시에는 선명한 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델피 낙시안스 스핑크스


델피 미술관 소장


낙소스 섬에 봉헌된 스핑크스. 대리석 산지로서 뛰어난 조각가를 배출한 낙소스 섬에서 보낸 봉헌품이었다. 높이가 2.3m나 되는 대리석 상은 기원전 560년경에 조각되었다. 처음 만즐어졌을 때는 높이가 9m가 넘는 이오니아식 가느다란 원주 위에 설치되어 아폴론 신전 앞에 놓여 있었다.

 


 우주의 배꼽 옴파로스 대체물

 


옴파로스(박물관)

 


플라태이아 삼각대 터(뱀신상을 두던 곳, 이스탄불로 이동)

 

 


      뱀신상 

 


김나지움 터


아테나프로나이아의 신역 서쪽에 있는 김나지움 터.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나 델포이의 젊은이들이 심신을 단련하는 시설이었다고 한다. 이들을 지도한 사람은 의사나 트레이너, 그리고 시인이나 교사 등이었다.


출처 : 대전소망성결교회
글쓴이 : 종준수은민주민정민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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