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칠언架上七言은 서기 30년 4월 7일 금요일 오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골고타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남기신 일곱 가지 말씀을 말한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마르코 15,34; 마태오 27,46) ②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사실 그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루가 23,34) ③ 진실히 당신에게 이르거니와, 당신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루가 23,43) ④ 부인,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입니다. 보시오, 당신의 어머니시오(요한 19,26-27) ⑤ 목마르다(요한 19,28) ⑥ 이루어졌다(요한 19,30) ⑦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루가 23,46)
성 바오로딸 수도회 - 백구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Eloi, eloi, lama sabachthani?"(마르코 15,34; 마태오 27,46)
이 말씀은 하느님께조차 방치되어 버림받는 것 같은 고독감과 비탄lament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려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활 기간에 수난을 예고하신 적이 있고(마르코 8,31; 9,31; 10,34), 성전을 사흘 안에 다시 세운다고도 하셨고(요한 2,19), 다 이루시기 전에 이루셨다고 하셨고(요한 17,4), 성자는 성부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항상 행하기에 홀로 버려두지 않는다고 하셨고(요한 8,29; 16,32),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놓는다고도 말씀하셨는데(요한 10,18), 이러한 말씀들을 참작할 때 이제와 새삼스레 버림받은 절망despair을 느낀 것은 아니며 앞으로 그분을 따르는 신앙인들이 이런 심정에 직면할 것임을 알려주시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다만, 구약시대에 말씀이 무력하게 된 측면에서는 하느님과 일치된 심정일지도 모르겠음). 이 비탄은 앞서 게세마니에서 근심하며 번뇌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과 동일한 심정일 것이다(마르코 14,32-42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죽기까지 따르는 본보기로서(요한 13,15; 1베드 2,21) 마지막 승리에 이르기 위해 겪어야 할 심적 과정을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주셔야 했던 것이다(요한 16,32-33 참조)
한편 이 말씀은 시편에서 다윗왕이 하느님을 향해 외쳤던 말이기도 한데(시편 22장 참조) 다윗 가문에서 나신 성자하느님 예수Jesus께서 되풀이하여 말씀하신다. 이에 대한 하느님의 답변은 22장 뒷부분과 이사야서 49,14-15절 등에 있다. 목숨(생명)을 얻으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루가복음 9,23절도 깊이 묵상해야할 구절로 보인다(→버림받은 것 같은 심적 상태를 이겨낼 수 없다면 이는 자애심自愛心 내지 자기애착, 자존심, 교만, 탐욕, 명예욕과 소유욕, 본성, 지배와 군림욕 등에 기인하여 자기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시련 고난 등의 어떠한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충실하실 것을 원하신다(베드로전서; 히브리 12,3; 10,36-39; 하바꾹 2,4; 이사야 53,10 참조). 끝이 새로운 시작이고 죽음이 새로운 생명을 가리키고 있다면 여기에서의 슬픈 비탄은 새로운 희망과 승리의 전주곡이 아닐까.. 그리스도를 완전히 닮기를 원했던 샤를 드 푸코 복자께서 1902년 9월 30일 게랭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현실로는 불가능합니다만 완전하게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가운데 완전하게 나 자신을 없애는 일 이외의 일을 혹시라도 내가 할 수 있다면 나로서는 완전한 실패, 영원의 고독, 모든 일에 있어서의 좌절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거기에는 그분의 비하와 십자가에 대한 우리들의 최대의 일치가 있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사실 그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루가 23,34; 이사야 53,12 참조)
이 구절은 원수 사랑의 가르침(루카 6,27-36)을 몸소 실천하심을 보여주신다(마태 6,12). 즉 삼위일체 하느님은 무지로 인한(사도 3,17; 13,27; 17,30; 1코린 2,8)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시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는 말씀을 떠오르게 하며(루카 5,32), 회개를 바라시며 인내하시는(로마 2,4; 루카 24,46-47 참조) 하느님의 사랑과 의로우심을 보여준다(로마 3,25 참조). 여기에서 '무슨 짓'은 요한 16,2-3절에서 제자들이 박해로 인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내지 신앙을 잃지 않도록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생각하면 이해에 도움이 된다. "여러분을 죽이는 자마다 그런 일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할 때가 옵니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행할 것입니다"(요한 16,2-4; 15,18; 8,40-41). 또한 마태오 23,32절의 '조상들의 못된 짓'도 이와 관련이 있다. 당시 일부 유다인들은 모세 율법에 의거 그리스도를 신성모독자로 여겨 죽이는데, 그들은 율법 문자에 사로잡혀 이러한 죽임을 마치 하느님께 자기희생의 제물을 바치는 예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광신자였다(사도 6,8-8,3 참조). 율법 문자를 섬겨 살인(1요한 3,14-15)을 일삼는 자들(요한 8,37-44)에게 다음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속에 울린다. "왜 나를 죽이려 합니까?"(요한 7,19). 용서는 죄를 묶어두지 아니하고 회개의 여지를 남겨 주는 사랑의 표현이며(로마 2,4; 사도 7,60), 만일 이렇게 풀려있는 상태에서도 회개하지 않고 계속 죽이는 일을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예고하신 대로 두 번째 죽음의 지옥행이 될 것이다(마태 23,32; 요한 8,21)
한편 위의 요한 16장 2절 등에 쓰인 '예배 또는 제사'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성체성사적 관점에서 십자가를 지는 희생 또는 자기봉헌의 의미를 지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구절을 참고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자비이지 제사가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여러분이 알았더라면 무죄한 사람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마태 12,7; 9,13).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께 맞갖은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시오. 이것이 곧 여러분에게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영적인 희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일치하여) 바치도록 하시오"(1베드 2,5). "선행과 서로 나누는 일을 잊지 마시오. 하느님은 이런 제사를 기뻐하십니다."(히브 13,15-16)
"진실히 당신에게 이르거니와, 당신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루가 23,43)
십자가에 달려있던 죄인 가운데 한 명이 불신(정말 당신이 그리스도가 맞느냐)과 세속적 차원의 구원을 바라는 반면에, 또 다른 죄인은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회개하며 그분을 옹호하면서(하느님 사랑) 내세적 차원의 구원을 바라는 태도를 보인다. 즉 후자는 하느님의 존재와 내세를 믿고 있고, 회개하면서, 예수님을 옹호하는 행실을 보이고 있어 죄와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그분과 함께 낙원에 있을 거라는 말씀을 듣게 된다(사도 10,42-43 참조). 이 죄인은 성자의 말씀과 동시에 죽음의 영역에서 주님과 일치하여 함께 하는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갔다고 하겠다(요한 5,24 참조). 이 구절은 선한 사람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늘에서 더 기뻐한다는 말씀을 상기시킨다(루카 15,7)
"부인,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입니다. 보시오, 당신의 어머니시오"(요한 19,26~27)
이 말씀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구원의 신비와 관련하여 대표성을 지닌 역할 관계 등에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구절이다. 과거에 영국 성공회 더비셔Derbyshire 관구의 주교였으나 현재는 은퇴하신 스테픈 버니Stephen Verney 주교께서 잘 묵상해 주신 글(제목:Water into Wine)이 있어 인용한 다음에 개인적인 의견을 서술한다. "요한 19,25-28절, 이것이 바야흐로 예수께서 탄생시키시려는 사랑의 실재이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할 일을 하신다. 그리고 성 요한은 '예수께서 이것을 행하신 후에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아셨다'고 우리에게 전한다. 여기서 '자기 집에'로 번역된 그리스어 '에이스 타 이디아'는 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말은 '자신의 마음을 다하는 깊은 (영적인) 친교로'를 뜻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사랑의 실재 안에서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를 마리아에게 내어 주신다. 예수께서 마리아와 사랑하는 제자에게 하셨던 말씀은 우리의 지성이나 상상으로는 금방 깨닫기 힘들 정도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과 경험 안에서 일생 동안 조금씩 드러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와 애제자는 하느님의 영광이 인간의 몸으로 내려와 머무른다는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눈다. …우리는 이 상황을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주었고,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그리스도가 된다. 우리가 서로 안에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을 놓아줄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탄생시키는 셈이 된다. 우리가 우리 각각의 내면 깊은 곳으로 서로에게서 나오는 예수님의 성령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다. …이들은 새로운 시대의 생명으로 함께 엮어져야만 하는 두 개의 실재이다. 겉으로 보기에 마리아와 사랑하는 제자는 각각 중년의 시골 아낙이며 지적인 한 명의 젊은 남성이다. 우리는 이들 안에서 성숙함과 젊음, 직관과 이성, 여성과 남성, 그리고 전통적 신앙과 예수님을 통한 새로운 신앙의 도전이라는 대립적 요소들을 만나게 된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것이다. 너희의 모든 대립은 함께 하나로, 위에서 아래까지 더 이상 꿰맨 데 없이 통으로 짜여지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보여 주신 자비의 심연을 우리가 어떻게 감히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을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하시는 순간에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를 마리아에게,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내어 주셨고, 마침내 그들은 하나가 될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성모님의 역할은 2장에 나오는 가나 혼인잔치에서도 부분적으로 드러나고 있는데(이에 대해서는 http://blog.daum.net/_blog/BlogView.do?blogid=0IDRC&articleno=646640&categoryId=346578 참고), 이제 십자가 아래에 서있는 19장에서는 그리스도의 계시 사명을 이어받아 복음을 증언(19,35; 21,24)하는 애제자의 어머니가 되신다. 여기 애愛제자는 그분의 품 가까이에서 내적인 것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사랑받고 신뢰받은 제자로(13,23-26 참조) 그리스도의 자기계시 및 구원계시, 즉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20,31절의 앞부분) 구원 내지 생명에 이르는 사랑의 복음을 설명하는(20,31절의 뒷부분) 역할을 부여받은 제자였다(실제 복음서와 요한서간, 묵시록을 통해 엄청난 계시를 하고 있다). 애제자는 새로운 모자관계에 따라 그분의 어머니(루가 1,43)를 집에 모심으로써(→직역하면 그분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어머니로서의 성모님과 그 역할을 받아들인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이루신'(요한 19,28) 이 모자관계 형성으로 인해 계시자였던 예수님과 성모님의 관계가 그리스도의 계시자인 애제자와 성모님의 관계로 그대로 옮겨간다. 여기에서 어머니라 함은 성모께서 두 번째 하와로서(생명의 어머니, 창세 3,20 참조),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요한 14,21; 21,7 참조)가 대표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어머니라는 것인데('your mother' is a declaration that Mary, the new Eve, is the spiritual mother of all the faithful, of whom the beloved disciple is the type and representative), 이는 성모님께서 믿음의 응답(순명. 루가 1,38)으로 말씀(구원 내지 생명, 그리스도)을 잉태하여 낳으신 구원의 신비와 관련이 있다(이처럼 믿음의 응답으로 인한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잉태는 보편적인 구원의 메시지이다. 요한 14,23 참조). 말씀이신 성자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의 믿음의 응답으로 세상에 들어오셨고,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는 이러한 말씀을 자기 안에 모시는 또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을 지니는 그리스도(인)이 되므로(14,21-23 참조), 말씀을 낳으신 어머니와 당연히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애제자는 예수님께서 집을 떠나 공생활 중에, 즉 하늘나라를 선포하실 때의 제자이고 예수님의 육적인 동기들은 따로 있었으므로 이 구절을 어머니의 세속적 삶이 걱정되어 효도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한정하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즉 그리스도께서 육적으로 모시던 사정을 이제 애제자에게 맡긴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타당성이 없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성모님의 육肉이 걱정되어 그런 말씀을 하셨고 계시자의 복음서에까지 실리도록 하셨을까, 또 이것이 마지막 계시(19,28)로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었을까?? 이제 십자가 아래로 부름받은 애제자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불순종으로 하와가 맺어놓은 매듭(죄와 죽음)을, 순명(루가 1,38)으로 말씀이 사람이 되게 하신 생명의 어머니이자(두 번째 하와) 계시의 협조자인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고 계시를 이어가게 될 것이다(19,35; 20,31)
"목마르다"(요한 19,28)
시편 22,15절 및 69,20-21절과 관련이 있는데, 식초와 함께 생각할 때 후자가 더 관련이 있어 보인다. "수치에 수치를 당하니 심장이 터지려고 합니다. 이 기막힌 쓰라림, 가실 길이 없사옵니다. 동정을 바랐으나 허사였고 위로해 줄 이를 찾았으나 아무도 없었습니다. 죽을 달라 하면 독을 타서 주고 목마르다 하면 식초를 주는 자들…"(시편 69,19-21).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들의 대응은 쓰라림을 준다. 한편 이 말씀은 아래 "이루어졌다"는 말과도 연결된다. 즉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음식은 자신을 파견하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다 이루는 것이다(요한 4,34). 따라서 배고픔과 갈증은 아버지의 뜻을 끝까지 다 이루고자 하시는(요한 18,11), 또한 모든 예언을 성취코자 하시는 갈망의 형상어에 속하며, 예수께서 식초를 거부없이 받았다는 표현은 이런 설명을 가능케 한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예수께서 지상에 파견되어 수행하셔야 했던 일, 즉 성부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계획하셨던 사랑과 순명의 본보기로서의(요한 13,15; 1베드 2,21; 요한 21,19; 8,12; 마태 19,21 참조) 십자가상 희생을 통한 구원계시를 다 이루었다는 뜻이다(요한 17,4 참조). 성자께선 성부께로부터 받은 사명mission(하느님의 뜻, 마르 14,36; 요한 6,38; 마태 3,15)을 십자가상 죽음에 이르기까지 기꺼이 순종하셨다(필립 2,8; 요한 14,31; 10,18; 8,29; 4,34; 2고린 1,19-20 참조). 그분의 죽으심과 승천 이후에 그리스도의 자기계시와 구원계시는, 말씀(구원 내지 생명)을 잉태하신 어머니와 영적인 모자관계를 맺게 된 애제자에 의해 증언된다(요한 19,35; 20,31; 21,20-24 참조)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루가 23,46)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기희생적 사랑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지고서 죽기까지 순종의 본보기가 되어주신(루가 22,42; 필립 2,8; 요한 13,15; 1베드 2,21; 2고린 1,19)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며 자신의 영을 온전히 그분께 맡기시는(의탁하는) 말씀으로 시편 31,5-8절에 유사한 표현이 있다. 이 말씀은 임종시에 한정되는 말씀이 아니며, 신뢰와 전적인 의탁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그분의 죽음에 참여하며(로마 6,3-5) 따르는 모든 신앙인에게 요구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루카 22,42 참조). "하느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당하는 이는 선을 행함으로써 진실하신 창조주께 영혼을 맡겨야겠습니다"(1베드로 4,19). 그리스도교의 첫 순교자인 성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으소서"라고 기도를 올린 적이 있다(사도 7,59)
참고문헌.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 영적독서를 위한 신약성서(성요셉출판사), The New Jerome Biblical Commentary(R.E.Brown외 2인, Prentice Hall), The New Jerusalem Bible(by Henry Wansbrough, Doubleday, 1985), 주석판 성요셉 공동체 성경(성요셉출판사), 해설판 공동번역 신약성서(국제가톨릭성서공회, 일과 놀이), 나오너라(성서 가족을 위한 요한복음서 해설 1, 최안나, 성서와함께), 놀라운 변화(마음으로 만나는 요한복음, 스테픈 버니, 생활성서사), 사하라의 불꽃(샤를 드 푸코의 영적 수기, 바오로딸), New Revised Standard Version(3rd Edi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The New American Bible(ST PAULS,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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