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었던 후손들은 동일하게 원죄를 물려받게 된 것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68)
계속적으로 어거스틴은 "공로와 죄의 용서에 관하여, 유아세례에 관하여"(De Peccatorum Meritis et Remissione, et Baptismo Parvulorum/412)의 논문 Ⅲ권에도 펠라기우스의 "바울서신 주석"에서 제시된 원죄의 문제점을 지적해 주고 있다. 즉 펠라기우스는 이 주석을 통해서 원죄를 반대하는 주장을 제시하였기에 이것을 비판하는 내용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먼저 "아담의 죄가 죄를 범하지도 않은 사람까지 손상시켰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의는 그리스도를 믿지도 않은 사람에게도 유익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펠라기우스의 오류를 지적해 주고 있다.
이런 펠라기우스의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끊임없이 원죄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 반론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주장은 곧 이어서 "만일 세례가 그 옛 죄를 씻어서 없게 해준다면, 세례를 받은 두 분 부모로부터 태어나는 자녀들은 이 죄로부터 벗어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지지도 않은 것을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69)
라는 주장으로 이어지면서 갓 태어난 유아에게는 원죄가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펠라기우스의 질문들을 통해서 우리는 왜 인간론에 대한 논쟁 가운데 "유아세례"와 "결혼"에 대한 문제들이 논쟁점으로 제시되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즉 이것은 원죄에 대한 내용이 실제적으로 적용되는 부분에 대한 것이었다.
이런 오류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의는 믿는 자 이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유익이 없는 것임을 증거 하면서, 특히 펠라기우스의 질문들이 원죄를 희석시키려는 질문들임을 깨닫고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라는 성경말씀을 근거로 예수님께서는 갓 태어난 유아들에게 있어서도 역시 구원자이심을 증거하고, 그러므로 유아들도 원죄의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증거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원죄의 고백은 정통교회가 늘 간직해 왔던 교리임을 더불어 언급해 주고 있기도 하다.70)
즉 키프리안이나 또한 제롬 등의 증언을 빌어서 반격했던 것이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이런 반격을 받을 때마다 "갓 태어난 유아는 죄의 사면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별되기 위해서 세례를 받는다"라고 하면서 의미를 계속적으로 가리우려고 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즉 한 논의에서 또 다른 논의를 계속적으로 던지면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려고 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한 가지 더 살펴보아야 할 논문은 "그리스도의 은총에 관하여, 그리고 원죄에 관하여"(De Gratia Christi, et de Peccato, contra Pelagium/418)라는 논문이다. 본 논문에서도 펠라기우스주의의 죄(罪)관이 더욱 깊이 있고 또한 폭넓게 잘 지적되고 있다. 특히 우리가 본 논문에서 깊이 주의해야 하는 부분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단순하게 원죄를 부정하는 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교묘하고 또한 모호하게 자신들의 입장을 전개시켜 나가기 때문에 이들의 죄관에 대한 논쟁점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구별해 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죄의 전달과 이로 인한 세례의 문제를 다룰 때나 또는 죄와 은총의 성격을 다룰 때는 전혀 다른 의미로 자신들의 입장을 전개시켜 나간다.
이처럼 본 논문에서 펠라기우스가 어거스틴과 계속되는 논쟁을 통해서 자신의 입장을 어떻게 바꾸어 나갔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거스틴의 지적을 따라서 펠라기우스주의가 가지고 있는 죄(罪)론이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정확하게 정립하므로 펠라기우스의 죄관이 마치 정통교회의 죄관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막아야 할 것이다.
먼저 펠라기우스의 제자인 카일레스티우스는 아담의 죄가 오로지 아담에게만 손상을 입혔을 뿐, 인류 전체는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갓 태어난 유아는 출생시에 아담의 범죄 이전의 상태와 동일하다라고 증거 하면서 결국 원죄는 단 하나의 갓 태어난 유아라도 붙들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원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다.71)
이와 같은 입장은 매우 모호하다 즉 한편으로는 죄 자체도 "모방"이란 말로 원죄의 의미를 희석시키고 또한 죄의 전달과 영향에 있어서도 이처럼 전혀 다른 의미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이들은 유아의 세례를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원죄의 유전을 부인하면서 갓 태어난 아이들은 타락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음을 계속 주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을 전체적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72)
① 아담은 숙명적인 인간으로 피조되었기 때문에 범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죽었을 것이다.
② 아담의 범죄는 그 자신만 손상시켰을 뿐이며, 인류 전체를 손상시키지는 않았다.
③ 갓 태어난 유아는 아담의 범죄 이전의 상태와 같다
④ 인류는 아담 안에서 죽지 않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지도 않는다.
⑤ 율법도 복음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하늘나라로 이끌어 준다.
⑥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에도 죄없는 사람이 있었다.
이와 같이 정리된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펠라기우스주의의 죄관의 특성을 좀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이들의 가장 기초적인 신학적 뿌리는 앞부분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무(無)율법주의에 대한 반대로 인간의 책임을 확립하고 강조하려는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론과 관계된 모든 내용 속에서 끊임없이 인간의 자율적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의지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시켜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펠라기우스의 죄관에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임을 기억해야 한다.73)
이것을 발견하면 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그렇게 많고 다양한 죄관의 내용들을 전개시켜 나가려고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 이전에 대한 죄의 문제나, 그리고 창조시의 인간의 상태나 또한 그 후의 죄의 전달에 대한 문제나, 또한 그 죄의 상태에 회복하는 과정에 대한 문제로 세례에 대한 문제 등 모두가 완전한 자유의지를 확립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어거스틴은 본 논문에서 펠라기우스와 카일레스티우스가 주장하는 원죄의 성격을 핵심적으로 밝혀 주고 있는데 특히 이들의 원죄에 대한 주장이 동일함을 다음과 같이 지적해 주고 있다.
나는 약속한 대로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펠라기우스가 실제에 있어서는 카일레스티우스와 동일한 견해를 고수하고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본다. 그는 "우리가 칭찬을 받을 수도 있고 또한 비난받을 수도 있는 선한 것과 악한 것은 우리와 함께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의해서 행하여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온전하게 성장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 가운데서 어느 것 하나를 행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덕스럽지 못하게 피조되지만 동시에 악하게도 태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들의 정상적인 의지가 행동을 취하기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그것만이 사람 안에 남아 있는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악이 사람과 함께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잘못이 없이 태어난다면, 그리고 사람의 의지가 활동하기 이전에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만이 사람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74)
그리고 이런 주장을 기초로 해서 어거스틴은 더욱 중요한 면을 지적해 주고 있다. 즉 이들의 주장이 매우 교묘하고 모호하여 자칫하면 정통교리처럼 이해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에 있어서 핵심적인 오류의 내용을 어떻게 구별해야 할 것인지를 집중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먼저 어거스틴은 논쟁에 있어서 펠라기우스의 주장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다음과 같이 정립해 주고 있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부인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과 무관한 하늘나라를 약속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에 대한 진정한 반대는 세례를 받지 않은 유아가 첫 사람의 정죄를 받을 수 있으며, 또한 원죄가 유아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오로지 중생에 의해서 깨끗게 될 수 있다고 고백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유아들은 세례를 받아야만 영원한 사망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례를 필히 받고 주님의 피와 살에 참여함으로써 영생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75)
이런 어거스틴의 지적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원죄(原罪)론과 관련해서 핵심적으로 고백해야 할 내용은 피해 가고 오히려 부수적인 부분은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교묘함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증거해 주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명백하게 밝히지 않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들도 갓 태어난 유아가 세례를 받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논쟁의 쟁점이 아니다. 우리는 갓 태어난 유아의 원죄의 소멸에 관해서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는 갓 태어난 유아에게는 중생의 물로써 깨끗하게 할 어떤 것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76)
이들은 이처럼 자신의 주장에 교묘하게 가리우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마치 이들도 우리와 동일한 입장에 서 있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외에도 이들의 모호함은 구원에 해당되는 부분에서도 역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있다. "그가 말하는 구속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악으로부터 선으로 가는 것인지? 아니면 선으로부터 더욱 좋아지는 개선을 말하는 것인지? 심지어 카일레스티우스까지도 카르타고에서 갓 태어난 유아의 구속을 인정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의 범죄가 유아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77)
이처럼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교묘하고 또한 모호한지를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펠라기우스는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내용과 그리고 그 죄와 부패의 성격, 그리고 죄에 의한 결과들, 또한 구원과 현실적인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완전하고 충족한 자유의지를 정립하게 위해서 자신의 논의를 계속적으로 전개시켜 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이런 과정 가운데서 결혼과 유아세례에 대한 문제도 논의로 또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즉 펠라기우스는 원죄를 주장하게 되면 결혼의 가치와 거룩함이 손상을 받고 더렵힌자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답변해 주고 있다.
따라서 갓 태어난 유아는 죄지을 능력을 가지지 못하였다고 할지라도 죄의 오염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결혼의 합법성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결혼의 꼴사나운 부적절함에 기인한다. 합법적인 것으로부터는 본성이 태어나고,꼴사나운 부적절함으로부터는 죄가 태어난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본성의 장본인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혼인 예법에 의해서 남성과 여성을 하나로 연합시키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죄의 장본인은 사람을 속인 마귀의 교묘함이며 여기에 동의한 인간의 의지이다.78)
이와 같은 어거스틴의 답변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 타락은 중생의 물로써 온전하게 씻기울 때까지는 중생한 사람의 육적인 몸안에 남아 있을 것이며, 그리고 중생한 사람은 다시금 중생할 필요가 없으나, 그럼에도 육체에 따라서 자녀를 생산하게 되며, 그 후손들에게 중생한 상태가 아니라 출생한 상태를 물려주게 된다고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불신앙으로 인해서 죄책을 느끼든지 혹은 완전한 신앙이든지를 막론하고 다같이 신실한 자녀가 아니라 죄인을 낳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야생의 올리브 씨앗이나 재배된 올리브 씨앗이나를 막론하고 다같이 재배된 씨앗이 아니라 야생의 씨앗을 생산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와 같이 사람의 첫 번째 출생은 오로지 두 번째 출생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는 그런 속박상태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결혼의 거룩함이 손상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보존된다고 지적해 주고 있다.79)
결국 지금까지의 논쟁점을 통해서 우리는 어거스틴의 지적처럼 펠라기우스가 단순히 원죄에 대한 문제점를 가장 중요한 점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의 자리를 확립하려고 했던 것이 그의 가장 중요한 논점이었음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즉 그는 "자유의지"의 자리를 확립하기 위해서 어떤 때는 원죄를 부정하기도 하고 또한 말을 바꾸어 원죄를 인정하듯이 표현하기도 했던 것이다. 즉 문제는 "자유의지"가 그에게 있어서는 더욱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펠라기우스의 비(非)성경적인 죄관으로 오늘날까지 교회가 죄론에 있어서 큰 혼란을 겪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즉 오늘날 더 이상 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분위기로 전락한 것이다. 결국 이런 분위기는 회개에 대한 언급이 점점 사라지고 오직, '상처', '연약함', '치유', '회복' 등과 같이 죄의 개념을 흐리게 하는 표현들만 난무하게 된 것이다. 즉 어느 곳 하나 그것을 분명히 '죄'라고 지적해 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피상적인 회개와 그리고 단순히 윤리적인 회개의 수준으로 전락한 죄의 개념을 우리는 깊이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2. 본성과 은총에 관하여(De Natura et Gratia, contra Pelagium)
다음으로 논쟁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내용은 "의지 와 은총"에 대한 부분이다. 즉 지금까지 죄에 대한 의미가 무엇이고 또한 그 성격이 무엇인지가 제시되었다. 특히 펠라기우스는 죄에 대한 의미를 전개시켜 갈 때에도 위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완전하고 충족한 자유의지"를 세워가는 것이 최종 목적이었기 때문에 이제는 자연적으로 이 의지의 성격에 대한 부분이 논쟁의 중심 내용으로 전개되는 것을 보게 된다. 즉 완전하고 충족한 자유의지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죄(罪)에 대한 이해가 가장 기초적인 이해로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지금까지 죄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펠라기우스가 인간의 본성에 자리잡고 있는 "의지"를 어떤 의미로 주장하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완전하고 충족한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와 반대로 인간의 의지라는 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존재하고 활동하는 것임을 어거스틴을 통해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먼저 "의지"에 대한 부분은 "공로와 죄의 용서에 관하여, 유아세례에 관하여"(De Peccatorum Meritis et Remissione, et Baptismo Parvulorum/412)라는 논문에서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다. 즉 이 논문의 Ⅱ권에서 어거스틴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서도 죄없이 살았던 사람이 있으며, 있었으며, 있을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해서 반론을 펴면서 이 의지의 성격에 대해서 성경적인 의미를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의지와 의지의 한계성에 대한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4가지의 명제를 세우고 이것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해 가고 있다. 첫 번째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사람이 이 세상에서 전혀 죄가 없는 무죄한 상태를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를 묻는다. 여기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나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람의 자유의지를 들어서 이러한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의지 그 자체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즉 하나님의 선물로 돌릴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유의지 그 자체의 존재뿐만 아니라 그 자체의 선함에 있어서까지,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의 계명을 수행하도록 사용되어질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80)
라고 매우 긍정적으로 답변한다.
그런데 이런 어거스틴의 답변은 펠라기우스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자유의지의 성격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즉 어거스틴은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6)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를 깊이 고려하면서 "이상 열거한 말씀들과 여타의 유사한 말씀들로부터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실행 불가능한 계명을 주시지 않으셨음을 확신할 수 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원조를 받아서81)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무엇을 막론하고 불가능하지 않음을 확신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사람은 원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죄없이 될 수도 있다"라고 답변해 주고 있다. 즉 어거스틴은 성경 자체에서 증거하고 있는 그 자체를 존중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즉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기 위한 목적 때문에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사실을 감추거나 축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가 성경 전체의 체계 속에서 어떤 의미로 제시되고 있는 것인지를 정립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논의를 이끌어 갔던 것이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의 논의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자의적인 의지로서 불가능한 그러한 것들을 행하도록 명령하지도 않으실 것이다"82)
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경의 단편적인 면만을 주장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 명제로 어거스틴은 "일찍이 이와 같이 죄없는 상태를 성취한 사람이 있었으며, 혹을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야 옳은 가?"라고 묻고서는 성경의 증언에 기초해서 부정적으로 답변해 주고 있다. 즉 어거스틴은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143:2),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1:8)라는 말씀에 입각해서 인간이 죄없는 상태를 성취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배격하고 있다.83)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첫째 주장과 두 번째 주장은 모순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첫째 주장을 어거스틴이 긍정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와 은총의 위대성을 성경이 명백하게 증거하기 때문에 이것을 드러낸 것이며, 두 번째 주장에서는 인간의 실제적인 형편을 다만 성경의 증언대로 증거한 뿐이다. 이런 논증을 통해서 우리는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의지와 영광을 아주 세밀하게 살펴서 어느 한 부분에서도 결코 가리우려고 하지 않았던 경건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즉 "의지"대한 내용을 무조건 반대한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처음에 주신 의지와 그리고 타락한 후의 의지와 또한 중생된 후의 의지를 깊이 있게 드러내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렇게 답변하고 난 어거스틴은 세 번째로 인간의 의지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죄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하는데, 왜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가? 라는 명제에 대해서 답하시기 시작한다. 즉 그것은 사람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죄를 짓지도 않았으며 또한 지을 것 같지도 않은 사람이, 사람의 아들로서 지금 살고 있지는 않으나 일찍이 언젠가 존재했었으며, 혹은 언젠가 시간이 오면 존재하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하신 중보자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그와 같은 사람은 지금 살고 있지도 않으며, 과거에 살지도 않았으며, 앞으로 도 살 수 없다고 못박고 있다.84)
이처럼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가 인간이 죄의 문제를 자신의 "의지"로 자유롭게 처신 할 수 있음을 주장하면서 "자유의지"를 세우려고 했던 것에 대해서 철저하게 성경적인 증거에 입각해서 배격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다음으로 제시되는 것은 "영과 의문에 관하여"(De Spiritu et Littera/412)라는 논문을 살펴볼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앞의 논문에서 제기했던 완벽한 의를 지니고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일찍이 없었으며 또한 없을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죄없이 살 수 있다고 선언한 것에 마르켈리누스는 일찍이 선례가 없었으며 또한 지금도 없는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느냐? 라는 질문으로 재질문을 하였고, 여기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3:6)라는 말씀을 가지고 은총의 성격에 대한 총체적인 내용을 제시해 주고 있다. 특히 여기서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주의의 뿌리를 좀더 깊이 있게 드러내었다. 즉 펠라기우스의 가장 위험한 교리적 성격을 원죄와 인간적 의의 불완전성과 은총의 필요성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지적해 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앞 부분에서도 소개한 것처럼 어거스틴이 성경에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그 어느 부분도 결코 축소하거나 삭제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성경에서 증거하는 그 자체로 제시하려고 했던 놀라운 경건의 정신을 다시 한 번 발견하게 된다. 즉 워필드도 이 부분을 매우 놀랍게 다음과 같이 지적해 주고 있다.
어거스틴은 마르켈리누스에게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대전제에 입각해서, 마치 낙타가 바늘 구명으로 들어가는 것까지도, 결코 일어난 일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가능한 것처럼, 무죄한 삶의 실제성은 부인하면서도 그 가능성은 긍정한다고 밝혔다. 인간의 완성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도구적으로 사용하시고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심으로써 이루시기 때문에 참으로 하나님의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은 참으로 우리들에게 죄없이 살았던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다만 사실을 선언적으로 언급한 것이다.85)
우선 어거스틴은 이와 같은 의문을 제시하는 마르켈리누스에게 "너는 비로소 이 위대한 일이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인간들의 역량에 의해서 성취되어질 가능성을 가졌음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의심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는 말로 글을 시작하고 있다. 이 말은 어거스틴의 답변에는 마르켈리누스가 질문한 것이 모순된 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에서 이와 같은 구조로 우리에게 답변하고 있음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즉 두 가지가 어떻게 조화롭게 소개될 수 있는지를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어거스틴은 사람이 죄없이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성경의 사실에 위배되는 것이지만 이 주장 자체로 인해서 이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즉 용서될 수 있는 오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도저히 용서될 수 없는 오류는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않고서 이러한 완성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주장인 것이다. 이런 주장은 하나님의 은총을 배격하는 것이며, 이것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일을 인간의 능력 안에 포함시키는 행위라고 지적하고 있다. 결국 펠라기우스가 가지고 있는 오류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어거스틴이 무엇을 더욱 중점으로 논쟁을 삼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펠라기우스의 단편적인 오류만을 보게되고 그러므로 인해서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펠라기우스의 오류의 핵심은 결국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선물을 완벽한 자유의지 안에 국한시키는 방식으로 도우심을 이해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처음 주신 완전한 자유의지의 충분성이 바로 도우심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의지는 더 이상 도우심을 받을 필요가 없이 활동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주장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인간들에게 무엇을 추구할 것이며 무엇을 피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계명과 율법 안에 국한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도우심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하는 주장까지도 언급하게 되었다. 즉 자유의지의 충분성은 결국 계명과 율법을 충분히 행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을 겉으로는 인정하고 있는 듯 했으나 그것을 실제적으로 적용하고 이해하는 방식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즉 은총이 필요없는 형태로 은총의 내용을 주장했던 것이다.86)
이런 은총은 결국 진정한 은총이 될 수 없는 것임을 어거스틴은 지적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가 교묘하게 완전한 자유의지를 주장하므로 은총의 내용을 가리우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 즉 자유의지조차도 선물임을 증거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는 참으로 진리의 길을 알지 못한다면 죄를 짓는 것 이외에는 별로 유용되지 못하는 것임을 지적하면서 성령의 은총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즉 율법과 영의 조화를 고후3:6에 근거해서 성령의 은총이 없는 율법 자체는 결코 죄를 없이 할 수 없고 오히려 죄를 드러내기만 할 뿐임을 지적해 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이와 같은 원리에 따라서 "행위의 법에 의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에게 명령한 것을 행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믿음의 법에 의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께서 명령하신 것을 주시옵소서라고 말한다"라고 증거하고 있다87)
이 말은 의지는 은총에 의해서 자유를 얻게 될 때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즉 은총으로 인해서 자유의지가 무효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지를 세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원리를 어거스틴은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라는 말씀에서 이끌어 내고 있다.88)
계속해서 어거스틴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방식을 "우리는 자유의지로써 지은 죄를 하나님에게 떠넘기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또한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89)
고 물으시는 구절에서 보여 주듯이, 우리가 믿게 되는 의지 자체가 창조의 시점에서 받은 것임을 감안해서 그것도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이와 같이 의지와 은총의 놀라운 관계의 내용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라는 말씀에 잘 제시되고 있음도 언급해 주고 있다. 즉 영혼이 받은 것은 무엇인든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그러면서도 받는 행위와 소유하는 행위는 또한 받는 자와 소유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다.90)
이처럼 겉으로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결코 모순되지 않는 은총과 의지의 성격이 성경에서 증거해 주시는 참된 인간론의 특성임을 정립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신비는 결코 호기심을 다가서서는 알 수 없으며 오히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라는 고백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임을 지적해 주고 있다.
이처럼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창조시의 의지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에 있어서부터 서로 명백하게 구별되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즉 펠라기우스는 창조시부터 "완전하고 충족한 자유의지"를 주신 것으로 생각하고 이것을 은총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비록 펠라기우스와 비슷하게 창조시에 선(善)과 악(惡)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의지"를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자유의지조차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으로 끊임없이 은혜를 입어야 하는 그런 성격의 자유의지라고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자유의지 자체가 선물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다음으로 이어지는 "본성과 은총에 관하여"(De Natura et Gratia, contra Pelagium/415)라는 논문에서 우리는 의지와 은총의 성격을 좀더 명확하게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본 논문에서 어거스틴은 앞 논문에서 논의되었던 내용을 계속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펠라기우스는 무엇보다도 죄의 질책을 받을 때에 인간적 본성의 연약성을 탓함으로써 도피하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반대해서 오히려 본성의 완전성을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펠라기우스의 입장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우리의 본성이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악으로 인해서 타락하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께 징벌을 받기에 이르렀으며, 그래서 더욱 은총을 필요로 하게 되었음을 증거해 주고 있다. 즉 타락으로 인해서 그나마 가지고 있었던 자유의지가 부패하고 변질되어 이제는 죄밖에 지을 수 없는 "노예의지"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제는 더욱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게 되었다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어거스틴은 은총의 총체적인 개념을 정립해 주면서 인간론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제시해 주고 있다.
우리는 본 논문을 접하게 될 때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이 매우 세밀하게 진행되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펠라기우스는 표현과 주제를 동일하게 사용하면서 전혀 다른 의미를 부가시키고 있고, 또한 더 나아가서 상이한 표현 사이에서도 또다른 구분을 제시해서 논쟁의 내용이 매우 포괄적인 형태로 제시되어 무엇이 초점인지 알 수 없도록 하는 것을 보게 된다. 특히 펠라기우스는 자신이 말한 부분에 대해서도 스스로 그 이미를 번복하고 전혀 다른 의미로 제시하기도 했기 때문에 펠라기우스가 말하고자 하는 논점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우선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죄없이 살 수 있는 '가능성'과 '현실성'을 교묘하게 구분하면서 그는 성경의 많은 의인들이 죄로부터 자유로웠다고 주장하면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인간에게 본래적으로 주어져 있었던 것이며, 바로 이와 같은 본래적인 가능성을 심어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가능성이 은총이라고 주장한다.91)
이런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정리해 보면 어거스틴이 지적한 대로 인간이 죄없을 수 있다는 사실보다는 죄없을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더욱 관심을 가져야 함을 알 수 있다. 즉 이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있다고 펠라기우스가 주장한 반면에 어거스틴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분을 통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않으면"92)
어느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고 부인하였다. 이렇게 볼 때에 논쟁의 전체적인 핵심은 은총에 관한 것으로서 펠라기우스는 은총의 진정한 의미를 인정하지 않은 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본성 안에 머무르게만 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어거스틴이 말하는 은총이란 우리 인간들의 공로가 철저하게 배제되어야만 진정한 의미의 은총이 정립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본 논문에서는 은총과 자유의지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일에 있어서 우리 인간들은 물론 분명하게 일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활동이 언제든지 인간들의 활동보다 선행적(先行的)이므로 하나님과 더불어서 동역자로 일할 뿐이다.93)
하나님은 언제든지 인간보다도 선행적으로 활동함으로써 인간이 치료받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치료의 과정에 있어서 인간을 또한 뒤따라오심으로써 인간들이 치료를 받고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랄 수 있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부름을 받도록 선행적으로 일하시지만, 인간들은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므로 또한 인간들을 뒤따라오심으로써 인간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게 하신다. 보라 성경에서는 이상의 두 가지 활동을 다같이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한다. 성경에는 이상의 두 가지가 다같이 있다. 즉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94)
라고 하였으며, 또다시 "나의 평생에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95)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논리적인 증거를 제시함으로써 찬양을 돌리려 하지말고 고백으로써 우리들의 삶을 밝히 드러내 보이도록 하자.96)
위의 지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비록 인간의 자유의지가 마치 인간의 모든 활동을 이루어 가는 것처럼 보여져도 그 인간의 활동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그것이 우리의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즉 인간의 의지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아래서 다스려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본성의 완전한 자유의지를 은총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율법과 계명을 주신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보았다. 즉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과 의문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살펴볼 수 있었던 것처럼 성령의 은혜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이 없이도 율법을 주신 그 자체가 충분한 은총이기 때문에 은총을 전혀 다른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또한 카일레스티우스가 "율법도 복음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하늘나라로 이끌어 준다"라고 주장한 것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처럼 이들은 본성의 완전한 자유의지의 충분성을 증거하므로 결국에는 고대의 성도들이(구약)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받는 신앙의 원리를 완전히 제거하기에 이르기도 한다. 이런 오류를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지적해 주고 있다.
이들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본성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살았었으나, 그 다음으로 율법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세 번째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살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까지는 창조주를 이성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나 인간의 태도가 부패하게 되었으며, 그 때에 본성이 녹슬어서 불충분하게 되었을 때에 율법이 이를 도왔는데, 이것은 자연이 달빛으로 말미암아 붉은 빛을 회복함으로써 본래적인 윤기를 되찾은 것과 같다. 그러나 사람들이 죄짓는 습관에 너무나도 깊숙이 물들어 버리고, 또한 율법이 이러한 습관을 치유하기에 불충분하게 되자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라고 말한다.97)
결국 이들은 신구약의 통일성을 깨뜨리는 선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어거스틴은 고대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은총을 빼앗는 것은 성경 전체를 파괴하는 행위임을 지적해 주고 있다. 그리고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2)라는 말씀을 근거로 고대의 성도들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을 얻는 것임을 증거해 주고 있다. 특히 펠라기우스가 그리스도께서 아직 성육신 전이었기 때문에 율법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심판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리스도의 심판은 그들과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된 것이냐?"라고 반문하고 있다98)
.
즉 오늘날 우리도 역시 심판 전이기 때문에 그리스의 심판과는 상관이 없이 산다라는 오류를 지적해 준 것이다. 계속해서 어거스틴은 구약이나 신약 모두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을 얻는 것임을 다음과 같이 증거해 주고 있다. "우리가 아직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은 그리스도의 심판이 결국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써 심판날에 그리스도의 우편에 서려 한다면 그 옛날의 성도들도 그 당시에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장래적으로 어느 날엔가는 이루어지게 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지체에 속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99)
그리고 다음과 같은 어거스틴의 신구약 이해는 은총의 통일성을 정립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이다"(시116:10) 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믿음에 의해서 깨끗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도께서는 "기록한바 내가 믿는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고후4:13)고 하였다. 이와 동일한 믿음으로부터 그분에 관해서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시45:6-7)라고 하였다. 이와 동일한 신앙의 영에 의해서 이상의 모든 사항이 일어날 것을 미리 보았으며, 그들은 이러한 일들이 우리들에게 일어날 것을 믿었다. 그들은 참으로 이러한 사건들에 참여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앙 안에서 예언하기를 즐거워하였다. -- 그러므로 나타났다면 그 당시에 존재하였으나 숨겨져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숨겨짐은 성전의 휘장으로써 상징적으로 말하였다. 그러므로 그 옛날에도 사람들 사이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한 분 중보이시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존재하였다.100)
지금까지 살펴본 펠라기우스의 은총관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그는 창조시 완전한 자유의지를 주셨고, 이것으로 모든 것은 충분하다고 한다. 즉 한 번 주신 이 자유의지는 그 어떤 것으로도 소멸되거나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은총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율법과 교훈과 명령 그 자체를 주신 것이 은총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완전한 자유의지가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에 율법과 교훈과 명령들을 완전하게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의롭게 될 수 있도록 율법을 주신 그것이 은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셋째는 은총은 값없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의 선택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 즉 인간의 공로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은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어거스틴의 지적처럼101)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은 과거의 죄만 사면을 받는 것이지 미래의 죄를 사면 받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펠라기우스주의의 은총관은 어거스틴의 은총관과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부분은 펠라기우스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들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행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계명을 주셨을 리가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어거스틴의 대답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은 이것을 설명하면서 은총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더욱 깊이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102)
고 말씀하신 데 대해서 우리가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돌이키소서"103)
라고 말하고, 또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키소서"104)
라고 말하고, 또한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라고 증거한다.
즉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기를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생각하라"105)
고 말씀하신 데 대해서 우리가 "나로 깨닫게 하사 주의 계명을 배우게 하소서"106)
라고 말하며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그것을 주시옵소서"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태도임을 지적해 준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기를 "네 정욕을 따라가지 말라"고 명령하신 데 대해서 우리가 "그러나 지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다르게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나이다"107)
라고 말하며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그것을 주시옵소서"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 그 무엇을 말하겠는가? 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너희는 의를 행하라"108)
고 명령하실 때에 우리는 "주의 규례로 나를 가르치소서"109)
라고 말하며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그것을 주시옵소서"라고 말하는 것 외에 또 무엇을 말하겠는가? 라고 말하며,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주님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 배부를 것임이요"110)
라고 말씀하실 때에 우리는 의의 음식과 음료를 구해야 하지 않겠으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배부르게 먹여 주시는 바로 그분에게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증거하고 있다.111)
이처럼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은 명령을 주신 것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이 없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임을 증거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사람도 명령하신 것을 이행할 수 없음을 아시면 서도 모든 사람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명령하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누구든지 불경건하게 그리고 경멸적으로 하나님의 훈계를 멸시하는 자들이 있을 경우에 그들의 정죄에 합당한 일을 행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훈계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이행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이행하지 못하였을 경우에, 스스로 용서함을 받기 바라는 심정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을 씻어 주시는 선한 일을 하신다라고 어거스틴은 증거해 주고 있다. 즉 죄가 없으면 하나님의 자비로운 용서가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죄가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로 말미암은 금기 조치가 실패할 수 없음을 증거하시기 위함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처럼 어거스틴이 드러내고자 했던 은총은 명령하신 것을 주시는 은총이며, 또한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친히 명령하시는 그런 은총을 말했던 것이다. 즉 인간의 의지를 사용하시고 또한 그 의지가 묵살되거나 제거되지 않고 확립되어지도록 하신다 할지라도 이 의지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아래 있는 의지인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이루시는 그런 은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이와 같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라는 말씀을 통해서 증거했으며, 또한 명령하시고 그 명령을 이루기 위하여 친히 뒤따라서 오셔서 그 명령을 이루시는 은총의 성격을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라는 말씀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즉 이것이 참된 은총의 성격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어거스틴의 지적을 통해서 무죄한 삶의 가능성 등과 같은 것이 문제점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없이 살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이 가장 심각한 문제점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즉 이것을 거부하게 됨으로 인간은 죄의 근본적인 성격인, 하나님과 같이 되려하고, 또한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의 힘으로 살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본질적인 죄악의 내용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정신은 하나님의 자리와 그분의 뜻을 모두 거역하고자 하는 엄청난 죄악의 내용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가장 중요한 논쟁점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도 '죄'에 대한 논쟁에서 출발하여 결국에는 '은총'에 대한 내용으로 논쟁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성격을 흐리게 하거나 가리우는 것이 가장 무서운 죄의 성격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런 논쟁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은총'의 내용이 은총 그대로 남아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04문에서 "제 일 계명이 요구하는 의무는 하나님께서 홀로 참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알고 인정하며, 따라서 그만을 생각하고, 명상하며, 기억하고, 높이고, 존경하고, 경배하며, 택하고, 사랑하고, 원하고, 경외함으로 그를 예배하고, 영화롭게 하고, 그를 믿고, 의지하며, 바라고,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그를 위한 열심을 가지며, 그를 부르며, 모든 찬송과 감사를 드리고, 전인격적으로 그에게 완전히 순종하고, 복종하며, 그를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범사에 조심하고, 무슨 일에든지 그를 노엽게 하였으면 그것을 슬퍼하며, 그와 겸손히 동행하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먹고살며, 그분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신앙의 근본정신이 보존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어거스틴은 자신의 논쟁에서 이것을 인간론의 가장 궁극점이 목적임을 정립해 주고자 했던 것이다.
3. 은총과 자유의지에 관하여(De Gratia et Libero Arbitrio)
우리는 본 논문을 통해서 은총과 의지의 관계성에 대한 신비하고 오묘한 진리의 내용을 소개받게 될 것이다. 즉 위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의지는 펠라기우스가 말한 것처럼 현재 완전하고 충족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아래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제 논쟁은 3번째의 중요한 주제로 옮겨가게 된다. 즉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이 말한 의지와 은총의 성격에 계속의 반문을 했고, 이 반문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반문으로는 은총만을 강조하게 된다면 의지는 그 자리를 잃게 되고 또한 의지가 없다면 인간을 만드시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이 가리워진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처럼 펠라기우스는 의지가 은총의 다스림 아래에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럼으로 의지와 은총이 어떤 방식으로 조화롭게 활동하는 것에 계속 반문을 던졌던 것이다.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실제적으로 의지와 은총이 어떻게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 가는 것인지를 성경의 증거를 따라 증명해 가기 시작한다. 즉 어거스틴은 은총을 너무나도 옹호한 나머지 자유의지를 제거시켜 버릴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되며, 반대로 자유의지를 지나치게 옹호한 나머지 우리들의 거만스러운 불경건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릴 정도가 되어서도 안 되는 것임을 제시해 주고 있다.112)
특별히 이 부분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의미들을 제시해 준다. 즉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이 단지 신학적인 논쟁의 성격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정체성을 확립해 주는 아주 중요한 실천적인 문제를 제시하고 있음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또한 판단하고 결정해야 삶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과정을 단 하루도 없이 살아가는 인간은 없는 것이다. 결국 이런 삶의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며 결정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문제인가? 아니면 운명론처럼 아무 목적없이 기계처럼 이끌려져 가는 것이나 또한 신비주의처럼 자신의 의지로는 아무것도 판단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항상 외부의 직접적인 계시와 인도를 통해서만 이끌려져 가는 비(非)인격적 존재인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총 아래서 인격적으로 우리의 의지를 확립하는 방식으로 살아 갈 것인가를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의미인 것이다. 즉 이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가운데서 성실한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배우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우선 "은총과 자유의지에 관하여"(De Gratia et Libero Arbitrio426)라는 논문에 잘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먼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성경 속에서 인간의 의지와 공로만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이루어 가는 것처럼 보여지는 다음의 말씀들을 주로 언급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증거하고 있다고 지적해 주고 있다.113)
(대하15:2) 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대상28:9)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어거스틴은 이들이 이 구절을 주장하면서 인간이 완전한 자유의지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지적해 주고 있다. 즉 이들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데는 우리의 공로가 이미 있었다는 식으로 성경을 해석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식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다는 사실에 우리의 공로가 있으며, 그 다음에 이 공로에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그를 만나 뵙게 하신다고 이들은 생각한다고 지적하고 있다.114)
이 구절을 보게 되면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의지가 앞선 것처럼 보여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성경을 단편적으로 이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다른 구절에 분명히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의 성격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경 전체의 의미를 고려해야만 위 구절의 참된 뜻을 이해할 수 있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주장한 것과는 다른 의미의 성경 구절이 어떻게 제시되고 있는 지를 다음과 같이 밝혀 주고 있다.115)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하기 위하여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라고 했으며, 그 다음에 자기의 자유 의지도 보이기 위해서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고전15:10)라고 첨부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 관해서도, 예컨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고 말한 때와 같이, 사람의 자유의지에 호소합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자기의 의지를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이런 권고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사람의 의지가 선행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경계하기 위해서,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라고 말한 후에, 즉시 이 말을 제한하는 의미로,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라고 첨부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내가 단독으로 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나와 함께 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는 비록 인간의 의지와 공로에 대한 성격으로 제시되는 말씀이 표현되고 있어도 성경 전체의 정신은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은혜의 성격임을 그 기초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은총의 기초 가운데서 인간의 의지를 촉구하는 말씀과 은혜를 강조하는 말씀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 것인가? 를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다.116)
그러므로 영생을 상으로 받는 우리는 선행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다고 해석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같이 내게는 생각됩니다. 주 예수의 말씀에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사도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고 말한 다음에, 사람들이 이 발언을 근거로, 믿는 사람에게는 선행이 필요하지 않고 믿음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으며, 또 사람들이 자기의 힘으로 선행을 할 수 있는 듯이 그 선행을 자랑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양편의 의견에 대처하기 위해서 사도는 즉시 첨부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 그러면 여러분은 듣고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그 원인이 있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행위에 대해서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행위 가운데는 우리가 그것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 내신 것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의심할 여지없는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곧 여러분의 선한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에 불과한 것과 같이, 선한 생활에 대한 상으로서의 영생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뿐 아니라, 영생을 상으로 주시는 선행이 거저 주신 것과 같이 영생도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즉 마치 의에 대한 상인 듯이 은혜에 대해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비록 사람의 의지와 공로를 나타내고 있는 말씀도 결국에는 은총임을 증거하고 있다. 즉 그는 처음 것도 하나님의 은총이며, 마지막의 것도 은총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는 "사람의 의지를 상대한 명령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도록 은총이 그를 돕는 것이다"117)
,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공로에 면류관을 씌워 주시는 것이고, 그대의 공로에 씌워 주시는 것이 아니다"118)
라는 언급을 통해서 왜 모든 것이 은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즉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라는 말씀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을 주시고 또한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지 않고 성취될 수 있도록 친히 뒤따라 오셔서 자신이 주신 것을 스스로 완성시키시기 때문에 결코 인간의 공로와 의지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정립한 구조에서만이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인간의 의지를 촉구하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공로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면서 동시에 인간이 게을러지지 않도록 우리를 지키시고 계셨던 것이다. 이 두 가지가 함께, 동시에 성도에게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도를 이끌어 가시는 놀라운 신비인 것이다. 이제 어거스틴은 이 주제와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지적을 던지면서 정리를 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인 줄 아시면서 명령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펠라기우스파는 주장하며, 이것을 자기들의 위대한 지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에게 구해야 할 것을 깨닫도록,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명령하십니다.119)
이 의미는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면 서도 마치 인간의 의지와 공로로 무엇을 주시는 것처럼 말씀하셨던 이유는 위에서 제시된 것처럼 인간의 게으름을 제거하시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보다 궁극적으로는 이 요구를 통해서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더욱 깊이 깨닫는 것, 즉 이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을 통해서만 이루어짐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더욱 깊이 의지하며 신뢰하는 자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깊은 자비하심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은총에 대한 깊은 신학적 이해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115문에서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고백되어지고 있다.120)
제 115문 : 아무도 이 세상에서 십계명을 지킬 수 없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십계명을 지킬 것을 엄히 명령하셨습니까?
답 : 첫째로, 우리가 오래 살면 살수록 우리의 죄성을 깨닫게 되고 우리의 죄성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더욱 더 사죄와 칭의를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마지막에 생이 끝난 다음에 우리 목표인 완전한 순종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점점 더 새롭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의 은총을 간구토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어거스틴은 상급(보상)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면서 이와 같이 의지와 은총 어떻게 신비롭게 조화를 이루는 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먼저 바울의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고후5:17) 라는 말씀을 증거해 준다. 즉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준비 할 수도 없고 다만 "하나님께서 일찍이 우리로 하여금 걷도록 예정하신"그 '선행으로' 조성되고, 형성되고, 또한 창조되었음을 안다는 것이다. 또한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어거스틴의 다음과 같은 증언을 통해서 우리는 보상이 어떻게 은총의 성격을 기초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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