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중세교회의 강제적인 면죄부 판매는 루터의 신앙 양심을 근본적으로 흔들게 되었다.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에 순응할 수 없었고, 나아가 침묵할 수도 없었다.
루터는 자신이 가르치고 돌보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목회적 양심과 책임에 따라 설교에서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기 시작하였고, 전혀 개선됨이 없자 드디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의 문 앞에 ‘95개 논제’를 내 걸음으로써 기존 교회와의 본격적인 논쟁에 들어가게 되며, 이것이 종교 개혁의 시작이 된다.
◀ 면죄부 판매 광경과 판매인 테첼. 그가 판매한 면죄부는 로마 성베드로 성당의 재건축과 마인쯔의 대주교 알베르트의 매직(買職) 비용의 충당기금에 사용될 것이었다.
1515년 루터는 10개의 어거스틴 수도원을 감독하면서 서신 교환과 방문 등을 통하여 새로 발견한 복음의 씨앗을 전파할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깨우침이 얼마나 급진적인지 알지 못한 채 계속 성경 연구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면죄부 논쟁을 계기로 그것이 공공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면죄부는 카톨릭교회의 일곱 성사들 가운데 하나인 고해성사와 연관된 것이다. 사제는 통회하는 고해자의 죄고백을 듣고 죄사면을 한 뒤 죄책에 대한 보속으로 순교, 시편 낭송, 특별 기도 등의 행위를 하게 하였다. 한편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와 성인들에 의해 축적된 선행의 보고(寶庫)를 보유하고 있으므로, 죄를 지은 이는 보속의 의무를 대신할 수 있는 면죄부를 돈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제도화 하였다.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이미 죽어 연옥에 가 있는 이들에게도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금화가 헌금궤에 떨어지며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은 연옥을 벗어나 하늘나라를 향해 올라가리라”고 테첼은 신자들을 유인하였던 것이다. 그는 프레데릭 현자가 작센영내에서의 면죄부 판매를 거부하자 경계 근처에다 면죄부 판을 벌여 놓았다.
◀ 교황이나 대주교가 양피지에 쓰고 봉인이 첨부된 면죄부 판매 허용증.
테첼에 의해 사용된 브란데부르크의 면죄부. 구입자 이름과 날짜만 적도록 미리 인쇄되어 있었다. 죄사함을 이런 식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
▶ 비텐베르크성 교회. 지역의 개 교회도 일년에 한번씩은 돈을 받고 성물들을 신자들에게 보여주고 일부 또는 전체 면죄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교황으로부터 받았다. 이 교회도 95개 논제를 내 건 다음 날, 제성기념일에 면죄부를 팔 수 있는 허가를 받아, 교회의 5000점 이상되는 성물들을 보기 위해 수 많은 이들이 교회를 찾았다. 그러나 이 교회는 더이상 ‘모든 성인들’에게 봉헌되어 있지않고 개신교 종교개혁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또한 여기서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 이종배찬이 처음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교구민들의 영혼을 염려하는 목회적 책임감에 움직여 루터는 이미 이전에 행한(1516년 10월 31일과 1517년 2월) 설교에서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였었다. 그러나 고해 문제의 재고 요청들이 결국 실패하자 루터는 공개 논쟁을 요청하기로 결심하여 1517년 10월 31일, 제성기념일(모든 성인의 날 전날 밤) 전야에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성(城) 교회의 문에 내걸었다.
루터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실 때, 그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셨다”라고 논제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복음의 재발견 을 면죄부 문제에 적용하여 “교회의 참 보고(寶庫)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거룩한 복음”(62조)이라고 역설하면서, 면죄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자비에 비할 바가 아님을 천명하였다(68조).
마지막 논제에서 루터는 기독자는 면죄부와 같은 행위의 의가 아니라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결론내린다.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95개 논제를 내건 비텐베르크성 교회의 문
애당초 학자들간의 토론을 위해 내걸었던 95개 논제는 대량으로 인쇄되어 ‘마치 천사들이 전령이 된 것처럼’ 순식간에 전 독일로 퍼져나갔을 뿐 아니라, 전 유럽에 미치게 된다.
이렇듯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이 효율적으로 전파되는 일에 중대한 기여를 한 것은 바로 인쇄술이었다. 이 기술로 인해 개혁 정신은 대학의 울타리를 벗어나 온 지역으로 퍼질 수 있었다.
구텐베르크가 1450년 경에 발명한 인쇄술로 처음 찍어낸 것은 면죄부였는데, 동일한 인쇄술이 반 세기를 넘긴 후에는 면죄부의 존재 가치를 흔드는 데 오히려 더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 구텐베르크. 1398?-1468독일 인쇄술의 창시자. 소위 활판 인쇄술을 발명하여 면죄부를 찍는 데 공헌했으나 결국종교개혁 전파에 더 큰 공헌을 하게 된다.
1455년에 인쇄된 구텐베르크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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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으로 베껴 쓴 라틴어 성경. 구텐베르크 이전에는 이처럼 성경을 일일이 손으로 필사했다. 이 일은 주로 수도원 등에서 어렵게 이루어졌었는데 인쇄술의 발달로 성서를 비롯하여, 많은 출판물들이 더 빠르고 더 저렴하게 생산될 수 있었다. |
95개 논제 발표후 5개월이 지난 1518년 4월에, 카톨릭 교회는 한 이름 없는 수도사의 주장 안에서 점차 비등하는 폭발력을 잠재우기 위해 그로 하여금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리는 어거스틴파의 독일 분회에서 자신의 신학을 소개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저들의 전략은 커다란 실패였다. 이 모임은 루터의 주장을 결코 억누를 수 없었다. 오히려 그의 바르고 강한 주장은 어거스틴회의 수도원 담을 훌쩍 넘어서 온 세상에 메아리로 번졌으며, 면죄부 판매 논쟁을 한층 더 고조시켰다.
여기서 루터는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알려진 자신의 신학 원칙을 발표하면서 스콜라주의의 ‘영광의 신학’과 극명하게 대조시킨다.
▶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슈팔라틴. 루터의 오랜 친구였던 그는 프레데릭 현자의 비서이며 궁정목사였다. 루터 종교개혁의 3대 케치 프레이즈는 “그리스도만으로”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논제 19 :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그 만드신 것들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바라보는 사람(롬 1:20)은 신학자로 불릴 자격이 없다. 논제 20 : 그러나 고난과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의 보이는 것, 하나님의 ‘등’ (출33:23)을 인식하는 사람은 도리어 신학자로 불릴 자격이 있다. 논제 21 : ‘영광의 신학자’는 악을 선이라 부르고 선을 악이라 부른다. ‘십자가의 신학자’는 사실 그대로 말한다. |
◀ 도미니칸 수도회의 원장이기도 했던 카예탄 추기경. 가톨릭 교회의 충실한 아들이었던 그는 루터와 논쟁할 생각은 전혀 없이 단지 ‘나는 뉘우친다’는 말 한마디만 들을 계획이었으나 모임은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논쟁으로까지 발전되었다.
루터가 자신의 주장 포기를 거부하자, 교황은 그를 이단 재판에 넘기려고 로마로 소환하였다. 그러나 프레데릭 선제후와 대학이 이것에 반대하면서 대신 아우그스부르크에서 카예탄 추기경이 그를 심문하도록 주선하였다.
이 만남은 면죄부의 돈과 관계있는 푸거 가문의 집에서 일어났다. 추기경은 1518년 10월 12 - 15일에 소환당한 그에게 면죄부에 대한 교황의 교령(Unigenitus. 1343)을 가리키면서 면죄부를 승인한 교황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고 위협하였다. 루터는 교황보다 교회회의가 더 높으며 모든 인간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최종적인 권위는 성서가 가진다고 반박하였다. 그리고 카톨릭의 성사들보다 오히려 ‘믿음’이 죄인을 의롭게 한다는 주장도 굽히지 않았다.
추기경은 결국 루터로부터 ‘나는 뉘우친다’(revoco)는 말을 얻어내지 못하자 프레데릭 선제후에게 편지를 써서 루터를 ‘로마로 넘기거나 영지로부터 추방’하라고 위협 섞인 강권을 하였지만, 선제후는 루터를 보호하였다.
카예탄의 논리는 루터가 교황의 권위로 교령에 승복해야 하고, 따라서 면죄부에도 승복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교령이 성서에 위배되며 면죄부는 축재수단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고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의 공로와는 같을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현자 프레데릭 선제후(1486-1525). 교황과 황제로부터 루터를 보호하고 개혁이 자신의 영지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종교개혁을 촉진시켰다. 선제후가 루터와 그의 일에 대해 품었던 열심은 둘이 서로 만나거나 말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더욱 놀랍다.
▲ 슈팔라틴. 루터의 오랜 친구였던 그는 프레데릭 현자의 비서이며 궁정목사였다. |
루터 생존시의 세 명의 작센 선제후들. 현자 프리데릭(1486-1525), 불변의 신앙인 요한(1525-1532), 그리고 관대한 요한 프레데릭(1532-47). ▼ |
다음 해 초(1519년 1월) 교황청의 특별한 호의의 징표인 황금 장미를 가진 밀팃츠가 선제후에게 나타났다. 그는 선제후가 루터를 추방하라는 카예탄의 요구를 이미 거부한 것을 모르고 루터를 추방하거나 로마로 압송할 경우 선제후에게 있을 유익을 선전하였다. 그리고 루터를 만날 수 있도록 허용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이 요청에 따른 만남은 허락되었다. 회합을 가진 두 사람은 이제 이후로는 피차 공적으로 침묵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엑크가 침묵을 깨트리고 루터를 공격하자 루터는 동료인 칼슈타트와 함께 라이프찌히로 따라가 그와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1519. 7·4 -14). 잉골슈타트의 교수였던 엑크는 자신의 대학이 아닌 라이프찌히 대학을 교묘하게 비텐베르크 대학의 도전자로 끌어들였다. 이 두 대학은 오랜 경쟁관계에 있던 공작령의 작센과 선제후령의 작센을 대표하는 대학들이었던 것이다.
이 논쟁에서 루터는 구원받기 위해 교황을 인정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반박하였다. 게다가 콘스탄스회의(1414 - 18)가 후스를 잘못 정죄한 것을 들어 교회의 공의회조차도 과오를 범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교황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지상에서도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고 주장하였다. 엑크가 주장하는 “로마에의 순종”(Romana obedienia)보다 자신의 입장이 더 기독교적이고 참된 의미에서 카톨릭(보편적)이라고 확신했다.
이제 루터가 교황뿐만 아니라 공의회의 권위마저 부인하는 것으로 만천하에 드러나 교황과의 결렬은 공개적인 것이 되었다. 그래서 이 논쟁을 계기로 해서 루터는 작센의 게오르그 공작과 같은 이의 적수가 되었으나, 한편 그의 단호한 태도는 멜랑히톤 같은 이를 우군으로 얻었다.
루터가 라이프찌히에서 행한 설교의 표제면. 이 설교가 논쟁이 일어난 같은 해에 인쇄된 것을 볼 때에 얼마나 신속히 그의 설교가 전파되었는지 알 수 있다. ▶
▼ 라이프찌히의 플라이센부르크성에서 벌어진 라이프찌히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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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엑크. 엑크는 라이프찌히 대학의 후원자인 게오르그 공을 움직여 논쟁이 벌어지게 했다. 엑크와 루터는 이미 이 논쟁이전부터 논쟁 중에 있었다.그는 어디서나 어떤 주제로나 논쟁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는 전문적인 논쟁가였다.▼ |
라이프찌히 논쟁은 루터에 대한 기대도 증대시켰고 그에 대한 공격도 가속화 시켰다. 엑크는 라이프찌히 논쟁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루터의 출교에 대한 교황의 교서를 이끌어냈다. 1520년 6월 24일 발표된 교서(Exurge Domine, 주여! 일어나소서!)에서 교황 레오는 뉘우칠 수 있는 60일간의 말미를 주면서 이 기간 안에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그와 동료들을 모두 파문할 것이라 하였다.
교서는 루터의 작품 중에서 41개 발언들을 열거하면서 ‘이단적이고 위법적이며 거짓’이라고 정죄하면서 루터의 모든 저서를 불태울 것을 명령하였다.
루터는 자신의 책들이 루벵에서 불탄 사건 이후 그리고 파문 위협을 담은 교서가 아직 비텐베르크에 도착하기 전, 성(城)의 엘스터 문앞에서 학생들과 함께 교황의 교서 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 법전의 화형식을 12월 10일 거행했다. 이로써 루터와 로마 사이의 모든 다리도 불에 타 버렸다.
▲ 교황의 교서를 불태우는 루터와 동료들. 19세기의 그림.
◀ 메디치 가문출신의
교황 레오 10세(1513-21).
루터를 최종적으로 파면하는 교황의 교서 (Decet Romanum Pontificem, ‘로마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는 1521년 1월 3일 로마에서 공포되었다.
자신에 대한 파문은 루터의 영혼 깊숙히 상처를 내었다. 사실 루터는 면죄부 논쟁이 한창 진행 중일 때에도 교황에 전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는 면죄부의 오용들로부터 로마 교황을 보호하는 일이 바로 그 권위를 세워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교황청이 로마를 적그리스도에게 넘겨주었다는 확신이 서게 되자 그 때 루터는 비로소 교황청에 반격을 결심한 것이었다.
◀ 교황과 메디치 가문의 상징이 그려져 있는 파문교서의 표제면.
따라서 루터가 과거와의 관계를 끊은 것은 급작스레 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 관계에서 돌아선 것은 자기가 아니라고 하였다. 오히려 자기는 철저히 외면을 당하였으며 세 번이나 출교를 당하였다고 하였다.
“1518년 슈타우피츠는 수도원에 대한 순종의 서약으로부터 나를 풀어주면서 아우그스부르크에 혼자 내버려두었다. 그리고나서 교황이 자신의 교회로부터 나를 끊어버렸고, 마지막으로 황제가 그의 제국으로부터 끊어버렸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영접하셨다.” 마지막 말은 시편 27:10에 대한 암시이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고함”의 표제면. 초판 4000부가 두 주일 만에 매진되었는데 당시로서는 엄청난 숫자였다. |
한창 자신에 대한 파문이 진행되고 있던 종교개혁의 중대한 해인 1520년에 루터는 3편의 작품을 저술하여 발표하였다.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고함”은 8월에 썼고외부적인 개혁을 다룬다. 루터는 세속정부가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는 데 주도권을 취하도록 권유하였다. 영적계급이 세속계급보다 우월하다는 중세적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모든 세례 받은 자들은 제사장이라는 명제를 내세웠다. 한편 세례 받은 이들은 모두 제사장들(sacerdotes)이지만, 단지 목사들만이 교역자들(ministeri)이다. 루터는 교황주의가 세 개의 ‘벽들’을 세워 개혁을 막으려 했다고 주장했다. 1. 영적 권위자들이 세속 권위자들보다 우월하다는 것 2. 교황만이 성경의 최종적 해석자라는 것 3. 교황이 교회회의들보다 우월하다는 것 “만인 제사장설”은 이 벽들을 모두 허물어 버렸다. “교회의 바벨론 포로”는 10월에 저작됐는데,신학 자체의 중요한 개혁, 특히 성례전 교리 및 집행과 관련된 개혁을 다룬다. 그는 로마 교황청이 그 권력의 근거로서 ‘일곱 성사’를 창안하고 이용해 왔다고 비난하였다. 그는 특히 카톨릭의 성만찬론 비판에서 세 가지 ‘포로 상태’를 말한다. 1. 평신도에게 포도주를 금하는 것 2. 화체설 3. 미사가 희생제물이라는 것 한편 루터는 성사의 수를 일곱에서 세례와 성만찬,두 개의 성례전으로 줄였다. “크리스천의 자유에 관하여”는 11월에 쓰여졌다.두 개의 극단적인 명제를 다룬다. 1. 크리스천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누구에게도 종속되어 있지 않다 2. 크리스천은 전적으로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종속되어 있다. 이 이중적 명제는 지금까지 바울의 자유 이해를 표현한 가장 성공적이고 적합한 말이다. 이 논문이 ‘크리스천의 삶 전체를 간략한 형태로 포함하고 있다’고 규정짓는 루터는, 복음이 주는 절대적인 자유와 이웃을 향한 절대적인 섬김의 모습 사이에는 전혀 갈등이 없다고 설파하였다. |
▲ “교회의 바벨론 포로”의 표제면. 루터는 이 책을 성례전에 대한 더 기본적이고 자세한 논쟁의 서곡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 |
▲ “크리스천의 자유에 관하여”의 표제면. 루터는 밀팃츠의 제안에 대한 응답으로 썼다. |
보름스시. 폭이 넓은 라인강을 뒤로 하늘을 찌를듯이 서 있는 망루들이 보인다. |
교황의 파면에도 불구하고 프레데릭 현자를 선두로 독일의 영주들은 보름스 국회에서 루터가 자신을 위해 변호할 기회를 얻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카를5세 황제는 루터에게 신변의 안정 보장을 약속하면서 루터에게 1521년 3월 6일, 초청장을 보내었다. 황제의 안전 보장은 믿을 바가 못되었다. 선제후의 궁전에서도 의견은 분분하였다. 결국 갈 것인지 말 것인지는 루터가 선택할 몫이었다. 루터는 단호한 마음을 가지고서 보름스로 갔다. “우리는 보름스에 입성할 것이다. 지옥의 모든 문들과 하늘의 모든 권세들이 막으려고 할지라도 … 거기서 우리의 사명은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다.” 슈팔라틴도 그의 결연한 모습을 감지했다.“그는 보름스로 가려고 한다. 그곳의 지붕위에 있는 기왓장의 수만큼이나 마귀들이 있을지라도… .”보름스에 1521년 4월 16일 도착한 루터는다음 날 첫 번 청문회에 참석하였다. 트리에르 대주교의 고문관은 루터에게 두 가지 질문에 답하도록 물었다. 1. 그대의 이름으로 출판된 이 책들을 그대의 것으로 인정하는가? 2. 그대는 이 책들에서 쓴 내용을 철회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첫 번 질문에 루터는 자신의 책들이라 시인하고 자신이 쓴 책들이 더 있다고 대답했다. 두번째 질문에 루터는 하루의 여유를 구했다. |
보름스로 들어가고 있는 루터. 1881년 작품. 이 당시 보름스의 인구는 약 7,000명 정도였는데 1521년 1월 이후에는 국회를 구경하려는 방문객들의 숫자가 도시 인구의 배에 육박했다. | |
황제 앞에서의 말틴 루터. 국회가 끝난후 불과 몇달 안되어서 보름스에서의 루터의 답변과 국회의 진행과정을 담은 소책자가 인쇄되어 퍼졌다. 표제면의 목판화가 국회의 장면을 묘사하는 것은 진기한 일로 당시에는 당대의 사건을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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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가 비엔나의 요하네스 큐스피니아누스에게 쓴 라틴어 편지 |
▲ 그의 모든 직함이 상세하게 나열되어 있는 카를 5세의 초상화. 막시밀란 황제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여 37년간(1519-56) 통치한 그는 안팎의 위협들에 직면하여 제국의 통일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긴박한 이슬람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새로운 복음적 신앙을 막지는 못하였다.
루터는 4월 17일 저녁에 비엔나의 요하네스 큐스피니아누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날에 있었던 일과 다음 날 있을 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이 순간 나는 황제와 사절들 앞에 서서 철회할 것인가하는 질문을 받았다 … 내일 나는 철회에 대한 답변을 할 것이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요청은 받아들여졌지만 이 하루 이상은 허락이 안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께서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한 영원히 한 글자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다 ….”
다음날(4월 18일) 루터는 황제앞에서 담대히 대답했다.
“성서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교회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 황제 앞에서의 루터의 두 번째 발언 기회. 바닥에 쓰여진 글씨는 루터의 변호인이 소리친 “루터의 책들의 제목을 거명해야 합니다”(Intitulentur libri)와 나중에 일부 첨부된 “나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Hier stehe ich, ich kan nicht anderst, Got helffe mir, Amen)이라고 적혀 있다.
카를 황제는 루터에 대한 신분 안전 보장의 약속을 지키려 했다. 그래서 루터가 3주 이내로 비텐베르크로 돌아갈 것과 도중에 설교와 저술을 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다.루터는 아무도 모르게 동료들과 함께 보름스를 떠났다. 길을 가던 중 루터는 프레데릭 현자가 미리 주선한대로 위장 납치되어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갔다. 여기서 루터는 게오르그 기사 행세를 하며 10개월간 지냈다.
한편 루터가 보름스를 떠난 후 황제는 보름스 칙령을 통해서 루터를 법에서 추방된 자라고 선언하였다. 이제 법적으로는 누가 그를 살해한다고 해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그의 가르침은 파리, 루뱅, 콜로뉴 대학 신학부로부터도 정죄당하였다.
◀ 루터가 납치되는 장면을 표현한 그림.
보름스 칙령의 본문. 루터를 제국 법의 보호에서 제외한 내용을 담고 있는 칙령은 1521년 5월 26일자로 공포되었다. ▶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성에서 ‘강제된 휴가’를 어떻게 지내야 할지 알았다. 그는 이 기간을 성경 주해, 카톨릭 학자들과의 서면 논쟁, 논문 저술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 번역에 사용하였다. 이 성경은 1522년 9월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9월 성경(September Bible)’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 게오르그 기사가 된 루터. 바르트부르크 성에 머무는 동안 루터는 이렇게 가장하고서 지냈다.
독일어 번역 성경은 루터 이전에도 있었으나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하고 나서야 비로소 성경은 독일에서 진정한 국민의 책이 되었다. 그는 번역 일을 훌륭히 수행하여 ‘독일의 나이팅게일들이 로마의 방울새들 만큼 노래를 아름답게 부를 수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주고자 했다. 이것을 위해 보통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하려고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슈팔라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성서 번역의 원칙을 알 수 있다.“우리들은 당신에게 때때로 적합한 단어를 물어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단순한 말을 가르쳐 주십시오. 궁정이나 성 안에서 쓰는 말은 사절합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단순성으로 유명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르트부르크성의 루터의 서재.
여기서 그는 신들린 사람처럼 하루에
1500단어 이상을 번역하여
11주 만에 완료하였다. ▶
변장한 루터가 비텐베르크를 잠시 방문하고 있을 때 루터의 동료들은 크라나흐를 떠볼려고 지금 방문중인 유명한 기사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크라나흐같은 예술가적 눈도 루터를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머물고 있는 동안 비텐베르크에서는 그의 대학교수 동료인 칼슈타트가 교회를 무력으로 개혁하려고 하였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는 세 명의 ‘츠비카우의 예언자들’도 합세를 했다. 성만찬에서는 그때까지 평신도에게 거부되었던 포도주도 제공되었으며, 혁신적인 예배의식과 예복이 도입되었고, 미사를 거행하던 수도사들은 돌에 맞았으며, 성상들은 교회에서 제거되고 불태워졌으며 소요가 일었다. 루터는 믿음의 일로서 시작한 자신의 일이 오해받고 위협당하고 있다고 느끼자, 12월 중 비텐베르크를 비밀리에 방문하여 5일간 머물다 돌아갔다. 이 때의 느낌을 슈팔라틴에게 쓴 편지에서 루터는 저들이, 복음이 주는 자유를 강제 조항으로 만들었다고 비난하였다. “나는 어느 누구도 폭력과 피흘림을 가지고서 복음을 위해 싸우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말씀을 통해 세상은 정복되며, 말씀을 통해 교회는 구원받으며, 말씀을 통해 교회는 부흥한다.” 소요가 계속되자 루터는 자신의 망명지를 떠나 1522년 3월 6일, 비텐베르크로 돌아와 교회에서 8일간 연속해서 설교하였다. 말씀만이 일을 해야 한다는 그의 원칙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안녕과 질서가 복구되었던 것이다. “요약하여, 나는 말씀을 설교하리라. 나는 말씀을 말하리라. 나는 말씀을 적으리라. 그러나 나는 어느 누구도 강제하거나 강요하지는 않으리라. 믿음은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지 강제되거나 강압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후의 루터의 모습 |
비텐베르크의 소요 문제를 복음적으로 잘 해결한 루터는 개혁을 위해 같이 힘쓸 팀을 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이미 보름스 국회 이전부터 진행되었었다. 성서 강해를 하는 동안 루터는 “비텐베르크 신학”의 진리를 동료 교수들에게 확신시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성서를 강조하는 이 학파는 작센 선제후령의 경계를 넘어 바젤, 뉴렘베르크, 스트라스부르크 등지의 인문주의자들에게까지 호소력을 보였다.
◀ 칼슈타트. 루터는 그의 급속한 개혁들을 새로운 ‘유다’의 일이라고 간주하였다. 이는 그가 복음이 주는 자유를 강제 조항으로 만들어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켰기 때문이었다.
이 첫번째 국면에서 같이 활약한 주인공들은 믿기 어려운 팀을 구성하였다. 루터보다 비텐베르크 대학에 먼저 온 칼슈타트는 스콜라학자풍의 교수로 루터의 기본 이념을 실질적인 문제들에 적용시키며 개혁운동을 이끌었으나 그 과격성으로 인해 루터와의 관계가 결렬되었다. 루터보다 훨씬 연하(나이가 어렸던)였던 멜랑히톤은 신학자라기 보다는 고전어 학자였지만 1521년에 루터의 신학을 ‘신학 총론(Loci Communes)’라는 체계적인 형태로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루터가 아직도 바르트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교수로 온 부겐하겐은 루터의 ‘교회의 바벨론 포로’를 처음 읽었을 때 그를 역사상 가장 큰 이단자로 여겼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본 결과 “전 세계는 눈이 멀었구나. 진리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이 사람뿐이다”고 탄복하게 되었다.
◀ 부겐하겐. 북부 독일의 종교개혁을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덴마아크과 같은 먼 지역에까지 ‘빌려준’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루터가 그를 가장 높이 평가한 이유는 루터가 매일 그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였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영적으로 어두웠던 어떤 순간에 부겐하겐이 자신에게 들려준 말을 회상하였다. “하나님은 정말로 자신에게 묻고 있을 것이오. ‘내가 이 사람(루터)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그에게 그렇게도 많은 최고의 선물들을 주었는데도, 이제와서 나의 은혜를 의심하는구나’” 루터는 계속했다. “내게 이 말은 엄청난 위로가 되었다. 마치 내 마음 속에서 메아리되어 울리는 천사들의 목소리 같았다.”
비텐베르크 광장. 가운데에 루터와 멜랑히톤의 동상이 서 있다. 그 뒷편으로는 시 교회가 보인다. ▶
종교개혁은 요원의 불길처럼 제국의 각지로 번지기 시작하였다. 1522년과 1523년을 거치면서 이 운동은 신속히 퍼져나가면서 점차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524년 이후로 농민전쟁과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은 개혁의 속도를 지연시키고 개혁의 일부 추종자들을 떨어져 나가게 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은 복음주의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계기도 되었다.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루터는 그가 언어 학자로서는 훌륭하나 신학자는 될 수 없으며, 모세처럼 모압에 머무르면서 결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인물이라고 꿰뚫어 보았다. ▶
루터는 당시 영국의 왕 헨리를 위시하여 많은 대적자들을 갖고 있었다. 이 때 인문주의의 거두인 에라스무스도 루터에게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히라는 압력을 사방으로부터 받고 있었다.
그는 루터와의 논쟁을 시작할 때 교황제, 공의회의 권위, 신앙과 칭의 혹은 성례전 교리 등과 같은 일반적으로 논의되던 주제들을 선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지의 자유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 우리는 화가들이었던 크라나흐 부자 덕분에 종교개혁과 그 지도적 인물들의 거의 모든 그림을 가지고 있다. 초기의 지지자들 가운데 둘러싸인 루터와 오른쪽으로부터 네번째에 에라스무스가 보인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와 논쟁의 반대편에 있긴 했으나 그를 병든 세상의 ‘엄격하고, 호된 의사’라고 내린 평가는 적중한 것이었다.
◀ 영국의 왕 헨리 8세. 신학 교육을 받은 그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 대한 비판서를 쓰고서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여기에 대해 루터는 그가 문제의 핵심을 파악했다고 평가했다. “오직 선생만이 문제의 중추를 꿰뚫어 봄으로써 목에 칼을 들이대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당신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에라스무스의 ‘자유 의지론’에 대항하여 루터가 ‘노예 의지론’을 강조한 것은 오로지 그 때에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확실성을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즉, 에라스무스의 ‘자유 의지론’과 루터의 ‘노예의지론’은 두 개의 서로 다른 기독교관을 나타낸다. 에라스무스는 윤리적인 삶의 개선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에 회의론자의 입장을 취하나 루터는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 죽느냐 사느냐에 대한 질문 밖에는 관심이 없다. 확신하지 않으면 어떻게 믿음이 있고 신앙이 있을 수 있는가? “성령은 회의론자가 아니다.”
▲ 멜랑히톤이 펜을 들고 대기하는 동안 성서를 잡고 로마 교회에 대항하고 있는 루터의 그림.
루터의 개혁 운동은 1517년- 20년 사이에, 카톨릭과의 단절 과정을 겪었으나, 한편 개혁 진영 내부 세력들과의 차별화 과정도 겪었다. 먼저 칼슈타트, 뮨처,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급진적 개혁운동과의 차별화(1521-25), 다음으로는 에라스무스와 인문주의자들과의 차별화(1524-25)과정이 있었다. 이러한 과정들은 종교개혁의 급속한 발전을 막는 결과를 가져오긴 했으나 다른 한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복음이 열광주의적 신비주의라든가, 인문주의적 계몽, 그리고 사회정치적 급진주의로 오해되는 것을 막는 결과를 가져왔다.이 과정들에 있어서 공통점은 루터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였다는 것이다. 전통을 성경 위에 올려 놓은 로마 카톨릭에 대해 루터는 ‘성서만으로’를 주장하였고, 열광주의자들의 주관적인 계시이해에 대해서는 성경의 객관적인 말씀을 주장하였으며,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에 대해서는 성경이 말하는 확실성을 주장하였고, 복음을 정치적 운동에 오용하는 농민들에 대해서 복음은 오직 양심만을 상대한다고 하였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만 된다면 그 결과는 저절로 온다고 확신하였다.“나는 면죄부와 모든 교황주의자들을 반대하였으나 결코 무력은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썼을 뿐이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잠을 자거나 친구들인 립과 암스도르프와 함께 비텐베르크 맥주를 마시는 동안 말씀은 교황을 철저히 무력화 시켰다. 그 어떤 군주나 황제도 그 정도의 해를 입힐 수 없었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말씀이 다 했다.”
루터는 1525년 6월 13일 결혼을 했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신부는 16년 연하의 전직 수녀인 카타리나 폰 보라(1449 - 1552)였다. 루터는 자신이 결혼하려는 목적이 늙으신 아버지에게 손주를 안겨드리기 위해서, 또한 결혼을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설교한 것을 몸소 실천하면서 본을 보이기 위해서라고 하였다.“나는 내가 가르쳐 온 것을 실천으로 확증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복음으로부터 오는 그렇게 커다란 빛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소심한 이들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행동을 뜻하셨고 또 일으키셨다. 왜냐하면 나는 ‘사랑에 빠졌다’거나 욕정으로 불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한다.”
◀ 1525년, 루터의 결혼은 독신 생활을 크리스천의 이상으로 본 일천년 동안의 전통을 깨는 사건이었다. 26살의 카타리나 폰 보라는 1523년, 종교개혁의 이상에 감동을 받고 시토회의 님쉔 수도원을 동료들과 함께 탈출하였었다. 루터는 그녀를 다른 이들에게 소개해 주었으나 그녀는 루터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결혼 1년 후의 루터와 아내 폰 보라.
그러나 루터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모두 다 반대를 하였다. 동료들은 루터가 결혼하면 온 세상과 마귀가 웃을 것이며 그 자신이 그동안에 이루어 놓은 일을 다 헛수고로 만들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특히 농민전쟁의 와중에서 그의 결혼선언은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종교개혁과 함께 복음이 전파됨으로 해서 사탄이 마지막 공격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농민전쟁도 복음을 독재 체재로 왜곡시키려는 사탄의 공격이라고 보았다. 지금까지 교황은 세속권력에 대한 우위권을 주장하였는데, 이제 농민들은 정치적 권력을 얻기 위해 복음의 이름으로 칼을 손에 쥐었다.
이렇게 종말이 왔다고 생각했을 때 루터는 다른 세상만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바로 결혼하였다. 하나님이 오시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살라고 하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루터는 결혼을 하는 것이 원수 마귀를 대적하는 한 방법이라 믿었다. “나는 내 결혼식으로 천사들을 웃게 하고, 마귀들을 울게 했다.”
루터와 카타리나의 결혼은 성공적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순수한 사랑이 꽃피었다. “나는 캐티(카타리나의 애칭)를 프랑스와 베네치아와도 바꾸지 않겠다. 왜냐하면 첫째, 하나님이 그녀를 내게, 나를 그녀에게 주셨기 때문이며, 둘째 다른 여자들은 보통 나의 캐티보다 허물이 더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 - 물론 그녀가 허물이 있긴 하지만, 훨씬 더 큰 덕목들이 가려주니까 - 이고, 셋째, 결혼과 관련된 믿음인 신실함과 존경을 그녀가 지키기 때문이다.”
둘은 슬하에 3남 3녀 - 요한네스(1526), 엘리사벳(1527), 막달레나(1529), 말틴(1531), 파울(1533), 마가렛(1534) - 을 두었다. 루터는 첫째 아들은 군인으로, 둘째는 학자를, 셋째는 농부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모두 다르게 되었다. 첫째는 법률가가 되어 나중에 바이마르 궁정의 고문으로 일했고, 둘째는 신학을 공부하였으나 목사로 일하지는 않았고, 셋째는 의학을 공부하여 유명한 의사가 되었다.
한편 루터의 집으로 변한 ‘검은 수도원’에는 그의 가족외에도 다른 이들도 많이 같이 살았다. 카타리나의 결혼하지 않은 이모, 루터 쪽의 부모 잃은 조카와 질녀들도 여럿 있었으며, 가난한 학생들도 하숙하였다. 게다가 개혁자를 만나러 원근각처에서 오는 수많은 손님들로 집이 늘 붐볐다.
◀ 반은 집, 반은 기숙사. 비텐베르크에 처음 와서부터 루터는 이 어거스틴 은둔자 수도원에 머물렀다. 종교개혁의 결과로 수도원이 해체된 후 선제후 프레데릭은 이 집을 루터에게 주었다. 이 집에서 모두 30명까지 살았다.
▶ 가족과 함께 류트를 켜며 노래부르는 루터. 1866년 그림. 루터 부부는 깊은 종교적 경건과 화목한 분위기 그리고 따뜻하게 손님을 대접하는 크리스천 가정을 이루었다. 루터는 ‘아이, 교회, 부엌’에 여자를 제한하는 전통적인 견해에 반대하여, 남자가 기저귀 빨고 잠자리를 정돈하는 것을 사람들은 비꼴테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천사와 피조물들과 기뻐하신다’고 하였다. 한편 자상한 아버지였던 루터는 엘리사벳이 8개월에 죽었을 때와 막달레나가 13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깊은 슬픔에 잠겨야 했다.
수도승으로서의 혹독한 고행, 아우그스부르크, 보름스, 바르트부르크에서 보냈던 압박의 시간들로 인해 루터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통풍, 결석, 소화불량, 두통, 심장 질환, 중이염 등 만성질환에 시달리던 그의 병이 1527년에는 더욱 심각해져 설교도 중단해야 하는 일까지 생겼다. 8월에는 설상가상으로 전염병이 비텐베르크를 휩쓸었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적인 위험들은 루터의 우울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 루터는 전염병을 피해 먼 곳으로 피신해 있던 멜랑히톤에게 또 다른 병에 걸렸노라고 편지를 썼다.“나는 벌써 한 주간 이상을 죽음과 지옥에서 헤매이고 있네. 온 몸은 고통에 빠져 있고 지금도 떨리고 있네. 그리스도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아서 나는 절망의 폭풍우 아래에서 신성모독의 지경까지 이르러 고통 당하고 있다네.”
이러한 시련의 한가운데에서도 자비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루터의 신뢰는 상실되지 않았다. 그의 확신은 외적인 안녕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찬송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바로 이러한 배경하에서 만들어졌다. 루터는 궁극적으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장조로 된 위풍당당한 곡조에 실었다.
▼ 루터가 쓴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의 복사본 원고. 이 곡은 불후의 찬송가가 되어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영어 번역만도 65개 이상이 있다.
3절 악마들로 가득찬 이 세상이 우리를 위협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노라, 하나님이 그의 진리가 우리를 통해 승리하도록 뜻하셨으니. 소름끼치는 어두움의 왕? 우리는 떨지 않노라. 그의 분노를 우리들은 참을 수 있으리. 그의 운명은 정해졌도다. 작은 한 말씀이 그위에 덮치리.
4절 그 말씀은 이 땅의 세력들위에 머무르시나니, 이들에게 감사치 말지니라. 성령과 은사는 우리의 것, 우리 곁에 계신 그를 통하여. 재물과 친척, 그리고 이 죽을 목숨도 사라지게하라. 그들은 몸을 죽이지만, 하나님의 진리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 그 나라 영원하리라.
병마와 우울증과 싸우면서도 루터는 교회 방문길에 나섰다. 1527부터 28년까지 작센 지방의 교회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시찰하는 동안 발견한 교인들의 영적 무지는 충격적이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카톨릭으로 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복음의 자유가 부여하는 도덕적 책임을 깨달으며 지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방문에서 돌아온 루터는 교인들의 교육을 위해 ‘소교리문답서’와 ‘대교리문답서’를 썼다. ‘소교리문답서’는 가정에서 어른과 아이들 모두가 함께 모여서 공부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고, ‘대교리문답서’는 특히 어른과 교역자들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교리문답서들은 전 성경의 요약으로, 일치서로서 ‘평신도의 성경’이라고 불리어졌다. 주제의 배열에 있어서도 복음적 성경관을 다루고 있다. “구원을 위해 세가지가 중요하다. 우선, 십계명을 통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두번째로 사도신조를 통해, 자신의 능력으로는 해야할 것을 하지 못하고, 또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알게 될 때 어디서 중요한 도움을 구하고 찾아야 할지 알아야 한다. 세번째로 주기도를 통해, 이 힘을 어떻게 구하고, 찾고, 얻어야 할지 알아야 한다.”
루터는 자신도 박사이며 설교자이지만 교리문답을 배우는 어린아이같이 행동한다고 하였다. 곧 아침과 하루 어느 때이든지 시간이 날 때마다 십계명, 주기도, 사도신조, 시편 등을 읽고 암송하였다.
▲ ‘소교리문답서’의 표제면. 책으로만 아니라 벽에 걸 수 있도록 플라캇으로도 인쇄되어 나왔다. 루터는 자신의 다른 책들은 다 불태워져도 좋지만 ‘소교리문답서’는 ‘노예 의지론’과 함께 예외라고 할 정도로 애지중지하였다. ‘소교리 문답서’는 짧고 간단명료한 형식으로 수세기에 걸쳐 사람들이 복음적 신앙에 있어서 중심되는 의미를 깨닫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
▲ 루터가 ‘독일 교리문답서’라는 이름으로 출판한 ‘대교리문답서’의 표제면. ‘대교리 문답서’는 루터 자신이 썼었던 교의학적 기본 문제들을 가장 포괄적으로 개관하고 있다. |
루터와 그의 동료들이 독일에서 개혁을 진행하고 있는 동안 스위스의 독일어 사용지역에서는 쯔빙글리(1484-1531)가 개혁을 주도하고 있었다. 루터의 영향을 받았지만 인문주의자였던 그는 기독교에 대한 이해, 특히 성만찬에 대한 견해가 달랐다. 쯔빙글리에게 있어서 성만찬은 단지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행위에 불과했으나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임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성만찬에 대한 논쟁은 이미 1524년 이후로 여러 신학자들 간에 진행되어 왔었는데 이러한 신학적 분열은 개혁 진영의 분열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헷세의 필립공은 신학의 일치를 이루려 1529년 10월 1일부터 나흘간, 마르부르크 회담을 주선하여 신학자들을 초청하였다. 신학의 일치가 더욱 요청된 이유는 그동안 잠정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 1526년의 슈파이어 국회 결정이 3년 뒤에 뒤집어져 일부 복음주의 영주들이 ‘저항’(프로테스탄트 라는 교회 이름이 여기서 유래)의 글을 올린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마그데부르크의 회담에서 신학자들은 복음주의 신앙을 대표하는 ‘15개 조항’중 대부분에 의견 일치를 보았으나 마지막 조항의 마지막 부분인 성만찬에서 ‘주님의 참 몸과 참 피가 떡과 포도주 안에 실재로 임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었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사의 전 과정을 바꾸어 놓았을 개신교 동맹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 마르부르크 회담이 열린 방. 루터는 회담 중 책상 위에 라틴어로 ‘hoc est corpus meum(이것은 내 몸이라)’이라 쓰고 천으로 덮은 다음 간혹 들춰 보면서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임재한다는 믿음을 고수하였다.
▲ 마르부르크 성. 헷세의 필립이 이곳에 세운 대학(1527년)은 그 시초부터 프로테스탄트주의 정신을 기초로 운영된 첫 독일 대학이다. |
▲ 스위스의 개혁자 울리히 쯔빙글리. 성만찬에 대한 그와 루터 사이의 의견의 불일치는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
한편 카를 5세는 이듬해 개신교도들과의 논쟁을 종식시키려 1530년 6월 20일부터 11월 19일까지 아우그스부르크국회를 소집하였다. 모든 것이 법과 정의에 따라 진행될 것이라는 약속에 따라 작센의 선제후인 요한은 소집에 응하면서 먼저 루터와 일단의 신학자들로 하여금 국회에서 제출할 “토르가우 조항”을 작성케 하였다.
국회가 진행되는 동안 국외 추방자로서 참석할 수 없는 루터는 작센 영지 최남단에 위치한 코부르크 성에서 머물면서 국회에서 진행되는 일을 편지로 보고 받았으며 복음적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도록 유약한 멜랑히톤을 독려하였다.
멜랑히톤은 ‘토르가우 조항’등에 기초하여 루터란 신앙의 요약인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다. 6월 25일 낭독된 고백서는 복음주의 교회 교리의 주요 항목들을 21개 조항으로 요약하였고, 다음으로 고쳐져야 할 카톨릭의 오용과 악습들을 열거하였다. 고백서를 읽은 루터는 멜랑히톤이 발을 ‘사뿐히 내디뎠다’고 하면서도 고백서를 “우리의 고백” 이라고 인정하였다.멜랑히톤은 루터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백서 작성을 할 때 “우리는 지금까지 당신의 권위를 따랐습니다.”고 분명히 밝혔다.
◀ 아우그스부르크 국회. 9년 전에는 단 한 명의 수도승이 황제와 제국 앞에서 용감하게 고백하였었는데, 이제는 핍박의 상황에 있는 복음주의 교회가 담대히 신앙을 고백하였다.
코부르크 성. 루터는 아우그스부르크에서가장 가까운 이 곳에서 다섯 달 머물면서 거의 매일같이 국회에 나가 있는 동료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남자답게 행동하라!”고 격려하였다. ▶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멜랑히톤은 루터의 가장 가까운 동료였으며 친구 중 하나였다. 그는 당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히브리어 학자인 로이힐리의 조카로서 석사학위를 17세에 받고, 21세때인 1518년에 비텐베르크에 희랍어 교수로 부임하였다.
루터가 ‘여윈 새우’라고 부를 정도로 병약한 학자의 전형이었던 그는 신학적으로 루터에게 의존적이었다. 그는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성에 머무르고 있을 때이든지, 9년 뒤 코부르크성에 머무를 때이든지, 그리고 루터의 사후에도 마음 든든한 선배를 늘 그리워하였다.
‘조용한 개혁자’ 필립 멜랑히톤. ▶
한편 ‘비텐베르크의 에라스무스’라는 별명도 갖고 있는 그는 냉철한 조직력의 소유자로서 훨씬 더 즉흥적인 루터와 구별이 되었다. 루터는 멜랑히톤의 방법론적인 신학적 재능이 없었더라면 자신의 저술들은 장황한 말 때문에 쓸모 없게 되었을지 모른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하였다. 멜랑히톤은 종교개혁 신학이 오래 지속될 수 있는 형태로 다듬어 표현하였다. 이때문에 그는 후대에 ‘독일의 교사’로 불리어 왔다.
▲ ‘조용한 개혁자’ 필립 멜랑히톤. |
▼ 그가 연구하고 집필하던 방. |
분주한 활동을 하면서도 루터는 번역 작업을 계속 하였다. 전체 성경의 출판은 신약 성경의 출판 이후 12년이 걸렸다. 루터는 성경번역을 위해 팀웍이 중요한 것을 알고는 자신이 ‘산헤드린’이라고 명명한 전문가 팀을 식사 전에 초대하여 번역의 수정작업을 하였다. 루터가 번역에 들인 공은 상당한 것으로서, 한 번은 슈팔라틴에게 부탁하여 계시록 21장에 나오는 보석들의 이름과 색상을 알려달라고 하면서 한 번 직접 볼 수 있도록 궁정에서 빌려와 달라기도 하였다. 또 한 번은 여러 마리의 양을 잡아 푸줏간 주인에게 보여 주면서 양의 각 부위의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 걸작을 번역하고 있는 루터와 동료들. 루터는 번역위원회의 구성에 있어서도 효시가 되었다. 1534년에 출판된 ‘루터 성경’은 독일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였다. “나는 아무도 모세가 유대인이라고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그를 아주 독일인으로 만들었다.” 번역된 성경은 독일 언어 뿐만 아니라 문학 발전의 기초를 놓았다.
성경에 대한 열심과 진지한 태도는 그의 마음 속에 성경에 대한 겸손한 태도와 함께 자리잡고 있었다. 신학박사로서 34년간 지내면서 성경을 번역하고 강해한 그였지만 성경의 깊이와 풍부함에 압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터의 사후 그의 주머니 속에서 발견된 종이 쪽지에 적혀있던 글은 이것을 증명해준다.
“어느 누구도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은 선지자들과, 세례 요한, 그리스도, 사도들과 함께 100년 동안 교회를 통치하기 전까지는 성서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믿지 않도록 하라. 이 신성한 Aeneid(성서)를 더럽히지 말고 그것에 머리 숙이며 그 자취에 존경을 표하라. ‘우리는 거지들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첫번째 완역 독일어 성경의 표지면. 루터는 사람들이 자신의 책들 대신 성경을 읽으라고 추천하였다 ▶
루터의 집에서 오후 5시에 나오는 저녁 식사는 쫓겨난 목사들, 수녀원을 도망친 수녀들, 정부 관리들, 외국의 방문객들, 그리고 루터의 비텐베르크 대학 동료들도 같이 나누곤 하였다. 대접을 잘하는 집안 분위기에 맞추어 활발한 대화가 오고 갔다. 이 때의 대화를 일부 제자들이 받아적은 것이 ‘탁상담화’이다.
탁상 담화는 본래 출판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개인용으로 기록되었다. 따라서 기록자 각자의 관심거리를 적었고, 그들간에 차이도 있지만 루터의 직접적인 발언이라는 점에서 16세기의 역사를 이해하고 루터의 인격과 생활과 그의 업적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역사적 문헌이 된다.
탁상 담화에서 루터는 많은 종류의 주제들을 다루었다. 그는 일상사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현상들 가운데에서도 신앙의 심오한 진리를 꿰뚫어 볼 줄 알았으며 그것을 특유의 직설적인 언변을 구사하여 표현하였다.
작은 새들에 대한 관찰에서 루터는 염려 없는 삶의 태도를 배웠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작은 새들을, 별로 소용없는 놈들까지 포함하여, 먹이시기 위해 얼마나 많은 비용을 들이시는지 계산할 수 없다. 내 추측에 까마귀, 수탉, 갈가마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참새들을 먹이시는 데 프랑스 왕의 한 해 수입 보다 더 들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 중에 누가 자기 몸을 생각하여 무엇으로 옷을 입힐까 염려하겠느냐.
▲ 비텐베르크의 루터의 집 내실. 황소 눈 모양의 창문, 창문가의 좁은 의자, 무겁고 오래된 식탁, 색칠한 벽, 이 모든 것은 루터의 ‘탁상담화’를 웅변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루터는 또한 먹이를 응시하는 개의 모습에서 하나님께 대한 흔들림 없는 기도의 본을 배웠다.“아, 저 개가 고기를 쳐다보듯이 내가 기도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개의 모든 생각은 고기 한 점에 집중되고 있다. 개는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거나, 원하거나,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흔들림 없이 기도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에 낙심을 하고 만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은 루터는 자신이 태어난 아이슬레벤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일기 63세 였다(1546년 2월 18일). 이 때 그는 만스펠트의 백작들 사이에 있었던 법적 논쟁을 중재하러 가 있는 중이었다.
루터가 사망하던 밤 의사와 그의 친구들이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루터는 요한복음 3장16절을 계속 암송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독생자를 주셨으니…” 새벽 세 시가 가까워 요나스 박사는 마지막이 이른 것을 알고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선생님께서 가르치신 교리와 그리스도 위에 굳건히 서서 돌아가시겠습니까?” 루터의 몸이 움직이면서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예.”
루터의 유해는 비텐베르크로 옮겨져 성(城)교회에 안치되었다.
◀ 멜랑히톤의 책에 그려진 루터의 마지막 초상. 그는 루터에 대해 몇 마디를 적어 넣었는데,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그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습니다.
루터가 죽음의 침상에서 드린 기도 “오 나의 하늘 아버지시며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여. 내게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교황과 모든 악한 자들은 그를 욕하고 핍박하고 모독하였으나 나는 그를 믿고, 선포하고, 고백하고, 사랑하고 찬양하였습니다. 내 주 그리스도시여, 내 가난한 영혼을 당신께 의탁하나이다. 오 하늘 아버지여, 비록 나는 이 육신을 떠나고 이 생명으로부터 탈취를 당하나 당신 곁에 영원히 머무를 것임으로 아무도 당신의 손에서 나를 탈취하지 못할 것을 확실히 아나이다.” |
멜랑히톤의 추도사 말틴 루터 박사! 오 교황이여, 살아서 나는 그대의 재앙이었고, 죽어 나는 그대를 멸망시키리.그는 1546년에 사망했습니다.그는 63년간 살았습니다.64번째 해는 그의 죽음의 해였습니다.그가 죽음을 만났을 때는 2월 18일이었습니다, 밤 두시와 세 시 사이에.그 달의 22일 그는 비텐베르크 교회 안에서 장사 지냈습니다. 그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 있습니다.
▲ 루터의 장의 행렬. |
▲ 루터의 관. 숨을 거두기 이틀 전 루터는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다. “내가 비텐베르크 집으로 돌아가면 관 속에 누워 구더기들이 뚱보 박사를 먹도록 내 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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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자신의 문장(紋章)을 만들어 “내 신학의 상징” 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전 종교개혁 가르침의 요약으로 불릴 수 있는 설명을 적었다.
둘레에 새긴 글자는 크리스천 신앙의 처음이자 마지막 확신을 담고 있다.“Vivit(그가 사신다)”
루터의 장미. 루터가 ‘나의 신학의 상징’ 이라고부른 문장. ▶
“우선 자연색의 심장안에 검은 십자가가 있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이를 믿는 신앙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나에게 상기시켜 준다. 마음으로부터 믿으면 의롭게 되기 때문이다. 비록 검정 십자가로써 육신을 죽이고 고통을 주지만 이것은 심장의 색조를 그대로 남겨 두고 우리의 본성을 파괴하지 않으며 죽음을 가져오지 않고 생명을 보호한다.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이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기 때문이다.
이 심장은 흰 장미의 중앙에 끼워져 있으면서 믿음이 기쁨, 위로, 평화를 가져옴을 보여준다.
요약하여, 믿음은 우리를 화려한 장미의 뜰로 인도한다. 이 평화와 기쁨은 세상의 것과는 다르기에 장미의 색은 희고, 붉은 색이 아니다. 흰색은 영들과 천사들의 색이기 때문이다. 장미는 하늘색 뜰의 배경 속에 있으면서 영과 믿음의 그러한 기쁨이 앞으로 도래할 천상의 기쁨의 시작임을 보여준다. 이 기쁨은 이미 지금 우리의 기쁨속에 있으며 소망으로 감싸여져 있으나, 아직 확연히 드러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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