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1·6교실/기독교윤리교실

[스크랩] 신정통주의 신학(新正統主義神學, Neo-Orthodoxy Theology)?

류성련 2015. 1. 17. 03:59

 

 

 

 

 

신정통주의 신학(新正統主義神學, Neo-Orthodoxy Theology)

신정통주의(neo-orthodoxy)는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동으로 칼 바르트(K. Barth)에 의해 시작된 신학사상이다.
신개혁주의라고도 하며 특징에 따라 위기신학 혹은 변증법적 신학이라고도 한다. 신학적 모티브가 종교개혁의 원리들에서 나왔기에 신정통주의라고 하나 종교개혁으로의 복귀운동은 결코 아니다. 자유주의 신학의 내재성을 비판하고 초월성을 강조하나 과학적 탐구와 가설을 정당시하고 성경비평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정통주의와는 다르다. 보다 정통적 입장을 취하는 바르트와 부룬너가 있고, 보다 새로운 입장을 취하는 틸리히와 니버가 있다. 한국에는 1930년대 초에 소개되었고 60년대에 들어 한철하와 윤성범사이에 신정통주의 신학논쟁이 있었다.

ꊱ 신정통주의 개념

1) 누구든지 개신교 신학사상 20세기에 가장 지배적인 신학자를 말하려면, 여러 사람을 논할 것 없이 바르트(karl Barth)와 불트만(Rudolf Bultmann)을 손꼽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20세기 신학의 기수(旗手)는 바르트였다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바르트는 19세기 초의 쉴라이에르마허와 같이 20세기초에 신학사상 지배적인 인물이 되었다. 20세기의 시작은 신학적으로 볼 때, 1914년 1차 대전의 발발(勃發)과 함께 나타난 것이다. 1899년과 1900년 어간의 겨울 학기에 하르낙(Adolf von Harnack)은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유명한 강의를 하였는데, 이것은 19세기의 낙관주의적(樂觀主義的) 신앙의 집대성(集大成)이었다. 바르트는 하르낙의 제자였으나, 자기 스승의 시민적 이상주의를 반대하고 나섰다.

2) 바르트의 신학은 처음에 그 논리적 구조가 부정(否定)과 긍정(肯定)을 동시에 말하는 변증법적 성격 때문에 “변증법적신학” (辨證法的神學) 이라 불리어졌고, 다음에는 그것이 가지는 시간관념이 과거도 미래도 다 부정하고 “지금 이곳에서” 현재점만을 강조하다 보니 그 위기적 성격 때문에 “위기신학” (危機神學)이라 불리워 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신학이 처음에 배경으로 하고 나왔던 실존주의 철학보다 기독교 진리가운데 한가지를 들고 나오는 것이 좋을 것으로 여겨졌던지 “말씀”(이곳에서 지금 경험하는 계시 사건)이란 하나의 신학적 개념을 들고 나왔기 때문에 “말씀의 신학” (theology of word)으로 불리워졌고, 그것이 한편으로는 19세기의 독일 관념론적 신학을 반대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가지는 위기적 성격 때문에, 또 “말씀” 경험의 단원론적(單元論的) 성격 때문에 정통신학을 반대하고 보니 “신정통주의” (neo-orthodxism)이란 이름으로도 불리워지게 되었다. 그 용어는 고사하고 이 모두가 바르트의 신학을 말하는 것이다.

ꊲ 신정통주의 내용

1) 신정통주의자들은 성경을 단순히 위대한 종교적 문헌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점에 있어서 자유주이자들은 지대하게 잘못되었다. 그러나 신정통 주의자들에 의하면 이러한 케리그마는 말씀(the World) 에 대한 증언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통주의자들이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하는 것은 여러 가지 큰 과오들을 가져오는 중대한 잘못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잘못이 있기 마련인데 성경도 물론 그것이 특별한(독특한) 책이긴 해도 인간적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불완전하고 오류가 섞인 상태(형태)로서 만 전달해 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정통주의자들은 정통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배척하는 성경의 고등비평( higher critical views of scripture)을 거의 대부분 받아들인다.

2) 그렇다면 신정통주의 신학은 어떠한 신학인가?

A. 말씀의 신학(theology of word)이다.
① 자유주의에 대한 신정통주의의 반역이 초기 바르트의 현저한 특징이다. 바르트 자신이 하르낙과 헤르만 등 유명한 자유주의 신학자들 밑에서 공부하였으며 그의 주석이 나오기까지, 이 사상계의 일부분을 이루었다. “하나님은 하나님 되게 하고 사람으로 만들지 말라”고 바르트는 외쳤다. 자유주의는 종교의 문화적 가치를 고양했으나 바르트는 종교를 최고의 죄로 정죄했다. 그는 그러한 정신에게 자기의 새로운 사상들에 대하여 다른 어느 명칭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란 이름을 취택했다. 그러나 그는 계시를 주장하면서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완전 일치시키지 않고 구별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② 성경을 읽되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있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성경은 단순히 하나의 표이나 최소한 그것을 통하여 말씀이 우리에게 오는 표라고 한다. 하나님과 성경간의 관계는 사실적이기는 하나 간접적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것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한다.
③ 바르트는 그 적극적 내용에 있어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으니 잘못이다. 그는 말하기를, “성경은 계시 자체에서 구분되어야 한다. 증거는 그 증거된 것과 동일시 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바르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도 한다. 그러나 그가 그런 말을 할 때에, 성경 자체가 적극적 내용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기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관할과 통찰하에 있지 않는 존재와 사건을 말함이다.”라고 하였고, 또한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의 일을 말함이니 그것은 우리로서 취급할 수 있는 상태나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바라볼 수 있는 것으로서 자유로운 하나님의 행동을 말함이다.”하였다.
④ 바르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함은 이적(異蹟)을 말함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어디까지나 성경 자체는 사람의 말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는 얼마든지 성경에 그릇됨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말하기를, “축자 영감(逐子靈感)이란 것은 말이나 역사(歷史)나 신학적 성경에 있어서 성경 말씀이 오류(誤謬)를 지니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축자영감이란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실수 있는 말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며 또한 거기 실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받아야 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⑤ 신정통주의 신학이 내세우는 계시사건(啓示事件) 또는 “말씀”이 기독교의 전체 진리 속에 차지하는 그 위치의 문제다. 현대 신학자들 뿐이 아니고 교회사 속에 나온 모든 이단까지도 기독교의 부분적 진리를 가지고 서지 않은 일이 없다. 문제는 어떤 부분적 진리를 가지고 전체 진리의 왜곡(歪曲)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말씀”이란 하나의 추상화된 진리를 가지고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또 교회가 신앙의 표준으로 신앙과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성실성을 가지고 고백한 문서들을 격하시키고 대격시키는데 문제가 있을 것이다.

B. 위기신학(theology of crisis)이다.
① 위기신학의 ‘위기’라는 말은 19세기의 내재론적 낙관주의적 신학의 붕괴, 독일 신학이 처한 위기 등을 자칭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나 위기신학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심판(헬라어로 krisis)을 가리키는 말이다.
② 바르트는 1차 대전이 끝날 무렵에 자펜빌의 목사직을 맡아 보면서 그의 첫 번 신학적 대작(大作)을 써냈다. 이것이 그의 「로마서 주석」이다. 제1판은 1918년에 나왔고, 제2판은 그가 말한 대로 “돌 위에 돌하나 첩놓이지 않고” 1921년에 나왔다. 제2판으로 말미아아 바르트는 신학적인 선풍을 일으켰다. 이 주석서로 바르트는 일약 대신학자가 된 것이다.
③ 바르트의 신학을 위기 신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도 페이지마다 위기라는 말이 나타나 있다. 그의 [로마서 주석]은 하나의 거대한 폭발과 같았다. 그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Das Gott ist Gott)라는 것만을 유일한 근거로 삼았다. 바울이 이것을 알았다는 것과, 또 바르트가 바울이 이것을 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바르트의 교의학적 전제(敎義學的 前提)이다. 바르트가 그 당시의 신학을 비난한 이유는 신학이 이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과 그분의 계시 대신에 인간과 인간의 신앙, 인간의 경건, 인간의 종교, 인간의 문화, 인간의 정신, 인간의 감정 등을 중심에다 두었기 때문이다.
④ 바르트는 <로마서 주석> 속에서 19세기 신학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사상, 곧 인간의 신앙과 불신앙, 정통과 자유주의, 역사의 높음이나 깊음이 모두 하나님의 심판아래에 있다는 위기 의식을 고조하였다. 이 위기 사상의 동기는 대전의 위기 의식, 로마서의 정죄와 심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신의 진노, 기타 선지자 예레미야, 사도바울, 개혁자 칼빈, 특히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이 작용하였다. 세속적 문화 활동과 정치적 혁명에 대한 부정적(否定的) 태도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한 참된 혁명과 천국이 임할 것을 전제했기 때문이었다.

C. 변증법적 신학(dialectical theology)이다.
① 위에서 밝힌 대로 바르트 신학을 위기신학 혹은 신정통주의라고도 불린다. K. 바르트의 <Der Romerbrief>(1919)를 기원하고 잡지<Zwischen den Zeiten>(1922-33)을 기관지로 출발해, 처음에는 바르트,고가르텐,투르나이젠 등이, 후에는 브룬너, 불트만 등이 가담했다. 헤겔의 변증법과는 달리 정,반의 두 개의 명제를 세울뿐 합(合)의 종합을 하지 못한다는 변증법을 사용하며 최후의 헤겔은 신의 일이라고 주장한다. 19세기 아래의 자유주의 신학을 통렬히 비판하고, 생명의 진리는 신의 계시에서만 파악할 수 있다고 해서 ‘말씀의 신학’이라고도 한다. 1930년대 초반에 와서 바르트와 브룬너 사이의 자연신학 논쟁과 고가르텐의 나찌스 지지로 인해 분열되기는 했으나 19세기 신학계의 공기를 일변시켜 20세기 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② 신 정통주의 신학의 사이비 보수성은 이 신학의 특수한 변증법적 논리(dialeoticism) 때문에 동정녀 탄생을 포함한 기독교가 주장해 오던 모든 교리를 긍정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 정통주의는 쉽게 자기도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그대로 받아 들인다고 말할 수 있다. 자기의 신학이 성경적이라고 주장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와 같은 뜻에서인가?
③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은 쉴라이에르마허, 리츨, 하르낙 및 트뢸취가 지배하던 신학적 시대에 반기를 든 것이다. 그 중에도 특히 쉴라이에르마허에 대해서 그러하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이미 “기독교가 야만과한데 뭉치고, 학문이 불시앙과 결탁하는 역사의 매듭이 어처럼 엇갈려 뒤엉킬 셈인가?”라고 염려한 일이 있다. 그런데 역사의 매듭은 그가 염려하던 방향으로 흘러가서 변증법적 신학은 신과 세계의 분리를 주장하는가 하면 자유주의 신학은 신과 신의 세계의 분리를 주장하는가 하면, 자유주의 신학은 신과 세계의 종합을 외치고 잇었다.
④ 바르트 자신이 말한 대로 그의 변증법은 “우리가 신을 이율성(二律性, Zweliheit) 속에서 파악할 수밖에 없으니,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참으로 하나가 되는 변증법적 이율성으로 신을 파악한다”는데 있다. 신의 진리는 한 마디로 나타낼 수 없고 언제나 정명제(正命題)와 반명제(班名題)로 나타낸다. 긍정은 부정으로 보충되고 수정되어야 하며, 긍정은 부정에서, 또 부정은 긍정에서 분명해진다. 신에 관하여 우리는 변증법적으로 말해야 하나 정(正)과 반(反)이 종합 통일되지 않고 정에서 반으로 다시 반에서 정으로 미끄러져 갈 뿐 중간이 없다는 것이다.

ꊳ 신정통주의 방법

1) 신정통주의자들의 신학적 방법은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철학방법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덴마아크국가 교회(the Danish State Church)의 아무런 생명 없는 정통주의 신앙에 항거하여, 신자 각 사람에게 그들 각자가 진리에 정열을 The아 부음으로써 실존적 변화를 체험하도록 촉구했다. 여기에서 실존주의(實存主義 : Existentialism)란 용어가 나왔다.

2) 이러한 실존적 진리는 정신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합리적인 명제(命題)들인 신조 이상의 것이다. 이간은 이러한 명제적(命題的)진리를 통해서는 구체적으로 현재적 삶의 현장에서 체험할 수 있는 실존적변화를 얻을 수 있다. 이처럼 실존적 지식을 강조한 것은 형식주의에 흐른 정통신앙과, 무관심한 자유주의에 대한 교정 수단(해독제)으로서 대단히 유효할 것이라고 했다.

3) 신정통주의자들은 주장하기를, 정통주의 신학의 문제점은 성경의 역설들을 합리적이며 논리적으로 조리있는 신학적 체계로 해결함으로써 성경적 불균형을 깨뜨리려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통주의 신학이란 얼어붙은 폭포수와 같고 감동력 없는 사상운동과도 같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ꊴ 신정통주의 특징

1) 하나님의 절대성을 강조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성보다 하나님의 내재(內在性)을 강조한다(Harnack). 인간의 형제성과 아버지의 부성(父性)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 계시지 무슨 위험을 가지시고 죄를 벌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 까닭에 그렇게 함으로 자유주의 신학은 내재주의(內在主義)이다.
바로 여기에 계시는 하나님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절대성 보다는 하나님의 친절성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저쪽성(저쪽)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절대로 건널 수 없는 계곡이 있다. 이것은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를 그대로 인용한 말이다. “영원과 시간의 질적인 차이”라 한다.

2) 신정통주의는 루터와 칼빈의 신학사상을 부흥시키려 한다. 특히 sola gratia, sola fide, sola scriptura(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을 강조한다.

3) 신학의 우위성을 강조한다. 신학은 철학, 문학, 윤리문학보다 가장 고귀하고 권위있는 학문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4) 성경의 신언성(神言性)과 성령의 역사에 의한 신언성 확립을 강조한다.
정통주의와 신정통주의는 성경을 다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한다. 그러나 왜 하나님의 말씀이냐에 대한 차이가 있다.
① 정통주의에서는 성경을 기록할 때 기록자들의 성경의 영감에 의해서 기록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냐에 대한 차이가 있다.
② 신정통주의에서는 성경이 기록될 때 영감받은 것은 사실이지마는 그 성경의 말씀이 오늘 이 시간 여기에서도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느 쪽이 더 칼빈의 성경관과 가까운가?

5) 신학의 학문성 인정과 개량적(改良的) 학문성을 강조한다.
언제든지 성경을 통해서 현재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비추어서 어떻게 새롭게 형성하느냐 하는 것이 관심이다. 이 말은 전통적 과거의 것을 부인 한다는 말이 아니라 과거의 것이 성경적으로 보는 것을 이 시간 다시 재확인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개혁교회 신학의 특징이라고 신정통주의자들은 말한다.

6) 신정통주의는 에큐메니칼 정신을 가지고 타교파와도 대화를 하자고 한다. 장로교 신학만이 절대적이 아니다. 루터교, 감리교, 심지어 가톨릭교회까지도 대화를 통해서 신학을 발전시켜 보자는 것이다.

ꊵ 신정통주의 오류

많은 사람이 지적하는 바와같이, 신정통주의는 많은 면에 있어서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서 떠날 뿐 아니라 그 근본개념에 있어서 그렇다. 결코 그것은 “종교개혁의 가르침에 되돌아가는 것”이라 할 수 없다. 현저한 오류를 몇 가지 지적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신정통주의는 인간의 주관적 경험을 진리의 표준으로 삼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신정통주의에서는 계시가 단순히 사람에게 향한 하나님의 선언이 아니다. 계시는 만남이요, 대면이요, 대화라 한다. 성경이 우리에게 오기까지는 계시가 아니라 한다. 이로써 계시 자체의 개념 자체를 파괴한다. 바로 이 점이 신정통주의가 소위 실존주의 철학에 의존함을 볼 수 있다.

2) 성경을 계시나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하려 들지 않는 정신으로 신정통주의는, 정통신학의 언어는 그대로 보존하면서 그것을 재해석한다. 이러한 재해석은 우유속에 독과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원죄, 아담의 타락,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 부활, 재림 등을 부룬너는 신화(myth), 바르트는 사화(saga)라 부른다. 이러한 교리들은 일찍이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건이나 상태들이 아니라고 한다.
예컨데 창세기 3장은 사실대로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인생의 죄와 자만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것 뿐이라고 바르트와 니버는 말한다. 신정통주의의 이 개념은 “좋은 소식” 곧 하나님의 아들이 조인의 구원을 위하여 이 역사의 세계에 들어오신 사실의 선포로서의 복음의 중심 의의를 말살시킨다.

3)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중심됨을 강하게 주장하는 나머지 그리스도와 별도로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어느 계시도 인정하지 아니한다. 이 견해는 일반계시의 실재성(행 14:17, 롬 1:19,20)을 훼손함에 그치지 않는다. 자연계시를 희생시켜서 특별계시를 강조할 뿐만이 아니고 모든 형태의 계시에 대한 환전한 재해석을 가져오며 따라서 계시의 성경적 성격 자체의 파괴를 초래한다.

4) 바르트의 견해에 있어서 “성육신은 하나님과 사람간의 구렁을 메꾼 화목에 있어서 실로 최중대한 계기였다”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화목되었으며(롬 5:10, 곧 1:22), 그가 십자가의 피로써 화평을 이루셨다(골 1:20, 엡 2:16)는 성경의 교훈은 사실상 바르트의 화목의 교리와 맞지 않는다.

5) 바르트는 천국과 지옥의 실재성을 부인한다. 또한 성경에 제시된 바와는 완전히 다른 구원의 개념을 가지고 있음을 가리킨다. 예수는 만인을 위한 구원사(救援史)라고 바르트는 말하며 구원의 원(圓)은 심히 커서 불교도나 유교도나 신도(神道)교도들을 포함하며, 선택과 유기(遺棄)간의 분계선은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다고 한다. 바르트의 이와 같은 성경관은 성경 자체의 주장과는 전연 다른 것이다.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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