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정교회 교실

[스크랩] [3-2]교회와 성경(카타콤베,화체설,이그나시우스,폴리갑,파파아스,리너스,져스틴 마아터,오리겐,터툴리안,제롬,어거스틴,동방정교회,대립교황,아비뇽유수)

류성련 2016. 6. 16. 23:28

 

[3-2] 교회와 성경

1]초대교회의 성립과 감독들
 (1)초대교회의 사건들

AD29년 4월15일 예수님이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마가의 다락방에서 만찬을 행하시었는데
이것이 지금의 교회에서 행하는 *성만찬의 시작으로 이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대속물로
내어 주시고 당하신 고통을 생각하며, 주님께 감사하는 행사이다.
AD29?년 4월 16일(금요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오후3시에 운명하시고 대업을 이루셨다.
운명하실 때에 태양은 사라지고 온통 캄캄하였고,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
그러므로 이제는 제사장을 통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었다.
AD29년 4월 17일(토요일) 무덤에 계셨다.
AD29년 4월 18일(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11번 나타났다.
그리고 그중에 8번은 제자들을 만났다.
AD29년 5월 28일(목요일) 베다니 부근 감람산에서 승천하셨다.
AD29년 6월 7일(일요일) 승천 10일 되던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하나님이 강림하셨다.
성령강림은 초대교회가 시작되는 날이다.
부활과 성령강림 때문에 안식일이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의 날(主日)이기 때문에 주일(主日)이라고도 이라고 한다.
바울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크리스트교)를 결정적으로 분리하여 인종, 지역, 신분을 초월한
세계종교로 선교하였다.
사도시대에 초대교회가 형성되었고, 개인 집이나 *카타콤베에서 비밀집회를 하였다.
초대교회는 로마정부로 박해받으며 신앙이 단련되었고, 박해는 기독교가 넓게 퍼지는 효과를 초래하여
전파속도에 가속화가 이루어 졌다.
감독과 장로, 집사의 조직이 정하여지고 신약성서가 쓰여졌다.
그리스드교의 신학이 완성되었고, 구약성서는 신약의 준비서로 보아 경전으로 채택되었다.
유대와 로마의 박해로 순교자들이 생기게 되었는데, 스데반, 야고보, 바울, 베드로가 초기의
순교자이며, 뒤이어 감독들과 신앙을 지키려는 자들이 수없이 사자의 밥이 되거나 로마인들의
구경거리로 죽거나 화형 당하였다.
믿음의 용사들은 로마병사의 손이 닫지 않는 무덤이나, 지하도시, 광야로 피하기도 하고 일부는
죽음을 각오하고 몰래 전도를 하면서 도시에 남았다.
그들이 비밀의 장소에 일요일에 모여 예배한 형식은 사도들의 편지(신약 성경)낭독, 사회자의
권면(설교), 모두 일어서서 주기도문을 낭송하고, 성만찬(빵과 포도주) 때에 감사기도 드리고
모두 아멘으로 응답하며, 부유한자, 뜻 있는 자는 연보(헌금)를 하였다.
이 때 모인 연보는 가난한 고아, 과부, 죄수, 예루살렘 교회에 송금하였고, 어려운 이방교회에 보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행5: 1-11)이 전 재산을 헌금하고 공동 생활하는 형태는 초기에만 있었다.
초대교회의 살림은 목사회의로 운용되었고, 지도자는 감독(사도를 대신한자), 다른 지도자를
장로라고 불렀다.
 *성만찬(Lord's Supper)과 화체설(化體說)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들 때 빵을 주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하고, 포도주를 주면서 "이것은 내 피다"라고 말하면서 보인 행동을 기념하는 것을 말하며 신약성서
마태 26:26-28, 마가 14:22-24, 누가 22:17-20, I 고린 11:23-25에 기록되었다.
초기교회에서는 모일 때마다 행하여 포도주에 취하거나 떡 때문에 다툼이 되기도 하여 문제가 되었고,
성찬식은 그리스도교 예배의 중심의식(儀式)을 이루어왔는데 교파마다 형식과 의미가 조금씩 다르다.
가톨릭, 초기 루터교, 성공회의 교리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그 실체가 변화'한다고
하는 화체설을 따르고, 교인 전체가 참여하며 빵은 누룩을 넣지 않는 것을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 빵과 포도주는 함부로 다루거나 버리면 불경건한 죄로 여기기 때문에 소중히
다루는데 남는 것은 감실에 보관하였다가 다음에 사용하기도 한다.
가톨릭은 삼위일체 주일 다음의 목요일(일부나라는 일요일)에 지키는 성체성혈대축일에(聖體聖血大祝日,
Feast of Corpus Christi)에 성체에 담아 미리 정해진 사람들에 의해 어깨에 메고 마을을 행렬한다.
칼뱅과 츠빙글리의 개신교회와 동방정교회는 성찬식에 쓰인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하지 않으며 누룩이 들어 있는 빵을 사용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만 참여 하여 제한적이다.
성찬식에 쓰인 빵과 포도주는 경건하게 생각하여 남는 것은 땅에 묻었으나 요사이는 가난한자들에게
주거나 나누어 먹으며 성찬식이 점점 더 형식적이 되어 오다가 지금은 교회의 사정에 따라 1년에
몇 차례만 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7일간 행적>
 *카타콤베(catacombe)
그리스어로 '카타콤베-낮은 지형의 모퉁이의 뜻'으로 당시에 묘지문화가 지하에 설치하는 것이었다.
나폴리, 시라쿠사, 몰타, 소아시아 등에서 볼 수 있다.
이 명칭의 유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3세기 후반에 베드로와 바울의 유해를 잠시 동안
안장했던 것으로 유명한 산세바스티아노 성당(로마 시 근처 아피아 街道에 있음)의 지하묘지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근교 아피아가도 아래가 가장규모가 크고, 구조는 지하 10-15m의 깊이에, 폭은 2-3m정도에
높이는 2m정도이다.
굴은 종횡으로 뚫어 계단을 만들어 여러 층으로 만들어졌으며,
통로 옆에는 관의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로마근교의 것은 길이가 총100Km가 넘는다고 하고,
200-700만 구의 장례가 이루어 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대단한 크기의 공동묘지 이다.
초대교회가 이곳에 크게 장소를 만들어 비밀 예배장소로 모였다고 한다.
무덤을 이용한 이유는 무덤에는 병사가 들어 갈 수 없는 엄한 장지 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하교회의 벽화는 기독교 미술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고,
박해 때의 유물과 조각상이 있어 순례자의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사도신경
사도신경은 예배드릴 때에 암송한다.
이것은 '사도들의 신앙 고백이 우리의 신앙고백도 또한 같습니다'라고 주님께 고백 드리는 암송문이다.
사도들이 한 문장씩 고백한 것을 연결 한 것으로,
베드로가 '전능하사 천지를..' 요한이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아멘
사도신경은 니케아 종교 회의(AD 325년)에서 결정하였다고 하여 '니케아 신경'이라고도 하나
지금같이 완성된 것은 8세기 때라고 한다. 
 13숫자와 금요일 이야기
서양에서는 13이라는 숫자와 금요일을 좋지 않는 날로 여기는 이유는 예수님이 성만찬을 행하실 때에
예수님부터 시작하여 13번째 앉아 있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판 '가룟유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요일은 예수님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지금도 13일과 금요일이 겹치는 날에는 좋지 않는 날로 여기며 컴퓨터 바이러스도 많은 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초대교회 당시는 금요일을 성금요일(Good Friday)라고 하여 금식하며,
예수님의 고통을 애도하였다.
그 후에 교회에서 금요일 종치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2)초대교회 감독들
사도들은 천국으로 떠나갔고, 그의 제자들이 교회를 맡아 감독자가 되었다.
성도의 수가 많아 지고 교회수도 많아지면서 감독들의 권위와 세속의 권력으로 조금씩 변해갔다.
초대감독들이 남긴 문서나 그들의 신학은 굉장히 중요하다.
초대교회 역사이자 이들이 끼친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어느 문서는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들을 교부(church father) 또는 감독이라고 한다.

<지하 무덤의 카타콤베 통로
옆의 구멍이 관을 놓는
자리이다>
 초대 교부들
폴리갑: 요한의 제자이며, 서머나 감독으로 화형 당했다.
많은 성도와 재정이 막강한 로마감독이 횡포를 부렸으며,
4월14일을 부활절로 지키라고 명령하였으나 폴리갑이 거절하였다.
이그나시우스: 요한의 제자이며, 안디옥 감독으로 있다가 사자 밥이 되었다.
파파아스: 요한의 제자이며, 에베소 감독으로 순교하였다.
리너스(AD67-79): 로마 1대 감독이다.
져스틴 마아터(AD100-167):'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는 민족이 없다'라고 예언하였으며,
순교하였다. 그는 초대예배 형태를 기록으로 남겼다.
오리겐(185-254): 신약성서의 정경화에 생애를 바쳤으며,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터툴리안(160-220): 카르타고인으로 '라틴교회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제롬(340-420): 학식 있는 라틴교부로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여 '불가타'역 성서를 만들었다.
1000년 동안 서방의 성서가 되었다.
어거스틴(354-430): 북아프리카의 히포(Hippo)교회의 감독으로 초대교회의 위대한 신학자이다.
'하나님의 도성(또는 신의 도성)'이라는 명작을 남겼고,
기독교 통일을 주장하여 로마교회의 주도권에 도움을 주었다.
삼위일체론을 완성하고서는 '진실은 하나님만 아실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그를 망나니에서 학자로 만든 '모니카'이다.
그를 성 아우구스티누스라고도 한다.
현재 알제리아에서 출생하였고, 카르타고에 유학하면서 17세에 여인에게서 아들과 사생아를 낳았다.
그의 생활은 34세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아들과 세례를 받을 때까지 방탕하였다.
 (3) 간추린 교회사
간추린 교회사를 기록하려고 자료를 찾아보니 과연 이런 것들을 여기에 올리는 것이 타당한지
망설여졌다.
이유는 로마카톨릭에 대한 것이 전부 부정적인 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사랑인데 허물을 덮어주지 못하고 노출시켜야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프로테스탄트도 교황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하여 여기에 기록하기로 하였다.
AD100-300
로마감독이 많은 성도와 막강한 재력으로 모든 감독의 머리라고 주장하며, 포악하기 시작하였다.
로마감독 아니케더스는 폴리갑에게 부활절 날의 변경을 명령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빅토 1세(190-202)도 동방교회에 부활절을 4월14일에 지키라고 명령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2세기 무렵부터 ‘*카톨릭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300년경에는 로마황제의 마지막 박해시대이다.
 *카톨릭과 교황 [교황과 타락 참조]
일반적으로 '카톨릭'은 세계적 또는 보편적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카톨릭은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까지 포함하여 지칭하는 단어로 2세기 무렵부터 교회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4세기에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의 두 공의회(公議會)가 신앙선언 속에서 ‘카톨릭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그 이후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은 로마교황인 카톨릭은 동방정교회와 구별하기 위하여 로마카톨릭이라고 한다.
교황(敎皇-Pope)이란 말은 영어 파파(Papa)로 아버지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모든 감독에게 쓰였으나 5세기가 지나가면서 로마교회의 감독에게만 사용하게 되었다.
초대교회를 지나 로마가 콘스탄티노플로 이전하고는 5대주교가 가장 큰 감독이었다.
5대 감독
은 로마, 안디옥,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이다.
로마교회는 교인 수와 재정 면에 가장 강력하였고, 455년 서 로마제국이 게르만에게 점령당하여
로마감독은 황제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로마카톨릭의 수장인 교황이
있는 교황청과 베드로 성당>
이것이 교황의 출현의 계기가 되었는데 로마감독이 전체 감독의 우두머리라고 자칭하였다.
다른 감독들은 반대하였으나 레오1세(440-461)는 자신만이 대주교이자 최초의 교황이라 부르고,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베드로를 로마교황1대라고 하였다.
후에 5대 감독 중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은 이교도인 회교의 지배하에 들어가 없어지게
되었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만 남게되었다.
로마교회는 교황이 교회와 땅까지 지배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동방정교회는 동 로마황제의 지배하에 있어 감독은 막강한 힘을 가질 수 없었다.
1453년 동 로마가 오스만투르크의 회교에게 점령당한 후에 그리스가 명맥을 유지한 이유로
그리스 정교회
라고도 한다.
동방정교회는 회교의 지배하에 들어가 힘이 약해지고 공산당의 종교말살로 그리스에서 명맥만
유지하다가 공산당의 붕괴로 러시아와 동구권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동방정교회(그리스정교회)
AD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를 비잔틴으로 옮기면서 카톨릭과 동방정교회의 분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비잔틴제국참조]
726년 동 로마 레오3세가 726년에 우상파괴로 로마카톨릭과 맞서게 되었다.
니콜라이 1세(858-867)는 최초로 왕관을 쓴 교황으로 동방교회에 간섭하자 서로 파문하였다.
AD869년 로마카톨릭이 동방교회에 간섭하자 서로 파문하다가 콘스탄틴 종교회의로 분열되었다.
AD1054년 동방 정교회는 로마카톨릭에서 최종 분리되었다.
동방정교회의 특징으로는 성령은 성부에게서만 나온다고 주장하나 카톨릭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동방정교회 성직자는 독신주의를 주장하지 않으나 부인이 죽으면 재혼은 할 수 없다.
마리아 대신에 성인들의 유물과 성화에 대하여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여 이것에 입맞춤을 한다.
영성을 강조하여 수도사는 결혼할 수 없으며, 수도원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이스라엘이나
그리스 북부 아토스 산에 많은 수도원을 가지고 있고, 세례방식은 침례를 행한다.
동방정교회에서 러시아정교회가 분리되었다.
AD300-400
콘스탄티누스에 의하여 교회의 해방되었으나 교회와 국가가 통합되어 부패의 기초가 되었다.
로마제국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풀로 옮겨가 5대 감독이 형성되어 감독들이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였고, 특히 로마 감독과 콘스탄티노풀 감독이 대립하였다.
로마 교회는 예배형식이 복잡하게 되면서 이교도가 쓰는 신부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노예제도 폐지, 경기장에서 싸움 금지, 아이의 살해금지, 십자가 형벌이 폐지되었고,
종교지도자의 세금과 병역이 면제되었다.
오늘날에도 세금과 병역 면제의 관습이 전해져 오고 있다.
AD400-600

476년 서로마의 멸망으로 로마감독은 정치적으로 해방되었으며,
그의 권한이 더욱 확장되어 유력한 존재가 되었다.
서로마를 점령한 야만인 게르만족은 로마문화와 동화되었다.
레오 1세(440-461)는 최초의 교황으로 그는 황제 발레티니안 3세의 승인을 받아 445년에 모든 주교의
대주교라고 주장하였고, 그 후로는 로마의 감독을 교황(법황)이라고 불렀다.
※ 그레고리 1세(590-604)를 최초의 교황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451년 칼케톤 종교회의에서 콘스탄티노풀의 대주교도 같은 권한을 인정하여 주었다.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으로 로마교황의 주도권 주장에 도움을 주었다.
AD600-700
회교도가 기독교의 땅을 공격하여, 638년 예루살렘과 이집트, 640년 페르시아, 689년 북아프리카,
711년 스페인을 정복하였다.
회교도의 정복은 교회가 예수님, 바울, 베드로, 마리아 등을 형상화하거나 그들을 유물이나
또 순교자들을 숭배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에 대하여 우상숭배가 없는 회교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한다.
회교들은 무력으로 전파를 하였고, 그들은 노예와 일부다처로 지배지역을 타락하게 하였다.
750년 회교도는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기고 1058년까지 계속되었다.


<동방정교회에서 분리된

러시아정교회의

이삭성당>

AD700-800
732년 찰스마텔이 프랑스 투르에서 회교도들을 물리쳤고, 그의 아들 샤를레망은 전 유럽을 통일하였다. 샤를레망은 AD726년에 비잔틴제국이 로마교황에게 우상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하였는데
이것을 거절한 로마교황이 곤경에 처할 때에 막아주었다.
이것에 감사하여 800년 레오 3세는 샤를레망에게 로마황제의 칭호를 주었다.[프랑크 왕국참고]
전 유럽을 땅은 샤를레망대제가 다스리고, 교회와 영적인 문제는 로마교황이 다스렸다.
AD800-900
니콜라이 1세(858-867)는 최초로 왕관을 쓴 교황으로 동방교회에 간섭하자 서러 파문하여 869년에
콘스탄틴 종교회의로 종교마저도 동서로 분열되었고, 1054년에 동방 정교회는 로마카톨릭에서 최종
분리되었다. 이것을 교회의 동서분열이라고 한다.
서쪽은 카톨릭이 종교와 세상까지 지배하는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동쪽은 회교의 점령으로
쇠퇴하였으나 그리스가 명맥을 유지한 이유로 그리스(희랍) 정교회 또는 동방정교회라고도 한다.
이들은 카톨릭과 비슷한 점이 많으나 교황과 신부가 없다.
지금은 소련이나 동유럽에 많이 믿고 기독교의 3대 종파에 들어간다.
857년 교황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치밀한 계획아래 거짓 '이시도로(Isidorian) 교령집'이라는 책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로마교회헌법의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857년부터 1050년까지를 교회사에 가장 더러운 암흑기의 자정이라고 하며, 부정, 부패,
부도덕, 유혈 등은 교회사에 오욕이라고 한다.
AD900-1000
로마교회의 암흑기로 매음, 매직, 살인, 음녀통치 등으로 그 중에 셀기우스(904-911)의 첩 마로지아는 904년-963사이에 그녀의 어머니 데오도라와 자매의 정부 및 자기의 자녀로 교황을 채웠다.
요한 10세(914-928)는 어머니의 정부로 있다가 그녀의 손에 죽었다.
레오6세(928-929), 스데반 7세(929-931)는 그녀가 세운 교황이고,
요한 11세(931-936)는 그녀의 사생아이다.
그리고 레오7세(936-939), 스데반 8세(939-942), 마틴 3세(942-946), 아가페터스 2세(946-955) 4명은 그녀의 아들이다.
그녀의 손자 요한 7세(955-963)는 아버지의 첩과 살면서 신분과 관계없이 난행을 하다가
여자의 남편에게 살해당하였는데, 그는 모든 죄를 지었고 궁전을 매음굴로 만들었다.
오토(대제) 1세(936-973)가 등장하여 귀족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로마교회를 이용하였고,
황제의 집안과 교회를 하나로 결합하였다. [신성로마제국 참조]
800년 샤를레망 대제부터 로마제국이라고 부르다가 그리스도교회와 일체라는 뜻으로 신성이라는
용어를 붙여 로마교회와 제국이 하나되어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하였다.
AD1000-1100 [신성로마제국 참조]
베네디트 9세(1033-1045)는 12세 소년으로 돈을 주고 교황자리를 매수하였고,
살인과 간음을 하며 돈을 훔치는 등 끔찍스런 행위를 하다가 추방되었다.
교황 중에 가장 나쁜 사람이라고 한다.
그레고리(그레고리우스) 7세(1973-1085)의 이름은 힐데브란트로 그는 1049-1073년까지 다섯 교황의
행정을 담당하면서 성직자의 개혁을 다짐하였다.
그는 교황이 되어 성직자의 2대 죄악인 부도덕과 성직자 매매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하인리히4세와 그레고리7세가 성직자를 임명권 때문에 서로 대립하다가 서로 파문하게 되었었다.
이 때를 이용하여 불만 가진 제후들이 내란에 동참함으로 황제는 '카놋사의 굴욕'을 당하였으나
내란을 평정한 후그레고리 7세를 추방하여 객사하게 하였다.
그레고리우스7세는 가장 타락하지 않은 교황이며, 교황의 개혁과 권한을 강화시켰다.
AD1100-1200 [십자군 원정 참조]
셀주크 투르크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순례자들을 방해하여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다.
로마의 세력 있는 집안에서 교황을 선출하여 두 교황과 대립하게된 것을 *대립교황이라고 한다.
인노센트 3세(1198-1216)는 비잔틴 황제까지 지배하여 모든 교황 중에 가장 세력이 강화되어
교황권의 절정기라고 한다.
그는 십자군 원정을 두 번이나 명령하였고,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살과 피로 바로 바뀐다는
화체설, 교황은 절대의 과오가 없다는 무오설과 비밀참회(고해성사)를 주장하며 실행하였다.
교황은 하나님 대리자로 교회와 세계 최고 지배자라고 주장하며, 성서는 라틴어 외에는 금지하였다.
그는 또 영국의 대헌장을 비난하였다.
그는 이단을 심리하는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여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알비파의 대학살을 명령하였다.
종교전쟁을 제외하고는 그가 가장 많은 피를 흘렸다. [종교개혁 참조]

<현재 교황 요한 바울 2세 모습>
 *대립교황(Anti Pope)
교황은 한 사람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인 경우에는 서로 대립함으로 대립교황이라 한다.
대부분은 세속세력의 개입이나 영향에 의하여 이중 삼중으로 교황을 선출했기 때문이다.
그 밖에 1059년까지는 세속세력도 교황선거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한 원인이었다.
14-15세기 유럽의 시스마(교회분열) 때에는 교회 내부가 분열하여 추기경단(樞機卿團)도 둘로 나뉘어
대립하였으므로 이런 모순이 생겼다. 교회사에 대립교황의 수가 37명이나 된다.
AD1200-1300
1241년 몽골의 동유럽을 침입하여 슐레지엔(지금의 폴란드 일부)에서 대공인 하이리히 2세를 무찌르고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도나우 강 유역을 지배하였다.
몽골의 침입으로 크리스천 60만 정도가 희생되었다.
당시 유럽은 몽고 군을 하나님이 심판으로 보낸 군대라고 생각하였다.
어느 날 갑자기 소문도 없이 나타난 이들은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무엇 때문에 공격하여 단숨에 전멸시키고 지배는 하지 않고 지나가 버리는지 모든 것이 풀리지 않는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몽골과 유럽 참조]
보니파스 8세(1294-1303)는 우남상크탐(unam sanctam)을 선언하였는데,
이 말은 모든 피조물은 구원을 받기 위하여 교황에게 복종하라는 뜻이다.
그는 몹시 타락하여 단테는 바티칸을 '부패의 소굴'이라고 부르고 보니파스 8세, 니콜라3세,
클레멘트5세와 함께 지옥 맨 아래층에 두었다.
1291년에 8차 십자군 원정의 실패로 모든 것이 원점으로 되돌아갔고 교황의 막강한 힘도 꺾이게 된다.
프랑스 필립 4세(1285-1314)는 교황청이 1200년경에 남부프랑스의 자기민족인 알비파를 대학살
한 것에 대한 민족의 독립정신과 성직자의 세금문제 때문에 보니파스 8세와 싸워 승리하였다.
이로서 교황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AD1300-1400
이때부터 종교개혁과 중첩되는 것이 많아 중첩되는 것은 가능한 피하기로 한다.
베네디트 11세(1303-04)가 죽자 필립4세가 교황을 프랑스 남쪽 변두리에 있는 아비뇽으로 옮긴 것을
아비뇽유수(1305-1378)라고 한다.
여기서도 한없는 축재, 축첩, 중 과세, 많은 성직 직분을 만들어 판매하였다.
1377-1417년 로마와 아비뇽의 두 교황이 자신들이 진짜라고 주장하다가 서로 파문하고 저주하였다.
이 때에 영국의 옥스퍼드대학 교수인 요한 위클립(1324-1384)이 나타나 교황권을 거부하며 성서를
읽을 것을 주장하였다. [종교개혁 참조]
1382년 위클립은 불가타역 성서를 첫 영어로 번역하였는데 죄로 위클립은 파문 당하였고,
그가 죽은 후에 시체를 화형 시키고 뼈는 강물에 뿌렸다.
AD1400-1500
요한 23세(1410-1417) 그도 가장 타락한 교황 중에 한 사람이다.
그는 수녀, 처녀, 유부녀, 형수 등의 200명의 여자와 난행하며 동성연애도 하였다.
천국과 지옥을 부인 하였으며, 그는 교황자리를 돈을 주고 샀으며 대신 교회직분을 팔아 이익을 챙겼다.
식스투스 4세(1471-1484)는 스페인에 종교 재판소를 만들었고,
돈으로 영혼을 연옥에서 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교황권으로 집안이 부자가 되었고 8명의 조카가 추기경이 되었으며 그 중에 델라 로베레 추기경은
후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되었다.
이노센트 8세(1484-92)는 여러 부인에 16명 자녀두었고, 발도파 전멸을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는 스페인의 종교재판장 토케마다(1420-1498)를 임명하여 18년 동안 10200명을 화형에 처하였고,
10만 정도를 종신징역 시켰다.
그는 베드로 광장에서 황소와 결투도 허락하였다.
교황의 타락에 대하여 이탈리아 플로렌스에서 사보나롤라가 개혁을 주장하였다.
알렉산더 6세(1492-1503)는 문예부흥시대에 가장 방종하였으며,
욕심 많고 타락한 사람으로 교황을 사고 추기경을 돈 받고 팔았다.
사생아도 많았고, 어린데도 높은 자리에 임명하였다.
반대하는 자는 살해하였고, 비오 3세 누이를 첩으로 하였다.
보헤미아의 요한 후스가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였고, 종교개혁이 절실히 필요 할 때에
1483년에 독일에서 루터가 태어났으며, 1484년 즈빙글리가 스위스 쥬리히에서 태어났다.
[종교개혁 참조]

<교황의 권위를 추락시킨
아비뇽유수>
AD1500-1600
율리우스 2세(1503-13)는 가장 부유한 추기경으로 교황을 샀다.
1506년 율리우스 2세에 의하여 베드로 성당 바실리카 초석을 브라만테가 놓았다.
개인의 군대로 제후 영토를 빼앗아 그를 군인교황이라 부른다.
면죄부 발행을 루터가 보고 놀랐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고, 프랑스 누아용 출신의 존 칼뱅(1509-64)이 가담하였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 할 때에 교황은 레오 10세(1513-1521)로 그는 8세에 대주교가 되었고,
교회 직분을 팔아 부호가 되었으며 13세에 추기경이 되어 교황자리를 흥정하였다.
우남 생크탐을 다시 선언하였고, 면죄부를 규정된 금액으로 발행하였고,
이단자의 화형은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선언하였다. [면죄부와 95개 조항참조]
바울 3세(1534-1549)는 프로테스탄트를 확실한 적으로 여기고 합스부르크가의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
(재위 1519-1556)에게 군대를 보내어 싸우게 하였다. [합스부르크 참조] [루터 파문, 보름스의회 참조]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한 보복으로 1540년 로마 교황청의 정식인가를 받아 예수회를 조직하였다.
1525년 틴데일은 성서를 대중언어로 번역 하였다는 죄로 화형 시켰다.
AD600-1600까지 기독교가 유럽을 지배하였는데도 불행하게 이 천년을 유럽의 암흑기라고 한다.
AD1600-1700
교황 바울 5세(1605-21)는 1615년 약 100년 만에 베드로 대성당을 완성하였다.
프로테스탄트와 교황의 마지막전쟁으로 30년(1618-48)전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종교적 성격을 띄었으나 후에는 자국의 이익으로 변질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우세로 종결되어 1648년 웨스트팔리아(베스트팔렌)조약으로 끝난다. [30년 전쟁참조]
울반 8세(1623-44)는 예수회의 도움으로 보헤미아 프로테스탄트를 전멸시켰다.
AD1700-1800
클레멘트 11세(1700-21)는 자기의 승인을 얻어야만 왕들이 통치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고,
성서를 읽지 말라는 교서를 발표하였다.
클레멘트 14세(1769-74)는 예수회를 폐지하였다.
비오 7세(1775-99)는 *성서공회를 반대하는 교서를 발표하였으며,
예수회를 재건하였고, '무오설'을 다시 주장하였다.
 *성서공회(Bible Society)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을 세계 각국에 전파하기 위해 각국어로 번역된 성서를 출판하여,
염가 또는 무료로 배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초교파적인 기관이다.
1710년 독일에서 경건주의(敬虔主義)가 전파되던 시절에 민중의 신앙을 깊게 하기 위해서
F.칸슈타인 남작이 조직한 성서협회이다.
AD1800-1900
1802년 나폴레옹은 교황권을 박탈하여 종교의 자유를 주었고, 1806년 이름만 유지하던
신성로마제국을 멸망시켰다.
레오 12세(1821-9)는 모든 종교적 자유, 관용, 성서 협회, 성서의 번역을 비난하였다.
카톨릭을 이탈하면 죄가 없다고 하여도 영생을 얻지 못한다고 선언하였다.
비오 8세(1829-30)는 양심의 자유와 성서 협회를 비난하였다.
그레고리 16세(1831-46)는 성서공회를 비난하며, 교황 불가류설(잘 못됨이 없다)을 열심히 주장하였다. 비오 9세(1846-78)는 교황은 '무엇이던지 할 수 있다'라고 선언하였고, 교황으로 있는 동안에 이단을
무력으로 제압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는 것을 비난하며, 신자들은 통치자에게보다는 교회에 복종하라고 하였다.
양심, 예배, 언론, 출판 등의 자유를 비난하였다.
마리아의 순결성, 신성을 선언하였고, 성서공회를 비난하였다.
신교는 기독교의 형식이 아니고, 카톨릭의 교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그의 대행자(교황)들이
기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1870년 에마누엘레(임마누엘)2세가 로마교황청에 침입하여 이탈리아에 편입시켰다.
교황은 국가와 있을 자리까지도 잃었다.
교황은 '무엇이던지 할 수 있다'라고 선언한 것이 무색하게 되었다.
이로서 교황은 정치적 권력을 지금까지 회복하지 못하였다. [바티칸 시국참조]
레오 13세(1878-1903)는 자기는 모든 통치자의 머리로 임명되었고, 이 세상을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만들며, 무오설을 강조하며, 개신교(프로테스탄트)는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말하였다.
AD1900-2000
비오 10세(1903-14)는 개신교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적이라고 비난하였다.
1929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교황 비오11세(1922-1939)와 '라테란 조약'을 체결하여 바티칸시를
교황의 통치로 회복시켜주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바티칸 시국참조]
비오 11세(1939-1958)는 로마 카톨릭만이 그리스도 교회이며, 기독교의 재결합은 로마 카톨릭에
복종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하였다. 현재는 교황 266(혹은 264대)대 요한 바울 2세(1978)이다.

<윌리엄 틴데일은 성경을 대중
언어로 번역 하였다는 죄로
1525년 화형 시켰다.>

 마리아의 신격화 이야기
모든 종교에 남신과 여신이 존재하는데 성경에는 여신이 없다.
신학자들은 마리아의 신격으로 격상한 그 근원을 신비의 종교 시초인 바벨론의 여신 세미라미스에서
찾고 있다. 여신은 니므롯의 아내로 남자 없이 영적으로 잉태하여 담무스를 낳았다고 한다.
예수님의 탄생과 똑 같은 것에 착안하여 세미라미스에 자리에 마리아를 앉히고 예수님이 하나님임으로 신의 어머니로 하나님 위에 높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3번째 회의 AD 431년 에베소회의와 4번째 회의 AD 451년 칼세돈 종교회의에서
오늘날 성모숭배(聖母崇拜)라고 알려져 있는 교리가 공포되었다.
이는 곧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를 예배한다는 것에 굉장한 소동을 일으켰으며,
심각하게 반대하는 이도 많이 있었으나 결국 천주교의 항구적인 교리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이 교리는 카톨릭 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가 되었다.
성도 여러분이 마리아에 관하여 막연하게 알고 있으므로 간단하게 신학적 의미를 찾아보기로 한다.
마리아는 신약성경에 간단하게 나온다.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일이다.
마리아의 신격화는 다 열거 할 수는 없고,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상호구원(Coredemptrix)설이다.
이것은 인류를 구원하는 일에 그리스도와 함께 마리아도 참여하여 다는 이론이다.
그 이유로 교부 이레나이우스가 주장한 아담과 하와가 불복종한 것을 그리스도와 마리아가 복종함으로 회복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성경을 통하여 그가 행한 행동을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본래 임무가 무엇인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죄 성에 대하여 자유로울 수가 없다.
자범죄(스스로 지은 죄)는 제쳐두어도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둔 이상에는 원죄(조상의 죄)에
대하여는 그녀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며, 죄인이 죄인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주교는 마리아에 대한 신앙심은 예를 들면 축일, 예배, 묵주기도 등의 형태를 보면 그들의
삶에서 마리아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너무 열중한 나머지 다른 교리는 뒷전으로 밀려나있다.
신학자이며, 주교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교회에 대하여 '우리는 신성한 동정녀 마리아를 제외시켜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수도원 이야기
수도원 광야에 혼자 살던 애굽의 안토니(AD250-350)가 시작하였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본받아 수도원 사회를 만들고 일하는 것과 수도생활을 나누어 하였다고 한다.
수도원의 사람이 증가하므로 조직이 생기고 계급이 생기면서 처음의 좋은 의도는 차츰 변질되고
타락하여지고 부도덕하여 졌다.
종교개혁 때에 신교국은 수도원을 폐지하였으나, 구교국은 남아서 서로 돕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소유를 실천하고 동굴이나 통나무집에 거하고, 자선도하며, 교육에도 힘쓰고 농사에도
많은 일을 하고 자신의 수도와 신학에도 힘써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스 테살리아 지방에는 수도원이 많고, 그 중에는 AD14세기에 계곡에 건설한 마테오라 수도원이
유명하다. 수도원은 비잔틴식과 프레스코벽화는 지금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마테오라의 절벽수도원은 가끔 달력에서도 볼 수 있다.
어느 수도원에 젊은 여자예언자가 있었는데, 젊은 왕이 예언을 받으러 왔다가 욕정이 생겨 여자를
범하고 말았다.
그후로는 노인만 예언자로 두었다고 하고, 동로마 교황이 수도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수도원을 금녀(禁女)의 집으로 만들어 심지어 암놈의 짐승까지 금하여 다고 한다.
어릴 때에 수도원에 들어온 사람 중에는 전혀 여자를 보지도 못하고 죽은 자도 있다고 전한다.



<시나이반도 시내산 아래
성 카테리나 수도원>

2]성경의 정경(正經)과 형성

정경을 캐논(Canon)이라고 하고 이것은 막대기(Cane)에서 유래하였다.
옛 날에는 저울도 막대기저울이고, 자도 막대기에 눈금이 있었다. 저울은 정의(진리)로 표현된다.
그래서 신앙의 척도로 인정된 책이라는 의미로 성경만을 캐논(Canon)이라고 한다.
참고로 말하면 성경은 총 1189장= 구약 929 + 신약 260 , 가장 긴 장은 시편119편이며,
성경의 맨 가운데 장은 시편 117편이다.
그리고 가장 긴 절은 에스더 8장 9절이고 가장 짧은 절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 절이다.
장과 절은 원문에는 없으나 1236년 카로((Caro) 추기경과 1551년 로버트 스데반(Robert Stephens)이
써 넣은 것이다.
 (1)구약성서
구약은 헤브라이어로, 신약은 그리스어로 씌어졌다.
구약에서 헤브라이어로 씌어지지 않은 부분(에스라 4:8-6:18, 7:12-26, 예레미야 10:11,
다니엘 2:4-7:28 등)은 아람어로 씌어졌는데, 이 아람어는 유대인 포로기 이후에 점차로 유대인의
구어(口語)로써 헤브라이어를 대신하게 되었던 방언이었다.
신약의 그리스어는 1세기경 로마제국의 통속어인 코이네(Koine) 그리스어이다.
이 그리스어는 단순하고 강조적이고 모험적인 표현을 즐겨 쓰는 특성이 있다.
유대라는 작은 지역에서 써지고 기간은 길었다(약 1000년간).
구약성서는 내용은 현재 것과 꼭 같지만 배열은 24권으로 현재와 달랐다.
율법 5권: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예언서 8권: (전기4권)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후기4권)이사야, 예레미아, 에스겔,
12소 예언서
제서11권: (3권 시가)시편, 잠언, 욥기 (권서5권) 아가, 룻기, 예레미아 애가, 전도서, 에스더,
(제서3권)다니엘, 에스라와 느헤미아, 역대기
위의 성서를 주제에 따라 분류하고 합쳐진 성경은 분리하여 만든 39권의 헬라어역 구역성서를
셉투아진트(Septuagint)라고 한다.
구약성서의 형성은 요세푸스가 말하기를 에스라 시대에 확정되었다고 한다.
BC3세기경에 히브리어로 써진 성서를 70인이 헬라어로 번역하였다.[알렉산드리아 참조]
AD2세기경에 히브리어가 아니고, 헬라어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중간에 써진 14권(외경)이 포함되었는데 이것을 고대라틴성서라 한다.
요세푸스는 이것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예수님이 한번도 인용하신 적이 없어,
프로테스탄트(개신교)는 39권의 셉투아진트를 정경으로 정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로마 카톨릭은 고대라틴성서를 AD1546년 트렌트회의에서 정경으로 선언하였다.
종교개혁 전까지는 일반은 성서를 보지 못하게 하였고 성서를 만들기만 하여도 사형 당하였다.
위클립(Johannes Wyclif) 1382년에 불가타역 성서를 첫 영어로 번역하였는데 그 죄로 파문되고 죽은
시체를 화형 시키고 뼈는 강물에 뿌려지는 수모를 당하였다.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은 1525년에 성서를 헬라어와 히브리어 성서를 정확하게 대중언어로
번역 하였다는 죄로 1536년 10월6일에 화형 당하였다.
외경14권: 에스드라 1서, 2서 도빗서, 유딧서, 에스더서 추가(제롬이 단편을 모아만듬),
솔로몬의 지혜, 교회서, 바룩서, 세 아이의 노래, 수산나 이야기, 벨과 용, 므낫세의 기도, 마카비 1서,
2서 이상14권 더하여져 80권이 카톨릭의 성서이다.
마카비 1,2서는 역사서로 중요하나 내용은 생략한다.

<율법의 날 두루마리 성경을 들고 통곡의 벽을 향하여 행진>
 (2)신약성서
넓은 지역에서 썼고 보급된 지역도 넓었으나 약 50년간으로 기간은 짧았다.

[신약성서가 보급된 지방을 알아보면]
유대 지역: 요한복음,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디모데 전후서, 빌레몬서, 베드로 전후서,
요한1,2,3서, 유다서, 요한 계시록 소아시아: 고린도 전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 전후서, 누가복음
헬라: 디도서 그레데: 마가복음, 사도행전 로마: 로마서
논쟁을 일으킨 성서: 야고보서, 베드로 후서, 유다서, 요한 2,3서, 이 성서들은 어느 학자는 의심한다.
위조된 책: 바울의 행적, 베드로의 계시록, 바나바의 편지, 교훈 집
이단자의 위조문서: 베드로 복음, 로마의 복음, 맛디아의 복음, 안드레 행적, 요한의 행적
이것 외에도 신약의 외경은 50여 개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 마호메트는 외경을 통하여 기독교 사상을 얻었다고 한다.
AD397년 칼타고 회의에서 지금 사용하는 27권의 성경이 신약성서로 확정되었다.
 (3)한글 성서의 번역사
1832년, 화란의 선교사 구쯜라프 목사가 첫음으로 성서를 소개하였고, 홍주와 고대 섬에 머물면서
주기도문을 번역하였다.
1880년, 스콜틀란드 선교사 존 로스가 한국인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 진과 함께 만주에서
4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완역하였다.
1882년, 문호가 개방되면서 1885년에 언더우드, 아펜셀(젤)러가 들어와 성서사업을 추진하였다.
1887년, 존 로스와 같은 계통의 존 매킨타이어가 신약전부를 완역하였다.
1900년, 아펜셀러는 마태복음, 고린도전·후서를 완역하였다.
1904년, 신약전서의 개혁, 1906년, 재 개혁
1902년 아펜셀러가 성서번역을 위하여 낱말 조사하러 가다가 목포 앞 바다에서 파선되었다.
그는 이화학당의 여학생 두 명을 구하기 위해 바다에 뛰들었다가 실종되어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
아펜셀러의 목적이 달성하였다면 지금 우리는 좀더 쉬운 성서를 읽고 있을 것이다.
성서가 번역 될 때에 한문자가 많이 사용되었고, 어법이 옛날어법이라 이해에 어려움이 많다.
성서 판권의 이익문제 때문에 성서개혁에 걸림돌이 되어 힘들고 이해하기 힘든 성경을 읽고 있다.

3]기독교의 심벌들
(1)십자가
본래는 로마의 중죄인을 시각적 효과를 얻기 위하여 집행하던 사형 틀이다.
보통은 3일 정도까지 산다고 한다. 예수님은 빨리 운명하셨다.
본래는 T 형인데 예수님은 죄의 명패를 달기 위하여 십자가 모형이 되었다.
명패는 'INRI-유대인왕, 나사렛, 예수'의 약자이다.
십자가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십자가에 예수님이 매달려 있는 것은 구교의 상징이다.
십자가에 아무 것도 없으면 신교의 상징으로 부활을 강조하는 의미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빈
십자가이다. 십자가와 비슷한 배의 닻을 심벌로 사용하기도 한다.
'X'형은 안드레 십자가라고도 하는데 안드레가 이 형의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국국기는 정상의 십자가(잉글랜드 기)와 안드레(스코틀랜드 기) 십자가를 겹친 것이다.
십자가는 전 기독교의 상징이고 구원의 상징으로 예배당이 있는 곳에는 함께 있다.


<아펜설러는 미국 감리교
목사로 배재학당을
설립하였다.>

 (2)비둘기
성령(하나님)의 심벌로 표시된다. 마태3:16절에 예수님이 세례 받을 실 때에 하늘에서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자기 위에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기 때문이다. 예배당의 조각에는 비둘기가 빠지지 않는다.
(3)양
구약에서는 희생의 제물이 양이다. 그리고 요한 1:29 절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예수님을 가리켜 양이라고 하였다. 한 마리만 있는 양은 주로는 예수님, 많은 양의 무리는 성도이다.
목자는 예수님으로 표현된다. 예수님의 양의 비유를 많이 하셨고 이것들이 성화로 표현되고 주로
죄인(신자)을 가리켰다. 성화에는 양의 그림이 많은 이유이다.
(4)물고기(ichthus: 익투스)
베드로를 보고 예수님이 사람을 낚는 어부(서반어-페스카도르)가 되라고 하셨다.
어부는 전도인의 상징이기도 하다.
물고기의 단어가 예수님의 이름을 합친 것과 물고기(어부)의미와 부합되어 초대교인들의 박해 때에
암호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요사이는 크리스천들이 차에도 많이 부착한다.
i: 예수, ch: 그리스도, th: 테우스(하나님), u: 피오스(아들), s: 소테르(구세주)
합하면 ichthus로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아들 구세주'가 된다.
 (5)α와Ω
계시록22:13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상징이 되어 조각이나 그림에 표현하게 되었다.
무덤의 관에서 십자가와 합쳐진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6)가리비(조개)
프랑스 사람들이 지금도 '야고보의 조개'를 ‘라 코큐 드 상 자끄’라고 부르는데 조개는 ‘가리비’로 스페인
북부 카스티야레온 지방 레온주 근방에 있는 콘포스텔라 해안에 많이 서식한다.
야고보는 마태 4장21절에 세베데의 아들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사도행전 12장1-2절에는 BC44년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순교하였다고 신약성경은 그를 간단하게 기록하였다.
그는 전승에 의하면 몇 가지가 전해져 오는데 그가 많은 곳을 순례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콘포스텔라’로 그곳에 그의 무덤이거나 유물이 매장되어 있어 순례 객이 많이 찾는다.
콘포스텔라는 지명이고, 산티아고가 ‘성(聖) 야고보’인데 전설로 내러오는 이야기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야고보의 유물이 대리석 배로 기적적으로 운반되는 것을 마상의 기사가 대리석 배를 바라보다가 말이
놀라 기사가 바다에 떨어졌으나 이 배를 타고 간신히 살아났다고 한다.
기사의 옷은 가리비 껍질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후로 이곳을 찾은 증표로 순례 객은
모자에 가리비를 달았다고 한다.
 (7)장미와 나무들
유럽중세의 성당의 조각이나 묘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장미와 사이프러스나무인데 장미는 잎이
십자가상의 예수님이 상처가 난 곳이 양팔과 두 발목 그리고 허리를 합한 다섯 곳과 장미의 다섯 잎이
같다고 하여 기독교를 상징하는 꽃이 되어 성당에서 성모마리아에게 바치는 꽃이 되었다고 한다.
사이프러스나무는 십자가로 쓰인 나무라고 하여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한다고 하며 종려나무는 부활을
의미했으며 ‘나는 포도나무’라고 말한 것에서 포도나무는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한다.
 (8)그 밖의 것
IHS: 예수는 인류의 구세주, X. P: 그리스도, 이것을 겹쳐 쓰기도 한다.
4복음서의 상징으로 사람은 마태, 숫소는 누가, 사자는 마가, 독수리는 요한이다.

4]성경의 용어와 단위들
 (1)용어
호산나: 구원하소서의 뜻, 할렐루야(알렐루야): 찬송, 감사, 숭배의 뜻, 보혜사: 성령의 다른 말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의 뜻, 셀라: 소리 높여 찬송함
아멘: 진실하다. 동의한다. 예수님이 '진실로 진실로...'가 이 뜻, 기도, 성서낭독 뒤에 한다.
구속: 죄인(노예)을 대가를 지불하고 산다는 뜻, 노엘: 축가(크리스마스)의 뜻
음부: 죽은 뒤에 가는 곳, 혼령이 사는 곳, 죄인이 죽어 벌받는 곳, 저승의 뜻


<물고기와 심벌>

 (2)지명
아람: 시리아, 베니게: 페니키아, 바사: 페르시아, 곡: 마곡의 땅의 지배자, 북방민족
메섹: 모스크바의 옛 이름, 토갈마: 알메니아(아르메니아)의 북방민족의 뜻
갈리리 호수(바다): 1. 갈리리 지방 이름에서 2. 디베랴는 티베리우스의 도시 이름에서 3. 게넷사레는
남쪽의 평지에서 지명에서 4. 긴네롯(수12:3)은 바다모양이 악기 하프(히: 킨노르)를 닮았다고 하여
붙인 이름으로 길이 12Km 폭 11Km로 평균 폭은 800m이다.
호수 주변은 기후가 좋고, 비옥, 온화, 열대식물과 과수가 풍부하나, 병균에도 적합한 기후라 병자도

많았다고 한다.

요단 강: 우리나라 말로 요단강이라고 번역된 이 강은 요르단(Jordan) 강으로 요르단 나라의 국명이기도
한데 본래 이 강은 히브리어 야르덴(Yarden)이 어원이다.
야르는 ‘내려오다’와 애통, 애곡의 뜻을 지녔으며, 단은 고대 이스라엘 북단에 있던 도시로 삿 17장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할 때 단 족속이 점령하여 붙은 이름이다.
요르단 강의 수원이 3개가 있으며, 그중 가장 큰 수원은 헬몬산 남쪽 기슭의 ‘단(Dan) 샘’으로 요르단
강은 ‘단 샘에서 내려오는 강’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헬몬 산에서 사해까지 흐르는 이 강은 찬송가에서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의 의미도 있으며, 나아만이
문둥병을 고친 장소와 예수님의 세례 장소로 유명하다.
 (3)길이
스타디온 약 200M 규빗 약 46cm, 하룻길 약 32-40Km(안식일 허용거리)
 (4)무게
1세겔 약 1/2 온스=14g, 1달란트 75파운드=34Kg (금, 은, 동으로 화폐의 단위도 되고 재능의 뜻도 있다.) (5)군대
백 부장=100명 천 부장=1.000명 1레기온(1개 사단)=6.000명
 (6)부피
1바트 약 24 리터, 1세아 약 14 리터, 1에바 약 42 리터, 1오멜 약 3.5 리터, 1호멜 34 리터
 (7)화폐
금 1 달란트=4만 달러, 은 1 달란트=2.500 달러, 1 데나리온=하루 품삯=16 앗사리온=64코트,
1드라크마 약16센트, 1세겔 약64 센트, 1므나 약 18 달러, 란트=18 센트, 1렙톤=2 코트 란트=1/2 센트
 (8)시간
하루는 유대식은 일몰에서 다음 일몰까지, 로마식은 밤 0시에서 다음 밤 0시까지 신약의 시간을 우리 나라 현재의 시간으로 환산하려면 6시간을 더한다.
 (9)성경에서 7의 숫자와 관련된 것
안식일, 희년 7x7(50년째), 유월절에서 오순(50)절 7주간, 어린양 2x7, 장막절 2x7, 용서 70x7,
나아만 7번, 여리고 성 7나팔에 7일간 마지막은 7번, 계시록 7나팔 7대접 7촛대 7별 7봉인,
7인 부활(엘리야-과부의 아들, 엘리사-수넴 여인의 아들, 베드로-드로가, 바울-유드고,
예수님-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나사로)
 (10)성경에서 40의 숫자와 관련된 것
모세(40년 왕궁, 40년 미디안 광야, 40년 재훈련) 40년 정치 기간(사울, 다윗, 솔로몬, 옷니엘, 드보라,
에흣, 엘리), 40일 금식기도(모세, 엘리야, 예수님), 40일 홍수, 40일 니느웨이 회개 기간,
이스라엘의 한 세대이다.
 (11) 천국과 지옥의 표현 방법
천국과 지옥의 표현 방법은 그 지역의 풍토성(환경)이나 사회성이 반영되어 있다.
기독교와 회교는 사막의 고통으로 뜨겁고 목마름이 지옥이고, 천국은 생명수가 풍부하고,
고통과 질병이 없으며 배고픈 것이 없는 곳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회교는 소수가 많은 여인을 차지하여 다수는 부인이 없어 미인 72명의 부인이 사회성으로
천국에 첨가되었다.
불교의 지옥은 매 맞고 짓밟히는 고통이며, 극락은 성취된 깨달음(아미타불)의 즐거움이 있는 곳으로
표현한다.
성경의 표현들이 우리들에게 실감나지 않은 것은 우리가 사막에서 당하는 고통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천국의 정의는 ‘하나님과 같이 삶에 끝없이 동참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바른 표현이다. 
※참고사항:
유대인들이 생각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본질로 본 것은 모세는 율법, 솔로몬은 지혜,
예수님은 가슴(사랑), 프로이드는 리비도(성적본능), 카알 마르크스는 유물론(물질),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이라고 하였는데 진정한 본질은 사랑이다.
유대인 노벨상을 받은 것은 경제부분 65%, 의학 23%, 물리학 22%, 화학 11%, 문학 7%라고 한다.


<갈리리 호수와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한 곳으로
호수 이름은 1.갈리리
2.디베라 3.게넷사레
4. 긴네롯이다.>

 

 

 

출처 : 세계 역사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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