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0 0 8 학 년 도
목회학 석사 학위 논문
청년을 위한 예배 형식에 관한 연구
퍼시픽 신학대학교 대학원
Pbcific Theological Seminary
2008년 5월
유 활 석
Yu, Hwal Seok
목차 (Index)
Ⅰ. 서론
1. 연구 동기와 목적
2. 연구 방법과 범위
Ⅱ. 예배의 일반적 고찰
1. 예배의 본질
2. 예배의 요소
Ⅲ. 예배 모형의 시대적 변화 과정
1. 구약시대의 예배
1)족장시대
2)율법시대
3)이스라엘 왕국시대의 예배
4)회당시대의 예배
2. 신약시대의 예배
1) 초대교회시대의 예배
2) 중세교회시대의 예배
3) 종교개혁시대의 예배
4) 종교개혁시대 이후의 예배
Ⅳ. 한국 개신교 예배의 역사
1. 역사적 배경
1) 영국 청교도들과 미국 교회의 예배
2) 청교도적 개혁주의 예배의 한국 전래
2. 개신교 예배의 특징과 문제점
3. 한국교회 예배의 문제점
Ⅴ. 현재 나타난 새로운 예배의 흐름들
1. 새로운 예배의 요소들
1) 찬양
2) 영화
3) 단막극
4) 간증
5) 좌담회
2. 새로운 예배의 흐름들
1) 교회 일치 운동에 기여한 예배(The Covergence Movement)
2) 은사 중심의 예배(Charismatic Worship)
3) 경배와 찬양 예배 운동(praise & Worship Movement)
4) 구도자 예배(Seeker Sensitive Worship)
Ⅵ. 현대 사회의 청년의 특성
1. 일반적 청년기의 정의
2. 한국 청년의 형성 배경
3. 현대의 한국 청년의 특성
4. 한국에서의 청년 사역의 상황
5. 앞으로의 청년 사역의 방향
Ⅶ. 청년을 위한 대안적인 예배의 형태에 관한 제안 - 파티 예배
1. 파티의 정의
2. 현대의 파티의 의미
3.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파티
1) 성경에서 언급된 파티의 종류
2)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파티
3) 파티적인 예배에 대한 제언
Ⅷ. 결론
Ⅸ. 참고문헌
Ⅰ. 서론
1. 연구 동기와 목적
예배는 기독교의 활동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단체적으로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류와 경배의 의식을 체험할 수 있는 활동이자 그리스도인의 주체성을 표현하는 행위이기도하다. 또한 불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만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모임이다.
구약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께 대한 경배의 제사 의식은 신약으로 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인하여 그 외형적 형식이 실제적인 인간의 삶 속에 적용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그러한 외형적 형식에 집착하게 되고 조직화, 거대화된 외형적 틀 속에서의 예배를 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루터가 구교에서 분리되어 나온 종교개혁이후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예배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개신교의 노력은 계속되어 왔으나, 현재에 와서는 고정관념의 한계와 관습으로 정체가 되고 있다.
또한, 급변하는 사회에 따라 세대 간의 격차로 인한 예배에 대한 여러 계층 간의 인식 또한 달라지고 있다. 현재 한국 사회는 급속한 산업화와 정보화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로인해 특히 세대 간의 격차가 심화 되고 양극화됨으로써 서로에 대한 이해가 매우 어려운 상태이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척박한 시대에 기독교를 개척하고 일궈온 시대의 기성그리스도인들과 이미 기독교문화로 풍요로워진 시대를 살고 있는 새로운 세대의 그리스도인들 간의 예배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점점 더 깊어져 가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따라 개신교에서는 예배에 대한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기성그리스도인과 새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개혁적이고 자유로운 예배에 대하여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각 교회의 특성에 따라 여러 가지 예배의 형태를 가지고 계발하여 더욱 복음주의적이고 개혁적인 예배를 위해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이 더욱 성경적이고 진리에 맞는 예배의 형태인지 검증되지 않은 채로 여러 가지 예배의 방식이 실행되고 있는 것이 현 기독교의 현실이다. 과연 현 세대의 특성을 무시한 채 전통적인 예배의 형식을 고수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예배의 전통과 경건함을 무시한 채 세대적인 문화의 입맛에 맞게 바꾸는 것이 옳은 것 인지 예배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여 올바른 예배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란 어떤 것이고, 급변하는 젊은 세대를 위하여 어떤 형태의 예배가 가능한지 연구해보고자 한다.
2. 연구 방법과 범위
본 연구 논문에서 특별히 청년을 위한 예배로 범위를 국한 시킨 것은, 예배란 사람이 마음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하나의 통로적인 역할로써 정의할 때, 그 형식과 분위기는 참여하는 사람의 수준과 사고방식에 따라 동일한 것이라도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를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시대의 청년들이 기존의 예배 형식을 어떻게 느끼는지, 그들을 위한 예배의 형식은 어떤 것이 있을지 연구해 보고자 한다.
먼저 성경에서 구약시대로부터 시작된 예배의식과 신약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의 예배에 대한 가르침을 고찰하여 예배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 연구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역사적인 고찰을 통하여 시대적인 배경에 의한 예배의 형태를 연구하여 역사적으로 어떻게 예배의 형식이 변화하였는지 알아보고, 더 나아가 한국에서 기독교의 발생 배경과 발전 과정을 통하여 현재 한국의 기독교 신앙과 예배에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현재 고착화된 개신교 예배의 형태에 대해 알아보고, 문제점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또한 현재 어떤 새로운 예배의 형식들이 활용되고 있는지 알아보고, 각 예배의 형식의 특성과 의미에 대해 연구해보고, 성경적인 정당성을 입증해볼 것이다.
다음으로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를 분석해보고, 기성세대와 어느 부분이, 왜 다른지 알아보고 그들 중심으로 예배의 형식을 정립해 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실제적으로 적용 가능한 청년을 위한 예배의 형태가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는지 연구해보고, 적용가능성과 성경적 정당성을 입증하려 한다.
이러한 연구과정을 통하여 현 시대 청년들의 복음화와 더욱 적극적인 예배로의 참여를 도울 수 있기를 바란다.
Ⅱ. 예배의 일반적 고찰
1. 예배의 본질
예배는 단순히 인간이 신에게 기쁨과 경배를 드리는 종교적인 의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예배는 단순한 의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원리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기독교의 예배는 먼저 우리들이 하나님의 인격과 그의 사역을 찬양하고 찬송하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다. 그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예배는 그의 구속 사역 때문에 성부의 영원한 찬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즉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 중심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공중 예배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가시적, 유형적 표징들을 통하여 구속 사역을 선포하고 실행에 옮기는 행위이다. 즉 예배는 교회적이다. 예배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한 행위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드린 예배 자체이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교회가 구속함을 받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행위들을 반복하는 것은 당연히 교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는 그로 말미암아 교회의 구원이 완성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행위들을 선포하고, 반복하고, 재반복하며, 재창조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인격적 신앙의 표현인 육체적(물질적) 행위들을 통해 세상에 봉사할 준비를 갖춘다.
그런데 예배를 여러 예배 신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좀 더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면, 예배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다.이들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예배는 먼저 하나님과 예배자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은혜의 계약에 기초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로 한 하나님과 사람, 곧 예배자와의 교제 혹은 만남”이다. 즉 하나님과의 만남이요, 인격적인 교제를 의미하며, 초대교회에서부터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섬겨주신 봉사와 인간이 그 하나님을 위하여 섬기는 봉사적인 행위로 이해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먼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섬겨주신 그 사랑의 봉사에 근거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감사의 찬양이요, 사랑의 행위요, 봉사인 것이다.
두 번째로 기독교 예배란 하나님과 그 백성간의 대화이다. 그런데 이 대화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이고, 대화의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있다. 계시와 응답을 통한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예배의 정의는 “기독교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보여 주신 하나님의 계시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 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의 영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응답하는 인간의 행위” 라고 설명한 폴 훈의 말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 있다.
세 번째로 예배는 하나님과 예배자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봉사이다. 예배는 먼저 예배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봉사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섭리 가운데 예배자들을 예배의 자리로 부르신다. 하나님은 예배자에게 베풀어 주시고 용서와 지혜와 능력과 말씀과 만족을 주신다. 동시에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자들의 봉사이다. 예배자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고, 신앙고백을 드리고, 찬송을 드리고, 헌신을 드린다.
네 번째로 예배는 영적이고 극적인 축제이다. 즉 하나님의 참된 가치가 인간의 생활 속에서 나타나게 될 때 그 최고의 가치를 가지신 하나님의 존전 앞에 서서 이루어지는 축제라 할 수 있다. 예배는 본질적으로 역사 안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축제이다.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로 들어가 그의 위대하심과 높으심을 선포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축제는 기쁨과 희열과 만족과 환희요, 긍정적이고 밝은 미래에 대한 약속이다.
마지막으로 예배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체험적이다. 지글러는 “기독교의 예배는 정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것은 다만 경험될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예배의 체험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예배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표현들은 내적 경험의 외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현대 예배신학자들의 예배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면 두 가지 뚜렷한 특징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예배가 기독론적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점이며, 응답과 만남이라는 용어가 두드러지게 사용되고 있는 점이다. 즉 예배란 예수님의 사역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응답이 만나는 현장이다.
2. 예배의 요소
좋은 예배는 회중이 능동적이고 온전하게 참여하는 예배이다. 그러면서 부활의 기쁨과 천국의 대망이 있는 예배여야 한다. 이러한 예배가 될 때에 예배가 회중들에게 감동과 감격을 주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며, 나아가 한국 교회와 세계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예배가 될 수 있다. 예배를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중요한 점은 예배를 구성하고 있는 예배의 요소, 그 요소의 배열인 예배 순서, 그리고 예배의 실제적인 운용이다.
기독교의 역사상 모든 예배는 반드시 그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 형태라고 하는 것이 흔히 우리들이 말하는 예배 순서라는 것이다. 즉 예배의 형태는 어떤 요소들을 어떤 순서로 배열하는 것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한국 교회는 “예배의 부름”이나 “묵도”로 시작하고“축도”로 마친다. 이것이 예배 순서이며, 이것을 표방하는 것이 예배의 형태이다.
예배는 마음과 뜻과 정성이 모아지는 총체적인 표현인데 누구나 수용할 수 없는 값진 내용이 없다면 크나큰 결례이며, 충실치 못한 자세라고 볼 수밖에 없다. 또한 집례자와 회중은 예배라는 이름 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내용을 순서에 담아내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예배의 변화를 위해서는 먼저 예배의 형식이 변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에 꼭 필요한 요소가 무엇이고, 그 순서는 어떠한가를 파악해야 한다. 2천년 기독교 예배의 역사 가운데서 많은 예배 요소가 생겨났고 또 그 중에 많은 것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기존의 예배 순서는 초대 교회부터 있었던 것도 있지만 또 어떤 것은 훨씬 우대인 19세기에 생겨난 것도 있다. 또 어떤 예배 요소는 특정 교단의 예배에 채택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교단에서는 배제되기도 한다.
예배의 모든 순서는 논리적으로 배열이 되어야 한다.
예배의 요소를 선정하고 그것을 배열하면서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임해야 하는 지에 대하여 정확하게 이해를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초대교회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예배 형식의 형성과정은 ‘다음과 같다’:
처음 3세기 |
4-6세기 |
중세기 |
말씀의 예배 인사(Sursum Corda) |
입당송(introit) 연도(Kyrie response) 영광송(Gloria in excelsis) 특별기도(Collect) |
시편 43 고백의 기도 |
구약봉독(시편찬송) 서신서 낭독(시편찬송) 복음서 낭독 설교 |
층계송, 알렐루야, 영창속창(Sequence) | |
(입문자들의 폐회) (신자들의 기도) |
|
니케아 신조 |
식탁의 예배 평화의 입맞춤 봉헌 |
성물에 대한 기도 예비기원, 삼성송 중보기도 주기도 평화의 입맞춤 |
봉헌기도와 그 의식 |
성만찬 기도 |
|
“하나님의 어린양” 혼합식 사제의 기도: “주님 저는 무가치한 자입니다.” |
성체분할 |
성만찬 송 |
묵상기도 세정식 |
성체분배 |
주의 만찬 후 기도 축도와 폐회 |
마지막 복음 끝맺는 기도 |
예배의 요소 중에는 고대에서 생성되어 현대까지 그 연결점을 찾고 있지만 어떤 요소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정도인 요소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예배를 구성하고 변화를 주는 문제에 있어서 무조건적인 개혁과 갱신이 아니라 건강한 토대 위에 예배의 갱신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재침례파 영향을 받은 교단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개신교회의 교회들은 지금도 예배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발생하는 대화의 현장으로 이해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배 순서는 단순히 인간의사 표현이나 흥미를 위한 것으로 오용이 될 수 없다. 예배의 순서에는 이런 신학이 늘 고려가 되어야 한다.
첫째, 기독교 예배는 성경에 근거한 예배가 되어야 한다. 예배는 개인적인 창작이나 조작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에 그 근거를 두어야 한다. 신약 속에 나타난 말씀과 성만찬, 그리고 기도와 송영 같은 소중한 예배의 부분은 회복이 되어야 한다.
둘째, 예배의 중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섬긴다는 것은 단순한 창조의 역사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인식되어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바로 예배의 중심이다. 예수님을 영접한 무리들은 예수님의 오심, 생애, 교훈, 수난,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을 이해하는 가운데 새로운 차원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셋째, 예배의 내용은 언제나 신학과 조화를 수반해야 한다. 예배가 신학적인 차원의 결함을 지녀서는 안 된다. 예배의 요소나 순서의 배열에 있어서 무신학적이거나 비신학적인 요소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넷째, 예배는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언제나 유지해야 한다. 삶과 무관한 예배가 아니라 예배를 통해 새로운 활력을 공급받고 삶의 가치성과 방향성을 제시받는 예배로서의 가치성을 가져야 되는 것이다.
개신교 예배 현장에서 발생하는 가장 비평적인 요소는 구교의 성도들과는 달리 자신이 드리는 예배의 순서에 깊은 이해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음 순서를 설교를 듣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한국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예배를 말씀만 들어도 되는 것으로 여기고 시간에 늦어도 설교 시간 안에 들어오면 되는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를 부인할 수 없는 실정이다.
Ⅲ. 예배 모형의 시대적 변화 과정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성서에 근거되어 있다. 성서에는 공중예배의 형태와 실행의 원리가 있다고 믿으며 그러므로 예배규범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은 성서를 상고한다.
본 절에서는 성서 안에서 발견되는 예배의 원리와 근거를 고찰하고자 한다.
1. 구약시대의 예배
구약의 이스라엘을 한마디로 특징짓는다면 그들은 예배 공동체였다. 그들의 생활에 있어서 신앙과 예배는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이스라엘을 유기적 공동체로 묶었던 것은 그들의 공통된 신앙이었고 이 신앙은 예배로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예배는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출발되면 그 기초는 역사적 기념과 영적인 사귐”에 놓여있다. 특별히 출애굽의 구원의 역사는 속박과 압박으로부터의 해방이었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데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1) 족장시대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예배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예배는 농업과 목축이라는 생업에 상응한 제물이 예배의 주요 가시적 내용으로 등장함으로 구약시대의 예배가 이미 제물을 전제한 예배로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하지만 성경기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관심은 제물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배드리는 자의 자세, 즉 예배드리는 자의 믿음을 원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서 다른 종교의 제사와는 분명한 구별이 있음을 나타내 준다.
족장시대의 예배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족장은 예언자, 제사장, 왕으로 불렸는데, 공적인 예배에서는 족장들이 사회를 하였고 예배를 집행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가족과 예배를 드린 곳은 가정이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는 옛날 이스라엘의 족장과 그 가족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새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옛날 이스라엘의 족장은 가족과 더불어 이동할 때 어디든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아브라함이 가족과 이동하면서 제단을 쌓은 것은 성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아브람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아브람을 찾으셨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셨고, 나타나신 곳에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예배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원리를 분명하게 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오시고 예배하는 자의 마음속에 임재 하신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예배는 외식이고 거짓이다. 인간만이 모이는 하나의 집단일 뿐이다. 아브라함 시대, 즉 족장 시대에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의 제단에는 희생 제물이 그 중심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족장시대 제사의 공통점은 제물을 피 흘려 죽게 하며, 불태워 드리는 번제의 행사로서 이루어 졌던 예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와 약속의 성취에 대한 감사의 의미가 전제 되면서, 제사행위는 곧 하나님과의 만남과 교통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율법시대
율법 시대에도 족장시대의 가족적 예배가 존속하기는 했다. 그러나 율법 시대의 공적 예배는 성전을 중심으로 거행되었다.
이때부터는 예배가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명을 따라 규정되며 예배가 곧 속죄와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기능으로 이해되었다. 이때의 예배는 성막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성막은 이스라엘 민족의 이동과 함께 그 진퇴를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으로서 다섯 가지 제사가 제정되었는데 그 종류는 번제, 소제, 속건제, 속죄제, 화목제이다. 또한 이러한 제사를 수행함에 있어서 직분을 수행하는 자를 세우게 되는데 그것이 제사장을 세우신 일이다. 최초의 제사장으로서 아론이 세워졌다.
율법시대의 예배는 계명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며 제사행위를 통하여 속죄하며 하나님과 화목하며 교통하는 것이 그 중심이었다. 특히, 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함께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기까지의 임시적이면서도 예배 생활의 근원이 율례로 제시되었고, 그 계명에 따라 예배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3)이스라엘 왕국시대의 예배
구약시대의 예배에 있어서 온전한 예배의 틀을 잡아가게 된 것은 성전으로 예배의 기능이 집중되면서부터이다. 성전은 이스라엘에 있어 하나님이 거하시는 임재의 상징이자 백성들이 나아와 기도하며 제사하는 고정된 장소였다. 이런 장소의 고착화는 유랑 민족에서 농경문화로의 정착이라는 사회적 변화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신앙적인 맥락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거한다는 약속의 성취를 반영하고 있다.
성전건축의 의미는 구원의 하나님이 이 집에 거주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그리고 모세의 광야예배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주어진 언약궤는 이제 예루살렘 성전에 자리를 잡게 된다. 성전예배에 있어서 3대 절기 예배는 이스라엘 민족의 중요한 축제로서의 예배의 성격을 가진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 그것인데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 기념일이며, 오순절은 유월절의 50일째 되는 날로서 역사적으로는 여호수아에 의하여 가나안에 정착된 후 처음으로 농사를 짓게 되었고, 첫 예배를 드리는 추수 감사의 날로 기념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초막절은 출애굽 당시 조상들의 광야생활의 고난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다.
성전예배는 특히 시편의 노래와 찬양이 함께 있었고 성가대와 악기들이 사용되었는데, 다윗왕 시대에 악기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4000명의 찬양대가 있었다(대상23:5).
이스라엘 예배와 기독교 예배와의 공통점을 든다면 첫째로 역사속에 행하신 하나님의 행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이며, 둘째로 예배의 본질상 협력적인 요소가 강조된다.
4)회당시대의 예배
주전 3세기 경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회당의 원래의 뜻은 헬라어로 ‘모이는 곳’이라는 뜻인데, 교육기관으로서 처음 세워진 것이다.
유대교의 회당예배가 언제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실한 증거가 나타나 있지 않다. 분명한 것은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의 침략으로 주전 722년에 멸망당하고 남 유다 역시 신바벨로니아에 의해 주전 586년 멸망당함으로 정상적인 성전 예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역사적 정황이 회당예배의 발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러 가지 학설 중 가장 설득력 있는 이론이 페투코브스키의 주장으로, 먼저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이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이 학개 선지자의 설득으로 제 2예루살렘 성전을 건립하게 되고 이때에 제사장의 수가 너무 많아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 24곳의 미쉬마도트(mischmadot)에 예배를 드리게 했다. 하지만 희생제물이 드려지는 것은 예루살렘에 국한했다. 이 때 매일 예배를 드렸으며 이것이 후에 회당이 생겨나고 안식을 중심한 예배가 이루어지는 근거가 되었다는 것이다.
회당 출현과 함께 유대종교의 예배는 제물중심에서 기도중심의 예배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회당예배는 역사적으로 학개 선지자의 노력으로 제2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면서 제물의 예배는 적어도 주후 70년 경 로마의 티토 장군에 의한 성전 파괴가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된 것으로 본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물예배의 형식화를 경계하는 의미와 더불어 예배의 중심이 제물예배를 벗어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도 구체적인 제물로 바쳐진 짐승의 피 대신에 감사의 제사를 요구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사1:1-17; 렘7:21-28; 호6:6; 8:13; 암5:21; 미6:6-8; 스7:5-7; 시50:7-15). 그러므로 올바른 예배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과 행함으로 연관된 것으로 이해한다.
결국 이 회당은 전환기의 예배장소로서 예루살렘의 함락과 솔로몬 성전의 파괴, 예배의 중심지로부터 포로로 떠난 오랜 기간, 예언 활동의 쇠퇴, 그리고 성경에 대한 가속적인 강조로 나타난 것이다.
회당예배는 성전예배와 여러 가지 면에서 달랐는데, 첫째 회당예배는 덜 형식적이었고, 둘째 회당에서는 교훈적 요소가 첫째였고, 셋째 제사장의 기능은 뚜렷하지 못하였고, 넷째 교사는 회당에서 중심인물이었고, 다섯째 평신도의 참여가 뚜렷해졌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배의 차이점은 예배에 의미를 주고 전달하는 역사적인 사건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즉 구약 성경에 나타난 예배는 출애굽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생활, 죽음, 부활에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구약성경의 요소가 기독교 예배의 발전에 영향을 미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시내산 사건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반적인 구조를 만들었다. 둘째로, 성전은 하나님의 현존을 강조하고 공간과 의식과 목회자를 신성시하도록 했다. 셋째로, 회당은 신앙 고백, 기도, 그리고 말씀을 강조했다. 구약의 예배를 물리적인 것으로, 신약의 예배를 영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구약의 예배와 신약의 예배는 모두 영적인 면과 물리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구약의 예배와 신약의 예배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의해 전달되는 것에 있다.
결론적으로 유대종교의 예배는 결코 기독교의 예배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예배는 구약의 역사적 과정을 거치게 되는 하나님의 계시의 점진적인 발전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예배로 나타난다. 그 때문에 특히 유대 종교의 회당예배와는 깊은 역사적 연관성을 지닌다. 유대종교의 예배가 기본적인 형식으로서 감사와 속죄와 화목에 있다면, 회당예배는 이 세 가지 신학적인 의미를 토라와 기도로 새롭게 발전시켰다.
2.신약시대의 예배
신약 시대의 예배를 이해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교훈과 그분의 관심이 어떠했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죄로 인해 죽어 간 생명들을 구원시켜야 한다는 특별한 사명감 속에서 하나님 아들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당시의 종교적 상태와 내용들 및 예배의 제도들을 판단하였다. 그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어떤 의식적인 제도보다는 심령에 부끄러움이 없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하는 회개 운동을 전개했다. 백성들의 내면적 각성과 실천을 추구하는 가운데서 예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하는 예배”를 강조했다.
그러나 그가 성전의 예배를 부정하거나 회당의 예배를 거부했던 일은 없었다. 오히려 성전 예배를 부패시키는 무리들을 향하여 채찍을 든 사건(요 2:12-25)을 비롯해서 성전 예배의 여러 절기를 지키는 일들(요 5장, 7장, 8장), 그리고 그의 생애의 절정이었던 수난의 주간을 대부분 성전에서 보내신 기록 등은 예수님의 성전 예배에 대한 관심을 충분히 이해하게 해준다. 그리고 당시에 여러 곳에 산재해 있던 회당을 규칙적으로 둘러보시며 말씀을 가르친 일이 복음서에 자주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예배의 단절자가 아니라 완성자라는 사실이다. 그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주제였던 “하나님을 사랑하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언약된 계명으로 예배중심의 종교성과 실천 중심의 윤리성을 계속 가르쳤다.
끝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에 의하여 새롭게 제정된 성례전이다. 세례와 성찬을 지칭하는 이 성례전은 구약의 성전예배나 회당 예배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의미와 내용을 지닌 예배 의식이다. 이 의식은 기독교 예배의 이천 년 역사에 변함없이 지켜지는 예전이 되었고 예배의 구심점으로 지금껏 지켜 오고 있다.
1) 초대교회시대의 예배
신약 시대를 거쳐 주후 200년까지에 해당하는 초기 교회에서 보여진 예배의 관심과 그 형태에 대한 기록은 예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예수님의 등장과 함께 신약 시대의 예배는 새로운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서술한 바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토록 심한 반대에 직면하여 급기야 십자가의 고난까지 받아야 했을까? 한마디로 예수님이 유대의 전통 사회에 도전하는 새로운 세계를 선포했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특별히 예배의 측면에서 볼 때 그분은 유대교의 제반 예전 활동(ritual act)의 종식을 선언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성전과 회당 예배의 모든 뿌리를 자신의 사건(Christ-event)에 근거하도록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은 그분이 제정한 성찬성례전에서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그분의 활동은 이러한 기본적인 사상을 심어주는 것으로 끝났지 결코 예배의 정확한 형태나 내용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예배 정신과 성찬성례전의 정기적인 거행은 당시의 유대교와 로마의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새롭게 노출된 예배의 실행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는 예배의 내용이나 형태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연히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에 집중적인 노력과 정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배를 통하여 그들의 생명을 결속하였고, 그 가운데서도 주님의 명령을 따라 가졌던 성찬 속에서 늘 새로운 신앙의 활력소를 찾았다는 점이다. 이런 과정을 지내오면서 자연적으로 그들의 예배 내용의 전부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되었으며, 그가 구약에 있는 모든 예언의 성취이심을 믿는 신앙이 굳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예배의 모든 핵심적 순서도 말씀과 성찬에 집중되었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새로운 사명을 재확인 하는데 역점을 둔 예배의 분위기를 형성해 갔다.
2) 중세교회시대의 예배
중세기의 예배를 간단히 표현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시간적으로 보더라도 1000여년 정도의 긴 시간이고, 공간적으로도 후기에 동방과 서방으로 나뉘어져 간단히 정리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기독교의 역사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온 사건은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재위 306-337)가 313년 밀라노 칙령을 공포하여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게 되면서부터인데, 이때부터 기독교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 놀라운 사건으로 인해 지금껏 개인 가정이나 동굴들(catacombs)을 찾아 이십 명 또는 삼십 명씩 분산되어 소집단으로 모이던 기독교 무리들이 지상에서 햇빛을 보게 되었다. 또한 예상 밖으로 많았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대형 예배당들을 건축하는 일이 불가피해졌고, 교회의 형태와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콘스탄틴 대제가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에 대성전을 건축함으로써 입증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다수의 무리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의 집전을 위하여 성직자의 위치와 권위 역시 점차 확장되어갔다.
이와 같이 급격하게 변천된 예배의 조건들은 외적인 형식과 의식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380년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부작용이 서서히 싹트기 시작하였다. 우선적으로 예배 현장에 신비적 요소와 미신적 형태들이 발생되었다. 그리고 인위적인 정교한 형식은 수많은 기도문을 비롯하여 교독과 교창을 양산하게 되었다. 특히 주님의 만찬은 미사에 있어 극적인 신비의 현상으로 그릇 이해되는 결과를 가져와 구약의 제사제도로 되돌아가는 느낌마저 갖게 한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마리아 숭배를 비롯하여 수많은 성자 및 유물 숭배사상이 나타나 초대 교회 시대에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었던 상태로까지 비약해 버렸다.
이토록 비약된 의식 위주의 교회는 드디어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간의 예배 양식에 대한 심각한 대립을 야기했으며, 그 끊임없던 논쟁의 결말은 1054년 동방과 서방 교회의 영원한 분열이라는 불행을 남겼다. 이렇게 분열된 동방 교회는 그리스와 제정 러시아를 중심으로 존속하였고, 서방 교회는 로마 교황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 교황의 절대 권위 아래 있던 서방 교회는 16세기경에 예배의식에 심각한 문제점을 노정시키게 된다. 예를 들면 성찬에서 화체설을 주장하여 미신과 뒤섞인 인상을 주었고, 예배자의 참석은 등한히 여기게 되었다. 또한 성경과 모든 예전은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기록되고 집례되어 회중은 참여자라기보다는 성직자에 의하여 연출된 하나의 연극을 구경하는 방관자로 퇴보되는 현상을 가져왔다. 특별히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던 말씀의 증거는 고정된 책자에 의존하여 생명력이 없는 단순한 기록을 읽는 데 그치게 되었다.
이처럼 교회의 본래의 모습을 예배 가운데서 상실하고 만 중세의 교회는 결국 면죄부의 판매와 같은 계속되는 모순을 범하여 결국 위태한 지경에 빠져갔다. 이 모순들이 그 시대의 역사를 암흑기로 몰고 가게 되자 드디어 광명의 새 아침을 추구하는 참신한 개혁의 일꾼들이 속출했다.
3) 종교개혁시대의 예배
종교개혁자들의 예배는 중세 교회의 사라진 역동성을 회복하고 말씀과 성찬이 함께 있는 예배를 회복시키려 하는데, 하나의 주안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초기 교회 예배 전통을 따라 말씀을 재발견하고 사고백 대신 공고백 기도를 예배중에 넣었고 미사 대신 성찬예식을 예배가운데 넣음으로 말씀과 성례전의 두 기둥을 세우고 찬양과 고백과 말씀과 헌신의 4막으로 된 예배를 하나님께 드렸다.
개혁자들이 중세교회의 고정된 예배의식을 버리고 말씀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는 기본적으로 일치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중세의 예배의식을 버리고, 어떤 형태의 예배의식을 가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개혁자들 간에도 일치하지 않았다. 개혁자들의 예배의식에 대한 견해는 크게 3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가장 보수적인 형태로서 루터의 개혁이며, 후에 성공회의 예배가 그 본을 따랐다. 루터는 사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나와서 새로운 교회를 만들 생각은 없었고, 단지 교회를 개혁할 마음만을 지녔었다. 그래서 그의 예배의식의 많은 부분은 카톨릭 예배의 많은 부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예배형식에 있어서 비교적 융통성있는 자세를 지녔는데, 성서에 금지되어 있지 않고, 교회에 도움이 된다고 결정한다면 예배요소를 허용하는 원칙을 지녔다. 예배에 대한 그의 특별한 공헌중의 하나는 찬송가를 좀 더 친밀하게 느끼고 부르도록 해주고, 자국어 성경을 번역하여 제공함으로써 회중들이 예배에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점이다. 특히 마틴 루터의 노래들은 예배에서 그레고리안 송가나 화성 합창곡만을 들어왔던 사람들에게는 술집을 연상시키는 충격적인 음악이었다.
둘째는 가장 급진적인 형태로서 쯔빙글리의 개혁이며, 재침례교, 퀘이커교, 청교도, 침례교, 회중교, 기타 자유교회의 예배 형태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모든 의식을 이교적인 것으로 거부하였고, 과거의 전승과 예배의식을 제거함에 있어서 교회에 유익을 끼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까지라도 다 제거하였다. 그는 미사를 예배의 규범으로 간주하지 아니하였고, 주님의 만찬은 본래 상징적인 것이라 믿었고 그런 이유에서 카톨릭의 화체설이나 루터의 공재설을 완전히 배격하였다. 그리고 성만찬은 1년에 4회 정도이면 충분하다고 믿었다. 그는 생각하기를 신앙은 물질적 통로나 외적인 수단과는 별도로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말씀을 읽고 전파하는데 표현된 말의 상징을 제외하고는, 예배에서의 모든 상징을 실제로 배격하였고 공중예배에서의 모든 음악을 철폐하고, 시편과 성가의 교송적 낭송으로 대치하였다.
셋째로는 두 형태의 중간에 해당되는 형태라 볼 수 있는데, 칼빈의 견해를 따른 것이며, 장로교 또는 개혁교회의 예배 형태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은 개혁신학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이며, 특별히 후 세대를 위한 예배의 예식서를 만드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루터가 로마의 예배식에서 떠난 것보다 더 멀리 떠나는 것이 목적이었다. 루터가 성서에서 금하지 않은 것은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한 데 반하여, 칼빈은 성서에서 가르친 바 없는 것은 예배에 수용될 수 없다는 입장을 지녔다. 이처럼 그는 중세 예배의 예식주의를 배격하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쯔빙글리의 극단적인 예배형태에 결여 되어 있는 것 즉 거룩함과 질서를 보존하였고, 조직화된 예배 형태와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통일성과 균형미를 잘 갖춘 칼빈의 예배 의식은 프랑스, 스위스, 남부 독일, 홀란드, 덴마크 및 그 밖의 지방에서 예배의 규범이 되었다. 죤 녹스(John Knox)의 [일반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와 영국 장로 교회의 [공중 예배 지침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칼빈의 영향력은 스코틀랜드까지 확대되었다. 칼빈의 예배의식은 수세기 동안 미국의 장로교회를 포함한 개혁교회에 계속 영향을 끼쳐왔다.
4) 종교개혁시대 이후의 예배
기독교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수 없이 많은 예배의 형태가 존재해 왔음을 볼 수 있다. 그중 본 절에서는 로버트 웨버의 책“예배의 어제와 오늘(Worship Old & New)"에서 제시한 그의 이론인 3가지 부류의 예배경향에 성결 및 오순절 운동을 더하여 4가지 경향의 예배로 나누어 고찰해보고자 한다.
첫째로 의식에 매이지 않는 예배는 영국의 청교도들 가운데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이러한 예배의 흐름은 초기 침례교, 회중교회, 퀘이커파 등의 예배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초기의 침례교도인 죤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신약 예배란 원래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신령한 행동이라고 굳게 믿는다. 또한 기도서를 낭독하는 것은 비록 그것이 합법적인 교회의 행동이라 하더라도 신령한 (영적인) 예배의 한 부분이 아니며, 오히려 죄된 인간이 만들어낸 부산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즉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기도란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 마음속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라야 하며, 이런 의미에서 성문화된 기도서를 이용하여 기도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이 같은 견해를 입증하기 위하여 다름과 같은 6가지 주장을 내세웠다.
1)성문화된 기도서는 기도하는 사람의 사고와 말을 박탈한다.
2)고정된 형식은 특정한 회중의 다양한 필요를 만족시켜주지 못한다.
3)고정된 형식은 예배의식서(Liturgy)를 성경과 동일시하기에 우상숭배와
같은 것이다.
4)고정된 형식은 타성과 무관심을 유발시킨다.
5)고정된 형식을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박해이다.
6)고정된 기도는 성부께 합당하게 나아가는 길을 오히려 방해한다.
이러한 반 예전적 예배의 경향이 가장 강하게 나타난 예배는 퀘이커교도들의 예배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성례와 같은 외부적 도움이나 외적 의식을 강하게 거부하고,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도록 하는데 주된 관심을 두었다. 그들은 또한 모든 의식과 형식은 새 언약에 의해 폐기되었으며,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역사는 신자들이 조용히 그리스도를 섬길 때에 예배 공동체 가운데서 일어나게 된다고 보았다. 이들에게 물세례는 성령 세례에 의해 대치되었고, 성찬은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영접하는 일로 대치된다고 보았다. 결국 이들의 예배는 철저히 의식을 배격하고 내적인 역사를 강조하는 예배였다.
개신교 예배의 두 번째 커다란 경향은 이해를 강조하는 예배의 경향이다. 이러한 예배의 모습은 장로교의 예배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데, 장로교는 예배에서 성경이 차지하는 위치를 매우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후기 웨스트민스터 예배 규칙서에는 인도자와 회중이 함께 교독 방식으로 신약과 구약에서 각각 한 장씩 읽을 것을 규정하고 있다. 장로교회는 성경을 봉독 할 때 주석을 다는 관례를 발전시켰으며, 주해 설교가 교인들의 삶에의 적용이 거의 없이 말씀만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어 왔다.
세 번째로 구령열정과 체험을 강조하는 경향의 예배는 경건주의, 모라비안주의, 그리고 부흥운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경건주의자들은 외적인 헝식에 의존하는 형식주의를 강하게 비난하였다. 특별히 이들은 예배에서 개인의 회심과 그로 인한 예배에서의 하나님의 임재의 체험을 강조하였다. 즉 교회의 객관적이고 집단적인 행위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의 개인적인 체험에 조점을 두며, 예배는 각 개인의 엄격한 윤리적 삶이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모라비안주의 예배의 특색 중의 하나는 그들이 부르는 찬송에 잘 나타나 있다. 그들의 찬송은 그리스도의 체험을 개인적으로 느끼도록 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들의 찬송은 지적인 요소보다는 감정적이고 감각적이며 상상적인 특징을 지녔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끼며, 그를 사모하며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긴밀한 관례를 갖는데 있었다.
구령의 열정이 잘 나타난 예배는 죤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죤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이들을 통해 회심과 개인적 체험의 중요성을 알았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그는 고전적인 개신교 예배 형식에다가 경건주의적인 요소를 적절히 가미하여 복음전도에 귀하게 공헌하는 예배형식을 만들었다. 그가 실시한 예배의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자. 첫째, 새로운 형태의 찬송을 도입하였다. 전통적인 찬송가는 그 내용을 시편과 성경의 본문으로만 한계를 지었다. 그러나 웨슬리가 도입한 찬송은 모라비안 교도들처럼 회심과 구세주에 대한 개인적 체험을 강조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대단히 혁신적인 시도였기 때문에 (교회가 그 자신의 찬송을 직접 쓴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거의 혁명적인 일이었음) 당시 기존 교회들의 따가운 비난을 받았지만, 결국 그로 인해 찬송이 개신교 찬양의 주된 부분이 되는 개신교 찬양의 새 장이 열어지게 된 것이다.그의 동생이며 부흥 운동 찬양에 엄청난 기여를 한 챨스 웨슬리는 개인적 체험을 강조한 찬송을 많이 작곡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둘째, 예배를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 짓도록 하였다. 웨슬리는 예배가 성도들의 전 인격과 관계되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예배란 소그룹의 양육, 금식, 성경 읽기, 성만찬, 공적이고 개인적인 기도를 포함하는 “은총의 수단” 이라는 훈련 용어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배란 공적인 예전과 개인적인 헌신 분 아니라 모든 충만한 의미에서 기독교인의 삶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예배는 회개에로의 부름을 포함한 구원의 전 드라마를 일으키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을 일으키고, 거룩한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모습을 재현하려는 거룩한 도전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셋째, 야외 설교의 도입이다. 야외 집회를 통해서 예배의 주된 요소는 기도, 찬송, 설교를 위주로 하는 단순하면서도 전도 지향적인 독특한 예배 방식으로 발전해 나아갔다. 이러한 예배의 주된 목적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데 있었고, 이러한 목적에 따라 불신자들에게 회심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데 주안점을 두고 기획되었고, 과연 불신자 회심을 위한 탁월한 예배 형태가 되었다. 웨슬리가 이러한 형태의 예배를 시작할 때는 기존 교회에서 그가 설교할 수 있는 자리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복음전하는 기회를 잡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었고, 또한 이러한 예배 형태를 기존 교회의 예배 형태를 대치할 의도도 없었다. 그러나 이 예배의 장점으로 인해 많은 기존 교회의 예배들도 이런 형태를 어느 정도 수용하게 되었다.
네 번째로 성결 운동 및 오순절 계통의 예배가 있다. 근대 오순절 운동은 1906년에 미국 LA의 아주사 거리(Azusa Street)의 부흥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운동 중 예배자들에게 성령의 강한 역사와 이로 인한 방언의 은사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근데 오순절 운동은 19세기의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기에 먼저 성결 운동을 살펴 본 후에 오순절 운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성결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은 실제적인 성결을 추구하였는데, 이것은 죤 웨슬리와 그의 사고 즉 회심의 경험은 하나님 은혜의 두 번째 사역이 뒤따라야 한다는 생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집회에 모여 가르침을 듣고, 노래하고, 두 번째의 은혜 체험을 위하여 강렬하게 기도하였다. 이런 성결 운동은 후에 나사렛 교단, 자유 감리교, 웨슬리안 교회, 기독교인 선교사 연합교회(C & MA)등의 교단이 탄생하는데 기여하게 되었다. 이들은 예배에서 강렬한 종교적 체험을 추구한 교회들로 알려져 있다. 특별히 부흥집회 시에는 자발적인 자유스러움이 그 특징으로 되어 있는데 특별히 성결의 은혜를 체험할 때 함성을 지르곤 하였다.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면서 울고, 소리를 지르고, 큰소리로 신음하며, 때로 심한 경련을 일으키는 모습은 흔한 모습이었다. 20세기 초에 오순절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것은 거의 성결 운동의 경험과 확신에 그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들이 부르는 음악의 내용과 음률 역시 성결 운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오순절 계통의 예배가 어떤 특성을 지니는지 자세히 살펴보자.
첫째, 이들은 음악을 복음 전달의 주된 요소 즉 사람들의 마음 문을 열고 사람들의 믿음을 강화시켜주는 요소로 사용하였다. 이들은 처음부터 복음을 제시하기 위하여 대중문화를 음악에 사용하였다. 이들의 노래는 사람들이 어떻게 믿음을 가지게 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는지를 표현하였다. 또한 악기도 파이프 오르간의 전통을 깨고, 기타, 드럼, 신디사이져 등의 다양한 종류의 악기를 도입하였다.
둘째, 성령 안에서의 기도를 하였다. 오순절 예배의 또 다른 특징은 성령 안에서의 기도 즉 방언이다. 이러한 방언기도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한사람이 방언으로 메시지를 온 회중에게 말하고 사람들이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거기에 해석을 붙이는 것이다. 다른 형태의 방언은 찬양인도자의 지시에 따라 혹은 찬양 후에 자발적으로 회중들이 통성기도를 할 때에 방언기도를 하는 것이다.
셋째, 성령세례를 강조하는 메시지와 회중의 힘을 돋우어주는 예언적 메시지가 많았다. 죤 웨슬리와 성결 운동에서 하나님 은혜의 두 번째 역사를 강조한 전통을 따라 오순절 교회는 성경말씀 중 성령세례의 오순절 경험을 뒷받침하는 구절들을 재해석하여 매우 강조하였다. 이러한 강조는 자연히 회중들로 하여금 성령세례를 체험키 위한 간절한 기도를 하도록 만드는 동기를 제공하였다. 또한 예언의 말씀이 자주 선포되었는데, 예언의 말씀이란 회중들을 강화시키고, 위로해주고, 확신을 주는 간단한 메시지를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예언적 메시지 역시 성도들에게 힘을 주고 더욱 기도하게 만드는 강한 계기를 주었던 것이다.
Ⅳ. 한국 개신교 예배의 역사
1. 역사적 배경
한국 개신교의 예배는 청교도들의 신앙적 전통과 개혁주의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영국 청교도 예배가들과 미국의 예배와 한국교회가 이들 예배와 어떤 경로를 통해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영국 청교도들과 미국 교회의 예배
종교개혁 이후 각 지역에 따라 교회들은 나름대로의 예전을 발전 시켜왔다.
영국의 경우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사망 후에 제임스 1세가 왕위를 상속받는데, 이 때 이미 칼빈의 신학에 정면으로 대치되지 않은 한, 예배 의식과 교회조직을 유지하려던 엘리자베스의 개혁에 불만을 품은 많은 그룹이 청교도란 이름 아래 모여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츠빙글리의 영향이나, 극단적인 재침례파의 영향 아래서 종교개혁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신학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예배 이해는 모든 예전의 형식과 내용을 파괴해 버리는 반 예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영국 국교회를 혐오했다. 그런데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오른 후, 감독제를 옹호하고 재침례파의 영향을 받은 청교도들을 조직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임스의 뒤를 이은 찰스1세도 윌리엄 로드(William Laud)를 스코틀랜드 감독으로 임명함으로써 청교도들을 탄압한다. 이 일로 스코틀랜드의 칼빈주의자들과 영국의 청교도들은 서로 가깝게 유대하게 된다.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제도를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지는 않지만, 찰스1세가 지원하던 감독제도에는 같이 반대했다. 영국의회는 마침내 종교문제에 관한 일단의 신학자들의 회의를 소집하게 되는데, 이것이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이다. 이 회의의 참석자는 대부분 영국의 장로교인들이었고, 약간의 독립파 그리고 8명의 스코틀랜드 교회의 대표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스코틀랜드 교회 파견자들은 투표권은 없었지만, 이 회의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참석 대표자 모두가 영국 국교회의 공동기도문을 거절하는데 동의 했지만, 장로교인들이 제네바 예전을 선호한 데 비해, 독립파들은 목회자의 임의에 보다 많은 자유를 주기를 원했다. 타협은 불가피 했고, 이 회의의 결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장로교 치리형태의 형식], [공중 예배를 위한 규칙]이 만들어 진다. 이 회의는 장로교적 형태의 교회제도를 선택하도록 의회에 권고했고, 영국 의회는 스코틀랜드인과의 “엄숙 동맹계약(Solemn League ane Covenant)에 조인하여 장로교 주에 실행에 옮긴다. 이것은 영국 국교회와 루터 교회의 예전을 불완전하고 결점 투성인 것으로 무시하고, 스코틀랜드에서 행하던 제네바 형식의 예배를 도입할 것을 의미했다. 1645년 이 [모범서]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에 의 해 정식으로 받아들여진 후, 세계 장로교의 발전에 표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장로교인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그런데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후, 찰스 2세의 뒤를 이은 제임스 2세는 영국의 공식 종교로서 로마 카톨릭을 복원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인들은 반란을 일으키지만, 1688년 오렌지공 윌리엄이 영국 문제에 관여하면서 스코틀랜드까지 장악한다. 그러나 그는 관대한 종교정책을 취함으로, 결국 스코틀랜드는 장로교를 국가의 공식 종교로 인정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교리적 기준으로 채택하게 된다.
그러나 17세기 네덜란드의 개혁주의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기초로 생겨난 미국 장로교의 역사 속에서는 칼빈의 영향 보다는 츠빙글리의 영향이 더 뚜렸하게 발견된다. 즉 초대교회의 말씀과 성만찬의 예배로 복원하려고 했던 칼빈의 예배신학의 정신은 외면되고, 여타의 모든 예전과 예식을 파괴한 쯔빙글리적 ‘설교중심’의 예배로 환원된 기형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는 영국 국교회의 예배의식을 반대하고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누리는 가운데 영국의 청교도들보다도 더 극단적으로 예배의 개혁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예배당 안에 있는 모든 상징물들을 배제하는가 하면, 기도서를 사용하는 것을 마다할 뿐 아니라 기도할 때 무릎을 꿇는 일까지도 반대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칼빈의 견해와도 다른 것이었는데, 청교도들의 예배 개혁은 다른 교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 장로교의 경우, 1788년 개최된 첫 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을 약간 수정해서 채택하였으나, 19세기에 와서는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예배 의식이나 형식을 엄격히 지키지 않았다. 이처럼 미국 교회들의 예배는 대체로 비예전적이고 청교도적이며 복음주의였다. 예배당에는 강단 한가운데 강도상이 있고 성찬대는 그 아래 일반 회중들이 서는 바닥과 같은 높이의 위치에 놓여 있었다. 대부분의 교회가 1년에 4번씩 성찬을 가졌으며, 십자가를 제외한 예술품이나 상징물, 촛불 등의 사용을 반대하였다. 여러 면에서 루터가 말한 ‘만인 제사장’사상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목사와 평신도간의 격차를 인정하지 않고 평준화 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유럽에서 사용하는 교회력도 지키지 않고, 겨우 성탄절과 부활절을 지키는가 하면, 이것마저도 지키기를 마다하는 교회가 있었다.
그리고 18, 19세기의 미국의 부흥 운동과 20세기 오순절 성령운동 역시 칼빈의 성례전적 신학을 간과해 버리고 미국의 토양 위에 개신교의 반 예전적 예배의 성격을 강화해 왔다. 이것이 마치 칼빈 이후 개신교의 바른 예배전통인 양 지배해 왔고, 더욱이 이 영향의 사정권 아래 있던 한국 개신교의 교회신학과 예배성격을 그 근저에서부터 반 예전적인 것으로 못 박아 버렸다.
2) 청교도적 개혁주의 예배의 한국 전래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의 예배 형식과 신앙 형태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들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에 전해 준 예배는 바로 미국 자유교회에서 익힌 것이었다. 자유교회는 청교도적 전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교회이다.
최초의 한국 개신교 선교사는 1885년 4월 5일 인천에 상륙한 장로교회 언더우드(H.G.Underwood)와 감리교의 아펜젤러(H.G.Apenzeller)부부였다. 언더우드는 영국에서 태어나 13세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네덜란드 신학교를 졸업한 후 북미 장로교회의 선교사로 임명받아 한국에 왔다. 그런데 이들은 미국식 자유교회 훈련을 받은 선교사들로서 즉석에서 즉흥적인 예배를 시도한 사람들이다. 특히 언더우드는 노방예배의 형태로 자주 예배를 드렸다. 이때부터 한국교회 예배는 선교사에 의하여 자유롭게 행해졌다. 그러나 신학교를 갓 졸업한 20대의 경험없는 선교사들에 의해 출발한 한국 교회는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이들에게는 뚜렷한 선교신학이나 유럽의 공동체적 신학과 교회론적인 의식이 부족했다. 그 결과 힘 있게 부르는 찬송과 간절한 기도, 그리고 소리높이 외치는 설교만 있으면 예배의 전부가 된다는 지극히 단순한 생각을 가져왔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예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예배예전이 심각하게 결여된 교회’ 또는 “회중집회이지 결코 예배는 아니다‘ 라는 지적을 하고 있다.
초기 한국교회는 형세가 미미하여 독자적인 정치를 만들기가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1907년 한국교회는 조선 예수교 장로회 독노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규정한 예배 모범과 교회정치형태를 본질적으로 신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1912년에는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설립되었으며 1915년에는 총회에서 정치편집위원을 선정하여 완전한 ‘정치’를 준비하게 하였는데, 1917년에 해당 위원들이 “웨스트민스터 권징조례”와 예배 모범을 개정하고 번역하여 제출하였다. 이를 통하여 아직까지 자체적인 헌법을 준비할 수 없었던 한국 교회는 세계장로교회의 헌법이 채택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규범들을 참고하여, 헌법제정의 기초자료로 사용하였고, 1934년 장로교 총회에서 [헌법]을 개정하였으나 그 기본정신에 있어서는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의 틀과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로 반세기 이상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초기 선교사들이 행한 청교도적 예배는 예배의식이 없는 설교 위주의 예배와 경건주의의 영향으로 확대된 개인주의, 부흥회와 함께 동반해 온 감상주의 내지는 주정주의적 형태를 한국교회 예배에 전해 주었다. 초기 선교사들의 동기는 당연히 17, 18세기 독일의 경건주의(Pietism)과 미국의 대부흥 운동(The Great Awakening) 그리고 영국의 복음운동(Evangelical Movement)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복음 이해란 개인의 회심과 구원의 내적 확신을 위한 경건주의였고, 그 회심과 확신이라는 것도 개인의 경험을 통해서 얻는 주관주의에 쏠려 있었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예배도 교파를 초월해 이러한 요소의 영향을 받아 탈의식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2. 개신교 예배의 특징과 문제점
예배와 문화의 상화 관계를 연구한 프랑크 센(Frank C. Senn)은 “기독교 예배의 역사는 곹 예배 의식(cult)과 문화(culture) 사이에 주고받는 이야기”라 하였다. 기독교 예배는 그 현장인 교회를 떠날 수 없다. 예배 자체가 개개인의 행동이 아니라 공동체의 자체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예배는 실천적이라 말할 수 있다. 예배는 교회의 상황을 무시하고 생겨날 수 없다. 그렇게 이루어지는 예배이론은 이론에 불과하다. 예배가 진정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회중들의 현대적 상황에 대한 배려가 반드시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전통주의에 사로잡혀 오늘의 상황을 무시하거나 배격하는 자세는 경계되어야 한다. 복음의 본질은 변할 수 없는 것이지만 복음의 형식은 변해왔고, 또 변해야 한다.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반문화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하고 세속문화에 대하여 적대시하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기독교 역사는 결코 문화와 단절되어 발전해 온 것이 아니다. 교회는 원하든 원치 않든 지금까지 문화와 상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지만 유대라는 그 문화속에서 사셨으며, 그 문화적인 내용과 형식을 이용하셔서 복음을 전하셨다 한국교회의 예배는 전통만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에 의해 예배가 형식에 사로잡혀 오늘 현대인들에게는 아무런 호소력을 주지 못하고, 예배자들은 교회라는 낮선 환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받아들이기 앞서, 과거의 전통 안에서 세워진 우리의 독특한 문화와 어투, 형식에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문화의 이질감은 하나님께 대한 반응으로 자신을 나타내고 싶어도, 현대적이고 내 속에 충실한 감정을 나의 표현으로 나타내지 못하고 교회가 가진 과거적 전통을 배워서 그것으로 표현하여야 하는 이질감이 생겨나는 것이다. 즉 회중들은 능동적인 참여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의식이 표현하는 수동적인 참여를 하게 될 수밖에 없다.
중세 시대에 아무리 좋은 예배적인 요소들을 예배에 포함시키고 좋은 건물을 치장하였지만, 회중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와, 예배의식들은 결국 회중을 외면하고 일부 성직자의 전유물이 되고 말았다. 또한 이들은 동일한 예배 의식을 언제 어디서나 사용하였다. 그것은 시대적, 지역적, 문화적 요소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 예배는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회중과는 거리가 먼 껍데기만 남았다. 오히려 예배를 타락시키는 동기를 유발한 것이다. 예배가 현대적인 지평을 가지지 못할 때, 회중들을 외면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생명력을 잃은 현대 문화와 동떨어진 예배는 참여하는 회중들까지도 수동적이고 율법적인 타성에 의한 예배를 하게 된다. 삶과 동떨어진 예배의식으로 자신의 삶과 직접적인연결고리를 찾지 못하게 되어 예배의식 자체만이 의미화, 목적화 되고 예배동안의 의식에만 충실하면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오류를 범하게 만든다.
오늘날 예배에 있어서 현대적인 문화의 산물들을 사용할 수 있느냐에 대한 많은 논란이 존재하고 있다. 이는 음악이나 악기, 예배에 사용되는 도구, 현대적인 의사소통 시스템들을 모두 포함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성경은 어떤 대답을 던져주는지, 역사적 전통 안에서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모습은 어떠하였는지 찾아보자.
신약성경 기자들은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서 코이네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하여 보라. 그들은 교육받은 사람만을 위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보통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예배를 드리는 장소를 생각해보면 그들은 자신의 주거 문화에 따라서 예배의 장소도 달라진 것을 볼 수 있다. 족장시대에는 다듬지 않은 돌을 세우거나 단을 쌓아서 하나님을 예배했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는 성막이 있었고, 이들이 정착 하였을 때는 성전을 지었다. 그리고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되었을 때는 회당 중심의 예배가 드려지게 되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와 모습도 문화의 배경에 영향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성막을 지을 때에 사용된 물건들은 만나처럼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준 것이 아니다. 그 재료들은 이스라엘 안에 있었던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애굽에서 빌어온 것들이었다. 또한 고전 6장의 말씀처럼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피조물 자체가 부정한 것은 아니다. 즉 도구에 있어서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은 없다. 다만 사탄의 공격으로 인해서 그것이 타락하고 오염되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만물이 다시 쓰여질 때 그것은 본래의 사명과 본질을 회복하고 있는 것이다. 피조물들의 왜곡된 용도와 방향을 새롭게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요 그것은 곧 예배로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점을 오늘날에 적용해 본다면, 현대적인 문화의 도구들을 예배에 사용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현재의 사용하는 악기는 괜찮고 새로운 악기는 안 된다. 혹은 현재 부르는 찬송가는 되고 새로운 노래는 안 된다.”는 식의 주장은 문화에 정형화되고 굳어졌기 때문이다. 현대의 예배 음악은 교회(교파)의 역사로부터 나왔다. 물론 성경으로부터 나온 가사는 많이 있다. 그러나 가사와 음악 모두가 성경으로부터 나오지는 않앗다. 특히 음악만을 문제 삼을 경우, 성경으로부터 나온 음악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으며, 성경시대(신구약시대)에 사용된 노래라고 증명될 수 있는 것도 없다.
어떤 이들은 구약의 제의들을 예로 들면서 예배의 현대화를 비판한다. 구약 성전제사의 형식과 절차는 그 자체가 예배의 본질에 관한 것이었다. 제사제도는 하나님께서 때가 차서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보이는 것이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한 제사로 영원히 드린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는 반드시 그 형식과 절차대로만 드려야 했다. 그것은 제의가 오직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방식을 가장 완벽하게 예표 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교회에 있어서는 형식은 본질이 될 수 없다. 그 형식이라는 자체도 예배의 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의 중심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예배의 형태와 모습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우리가 가진 어떤 형태도 그분을 제안하거나 그분에게 의로운 것으로 전해질 수 있는 것은 없다. 다만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만이 그분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그 시대의 문화와 사람들의 상황에 맞게 상황화 되었으며, 하나님의 계시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과 채널을 사용하여 기록되고, 전송되었다. 성경 안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며 제사하는 방식들도 문화에 맞게 바뀌어가는 과정을 거쳤다. 또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의 방법은 가장 큰 하나님의 은혜이자 예배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음의 진리를 주시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최선의 방법으로 성육신의 방법을 사용하셨듯이 오늘날 우리의 문화의 상황에 가장 적절한 경건의 예배형태를 찾는 것에 거부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문화를 사용하셔서 대화하시고, 우리를 변화시키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살과 피를 가진 사람이기에 주님께서는 우리들과 같이 되셨다.
예배 속에 현대적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개혁주의 전통과 역사에 위배하지 않는 것이며, 예배에 있어서 상황, 즉 문화의 반영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반영은 전통의 본질과 의미를 지키는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다. 회중들의 언어, 음악, 건축, 미술 등 문화적인 요소와 그 시대의 생활이기(生活利己), 음향, 영상, 조명 등이 예배에 반영될 때 그 예배는 생동감을 가지고 사람들과 호흡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상황과 문화를 강조하더라도, 늘 성경이 말하는 본질과, 개혁교회가 이루어온 전통과 신학 위에서 반영한다는 점이다. 본질을 왜곡시키는 어떠한 형식과 새로운 시도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 중심적이지만 또한 인간의 삶에 기초를 두고 있다. 예배는 하나님 중심적이면서 동시에 문화 인류학적이라 할 수 있다. 예배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있고 예배에 사용되는 어투는 선포적이기 때문에 세속에서 분리된 특정한 의식이나 생각의 전환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 우리 삶을 전적으로 드리는 것은 일상적인 삶에 대한 불연속성과 연속성을 요구한다. 하나님이 현재까지 행하시고 약속하신 이야기를 재현하면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의 임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새롭게 깨달아야 한다.
3. 한국교회 예배의 문제점
한국교회 정착시기의 예배신학의 부족은 한국인의 생활과 문화에 자리 잡고 있었던, 무속종교, 샤머니즘, 유교의 제의의식들의 영향을 완전하게 차단하지 못한데서 기인한 것이다. 예배 본래의 진정한 모습을 갖기 위해서는 예배에 대한 신학적 정립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배가 올바른 신학 위에 있을 때, 우리 예배 속에 있는 역기능적인 모습들과 형태들을 버리고 예배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한 갱신은 시작될 것이며, 앞으로도 끊임없이 다가올 반 기독교적 유혹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Ⅴ.현재 나타난 새로운 예배의 흐름들
1. 새로운 예배의 요소들
예배의 갱신과 새로운 형식에 대한 문제는 실로 엄청난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현재의 상황도 그러하지만 최초의 살인이 벌어진 가인과 아벨의 갈등도 예배가 그 중앙에 위치하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을 가져온 것도 예배의 문제이고 종교개혁과 그 이후 모든 예배에 관련된 갈등과 대립은 영국교회와 청교도간의 대립에서 보듯이 예배행위의 특정 형식에 관한 갈등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세대간의 문화 차이, 예배에 대한 인식의 차이 등으로 많은 논쟁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예배전쟁’이라 부를 정도로 그 갈등의 골은 깊다.
한국 교회는 지금 새롭게 시도되는 몇 가지 예배 모델들을 외국으로부터 도입하여 그 의미와 신학에 대한 별다른 질문도 없이 무턱대고 사용함으로써, 예배의 현장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깊이 반성해 보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성격은 보수적이다. 결국 교회의 중심적인 과제는 새로운 세대에 전달할 수 있도록 복음을 잘 보존하는 것이다.
1) 찬양
찬양은 고대로부터 예배와 함께 있어온 새롭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일반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찬양과 같이 새롭게 변화하는 요소 또한 없기에 예배의 요소 중 가장 중요하면서 가장 새로워져야 할 요소이다.
“호가 창창 불락(好歌 唱唱 不樂)”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노래도 자꾸 부르면 별 기쁨이 없다는 말이다. 유행가가 계속 바뀌는 것은 바로 이 원리 때문일지 모른다. 특히 요즘같이 모든 것이 빨리 변하는 시대에는 유행하는 노래도 금방금방 변하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심성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오늘날 “특별한”종교 음악의 형태들 가운데 가장 사랑을 받고 있는 가스펠 음악은 응접실 음악-1세기 전의 세속 음악-의 표현을 본뜬 것이다. 그 말은 드와이트 L. 무디와 아이라 생키 등 19세기 복음주의자들이 사용하던 것인데, 그렇게 부른 까닭에 그 음악의 소리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 친숙하고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1세기 훨씬 이전부터 감리교회의 전신인 대부흥 운동은 웨슬리 형제들이 만든 노래들을 불렀다. 그들의 새로운 18세기 찬송가의 곡조는 영국 포크 음악의 표현과 당시에 런던 거리에서 불리던 노래의 음악적 표현을 따랐다.
그리고 물론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은 전통적으로 미사와 함께 동반되던 친숙한 곡조보다는 교회 밖의 세계에 더 널리 퍼진 새로운 음악을 부흥시켰다.
남부 국가에서는 당대의 대중적인 포크 음악의 멜로디에 맞춰 시편에 운율을 넣은 새로운 토속적인 음악 형태를 수테르리데켄스(souterliedekens)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스코틀랜드에서는 웨더번 형제가 구데와 골디 발라티스(Gude and Goldie Ballatis)를 통해 유명해졌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사랑이나 사냥에 관한 포크 발라드로서, 기독교적인 의미를 갖게하기 위해 가사를 일부 바꾼 것이었다. 중세기에는 순회 전도자들(프란시스칸)이 사용했던 포크음악과 관련된 비 전례적인 음악적 표현으로서 라우다(Lauda)가 존재했었다. 그 이전에도 운율 찬송가의 아버지인 밀란의 암브로즈의 운율 찬송가들이 4세기 쯤 거리의 노래, 노동가, 그리고 일반 시민들의 행군가의 형태로 발전되었다.
역사 전반을 통틀어 부흥기를 맞을 때 마다 교회음악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 즉 전문적인 음악인들의 세련된 세계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세계와 접촉을 재정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수세기동안, 팝음악은 문화적 악(惡)의 상징으로 존재해왔다. 문화인이나 기독교 신앙에 독실한 사람이라면 랙타임, 재즈, 스윙, 또는 록음악 같은 것과는 멀리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당연히 그러한 저속한 음악이 기독교 교회의 예배에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음악들은 부적절, 불경건, 저속, 죄악, 사단적이라는 말로 수식되었다. 의문의 여지없이 이러한 오래된 편견의 배후에 있는 이유는 그러한 형태의 음악이, 그리스도인들과 문화인들 모두가 배격할만한 특정한 종류의 장소와 활동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에 들어와 대중통신의 발달과 더불어, 장소와 음악을 동일시하는 현상 전체가 완전히 변모하였다. 예를 들면 라디오, 축음기, 텔레비전, 그리고 카세트녹음기가 등장함에 따라, 재즈는 더 이상 뉴올리언즈의 매음굴이나 시카고의 무허가 술집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재즈는 집사님의 거실에도 파고들었고, 적어도 집사님의 딸이나 아들의 방에 쉽게 침투하였다. 팝음악은 여러 가지 형태로 20세기 초반에 숨어 있던 어두운 장소로부터 빠져나와 사실상 사회 전체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음악적 혁명으로 그러한 음악이 신앙의 본질에 대한 어떤 가정들에 대해 재검토를 하도록 교회에게 가한 압력이다. 확실히 새로운 음악은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의 대립을 다시 검토할 것을 요구했다. “신성한” 음악이라는 것의 존재와 그러한 음악을 구별하는 것에 관한 가정들이 의문의 대상이 되었다.
내재적으로 기독교적인 멜로디, 리듬, 또는 화음같은 것이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이러한 압력에 대면하자 결정의 기준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분명히 성경에는 이 점에 관해 구체적인 언급이 전혀 없으며, 이 주제에 대해 다루지도 않고 있다.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되자, 논쟁의 장은 “연합”의 영역으로 쉽게 옮겨졌다.
1870년대의 팝음악의 양식을 본따서 만들었던 가스펠 찬송가는 이제 교회의 뚜렸한 “이질성”을 표현하는 음악적 표현이 되었다. 가스펠 음악이 그러한 특징을 갖는 변화를 겪은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은 같은 형태로 남아 있으나 다른 음악적 양식들이 사회에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신약성서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고전 9:22)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어떻게 복음 안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의 분별이 있을 수 없는가” (골 3:11)에 대해 말해준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러한 구별이 적합하지 않다. 교회 음악의 영역에서는 바하를 좋아하고 그의 음악만을 받아들이거나 가스펠 음악, 옛날 시편의 운율, 또는 기독교 팝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나누어 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바로 그러한 성경의 교훈에 따라 지켜나가야 한다.
교회내의 그러한 태도가 갖는 기능적인 결과는 회중들이 다양한 종류의 음악적 표현과 그 모두에 대한 감상적 태도의 함양일 것이다.
2) 영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영화와 기독교가 매우 적대적인 관계에 있다고 생각 할 것이다. 그리고 물론 모든 영화가 다 그리스도인에게 유익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예배에서 사용될 수 있는 영화는 어느 정도 함께 공감하고 느낄 수 있는 내용이 되어야 한다. 영화란 요소도 인간의 삶의 한 부분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삶을 더 부분적으로 세밀하게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내면을 객관적으로 봄으로써 그 일면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에 대한 상징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줄 수 있다. 또한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 이라는 말이 있듯이, 열 마디 말 보다 시각적으로 한번 보고 느끼는 것이 더 큰 효과적일 수 있다.
3) 단막극
단막극은 5분 정도의 짧은 시간동안 극을 하는데, 성도들이 설교를 듣기 전에 설교와 관련된 주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주는데 아주 효과적이다. 단막극이 때로 무언극으로 진행되어지는데 말없이 의미를 표현하지만 그것이 전달해주는 메시지는 깊고 분명하며, 강력한 역동적 힘을 지닌다. 이런 단막극은 회중들을 단순한 관람자로 앉아있게 하지 않고 거기에 몰두하게 하면서 참여자로 만들어 준다.
4) 간증
간증으로 유명한 예배는 로버트 슐러 목사의 크리스탈 교회의 예배이다. 그 교회는 예수 믿고 구원 얻어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바뀐 사람들 뿐 아니라, 인간 승리를 한 감동적인 사연을 가진 사람들을 초청하여, 잠깐 인터뷰도 하고 간증도 하게 한다. 그래서 목회자의 설교에도 은혜를 받지만, 그 앞에 이루어진 이런 은혜로운 간증에 결정적인 은혜를 받는 경우가 많다.
5) 좌담회
TV의 토크쇼를 참고하여, 교회에서도 가정의 달이나 절기 같은 때에 특별 프로그램으로 좌담회를 해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두 세 가족을 강대상 앞에 놓고 목회자나 기타 사역자가 직접 진행자가 되어 그 가족들로부터 생생한 신앙간증도 듣고, 간혹 그들을 목회자가 집단적으로 카운슬링을 해주며 보다 인간적인 접근을 시도하면 모든 성도들이 많은 것을 배우게 되고, 즐거움을 누리며, 또 가족들의 구체적인 기도제목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
2. 새로운 예배의 흐름들
1) 교회 일치 운동에 기여한 예배(The Covergence Movement)
이 예배는 교회 일치 운동의 영향을 입어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 일치 운동의 모든 차원이 그러하지만 특별히 한 분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를 일치시켜보려는 일은 처음부터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들은 교회 일치 운동의 당위성 앞에서 각기 지니고 있는 전통들의 부차적인 것들을 양보하고 최소 공배수를 찾는 노력 속에서 예배의 일치를 경험하게 되었다.
아울러 지금껏 각자의 입장에서 각자의 예배 형식만을 고수하며 예배를 드려오던 교회들이 에큐메니칼 운동을 하면서 각각의 예배에 있는 다양한 장점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운동을 소개하면서 웨버(Robert E. Webber)는 다양한 기독교 예배 전통을 크게 3가지 즉 “예전/성만찬적 예배(Liturgical/Sacramental)", "복음적/개혁 신학적 예배(Evangelical/Reformed)", "은사 중심적 예배(Charismatic)"로 구분하면서 각 예배의 특징 및 강조점들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① 예전적/성만찬적 예배 : 신학, 정통성, 우주성, 역사적 연결성, 예전중심의 예배, 사회 행동, 교회를 성육신의 관점에서 이해(신학, 역사 그리고 성만찬 위에 서있는 교회 이해)
② 복음적/개혁 신학적 예배 : 성서적 근거, 개인적 회심, 전도와 선교, 강단 중심의 예배, 개인적 성화, 교회에 대한 성서적 개혁 신학적 이해(실용적이고 합리적인 교회 이해)
③ 은사적인 예배 : 5중사역과 정치제도, 성령의 능력, 성령의 은사, 은사 중심의 예배, 하나님의 왕국, 영적, 유기적, 기능적 교회 이해(역동적이고 비공식적인 교회 이해).
이상의 3가지 예배의 장점을 잘 살리면서 이 예배는 다음과 같은 면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첫째, 성례전 특히 성만찬에의 관심이다. 예전적인 예배에서는 성례전을 예배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 강조하는 반면, 복음적이고 은사적인 교회들에서는 성례전이란 주님의 명령에 의한 교회의 규례(Ordinance) 정도의 의미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짙다. 그러나 점차고 주님의 임재와 능력이 성례를 통해서 예배자에게 나타난다고 하는데 이해를 같이 하고 있다. 특별히 초대교회의 예배에 대한 연구 결과 초대 교회 예배는 기본적으로 ‘설교’와 ‘성만찬’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어느 한쪽을 배제하거나 경시한 예배는 참다운 예배라고 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얻으면서 성만찬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졌다.
둘째, 표징과 상징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이다. 표징이나 상징은 우상화의 염려로 인해, 개신교에서는 처음부터 위험한 것 혹은 피해야 할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교회 일치 운동을 통해 이러한 표징과 상징 등이 내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이해하고 예배자들로 하여금 진리로 향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셋째, 초대교회에 대한 관심이다. 현대 사회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유로운 신앙의 표현이 허용되고 있고, 이로 인해 수많은 교파와 예배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이때 교회 일치 운동에서 대두되는 문제는 교회의 본질과 뿌리에 대한 관심이다. 자연히 신약성서와 초대교회로부터 사도들에 의해 지켜져 왔던 믿음과 그들의 예배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공감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예배에서의 자발성에 대한 관심이다. 예전적인 예배는 집례자를 중심으로 일정한 형식을 따라 진행되어지는 예배로서 회중들의 자발적인 참여나 성령의 역사하심의 기회가 많지 않은 경향이 많다. 그러나 본래 예전이란 단어의 헬라어 의미를 보면, “백성들의 활동 또는 일”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전이 예전답게 되려면 자발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특히 자발성의 문제는 은사적인 예배에서 많은 도전과 지혜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2) 은사 중심의 예배(Charismatic Worship)
근자의 은사 중심 예배는 하나님의 역사와 성령의 은사, 특별히 방언과 예언을 강조하는 예배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 운동은 멀게는 2세기의 몬타누스 운동에 연결되어 잇고, 가깝게는 20세기 초엽의 오순절 운동과 연결되어 있는 은사운동은 다른 교단에도 직접 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고 특별히 예배에 끼친 공헌이 크다. 은사주의 운동을 펼치고 있는 교회들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왕성하게 성장하고 있고, 특별히 많은 선교지에서 힘 있게 전개되어 가고 있다.
은사 중심의 예배는 다양한 교회들에 널리 퍼져 있고 그 이해 또한 매우 다양하므로 한마디로 묘사하기가 매우 어렵고 이로 인해 은사 중심의 예배 역시 그 정의를 내리기가 간단치가 않은 면이 있다. 그러나 은사 중심의 예배를 가장 간단하게 표현 한다면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고 그 역사로 말미암아 회중 각자가 적극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예배라 할 수 있다. 은사 중심의 예배가 어떤 특징을 지니는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은사 중심의 예배는 한 마디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예배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신학 중의 하나는 성령님이 중재하시는 현존이야말로 예배자들로 하여금 능력있는 예배를 드리게 하는 핵심적인 요인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회중들을 명확치 않은 상태로부터 끌어내시며 또한 다양한 표현들의 예배를 격려하시어 예배의 활력을 북돋아 주시는 분이시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예배는 성령의 역사에 민감한 예배이다. 성령은 예배 전에 역사 하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예배 중에도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예배를 철저하게 준비하지만, 동시에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공간도 주어져야 한다. 이러한 공간은 즉흥성(Spontaneity)으로 나타나는데, 미리 회중 중에서도 누구든지 어느 때든지 예배에 공헌할 수 있는 여지가 있고, 예배의 전체 흐름도 미리 짜여진 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분위기에 따라 찬양과 기도 기타 은사활동을 자유스럽게 행할 수 있는 여지를 예배 중에 마련하고 있다.
은사중심 예배에서는 회중의 자발적인 참여를 강조하는데, 이것은 만인 제사장설에 대한 보다 폭 넓은 이해와 연관이 있다. 보통 만인제사장이란 말을 할 때에 그리스도 외에 더 이상 다른 중재자가 필요치 않고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으로 이해한다. 여기에서 주된 관심은 관계성에 대한 것으로 개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을 회복한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은 이러한 기본적인 이해 위에다가 제사장 즉 예배를 드리는 자로서의 기능에 초점을 맞추면서 모든 신자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자발적으로 마음껏 찬양을 드리며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더 넓게 이해를 한다. 즉 모두가 제사장이므로 예배의 인도자 뿐 아니라 모든 성도가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자세로 예배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에의 자발적인 참여는 각 지체가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예배 중에 능동적으로 발휘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몸의 각 지체는 다른 지체를 위해 봉사하듯이, 예배 중에도 회중은 다른 지체의 유익을 위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은 은사를 가지고 봉사해야 한다. 이러한 은사 가운데는 방언의 은사, 예언, 통역, 신유, 가르침의 은사등 다양한 형태의 사역이 포함되어 있다. 가르침의 시간, 중보기도, 치유의 시간 등이 있어서 회중들이 특별한 은사를 받은 이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은사를 활용하여 지체를 섬기기도 한다. 어떤 순서가 특별히 정해진 것이 아니라 회중들이 자발적으로 나와서 순서들을 진행한다. 은사 중심의 예배에서는 다양한 은사가 나타날 수 있도록 장려하면서 그것을 위한 적절한 장을 마련해주는데 그 주된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은사 중심의 예배에 참여한 회중들은 매순간 성령의 이끄심을 분별하며 성령의 충만함에 사로잡히기 위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에 매우 민감한 예배를 드리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를 강하게 갈망하고 이런 이유로 해서 이들은 자주 하나님의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힌다. 그들은 이러한 체험을 기도나 기쁨의 함성, 손을 드는 행동, 기타 다양한 표현으로 표출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표현은 찬양의 시간에 특별히 많이 나타나는데, 이들의 찬양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지닌다. 1) 시편과 성경구절로 된 찬송(Scripture Songs), 2) 경배와 찬양을 위한 음악, 3) 다양한 악기의 사용, 4) 찬양인도자에 따라 부르는 회중 찬송, 5) 예배 춤의 사용, 6) 찬양 사역자의 예언적 역할에 대한 강조, 7)손을 들고 찬양하거나, 팔들을 끼고 찬양하는 것 등이다.
은사주의 예배는 예배의 장에서 멈추지 않고 섬기는 삶으로까지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의 예배는 활기와 생동감이 넘치는 삶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봉사로 열매를 맺는다. 사도 바울은 참 예배란 우리 자신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라 하였고(롬 12:1), 히브리서 기자는 선행의 삶을 통하여 드리는 예배를 명했는데 (히 13:15-16), 은사 주의자들은 이런 말씀을 잘 실천에 옮기고 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과 학대받는 자들, 알코올과 마약에 중독된 자들을 위한 사역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들이 이 같은 사역들에 열심인 이유는 이러한 사역들 자체가 바로 예배의 연장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리고자 모여 온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는 주변의 세계의 요구에 자신을 내어주는 삶에 대한 예행연습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열정적이었다면, 그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데도 열정적이어야 함을 그들은 잊지 않는 것이다.
3) 경배와 찬양 예배 운동(praise & Worship Movement)
찬양 중심의 예배는 1960-70년대 기존 전통 예배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되어 서구교회에서 많은 반향을 일으킨 예배 형태인데, 기본적으로는 은사중심예배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이 예배에서 불리우는 많은 찬양들이 본래 은사중심 예배에서 불리우던 찬양들이다. 찬국에서는 온누리 교회를 중심으로 경배와 찬양예배로 많이 알려진 예배이며, 지금은 많은 교회들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찬양을 중심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찬양 중심의 예배는 성령의 즉각적 임재(Immediacy)와 친밀감(Intimacy)에 대한 기대와 열망을 많이 가지고 있고, 찬송의 표현은 현대 그리스도인의 문화를 반영하는 비공식성을 지닌 음악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처음에는 이런 음악이 연주 음악이었는데(Performance Songs), 그 후에 점차로 회중 음악으로 바뀌어 갔다. 찬양 중심 예배는 주로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①성서에 나타난 찬양 요소의 회복
찬양 중심 예배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신구약성서에서 발견되는 찬양의 회복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예배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경배와 찬양예배 인도자로 널리 알려진 콘웰(Judson Cornwell)은 찬양과 예배의 차이점을 시편 95편을 근거로 설명하는데, 그에 의하면 예배에 있어서 먼저 찬양(Praise)이 있고(v.1-2), 그 다음에 예배(Worship)라는 것이다.
성도들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권능의 행위와 그들의 삶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를 찬양한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예배한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행위에, 예배는 하나님의 본성에 초점을 맞춘다. 어찌되었든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찬양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 예배드리는 길을 얻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찬양을 매우 강조한다.
②인간의 감정과 신체적 표현을 중시하는 예배
18세기이래 서구사상은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설명을 중시하여왔다. 이러한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예배는 자연적으로 주지주의적인 특징을 많이 띄고 예배의 형식 역시 지적인 측면에 호소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이런 면에 반하여 찬양 중심의 예배는 지적인 면보다는 인간의 느낌과 감정을 중시하고 거기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다. 감정은 인간의 인격을 구성하는 3요소 중의 하나이다. 감정이 움직여지지 않는 한 온전한 인격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찬양운동에서는 감정적인 요소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감정을 중시하는 이들의 예배는 나아가서 신체적 표현도 중시한다. 이들은 예배에서 수동적이지 않고 적극적이며 마음을 다해 손을 들기, 인사와 손뼉치기, 춤추기, 그리고 외치기 등을 하며 이러한 신체적 표현들은 예배에 활기를 더한다. 하나님을 영, 혼, 육의 전 존재로 드려야 한다. 전통적인 예배들은 예배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측면만을 인정하려 하나 은사 중심 예배에서는 신체적이고 감정적인 표현들까지도 함께 나타나야 한다고 믿는다. 신체적인 표현은 영적인 표현들까지도 함께 나타나야 한다고 믿는다. 신체적인 표현은 영적인 표현보다 결코 열등한 것이 아니다. 몸은 영적 예배의 주요한 전달 수단이 것이다. 예를 들어 손을 높이 드는 신체적인 행동은 경배와 복종을 나타내는 영적인 의향의 표시이다. 춤추는 것은 큰 기쁨과 즐거움을 드러내는 표시인 것이다.
찬양중심 예배에서 이처럼 감정과 신체적 표현을 중시한다고 해서, 이 예배를 단순히 감정적인 예배라든지, 성서적 기초가 부족한 예배라고 쉽게 판단해 버리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결론일 것이다. 이런 예배의 형태가 느낌과 감정 그리고 표현을 강조하기에 말씀을 깊이 파헤치는 면은 좀 부족하지만, 기존의 주지주의적인 예배의 한계점을 극복한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감성을 중시 여긴다는 의미이지, 지적인 측면에의 호소를 무시한다는 것은 아니다.
③찬양을 통한 하나님 임재의 체험 강조
찬양 중심 예배의 순서는 구약의 성막과 성전에서의 입당 순서를 따른다. 즉, 성전 바깥뜰에서 성전 안으로, 그리고 지성소로 들어간다. 이들의 예배를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개인 간증의 합창이 있는데, 주로 “나(I, Me)"가 들어가는 찬송을 한다. 이때는 성막의 바깥뜰에 있는 단계로 아직 예배할 수 없다. 그 다음에는 성전문을 들어가는 노래로서 찬양에서 예배에로의 전이를 표현한다. 이때는 주로 감사의 노래가 불려진다. 세 번째 단계는 지성소로서 하나님의 본성에만 초점을 둔다. 이때 회중들은 고개를 들고, 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들의 느낌을 몸으로 표현한다. 이때 회중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체험하게 된다. 죤 윔버의 빈야드 교회 (Vineyard Church in Anaheim)의 예배도 약간 진행순서는 다르지만, 하나님 임재 체험을 강조한다. 예배 순서를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초청의 시간(Invitation Phase) - 초청의 노래를 부르면서(예를 들면, “I just came to praise the Lord"같은 찬양), 손뼉을 치고, 몸을 흔들며, 회중들은 미소를 지으면서 서로 인사한다.
2) 나아감의 시간(Engagement Phase) - 회중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시간이다. 이 때는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노래를 부른다.
3) 경배의 시간(Adoration Phase) - 이전의 다양하고 활발한 분위기에서 진지하고 조용한 톤으로 부른다.
4) 영적 만남의 시간(Intimacy Phase) - 예배 중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개인적인 시간으로 주님과의 만남을 기대한다. 일어서서 손을 올리고 눈을 감고 조용히 부르거나,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어떤 이는 엎드려 있기도 한다.
5) 정리하는 시간(Closeout Song) -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분위기를 바꾸는 찬양을 한다. 이런 찬양 후에 말씀을 선포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④형식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예배
전반적으로 예배의 흐름에 많은 융통성이 있다. 찬양이 꼭 예정된 대로 불리지 않고 그 때 그 때 분위기와 성ㄹ여의 인도하심에 따라 불려 지는 융통성은 물론이고 다른 요소들도 매우 융통성 있게 진행되어진다. 예를 들어 소위 말하는 목회자의 목회 기도 대신 그룹별로 모여서 드리는 기도가 드려질 수 있다. 설교 후에 설교를 중심으로 간단한 토론 혹은 피드백의 시간을 가지고 예배를 마치는 수도 있다. 예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는 소위 사역의 시간인데, 다양한 그룹들로 나위어서 은사 받은 이들을 중심으로 은사를 실행하면서 지체들을 세워주기 위한 구체적인 도움을 준다.
⑤찬양의 능력을 인식하는 예배
경배와 찬양 예배는 찬양이 갖는 능력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찬양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을 행하시는 또한 행하실 수 있는 왕좌를 만든다고 믿는다. 구약에서 흠향할 만한 희생 제사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불로서 응답하셨듯이 (레위기 9:24, 창 15:17, 대하 7:1, 히 12:28-29), 성도들의 찬양에 하나님은 권능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즉 기적, 치유 그리고 축사 등의 역사가 역동적인 예배, 특히 찬양 후에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미국의 복음 전도자인 오스본(T.L.Osborne)은 아프리카에서 영적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큰 확성기를 동원해 30분 동안 “모든 사람들아 왕 되신 주를 찬양하라” 라는 테잎을 정기적으로 틀었고, 설교 전에도 찬양을 많이 드렸는데, 이로 인해 놀라운 기적들이 많이 일어났다고 간증하였다.
캘리포니아의 목사이자 작곡가인 잭 헤이포드(Jack Hayford)는 그의 교회에 아이를 가지지 못한 한 여성에게 정기적으로 찬송을 부를 것을 처방했다. 이것은 이사야 54:1의 말씀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는데, 그녀는 일 년 후에 딸아이의 어머니가 되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성경은 이러한 역사를 많이 보여준다. 엘리사는 예언하기 전에 거문고 타는 자를 불렀고(왕하 3:15), 사울왕은 다윗이 악기를 연주할 때 악령들의 눌림에서 해방되었으며(삼상 16:23), 신약에서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노래하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지진이 나고 감옥문이 열리는 것으로 응답하시는 것을 체험하였다.(행 16:25-26)
4) 구도자 예배(Seeker Sensitive Worship)
구도자 예배란 미국의 윌로우 크릭 교회와 새들백 교회에서 불신자 혹은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을 위하여 특별히 기획한 예배이다. 이 교회들에서는 보통 주일 예배시간에 구도자들만을 위하여 예배를 드리고, 기존 신자들은 주중에 예배를 드린다. 주말에 드려지는 구도자 예배에는 보통 기본적인 찬송과 예전만을 넣고 나머지는 무대 공연을 하는 것처럼 진행한다. 이런 예배를 통해서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접하고 교회로 점차 가까이 다가오게 된다는 것이다. 새들백 교회의 릭워렌(Rick Warren) 목사는 “성장하는 교회는 수용성이 강한 사람들을 향해 내뻗는다. 반면에 성장하지 않는 교회는 소극적인 신자들의 전열을 가다듬는데 신경을 다 쓴다.” 라고 말하면서, 아직 교회에 나오고 있지 않지만, 교회에 나올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그들이 쉽게 수용할만한 예배로 인도하여 자연스럽게 교회의 일원이 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즉 구도자 예배의 가장 기본적인 철학은 예배 자체가 아주 중요한 증거의 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신자들이 교회에 나와서 처음 대하는 것이 바로 예배이고, 교회의 가장 중요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배이므로, 이 예배가 그들을 효과적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예배의 분위기와 내용을 만들어주자는 것이 구도자 예배의 기본적인 신학이다.
새들백 교회에서 행한 조사에 의하면, 사람들이 교회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4가지 공통된 불평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교회는 아주 지루한 곳이다. 특별히 설교가 그렇다. 설교의 내용은 나의 삶과 별 연관이 없어 보인다.
2) 교회의 교인들은 방문자들에게 그리 친절하지 못하다.
3) 교회는 나 자신보다 내가 가진 돈에 더 관심을 갖는 것 같다.
4) 자녀를 맡기는 문제가 염려된다.
위에서 보여주는 대로 불신자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가장 큰 장애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예배의 지루함과 생활에의 무 관련성 이다. 그런데 지금이야말로 단순한 수평이동 성장에서, 참으로 회심 성장을 이루어야 하는 시대에 접어들었으므로, 불신자들이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잘 알고 그들에게 맞는 전도의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시점에 와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위한 예배를 개설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즉 입술의 증거를 통해서 구도자들이 교회에 대하여 작은 관심을 가질 때, 이들에게 적절하면서도 창조적이고 호소력 있는 방식으로 계속적인 도전을 줄 수 있는 장소로 이들을 데려가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의 생활방식에 젖어있는 불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급진적인 삶을 변화시키는 메시지는 이들을 당황스럽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이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는 환경 속에서 메시지가 전해져야 한다. 또한 메시지의 적절성, 창조성 그리고 그들에게 호소력 있는 내용 외에도 처음 예수 믿으려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윌로우크릭 교회의 경우, 주말인 토요일과 주일은 온전히 초청된 불신자들을 위해 간단한 전도 집회 형식의 예배를 드리며 복음을 전한다. 준비된 찬양, 간단한 현대인의 삶에 관한 간증, 복음제시, 그리고 그날 설교의 내용을 담은 단막극과 마지막에 목사의 복음적인 전도설교로 집회를 마친다.
구도자 예배의 저변에는 나름대로의 확신들이 있다. 릭 워렌의 주장을 중심으로 그 내용들을 살펴보자.
- 예배에 고정된 스타일은 없다. 하나님은 다양한 예배 형식으로 인해 결코 괴로워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다양성을 즐거워하신다. 인간을 이처럼 다양하게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성도들은 수천가지의 예배 스타일과 표현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동일하게 가치 있는 것이다.
- 참된 예배는 구도자 혹은 새 신자들에게 아주 강력한 전도의 효과를 지닌다.
- 하나님께서는 새 신자들이 가질 수 있는 염려, 불안 , 갖가지 고민들에 대하여 민감하기를 원하신다.
-구도자 예배란 결코 예배나 메시지의 질을 낮추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배의 신학을 바꾸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배의 분위기를 바꾸라는 것이다. 또 메시지 자체를 바꾸라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의 전달 방법을 바꾸라는 것을 의미한다. 예배에 나온 어떤 사람도 지루함을 느끼기를 원치 않는다.
- 예배는 각각의 목적에 따라 전문화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새들백이나 윌로우 크릭에서는 기존 신자들을 위한 예배와 구도자들을 위한 예배를 따로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고 있다.
- 구도자들이 결정을 내리는 데는 시간이 필요함을 이해한다. 현대인들은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고 수용이 되어야 결정을 내린다. 그들은 강요당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것도 당장에 무언가를 결단하라고 하는 것은 보통 무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지식수준이 높을수록 더욱 그렇다. 구도자 예배는 구도자들이 충분한 시간을 두고 꼼꼼히 따져보고 결정할 수 있는 배려를 갖는다.
- 예배에 있어서 탁월함의 필요성을 인식한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모든 것에 있어서 탁월한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세상의 것보다 더 낙후되고 질이 떨어져서는 결코 불신자들을 효과적으로 이끌 수 없다. 특별히 하나님의 속성을 전달하는 것들에 있어서 그러해야 하고,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역인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탁월함을 유지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구도자 예배는 동시대적이고 창조적이며 높은 수준의 프로그램을 시도한다.
- 구도자 예배는 사람들이 그들의 시간 또는 물질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것을 매우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이해한다. 그래서 새신자는 헌금순서에 참여치 않아도 되며, 참여한 그 자체로 환영을 받는 것임을 분명히 알려 주어서 새 신자들이 믿음이 생겨서 스스로 헌금을 낼 수 있을 때까지 부담 없이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준다.
구도자 예배란 결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도자 예배란 기존 신자들이 자신들의 관심보다 불신자나 새 신자의 관심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기존 신자들이 원하는 것이나 편안해 하는 것이나 전통을 추구하는 것을 희생하고 불신자들이 편안해 하고 원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자신들이 편안해 하는 것에서부터 자원하여 나오는 것은 영적으로 보통 성숙한 자세가 아닌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섬김을 받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고 자신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고, 제자들 역시 이런 삶을 살 것을 명하셨다(마 20:25-28). 구도자 예배는 이 같은 섬김의 자세가 예배에 나타난 것이다.
Ⅵ. 현대 한국의 청년의 특성
1. 일반적 청년기의 정의
청년기가 언제 시작하여 언제 끝나는가는 문화에 따라 차이가 있고 청년기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의 조망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다. 생리학적으로는 생식기관과 2차적인 성 특징들이 나타날 때 시작하여 생식 체계의 완전한 성숙과 함께 끝난다. 그러나 생리학적 정의의 문제점은 청년기의 시작 시기가 신체 변화를 확인할 수 있기 약 2년 전에 일어나는 호르몬 변화의 시작 시점을 의미하는 지 혹은 2차적 성 특징이 나타나는 시점을 이야기하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문제점이 있다
또한 인지적 관점에서는 추상적 사고와 논리적 추리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상위인지(metacognition) 능력을 갖기 시작할 때 청년기가 시작되고,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을 때 청년기는 끝이 난다. 그러나 개인의 인지 발달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형식적 조작사고의 시작 시기와 종결 시기를 확인하기 어려우며 전체 성인의 단지30%만이 완전한 형식적 조작능력을 획득할 수 있으므로 문제가 된다.
사회학적인 관점은 생리학적 정의나 인지적 정의와는 다르게 청년기는 사춘기의 출현으로 시작되며 사회적 요구에 대한 일관성 있는 대처 양식이 확립되어 사회가 그들의 성인됨을 인정할 때 종결된다는 것이다(Sebald,1968). 여기서의 사회적 인정이란 법적 규정을 의미하며 우리나라는 만 20세를 법률상의 성인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대처 능력의 획득과 사회적 인정은 동시에 일어나지 않을 수 있으며 대처 능력의 획득 없이도 사회적 인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개인의 연령을 기준으로 10세부터 19세까지의 10대를 청년기로 분류하는 사람도 있다(Ramsey,1967). 그러나 10세에도 사춘기가 시작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20세 이후에도 부모와 함께 생활하면서 부모의 재정적 지원을 받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 정의도 수용되기 어렵다.
짐링(Zimring, 1982)은, 청년기는 사회적 자유가 허용될 때 시작되고 연령의 대다수가 법적, 경제적 그리고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을 때 끝난다고 제안한다. 즉 아동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자유가 주어지기 시작 할 때 청년기가 시작되고, 그 자유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을 때 청년기가 끝난다고 가정한다.
현실적으로 중학교 과정에서 교과 과정의 일부를 선택할 수 있고 과외 활동의 폭이 약간 넓어진다면 자유가 허용되기 시작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자유는 고등학교, 대학교, 직업훈련학교 등을 거쳐가면서 확대된다. 물론 운전면허를 획득하고 유흥업소에 출입하고 부모 승인 없이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은 자유를 허용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짐링의 정의는 사람에 따라 성인의 지위 획득 시기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 이유는 사람에 따라 10대 후반에 가정을 떠나고 직업을 갖고 결혼하여 부모가 됨으로써 청년기를 종결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20대 후반까지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여 학업을 계속 함으로써 아직도 청년기에 머무르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다양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청년기는 사춘기 혹은 성적 성숙의 시작에서 출발하여 성인의 책임을 맡을 때까지로 정의된다. 여기서 사춘기란 급속한 신체 성장을 이루는 시기로서 성장급등과 신체 구성의 변화가 일어나고 특히 2차적 성 특징의 출현으로 정의되는 시기이다.
청년기는 사춘기의 시작에서 출발하기는 하지만, 사춘기의 종결과 함께 청년기도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성적 성숙이 끝났다고 할지라도 개인이 성인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춘기의 시작이나 성인기의 시작은 사회나 시대에 따라 달라 질 수 있으므로 청년기의 시작연령과 종결 연령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은 그들의 10대와 20대 초반을 대부분 학교에서 보내고 있다. 긴 교육 기간을 갖는 이와 같은 현실에서 교육 단계와 일치되게 청년기를 구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중학교 시기는 청년초기, 고등학교 시기는 청년중기에 해당하고 그리고 청년후기는 대학교, 기술학교 및 군복무 기간을 모두 포함한다. 또한 청년초기와 중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청소년으로, 그리고 청년후기에 해당되는 젊은이들을 청년으로 명명된다. 물론 대학 졸업 이후에도 성인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전문 학위를 취득하기 위하여 혹은 직업훈련 때문에 경제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하는 사람들 모두 아직도 청년후기에 처해 있는 청년들임이 분명하다.
2. 한국 청년의 형성 배경
많은 현대 청년문화론에서 공통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영향이다. 기성세대가 근대 사회의 주체로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세대라면 현재 청년은 이러한 기성세대를 부정하고 저항하는 세대라는 점이다. 현재의 젊은 세대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 소비 사회에서의 물질적 풍요, 탈 이념성 분위기의 형성, 컬러TV나 PC등 전자 매체와 영상 매체의 발달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성세대는 생산 자본주의 시대의 사람들로서 자신을 훈련된 노동력으로 삼아왔다. 또한 이들은 역사의 진보와 배움이 가져올 행복을 굳게 믿는 계몽주의 시대의 사람들로 배움과 교육을 중시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집단에서 찾아온, 경제적 빈곤의 시대를 살아온 세대이다. 이에 비하면 현재의 젊은 세대는 소비 자본주의 세대의 산물로 가족이라는 집단보다는 자신을, 평준화된 개성보다는 독특한 자신의 개성을 중시한다. 이들은 기성세대를 권위주의의 세대이며 수동적으로 눈치껏 적응하여 왔다고 본다. 이에 비하여 현재 청년 세대는 자신의 체험과 감성을 중시하고 현실적이다. 또한 생산주의 세대인 부모가 쓰지 못하는 돈을 대신 쓰는 소비 주체로서의 자신을 형성해 왔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의견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경우 부모 및 조부모와 청년은 분명히 구분되는 세대이다. 연세대의 윤진 교수는 한국가정의 특징을 출생 동시집단일 뿐 아니라 역사적 경험이 전혀 다른 동시 집단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1970년대 손자와 1940년대생 부모와 1910년생 할아버지를 예로 들어 각 세대간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한국의 청년 세대는 부모 및 조부모 세대와 확실하게 변별되는 새로운 세대이다. 조부모세대는 일제시대와 6.25를 통해, 제 1공화국에서 6공화국까지 경험한 세대이다. 이들은 정치적인 격변 뿐 만 아니라, 보릿고개와 같은 의식주 상황에서 생존 그 자체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던 세대이다. 부모세대는 해방 후 출생하여 6.25를 맞이하고 유신 광주항쟁 등의 사회적 격변을 체험했으며 고속도로 건설, TV방송 등의 혜택을 누렸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도 경제적 어려움과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의 전황에 다른 많은 시대적 변천을 체험하였다.
하지만 70년 후반에 태어난 청년 세대는 이들 두 세대와 전혀 다른 경험을 하며 자라나고 있다. 이들은 일제시대, 해방, 6.25등을 역사 교과서 속에서 배우며 살아왔고, 급속한 생활수준 향상, 나날이 좁아지는 지구촌과 외국문물에 대한 문화개방, 교복 자율화, 개인중심주의와 소시민 의식 속에서 성장해 가고 있다. 이들 3세대 가족 구성원은 연령적으로 각각 30년씩의 경험, 태도, 의식구조에서 결코 같은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은 가족 내에서 여러 가지 특수한 역동관계를 드러내게 된다.
한국의 청년들은 가정에서 조부모세대와 부모세대와의 가족과의 성장과정, 생활 양식, 경험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문화적 갈등을 겪고 있으며 이것은 가치관의 차이로 이어지게 된다.
사실 한국적인 상황 속에서 세대간의 격차를 사회적, 역사적 맥락으로 이해하지 않고는 청년의 이해란 있을 수가 없다.
3. 현대의 한국 청년의 특성
현대 청년 세대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기 중심적 경향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자기 중심적 사고는 개인의 독창성과 창의성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긍정적 요인으로 평가된다.
둘째, TV, PC등 전자 매체에 의해 양육된 최초의 세대이다. 이는 현재의 정보화 사회와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가장 신속하게 적응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셋째, 문화적 취향에 있어서 잡식성의 경향을 보인다. 오페라나 서양의 고전음악을 좋아하는 이들, 재즈나 랩음악에 심취하는 이들, 서편제나 사물놀이와 같은 한국의 전통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는 이들도 있다. 물론 한 사람에게서 서로 다른 특징을 동시에 보이기도 한다.
넷째, 청년세대는 생각하는 것과 행동 사이에 모순적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일본에 대해서는 싫다는 의견을 지배적으로 보이지만, 일제 가전 제품이나 문구를 사용하고 일본풍의 의상을 선호하며 일본 노래를 즐겨 듣는 모순적인 경향을 보인다.
다섯째, 감성적인 특징이다. 흑백 시대로 불리우던 기성 세대와는 다르게 색채 혁명으로 불리우는 컬러 TV와 함께 성장한 세대의 특징을 보인다.
여섯째, 모방성과 개성이 강한 세대이다. 이들은 새로운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흡수력이 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잠재된 창의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현재 청년 세대는 자기주장이나 자기표현이 분명하고 개성을 중시한다. 이들은 영상 세대이며 PC세대로 문자 매체를 싫어하고 광고를 좋아하고 비디오 매니아가 많다. 그리고 적극적, 진취적이고 과감하며 개방적, 능동적이다. 형식보다는 실속을 중시하고 합리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기성 세대의 고정 관념으로부터 탈피, 탈고정 관념적 성향을 지닌다. 자유 분방함을 추구하고 권위를 싫어하며 획일성을 지양하고 다양성을 추구한다.
4. 한국에서의 청년 사역의 상황
70년대 한국 교회의 성장신화는 80년대와 90년대에 들면서 점점 완만해지고, 더딘 성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사실 심각한 문제는 한국 교회의 청년들이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래의 한국 교회의 주일학교의 공동화는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교회는 더 이상 소화해내지 못하는 청년들에게 새롭게 접근해야할 시기이다. 청년들에 대해 보통의 기성세대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문화적 이질감으로 인해 그들에게 다가갈 수 없다.
이제 한국 교회는 미래의 주역일 청년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문화와 생각을 이해하고 이에 적합한 선교전략을 구사해야할 시기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낮은 출생률과 낮은 사망률을 보이는 인구 안정기의 사회로 진입하면서 경제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안정감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에 복음에 대해 비교적 비수용적인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이때 부터는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계층과 그룹들에 대한 특수한 선교와 목회의 필요성이 요구하게 된다.
교회에서 청년 감소 현상의 원인은 한마디로 감동도 재미도 없어 밖으로만 맴돈다고 할 수 있겠다. 청년 교인이 감소하는 것은 교회의 교육 등 프로그램상의 문제와 사회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청년 교인 감소의 교회 내적인 원인은 주로 교회의 프로그램 및 교육과 관련되어 있다. 특히 사회의 여러 측면이 발달하면서 청년들이 흥미를 느끼는 대상이 엄청나게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아직까지 구태의연한 프로그램을 계속 운영하고 있다는 점을 가장 먼저 지적해야 할 것 같다.
한마디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19세기의 방법으로 짜여진 내용을 전달하려 하다 보니 흥미를 만족시켜 주지 못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시대착오적인 프로그램이 계속되는 한, 청년 교인들의 감소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한 집단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형식, 내용, 이념, 그리고 교육자와 피교육자라는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사회가 변화하고 발전하면, 가장 먼저 피교육자가 교육 외적인 요인으로 인해 변화한다. 이 경우 교육은 그 이념을 살려 나가면서 교육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도록 형식, 내용 등을 변화시켜 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피교육자인 청년층이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분야의 변화를 거의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교회의 교육 이념이 일정하게 세워져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 교회의 교육 이념이 올바르게 수립되어 있다거나 아니면 이것이 청년들에게 제대로 전달된다는 징후는 별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년들은 ‘배울 것이 없는’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의식과 구조도 청년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한다. 교회의 어른들에게 있어서 청년들은 ‘공부 잘하고 말만 잘 들으면 되는 존재’ 정도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 틀에서 벗어난 청년들은 단번에 ‘문제아’로 낙인 찍히기 십상이다.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힌다든지, 자신이 가진 특기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재능이 허용된다면 성가에 필요한 목소리나 피아노 등 악기를 다루는 재주 정도이다. 한마디로 교회 전반적으로 청년들이 소외되고 있는 현실이 청년들을 교회 밖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한국 교회는 교육적 측면에서나 의식적, 구조적 측면에서나 청소년들을 감싸주기보다는 소외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5. 앞으로의 청년 사역의 방향
청년 그들의 성패는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사회나 교회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의 미래의 희망이요 우리사회가 가진 가장 소중한 자산이다.
그래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기능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즉 교회의 갖가지 기능에 참여하도록 교육시키는 기능으로서 교회의 유지 수단적 기능에만 주력함으로써 생명력을 상실하고 구태의연한 교육방식이 지금도 머리수를 늘리기 위해 그대로 사용되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폐쇄성은 청년들의 환경을 제한시키는 결과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자원을 바르게 계발하여 미래를 책임질 수 있게 하는 것은 기성세대 어른들에게 주어진 책임이다. 여기에 교회가 건전한 청년 사역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와 그 사역의 중요성이 있다.
첫째, 지원적 사역(Support Ministry)이다. 이는 교회가 청년들에게 자신들이 정말 가치 있는 존재임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하며, 하나님이 실제로 그들을 보호하며 감싸주신다고 하는 신뢰를 갖게 해 주는 교역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사랑으로 접촉되어 있음을 다시 인식하게 하는 것은 청년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그들을 직면시킴으로써 자기를 탐색하고 있는 과정의 청년들에게 격려하여 주고 지원해 주는 것은 그들의 사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며 또 자기 자신만의 울타리 안에서 나와 그 자신 외의 다른 사람, 그리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의 자리에 있게 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충고가 아니라 지원하여 주는 것은 교회 교역의 독특한 잠재력이 된다.
둘째, 긍정적 사역(Affirmation Ministry)이다.
청년들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 사이의 차이에 매우 민감하며 그들은 자주 이러한 차이에 근거해서 그들 자신을 부정적으로 판단하여 삶의 모든 면을 어둡게 만든다.
셋째, 상호인격적인 사역(Interpersonal Ministry)이다.
청년의 자아 정체감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형성된다. 그들이 정체감 문제에 접하고 그것을 타자와 인격적으로 나눌 때 청년들은 다른 사람의 여정에서 대화할 기회를 갖게 된다.
Ⅶ.청년을 위한 대안적인 예배의 형태에 관한 제안
- 파티 예배
앞에서 고찰하였듯이 역사적으로 예배는 역할과 형식에 있어서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화하여 왔다. 예배의 변화는 서양 문명의 발전과 그 시대의 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초대교회의 카타콤 예배, 중세의 예배의 형식, 종교개혁의 예배 갱신, 청교도의 예배 모범, 오순절 교회의 예배의 모습들은 특수한 시대적 상황이나 나상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이렇게 예배가 변화되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교회가 시대의 변화에 앞장서서 변화를 주도하기보다는, 예배의 회중들의 관심과 요청이 더 큰 영향을 미쳐왔다. 이런 관점에서 예배에서 문화매체의 사용에 대한 이슈도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왜 예배에서 새로운 문화 매체를 사용해야 할까?
첫째는 현대 사회가 새로운 문화적 형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시대는 정보화시대, 영상문화시대, 또는 디지털시대라는 말들로 잘 설명될 수 있다. 활자가 발명되던 시대에는 인쇄물로, 라디오 시대에는 음성으로 하듯이 현 시대의 산물인 멀티미디어를 예배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사용하는 것을 거부할 수는 없다.
둘째는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맞는 문화적 행동을 하기를 원하는데, 신세대 회중들에게 현대문화매체는 필수적인 수단이며, 이러한 매체를 사용하여 이미지를 창조하고 싶어한다.
신세대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이 기성세대와 크게 구별되는 점은 기성세대들이 소수의 전문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를 수용하는데 익숙한 반면, 이들은 각자가 이미지를 창조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예배에서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어 한다. 찬송을 할 때도 온몸을 사용하는 것을 더욱 자연스럽게 느끼고, 광고도 음성이 아니라, 영상을 통한 광고에 더 큰 감동을 받는다. 신앙의 표현을 드라마나 어떤 몸짓으로 하는 것을 더욱 선호하는 세대이다.
이러한 세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다음에 나올 파티적 예배를 청년예배의 대안으로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파티의 정의
파티의 단순한 사전적인 의미를 따지면 ‘친목을 도모하거나 무엇을 기념하기 위한 잔치나 사교적인 모임’이라 정의할 수 있다.
2. 현대의 파티의 의미
우리나라에 파티란 개념이 유입된 것은 개화기 서양문화가 도입 되면서부터였으며, 경제적 소득 향상과 삶의 질을 중요시 하는 90년대를 넘어서면서 파티는 단지 사치스러운 특수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닌 좀 더 보편적인 의미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현재는 남과 좀 더 다른 특별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개인들의 욕구로 소규모 파티가 성행되고 있다.
즉, 파티는 평범함 속에서 특별한 이벤트를 마련하는 것이며, 일상생활의 청량제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파티는 곧 축제문화에서 자연적으로 파생된 연희 활동이었다. 축제는 예술적 요소가 포함된 제의에서 출발 했으나 유희성을 강하게 지니게 되어 오늘날에는 종교적인 신성성의 거의 퇴색되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축제의 오랜 형태인 제천의례는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음주가무하며 즐기는 것이 관례였다. 단순히 술 마시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바로 축제가 신성한 종교 행사였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오늘날의 축제는 종교성을 상실되어 유희적이고 놀이적인 모습이 강조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파티를 이야기 하면 클럽을 빼놓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클럽은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만나서 공통된 관심사를 추구하는 장소로서 등장했고, 클럽의 개념은 음악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발달해 왔다. 이러한 클럽의 공동체적 네트워크는 공통의 관심사와 문화 양상에 근거해 특정 지역의 클럽 문화를 창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클럽 파티문화의 본질적인 부분은 상실되고, 일부의 언론과 방송들로 인한 이미지가 젊은이들의 불건전한 밤 문화 위주로 소비와 향락적인 부분을 부각시켜 왜곡된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3.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파티
1)성경에서 언급된 파티의 종류
➀ 진설(陳設): 음식을 마련하여 상을 베푼다는 뜻임.(창세기 18:8)
ן?? : 나탄이라고 읽으며 의미는 “주다, 놓아주다, 허락하다, 봉헌하다, 생산하다, 만들다. 언급하다”라는 뜻이 있음.
➁ 식탁: 나그네들을 위해 경건한 자들이 베푸는 정성스런 접대를 가르킨다.
ה??? : 미쉬테(원어) 마시다‘연회’,‘잔치’의 뜻(창세기 19:3)
➂ 잔치: 아비멜렉과의 계약체결 이후에 행해진 절차로써 이는 고대 근동의 풍습으로 체결된 계약의 확인과 인정을 뜻하는 관례적 행위(창세기26:30)
ה??? : 미쉬테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
➃ 떡: 희생 제사를 드린 후에 갖는 공동의 식사 또는 잔치를 의미한다. 이는 고대 제사의 축제적 성격을 반영하는 것으로, 신에 대한 감사와 기쁨을 서로 교제하며 함께 나누는 행위이다.(출애굽기 18:12)
ם?? : 레헴이라고 읽으며 뜻은 빵, 음식, 떡덩이, 고기, 먹을 양식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2)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파티
황성철 교수는 “기독교의 예배는 본질적으로 역사 안에서 행하신 하니님의 활동, 즉 창조, 섭리, 구속의 약속,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가가의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적 계시, 그리고 성령님의 강림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나심을 찬양하고 축하하는 축제이다.”라고 하였다.
풀러 신학교의 예배신학자 마틴(Ralph Martin)도 “예배를 영적이고 극적인 축제(spiritual and dramatic celebration)”라고 정의하였다. 버크하르트(John Burkhart)는 “예배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하셨고, 하시고 계시며, 또 앞으로 하실 것에 대한 축제적 응답이다.”라고 말했다. 랑게(E.Lange)는 “예배를 언약 갱신의 축제 또는 축하행위”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 예배의 문화는 축제의 문화가 아니라 경건과 제의의 문화이었다. 유교적인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던 터라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상스러운 하층민의 것으로 생각되는 문화적 배경 위에 예배의 형식들이 정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배속에서 지나치게 ‘경건’만을 강조한 결과 예배의 분위기는 무겁고 비장함이 흐르는 경향으로 흘렀다. 예배도중 찬송을 부르는 것 외에 회중이 소리를 낸다든지, 아이들의 약간의 소음만 끼어들어도 거룩한 예배를 망치는 것으로 여겼다. 예배시간에 웃거나 박수를 치는 것을 금지하는 교회도 있었다.
기독교 예배가 파티인 이유는, 첫 번째, 부활의 공동체가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거룩한 자녀들이 함께 감사와 기쁨으로 그리스도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이다.그래서 예배는 기쁨의 잔치인 것이다. 초대교회의 모임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47), 큰 기쁨으로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었다.(눅 24:52-53) 그렇다면 오늘 예배도 그 기쁨을 잘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
두 번째, 예배는 교회의 미래이며 실존인 하나님 나라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배 안에 현재한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인 천국을 지향하며 그 모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예배가 기쁨과 즐거움의 파티가 되고 찬양과 경배가 넘쳐나야 하는 것이다.
세 번째,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파티가 되기 때문이다. 파티적인 예배의 모습을 성경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노래하며 춤을 추었을 때(삼하 6:12-23), 다윗이 그 모습을 보고 멸시하는 미갈에게 다윗은 이렇게 대답한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겼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삼하 6:22)”
여기에 파티예배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 있다. 왜 다윗이 노래하고 춤 출수 있었는가? 그것은 바로 “여호와 앞에서“라는 이유에서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서 행해지는 것이라면 우리의 예배도 노래하고 춤추는 파티가 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는 예배라면 우리는 순전함과 겸손함, 그리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예배해야 할 것이다.
3) 파티적인 예배에 대한 제언
현재 한국적 상황에서 클럽과 파티라는 용어가 다분히 세상적인 청년문화로써 일부 대중매체와 언론에서 밤 문화와 소비 향락적인 부분만을 부각 시켜 부정적인 인식이 생긴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로 인해 실제로 그러한 목적으로 클럽을 찾는 사람들이 늘게 되어 이미지가 퇴색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언어적인 측면에서의 선입견으로, 여기서 제안 하고자하는 청년들의 파티적 예배는 본질적인 부분에서의 약간의 공통점을 가지고 청년들의 문화와 공감대에서 시행할 수 있는 예배의 형식이라 생각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젊은 크리스천들의 모임을 하나의 클럽이라 칭하고, 그 모임에서의 예배를 파티라 칭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떤 용어로 인해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청년 문화와 가까운 부분은 사용하여 더욱 청년들로 하여금 신선하고 친근감 있는 예배를 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재 청년들은 과거의 세대와는 문화와 요구가 다르다. 또한 현재의 예배의 모습이 정답도, 정형화된 형태도 아닌 문화에 따라 변화되어 왔고, 예배의 본질은 결국 밖으로 보이는 형태보다는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내용이 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현재 청년들에게는 그들의 피부에 와 닿는, 더욱 그들의 문화에 친숙한 형태로의 예배가 절실하다. 또한 더욱 예배의 본질적인 성격을 살리는 것도 현재 기독교계의 예배의 현실에서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다. 청년들은 또한 그들의 신앙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장이 필요하다. 적극적으로 회중이 참여할 수 있는 예배로 인해 더욱 많은 청년들이 인생의 목적과 가치를 깨닫는 기회를 찾을 수 있도록 배려해야한다.
그런 면에서 개방적이고, 열린 마음으로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인 파티적인 예배가 매우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형태라 제안한다.
소그룹식의 모임에 어느 정도 전문화된 찬양과 또한 여러 형태의 찬양팀들의 찬양으로써 서로간의 교제 또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예배가 찬양에 편중되지 않고, 여러 형태의 교제의 방식과 복음을 증거하는 방식으로써 영상, 연극, 또는 좌담회등 앞서 제시한 여러 형태의 새로운 요소들을 이용, 연구 개발하여 더욱 성경의 진리 복음이 우리 삶과 동떨어진 문화가 아니라, 우리 삶과 문화에서 적용, 발견 할 수 있고, 바로 우리 삶 자체인 것을 알려주는 도구로써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의 예배는 기존의 크리스천 청년들 뿐 아니라, 불신자인 청년들까지도 흥미를 가질 수 있고 자연스럽게 기독교의 사상과 복음이 흘러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동일한 예배로써 신자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불신자는 그들의 예배에 참여하고 보는 것만으로써 흥미 또는 호기심과 기대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러한 예배의 장점이라 하겠다.
많은 청년 크리스천 클럽모임이 생겨 셀 방식의 소그룹 모임을 통해 이러한 청년들을 위한 파티 예배가 활성화됨으로써 적극적으로 그들이 예배의 주체가 되고, 복음이 전파되는 장이 되고, 그들의 신앙을 지키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리라 생각한다.
Ⅷ. 결론
실제적으로 많은 크리스천들은 예배와 파티의 연관성에 대하여 부적절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생애 때 소위 경건파 신자들에게는 언제나황당하게 보이는 분이셨다. 바리새인 중에서는 상당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신앙 이미지를 보고 당황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파티를 여시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영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 확신했다.
현재 우리도 우리가 정해놓은 규율 안에서 외적인 모습을 통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예배는 인간의 내적인 문제가 되었다.
단순히 음악, 복장, 오락 활동, 또는 식사법 등과 같은 외형적인 것을 강조하는 것에서 태도, 가치관, 목표, 그리고 헌신과 같은 내적인 문제로 시선을 돌리도록 한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 중심적이지만 또한 인간의 삶에 기초를 두고 있다. 예배는 하나님 중심적이면서 동시에 문화 인류학적이라 할 수 있다. 예배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있고 예배에 사용되는 어투는 선포적이기 때문에 세속에서 분리된 특정한 의식이나 생각의 전환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전적으로 드리는 것은 일상적인 삶에 대한 불연속성과 연속성을 연결하고 요구한다.
예배의 형식은 본질을 담는 그릇이다. 예배의 내용은 분명히 영적인 내용에 항상 예속되어야 하지만, 예배는 그 외형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배의 형식은 회중이 하나님과의 만남과 대화의 교통이 가능해지도록 해주는 수단은 되지만 예배 자체는 될 수 없다. 따라서 예배의 모든 형식들은 예배자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교제와 대화를 돕기 위하여 준비되는 것으로 의미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예배의 형식과 본질은 구별 할 수는 있으나 형식은 본질을 담는 것이므로 구분될 수는 없다.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 작성시에도 갈등이 많았다. 그것은 예배의 형식(form)과 자유로움(freedom)에 대한 것이었다. 예배의 형식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적 예배를 드릴 것인가가 중요한 이슈(issue)로 등장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매우 심각하고 슬픈 논쟁들”이 일어났음을 의장이었던 마샬(Stephen Marshall)은 전체 회의에 보고하고 있다. 그 결과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이와 같이 상반된 입장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 동안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해 오던 예배서를 만들지 않고, 대신하여 예배 모범(directory for worship)을 작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배모범은 자연히 예전(liturgy)에 상반되는 것으로서, 예배의 주된 항목들을 요약하고 예배 요소들의 본질을 기술하는 정도로 마무리 할 수밖에 없었다. 갈등에 의해서 예배서를 만들지 못했다 할지라도 회의의 결과는 본질을 규정하고 그 본질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형식의 변화 가능성을 열어 놓은 것이다. 존 칼빈도 ‘성경이 예배의 형식을 세밀하게 규정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파티적 예배도 예배의 본질을 파괴하자는 것은 아니다. 단지 본질을 전달하기 위한 형식을 개선하자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는 많은 문화적인 요소를 받아왔고 실제 그것을 예배에 활용하고 있다. 교회가 시대를 이끌어가며 사회를 구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의 급변하는 상황을 바르게 인식하고 변화에 앞서가야 한다. 또한 끊임없는 준비 속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하며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예배 형식의 파괴는 분명 예배의 거룩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대적 예배가 주장하는 갱신은 ‘형식의 파괴’가 아니라 본질에 충실한 현대적이고 문화적인 상징과 형식을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분명 예배의 부흥은 그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본질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매력적인 예배가 되도록 문화적 형식에 대한 개혁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문화의 틀 속에 예배의 내용을 어떻게 담을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노력이다. 형식에 있어서 그 본질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거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은 본래의 본질이 주는 의미를 잘 살려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개혁되고 갱신되어야 한다. 예배 갱신에 대한 요청은 예배의 대상을 새롭게 하자는 말이나, 예배의 순서나 진행방식 또는 표현 방식을 새롭게 하자는 말이 아니다. 예배의 갱신이란 변천하는 시대의 유행에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인 교회전통의 핵심부분을 재발견하고, 이 전통을 이어 받고 표현하는 데 있어서 새롭고 참신한 방법을 발견하자는 것이다. 즉 본질의 훼손 없이 본질을 더욱 강조하며 보존하려는 노력이다.
예배의 순서와 표현 그 자체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대에 따라 계속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기들의 몸과 마음을 자기들이 공감할 수 있는 '시대적‘ 상징들 안에 온전히 담아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과 새롭게 함이 이루어질 때마다, 모든 형태의 예배는 무엇이 가장 본질적인 것인지를 다시 정의하여야 한다. 문화의 옷을 입은 예배가 그 본연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항상 본질과의 연결 끈을 놓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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