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
◆ 바울 이후 신학을 가장 잘 집대성한 어거스틴........
제 4세기가 낳은 대 성자 어거스틴은 고대 로마 교회가 낳은 4대 박사, 곧 히에로니무스, 암부르시우스, 어거스틴, 그레고리우 스 1세 가운데서 중에 제 1인자로 꼽히는 최대 인물이었다. 마니교를 위시해서 펠라기우스 같은 이단사설(異端斯說)을 물리 치는데 4천 권이 넘는 저서를 내면서 신학과 신앙을 확립한 거대한 인물이었다.
이 위대한 인물이 그 어머니 모니카가 눈물도 드린 기도의 산물이었다고 하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Saint Augustine(354-430)는 누미디아(북아프리카) 타가스테(지금의 수크아라스로 당시 로마의 속지) 출생.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의 하급관리였고 어머니 모니카는 열성적이고 경건한 그리스도교도였다. 카르타고 등지로 유학하고 수사학(修辭學) 등을 공부하여, 당시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로마제국 말기 청년시절을 보내며 한때 타락생활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19세 때 M.T.키케로의 《철학의 권유:Hortensius》를 읽고 지적 탐구에 강렬한 관심이 쏠려 마침내 선악이원론(善惡二元論)과, 체계화하기 시작한 우주론(宇宙論)을 주장하는 마니교로 기울어졌다.
그 후 그는 회의기를 보내며 신(新)플라톤주의에서 그리스도교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편력을 하였다.
그의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384년에 만난 밀라노의 주교(主敎) 암브로시우스였다. 그는 개종에 앞서 친한 사람들과 밀라노 교외에서 수개월을 보내면서 토론을 벌였는데, 그 내용들이 초기의 저작으로 편찬되었다. 388년 고향으로 돌아가서 수도생활을 시작하려 하였으나 사제(司祭)의 직책을 맡게 되었고, 395년에는 히포의 주교가 되어 그곳에서 바쁜 직무를 수행하는 한편, 많은 저작을 발표하였다.
《고백록》도 그 중의 하나이지만, 대작으로서는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 《신국론(神國論)》 등이 널리 알려졌다. 그의 사상은 단순한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참된 행복을 찾고자 하는 활기있는 탐구를 위한 것으로서, 그가 살아온 생애에서 그것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 그 체험을 통하여 찾아낸 결론은 《고백록》의 유명한 구절 "주여, 당신께서는 나를 당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드셨나이다. 내 영혼은 당신 품에서 휴식을 취할 때까지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인간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함은 물론, 하나님이 잠재해 계시다는 우리의 영혼도 알아야만 한다. 그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철학의 대상으로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하나님과 영혼이었다.
◆ 성 어거스틴의 영적인 발전...
인문 과학의 영역에서 어거스틴은, 오늘날 우리가 학문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는 그러한 소수의 인물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먼저 이 사실은 그의 변화무쌍한 인생이 서양 역사의 중차대한, 참으로 결정적인 전환점을 이루었다고 하는 점에 있다. 한 이교도 아버지와 한 기독교 신자 어머니의 아들로서 그는 저 열광적인 흥분의 시대, 곧 이교문화와 기독교가 마지막 화해를 위해 애를 썼던 시대를 자신의 인격 안에서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의 소년 시절에 여전히 배교자 율리안의 투쟁 구호가 울려 퍼지고 있었는데, 율리안은 가장 극한 폭력으로써 그리스도의 영향력에서 로마 제국을 빼돌려 이교 제신(諸神)에게 다시 바치기를 원하였던 사람이다.
생애의 절정에서 어거스틴은 중차대한 사건들의 증인이 되었는데, 곧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카톨릭 국가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와 로마 제국, 감독과 황제를 서로 동거동락 하게 하였던 사건들의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노령에 접어들었을 때에, 동 로마와 서 로마의 분리를, 즉 어떤 의미로 서방의 탄생 시간을, 그러나 또한 동시에 게르만 정신의 탄생 시간을 체험하였다.
이미 알라리히가 로마를 침공하였고, 게르만 지파들은 서 로마 제국을 쳐서 그 잔재로 자신의 제국들을 건설할 참이었다. 열병으로 침대에 누워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서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육안으로, 게르만계 반달족이 그의 감독 도시(히포)를 포위하였을 때에, 새로운 사람들을, 즉 한 새로운 미래를 담당할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그의 외적인 운명에 따라 볼 때에도, 과도기의 인물이었다. 그는 한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서서, 이교 문화가 기독교에 의하여, 로마 문화가 게르만 문화에 의하여 극복되었던 시대와, 형성 중인 서양의 최초의 윤곽들이 역사의 하늘에서 어슴푸레 그려지기 시작했던 시대를 직시하였던 것이다. 어거스틴이 살았던 외적인 시대 상황의 독특한 특성 이외에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 성자 자신의 인격이다.
이미 생전에도 상당히 읽혀졌던 「고백록」에서 그는 거기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러한 한 영혼의 역사를 보기 드문 필체로 그리고 있는데, 이 필체는 아주 복잡다단하고 깊이 숨어 있는 영혼의 과정들을 그 본원적인 신선함과 향내를 풍기는 가운데 잘 드러내고 있다. 비록 그가 부차적으로 그 시대의 정신에, 곧 고대 말기의 정신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 할지라도, 무엇보다도 심리학적 심리 관찰과 심층 관찰에 대한 관심을 통하여 현대적인 어느 현대인과도 같이, 그는 본질적으로 그의 정신 세계에 힙 입고 있다. 단순한 세상 감정으로 대담할 정도로 자기 자신의 내면 세계를 그냥 뛰어 넘어섬으로써 자신을 등한시하고 외부 세계에 전념하던 고대 사람의 입장과는 현격하게 달리 그의 사유에 있어서 내적인 사람, 곧 인간 영혼은 가장 본래적이며 가장 가까운 의미 있는 성찰 대상과 인식 대상이었다. 그렇게 볼 때에 어거스틴은 의식적인 경험주의자였다.
전대미문의 섬세함과 정확성을 가지고, 진정 "생리학적 심리학"을 가지고서 그는 자기 성찰과 타인 성찰의 노정에서 인간 영혼의 삶에 대한 표현들과 기능들과 법칙들을 서술하였다. 여전히 오늘도 어린아이의 영혼의 삶과 그의 놀이와 눈물과 거짓말에 대한 그의 진단들과, 연민과 비극적인 것에 대한 심리 묘사와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한 심리 묘사 등은, 이에 대해 말하여 질 수 있는 것 중에서도 최상에 속한다.
아마도 그는 일말의 의식의 사실들의 토대로부터야 비로소 실재성의 굳건한 대지로 들어갔다 할 수 있다. 그리고 비로소 인간 영혼 안에서 발견된, 논리적이며 윤리적이며 미학적인 제 공리(公理)의 기존 사실로부터, 이 실체적인 선험(先驗)으로부터야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실재성에 이르는 어떤 확실한 길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거듭 그에게 있어서는 심리학적인 성찰이 형이상학적 대상들의 사전 단계요 근거였다. 참으로 그는 심리학적으로 훈련된 눈을 가지고서 심지어 신적인 삶의 심층을, 하나님의 삼위 일체적 존재를 들여다보고 인간 영혼의 삶을 비유로 삼아 삼위일체의 내부 삶을 선명하게 그려보고자 과감하게 시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적-심리학적인 정신 자세가 그의 탐구 자세에 부여하였던 것은, 우리가 특히 어거스틴 적이라고 느끼는 그러한 실재성에 가까움과 그러한 뜨거운 구체성과 선명함과 동시에 또한 생동감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 정신 자세는 허무맹랑한 것에서 그의 사유를 지켜주고, 그가 제 아무리 높이 정신의 날개를 펼쳤다 하여도, 모든 인간적인 인식의, 그러나 또한 모든 신학적인 인식의 불완전함과 제약성에 대하여 그를 무지한 상태로 두지 않았다.
바로 그가 '박식한 무지'(docta ignorantia)란 말을 사용했다고 하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누구와도 달리 어거스틴은 위대한 신학자 중에서도 심리학자였다.
또한 그의 천재적인 통찰력, 즉 미리 예감하는 동시에 미리 느끼고 포착하면서 궁극적인 가능성들과 맥락들을 감촉하는 능력은 그의 심리학적인 재능에 뿌리를 두고 있기도 하다. 그가 새로운 고랑을 파지 않았거나 적어도, 그 해결을 위하여 수 백년 간이나 애써 왔고 또 애쓰고 있는 그러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싶은 신학 분야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가 이미 얻은 결과들의 순수 논리적인 추론과 괄호 묶음을 무시하였고, 그의 사상들의 보다 말끔한 조직적인 구축과 확장 등을 무시하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창조적이며 언제나 새롭게 시작되고 새롭게 태어나는, 그의 심리학적 내부 고찰과 심층 고찰의 풍성함과 관계되었다 할 수 있다. 그의 철학적인 통찰들과 신학적인 통찰들은 상당히도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는 그것들을 고도의 통일성으로 총괄하여서 그들에게 그의 체계의 전체 안에서 그들의 특별한 장소를 배당하고자 하지도 않았거니와 적어도 그렇게 하기에도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적지 아니한 그의 논제들에 대하여 오늘날 여전히 그 학술적인 연구가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과, 어느 정도의 권리를 가지고 어거스틴의 명제들에 의존하지 아니하는 그러한 기독교 공동체가 하나도 없다고 하는 사실도 바로 이러한 점에서 설명해 볼 수 있다.
어거스틴은 한 생동력 있는 사람으로서, 즉 먼저 자신의 질문들을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끄집어내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에게 문제들을 제시하는 그러한 외적인 대상을 결코 그 단순한 문제 자체에서 보려고 하지 않고, 언제나 자기 자신과 관계시키는 가운데 그것을 보려는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연구하였다.
그런 한에 있어서 그의 신학은 체험의 신학이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거룩한 것과 신성한 것이 단지 체험의 과정으로서 혹은 의식의 사실로서 존재하기나 하는 것 같은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도리어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 자신에게 있어서 진리인 동시에 학문이 아닌 진리 자체나 학문 자체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학문은 그 자신과의 관계성을 통하여 비로소 참으로 살아 있고 풍성하게 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그러했다.
여기서 어거스틴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얼마나 다른 길을 걷고 있는지 알 수가 있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주체, 곧 신학자는 대상(객체), 곧 계시의 말씀의 고상한 실재성 앞에서 전적으로 뒷전에 물러나 있다. 신학을 한다는 것은 여기서 침묵의 경외심으로 하나님의 말씀, 이것만 듣고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주체성을 벗어나서, 모든 개인적이며 문화사적이며 시대사적인 정조들과 숙고들에서 온전히 벗어난 가운데 진리 자체, 곧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그 순수성과 풍성함 가운데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성 토마스의 작업 방식을 수놓는 이 유일한 파토스는 순수 사실성의 파토스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결한 봉사의 파토스이다. 이렇게 모든 주체성에서 벗어나는 일로부터 모든 시간에서 벗어나는 일이, 곧 전적으로 타당한 것, 초시간적인 것, 영원한 것이 흘러나오나, 다른 한편으로 또한 토마스주의 적인 교리방식의 냉랭한 것, 뻣뻣한 것, 비인격적인 것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어거스틴의 신학은 그의 인격과 그의 시대와는 뗄래야 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신학은 적지 않게 시대 조건적이요, 상대적인 것을 그 자체에 지니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바로 그 때문에 일깨워주고 불을 일으키고 있다 할 수 있으며 오늘날까지 이 불을 일으키는 힘에 있어서 잃은 것이 하나도 없다 할 수 있다. 이로써 어거스틴이 이미 그의 심리학적인 입장으로 볼 때에 현대인들에게 가까이 있다면, 즉 어느 위대한 스콜라 신학자들보다도 더 가까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그 자신이 그러했던 바 그러한 사실을 통하여, 즉 그가 그 자신의 삶을 살았던 그러한 특별 방식을 통하여, 그의 생애의 특유한 리듬을 통하여, 그의 특별한 삶의 스타일을 통하여 그러하다는 말이다.
어거스틴은 삶의 여러 수수께끼에 눈이 뜨이기 시작하였을 때, 카톨릭 교회의 삶 공동체와 사랑의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다. 그의 경건한 어머니 모니카는 아마도 그가 어려서부터 그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마음에 심어주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세례를 받지도 아니했거니와 철저한 교회 교육도 받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고독한 자로 성장했던 것이다. 처음에 그의 이교도 아버지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제어하기 어려운 삶의 쾌락과 무제한적인 명예욕과 생동감 있게 번득이는 정신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 즉 한 부드러운 유연한 심성과 섬세한 영적 감각과 순전한 내적 경건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그 안에서 꿈틀거렸다는 사실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게 그는 열정적인 감각성의 온 정열을 다하여 이 세상의 즐거움에, 곧 외적 명예와 인정을 받고자 하는 일에, 무엇보다도 사랑의 자극에 탐닉하게 되었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것 말고 내 마음을 즐겁게 하였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한 이교도였다.
"내가 비어 있으면 있을수록..., 내 영혼은 건강하지 못했고, 종기 투성이가 되어서 바깥 세상으로 내던져졌습니다."
물론 또한 이교도로서 그는 어머니를 부인할 수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얌전하였다." 그는 "영혼이 없는 것을 사랑할 수 없었다." 이 뜨거운 정열적인 시절에 어머니의 유산은, 그가 친구들을 찾고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러한 여성적인 부드러움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와 같이 동일한 생각을 가진 자들과의 영적인 연대성을 가지려는 그의 욕구는 전 생애에 걸쳐서 드러나며 후에, 그의 사랑의 신학과 공동체 신학이 그 위에서 성장하였던 바 그러한 자연적인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키케로(Cicero)가 지혜 추구에 대하여 논하였던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란 작품을 읽게 되었을 때에, 어머니의 기도와 눈물 덕택으로 말미암아서 어머니의 유산은 계속하여 제법 풍성하게 전개될 수 있었다.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서" 그는 지혜의 불멸성을 추구하고자 열망하였다. 그 책은 "이 학파나 저 학파가 아니라, 진리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 진리 자체를 사랑하고, 탐구하고, 얻고, 붙잡고, 강하게 포옹하도록"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오, 진리, 진리시여, 그때에도 내 영혼의 골수가 얼마나 내적으로 주님을 찾아 숨을 헐떡거렸는지요!"
여기서 이미 가장 내면적인 어거스틴이, 곧 열정적인 진리의 추구자, 자기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얻고자 애쓰는 사람, 하나님을 얻고자 싸움을 벌이는 사람으로서 나타난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진리는 그 어떤 전문적 학문의 주도 명제와 교조가 아니라, 또한 그 어떤 한 조각의 실재성을 단순히 탐색하고 목록으로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실재성의 가장 깊은 근원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원(原) 근원들과 배후 근원들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다시금, 한 이론적인 지식 취득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실제적인 입장 천명을 목적으로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추구하였던 진리는 그에게 있어서 삶이었다. 'veritas'(진리)와 'beata vita'(행복한 삶)는 그에게 있어서 동일한 것이었다. 그의 질문과 사유는 그의 삶의 의지의 깊이로부터 태어난 것이었는데, 이것을 실존적인 질문이자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영혼을 불태웠던 진리에 관한 질문은 무엇이었나? 그의 전반적인 하기의 발전을 그릇된 빛 가운데 보지 않기 위하여, 이미 여기서 동시에 확정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 질문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나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 자신이 거듭 설명하듯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처음부터 그 안에서 살아 있었다. 이것을 그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거스틴은 처음부터 그 어떤 단순한 의미로 볼 때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것도 그의 어머니에게서 받았다. 예를 들면 그렇게 열정적으로 소화한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란 책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그에게 있어서 꽤 언짢은 실망이었던 것이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본질의 맛"으로써 여러 차례에 걸쳐 그는 그에게 다가온 세계관 체계들을 검증하였다. 그가 마니교에 빠졌을 때에, 그에게 있어서 "미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다. 그래서 그가 그들과 결별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그들의 가르침에 "그리스도의 본질의 맛"이 없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다.
철학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를 묶어 둘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어거스틴이 인식적으로가 아니라, 감성적으로 그 자신이 생각하고자 했던 것 이상으로 그 당시에 벌써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 그의 진리 추구는 무엇과 관계되었는가? 그것은 그의 하나님 개념이 소화해 낼 수 없을 정도로 짐을 가중시켰던 그러한 일종의 난점들과 반 명제들을 해명하는 일과 관계되었다. 그의 그 당시, 대중적인 스토아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물질주의적인 사유 방식에 있어서는, 그 어떤 방식으로든 질료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떠한 실재성도 있지 못했거니와 또 있을 수도 없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 문제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나온 모든 존재의 질료성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 아마도 하나님이, 신이 아닌 모든 것을 자체에 빨아들이는 그러한 끔찍하게도 생긴 해면과도 같이, 무한히 질료적인 연장으로 존재하는가? 하여튼 그에게 있어서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사람의 형태로 생각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무엇보다도 카톨릭 교회에 진노를 발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카톨릭 교회가 그러한 단순한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하나님 개념을 대변하는 까닭에 그러한 하나님 사상이 들어 있는 구약을 굳게 고수하고 있다고 하는 선입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그와 같이 그를 괴롭히는 질문은 무엇보다도 사유를 약속해 주는 어지간한 하나님 개념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런즉 이 질문은 반(反) 카톨릭 적으로 첨예화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참된 하나님 개념을 추구함으로써 다른 문제가 제기되었다. 악과 질병과 죄와 죽음이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와 관계될 수 있는가? 그의 물질주의적 전제에 따르면 그에게 있어서 또한 악은 다소 질료적인 것, 곧 질료적 실체였다.
이 악의 실체는 어디서 오는가?
선하신 하나님께서 악의 실체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인가?
아니면 그것은 도리어 악한 마귀의 권세 물은 아닌가?
이 질문 또한 반 카톨릭적 르상티망의 결과였다. 왜냐하면 바로 카톨릭 교회가 그 권위를 지극히 강조함으로써 도덕적으로 악한 것, 곧 죄를 인간의 자유 의지로 돌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톨릭 교회는 또한 심리적으로 악한 것, 즉 질병과 죽음을 적어도 간접적으로나마 자유 의지의 오용으로, 곧 아담의 원죄로 돌렸던 것이다. 그렇게 어거스틴의 감각적이며 열정적인 정신이 그 당시에 느꼈듯이, 이러한 그에 대한 교회의 응답은 어거스틴 안에 필경 심각한 대립을 일으켰다.
그것이 다소 질료적인 것, 한 실체였다면, 어떻게 사람이 그의 피조물적인 무력함 가운데 스스로 악을 일으킬 수 있었는가? 교회에 대한 그의 반대가 감성적으로 아마도 더욱 자극되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교회가 악하다 불렀던 바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거니와 또 포기하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카톨릭 교회에 대한 그의 반대 감정은 또한 바로 이 문제로부터 항시 새로운 양식을 공급받았던 것이다. 교회가 그러한 문제와 비슷한 난점들에 대하여 적절한 토대를 제공하지 못하고, 언제나 단지 신적인 권위의 비중만을 제공하였다는 사실이 그의 영혼을 진절머리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카톨릭 교회의 권위에 대한 자랑이 자유스런 탐구의 억압, 참으로 진리애의 억압을 의미하지 않았는가? 그와 같이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진리의 문제는, 요컨대 그가 교회가 제시하는 길과는 다른 길을 추구하고 찾아야 했다고 하는 의미로 설명이 될 수 있다.
그는 교회 없이 그리고 교회에 반대하여 탐구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어거스틴이 교회에 대한 이러한 반대 입장을 취한다는 사실, 그가 그의 이해들을 끊임없이 교회의 가르침과 비교하고 교회를 비난하고자 극구 애쓰고 있다고 하는 사실은 이 심리학자에게서 교회의 권위가 그렇게 그 당시에 벌써 그의 무의식 안에, 그가 이것을 분명히 의식하였을 때 보다 더 깊이 뿌리를 내렸다고 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교회가 요구하는 권세로서 그 당시에 이미 그의 영혼에 있어서 그로 하여금 궁극적인 진리 탐구를 카톨릭 진리와의 논쟁으로 이해하도록 하였던 까닭에 내적으로 교회에 반대해야 했기 때문에, 교회에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 어린 아이 안에 있던 어머니는 침묵하지 않았다. 여전히 이 어린아이는 어머니에게 대들었다. 19세의 어거스틴은 마니교도에게 갔다. 여기서 그는 그가 추구하였던 것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성장해 나온 다른 영지주의와 비슷하게도, 거기에 단순한 하나님 개념만 들어 있다 하여서 구약을 거절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론과 그리스도론을 그럴듯한 학술적이며 천문학적인 논증들로 강화시켰다.
그들은 언제나 "진리, 진리"에 관하여 말하였으며 자유스러운 탐구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모든 믿음을 맹신이라고 정죄하였다. 나아가 그들은 죄와 악을 자기 의지의 무행위라 설명하지 않고 빛의 하나님과의 투쟁을 벌이는 한 악한 원리의 발현이라고 설명하였다. 그와 같이 그의 비판적 사유의 모든 요구들이 채워진 것처럼 보였으며, 가장 중요한 것, 즉 살 권리와 온전한 감각적 즐거움을 누릴 권리가 확보된 것 같았다.
어거스틴은 9년간 이 정열적인 동방의 이원론에 헌신하였으므로, 어머니에 대한 저항과 교회로부터의 이탈이라고 하는 극점에 도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혼의 가장 심오한 그리움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의 진리애는 너무도 정직한 것이었으므로 마니교도들의 천문학적인 지혜와 그들의 "잘 차려입은 사환" 파우스투스에게 속아넘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그들의 가르침에는 그리스도의 본질의 맛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회의주의 철학에 대한 상세한 연구를 통하여 이 결과에 이르렀는데, 그것들은 그에게서 마니교의 전 교리 체계를 뒤흔들어 놓고 말았던 것이다. 심한 좌절로 말미암은 이 분위기 안에서 그는 384년에 법정 웅변 교사로 밀라노로 부름을 받았다.
여기서 처음에 그로 하여금 전적으로 의심과 절망을 품게 하였으나, 심층적으로 그의 회심의 위기를 불러 일으켜 준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섬세한 마음의 소유자요 처세적이며 경건한 감독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들이었다. 이제 그는 카톨릭 신자들의 하나님 개념과 믿음 개념에 대한 자신의 거절적인 판단들이 그릇된 편견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에게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밀라노에서 겪은 체험들의 영향을 받는 가운데 "우리 주님이시오 구세주이신 분에 대한 카톨릭 교회의 믿음이 깊이 내려앉았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의 영혼은 그것을 "매일 더 많이" 마셨다. 그러므로 카톨릭 교회의 그리스도 상(像)이 밀라노에서 그를 매혹시켰던 것이다. 여기서 그의 영혼을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계몽에 열어 주었고 카톨릭 교회의 권위에 대한 주장을 매력 있게 만들었던 것은 다시금 어머니의 오래된 유산, 곧 모니카에게서 전수된 그리스도에 관한 청소년기의 영향들이었다. 이미 그는 이런 계획을 품게 되었다: "내 부모님이 세워주신 그 곳에 내 발을 굳게 디뎌야지." 그러나 처음부터 그를 괴롭히고 교회와 갈등을 일으켰던 두 주요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참된 하나님 개념에 대한 문제와 악의 기원에 대한 문제였다.
우리가 보았듯이, 그것들은 그의 물질주의적인 전제에, 곧 모든 존재자가 필경 물체적이라는, 즉 하나님과 악이 어떠한 물질적인 실체들로서 이해될 수 있다고 하는 전제에 뿌리를 두었다. 그는 물질(질료)로 곤란을 겪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곤란을 겪었던 것이다. 기독교를 물질주의적으로 해석하려는 그러한 부질없는 시도는 그를 단순히 감내하기 어려운 투쟁으로 내몰았다.
그는 전적으로 찢겨지고 말할 수 없는 비애를 겪는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어거스틴은 파우스트와 같은 인물이었다. 사람들이 괴테의 파우스트와 어거스틴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몇 가지 특징들을 언급한 것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이 양자에게서 진리와 영혼의 지복을 얻기 위한 동일한 열정적인 고투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양자에게서 천문학과 악령에 빠진 일, 여인 사랑과 이 세상을 섬기는 일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 양자에게서 진리에 대한 좌절과 죽음에 대한 그리움이 나온다.
그리고 동시에 발전의 마지막을 미리 이야기 해 보자면, 양자에게서 "지복으로 전개되는 사랑의 계시"를 통한 동일한 구원의 노정이 나온다. 그의 분열되고 짓눌려진 영혼의 염려로부터, 그의 물질주의적 사유의 곤궁에서부터 그를 구해준 것은 두 번째 위대한 체험이라 할 수 있는 신(新)플라톤주의 서적들을 읽은 일이었다. 고대의 철학적 체계에서 정신적인 것이 플라톤과 그 후손들의 체계에서만큼 그처럼 그 본래 존재와 본래 법칙에 있어서 풍성하게 인식되고 알려진 것은 없었다.
어거스틴이 신플라톤주의 서적 - 무엇보다도 플로틴의 「엔네아데」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 에 점점 더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순수 영적인 것의 본질과 실재성이, 곧 변화하지 않고 보편타당하며 필연적인, 그러기에 사라지고 가시적인 사물들보다 더 심오하고 더 참된 존재를 소지하는 그러한 한 영적 개념 세계의 실존이 더욱 더 그에게 반짝였던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의심을 물리쳤던 해방하는 인식, 곧 비물체적인 한 존재, 질료적 존재보다 더욱 뛰어난 한 존재, 한 순수 영적인 존재가 있다고 하는 인식이었다. 이로써 물질주의적 사유가 관념론적 사유로써 극복된 것이다. 어거스틴에게서 그 결과들은 스스로 일어났다. 불변하는 개념 세계의 원 근거인 하나님은 순수 영이라는 것이다. 인간 영혼도 이 불변하는 개념들의 유기체와 담지자로서 순수 영적이라는 것이다. 그와 같이 어거스틴의 사유에 있어서, 질료적 실재성과 충돌하는 일없이, 흡사 하나님과 영혼이 그 영원한 실재성을 가지는 장소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차후로 그는 공간과 연장의 문제로 놀라는 일없이, 하나님과 영혼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로써 또한 동시에 다른 문제, 곧 악이 어디서 오는가 하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나님은 원 진리와 원 실재성으로서 존재의 충만함, 곧 불변자, 참 존재이기 때문에, 비신적(非神的)인 것, 반신적(反神的)인 것, 곧 죄와 악은 어떠한 질료적인 것도, 요컨대 어떠한 존재자도 아니라, 본질적으로 존재의 결여, 존재로부터의 타락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어거스틴은 모든 어려운 문제에서 해방되었다. 그의 물질주의적인 사유가 없어진 동시에 물질주의적 하나님 개념과 그 이원론적 우주론이 사라졌다. 이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새로운 입장이 그에게 필요하게 되었다. 존재의 비밀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 안에 있다는 것이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네 자신에게로 돌아가라! 진리는 속 사람 안에 거한다."
진리는 하나님이 영혼과 접촉하시는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이 양극, 즉 하나님과 영혼 사이에 이제부터 이 성자의 사유가 움직이게 된다.
"나는 하나님과 영혼을 알기를 갈망합니다. 다른 아무 것도 없는가? 다른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자기 자신에게로, 마음의 고요함으로, 위대한 침묵으로 돌아간다. 어거스틴은 신비주의자가 된다. 어거스틴에게서 차후에 물질주의적 사유로부터 해방됨과 더불어 곧 카톨릭 기독교가 참된 기독교로 입증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특징적인 일이다. 확실히 그 자체로 볼 때에 관념론으로 나아감으로써 카톨릭 교회로 나아가는 일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그러했을 것이다. 이로써 새로이 카톨릭 교회와 그 권위가 이미 처음부터 그의 무의식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살아 있었다고 하는 우리의 추측이 확증되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가 질풍노도 시대에 교회에 제시하였던 그러한 모든 비난들이 그대로 사라졌던 순간에 교회는 유일한 참된 교회로 그의 정신 앞에 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무거운 짐을 떨구듯이, 옛 편견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신플라톤주의적 영 개념과 더불어 또한 유일한 카톨릭 교회와 유일한 카톨릭 진리가 문제없이 입증되었다는 사실이 확실하다 할지라도, 다른 한편으로 확실히 그가 이 카톨릭 진리를 그 당시에 아직도 신플라톤주의의 눈으로 보았다고 하는 사실이다. 아마도 카톨릭 교회에 대한 그의 고백은 모든 교의와 제도들에 대한 분명한 긍정을 포함하였다. 어거스틴은 심정적으로 그 당시에 이미 온전한 카톨릭 교인이었으며, 그는 끝까지 이것으로 머물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카톨릭주의를 그 당시에 아직도 신플라톤주의의 조명으로 보았던 것이다. 달리 얘기하면, 그는 기독교를 그 당시에 아직도 본질적으로 신플라톤주의와 동일시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양 종교 체계들의 공통점만을 인지하였고 그 차이점과 반대되는 점을 인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공통점을 무엇보다도 하나님 개념에서 인식하였다.
◆ 바울 이후 신학을 가장 잘 집대성한 어거스틴........
제 4세기가 낳은 대 성자 어거스틴은 고대 로마 교회가 낳은 4대 박사, 곧 히에로니무스, 암부르시우스, 어거스틴, 그레고리우 스 1세 가운데서 중에 제 1인자로 꼽히는 최대 인물이었다. 마니교를 위시해서 펠라기우스 같은 이단사설(異端斯說)을 물리 치는데 4천 권이 넘는 저서를 내면서 신학과 신앙을 확립한 거대한 인물이었다.
이 위대한 인물이 그 어머니 모니카가 눈물도 드린 기도의 산물이었다고 하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Saint Augustine(354-430)는 누미디아(북아프리카) 타가스테(지금의 수크아라스로 당시 로마의 속지) 출생.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의 하급관리였고 어머니 모니카는 열성적이고 경건한 그리스도교도였다. 카르타고 등지로 유학하고 수사학(修辭學) 등을 공부하여, 당시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로마제국 말기 청년시절을 보내며 한때 타락생활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19세 때 M.T.키케로의 《철학의 권유:Hortensius》를 읽고 지적 탐구에 강렬한 관심이 쏠려 마침내 선악이원론(善惡二元論)과, 체계화하기 시작한 우주론(宇宙論)을 주장하는 마니교로 기울어졌다.
그 후 그는 회의기를 보내며 신(新)플라톤주의에서 그리스도교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편력을 하였다.
그의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384년에 만난 밀라노의 주교(主敎) 암브로시우스였다. 그는 개종에 앞서 친한 사람들과 밀라노 교외에서 수개월을 보내면서 토론을 벌였는데, 그 내용들이 초기의 저작으로 편찬되었다. 388년 고향으로 돌아가서 수도생활을 시작하려 하였으나 사제(司祭)의 직책을 맡게 되었고, 395년에는 히포의 주교가 되어 그곳에서 바쁜 직무를 수행하는 한편, 많은 저작을 발표하였다.
《고백록》도 그 중의 하나이지만, 대작으로서는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 《신국론(神國論)》 등이 널리 알려졌다. 그의 사상은 단순한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참된 행복을 찾고자 하는 활기있는 탐구를 위한 것으로서, 그가 살아온 생애에서 그것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 그 체험을 통하여 찾아낸 결론은 《고백록》의 유명한 구절 "주여, 당신께서는 나를 당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드셨나이다. 내 영혼은 당신 품에서 휴식을 취할 때까지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인간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함은 물론, 하나님이 잠재해 계시다는 우리의 영혼도 알아야만 한다. 그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철학의 대상으로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하나님과 영혼이었다.
◆ 성 어거스틴의 영적인 발전...
인문 과학의 영역에서 어거스틴은, 오늘날 우리가 학문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는 그러한 소수의 인물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먼저 이 사실은 그의 변화무쌍한 인생이 서양 역사의 중차대한, 참으로 결정적인 전환점을 이루었다고 하는 점에 있다. 한 이교도 아버지와 한 기독교 신자 어머니의 아들로서 그는 저 열광적인 흥분의 시대, 곧 이교문화와 기독교가 마지막 화해를 위해 애를 썼던 시대를 자신의 인격 안에서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의 소년 시절에 여전히 배교자 율리안의 투쟁 구호가 울려 퍼지고 있었는데, 율리안은 가장 극한 폭력으로써 그리스도의 영향력에서 로마 제국을 빼돌려 이교 제신(諸神)에게 다시 바치기를 원하였던 사람이다.
생애의 절정에서 어거스틴은 중차대한 사건들의 증인이 되었는데, 곧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카톨릭 국가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와 로마 제국, 감독과 황제를 서로 동거동락 하게 하였던 사건들의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노령에 접어들었을 때에, 동 로마와 서 로마의 분리를, 즉 어떤 의미로 서방의 탄생 시간을, 그러나 또한 동시에 게르만 정신의 탄생 시간을 체험하였다.
이미 알라리히가 로마를 침공하였고, 게르만 지파들은 서 로마 제국을 쳐서 그 잔재로 자신의 제국들을 건설할 참이었다. 열병으로 침대에 누워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서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육안으로, 게르만계 반달족이 그의 감독 도시(히포)를 포위하였을 때에, 새로운 사람들을, 즉 한 새로운 미래를 담당할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그의 외적인 운명에 따라 볼 때에도, 과도기의 인물이었다. 그는 한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서서, 이교 문화가 기독교에 의하여, 로마 문화가 게르만 문화에 의하여 극복되었던 시대와, 형성 중인 서양의 최초의 윤곽들이 역사의 하늘에서 어슴푸레 그려지기 시작했던 시대를 직시하였던 것이다. 어거스틴이 살았던 외적인 시대 상황의 독특한 특성 이외에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 성자 자신의 인격이다.
이미 생전에도 상당히 읽혀졌던 「고백록」에서 그는 거기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러한 한 영혼의 역사를 보기 드문 필체로 그리고 있는데, 이 필체는 아주 복잡다단하고 깊이 숨어 있는 영혼의 과정들을 그 본원적인 신선함과 향내를 풍기는 가운데 잘 드러내고 있다. 비록 그가 부차적으로 그 시대의 정신에, 곧 고대 말기의 정신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 할지라도, 무엇보다도 심리학적 심리 관찰과 심층 관찰에 대한 관심을 통하여 현대적인 어느 현대인과도 같이, 그는 본질적으로 그의 정신 세계에 힙 입고 있다. 단순한 세상 감정으로 대담할 정도로 자기 자신의 내면 세계를 그냥 뛰어 넘어섬으로써 자신을 등한시하고 외부 세계에 전념하던 고대 사람의 입장과는 현격하게 달리 그의 사유에 있어서 내적인 사람, 곧 인간 영혼은 가장 본래적이며 가장 가까운 의미 있는 성찰 대상과 인식 대상이었다. 그렇게 볼 때에 어거스틴은 의식적인 경험주의자였다.
전대미문의 섬세함과 정확성을 가지고, 진정 "생리학적 심리학"을 가지고서 그는 자기 성찰과 타인 성찰의 노정에서 인간 영혼의 삶에 대한 표현들과 기능들과 법칙들을 서술하였다. 여전히 오늘도 어린아이의 영혼의 삶과 그의 놀이와 눈물과 거짓말에 대한 그의 진단들과, 연민과 비극적인 것에 대한 심리 묘사와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한 심리 묘사 등은, 이에 대해 말하여 질 수 있는 것 중에서도 최상에 속한다.
아마도 그는 일말의 의식의 사실들의 토대로부터야 비로소 실재성의 굳건한 대지로 들어갔다 할 수 있다. 그리고 비로소 인간 영혼 안에서 발견된, 논리적이며 윤리적이며 미학적인 제 공리(公理)의 기존 사실로부터, 이 실체적인 선험(先驗)으로부터야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실재성에 이르는 어떤 확실한 길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거듭 그에게 있어서는 심리학적인 성찰이 형이상학적 대상들의 사전 단계요 근거였다. 참으로 그는 심리학적으로 훈련된 눈을 가지고서 심지어 신적인 삶의 심층을, 하나님의 삼위 일체적 존재를 들여다보고 인간 영혼의 삶을 비유로 삼아 삼위일체의 내부 삶을 선명하게 그려보고자 과감하게 시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적-심리학적인 정신 자세가 그의 탐구 자세에 부여하였던 것은, 우리가 특히 어거스틴 적이라고 느끼는 그러한 실재성에 가까움과 그러한 뜨거운 구체성과 선명함과 동시에 또한 생동감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 정신 자세는 허무맹랑한 것에서 그의 사유를 지켜주고, 그가 제 아무리 높이 정신의 날개를 펼쳤다 하여도, 모든 인간적인 인식의, 그러나 또한 모든 신학적인 인식의 불완전함과 제약성에 대하여 그를 무지한 상태로 두지 않았다.
바로 그가 '박식한 무지'(docta ignorantia)란 말을 사용했다고 하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누구와도 달리 어거스틴은 위대한 신학자 중에서도 심리학자였다.
또한 그의 천재적인 통찰력, 즉 미리 예감하는 동시에 미리 느끼고 포착하면서 궁극적인 가능성들과 맥락들을 감촉하는 능력은 그의 심리학적인 재능에 뿌리를 두고 있기도 하다. 그가 새로운 고랑을 파지 않았거나 적어도, 그 해결을 위하여 수 백년 간이나 애써 왔고 또 애쓰고 있는 그러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싶은 신학 분야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가 이미 얻은 결과들의 순수 논리적인 추론과 괄호 묶음을 무시하였고, 그의 사상들의 보다 말끔한 조직적인 구축과 확장 등을 무시하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창조적이며 언제나 새롭게 시작되고 새롭게 태어나는, 그의 심리학적 내부 고찰과 심층 고찰의 풍성함과 관계되었다 할 수 있다. 그의 철학적인 통찰들과 신학적인 통찰들은 상당히도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는 그것들을 고도의 통일성으로 총괄하여서 그들에게 그의 체계의 전체 안에서 그들의 특별한 장소를 배당하고자 하지도 않았거니와 적어도 그렇게 하기에도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적지 아니한 그의 논제들에 대하여 오늘날 여전히 그 학술적인 연구가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과, 어느 정도의 권리를 가지고 어거스틴의 명제들에 의존하지 아니하는 그러한 기독교 공동체가 하나도 없다고 하는 사실도 바로 이러한 점에서 설명해 볼 수 있다.
어거스틴은 한 생동력 있는 사람으로서, 즉 먼저 자신의 질문들을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끄집어내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에게 문제들을 제시하는 그러한 외적인 대상을 결코 그 단순한 문제 자체에서 보려고 하지 않고, 언제나 자기 자신과 관계시키는 가운데 그것을 보려는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연구하였다.
그런 한에 있어서 그의 신학은 체험의 신학이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거룩한 것과 신성한 것이 단지 체험의 과정으로서 혹은 의식의 사실로서 존재하기나 하는 것 같은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도리어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 자신에게 있어서 진리인 동시에 학문이 아닌 진리 자체나 학문 자체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학문은 그 자신과의 관계성을 통하여 비로소 참으로 살아 있고 풍성하게 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그러했다.
여기서 어거스틴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얼마나 다른 길을 걷고 있는지 알 수가 있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주체, 곧 신학자는 대상(객체), 곧 계시의 말씀의 고상한 실재성 앞에서 전적으로 뒷전에 물러나 있다. 신학을 한다는 것은 여기서 침묵의 경외심으로 하나님의 말씀, 이것만 듣고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주체성을 벗어나서, 모든 개인적이며 문화사적이며 시대사적인 정조들과 숙고들에서 온전히 벗어난 가운데 진리 자체, 곧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그 순수성과 풍성함 가운데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성 토마스의 작업 방식을 수놓는 이 유일한 파토스는 순수 사실성의 파토스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결한 봉사의 파토스이다. 이렇게 모든 주체성에서 벗어나는 일로부터 모든 시간에서 벗어나는 일이, 곧 전적으로 타당한 것, 초시간적인 것, 영원한 것이 흘러나오나, 다른 한편으로 또한 토마스주의 적인 교리방식의 냉랭한 것, 뻣뻣한 것, 비인격적인 것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어거스틴의 신학은 그의 인격과 그의 시대와는 뗄래야 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신학은 적지 않게 시대 조건적이요, 상대적인 것을 그 자체에 지니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바로 그 때문에 일깨워주고 불을 일으키고 있다 할 수 있으며 오늘날까지 이 불을 일으키는 힘에 있어서 잃은 것이 하나도 없다 할 수 있다. 이로써 어거스틴이 이미 그의 심리학적인 입장으로 볼 때에 현대인들에게 가까이 있다면, 즉 어느 위대한 스콜라 신학자들보다도 더 가까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그 자신이 그러했던 바 그러한 사실을 통하여, 즉 그가 그 자신의 삶을 살았던 그러한 특별 방식을 통하여, 그의 생애의 특유한 리듬을 통하여, 그의 특별한 삶의 스타일을 통하여 그러하다는 말이다.
어거스틴은 삶의 여러 수수께끼에 눈이 뜨이기 시작하였을 때, 카톨릭 교회의 삶 공동체와 사랑의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다. 그의 경건한 어머니 모니카는 아마도 그가 어려서부터 그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마음에 심어주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세례를 받지도 아니했거니와 철저한 교회 교육도 받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고독한 자로 성장했던 것이다. 처음에 그의 이교도 아버지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제어하기 어려운 삶의 쾌락과 무제한적인 명예욕과 생동감 있게 번득이는 정신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 즉 한 부드러운 유연한 심성과 섬세한 영적 감각과 순전한 내적 경건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그 안에서 꿈틀거렸다는 사실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게 그는 열정적인 감각성의 온 정열을 다하여 이 세상의 즐거움에, 곧 외적 명예와 인정을 받고자 하는 일에, 무엇보다도 사랑의 자극에 탐닉하게 되었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것 말고 내 마음을 즐겁게 하였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한 이교도였다.
"내가 비어 있으면 있을수록..., 내 영혼은 건강하지 못했고, 종기 투성이가 되어서 바깥 세상으로 내던져졌습니다."
물론 또한 이교도로서 그는 어머니를 부인할 수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얌전하였다." 그는 "영혼이 없는 것을 사랑할 수 없었다." 이 뜨거운 정열적인 시절에 어머니의 유산은, 그가 친구들을 찾고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러한 여성적인 부드러움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와 같이 동일한 생각을 가진 자들과의 영적인 연대성을 가지려는 그의 욕구는 전 생애에 걸쳐서 드러나며 후에, 그의 사랑의 신학과 공동체 신학이 그 위에서 성장하였던 바 그러한 자연적인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키케로(Cicero)가 지혜 추구에 대하여 논하였던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란 작품을 읽게 되었을 때에, 어머니의 기도와 눈물 덕택으로 말미암아서 어머니의 유산은 계속하여 제법 풍성하게 전개될 수 있었다.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서" 그는 지혜의 불멸성을 추구하고자 열망하였다. 그 책은 "이 학파나 저 학파가 아니라, 진리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 진리 자체를 사랑하고, 탐구하고, 얻고, 붙잡고, 강하게 포옹하도록"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오, 진리, 진리시여, 그때에도 내 영혼의 골수가 얼마나 내적으로 주님을 찾아 숨을 헐떡거렸는지요!"
여기서 이미 가장 내면적인 어거스틴이, 곧 열정적인 진리의 추구자, 자기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얻고자 애쓰는 사람, 하나님을 얻고자 싸움을 벌이는 사람으로서 나타난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진리는 그 어떤 전문적 학문의 주도 명제와 교조가 아니라, 또한 그 어떤 한 조각의 실재성을 단순히 탐색하고 목록으로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실재성의 가장 깊은 근원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원(原) 근원들과 배후 근원들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다시금, 한 이론적인 지식 취득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실제적인 입장 천명을 목적으로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추구하였던 진리는 그에게 있어서 삶이었다. 'veritas'(진리)와 'beata vita'(행복한 삶)는 그에게 있어서 동일한 것이었다. 그의 질문과 사유는 그의 삶의 의지의 깊이로부터 태어난 것이었는데, 이것을 실존적인 질문이자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영혼을 불태웠던 진리에 관한 질문은 무엇이었나? 그의 전반적인 하기의 발전을 그릇된 빛 가운데 보지 않기 위하여, 이미 여기서 동시에 확정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 질문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나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 자신이 거듭 설명하듯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처음부터 그 안에서 살아 있었다. 이것을 그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거스틴은 처음부터 그 어떤 단순한 의미로 볼 때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것도 그의 어머니에게서 받았다. 예를 들면 그렇게 열정적으로 소화한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란 책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그에게 있어서 꽤 언짢은 실망이었던 것이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본질의 맛"으로써 여러 차례에 걸쳐 그는 그에게 다가온 세계관 체계들을 검증하였다. 그가 마니교에 빠졌을 때에, 그에게 있어서 "미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다. 그래서 그가 그들과 결별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그들의 가르침에 "그리스도의 본질의 맛"이 없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다.
철학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를 묶어 둘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어거스틴이 인식적으로가 아니라, 감성적으로 그 자신이 생각하고자 했던 것 이상으로 그 당시에 벌써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 그의 진리 추구는 무엇과 관계되었는가? 그것은 그의 하나님 개념이 소화해 낼 수 없을 정도로 짐을 가중시켰던 그러한 일종의 난점들과 반 명제들을 해명하는 일과 관계되었다. 그의 그 당시, 대중적인 스토아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물질주의적인 사유 방식에 있어서는, 그 어떤 방식으로든 질료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떠한 실재성도 있지 못했거니와 또 있을 수도 없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 문제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나온 모든 존재의 질료성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 아마도 하나님이, 신이 아닌 모든 것을 자체에 빨아들이는 그러한 끔찍하게도 생긴 해면과도 같이, 무한히 질료적인 연장으로 존재하는가? 하여튼 그에게 있어서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사람의 형태로 생각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무엇보다도 카톨릭 교회에 진노를 발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카톨릭 교회가 그러한 단순한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하나님 개념을 대변하는 까닭에 그러한 하나님 사상이 들어 있는 구약을 굳게 고수하고 있다고 하는 선입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그와 같이 그를 괴롭히는 질문은 무엇보다도 사유를 약속해 주는 어지간한 하나님 개념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런즉 이 질문은 반(反) 카톨릭 적으로 첨예화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참된 하나님 개념을 추구함으로써 다른 문제가 제기되었다. 악과 질병과 죄와 죽음이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와 관계될 수 있는가? 그의 물질주의적 전제에 따르면 그에게 있어서 또한 악은 다소 질료적인 것, 곧 질료적 실체였다.
이 악의 실체는 어디서 오는가?
선하신 하나님께서 악의 실체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인가?
아니면 그것은 도리어 악한 마귀의 권세 물은 아닌가?
이 질문 또한 반 카톨릭적 르상티망의 결과였다. 왜냐하면 바로 카톨릭 교회가 그 권위를 지극히 강조함으로써 도덕적으로 악한 것, 곧 죄를 인간의 자유 의지로 돌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톨릭 교회는 또한 심리적으로 악한 것, 즉 질병과 죽음을 적어도 간접적으로나마 자유 의지의 오용으로, 곧 아담의 원죄로 돌렸던 것이다. 그렇게 어거스틴의 감각적이며 열정적인 정신이 그 당시에 느꼈듯이, 이러한 그에 대한 교회의 응답은 어거스틴 안에 필경 심각한 대립을 일으켰다.
그것이 다소 질료적인 것, 한 실체였다면, 어떻게 사람이 그의 피조물적인 무력함 가운데 스스로 악을 일으킬 수 있었는가? 교회에 대한 그의 반대가 감성적으로 아마도 더욱 자극되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교회가 악하다 불렀던 바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거니와 또 포기하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카톨릭 교회에 대한 그의 반대 감정은 또한 바로 이 문제로부터 항시 새로운 양식을 공급받았던 것이다. 교회가 그러한 문제와 비슷한 난점들에 대하여 적절한 토대를 제공하지 못하고, 언제나 단지 신적인 권위의 비중만을 제공하였다는 사실이 그의 영혼을 진절머리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카톨릭 교회의 권위에 대한 자랑이 자유스런 탐구의 억압, 참으로 진리애의 억압을 의미하지 않았는가? 그와 같이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진리의 문제는, 요컨대 그가 교회가 제시하는 길과는 다른 길을 추구하고 찾아야 했다고 하는 의미로 설명이 될 수 있다.
그는 교회 없이 그리고 교회에 반대하여 탐구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어거스틴이 교회에 대한 이러한 반대 입장을 취한다는 사실, 그가 그의 이해들을 끊임없이 교회의 가르침과 비교하고 교회를 비난하고자 극구 애쓰고 있다고 하는 사실은 이 심리학자에게서 교회의 권위가 그렇게 그 당시에 벌써 그의 무의식 안에, 그가 이것을 분명히 의식하였을 때 보다 더 깊이 뿌리를 내렸다고 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교회가 요구하는 권세로서 그 당시에 이미 그의 영혼에 있어서 그로 하여금 궁극적인 진리 탐구를 카톨릭 진리와의 논쟁으로 이해하도록 하였던 까닭에 내적으로 교회에 반대해야 했기 때문에, 교회에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 어린 아이 안에 있던 어머니는 침묵하지 않았다. 여전히 이 어린아이는 어머니에게 대들었다. 19세의 어거스틴은 마니교도에게 갔다. 여기서 그는 그가 추구하였던 것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성장해 나온 다른 영지주의와 비슷하게도, 거기에 단순한 하나님 개념만 들어 있다 하여서 구약을 거절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론과 그리스도론을 그럴듯한 학술적이며 천문학적인 논증들로 강화시켰다.
그들은 언제나 "진리, 진리"에 관하여 말하였으며 자유스러운 탐구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모든 믿음을 맹신이라고 정죄하였다. 나아가 그들은 죄와 악을 자기 의지의 무행위라 설명하지 않고 빛의 하나님과의 투쟁을 벌이는 한 악한 원리의 발현이라고 설명하였다. 그와 같이 그의 비판적 사유의 모든 요구들이 채워진 것처럼 보였으며, 가장 중요한 것, 즉 살 권리와 온전한 감각적 즐거움을 누릴 권리가 확보된 것 같았다.
어거스틴은 9년간 이 정열적인 동방의 이원론에 헌신하였으므로, 어머니에 대한 저항과 교회로부터의 이탈이라고 하는 극점에 도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혼의 가장 심오한 그리움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의 진리애는 너무도 정직한 것이었으므로 마니교도들의 천문학적인 지혜와 그들의 "잘 차려입은 사환" 파우스투스에게 속아넘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그들의 가르침에는 그리스도의 본질의 맛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회의주의 철학에 대한 상세한 연구를 통하여 이 결과에 이르렀는데, 그것들은 그에게서 마니교의 전 교리 체계를 뒤흔들어 놓고 말았던 것이다. 심한 좌절로 말미암은 이 분위기 안에서 그는 384년에 법정 웅변 교사로 밀라노로 부름을 받았다.
여기서 처음에 그로 하여금 전적으로 의심과 절망을 품게 하였으나, 심층적으로 그의 회심의 위기를 불러 일으켜 준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섬세한 마음의 소유자요 처세적이며 경건한 감독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들이었다. 이제 그는 카톨릭 신자들의 하나님 개념과 믿음 개념에 대한 자신의 거절적인 판단들이 그릇된 편견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에게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밀라노에서 겪은 체험들의 영향을 받는 가운데 "우리 주님이시오 구세주이신 분에 대한 카톨릭 교회의 믿음이 깊이 내려앉았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의 영혼은 그것을 "매일 더 많이" 마셨다. 그러므로 카톨릭 교회의 그리스도 상(像)이 밀라노에서 그를 매혹시켰던 것이다. 여기서 그의 영혼을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계몽에 열어 주었고 카톨릭 교회의 권위에 대한 주장을 매력 있게 만들었던 것은 다시금 어머니의 오래된 유산, 곧 모니카에게서 전수된 그리스도에 관한 청소년기의 영향들이었다. 이미 그는 이런 계획을 품게 되었다: "내 부모님이 세워주신 그 곳에 내 발을 굳게 디뎌야지." 그러나 처음부터 그를 괴롭히고 교회와 갈등을 일으켰던 두 주요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참된 하나님 개념에 대한 문제와 악의 기원에 대한 문제였다.
우리가 보았듯이, 그것들은 그의 물질주의적인 전제에, 곧 모든 존재자가 필경 물체적이라는, 즉 하나님과 악이 어떠한 물질적인 실체들로서 이해될 수 있다고 하는 전제에 뿌리를 두었다. 그는 물질(질료)로 곤란을 겪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곤란을 겪었던 것이다. 기독교를 물질주의적으로 해석하려는 그러한 부질없는 시도는 그를 단순히 감내하기 어려운 투쟁으로 내몰았다.
그는 전적으로 찢겨지고 말할 수 없는 비애를 겪는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어거스틴은 파우스트와 같은 인물이었다. 사람들이 괴테의 파우스트와 어거스틴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몇 가지 특징들을 언급한 것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이 양자에게서 진리와 영혼의 지복을 얻기 위한 동일한 열정적인 고투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양자에게서 천문학과 악령에 빠진 일, 여인 사랑과 이 세상을 섬기는 일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 양자에게서 진리에 대한 좌절과 죽음에 대한 그리움이 나온다.
그리고 동시에 발전의 마지막을 미리 이야기 해 보자면, 양자에게서 "지복으로 전개되는 사랑의 계시"를 통한 동일한 구원의 노정이 나온다. 그의 분열되고 짓눌려진 영혼의 염려로부터, 그의 물질주의적 사유의 곤궁에서부터 그를 구해준 것은 두 번째 위대한 체험이라 할 수 있는 신(新)플라톤주의 서적들을 읽은 일이었다. 고대의 철학적 체계에서 정신적인 것이 플라톤과 그 후손들의 체계에서만큼 그처럼 그 본래 존재와 본래 법칙에 있어서 풍성하게 인식되고 알려진 것은 없었다.
어거스틴이 신플라톤주의 서적 - 무엇보다도 플로틴의 「엔네아데」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 에 점점 더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순수 영적인 것의 본질과 실재성이, 곧 변화하지 않고 보편타당하며 필연적인, 그러기에 사라지고 가시적인 사물들보다 더 심오하고 더 참된 존재를 소지하는 그러한 한 영적 개념 세계의 실존이 더욱 더 그에게 반짝였던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의심을 물리쳤던 해방하는 인식, 곧 비물체적인 한 존재, 질료적 존재보다 더욱 뛰어난 한 존재, 한 순수 영적인 존재가 있다고 하는 인식이었다. 이로써 물질주의적 사유가 관념론적 사유로써 극복된 것이다. 어거스틴에게서 그 결과들은 스스로 일어났다. 불변하는 개념 세계의 원 근거인 하나님은 순수 영이라는 것이다. 인간 영혼도 이 불변하는 개념들의 유기체와 담지자로서 순수 영적이라는 것이다. 그와 같이 어거스틴의 사유에 있어서, 질료적 실재성과 충돌하는 일없이, 흡사 하나님과 영혼이 그 영원한 실재성을 가지는 장소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차후로 그는 공간과 연장의 문제로 놀라는 일없이, 하나님과 영혼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로써 또한 동시에 다른 문제, 곧 악이 어디서 오는가 하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나님은 원 진리와 원 실재성으로서 존재의 충만함, 곧 불변자, 참 존재이기 때문에, 비신적(非神的)인 것, 반신적(反神的)인 것, 곧 죄와 악은 어떠한 질료적인 것도, 요컨대 어떠한 존재자도 아니라, 본질적으로 존재의 결여, 존재로부터의 타락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어거스틴은 모든 어려운 문제에서 해방되었다. 그의 물질주의적인 사유가 없어진 동시에 물질주의적 하나님 개념과 그 이원론적 우주론이 사라졌다. 이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새로운 입장이 그에게 필요하게 되었다. 존재의 비밀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 안에 있다는 것이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네 자신에게로 돌아가라! 진리는 속 사람 안에 거한다."
진리는 하나님이 영혼과 접촉하시는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이 양극, 즉 하나님과 영혼 사이에 이제부터 이 성자의 사유가 움직이게 된다.
"나는 하나님과 영혼을 알기를 갈망합니다. 다른 아무 것도 없는가? 다른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자기 자신에게로, 마음의 고요함으로, 위대한 침묵으로 돌아간다. 어거스틴은 신비주의자가 된다. 어거스틴에게서 차후에 물질주의적 사유로부터 해방됨과 더불어 곧 카톨릭 기독교가 참된 기독교로 입증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특징적인 일이다. 확실히 그 자체로 볼 때에 관념론으로 나아감으로써 카톨릭 교회로 나아가는 일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그러했을 것이다. 이로써 새로이 카톨릭 교회와 그 권위가 이미 처음부터 그의 무의식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살아 있었다고 하는 우리의 추측이 확증되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가 질풍노도 시대에 교회에 제시하였던 그러한 모든 비난들이 그대로 사라졌던 순간에 교회는 유일한 참된 교회로 그의 정신 앞에 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무거운 짐을 떨구듯이, 옛 편견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신플라톤주의적 영 개념과 더불어 또한 유일한 카톨릭 교회와 유일한 카톨릭 진리가 문제없이 입증되었다는 사실이 확실하다 할지라도, 다른 한편으로 확실히 그가 이 카톨릭 진리를 그 당시에 아직도 신플라톤주의의 눈으로 보았다고 하는 사실이다. 아마도 카톨릭 교회에 대한 그의 고백은 모든 교의와 제도들에 대한 분명한 긍정을 포함하였다. 어거스틴은 심정적으로 그 당시에 이미 온전한 카톨릭 교인이었으며, 그는 끝까지 이것으로 머물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카톨릭주의를 그 당시에 아직도 신플라톤주의의 조명으로 보았던 것이다. 달리 얘기하면, 그는 기독교를 그 당시에 아직도 본질적으로 신플라톤주의와 동일시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양 종교 체계들의 공통점만을 인지하였고 그 차이점과 반대되는 점을 인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공통점을 무엇보다도 하나님 개념에서 인식하였다.
출처 : 푸른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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