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1·6교실/신학이해교실

[스크랩] 聖 어거스틴의 歷史神學에 대한 硏究

류성련 2014. 3. 9. 20:06
聖 어거스틴의 歷史神學에 대한 硏究


                            강  근  환


          서                   론

키이스(G. L. Keyes)가 말한 것처럼 모든 실제적인 역사가들은  항상 어떤 분명한 인식론적 원리들에 입각해 일하며 그들이  인식하고 있건 아니건 간에 역사철학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어떤 한 역사가의 역사해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필히 그의 방법론에 관한 원리들을 탐구해야 한다. 성 어거스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성 어거스틴은 특히  그의 명작이며 22권으로 된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을 통해 역사해석을 시도하였다. 실제로 성 어거스틴은 인간의 全歷史를 시작부터 종국까지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과 지상의 도성 Civitas Terenna)이라는 두 도성의 발전을 통해 다루고 있다. 그러면 성 어거스틴의 역사해석 원리는 무엇인가? 나는 성 어거스틴의 역사 방법론과 역사해석을 이 논문의 주요 과제로 삼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 논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첫 부분에서는 성 어거스틴의 역사연구 방법론을 다루고, 두번째 부분에서는 그의 역사해석을 다룰 것이다. 그리고 결론으로써 이 논문을
끝맺으려 한다.

                                    I.

               1. 역사신학(Theology of History)

  성 어거스틴은 개인과 인간 사회 양 측면에서 역사를 연구한다. 그는 경험의 全世界를 역사의 연구 분야-지역사, 국가사, 公的 歷史, 私的 歷史, 정치사, 과학사, 철학사, 문학사, 과거와 미래, 시간과 영원-로 끌어들인다. 그의 인간 역사의 肖像을 특히 그의 두 명작인 ?고백록?(Confessions)과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都城?에서 사회 전체의 역사를, ?고백록?에서는 개인의 역사를 다룬다. 그래서 포탈리(E. Portalie)는 기술하기를, “?고백록?은 한 영혼 속에 체험된 것으로서의 신학이요, 하나님이 개인 속에서 활동하시는 역사이다. ?하나님의 도성?은 인간의 역사 체계 속에 존속하는 것으로서의 신학이며, 세계 속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을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하나님의 도성?은 성 어거스틴이 인간의 역사를 해석한 명작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인간 역사의 시작부터 종국까지를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성 어거스틴의 역사해석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책이다.
  그러면 방법론의 관점에서 어거스틴이 역사연구를 위해 시도하는 연구방법의 기초는 무엇인가? 모든 실제적인 역사가들은 항상 어떤 분명하고 인식론적인 원리들에 입각해 일하고 그들이 인식하건 아니건 간에 역사철학을 지니고 있다. 인정을 받는 역사철학자들은 역사해석 작업에서 그들이 분명하게 수용하고 있는 원리들을 나타내 보이고 싶은 억누를 수 없는 유혹을 받는다. 키이스에 따르면 한 인간의 역사철학은 역사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철학적이라 할 수 있는 아주 일반적인 두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명시적이건 암시적이건-에 의해 결정된다고 볼수 있다. 첫째 질문은 객관적인 실재를 믿는가 아니면 주관성에 예속되어 있다고 느끼는가?이고, 두번째는 만일 객관적인 실재를 믿는다면 그 실재와 교통하는 접근수단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다. 성 어거스틴은 진리론 및 실재론을 지니고 있었고 그서을 분명히 그의 역사연구 방법론에 적용시켰다. 성 어거스틴의 이론은 명시적이다. 그의 외적인 객관적 실재를 믿는다. 로버트 니스벳(Robet A. Nisbet)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는 근본적인 것이었으며, 이것이 꽁트(Comte)나 막스(Marx)와 구별되는 점이다” 라고 말한다. 키이스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성 어거스틴은 神의 啓示라고 하는 어떤 선험적인(a priori)인  전제들
    로부터 시작한다. 이 전제들은 역사적 증거에 대한 그의 자세와 역사과
    정에 대한 그의 독특한 해석 양 면을 모두 지배하고 있다. 그 전제들은
    믿음에  근거해 있는 것이지만,  모든 것들이 다 그 전제들을 부양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聖,俗의 문학이 좋건 싫건 간에 한결 같이 원형
    적 전제들의 그럴듯함을 증거하도록 강요를 받는다.

  이리하여 성 어거스틴은 계시에  비추어 全歷史의  모든 상황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의 섭리를 본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섭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절충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와 美, 形態, 順序, 數, 重量, 穉數의 창조주이시다. 그러므로 어떤 과학적 虛勢(Pretensions)를 지닌 역사가는 누구도 단지 믿음으로만 견지될 수 있는 것이기는 하나 그 굳건한 신앙(belief)이 그의 역사해석을 지배하고 있다는데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역사는 본직적으로 宗敎史다. 그래서 혹자는 성 어거스틴은 역사철학이 아니라 역사신학을 기술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버레펠드(M. Versfeld)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 이전에는 아무도 인간 본성과 운명의 증언을 위해  그
    처럼 깊이 역사를 연구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관계로
    그의 역사연구는 문명히 역사신학이지 역사철학은 아니다. 철학은 어느
    면에서 계시없이 가능한 그 어떤 것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의 역사에 대한 신학적 통찰이 ?하나님의 도성?에 영향을 미쳤다. ?하나님의 도성?은 그가 역사를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어거스틴은  로마의 멸망에 직면하여 이러한 독특한 전제 하에서 시작부터 종착지까지 세상 모든 나라들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두 都城의 발전을 통해 설명하려 하였다. 버스펠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어거스틴은 우리에게 영원의 관점에서(sub specie aeternitatis) 역사
    의 一瞥(glimpse)을 제공하려 시도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를 인간의 영
    원한 종말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종말에 대
    해 우리에게 말했기에 이 종말에 대해  알고 있다. 철학이 세계를 포괄
    적 전체로 보려고 노력하는 한 그 노력은 철학적이다. 그러나 어거스틴
    이 사용한 일치의 궁극적 원리는 신학적이다.his crede ut intelligas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성?은 역사신학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 아주 중요하다. 말을 바꾸어, 성 어거스틴의 역사연구방법은 방법론의 특성상 독특한
것으로 철학적이기 보다는 신학적이다. 때문에 어거스틴의 역사신학은 그의 역사해석과 두 도성의 개념 이해를 위한 基調임에 틀림없다.

                 2. 변증론적 역사가(Apologetical Historian)

  성 어거스틴은 변증론적인 역사가이다. 그의 방법론은 그것을 지배하는 엄격한 신학체계 때문에 反歷史的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의 기독교 신조를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취급했고 그 신조 안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경험이나 역사과정의 경우는 그 신조의 규칙에 순응하게 하였다. 키이스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그 변증론자의 역할은 애매모호하다. 얼핏 보면 그는 관심을 갖고 있는
    관념들을  시험하고 있는 듯 하기에 순수 과학자와  닮은 꼴로 보인다.
    그러나 더 가까이서 보면 그의 지략(Intellectual  Maneuvers)이  앞의
    결론을 가져오고 있음을 알게된다. 교리는 늘 흠없는 것으로 판명된다.
    그 변증론자는 밧줄에  매여 있는 작은 개와 같다. 그는 상하로 날뛰며
    짖어댄다. 그러나  그가 너무  멀리 돌진하면 밧줄이 그를 멈춰세운다.
    그 변증론자에게 있어 그의 선험적 가설들이 밧줄을 대신하고 있다. 그
    는 조사를 위해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념들의 건전성과  그럴듯
    함을 예증하기 위해 탐구한다.

  어거스틴의 歷史硏究意圖는 역사의 發展樣式과 輪廓을 발견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도처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려는데 있다. 그의 기독교 신앙을 분기시키고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진술하고 있다. 포탈리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어거스틴은 자신을 그 과업에 종사하게 했다. 그는 자신이  로마제국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해석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음을 발견했을  때 그
    의 작업범위를 더 확대하여 그의 변호를 역사철학으로 변형시킨 천재적
    인 섬광으로 일견에 세상나라들의  운명까지 둘러쌌다. 그는 인간을 태
    초에로 되돌아가게 하며 종국적 목표로 인도해가는 유일한 종교인 기독
    교가 세상 나라들의 운명의 중심이라고 보았다.

  사실 그는 신앙을 옹호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성?을 저술했다.  이  기념비적인 작품을 완성한 1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경과한 후에  그는 그 작품을 저술한 목적을 다시 진술하였다. 즉 아버지의 집에 대한 불타는 열망에 못이겨 고트족(the Goths)과 알라릭(Alaric)의 침입에 의해 410년에 로마가 멸망한 것을 기독교 때문이라고 하는 이교도들의 모독과 실책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도성?을 쓰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이다. 41 0년에 고트족에 의해 로마가 포위된 것이 ?하나님의 도성?을 구성하게 된 이유였다. 그리고 영원할 것으로 보였던 로마市가 멸망당한  것에 의해 상처를 받은 기독교인들과 이교도들 양측의 마음을 재교육하려는 시도로 ?하나님의 도성?을 저술했다고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로마의 멸망은 일시적인 것들과 우리 삶에서의 일시적인 정책들의 역할 에 대한 마음가짐을 부득이 다시 생각해 보게 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변증적 이유에서 그 작업이 시도되었다는 점이다. 버스펠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는 로마가 멸망하게 된 원인은  로마의 부도덕성과 무신앙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세상 모든 사회들의 특성을 나타내 보이며, 오직 하나
    의 도성만이 영원함을 인간들에게 보여주고, 로마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미덕을 발휘하는 한에서만 남보다 뛰어났었다는 것을 증
    명하기 위하여 이 일을 착수하였다.

  성 어거스틴은 두 도성을 주로 계시, 즉 성서에 기초를 두고 설명한다. 그는 정경으로 인정된 성서(Canonical Scripture)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인간이 역사의 진행과정에 대한 설계(Design)및 세부사항(Details)과 연관이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주요자원이라는 신념에 공식적으로 헌신하고 있다. 성서의 정경들은 인간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 안에 담고 있다는 것이다. 버스펠드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만일 역사의 의미가 역사의 섭리적 계획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
    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이
    라면 하나님께서 그의 신적인 생명과 의지에 관해  우리에게 부여한 계
    시를 통해 우리를 그의 계획에로 끌어들이지 않는 한 그 역사의 의미는
    영원히 우리에게 닫혀져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성서에 기
    초를 두고 두 도성을  설명하며,  그 저술작업에 있어 인간적인 기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그처럼 자주 요청하고 있는 이유이다.

  理想社會 또는 理想國家와 두 都城의 개념은 ?하나님의 도성?이 구성되기전부터 존재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플라토(Plato), 티코누스(Tyconus), 그리고 성서가 광대한 財源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어떤 다른 가능한 자료-이교도적인 것이건 기독교적인 것이건 간에- 보다는 성서로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마르쿠스(A. Markus)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어거스틴은 “두 세계”에 대한 플라톤과 성서의 어조 사이에는 실질적인
    격차가 있음을 그의 생애의 아주 후반기에 깨달았다.  그때 그는  젊은
    시절에 그리스도의 나라(그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요
    18:36)와  프라토 형태의 지성적인 세계(Intelligible World)를 동일시
    했던 것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발전의 첫째되는 주요 계단은 성서에의 몰두, 성직수임, 그리고
    특히  390년대 중반의 바울서신 탐독의 결과였다. 이것이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점차적으로 구원 받은 자와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은 자에 대해
    단호한 시각(Vision)을 갖게한 근원(Source)이었다.

  두 거대한 사상의 흐름이 로마에서 서로 만났다. 즉 그리스-로마(Greco-Roman) 문화와 철학 전통 그리고 팔레스틴으로부터의 유대-기독교(Judaeo-Christian) 계시이다. 성 어거스틴은 이 두 전통의 총아이며 이 두 사상조류를 깊이 들이 마시며 성장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어거스틴은 플라톤주의자이다. 플라톤 및 신 플라톤주의는 철학적인 측면에서 어거스틴의 정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어거스틴은 플라토에게 많은 빚을 지고있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의 철학에서 단지 헬라적인 요소만을 인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국가? 및 ?법률?과 성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 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버스펠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국가?는 인간의 철학적 사고의 구축물이다. 그것은 인간의 합리성이 암시하는 바가 제거된다면 인간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의 이상적인 구축물이며 단지 언어 속에만 존재하는 어떤 기획물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의 성서적인 배경을 힘입어 역사에 대해 보다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견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에게는 ?하나님의 도성?이 이상적인 것도 아니고 단지 신화적인 언어로만 묘사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철학과 상상적 지식이 아니라 계시된 진리에 대한 확신을 필요로 하는 실제적이고 현존하는 사회(Community)이다.  다시 말해서 어거스틴이 성서의 정경을 계시된 진리로 믿는한 그에게는 이상향적인 요소는 없다는 것이다. 키이스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이 세상의 사상과 성서가 상반되는  경우는 성서가 언제나 옳다고 그는
    믿는다. 이러한 생각은 그를 지구는 겨우 수천년전에 존재한  것이라는
    전제에 붙들어 맨다. 그는 모든  진리는 기독교적이라고 믿는다.  이교
    철학자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는 단연코 그들이 잘못된 것이다.  이교
    철학자들이 동의할 때는 그는 유대-기독교 전통이 지혜의  궁극적 원천
    이라고 생각한다.  중립적인  독자들은 그의 주장이 불성실함을 발견할
    것이며, 그의 모든 신념들이 그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외고집적(wrong-
    headed)이라고 추론할 것이다.

  ?하나님의 도성?에서 우리는 어거스틴의 다양한 역할을 발견한다. 즉 신학자, 철학자, 도덕주의자. 정치사상가, 역사 해석자, 문학 및 드라마 비평가로서의 역할 등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결코 그가 우선적으로 기독교 감독이지 철학자가 아님을 잊지 않았다. 그는 철학이나 사상학파 에게서 보다 교회와 성서에서 훨씬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기에 그는 이성적인 사색보다는 성서의 계시에서 진리를 찾는다. 그는 그의 생애 중 많은 부분을 변증론자로써 교회를 변호하는데 할애했다. 이 목적달성을 위해 그는 세속철학을 활용하였다. 키이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는 지금 전문적인 철학자이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 감독이며 결코 그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다. 그는 고대의 중요한 세속철학을 지적인  원천
    으로 활용한다. 성서의 正經에 관하여는 그는 이레니우스와(Irenaeus)
    와 성 아다나시우스(St. Athanasius)에 동의하여 성서는 첫번째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자료라고 한다. 그러나 그가 세속적인 증언을 할 때  그
    의 변증적인 목적을 지키기 위해 성서를  기꺼이 왜곡시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성 어거스틴은 철저한 변증론자다.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쳐 온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조금도 틀림없는 것으로써 숙고되어야 한다. 역사적 증거, 세속의 과학, 지적 훈련, 철학적 사색, 그리고 성서의 정경 자체는 그의 선험적 가설들의 그럴듯함(Plausibility)을 예증하는데만 활용되어야지 결코그것을 시험하는데 활용되어서는 안된다. 성어거스틴의 역사 연구 방법의 근본적인 기초는 기독교 신앙이며, 역사연구를 포함해 그가 연구하는  주요 한 목적은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는 것이다.

               3. 神知識(Religious Knowledge)

  성 어거스틴의 역사해석은 그의 독특한 지식론에 의해 결정된다. 성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감정(Sensation)과 이성(Reason)은 필요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비록 오류에 빠지기 쉽지만 각자가 우리 주변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는 이성이 발견한 것을 비준해주고 인간들에게 하나님, 우주,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준다. 결과적으로 성 어거스틴이 계시에 예속시킨 개념들은 대부분 그의 역사해석을 계산에 넣은 것들이다. 키이스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첫째로, 모든 상황들이  예정된 자리를 가지고 있는 더 오래된  세상이
    있다. 이러한 결정론이 기독교적인 용어로 표현되고 있다. 전능하신 하
    나님이 가시적이고 불가시적인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다. 어떠한 사건도
    그의 섭리적인 계획 밖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두번째는, 비록 모든
    형식상의(external) 사건들이 예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자유의지
    의 여지를 약간 허용한다면, 우리는 이 필연적인  것에 대해 어떻게 해
    석하고 반응해야 할 것인가를 어느 정도는 선택할 수 있다. 세째로, 인
    생의 가장 중요한 것은 경험의 세계에  대해 옳바른 태도를 채택하거나
    채택하도록  인도되어야 하는 일이다. 이념적으로  건전한 사람은 모든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 이론은 선교사역으로 이끌어 갈지도 모르
    며, 연이어 가능한 곳에서 사상을 통제하려는  호의적인 노력에로 이끌
    어 갈 수도 있다. 정성을 다하여 후자를 행하는 자는 강압적인  아버지
    의 참뜻(Value)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네번째는, 드러난 모든 명제
    들은 성서의 정경들 속에서 지지자를 찾아낼 것이다. 이것은 만일 필요
    하다면 선험적인 해석을 후원하도록 가상적인 증거가 강요될 것을 암시
    하고 있다. 그 암시가 거짓은 아니다. 다섯째로, 우주적이고 영원한 영
    역의 법이 있다. 이 법은 실재들의(플라톤적인)  형태와  과정의 양상,
    수학의 법칙, 그리고 어떤 도덕적인 원리들을 내포한다. 사회와 경제의
    변화법칙도 분명히 포함된다.  우리의 관찰과 귀납적  추리는 우리에게
    풍자화와 근사치를 보여주어 이해 가능한 세계에 이르는 길을 가리켜준
    다. 그러나  관찰과 귀납적 추론은 우주적이며 영원한 영역의 원리들을
    결코 가리켜주지 못한다. 그것들은 더 높은 자원이 필요함을 암시해 줄
    뿐이다. 이러한 형상들의 법칙과 양상은 단순히  하나님의 마음에만 실
    재하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할 때 그리고 원하는 정도로 가시적
    인 세계에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 안에 全 진리체계를 지니고 있다. 존재와 思考의 윈인과 법칙들이 한결같이 그에게 매여있다. 하나님의 본질은 비판의 표준, 즉 진리에 대한 견고하고 변함없는 최종의 시금석이며, 영원한 진리의 법칙이고,
영원한 진리 그 자체이다. 피조된 모든 것의 발전과 행위의 침범할 수 없는 규범인 世界秩序는 하나님의 본질을 반영한 것이다. 우 는 그에 대해 “한
하나님, 한 진리, 하나이며 으뜸가는 지고의 본질” 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어거스틴의 하나님은 실천이성의 요구에 따라 필연적으로 지고의 신이 될 것을 요청받고 있는 칸트의 신과는절대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의 증언이란 것은 본질적으로 이성 부분을 신적 본질의 본래적인 필연성에 복종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7 더하기 3은 10이 되어야 하지만 그들은 10이 아니다라고 판명하지 않듯이, 하나님은 존재해야 하지만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명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분명히 인간을 초월하는 旣知 사항이 인간이성 속에 순전하게 현존해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객관적인 실존을 암시한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가지는 관념을 위한 충분한 근거를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이러한 뿌리 깊은 경향성으로 인해은 성 안셈(St. Anselm)과 성 보나벤추라(St. Bonaventura), 스코투스(Duns Scotus), 데카르트(Descart)의 형이상학과 어거스틴의 형이상학이 서로 연결된다.
  사실 하나님은 어거스틴이 진리에 대한 개념을 그 위에 굳게 정착시킨 절대적인 바위다. 하나님은 모든 思考와 存在의 기초이다. 그는 만물의 창조주이며 법을 부여하시는 분이고 만물의 진리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이 만물의 진리를 인지하는데 있어서의 원천이고 안내자이다. 그는 “그가 보는 것(객관적인) 뿐만 아니라 視覺力까지도 이애하고 수용하는 분”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진리의 근원인 하나님에 대한 추구가 그의 全生涯에 걸친 지속적 과업이다. 神知識에 대한 인격적인 체험에서 그는 神知識이란 필연적으로 실존적이고, 이성적이며, 신앙적이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a) 實存

  어거스틴의 첫째 관심은 新 아카데미파의 회의주의에 반하여 회의론자의 모진 의심이 전혀 뒤흔들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실존에 대해 확신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의 실존을 증명하려는 자는 누구든지 먼저 자신의 실존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Cassiciacum에서의 대화 앞부분을 상대자의 실존에 대한 의식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을 추구하거나 증명하는 첫째 단계로써 자신의 실존에 대한 증명은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인격이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추구하는 주체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하면 추구자 자신의 실존은 인식론적인 그리고 “나와 당신”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유일한 주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神知識觀에 따르면 자아 실존에 대한 확신은 진리를 향한 기초적인 예비과정이다.
  인간은 매순간 하나님 앞에서 홀로 자신을 선택하는 실존적인 존재이다. 그러기에 그가 인간의 자아인 자신의 실존을 무시한다면 神人關係性이나 神知識은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 참으로 인간은  그가 결정해야 한다는 면에서 歷史안에서의 책임적 존재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파트너로서 자신의 결정에 따라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自我意識이 결정의 전제조건이다. 현대의 인기있는 실존주의는 인간의 자아인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입증해주고 있다. 신학이 자아인식을 무시하는 것은 自己敗北行爲이다. 실제로 금세기의 유명한 신학자들(예를 들면 R. Bultman, P. Tillich, etc.)은 이 자아인식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었다. 성 어거스틴이 인간의 자아실존을 神知識의 주체로 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쇼프(Ludwig Schopp)는 주장하기를, “어거스틴은 자아의식을 지식의 근본적인 기초로 수립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다. 이야말로 그가 이룩한 가장 큰 공로들 중의 하나이다” 라고 하였다.

     (b) 理性(Reason)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신앙에 기초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 진리에 대해 어떤 엄밀한 합리적인 논증도 허용하지 않는가? 결론적으로 미리 말하면 어거스틴은 이성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에 있어서 불가분의 요소로 간주한다. 길손(E. Gilson)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하나님이 존재하고 있음을 믿는 사람들의 眞理(Truth)는 하나님의 존재
    를 증거하기 위해 사용하는 논증의 합리성을 조금치도 감소시키지 않는
    다. 오히려 신앙은 이성으로  하여금 그 논증의  타당성을 더 분명하게
    살펴보도록 도움을 준다. 다시 말해서 견고한 신앙은  이성으로 하여금
    분명한 논증을 요구하는 의무를 벗어나지 않게한다.

  어거스틴의 인간론은 이성이 신지식에 있어 불가분의 요소로 간주되어야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어거스틴은 인간론에서 사람은 육과 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사람은 이성적인 존재로 피조되었기에 영은 본성상 지식의 양식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지식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이성을 통하여 아는 것이다. 다시 말로 한다면 이성은 인식적인 지식의 기준(Criterion)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인식론의 면에서 神知識을 위한 제 2의 조건이다. 길슨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감각은 지식의 수준에 오를 수 없다. 비록 우리가 눈으로 보아 色을 인
    지하고 귀로  들어서 소리를 인지하지만, 소리는 눈으로 인지되지 않고
    色은 귀로 인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인간과 동물에게 공통
    적인 視聽覺에 의해서가 아니다.  더 분명한  것은 눈은 보기는 하지만
    눈이 보고있다는  사실을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눈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더더욱 알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식은 제 3의
    名詞(Term)로써 존재와 生보다 위에  놓이고 차례로 계급구조를 이루는
    외면의 감각, 내면의 감각, 이성이라는 세가지 용어로 구분된다...이성
    은 외면의 감각을 의미하면서  또한 그것을 판단한다. 이리하여 전술한
    분석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이성이 외면과 내면의  감각을 구분한다. 그
    리고 이성은 그들 모두를 정의하고, 분류하며, 정돈한다. 만일  이성이
    그것들을 판단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모든 행위들을 깨달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단순히 知的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知的이다. 神知識에 관한 어거스틴의 교훈은 “超哲學的”(trans-philosophical)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거스틴은 知的 확신에 대한 제한성을 지적하면서 知的 판단에 있어 意志의 영향이 막중함을 강조한다. 칸트가 그의  ?실천이성 비판?에서 말하듯이 “意志”는 도덕과 관련이 있는 용어이다. 포 리의 말처럼 “이론의 근본 원리로서, 어거스틴은 심성(Heart)의 도덕성이 없이는 마음(Mind)은 진리를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참으로 종교의 진리는 사색적인 싸늘한 이론으로써가 아니라 인생의 法道로서 정성을 다하여 포용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삶의 樣式으로써 인간에게 제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이성적인 사색은 영원한 복락에 대한 신비한 명상에로 영혼을 인도하는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준비적인 역할에 불과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神認識에 대한 세번째 조건으로써 신앙이 요청된다.

     (c) 신앙(Faith)

  계시론적인 神認識(Reiigious Knoeledge)은 “나와 당신”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성 속에서 발생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호간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서로를 아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客體의 人格(Object Person)에 대한 어떤 인식과 이해가 없는 사랑은 무의미(nonsense)하기 때문이다. 사 실 사랑하는 경우에, 사랑을 받는 객체는 그 사랑을 자신의 像(Image)으로 바꾸어 그것에 同化하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 든지 사랑하는 주체에 반응을 한다. 길슨은 말하기를, “육체적이고 썪어질 것을 사랑하면 肉體化되고 멸망에 처해지게 된다. 영원한 것을 사랑하면 영원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계시는 神人의 만남을 통해 은혜로 말미암아 발생한다. 왜냐하면 兩者 중에 주도권을 쥐는 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에게는 神認識에 관한 은총은 조명(Illumination)을 의미한다. “히포의 박사(Doctor of Hippo)는 이해를 돕는 照明을 대개 의지에 미치는 은총의 영향과 비교하기를 아주 좋아한다”고 포탈리는 말한다. 어 스틴은 ?삼위일체론?(On the Trinity)에서 영혼을 조명하는 빛은 의롭게 하는 은총과 비교되며, 양자 모두 영혼 속에서 창조된 형태들이다라는 아주 중요한 논제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조명을 의도한 어거스틴의 여러 표현들을 볼 수 있다.
  은총적 조명은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생기는 것으로써 성령의 자비하심에 의하여 아담(Adam)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실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다시금 이룩하는 것이다. 바르트(Barth)의 화해론에 의하면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고후 3:17))으로써 화해케 하는 능력이시다.
  성령의 조명성에 입각한 이러한 이유에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20절에서 말하고 있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라는 가르침이 어거스틴에게 곧바로 적용되었다고 할 것
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만 창조주와 사물의 입법자와 진리만이 되시는 분이 아니라 이러한 사물의 진리를 인간으로 하여금 인식케 하며 우리 안과 밖의 근원이 되시기도 한다. 그 분 안에 주관적인 인식과 세상의 객관적인 실재와의 관련성이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에 있어서는 “우리는 이해할 수 있기 전에 먼저 믿어야 한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참 로 신앙은 지식의 시작이다. 키 스는 기록하기를, ”성 어거스틴은 우리가 아는 것이 극히 미미한 것임을 인식하였다. 우리는 대부분 신앙 안에 담겨진 신념에 따라 사는데, 이는 세속적인 가정들에 대해서만 아니라 종교에 대해서도 사실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은 권위를 신앙의 규범적인 기초로 前提한다. 거  모든 상황에서 행위에 대한 우리의 의견(opinion)과 규칙(rule)은 권위에 의해 취사선택되어 視覺과 聽覺 같은 감각적인 감식력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우리는 부모의 말씀과 가르침을 신뢰하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대체로 죽음 후의 소생에 대한 보편적인 기대는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니고 권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의견(Pronouncement)에 의해 지탱이 된다. 그 서 성 어거스틴은 지적인 확실성이 없이는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 있지만 이러한 권위에 대한 흔쾌한 신뢰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어거스틴은 신앙의 세가지 자원인 성서와 전통,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을 권위로 선언하고 있다.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성서의 정경들에 동의한다”고 말할 정도로 어거스틴에 있어 성서의 정경은 전혀 오류가 없는 규범이다. 그러나 성서 안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전통만이 사도들에게 임한 여러 계시들을 전수하였기 때문이다. 즉 “우주적인 교회가 유지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있는데, 교회가 유지하고있기 때문에 비록 그들이 문서화 되지는 않았지만 사도들이 명한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위 성서와 전통이 교회의 살아있는 권위이다. 어거스틴이 “나는 카토릭 교회의 권위가 그것을 명하지 않았다면 복음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라고말하듯이 권위만이 성서의 유효성을 認證한다. 교회의 가르침에 의해 복음은 성서와 전통을 해석하는데 있어 반드시 추종해야할 최고의 규범이 된다. 포탈리는 이렇게 논평하고 있다.

    신앙을 입증하는 논리적인 순서에 있어서, 어거스틴은 성서에 의해서는
    입증되지  않지만(만일 그렇지 않으면 악순환이 있었을 것이다)  그 기
    초에서나 거룩성의 탁월한 驚異性에 의해 입증되는 교회의 神性性을 聖
    書(The Sacred Books)의 지식 또는 적어도 그 영감성  보다 앞에 둔다.
    그 다음에  그는 교회의 종교사상의 본질적 요소에서 신성한 것으로 알
    려져 있는 카토릭  교회로부터 교회의 사명과 특권을 그에게 보다 명료
    하게 보여주는 신조와 영감된 책을 받는다.

  그러므로 성 어거스틴이 왜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을 설득시키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존재함을 가르치는 성서의 진리를 그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하였던가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 어거스틴은 신앙에 입각하여 神知識의 근원인 하나님의 存在에 대해 확신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믿는 것과 이해하는 것의 관계성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그는 “믿으려면 이해하여야 하고 이해하려면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포 리는 “신앙에 이르는 準備段階를 고려함에 있어  이성의 선행적이고 마음의 歸依((Adherence)를 동반시키는 역할을 어거스틴 보다 정확하고 신중하게 주장한 사람은 없다. 그는 이성과 신앙의 관계성을 완전하게 잘 정돈하여 제시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 어거스틴의 神認識(Religious Knowledge)의 관점은 방법론 상 폴 틸리히(P. Tillich)의 相關方法(Method of Corelation)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神認識(Religious Knowledge)은 권위와 조명(Illumination)을 통한 신앙과 은총의 신비스러운 만남의 접속점에서 생긴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팽이가 설 수 있는 것은 상관성의 원리에 입각한 求心力과 遠心力 사이의 긴장 관계에 의한 것임과 같이 주체인 “나”와 객체인 “당신” 사이의 긴장 관계가 없는 한 인식론적 사실인 계시가 생길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II.
            1. 직선(Rectilinear) 史觀
  성 어거스틴은 세계사를 여섯 무대로 구분함으로써 세계사에  하나의 유형을 부과한다. 역사는 순환적이며 나선형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고 직선적으로 발전한다고 보며, 여섯 무대로 구분한 것은 舊約史가  분명히 어떤 구분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여섯 무대는 1)아담에서 노아까지, 2)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 3)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4)다윗에서 바빌론 포로까지,  5)바빌론 포로에서 그리스도의 탄생까지, 6)그리스도의 탄생부터 마지막 심판까지이다. 성 어거스틴은 6일 동안의 창조와 병행점(Parallel)이 있음을 주목한다.  이는 또한 세계사의 발전과 인간 개인의 성장 간에 유사점이 있음을 암시한다. 키이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미성년기에는 창세기에 나오는 거인들이 상징하는 것처럼 육체가  지배
    한다. 인류의 초창기에는 왕과 예언자들이 등장하였다. 그리스도는  老
    年期, 즉 외면적인 삶에서 내면의 삶으로 강조점이 변하는 중이어서 참
    으로 활기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人生期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그
    는 여섯  무대의 관점에서 성서와 세상의 자료들로부터 그의 증거를 정
    돈하였다.

  발생과 쇠퇴의 주기에 대한 고전주의의 관점과 기독교의 관점 간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발생과 쇠퇴가 무한한 다수의 상황속에서 계속되고 순환한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관점에서는 발생과 쇠퇴가 1회적이며 유일하고 반복되지 않는다. 가까운 장래에 무엇인가를 종결하는 인간실존의 한 주기만 있고 이것으로 끝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역사의 관점에서 신곡(Divine Comedy)은 단지 1회만 공연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키이스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세계를 영원하며 시작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던  고대의
    철학자들은 기록된 역사가 짧다는 사실 때문에 당황했다.  그들은 현대
    식으로 인종이 늦게 발전했고 문화가 대단히 번영하고 있다고 가정하기
    보다는 순환하는 역사적 주기를 지닌 영원의 저 먼 거리에 살고 있다고
    추리했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에게는 역사의 과정은 직선적이다. 지구
    의 역사는 약 6,000년이며,  成肉身은 시간 속의 1회적 사건이다. 그리
    스도는 한번에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했기 때문에 그
    는 더이상 죽지 않는다.

  성 어거스틴의 직선적인 역사관을 위한 기초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견고한 신앙이다. 직선적인 역사의 방향 이해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 어거스틴의 역사관은 발생과 쇠퇴의 주기에 대한 헬라의 歷史思想과  차이가 있다. 니스벳은 그의 저서인 ?사회변화와 역사?
(Social Change and History)에서 데오돌 검퍼쯔(Theodor Gomperz)로부터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기하학적으로 말해(Gomperz가 기록하기를),  우주의  進行過程은  彈道
    (Trajectory)나 순환(Cycle)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彈道로서의 우
    주과정은 미지의 목표를  향한 여행일 것이고, 순환으로서의  과정이란
    항상 출발점으로 되돌아 오는 현상의 순회 과정일 것이다.  헬라인들은
    그들 앞에 놓여있는 이러한 양자택일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할지를 망설
    일 만한 여지가 있을 수 없었다. 헬라인으로  하여금 첫번째 것을 택하
    게 할 결정적인 類比가 없었다. 헬라인들은 식물들의 삶 속에서 자신을
    계속적으로 갱생시키는 쇠퇴와 부활의 광경을 인용하여 순환론을 지지
    하였다.

  동양사상의 역사의식 결핍성은 동양사상이 하나님에 대해 모호한 개념을 갖고 있는데 그 원인이 있다. 불교와 유교에서는 한결 같이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성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이는 直線史觀을 견지할 수 없다. 사실 성 어거스틴의 직선사관은 다른 사관들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특징을 지닌 기독교적인 사관이다.
  성 어거스틴은 역사과정을 하나님을 목표로 하여 전진해 나가는 것으로 본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는 완전하다. 모든 것이 서로 협력하여 善을 이루고 섭리는 잘 조화된 우주의 과정을 행복이 넘치는 예정된 목적지로 빈틈 없이 인도한다. 모든 피조물은 역할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완전하게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가 모든 것을 다스리고 화해시킨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와 美, 形態, 秩序, 數, 重量, 穉數(Measure)의 창조주이시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고의 진실한 분이요, 말씀과 성령(삼위일체이신)
    을 지니고 있고,  모든 혼과 몸을 지으신 창조주요 한 분뿐인 전능자이
    다. 그의 선물에 의해 모든 것은 자만심이 아니라 진실을  통해 행복을
    누린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 인간과 천사만이 아니라, 가장 작고 비천
    한 짐승의 내장(entrail)이나 새의 깃털, 혹은 식물의 꽃,  나뭇잎까지
    도 조화를 이루도록  하셨다. 말하자면 모든 곳에 상호 간의 평화가 내
    재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 세상(Kingdom)과 인간의 통치  및 예속
    (Servitude)을 그의 섭리적인 법칙 안에 두었음을 믿을 수 밖에 없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역사의 지배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그의 파트너로써의 역할 만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 어거스틴의 관점은 “인간이 역사를 만든다”라고 주장하는 마르크스(Marx)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브루스 마쯔리쉬(Bruce Mazlish)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이제부터 마르크스 체계의 세부사항들은 옆으로  치우고 그의 역사비판
    을 비판해 보도록 하자. 마르크스의 기본 사상은  ‘인간이 역사를 만든
    다’는 것이다.  이는 헤겔적인  공식(Formulation)이기  보다는 비코적
    (Vico-like)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는 심사숙고해서  말하기를, ‘역사
    는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다. 즉 마치 역사가 인간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역사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인간을 수단으로  사용
    하는 것은 결코  역사가 아니다. 오히려 역사는 인간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추구하는 행위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로저스(E. Rogers)는 ?기독교의 공산주의에 대한 비평?(A Christian
Commentary on Communism)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압축해서 요약한다면 이것들은 모두 매우 독단적(pontifical)인 진술들
    이다. 그 기초들을 계속 추적해 보면 우리는 그 개념이 두개의 전제 위
    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는 ‘역사는 스스로 힘을 지니고 있
    는 것이 아니며 인격화 될 수 없다. 역사는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다.
    역사는 단지 인간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추구하는  행위일 뿐이다’라는
    것이다(Cf. German Ideology, p. 38). 다른 하나는 증명 가능한 사실로
    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절대적인 이데아(Absolute Idea)나
    영원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이 땅에서는  증명할 수 없는 것
    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독단적인 도그마를 배격하고 순전히 경험적인
    방법으로 증명이 가능한 것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비록 성 어거스틴과 마르크스 사이에 역사의 진보에 대한 개념이 유사하다고는 해도 역사관에 있어서는 역사과정을 결정하는 궁극적 요인에 대한 절대적인 차이점이 있다.
  성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인간 사회는 자체의 물리학과 본래의 자체적인 질서 및 발전을 지니고 있다. 인간 사회는 하나님이 부여한 계획에 따라 진행되어 나간다. 성어거스틴은 역사과정의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의 섭리를 본다. 성 어거스틴은 우주의 과정에 대한 그의 心像(picture)을 묘사하기 위해 “神曲”(Divine Comedy)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는 역사과정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 보듯이 그 과정을 설명하는 모든 요소를 기독교에서 이끌어 낸다.
  기독교적인 신앙의 빛 속에서, 성 어거스틴은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에 따라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직선적으로 계속 진행해 나가는 것으로 믿는다. “분명히 무질서는 없다. 창조, 이 땅에서의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史,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이 모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연극공연 전에 대본(Text)이 작성되었다”라고 키이스는 말했다.
다시 말해서 성 어거스틴은 인간역사는 처음부터 종국의 마지막 심판까지 6장면으로 되어있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두 도성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2. 예정(Predetermination)

  성 어거스틴은 역사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예정하신 계획에 따라 목표점을 향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직선으로 진행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완전하게 창조된 우주는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  그리고 섭리가 현명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우주의 과정을 행복이 넘치도록 예정되어 있는 목적지로 이끌어 간다. “성 어거스틴은 우리의 경험 세계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들은 지혜롭고 사랑이 가득한 섭리적인 계획 속에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들임을 서슴없이 믿었다”고 키이스는 기술하였다. 드라마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사건이 그것을 창조한 하나님에 의해 미리 알려진다. 시를 암송하는 사람은 암송의 始末 내내 그가 암송하는 순간인 현재와 암송을 마친 미래를그의 마음 속에 담고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마음 속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영원한 현재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 어거스틴의  역사관에서 역사의 필연성 혹은 불가피성을 볼 수 있다. 로버트 니스벳은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여러번 반복적으로 다음의 논제를 강
    조하였다:  “하나님은 시간 속에서 새롭고 급작스러운 결정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의 불변적이고 영원한  계획에  의해 창조하였다.” 그는 또한
    “하나님은 시간 속에서 창조하기를 원했지만  변하지 않는 그의 계획과
    의지에 따라 이것을 하기를 원하였다”고 기술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하
    나님의 주권에 대한 아주 단순한  개념(Notion)으로부터가 아니라 예정
    된 계획 속에서 들어내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보다 복잡하고 정교한
    개념과 영원히 어긋남이 없는 하나님의  물리학으로부터 필연성이 발생
    하는 것이다.

  실제로 역사의 필연성이라는 성 어거스틴의 사상은 西歐思想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로버트 니스벳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것은  “섭리”(Providence)라든가  “정신”(Spirit)이나  “변증법”
    (Dialectic) 또는 “분명한 숙명”(Manifest Destiny)이라는 형태로 서구
    사상에 결정적인 많은 결과를 이룬 하나의 학설(Doctrine)이다. 역사의
    필연성에 대한 사상이 고대사상의 여러 부분에 분명히 예시되어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성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이  Orosious,
    Otto of Feising, Bossuet, Condorcet, Comte, Hegel, Marx로 이어지는
    서방 특성적인 지적 계통의 출발점이라고 확실히  믿는다. 그리고 현대
    의 Berdyaev, Niebuhr, Sorokin, Toynbee 등도  어느 정도는 그 계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어거스틴이  역사의 필연성이라는 사상 면에서는 서구사상과 동일 선상에 서있지만 "하나님에 도취된 어거스틴과 물질주의를 지향하는 칼 마르크스 사이에는 넓다란 심연(Gulf)이 가로 놓여 있다...어거스틴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실존이  근본을 이루는데, 이  점에서  어거스틴은 꽁트(Comte)나 마르크스(Marx)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어거스틴은  역사의  필연성이라는 이러한 전제를 기초로 하여 ?하나님의 도성?에서 두 도성의 발전을 통해 인간의 역사를 설명한다. 어거스틴은 기술하기를, “우리는 이것을 인간에 따라 사는 사람들로 구성된 혈통과 하나님을 따라 사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혈통이라는 두 부류로 나눈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을 신비하게 두 도성 혹은 두 인간 사회라고 부른다. 그 중의 하나는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통치하도록 예정되어 있고, 다른 쪽은 악마와 더불어 영원한 형벌을 받도록 예정되어 있다.” 지조의 도성은 그의 동생을 살해한 가인(Cain)이 始祖이고, 하늘의 도성은 지상에서 은총을 통해 순례자의 삶을 살다가 후에 은총에 의해 하늘나라의 시민이 된 아벨(Abel)이 시조이다. 아벨은 지상에서는 “이방인”(Foreiner)이었으며 “재류 외국인”(Resident Alien)이었다. 하나님의 도성은 이 세상에 대해서는 이방인이며 거류 外人이다. 가인은 도성을 세웠으나 아벨은 도성을 세우지 않았다고어거스틴은 말했다. 성도들의 도성은 위에 있다. 성도들이 비록 여기에서는 이 땅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만 그 나라가 도래할 때까지 순례자로 사는 것이다. 그 후 육신이 부활할 때에 하늘의 도성은 그 나라의 시민들을 불러 모은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보는 역사의 과정은 예정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두 도성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이다. 두 도성은 풀수 없을 정도로 이 땅 안에  뒤섞여 있다. 그러나 두 도성의 일원들은 최종의 만족으로  추구하는 대상(Object), 즉 그들이 자신을 위해 “향유하기”(enjoy) 원하며 그들이 추구하는 관심이 달려 있는 대상에 따라 구분이 된다. 하늘의 시민들은 하나님 외에는 어느 것도 궁극적인 헌신의 가치가 있는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지상의 도성에 속한 시민들은 보다 저급한 선(Good)을 더 좋아한다. 다시 말해서 두 도성은 어거스틴의 말처럼 相異한 사랑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두 사랑이 두 도성을 세운다. 지상의 도성은 하나님을 경멸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도성은 자기를 경멸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어거스틴은 말했다.
  지금 우리는 “자기를 경멸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하는 심각한 물음에 직면해 있다. 어거스틴은 “은총에 의해 예정되고 선택된 자들”이라고 간단히 답변한다. 키이스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인간은 모두 죄에 대한 경향성을 지니고  출생하였다. 누구도 스스로는
    선을 의도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몇 사람을 하나님의 계획
    에  대해 신뢰하도록 회복시킨다. 이러한 소수의 사람들이 회복되는 것
    은 그들이 그것을 택했거나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놀라운  은총에 의
    해서인  것이다. 번개불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표적들을 관통한다. 행
    운을 얻은 자들은 그들의 행운에 대해  다만 깜짝 놀라는 일 외에는 아
    무 것도 할 수 없다. 분명한 자격을 지니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누
    구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주장할 수 밖에 없다. 두번째로 태어난 아벨이
    이 땅에서 최초로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선택되었다. 쌍둥이로서 동
    생인  야곱은 개인의  어떠한 공로도  없이 모태로부터 선택되었다 (De
    Civ., D., xv. 1, 12; xiv. 35). 아무도 그 자신의 선택을 통해서가 아
    니라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그러한 생각을 주입시켜 주기 전에는 救援
    을 바랄 수 없다. 아무도 하나님께서 의지와 능력을 부여해 주시기  전
    에는 善도 행할 수 없다. 그가 의지는 갖고  있어도 그가  보기에 선한
    것으로 생각되는 일을 행할 능력은 갖고 있지 못하다. 하나님이 신앙이
    나 선한 일에 있어서의 의지와 능력 그리고 인내의 유일한 원천이시다.
    선택된 자가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놀라
    운 은총이 계속적으로 필요함을 자백하는 것이다.

  성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전 인류는 첫사람인 아담 안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실제로 아담의 본성을 조만간에  두 도성-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두 부분으로 예지 예정하셨다. 어거스틴은 “우리는 다만 태초에 창조된 첫사람 안에 하나님의 예지 속에서 전인류에 관계된 이 두 도성 혹은 두 사회의 토대가 놓여있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의 역사관을 통해 우리는 예정을 통해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장엄한 주권을 볼 수 있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기독교적 신앙이 자유의지에 대한 어떤 여지를 필요로 하고 있기에 숙명론에 몰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인간이 자유의지의 노력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믿었다. 키이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결국 우리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은 그가 선택한 자들을  그에게로 인도
    하기 위해 그들의 영혼에 역사하실 뿐 아니라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자
    유로이 관여 하신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그의 처분에 따라 인간의 意向
    을 악하고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돌아서게 할 수도 있고 그가  기뻐하시
    는 방향으로 향하게 하실 수도 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의 全過程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태초로부터  누가
    그의 자유롭고 분에 넘치는 은총을 받을 것인지를 알고 계셨다. 하나님
    은 그의 대리인인 전도자들을 통해 그가 선택한  자들을 부르고 확증하
    실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히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만 구원 받게 될
    것이다.  은총은 불가항력적인 설득력이요 마음을 끌어  당기고 기쁘게
    하는 것이며  무가치한 것에 대한  사랑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 쪽으로 중재해 주는 강력한 動因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에 있어서 예정과 관련이 있는 하나님의 의지가 인간 개인과 歷史의 구원을 위한 결정적인 요인이다. 성 어거스틴의 엄격한 예정 사상을 숙고하면서 키이스는 다음과 같이 심각한 질문을 한다: “만일 자연인이 죄의 불가항력적인 성향 때문에 죄를 범하는 것이라면 성 어거스틴처럼 인간의 책임성을 믿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은 모든 상황은 하나의 웅대한 계획 속에 각각의 자리를 갖고 있으며 하나님의 자비는 不可解한 방법으로 역사함을 믿는다. 마르쿠스(R. A. Markus)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죄와 구원이라는 면에서 두 부류의 인간들 또는 두 국가로 분명히 정의
    할 수 있다.  그것은 우주론적인 면에서 이해한 “내부인”과 “외계인”으
    로 구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인간의 운명은 불가해한 하나님
    의 심판과 보다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결국 인류는 불가해한 방
    법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두 부류로 분리된다. 어거스
    틴은  바울이 말한 로마서 9장 8절을 주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
    다: ‘하나님은 그가 원하는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고 그가 원하지  않는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이 인간적인 연
    구로는 접근 불가능한 어떤 비밀스러운 정의의 행위라고 지체없이 확고
    하게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예정은 “눈에 거슬리고 호감을 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 님의 예정은 절대적으로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신앙이 없다면 이 문제와 관련하여 많은 의문과 의심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성 어거스틴처럼 하나님을 확고하게 믿는 자가 아니면 하나님의 예정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1장에서 이미 고찰해 보았듯이 역사신학이라는 면에서 신앙이 성 어거스틴의 역사 연구방법에 있어서의 근본 토대임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요약해 보면,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역사를 지배하신다는 근본적이며 기독교적인 전제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역사를 두 도성의 발전 속에서 하나님이 예정한 섭리적인 계획에 따라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는 것으로 보고 있다. 키이스의 말에  따르면, “어거스틴은 神曲의 줄거리(Plot)가 우리를 포함한 연기자(Performer)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 속에 영원 전부터 존재해 있었다고 믿는다. 연기자들은 이 줄거리(Plot)를 현상계의 세목들 속에서 수행할 능력과 의무를 지니고 있다...그 드라마는 계획된 대로 전개되어 나간다.” 그러므로 이 예정론은 분명히 세계사를 영원히 예정되어 있는 계시라는 개념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몰트만의 말처럼 “이 현재 역사, 즉 문화와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고 있는 現時代의 歷史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과 그의 나라를 실현하는 계시과정에 있어서의 하나의 요소임에 틀림 없다.” 다시 마지막 장에서는 神曲이 지향하는 종말론적인 종국과 관련한 역사의 목표에 대한 성 어거스틴의 사상을  다룰 것이다.

               3. 행복한 종말론(Happy Eschatology)

  성 어거스틴의 역사에 대한 가장 중요한 신념은 역사과정은 목적론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기독교적인 목적론자이다. 그는 지혜로운 섭리가 조화를 이룬 우주의 과정을 예정된 행복의 종착지, 다시 말해서 “해피 엔드”(a happy ending)로 이끌어 간다고 믿는다. 키이스는 “성 어거스틴에 의하면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불행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만일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다면 이는 틀림없이 우리의 어떤 결점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회심과 세례 사이의 은신기((Retreat Time)에 있었던 캐시키 아쿰(Cassiciacum)의 대화에서 어거스틴이 첫 문제로 제기한 행복에 대한 질문을 되돌아 보면, 그가 개인과 온 인류의  궁극적인 목표로서의 행복에 대해 얼마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가를 인식할 수 있다. 개인과 인류 전체의 행복에 대해 어거스틴이 취했던 신학적 입장이 그의 기독교적인 삶의 전반에서 후반까지 변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계속 온전하게 유지되었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하다. 성 어거스틴은 인간의 행복은 인간 역사의 결승점인 종말론적인 왕국에서 온전하게 성취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창조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은 은총에 의해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도성에 속한 성도들 만이 영원한 은혜를 누리게 되고, 하나님에게 버림 받은 자들은 마지막 심판 후에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키이스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성 어거스틴은 육신이 부활하여 영혼과 다시 연합함으로 시작되는 미래
    의 삶(Future Life)이 있다고 믿는다.  미래의 삶에서, 선택을 받은 자
    들은 이 땅의 삶이 무의미하고 비참한 것으로 생각된 것이 모두 하나님
    의 뜻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은 그들이  이것을 믿을 뿐이나 그
    때에는 이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과의  화해에서  약
    속된 행복을 온전히 누리게 될 것이다-여기에서는 단지 그 행복을 신앙
    심을 통해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미래의 삶에서는, 영원히 멸
    망받지 않을 것처럼 보이며 그  화창함으로 인해 때로는  크리스챤들을
    혼란에 빠트리거나 부끄럽게 했던  이 세상은 영원한 파멸에 처하게 될
    것이다.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이 땅에서 추구했던 하나님과의 관계성
    을 최상으로 이루게 될 것이다. 선택을 받은 자들은 완전한 세상에서는
    그들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됨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께 버림받
    은 자들은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되어 ‘스스로’(independent) 그들에게
    전적으로 불행하게 보이는 세상에 처하게 될 것이다.

  두 도성, 즉 하나님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은 태초로부터 세상 끝 날까지 함께 뒤섞여 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교회가 어떤 세속의 체계에 의존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다시 말하서 그는 교회의 운명을 지상 제국의 운명과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성 어거스틴은 때로 교회를 하나님의 도성으로 말하기도 했고 두 명칭을 서로 교환해서 사용할 수 있다고도 했지만, 선택된 자들의 단체(Corporation)를 보이는 교회와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버레펠드는 “만일 우리가 교회를 현세의 제도, 즉 인간의 경험과 역사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마땅히 교회는 순례자들 뿐 아니라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들도 함께 포함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또한 가라지 비유를 교회에 적용하였다. 교회에는 善人과 악인이 함께 섞여 있다. 밀이 땅과 왕겨와 함께 뒤섞여 있다. 교회에는 악한 성직자들도 있다. 교회는 잠정적으로 있는 순례자며 육신이 다시 부활할 때까지는 완전히 하나님의 도성과 통합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교회 자체는 두 도성이 혼동되어 있는 무대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얻어지는 기본적인 결론은  “교회”와 “세상” 간에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쿠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교회는 모든 인간의 제도들과 마찬가지로 심판을 받게 된다. 단 한번의
    심판으로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을 구원으로 예정된 자와 멸망으로 예정
    된 자로 가려낼 수 있다. 敎會史는 성육신(Incarnation)과 하나님 나라
    의 도래(Parusia) 사이의 어떤 세속적인 역사일 뿐이다.

  하나님이 의도한 창조의 완성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Kingdom)이
다. 교회는 잠정적인 제도이다. 세상 속에 독특하게 잠정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와 세상의 이중성은 단지 종말론적인 나라에서만 없어지게 될 것이다. 현시대 또는 “마지막 시대”에 교회는 주님과 다가 오는 그의 나라를 증거하기 위해 세상 속에 존재해 있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 속의 그리스도의 현존은 아니다. 교회는 이 현존의 표식(Sign)이다. 그 나 성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개념은 수 세기에 걸쳐 교회와 국가에 대해다양한 이해의 여러 해석들을 낳게 하였고 서구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반 루벤(Arend Th. Van Leeuwen)은 그의 ?세계사 속의 기독교?(Christianity in World History)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성?은 유세비우스(Eusebius)의 신학이 비쟌틴 제
    국을 위한 것(Byzantinism)이었던 것과 같이  그후의 서구교회  역사를
    위해 구성된 것은 아니었다.  어거스틴의 그 작품은 그 후 수세기에 걸
    쳐 서구 기독교의 연약한 위를 채워준  강력한  지적 양식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중세기의 로마 카토릭 교회는 국가와의  세력 경쟁에서
    자기들을 변호하기 위해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에 열렬히 매어달
    렸다- 애석하게도 그것을 왜곡시켜 계속적인 진보를 경감시키기는 했지
    만 말이다. 루터는 성서와 종말론 사상에서는 어거스틴을 재발견하였지
    만,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국가에 대한 어거스틴의 묵시론
    적인 평가를 약화시켜 단순히 교회와 국가기능을  분할하여 이원화하였
    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도성의 시민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강조를 많
    이 하였지만  종말론적인 긴장에 대해서는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 어
    거스틴이 보기에는  분파들이 민감하게 보존하고 있는 묵시론적 대망은
    하나님의 도성이 기독교 제국 위에  비추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내의 빛
    에 대해 소경이 되게하는 요소였다. 세계사가 처하게 된 위기와 변화의
    순간에 생겨난 어거스틴의 시각(Vision)은 서구교회의 신학과 종말론적
    인 개념 전반에 걸쳐 다이나마이트를 충전하는 촉매제로써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리하여 마르쿠스는 교회 선교와 세상 구원과의 의미심장한 역설적인 관계성을 지적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관계는 하나님의 의도가 신비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우리 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딤전 2:4).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위해 일하는 대상은 세상이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교회는 세상, 즉 구속을 받고 화해를 이룬 세상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교회는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과는 역시 다르다.”
  성 어거스틴이 말하는 하나님의 도성은 종말론적인 나라(Kingdom)에 비추어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독자적인 행동에 의해 이룩되는 나라이다. 인간들은 다만 소망 중에 믿음과 인내로 기다릴 뿐이다. 다시 말해서 크리스챤은 그 나라가 종말론적이기 때문에 소망 중에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절대적인 성향을 띈 즉각적인 정책의 투자나 심지어는 사회이념도 거부한다. 마르쿠스는 “우리가 보듯이 어거스틴은 인간 특유의 상황 속에 있는 긴장은 이 땅의 삶에서는 최종적인 해결이 불가능함을 점차로 깨닫기 시작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비록 기독교의 묵시적인 역사관이 마르크스의 역사관에 변형된 형태로 반영되어 있기는 하지만 메시야를 대망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와 공산주의 사관은 차이가 있음을 반 루벤은 지적하고 있다. 반 루벤은 마르틴 와이트(Martin Wight)로부터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러시아 혁명은 成肉身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은연중에 광범위하게  심판
    하여 역사 안에 의미를 실현하였다. 그 후 세상을 최종적으로 명백하게
    심판할  世界革命에 대한 과도한 기대감이 뒤 따랐다. 세계혁명이 일어
    나지 않자 공산주의 운동 측은 폐막사(Epilogue)의 무기한 연기라는 전
    략을 취했다. 두 묵시론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마르크스주의가  역사 범
    주 외적인 것을 부정하고 역사과정 자체 안에서 역사를 완성할 것을 강
    요한다는 점이다.

  성 어거스틴이 일찌기 캐시키아쿰에서 행복은 신앙을 통해 하나님을 소유함에 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그는 인간 역사의 목표이며 인간의 행복이 온전하게 실현되는 종말론적인 나라는 우리 스스로는 성취할 수 없고 하나님의 도움의 선물로써만 성취된다고 믿고 있다. 길슨의 말처럼 어거스틴은 분명히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행복한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주 겸손하게 그것을 추구해야 하며 그것을 얻도록 간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다시 말로 하면 신앙과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 그리고 겸손이 진정한 행복의 삶인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이르는 첫번째 단계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거스틴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행복추구가 하나님의 나라가 행복한 결말에 도달하는 곳에서 완전히 해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이 행복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행복이 인간 존재의 으뜸가는 욕구라고 믿었다. 성 어거스틴은 실제로 행복이 인간의 가장 선천적인 욕구이며 인간의 모든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선천적인 갈망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무엇 보다도 그 자신의 운명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에게는 자기를 알기 위해 힘쓰는 것과 안락함 및  가능하다면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아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러기 때문에 길슨은 “무엇 보다도 중요한 일은 어거스틴이 그의 지혜론에서 철학의 목적을 늘 행복과 동일시하고 있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그의 걸작인 ?하나님의 도성?을 종말론적 나라 속에서 행복한 결말로 끝을 맺음으로써 그의 오랫 동안의 과제를 결말 지었다. 인간의 역사는 행복이 넘치는 종국을 목표로 하여 하나님의 섭리적인 설계에 따라 계속 앞으로 진행해 나간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역사는 하나님께서 그의 선택한 자들을 영원한 행복을 위해 훈련시키시는 무대라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우 는 참으로 성 어거스틴이 그의 전 생애에 걸쳐 겸손한 신앙으로 인간의 행복에 대한 그의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얻고자 노력하였고, 마침내 역사에 대한 성서적인 통찰에 비추어 인간 역사의 목표로서의 행복한 종말론 속에서 완전하고 틀림없는 답변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결       론

  결론적으로 이 논문을 요약해 보면 성 어거스틴의 역사 연구 방법론은 철학적이기 보다는 차라리 신학적이다. 즉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 성 어거스틴의 역사 연구에 있어서 방법론 상의 근본 토대를 이루고 있다는 말이다. 성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실존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 성 어거스틴은 은총에 의한 신앙적인 계시를 통하여 역사를 해석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요 만물에게 법을 부여하는 자며 모든 것의 진리되는 분일 뿐 아니라 인간이 이 만물의 진리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의 안내자요 근원이 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 어거스틴에 있어서 주관적인 인식과 세상의 객관적인 실재 사이의 관계성은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역사를 해석할 수 없다. 하나님이 역사의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그의 역사 방법론은 편견이 없는 역사가인 콩트나 마르크스의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가 역사를 연구하는 주요 목적은 사건들의 패턴을 발견하려는 것이 아니고 성서 정경의 표준에 비추어 그가 사실로 받아들인 패턴에 역사는 어떻게 순응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다른 말로 성 어거스틴의 역사에 대한 설명은 기독교의 신앙에 비추어 해석된다. 그러므로 성 어거스틴의 역사신학은 계시를 통한 神知識에 의한 변증론적인 역사 연구방법이다. 계시에 비추어 성 어거스틴은 역사는 시작부터 종국까지 예정된 하나님의 설계에 따라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기꺼이 믿는다. 성 어거스틴은 전체적인 역사의 肖像을 ?하나님의 도성?에 설명되어 있는 두 도성의 발전을 통해 묘사한다. 두 도성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두 도성의 발전, 더 나아가 우리의 경험세계 속의 모든 사건들은 지혜와 사랑의 섭리적인 체계 속에 각각 위치가 예정되어 있다. 그는 두 도성이 비록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뒤섞여 있고 혼동되어 있지만 인간 역사는 행복한 결말이라는 최종의 목표점을 향하여 전진한다고 믿는다. 실제로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완성시킬 그의 종말론적인 나라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의도의 최종적인 완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실로 종말론적인 나라 속에서 그가 전생애 동안 부지런히 추구했던 인간의 영원한 행복이 온전히 실현될 것을 기대한다. 이러한 행복한 종말론에서 그의 비관적인 역사관은 극복되었다.
출처 : 푸른 향기
글쓴이 : 푸른향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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