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종말론 이해의 새로운 전형
한동안 2000년에 가까워지면서 Y2K로 표현되는 밀레니엄 버그와 같은 문제가 현실적으로 다가와 많은 사람들이 지구 종말에 대한 위기의식을 많이 가졌다. 이는 A.D 2000년을 21세기 또는 새천년의 시작으로 보는 잘못된 정의와 함께 사회환경 및 미디어를 통하여 조장되는 막연한 불안감이 어우러진 결과이다. 즉 핵의 공포,인구 팽창, 기상이변, 환경 오염에 대한 두려움, 우주행성의 충돌의 가능성 등이 2000년대로 넘어가는 어떤 신비감과 맞물려 미래에 대한 부정적 예견을 낳으면서 진행되는 일종의 문화적 종말론이다. 이러한 현상이 상업주의로 일관된 언론 및 방송매체들의 극적인 표현을 통하여 더욱 증폭되는 실정이라 하겠다. 이러한 시류를 반영하듯이 최근에는 크리스천들의 종말론에 관한 관심도 부쩍 늘어난 것 같다. 그 일례로 미국의 어느 기독교 서점에서는 예언 분야서적의 진열대가 역사분야 서적 진열대보다 2배나 크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 예언 분야에는 묵시적인 소설 분야 도서들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한다. 평신도를 위한 신학 대중지는 물론이고 신학전문지도 이 분야를 다루고 있다.미국의 CHRISTIANITY Today 에서 분기별로 발행하는 Christian History 는 지난해 2월에 종말에 대한 특집호를 내었다. 이와 같이 모든 출판사가 종말론에 이해되어 온 내력에 대하여 적어도 한권씩 출판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지금까지의 성경적-신학적-종말론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주로 "때와 시간"중심의 종말론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창조, 타락, 십자가의 구속, 재림을 직선적인 시간의 진행 쪽으로 이해하면서 그중에서도 에수 그리스도의 재림"시기"에 대하여 신자들이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는 경향이 매우 짙다. 이러한 경향은 2000년대로 넘어가면서 임박한 종말론으로 인한 집단 가출 내지 자살 소동 등으로 사회에 잦은 물의를 빚는다. 그러나 성경적 종말론은 "때"중심이라기 보다"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중심이다. 종말론의 핵심은 어느때 어느사건에 있는 것이 아니며 , 어떤 예정이나 계획에 있지도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있다는 말이다. 특히 복음서는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우리에게 제시하기 보다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연결 시키고 있다.성경적 종말론은 언약적-구속사적-승리의 종말론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따라 이루어진 변혁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초림에 따라 "이미"이루어졌으나 재림과 더불어 완전히 이루어질 온 세상의 대변혁을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사역의 역사성을 무시한다는 말은 아니다.본고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따른 변화에 맞추어 성도들과 이 세상에 일어난 종말론적 변혁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살피고자 한다. 먼저 성경이 제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 특성을 살펴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 특성한 사람이 어떠한 인격을 가진 사람인지를 알려면 그 사람이 이룩한 업적과 그 영향들로 평가 되어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알기 위해선 먼저 그의 하신 일과 이로 인한 변혁의 영향을 살펴야 한다. 또 그분의 하신 일은 복음의 근본적인 특성과 이어진다.
* 복음의 본질적 특성
우리의 논의를 고린도전서 15장 1-5절을 중심으로 시작하고자 하는데, 이는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일로써 복음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고린도전서 15장 1절 이하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전한 복음과 그로 인한 변혁들을 설명하고 있다. 즉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사 게바에게 보이(신)..." 일련의 사건들을(고전 15:3-5) 바울이 전한 "복음" 이라 규정한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복음이 "해석이 없는 4가지 동사"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여기 예수님의 " 죽으심", "묻히심", "다시 사심", "보이심"을 요한복음의 저자는 하나님의 아들의 인생 여정으로 보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가 그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여정의 주제로 십자가를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4가지 사건을 기독론적 운동의 일부로 본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4가지 사건은 그야말로 끔찍하고 두려우며 놀라운 사건들인데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를 가리켜"복음"이라고 말하니 이해하기 힘든 점도 없지 않다.
- 성도들의 영적 변혁
이 복음사건을 믿는 자는 넘어지지 아니하고 바로 "서며"(고전 15:1), 또 이것을 전하는 사도들의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다.(고전 15:2)
이 말씀의 적용은 우선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해당되고 그 다음에는 이 서신을 읽고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같은 영적인 변혁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확실히 이 사건은 특수한 사건임에 특림없다고 하겠다.
이러한 변혁은 종말론적으로 애해하여야 한다. 종말론적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그의 구속사역의 혜택들이 "이미"(already)이루어졌으나 그리스도의 재림때까지는 "아직"(yet)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not)것을 말한다.
성도는 이미 구원받았고, 또 구원받고 있으며, 나아가서 온전히 구원을 받을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 변혁의 현재면을 예로들어 말하자면 우리가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동일한 형상(image)으로 화해되는(고후 3:17-18) 구원 사역인데 이는 성령론적 특징을 가지는데 성도의 성화가 여기에 포함된다.
예수님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 성도들이 같이 죽고 함께 일어나서 주님과 함께 하늘에 앉히시는 변혁이 일어났다.(롬 6:3-9, 엡 2:5-6)
이 사실은 그 사건 당시에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성도들 조차도 거듭나게 하시는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벧전 1:3)는 말이다.
- 시공간을 초월한 독특성
도대체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시기에 1세기 골고다에서 이룩하신 구속사역이 마게도니아의 고린도 교회 성도를 "그 가운데 서도록"하신다는 말인가?(고전15:1)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으시고 묻히시며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어 사람들에게 보이심으로 팔레스타인에서 멀리 떨어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말인가? 도대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기에 베드로전서를 받은 사람들 곧 그 당시 소아시아에 흩어진 나그네(벧전 1:1)된 자들이 예수님을 보지도 못하였는데(벧전 1:8) 거듭나는 변혁이 일어났단 말인가?
인류 역사상 이와같이 놀라운 일을 이루어 낸 분은 또 다시 있을 수 없다.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도 예수님처럼 "해석이 없는 4가지 동사"의 과정을 거친 사람이다. 즉 그도 죽었다가 묻혔다가 나흘만에 다시 살아나 여러 사람들에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인간 나사로와 그가한 일을 믿는다고 우리에게 무슨 변혁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지어 반포한 것과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건조하여 임진왜란때 크게 승리한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고 우리는 믿는다. 그러나 그렇게 믿는다고 우리가 변화받지 않는다. 오직 에수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그 구속사역을 믿을 때만이 이런 변혁이 일어난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룩한 사역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사역은 시간적으로 그때 그 당시에만 한정될 사건이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 생애의 4가지 사건으로 구성되는 그의 구속사역은 지역적으로 어느 한곳에만 묶여질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시간을 뛰어넘고 공간을 뛰어넘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심을 그 개인의 생애를 마감한 차원에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 요약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1)죽으심, 2) 묻히심 3) 다시사심, 4)게바에게 보이심, 이 4가지 동사들의 나열이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끔찍하지만 놀라운 기독론적 움직임들을 복음이라고 할만큼 믿는 성도들에게 이적의 변혁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이런 동사로 된 사역의 주체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어떤 분인지 마땅히 살펴보아야 할것이다. 이 그리스도는 언약의 중보자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인격에 근거한 종말론은 언약적임이 분명한데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그리스도의 온 교회적인 인격
그렇다면 이 분은 예사로 평범한 분이 아니시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참조 홈 13:3-4)
*마태복음 2: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헤롯의 박해를 피해서 아버지 요셉의 꿈에 따라 모친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시어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계셨다. 그런데 마태복음 저자는 이 사실이 선지자의 예언 성취를 위함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하지 않고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이거은 호세아 1:1에서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이라는 내용을 성취시켰다는 말이다. 즉 모세의 인도로 이스라엘 배겅이 홍해를 건너 출애굽한 것을 말한다. 이것을 인용한 마태복음의 요지는 예수께서 헤롯의 박해를 피해 계시다가 이제 때가 되어서 혼자서 출애굽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출애굽하시는 것이나 남자 장정만 6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의 박해를 피해 출애굽하는 것이 동일시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혼자이시지만 온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한 인격을 가지셨다는 말이다.
* 마태복음 2:16-18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는니라.
베들레헴과 그 지경의 두 살 아래의 모든 사내아이를 헤롯왕이 죽임으로 그 아이들의 어머니들이 통곡하고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처참한 비극적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이 사건을 바벨론 포로 시에 라헬 즉, 이스라엘 어머니들이 자기 자식들을 잃은 것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31:15)에 비추어 해석하고 있다. 베들레헴에서 예수님 당시에 일어난 살해사건을 마치 예수님이 쫓겨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같이 하나님의 백성들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기쁘게 돌아와 회복할 것을 내다보는 전주곡으로 이 구절을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애굽에서 불려 나오듯이 유다 백성들도 바벨론에서 불려나오는 출애굽 주제의 일원으로 이 구절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유대나라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갈 때의 형편이다.
즉 백성의 장정이 잡혀가는 것으로 인하여 그 어머니들이 통곡하는 민족적 서러움을 표시하고 있다. 예수님이 날때의 살해된 아기들의 어머니들은 곧 바벨론 포로 잡혀 갈 때의 유대 어머니들과 동일시되고 있다. 그 배후에는 아기 예수님의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가리키며, 이것은 곧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의 출바벨론과 연관을 짓는 것이 분명하다.
* 사도행전 9:4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 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22:7 26:14)"
사울이 "주의 제자(행9:1)를 체포하기 위하여 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발급받아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길에 나타나신 주님의 말씀 중 일부이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네가 어찌하여 내 제자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시지 않고 "나"를 이라고 하심으로 성도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였다.
마태복음 25:45에서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하시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고 하곘다.
*갈라디아서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1.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출애굽 당시의 20세 이상의 남자만 60만명이나 되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 전체 숫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데도 "하나(One)"라 했다.
2. 아브라함과 그 자손은 육적인 자손만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아야 한다(갈 3:7, 26,29).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이들이 한분 예수님으로 대표된다. 쿨만(O.Cullmann)은 이 말씀을 근거로 구약은 여럿이 한 분으로 줄고(Many in on e), 신약은 한 분이 여럿으로 늘어난다(One in Many)고 말했다.
3. 그렇다면 구약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과 신약의 모든 참 백성(여기에는 아직도 나지 아니한 주의 참 백성을 포함함)을 포함한 보이지 아니하는 교회(Invisible Church)를 "한 분 그리스도"라 한 셈이다. 즉 신구약 시대를 통털어 주의 교회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 되고 있다는 말이다.
에베소서 2:15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교회를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 (one new man)을 지었다고 말한다. 단순히 두 계통이 사람들이 하나로 되었다는 의미도 있지만 신약 교회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자기의 안에서 새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여러 시대에 걸쳐서 여러민족으로 이루어진 신약교회를 "한 사람"이라고 함으로 그 단체적 성격이 나타남을 알수 있다.
고린도후서 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사랑하시어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음이 14절 마지막에 낭고 그 죽음의 목적이 그 다음 15절에 이어진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자를 위하여 (살게)하려 함이니라
휴는 "그리스도 한분이 모든 사람 대신에 죽으셨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말이다. 그죽음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하나가 되신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모든 사람의 죽음이 주님의 몸에서 다 완료되었다. 사망과 부패가 그 말씀(the Word=예수님)을 통하여 온전히 파멸에 이르렀다."고 말하였다.
단순과거동사를 사용하여 "한사람이 죽었다..모든사람이 죽었다"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가리킨다. 과연 이 구절들은 바울이 대표가되시는 분으로 예수님을 알고 있는 가장 명료한 표현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로마서 5:12-21의 내용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즉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범죄하고 예수님 한분의 의로운 행동으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었다(롬5:12)는 말이다. 아담과 그리스도 이 두 사람의 경우에 한 번의 행위가 우주를 포함하는 만물적 결과를 가져와서 모든 사람만 아니라 "만물"이 실제로 연루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굳윈(Thomas Goodwin)은 "하나님 앞에는 아담과 그리스도 두 사람만 있을 뿐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들의 허리에 매달려 있다.(참조 고전 15:22)"고 약간 묘하게 표현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 교회적 인격을 다시 확인한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인격의 특성때문에 그가 부활하셨을때 그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던 "우리"가 거듭났다,(벧전1:3)는 변혁의 축복이 가능하다.
물론 이것은 성령론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재창조(regeneration)의 문제이다. 신자가 누릴 수 있는 종말론적 변혁이 가능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예수님의 인격으로 대표 원리도 임마누엘 원리도 더 쉽게 이해하게 된다.
* 그리스도의 판타(만유적)인격
그리스도의 인격은 우주보다더 더 큰 만유적 인격 즉, 판타(all)의 인격을 가지신 것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 에베소서 1:22-23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위에서 밑줄 친 부분에서 드러나듯이 그리스도는 만물 위에 있는 교회의 머리이시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머리이시며(22절) 동시에 만물 위에 있는 교회의 머리이시다는 말이다(엡 5:23)
즉 이 교회는 만물 위에 있으므로 그리스도 -교회-만물의 순서를 우리는 분명히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은 같은 것이 아니다. 머리란 권위와 통치를 의미한다.
개혁주의 종말론 이해의 새로운 전형(6)
또 그리스도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신데 교회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충만이시다. 그리스도는 만물을 복종하게 하시고 만물을 포함하신다.
* 골로새서 1:17-18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게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골로새서 1:18에서도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는 표현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곧 몸의 머리요 교회의 머리임을 말한다. 여기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 해당되는데 이 몸은 16절과 17절에 있는 만물을 포함한다.
만물의 정의는 16절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만물이(만유가)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다..."라고 표한한 것이 곧 그 정의라고 할수 있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안에 포함된다. 만물중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거룩한 세계(holy world)로서 온 우주보다 더 큰 차원을 지니고 있다고 할수 있다.
복음은 단순히 개인 구원의 기쁜 소식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 이미 오는 세상이 침투한 것으로 종말론적이요 결정적이란 말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는 새로운 창조, 새로운 아담, 형상의 건설자이시다. 그 나라의 새로운 세계의 개설은 일종의 구출 작전이 아니라, 우주적 건축 프로젝트의 시작이라고 어떤 학자는 말하나 사실 이것은 우주보다 큰 판타(만유)의 건축계획이다. 역시 예수님의인격이 보통 분이 아니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이 온 교회적 인격이시요, 온 우주를 초월하시는 판타 인격이 시란 말이다.
* 종말론적 화목의 변혁
종래의 종말론은 주로 "시간"중심으로 "마지막에 관한 것"들을 논의하여 왔기에 , "변혁(화)"에는 별로 관심도 보이지 아니 하였고 따라서 체계화된 정리도 보편화되지 아니한 듯하다. 사실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시간을 초월하는 복음-우주보다 큰 만유적인 인격을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묻히시고 다시 사신 그의 사역-을 시간에 묶어서 이해하고 있다. 실제로 복음이 "시간"에 속박되고 역사에 종속되어 있다. 이 사실이 성경적이 아님을 지적하는 것이 본 논문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제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에수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사역-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의 나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온 성도들은 물론 만유(물)(판타)에게 종말론적으로 이미 화목의 ㅕㄴ혁이 일어났으나 그 최종적 완성은 아직 일어나지 아니한 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 성도(개인 및 전체)의 종말론적 변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승천하심으로 그 와 신비롭게 연합되어 있는 믿는 성도각자는 오순절에 주님이 보내신 성령 곧 주의 영에 의하여 (고후 3:17-18) 중대한 영적 변혁을 입었다. (롬 6:1-11)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근거로 한 종말론은 성령론적 종말론을 다른 각도로 논한것이 지나지 않는다. 모두 예수님의 구속사역으로 이미 믿는 자들에게 원칙적으로 이뤄진 종말론적 변혁인데 이는 엣 사람이 멸망받아 지나가고 새 사람이 회복되는 변혁이다. 이 변혁은 세례와 성찬으로 믿는 성도에게 구현된다.
개혁주의 종말론 이해의 새로운 전형(7)
- 하늘에 앉힌 자
성도는 이미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살리시어 그 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었다(엡2:5~6). 그리고 여기 "함께 살리셨다"는 말은 이 변혁이 성령의 사역인데, 이것을 고린도후서 3:6의 끝에서도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 함으로 성령 곧 주의 영이 주체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이 영을 고린도전서 15:45에서는 살려주는 영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로 살려주는 영으로 되어진 것은 곧 구속사적변혁이며 이 변혁으로 성도들이 축복을 받게 된 것이다. 에베소서 1:20에도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앉히었따"는 것이 무슨 뜻인가? 이것은 하늘의 보좌를 가리킨다. 따라서 크리스찬은 그리스도 안에서 왕좌에 앉히었다는 말이다.
- 영생을 가진 자
성도는 동물들이 가진 목숨 외에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을 더 가지고 있어서(요일5:11~12) 생명을 둘 가지고 있다. 골로새서 3:3에는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한다. 이 생명은 영적이요 하늘의 것으로서 복음을 듣고 거듭남으로 주어진다.
- 세상을 이긴 자
성도는 세상을 이기는 자임을 요한일서 5;4~10에서 밝히고 있따. 세상을 이긴다는 말은 어두움, 죄, 사탄의 권세,사망을 이긴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선 예수님은 요한복음 11;25~26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선언하시었다. 그런데 이것을 증거하는 이가 셋인데 곧 성령과 물과 피라고 하며, 이 셋의 증거는 한결같이 다 같다고 요한은 주장한다.
- 부활의 능력 소유자
성도는 부활의 능력을 이미 여기서 지니고 있다. 에베소서 1:15 이하에 바울의 기도가 나오는데, 그 네 번째 간구에서(19절이하)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을 언급하면서 그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인지를 에베소 교인들이 알기를 소원하고 있다.
에베소서의 저자는 그 능력을 20절에서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으로 천명한다. 즉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에서 부활의 능력을 믿는 성도에게 이미 존재함을 피력하였다. 특히 놀라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은 성도 안에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 세례 요한보다 큰 자
성도는 세례 요한보다 큰 자로서 천국에 들어와 있는 자들이다. 즉 마태복음 11:11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물론 여기서 "크다"는 개념은 모든 대중들의 평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주 예수님의 잣대를 기준으로 평가한 것이다.
- 율법을 이룬 자
성도는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어 낸 자가 되었다(롬10:4; 8: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 여기서 율법의 마침은 율법의 "마지막"이라기보다도 "목적(goal), 목표(aim)"이다. 왜냐하면 "율법의 마지막"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는 목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율법의 요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만 충족시킬 수가 있다.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이 목적을 달성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마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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