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쿰란의 한 동굴(Qumran Cave 1)에서 산양을 쫓고 있던 베두인족(유목민) 양치기 소년에 의해 토기에 담긴 오래된 히브리어 구약성서 두루마리 등의 문서 더미가 발견되었다. 이 문서들을 쿰란문헌(사해문서, 사해 두루마리, Dead Sea Scroll)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 개의 문서가 아니라 사해 서북쪽 연안의 쿰란동굴을 포함하여 사해 서쪽의 유다의 황야로 일컬어지는 지역에서 과거에 발견되었고(특히 쿰란에서 남쪽으로 20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무라바트 동굴과 30Km쯤 떨어진 엔게디 바로 아래 헤베르 동굴에서 1-2세기의 귀중한 문헌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현재도 계속 발견되고 있는 수많은 고문서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그동안 이 지역에서 발견된 문서로는 에스델서를 제외한 구약성서의 모든 책과 일부 주석서(하바꾹 나훔 미가 이사야 호세아 스바니야 시편 37편 등), 외경 및 성경 이외의 문서들이 있는데, 이중 중요한 것을 살펴보면.. ①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이사야서 두루마리(1QIsa) ②쿰란공동체의 조직과 생활에 관해 규율한 수도원 규칙서(1QS) ③쿰란 수도원 설립과정과 관련된 해설이 있는 하바꾹서 주석(1QpHab) ④종말에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규범인 이스라엘 규칙서(1QSa) ⑤종말에 치를 전쟁과 전술을 담은 종말전쟁기(1QM) ⑥감사시편(찬미가, 1QH) ⑦시편 집성(11QPs) ⑧1910년 카이로에서 발견된 것으로 문헌상 결혼과 사유재산이 허용한 것으로 보아 일반 평신도를 대상으로 한 듯한 다마스커스 문헌(CD) ⑨성전 설계와 성전 축제, 정결례, 형법 및 재판규정 등 다양한 내용이 들어있는 성전 두루마리(RT, 이 문헌은 베들레헴의 어느 골동품상이 엄청난 값으로 팔아먹으려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1967년 6일 전쟁때 이스라엘군이 베들레헴을 점령하고 습격해서 압수했다고 함) ⑩노아 탄생에서부터 창세 15,4까지 재미있는 이야기 형태로 엮은 창세기 전설(1Q GenAp) 등이 있다.
* 보충(사해 두루마리). 사해 두루마리는 사해 연변의 북서쪽 11개의 쿰란 동굴에서 1947년 이후 발견된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 문서를 말하며, 주로 양피지와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다(양피지 두루마리는 800여개가 발견되었다). 발견된 성서는 에스델서를 제외한 구약성서 전부와 외경의 상당 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밖에 공동체 조직과 생활 등과 관련된 여러 문서가 발견되었다. 이중 12족장의 유훈遺訓, 요엘서의 단편 등은 신약성서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기원전 2세기의 시대에 속하는 이사야서 필사본(약자 IQISa)은 오늘날 이사야서 번역가들이 반드시 참고해야 할 대본으로 손꼽힌다. 위 문서들은 1세기 유다교 분파와 그리스도교를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발견된 성경 사본
쿰란문헌 보관 모습
쿰란 제1동굴에서 발견된 점토단지(높이 65.7-47.5cm, 직경 25-26.5cm)
* 보충(쿰란 폐허, 공동체 거주지). 예루살렘에서 약 30Km, 예리고에서 13Km, 사해 연안에서 1.3km 거리에 있는 이 곳은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발굴이 시작되었다. 발굴 결과 수도원 중앙에 회의실과 도서실(→이 도서실이 발견된 쿰란문헌의 집필 장소일 것이다), 식수 등으로 사용할 여러 저수장(우물이 없어 뒷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 저장), 남쪽과 북쪽 끝에 정결례를 위한 저수장이 있고 남쪽 저수장 곁에는 식당이 있다. 수도원 남쪽 바깥에는 옹기 가마가 있었는데 쿰란 문서를 담은 옹기는 여기서 제작되었다. 수도원 서쪽의 계곡과 산에는 자연 동굴과 인공 동굴이 많이 있는데(수도원의 동쪽은 호수) 수도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런 동굴에서 살았다.
발굴된 공동체 거주지
정결례(미끄베) 저수장
문헌이 가장 많이 발굴된 4번 동굴(Qumran Cave 4)
쿰란 동굴에서 출토된 일상 용기들
* 보충(사해, 死海, Dead Sea). 죽어서 존재하는 바다 사해는 거대한 바다와 같은 호수이다. 남북 길이 80Km, 동서 길이 16Km, 평균수심 146m, 면적 1,020㎢로서 대함몰지구대에 있는 관계로 호수면이 해수면보다 392m 낮아(Earth 394m below Sea Level) 지구에서 가장 낮은 지역이다. 사해는 북쪽의 요르단강, 동쪽의 아르논강, 남쪽의 세레드강 등으로부터 물이 들어오기만 하고 나가는 곳이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는 까닭은 사막 건조기후여서 물이 들어오는 양만큼 증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염분농도가 지극히 높아 보통 바닷물의 다섯 배인 30% 정도여서 생물이 살 수 없고(→사해 이름의 연유가 됨) 부력 1.166으로 물 속에 들어가면 그대로 떠있을 수 있다.
사해의 위성사진 사해의 소금기둥
사해 Dead Sea
(하얀 것은 소금. 사해는 지구상에서 가장 염분이 많은 물로 여겨진다)
사해 Dead Sea
이스라엘 사해의 지형 높이가 해수면 아래 394m라는 사해 표지판으로
히브리어 아랍어 영어로 쓰여 있다.
호수 서쪽의 예루살렘과 동쪽의 헤스본의 지형 높이가 1Km에 근접하므로
예루살렘과 사해의 수직 높이는 1.3Km 내외가 된다.
현재 인류가 소유하고 있는 히브리어 텍스트(수천 개)는 거의 전부가 마소라본이며 제일 오래된 것은 서기 9-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쿰란에서 발견된 텍스트들은 기원전 3-2세기로 연대가 추정된다. 쿰란의 두루마리들은 히브리 마소라본이 얼마나 충실하게 성서 본문을 전달하고 있는지 입증하여 준다. 오늘날 쿰란의 두루마리들은 스투트가르트 히브리어 성서에서 본문 비판에 많이 인용되고 있다. 이 스투트가르트판 히브리 성서는 쿰란 유적의 발굴 이후 1967-1977년경 발간되어 키텔Kittel의 히브리 성서(Biblia Hebraica, 1927~1937년 간행, 공동번역의 번역대본)를 기본텍스트로 하면서 쿰란 수사본을 반영하여 보다 완전한 히브리어 성서이면서 본문비판으로도 훨씬 가치가 크다(가톨릭 공용 성경의 번역대본이기도 함)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히브리어 성서 사본보다 거의 1천년이나 더 오래된 사해 두루마리의 발견이 가져다 준 공헌은 크다. 첫째로는 구약본문 비평학舊約本文 批評學에 대한 기여인데, 마소라 본문과의 비교 또는 70인역(LXX; Septuaginta)의 평가문제 등에서 구약 비평학은 새로운 전개를 보이고 있다. 둘째, 히브리어 학자에게 새롭고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셋째, 종래에 자료가 빈약했던 신구약 중간시대사, 특히 에쎄네파의 사상 교의 생활 등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제공하고 있다. 넷째, 신약성서와의 관련에서 많은 연구 과제를 제시한다. 초대교회와의 유사점과 상이점, 목욕재계 의식과 초대교회의 세례, 메시아 사상, 세례자 요한과 에세네파 내지 쿰란교단과의 관계, 하느님과 벨리아르(Belial, 타락한 천사) 내지 빛과 어둠의 항쟁 등 이원론적 문제에 대한 연구 자료로서의 공헌도 빼놓을 수 없다.
많은 학자들은 쿰란 공동체를 예수 시대의 유대교 3대 종파의 하나인 에쎄네파와 동일시하고 있으며(이스라엘 이외 지역 사람들, 즉 이방인들이 이렇게 불렀음) 사해문서가 신약성서의 진정하고 분명한 배경을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 보충(쿰란 공동체, 에쎄네파). 이 공동체는 1947년 이스라엘의 死海 부근에 있는 쿰란 동굴에서 많은 양의 문헌들을 발견하면서 그 실체가 자세히 알려졌다. 문헌들의 발견으로 그리스도교 성서학계에서는 커다란 파장이 일었는데 잘못 알려진 사실들이 정정되거나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사실들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쿰란 공동체는 에쎄네파로 추정되는데 이는 제관들 중심의 사두가이파, 평신도 중심의 바리사이파, 민족독립 투사 단체인 열혈당파와 함께 유다교의 한 분파로 볼 수 있다. 이 집단은 예루살렘 성직자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제들과 내쫓긴 일반신자들이 합해져서 기원전 150년경에 생겨났는데(135-104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음), 성서 인물로서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도 그의 언행 등에 미루어 에쎄네파 출신으로 추측하는 의견이 있다. 그리스도 시대에 그들은 死海 북부의 광야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아주 엄격한 생활방식을 지키며 살고 있었는데(주로 동굴에서 지내면서 엄격한 수도자로서의 이상에 따라 은수자적 공동체 생활을 하였음. 한편 기원전 31년 대지진 이후 예루살렘의 시온산에도 이들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어둠의 자녀들과는 분리되어 금욕주의를 강조하는 생활을 하였다(거주지의 무덤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에서 여자의 뼈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함). 그들의 생활방식은 사제적 성격, 계급성, 엄격한 율법 준수, 종말이 임박한 것으로 확신하고 이에 대비한 묵시론적 영성, 가난한 삶 추구, 진정한 하느님의 백성인 빛의 아들로 자처함 등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이들은 많은 점에서 바리사이들과 비슷하나 공식 유다교와는 아주 달랐다. 이들은 이원론적 관점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진리와 거짓의 대립으로 특정지어진다. 선한 영과 악한 영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고 이 둘이 서로 투쟁하는 가운데 인간의 변화가 결정된다고 보았으며 양측의 거센 투쟁은 있으나 결국 하느님께서 악의 영을 파멸시키신다고 보았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공동생활을 하면서 재산을 모두가 골고루 나누어 사용하고 각자 가지 손으로 땀 흘려 일할 의무를 실천하며 상거래를 못하게 하고 희생제사의 형태로까지도 피를 흘리는 일을 못하게 했다. 이들의 공동체 조직은 그리스도교 수도회들과 매우 비슷한데(개신교 제외), 입회 조건이 매우 까다롭고 수련기간이 있고 계급적으로 다스리며 규율이 엄격하고 정결 예절을 실행하며 저녁밥은 공동으로 모여서 거룩하게 먹었다. 이들은 정의의 스승이라고 하는 메시아를 기다리며(어떤 자료에서는 정의의 스승이 쿰란 공동체를 설립했다고도 함) 메시아가 세상에 오면 불경한 자들을 뿌리 뽑아 없애고 정의로운 사람들의 영원한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거룩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쿰란 공동체의 최후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진 바는 없고 여러 가지 의견이 있는데 제1차 유다항쟁 중이던 68~70년 사이에 파괴 몰살당했거나 주변 요새 등으로 도망했지만 결국 그들의 사상이나 생활 방식을 끝까지 고수하지 못하고 점차 주변 국가들에 동화되어 사라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사해 주변 지도
사해 관련 남동쪽의 초아르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후 롯과 그의 가족들이 도망간 곳
* 참고(쿰란문헌 기호 읽는 방법). Q 앞의 숫자는 문서가 발견된 동굴 번호(the cave number), Q는 Qumran, Q 다음의 알파벳은 문서 종류(S는 히브리어 Serek의 이니셜로 공동체 규칙; Sa는 이스라엘 규칙; Ps는 시편; pHab는 하바쿡서Hab의 주석p; Isa는 이사야서 두루마리; H는 히브리어 Hodaiot의 이니셜로 찬미가 내지 감사 시편; M은 히브리어 Milkamah의 이니셜로 전쟁 문서를 말함), 가장 뒤의 숫자는 면, 행의 문서번호(manuscript number)를 나타냄. 따라서 1QS 11,14로 표기되어 있다면, 이는 쿰란 제1동굴에서 발굴된 공동체 규칙 11면(장) 14행(절)을 의미함. 한편 신약에서의 Q는 구약과 달리 Q문헌(예수 어록, Quelle의 약어)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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