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타본Vulgata, Latin Version은 서기 391년부터 406년까지 성 예로니모 Hieronymus Sophronius(아래 각주* 참고)에 의해 구약은 히브리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고, 신약은 서기 2세기 이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어 있던 고대 라틴어 역본을 그리스어 원문과 대조 및 수정하여 완성한 라틴어 성경을 말한다.
구약 중에서도 시편을 포함한 6권은 신약성서와 마찬가지로 고대 라틴어 역본이 낫다고 여겨 히브리 본문과 대조하며 수정하는데 그쳤다. 여기 고대 라틴어 역본은 몇 권이나 되는지 오늘날 알 수 없지만 불가타본 작업 이전에 70인역(구약)과 그리스어 원문(신약)에서 이미 라틴어로 번역되어 있던 단행본들을 통칭한다. (최근 독일 보이론의 베네딕토 수도회에서 고대 라틴어본의 비판본을 출판중이라고 한다)
불가타는 대중적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이 명칭이 붙여진 것은 13세기에 이르러서인데 번역이 원문에 충실할 뿐 아니라 당시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 있어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이 불가타본은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법적인 정통성 및 신뢰성을 공인 받았으며, 다만 미흡한 부분에 대해선 위원회를 구성하여 식스토판과 식스토-클레멘스판Vulgata, Sixto-Clementina이 1590년대에 출간되었다.
식스토-클레멘스 Vulgata, Sixto-Clementina
이후 1907년에는 성 예로니모의 원래 텍스트를 복원하기 위하여 이를 위해 베네닉토 수도원을 건립하여 25권으로 된 베네딕토 수정판 불가타본을 1987년에 완성하였으며, 1965년에는 교황청 위원회에 의해 히브리어 및 그리스어 본문과 대조하여 본문을 보다 정확하게 다듬은 네오 불가타본이 1979년에 완성되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반포되었다. 오늘날 가톨릭교회의 공용 성경으로 라틴어 전례와 공식문서에 활용되는 불가타본은 이 네오 불가타본이다.
* 성 예로니모(히에로니무스, 제롬Jerome). 347년 달마티아의 아퀼레이아 근처 스트리도니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한 그는 12세 때 로마에서 수사학과 라틴어 문학을 공부하였고, 373년에 안티오키아에 머물면서 성서주석 방법과 그리스어를 공부하였으며, 이후 칼치스 사막에서 375-377년까지 은수자 생활을 하며 어느 랍비로부터 히브리어를 새로 배웠다. 379년에 일정한 사목직을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제서품을 받았고, 380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우스의 강의를 듣고 오리게네스Origenes의 성서주석 방법에 매료되었으며 니사Nyssa의 그레고리우스 주교와 교류를 가졌다. 이때부터 성인은 오리게네스의 수많은 저서들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성 인이 382년 로마에 왔을 때 교황 성 다마소 1세는 그를 비서로 임명하고 신구약성서 모두를 라틴어로 새로이 번역하는 대업을 맡겼다. 서방교회에서 이미 여러 개의 라틴어 성서 번역본이 있었지만 교황은 히에로니무스에게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라틴어 성서본을 만들도록 위촉한 것이다. 한편 당시 성인은 헬비디우스의 이론을 반박하는 "헬비디우스 논박, 복되신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에 대하여"(383년)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는 헬비디우스가 마리아는 예수 외에도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교황 서거 후 386년 여름부터는 베들레헴에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고,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34년 동안 성서번역 활동에 몰두하면서 당시 몇몇 이단적인 가르침에 대한 반박글을 발표하였다. 예를 들어 요비아누스의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 부인과 사제의 독신 그리고 성인들의 유해 공경 반대에 대해서 명확한 근거로 반박하였다. 하지만 성인의 가장 큰 업적은 391년부터 406년까지 계속된 성서의 라틴어 번역이었다. 391년부터 신약성경은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고 구약성경은 히브리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한다는 원칙을 세워, 70인역Septuaginta을 배척하는 유대인 랍비들과 토론을 벌이면서 새로이 번역하였다. 406년까지 계속된 이 엄청난 작업으로 번역된 라틴어 성서에 불가타Vulgata(대중적이란 뜻)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번역 당시가 아니라 13세기 때였다. 그 이유는 성인의 라틴성서본이 원문에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일 뿐만 아니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인은 419년 9월 30일 베들레헴의 수도원에서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아마도 교부들 가운데에서 가장 박학한 학자였고 동시대인들 중에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오늘날 성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그레고리오와 더불어 서방의 위대한 4명의 교회학자 중 한 명으로 불린다.
성 예로니모 Hieronymus, Jerome
'성경자료교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신구약 성경 사본 1 (쿰란사본) (0) | 2010.07.30 |
---|---|
[스크랩] 신구약 성경 사본 2 (70인역) (0) | 2010.07.30 |
[스크랩] 신구약 성경 사본 4 (사마리아 오경) (0) | 2010.07.30 |
[스크랩] 신구약 성경 사본 5 (마소라본) (0) | 2010.07.30 |
[스크랩] 신구약 성서의 정전 형성과 외경 (0) | 2010.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