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후기 시대의 신학적 질문
현재신학의 논의와 맥락은 보수적인 신학자와 진보적인 신학자의 두 입장이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오늘의 시대를 기독교 후기 시대라는 시대적 인식을 받아들이면서 전통적인 가치와 신학적 주장이 상대화되거나 주변화된 세계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신학적 지평을 찾는 이들이다.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기독교 후기 시대라는 언어조차 받아들이기를 꺼려하며 기독교신학의 보편적 유효성을 주장하는 입장을 유지한다. 그러나 진보 진영의 신학자들 중에는 여전히 유럽중심주의적인 신학적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해방신학자들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
서구의 신학자들은 그들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전세계 어디에서나 타당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신학적 사유를 전개해 왔다. 그러나 그런 기독교신학이 명료한 진리처럼 주장해 왔던 이론들 중에는 오늘의 비판적 지식인의 관점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현대 신학적 논의의 빛에서 본다면 이제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절대적인 진리의 기준으로 기르쳐진 내용 중에는 서구 백인 남성들의 생각을 거치면서 이루어진 인간을 차별하는 논리들이 주종을 이루었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고, 그 결과 기독교의 가르침 속에 담긴 도덕적 오류들은 기독교 신앙의 신뢰를 격하시키는 경우에 이르렀다. 이런 오류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인종차별, 여성차별, 타종교인의 차별이다.
특히 정치신학적으로는 개신교가 가톨릭교회에서 이루어진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의 뼈대를 답습하고 정치신학적 유산을 물려받아, 콘스탄틴 시대에 기독교는 로마제국을 기독교의 나라로 승인했고,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제국의 종교로 승인하게 되어, 유대 기독교 전통의 예언자적 전통을 예수의 메시아 사상으로 대치함으로써, 완성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즉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현실을 변혁하고 개혁하라는 준엄한 사회윤리적 요구를 담고 있었던 예언자 정신을 약화시킴으로써 사회정의에 대한 강한 종교적 충동을 상실했다.
로마제국의 질서를 인정하고, 로마제국을 옹호하는 정당전쟁이론은 정의로운 싸움의 주체는 언제나 통치자이지 결코 신민이거나 민중일 수 없다는 전제가 깊이 깔려있음으로, 종교적 전통에서 울러 나오던 예언자 혼에서 울려 나오던 변혁과 회개의 메시지는 어거스틴 이후 기독교 사상사에서 침묵하게 되었다. 기존의 질서를 위배하는 요구는 반사회적이며 심지어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철저히 매도되고 척결당했다. 이것을 마크 엘리스는 거룩하지 못한 종교와 정치의 연대가 불러온 포악이라고 했으며, 기독교는 이 포악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다.
오랜 서구 기독교 역사 속에서 정치는 기독교를, 기독교는 정치를 이용하여 권력화하였다. 그러나 세계는 종교적 세계관에서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하면서 세속화되었고, 종교개혁 이후 사회는 종교의 후견과 조언이 시대착오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정치 경제 사회적 권력을 종교 권력으로부터 독립시켜 왔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제정일치 시대의 종말이 온 것이다. 종교개혁 시대는 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야 함다는 주장을 하였으며, 종교적 가르침 중에 많은 내용이 신화와 미신적인 추정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게 되었는데, 천둥 번개와 같은 자연재해를 하나님의 진노라고 가르쳐온 교회의 주장은 번개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보편화되었을 때 그 정당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구원과 현실세계 관련성
구원은 신앙인들의 가장 긍극적인 질문으로, 구원이 지극히 사적이고 영적인 것에 머문다면 삶의 다른 차원에서의 구원은 제외되기 쉽다. 사회 정치 경제적 현실을 소외시키는 구원은 결국 사회 정치 경제적인 구원에 대한 질문을 침묵시키는 것이 된다. 개인의 영혼이 구원을 받으면 사회 정치 경제적 정의가 자연히 수반될 것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는 해방신학이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해방신학은 이렇게 현실 관련성을 상실한 기독교는 보편적인 진리일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구조악의 조장, 침묵에 대한 비판
해방신학은 개인적 영성과 죄악에 대한 비판이론을 넘어서 사회 제도가 지닌 악으로부터 구원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악에 대한 인식 능력을 가져야 하고, 지배와 억압의 현실을 보고, 남녀 차별과 유색 인종의 차별 등을 보아야 한다. 정의가 결여된 영성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의한 관계를 조장, 유지해왔다. 지배자 편에서 지배세력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강조하여 피지배계층을 소외하고, 산업혁명 이후 사적소유의 정당성을 옹호함으로써 경제적 착취와 억압을 옹호했다. 해방신학은 억압과 지배 구조와 계기에 대하여 침묵해 온 기독교 신학에 대한 비판적 반성을 끈질기게 요구하면서 억압의 현실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해왔다. 정치 경제 사회적 억압과 지배는 교묘하게 종교와 결탁되어 종교는 지배구조를 하나님의 질서로 옹호해 주고, 정치 경제 사회적 지배세력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안에 종교 지배자들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프랑스혁명이후 서구 기독교는 현존질서 유지적인 기능을 하면서, 신민지정책을 협력하였다. 그러나 정치 사회 경제 권력이 기독교를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을 때 까지 스스로 비판 반성하여 속성을 바꾸지 못함으로써, 결국 신자들의 대다수를 잃게 되었다. 가장 치명적인 사건은 나치의 후원자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기독교 안에는 여전히 역사적 반성의식이 없는 세력들에 의하여 종교와 정치의 결탁이 이루어지고, 지배세력과 야합함으로써, 종교의 예언자적 전통을 스스로 잠재우는 세력들이 진을 치고 있다.
전인적 책임과 구원을 향한 질문
아시아 해방신학은 유일회적인 기독론을 넘어서서 사건으로서의 기독론, 패러다임으로서의 기독론을 낮고 천한 이들과 동행하는 그리스도론에서 정통교리가 아니라 정행의 길을 찾는다. 현대 해방신학은 서구 전통신학들이 간과하고, 제외시키고, 저주하고 차별했던 이들 편에 서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려는 특징을 가진다. 가부장적인 하나님에서 해방되어 평등주의적인 하나님으로, 인종차별주의적인 하나님 신앙에서 보편적인 인권론적인 하나님 신앙으로, 착취와 억압을 간과하며 영혼구원만을 역설하는 하나님에서 전인구원의 해방의 지평을 가리키는 하나님에 대한 증언들이 이어지고 있다. 온갖 차별과 억압과 착취문화에 의하여 포로되었던 이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고귀한 인간으로 회복시키는 정치 경제 사회적 운동이 영혼구원의 가르침에 잇대져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도덕적 모순과 해이
지난 역사에서 기독교의 가장 심각한 내적 모순은 성서적 예수의 상실에 있다는 주장들이 제기 되고 있다. 가난한 자들의 이웃이었던 예수가 삭제되는 동시에 우주적 지배자로 높여진 예수가 등장했고, 평화의 임금으로 예루살렘에 들어 왔던 예수는 정당전쟁론을 앞세우고 주변 국가들을 괴롭히는 전쟁의 후원자로 합리화되었다. 더불어 욕망과 쾌락의 문화를 지배하고 축복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세라와 바알을 방불케 하였다. 예언자 정신의 상실과 더불어 속죄주 예수에 대한 교설의 확립은 결국 보편적인 인간의 죄스러운 삶에 대한 용서와 구원을 약속하는 종교심리적인 위안의 은신처가 된 셈이다. 문제는 이들이 범한 죄의 결과로 무수한 이들의 고난과 고통이 당연시되거나 간과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명백하게 기독교 안에 자리 잡은 도덕적 해이와 모순을 드러내는 증거로 남아 있다.
홀로코스트와 현대 신학의 해방적 특성
해방신학은 복음주의가 지니고 있는 불의한 현실에 대한 무관심과 침묵을 비판하고, 에언자적 전통을 회복시킴으로써 좀더 나은 역사적 선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다.
해방신학의 지평은 오늘의 세계 현실을 담아 낼 수 없는 편협하고 왜소한 신학으로부터의 해방만이 아니라, 그러한 왜소한 신학안에 갇힌 하나님의 해방을 요구하고, 나아가서 인문사회, 과학, 생물학과 의학의 영역에서 인간의 권리와 생명권을 옹호하는 신학적 과제를 열어 온 사상적 동인을 지니고 있다.
분열된 세계의 화해와 치유의 과제
오늘날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는 수백 개의 교파로 분열되어 있다. 사회과학적 테이터를 부정하는 보수신앙공동체가 있고, 사회과학적 진보를 받아이려는 신앙 공동체도 있다. 그러나 두 진영은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한 신앙체험과 고백을 중시한다. 하나님이 죄인인 인간과 그리스도 안에서 연대하신 사건이 복음이라면, 우리는 이제 차별받고 소외되었을뿐 아니라 배제되었던 이들과의 연대를 추구함으로써 복음적 실천을 지향해야 할 역사적 시점에 서있다. 우리 안에 있는 장벽, 착취적 근성과 폭력성의 제거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선결해야 할 과제이다. 그리고 고난과 가난, 억압과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과 나누어야할 연대는 기독교인들의 거룩한 의무다.
'목회신학대학원1·6교실 > 기독교윤리교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신정통주의 신학(新正統主義神學, Neo-Orthodoxy Theology)? (0) | 2015.01.17 |
---|---|
[스크랩] 토마스 아퀴나스 사상의 생태신학적 함의 / 이재돈 (0) | 2014.06.06 |
[스크랩] [크리스천 인문학] ‘내적인 빛’에 따른 삶을 산 퀘이커교의 창시자 조지 폭스 (下) (0) | 2014.05.20 |
[스크랩] [크리스천 인문학] ‘내적인 빛’에 따른 삶을 산 퀘이커교의 창시자 조지 폭스 (上) (0) | 2014.05.20 |
[스크랩] 기독교대한감리회 목회자 윤리강령 (0) | 2014.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