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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새로운 중고등부 패러다임을 극복하는

류성련 2010. 5. 23. 04:10
새로운 중고등부 패러다임을 극복하는
21세기 교회교육의 새 방향


박현동 목사
<의정부청소년교육선교회 총무>
phddd@hanmail.net


"과연 현재의 주일학교 교육 체계를 가지고 21세기를 창조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크리스천 리더들을 키워낼 수 있을까?" 본 강의는 이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교육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목회(성인중심의 예배와 돌봄의 기능)와 교육(어린이와 청소년 중심의 주일학교 교육)의 극심한 이원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원화 현상은 청장년들에게는 제대로 된 기독교교육을 받을 기회를 박탈하였고,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목회적 돌봄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결국 한국에서 기독교교육하면, '주일학교 교육'이 이를 대신함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신앙인을 양성하여,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교회교육의 목적은 점점 더 달성하기 어려워지는 듯 하다.
이제 '주일학교'라는 교육 체제로는 다변화·다원화의 21세기를 감당하기 어렵다. 20세기 한국의 기독교교육을 대변한 주일학교는 이제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정보화·세계화·과학화 사회의 여러 가지 신앙적·사회적·문화적 과제들을 능동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교육 체제를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Ⅰ. 20세기형 기독교교육 : 주일학교교육

현재 한국교회에서는 '주일학교 교육'과 '교회학교 교육'을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영국에서 주일에만 어린이와 청소년을 모아 놓고 교육하던 '주일학교'의 명칭이 신학적으로 보수주의 경향을 띤 교단에서 습관적으로 '주일학교 교육'이라는 말로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교회학교 학생들이나 성인들은 주일에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수요일에도 모이고. 금요일에도 모이고. 토요일에도 모인다. 그러므로 '주일학교 교육'이라는 명칭은 사실 20-30년 전부터 외국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대신에 '교회학교'또는 '교회교육'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주일학교 교육은 20세기 교회교육의 한 형태로서 중요한 위치와 역할을 감당했지만, 이제 새로운 옷을 입을 때가 된 것이다.

1. 주일학교 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문제점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교회교육'하면 갓난아기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복음 안에서 성장하도록 하는 것보다 주로 어린이나 청소년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역사적 배경은 1780년 영국에서 시작된 '주일학교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겪고 있었다. 산업화와 도시화 현상에 따른 부정적 부산물로서 당시 어린 청소년들의 노동과 청소년 비행이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 당시 기독교인이면서 신문업자인 로버트 레이크스(Robert Raikes)가 청소년의 사회적 문제의 원인을 무식(Ignorance)과 게으름(Idleness)이라는데 착안하여 청소년들이 노동에서 쉬는 주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성경뿐만 아니라. 영어. 산수. 예배방법 등을 가르쳤다.
1780년 불과 30여명 되는 거리의 청소년으로 시작된. 주일학교 교육운동은 당시 영국사회에서 크게 호응을 얻었다. 1784년 영국과 웨일즈와 스코틀랜드의 주일학교에 등록된 청소년 수가 25만명. 1835년 레이크스가 죽던 해에 등록된 영국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125만명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그러나 영국을 변화시키고 소위 교회교육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18세기의 주일학교 교육운동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첫째로. 영국교회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처음 조직되는 시기부터 주일학교는 교회에 부속된 주변기관으로 존재했고, 목회자들의 관심 밖이었다. 둘째로 기성 교회가 주일학교 교육운동을 외면하자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이 주일학교 교육운동을 흡수하여 주일학교의 목표가 성경교육과 회심으로 제한되었다. 주일학교 운동이 전도나 부흥 운동의 종속적인 방편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주일학교 교육은 신앙에 열성 있는 평신도를 중심으로 어린이나 청소년의 회심과 성경 및 교리교육으로 이해되었으며. 그것도 교회의 주변적 하부구조로 발전되어 왔다.
이러한 현상은 주일학교가 미국으로 건너가서도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1915년에 시카고에서 열렸던 '주일학교대회'의 보고서에 의하면 그 당시 무디(Dwight L. moody)나 제이콥스(Benjamin Jacobs)같은 열정적인 평신도 지도자들이 이룬 성공적인 주일학교운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카고 지역에서는 청소년 8명 가운데 1명은 범죄로 인하여 구속되었다는 것이다. 이토록 아이러니한 상황은 당시 주일학교 교육이 부흥 운동의 일환이었을 뿐. 교회와 연결되지 못했고. 또한 목회자의 목회 관심과 지도 밖에 있는 평신도들의 한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교회와 주일학교가 근본적인 차원에서 만나지 못하고 이원론적으로 유지되어 온 현상은 영국과 미국을 거쳐 한국교회에도 오늘날까지 만연되어 있는 정황이다. 1887년 평양에서 6개의 주일학교가 시작된 이래 한국의 주일학교 교육도 주로 평신도 손에 맡겨져 교회의 선교 기능을 보완하는 부수 기능으로 전락하였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교파별로 주일학교 연합회를 조직하여 교사교육 등 교리교육을 정비하는데 노력하였으나 주일학교 교육은 답습적으로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각 교단의 지도자들이 교단의 숫적 확장에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는 '교육전도사'라는 한국 특유의 직책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 교회교육은 주로 이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미래에 목회자가 되기 위한 교육 실습장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즉 교회교육의 본래 기능 회복보다는 교회학교 학생수의 증가를 위한 '학생수 배가운동' 이나 '전원출석 운동'등 선교 기능의 보조역할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목회자는 예배와 설교에 관심을 갖고 교육은 교육전도사들의 몫으로 분리되는 양상을 띠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주일학교 교육의 왜곡된 현상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은 기독교교육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다. 기독교교육의 본래 목적과 이에 따른 올바른 방향이 이루어진다면, 한국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길도 열리게 될 것이다.

2. 기독교교육의 본질
최근에 많은 노력들을 통해서 기독교교육, 교회교육, 그리고 주일학교교육의 상호관련성과 그 개념적 정립에 많은 진전이 있는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과거에는 기독교교육을 교회교육과 동일시함으로 기독교교육의 범위가 스스로 제한되었고, 교회교육 역시 주일학교 교육과 동일시됨으로 결국 교회에서의 교육이 왜소화되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그러면, '기독교교육'이 무엇인가? 기독교 교육은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공동체가 본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에 관련되는 교육행위' 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정의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을 강조한다.

첫째, 기독교교육은 기독교공동체의 교육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의 교육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 기독교공동체가 주도적으로 행해나가는 교육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교육은 가장 근원적인 기독교공동체인 교회의 교육을 포함하면서 학교, 가정, 사회에서의 모든 기독교적 관점에 기초한 교육을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기독교교육은 기독교공동체의 본질적 요소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기독교교육이 기독교공동체의 부차적인 일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일에 속하며 교육은 곧 기독교공동체의 존재양식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교육헌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쉐마 본문(신6:4-9)을 검토해볼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본문은 종교적 명령과 교육적 명령을 병행하므로 신앙을 전승시키는 통로로서의 교육을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공동체는 곧 신앙공동체이며 신앙공동체는 곧 교육의 공동체임을 볼 수 있게 된다.

셋째 기독교교육의 핵심은 신앙 교육이다.
기독교교육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신앙을 가꾸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신앙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는가 하는 점과 이 신앙이 어떻게 성장해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 제기되는 근본적인 문제는 신앙교육이 과연 가능한가하는 질문이다. 물론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성령님은 기독교교육의 과정에서도 주도권을 가져야하며 이것이야말로 기독교교육이 다른 모든 교육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신앙의 작업으로서의 기독교교육을 노력하는 것은 교육하시는 하나님이 그의 뜻 안에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 때문이다.

기독교교육은 기독교공동체의 교육이고, 기독교공동체의 본질적 요소이다. 따라서 기독교교육의 핵심은 신앙교육이다. 따라서 21세기 기독교교육은 이처럼 분명한 정체성을 가진 신앙교육으로 시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신앙교육의 본질에 따른 다양한 형태의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Ⅱ. 21세기 교회 교육의 방안

이제 새로운 21세기가 시작되었다. 인터넷을 사용하기 시작한 1990년대에 이룬 문명의 발전과 변화가 인류가 창조된 이후 1990년대 이전까지 이루어진 변화보다 더 빠르게 일어났다는 말이 있을 만큼 세상을 놀랍게 달라지고 있다. 새 천년에는 그 변화의 속도가 더욱 가속화할 것이 명백하다. 이러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 교회가 우선적으로 힘써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21세기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기독교인을 양성하는 일이다
98년도 하버드 대학이 받은 기부금의 총액은 11조원이었다고 한다.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돈이 21세기를 이끌어가야 할 젊은이들에게 투자된 것이다. 교육에 투자하는 대학이 좋은 대학이 될 수밖에 없다. 하버드 대학의 총장은 대학이 발전하기 위한 세 가지 요소로 훌륭한 교수, 우수한 학생, 그리고 교육에 대한 투자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는 교육에 대한 투자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특히 교회교육지도자와 교회학교 교사에 대한 투자, 그리고 교회교육의 질을 높이고 교육 환경의 개선하기 위한 투자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교회학교의 교육이 예수님의 제자로서(마 28:19-20), 사회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마 5:12-16)을 양성하는 참된 교육이 되도록 모두가 힘써야 한다.
그렇다면 21세기를 맞아 교회 교육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기독교교육을 통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양성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다음의 열 가지 교회교육 방안을 제시한다.

1. 교회학교 교사의 지도력을 개발하는 것이다.
교회교육에서 교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인터넷 환경에서의 교회교육은 더욱 절실히 전문가로서의 교사를 필요로 한다. 이제는 지루하고 단편적인 방법으로는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학생들은 멀티미디어 기재들을 이용하여 다양한 정보를 습득하고 있는데, 교사는 여전히 준비되어지지 못한 교육 환경 속에서 진리를 가르친다는 자부심만을 가지고 구태의연하게 가르친다면, 교육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므로 학생을 잘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유능한 교사의 양성은 필수적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교사를 양성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우리는 계획성 있는 교사교육을 실시하지 못했다. 교육은 '바람직한 변화를 위한 지속적으로 의도적이며 계획적인 모든 활동'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육을 시행하는 교사들에 대한 교회의 교육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계획적이지 못했다. 21세기의 한국 교회는 목적이 분명한 교사 교육을 시행함으로 21세기를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유능한 교사를 길러내야 한다. 그것만이 교회교육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
물론 교사를 선발하기 위한 기초 과정의 교육이 실시되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교육지도자들과 교사들이 정기적으로 함께 하는 시간을 통하여 삶을 나누고, 학생들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점을 찾으며, 미래를 설계하는 교사 웍샆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하여 교회학교 교사는 학생들을 잘 가르칠 수 있는 실제적인 철학과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2. 학습자 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교사들은 학생들의 변화에 당황해한다. 그리고 학생들은 그러한 교사들의 반응을 접하면서, 억지로 예배를 드리고 공과공부를 한 후에 어두운 얼굴로 교회를 떠난다. 이것이 오늘 우리 교육 현장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문제는 교사 중심의 교육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교육 현장은 학생 중심으로 바뀌어져야 한다. 학교에서의 교육도 교사가 월급을 받기 위해 학생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교회의 교육직은 교사가 자신이 봉사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얻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학생들이 교회에서도 '맞춤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각 개인에게 맞는 적절한 교육을 하셨던 것처럼(요 4:1-42), 우리도 학생들 각자에게 필요한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먼저는 그들의 흥미와 필요에 맞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고, 다음으로 사랑이 넘쳐나는 진정한 만남의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예배와 특별활동 등이 그들에게 꼭 맞는 교육으로 새롭게 연구되고 기획되어져야 한다.

3. 전인적 성장을 위한 소그룹 양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소그룹은 20세기에 가장 효과적인 교육 환경으로 판명된 것이다. 미국이나 한국에서 성장하는 대부분의 교회는 소그룹 양육이 잘 정착된 교회들이다. 소그룹 환경이 참으로 중요한 이유는 공동체를 지향하게 하기 때문이다(행 2:42-48). 사람들은 소그룹을 통하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공동의 목표를 함께 추구하는 역동적인 힘을 얻는다.
이러한 소그룹의 자연스러운 형태가 바로 분반공부이다. 교회교육은 분반공부를 통하여 이러한 소그룹의 역동성을 회복해야 한다. 어떤 교회들은 "예수 마을, 꿈이 자라는 땅" 등의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서 학생들의 성장을 돕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반공부는 학생들에 대한 제자 훈련이나 더 심도 깊은 신앙 훈련으로 발전할 수 있다.

4. 가정의 신앙 교육이 회복되어야 한다.
한국의 부모는 대단한 교육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부모에 의해 이루어지는 교육은 거의 없고 대부분 학교, 학원, 그리고 교회에 위탁하는 경향이 크다. 그래서 학생들이 무엇을 배우고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잘 모른다.
신앙 교육에 대한 부모의 생각은 더욱 열악하다. 그래서 고등학교 시절쯤엔 공부를 위해서 교회에 빠져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이 기독교교육의 가장 큰 딜레마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만약 부모가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세심하게 지도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가장 효과적인 교육의 현장이 될 것이다(신 6:4-9). 교회학교만으로는 21세기의 기독교교육을 감당할 수 없다. 필연적으로 부모가 신앙교육의 한 축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정기적인 부모교육을 잘 준비하고 실시해야 하며,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가정 학습지나 교육자료 등을 개발하여 꾸준한 신앙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5. 전문성에 날개를 다는 영성 훈련이 필요하다.
교회학교의 전문화는 21세기 교회들의 필수 코스이다. 그러면, 이것만으로 충분한가? 아니다. 영성의 기초가 없는 전문성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사와 학생들에 대한 영성 훈련을 강화해야 한다.
영성 훈련은 실제적이어야 한다. 영성 훈련은 내적 훈련과 외적 훈련 그리고 공동 훈련으로 이루어진다. 내적 훈련은 말씀과 기도를 내면화하는 훈련이고, 외적 훈련은 섬김과 순종에 관한 훈련이며, 공동 훈련은 고백과 예배와 찬송에 관한 훈련이다. 영성 훈련은 매일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그리고 수평적으로는 교사나 부모와 관계를 맺게 된다. 따라서 지속적인 훈련은 엄청난 결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6. 무수히 많은 새생명을 잉태시킨 게절학기 교육을 새롭게 하자.
계절학기 교육은 지금까지 교회학교를 지탱해온 중요한 신앙 훈련의 장이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한 여름 또는 겨울의 교육'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회심의 교육 현장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식상한 모습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현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역시 세상의 변화에 있다. 교회의 계절학기 교육이 학생들이 너무 좋아서 신나게 참여할 수 있을 만큼 신선한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름이나 겨울 방학은 특별한 교육 기회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시대에 맞는 교육의 제공이다. 신나고 재미있으면서도 열정적이고 영감 있는 교육이 제공된다면 학생들은 언제든지 그들의 시간을 교회에 투자하게 될 것이다.

7. 세상의 문화를 능가하는 창조적인 문화 교육과 축제를 실시하자.
여름 교육이 끝나고 가을이 오기까지 교회학교는 영적 공백 상태를 겪는다. 여름 교육의 결과로 더 좋아져야 할 교회학교가 오히려 침체기를 겪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학생들이 시골이나 휴가를 다녀오면서 신앙적으로 느슨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창조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여름 교육 이후를 문화 축제의 기간을 선포하여 추수감사절까지 다양한 문화 교육과 축제를 실시하는 것이다. 교회에는 문화가 없는가? 사회의 기류에 편승한 세속문화 이상의 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창조적인 문화를 만들 수는 없는가? 등의 문제를 고민하면서 구체적인 대안을 학생들과 더불어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8. 멀티미디어를 통한 교회교육을 준비하자.
미래학자들에 의하면 21세기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될 것이라고 한다. 컴퓨터의 발달로 재택 수업이나 재택 예배라는 새로운 형태의 생활양식이 만연할 것이다. 기존의 조직 교회는 쇠퇴하게 되고 새로운 형태의 교회가 생겨날 것이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그대로 교회교육에 대한 내적인 도전이 되어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교회학교의 틀을 초월하여 적극적으로 새로운 환경에 대처해야 한다. 먼저는 교재 중심의 교육을 상호 만남의 교육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공간도 막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바꾸어야 하며, 교회의 공동체교육을 폭넓게 구성해야 한다. 교사는 더 이상 전달자가 아니라 학생들의 생활 세계를 자극하는 자요, 큰 도전의 세계로 안내하는 자며, 낙담과 좌절이 있는 곳에서 격려하고 지원하는 자로서의 역할을 준비해야 한다.

9. 절기교육을 통하여 체험과 봉사와 섬김이 이루어지도록 하자.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의 절기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절기가 설날이나 추석만큼 우리에게 절실하지 못한 이유는 절기가 우리의 생활과 밀접히 관련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절기와 생활의 관계를 잘 연구하여 생기 있고 활기찬 프로그램을 계획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사순절과 부활절의 기간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돌아보는 프로그램을 준비하면, 개인의 경건생활 뿐만 아니라 금식 등을 통하여 모아진 헌금이나 헌물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10. 지속적인 평가와 새로운 기획으로 역동적인 교회학교를 만들자.
교회교육은 삶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학습자나 학습의 내적, 외적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해야 한다. 이는 구태의연한 교육은 아무리 좋은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라 할 지라도 과감하게 포기하고 새롭게 계획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속적인 평가는 늘 새로운 교회학교를 만드는데 꼭 필요하다. 평가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관찰과 대화 그리고 설문 등이다. 그러나 사회 과학적인 평가도구를 이용하여 전문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 자신을 돌아보면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기 때문이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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