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론 교실

[스크랩] 성서론

류성련 2017. 2. 15. 00:29









성서론



1. 역사적 배경1)



A. 초대교회시대의 성서관



신약성서의 공동체는 세가지 規範을 가지고 있었다. 즉, (1) 구약성서(딤후3:16), (2) 예수를 눈으로 보았고 그의 말씀을 귀로 들은 자들의 사도(행1:21-26, 고전9:1, 마16:19, 18:18, 눅10:16) (3) 궁극적 규범으러서 구약성서와 사도들에게 규범을 부여하는 주님(고전7:10, 9:14)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할 뿐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는 것에는 세 가지 권위는 구별된다. 사도들의 말씀이 교회의 기초가 된다면 그리스도는 이 기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모퉁이 돌이 된다.

교회의 권위가운데 가장 궁극적 권위인 그리스도의 말씀은 먼저 사도들과 그들의 제자들에게 말로 전달되었으며, 주후 1세기 후반에 부분적으로 글자로 기록 되었다. 사도들이 사망한 후에 그들을 통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계속 듣기 위하여 이 말씀은 기록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기록된 이 말씀이 사도들의 말씀을 대신하게 되었다. 나아가서 영지주의, 몬타니즘2) 등 이단설은 기독교 신앙을 변질 시키고자 위협하였기 때문에 교회는 말로 전하여 오던 말씀들을 더욱 문서화 시키고 이 문헌을 정경(政經, kanon) 곧 규범으로 확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주후 200년경 신약성서의약 221권이 정경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주후 4세기 후반에 지금의 27권이 정경으로 확정 되었다.



B. 종교개혁과 정통주의 신학의 성서관



종교개혁에 있어서 성서서의 원리는 교회의 구성적 원리를 형성하고 있다.

루터는 성서의 은유적 이해를 거부하고 문자적 이해3)를 주장한다. 그러므로 성서는 교회와 전통의 보증이나 해석이나 해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다. 루터에 의하면 성서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의 성서론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명제는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데 있다.



C. 계몽주의 시대의 성서관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구 프로테스탄티니즘)과 계몽주의 시대의 개신교 신학(신 프로테스탄티니즘)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성서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신 프로테스탄티니즘의 성서는 다른 책들과 같이 한 역사적인 책이며 역사적으로 해석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성서의 규범적 권위는 차츰 상실되고 인간의 이성과 종교적 자기의식이 대신 등장하게 되었다. 결과 이시대에는 성서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2. 성서와 교회전통, 신앙고백



A. 전통의 원천과 규범으로서의 성서



성서론은 종교개혁신학과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에 있어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 할 만큼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로마 카톨릭교회와의 갈등인데 로마 카톨릭의 주장은 교회가 공포하는 말속에는 성령이 말하고 있고 그러므로 카톨릭교회는 교회의 전통의 중요성과 교황이내리는 모든 공적인 결단의 무오성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종교개혁 신학은 sola scriptura(오직성서로만)의 원리를 주장하였다.



B. 전통의 필요성



성서는 전통속에서, 전통으로부터 형성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전통을 버리거나 무시 할수 없다. 전통없이 성서를 읽고 이해하려는 것은 광신주의 에 빠질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전통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성서를 언제나 새로운 개인적, 역사적 상황속에서 직접 읽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사신(使信)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언제나 전통을 고려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성서에 대한 모든 역사적, 신학적 해석이 배재되어서는 안된다. 2천여년간의 교회역사를 무시한채 성서를 자기나름대로 읽고 자기의 성서 이해를 절대화 시키는 것은 위험한일이다. 이러한 일은 기독교 신앙을 왜곡시키거나 교회의 존폐를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C. 신앙교백서의 필요성



교회의 전통을 고려하면서 성서의 진리를 새롭게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가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고백이란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양, 그리스도인의 삶, 설교 이와 같은 것을 통한 신앙의 모든 표현을 말한다. 교회는 전통의 노예(奴隸)가 되지 않지만 이와 동시에 전통을 무시하거나 버리지 않는 진중한 자세로써 성서가 오늘 이 시대에 새롭게 말하는 것을 신앙고백서를 통하여 표현해야 한다. 교회는 이러한 의미를 가진 신앙고백서를 발표함으로서 자신이 인식하는 성서의 진리를 증언하는 동시에 이를 통하여 자신의 공신력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3. 정경의 기준, 정경과 사회의 권위



A. 정경의 기준







정경이란 기독교의 모든 선포에 있어서 규범이 되는 것, 혹은 기독교“진리의 규범”을 말한다.따라서 기독교의 모든 이론과 실천은 언제나 성서에 의하여 검증되어야 한다.

그러면 왜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서의 66권만이 정경이라고 말 할 수 있는가?

구약성경 39권이 정경이라는 것은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약성서는 구약성서의 권위와 정경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신약성서 27권의 정경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준은 내용자체에 있다. 정경을 정경으로 되게하는 것은 어떤 외적인 것이 아니라 정경의 내용자체이다. 이 내용은 한마디로 예수그리스도이다. 정경의 중심적 내용을 형성하는 예수그리스도를 증언하는데 있다(루터)

둘째 기준은 사도성에 있다. 신약성서 27권에 기록되어있는 말씀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들은 사도들로부터 혹은 이 사도들의 제자들로 부터 유래하는 증언이다.

위에 기술한 두 가지 객관적 기준 뿐아니라 세 번째의 주관적 기준이 전제될 수밖에 없다.

즉 성령의 내적증언이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가진 정경을 정경으로 보증하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정경은 정경이 된다.



B. 정경과 교회권위의 관계



교회의 권위가 성서의 정통성에 대한 규범이 될 수 없다. 바르트가 분명히 말하는 바와 같이 어떤 문헌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증언, 곧 정경으로 확정하고 모든 다른 문헌들로 부터 구별하여 선택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교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경은 이미 확정되어 있고 구별되어 선택되어 있었으며 교회는 이것을 발견하고 인정 하였을 뿐이다.4)



4. 성서와 하나님의 말씀



A. 성육신된 말씀에 대한 증언으로서의 성서



고전적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에 있어서 성서의 문자 그 자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성서의 문자는 하나님이 불러준 것이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견해에 의하면 성서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신앙의 기초 위에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다. 사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성서는 신화적 이야기로 가득한 종교적 문헌에 불과할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것은 “하나의 신앙고배”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드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성서의 문자 자체를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서 안에서 성서를 통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B.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현재적 말씀으로서의 성서



성서는 옛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저장해둔 옛날의 유물이 아니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성서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증언이기 때문에 성서의 본문이 말하는 것을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는 것이며, 성서의 본문을 통하여 지금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리고 성서의 본문을 통하여 지금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에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분명하지만 성서만이 하나님의 말씀일 수는 없고 세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다. (1)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 된 말씀 (2)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3) 하나님의 선포되는 말씀



킨더(E. Kinder)의 견해에 의하면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의 전부가 아니라 성서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가능하게 된 역사적 증언이다. 킨더도 말씀의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하고 있다. (1) 예수그리스도 안에 발생한 말씀 (2) 성서 안에 기록된 말씀 (3) 현재적으로 선포되는 말씀



웨스트(W. Joest)의 견해에 의하면 심약성서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과 직접 동일하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도구”에 불과하다.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말씀과 직접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케제만(E. Kosemann)은 성서의 형식적 권위를 거부한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성령은...성서 안에 나타난다. 그러나 성서가 성령에 의하여 권위를 얻지 않고 그의 현 상태에서 권위가 되며, 성령을 대체시키고자 할 때 언제나 글자가 될 수 있고 또 된다. ....달리 말하여 정경은 복음과 간단히 동일하지 않으며, 그것이 복음이고 복음이 되는 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다. ”



지금까지의 이론들을 종합하면 성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성서는 실증적(實證的)으로 파악 될 수 있는 하나님의 “물건”같은 의미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1) 성령이 성서 안에서, 성서와 함께 증언하시기 때문이다. (2) 성서의 텍스트는 우리가 신앙의 응답(應答)석에서 이 텍스트가 내용에 순종하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약의 역사에 소속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3) 성서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근원적인 말씀은 인간의 언어와 개념과 사고를 빌어 기록된 문헌 인 성서 자체가 아니라 성서 안에 증언되어 있는 예수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가 주이다”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점에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5.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관계, 구약성서의 권위

신약성서가 예수그리스도의 사건을 구약성서로부터 이해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신약성서는 구약성서의 개념들과 사고의 틀을 사용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성서의 연속성(連續性)을 발견한다. 반면에 신약성서의 선포는 구약성서에 대하여 자유로운 태도를 취하고 있다. 여기서는 두 성서간의 불연속성 및 대립을 발견한다. 이제 두 성서간의 관계에 대해 알아본다.



A. 두 성서의 관계에 대한 해석들

(1) 양자의 일치성을 강조하는 입장

히틀러의 제 3국 시대에 있어서 구약성서는 많은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대항하는 고백교회(告白敎會)측에 속한 신학자들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일치성을 강조하였다. 피셔(W. Vischer)에 의하면 “예수는 구약성서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의 가치를 격하시켜서는 안된다. “두 성서를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기독교의 존폐가 결정된다. 구약성서의 증언의 가치를 신약성서에 비하여 하락시키는 교회는 사도들의 사신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을 믿지 않으며 ‘기독교적’이기를 중지한다.” 바르트도 두 성서의 일치성을 강조한다. 구약성서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기다리는 “기다림에 대한 증거”요, 신약성서는 이를 회상하는 “회상에 대한 증거”이다. 전자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계시의 “전시대의 증거”요 후자는 “후시대의 증거”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두 성서의 분리도 거부하지만 어느 한 성서를 격상시키거나 격하시키는 것도 거부한다.

(2) 양자의 불일치성을 강조하는 입장

하르낙, 트뢸치, 불트만은 두 성서의 불일치성을 강조한다. 먼저 신약성서는 하나님을 구약성서와 다르게 이해한다. 즉, 신약성서는 하나님께서 죄의 용서, 새 이스라엘의; 부르심, 성령의 보내심과 같은, 한 마디로 말하여 세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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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金均鎭, 기독교조직신학Ⅰ, P.167-171.

2) 몬타니즘은 본질적인 성격상 기독교라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교회의 신앙을 따라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몬타니즘은 초대교회에서 거부당했던 종교운동이었다. 몬타니즘은 몬타누스에게서 출발한 운동이며 서부 소아시아 지역인 브리기아(Phtrigia)에서 172년부터 일어났다. 몬타니즘의 발흥에 관하여 유세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모든 선을 대적하는 큰 적수이며, 악을 조장하는 자이며, 또 인간들을 대적하여 온갖 음모를 아끼지 않는 하나님의 교회의 원수는 다시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교회를 대적하는 새로운 이단들을 출현케 했다. 이들 중 어떤 이단들은 독사처럼 아시아와 브리기아 지방에 기어들어왔다. 원래 이교 제사장(a pagan Phrgian priest)이었던 몬타누스는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후 이교주의를 포기했지만 여전히 새 종교를 구 종교 관습 속에서 이해하고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교회는 그들의 자만한 것이 기성교회의 문제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악령 때문이라고 보았다. 몬타누스는 그를 통해 성령(Paraclete)시대가 왔다고 가르쳤다. 유세바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몬타니스트들은 “자신들이 성령과 예언의 은사”를 소유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의 일관된 주관은 성령께서(Paraclete)께서 예언자 몬타누스와 그를 돕는 두 여인을 통해 새 예언을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몬타니즘의 세력이 커지면서 다른 관습들이 추가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독신과 순교에 대한 강조다 단지 한번만 결혼해야 하며, 영적인 이유로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순교가 권장되었고 순교를 피하는 것은 죄라는 이론이다.

3) 루터는 성서의 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였다는 이론이 있음.

4) 이에 반해 로마 카톨릭교회는 정경에 대한 교회의 권위가 가진 타당성을 주장한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정경은 교회의 전통에 의하여 형성되었으며 따라서 정경에 대한 인정은 전통을 신앙의 제2원천으로 인정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출처 : 알프스의 눈동자. 데보라의 세계여행
글쓴이 : 알프스의 눈동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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