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2·6교실/교회사2 교실

[스크랩] 루터 종교개혁의 정체성 확립

류성련 2014. 9. 4. 22:28

루터 종교개혁의 정체성 확립*


박   준   철**



Ⅰ. 단순한 개혁에서 가톨릭 교회와의 결별로

Ⅱ. 형성되는 정체성

Ⅲ. 정체성의 대중적 구현



Ⅰ. 단순한 개혁에서 가톨릭 교회와의 결별로


종교개혁은 장구한 세월 동안 단일 체제를 유지해 온 서유럽 기독교 세계를 양분한 획기적 사건이었다.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이 종교개혁의 선두주자는 오랜 풍상과 질곡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Augsburg) 화의(和議)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한 기독교 종파로 승인된 루터파였다. 주지하듯이, 루터파 종교개혁의 도화선은 1517년 10월 31일 아우구스티누스 교단의 수도사이자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였던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부착한 「95개 논제」였다.1) 면벌부 판매를 비판한「95개 논제」는 빠른 속도로 제국의 여러 지역에 유통되었고2), 점차로 확대된 그 파장은 교회 지도부의 심각한 우려와 강경한 대응을 유발시켰다. 거듭되는 만류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신을 고집한 루터는 결국 1520년 6월 파문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고, 이제 그는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가 택한 것은 다름 아닌 기존 교회와의 결별이었고 이로써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독일 종교개혁사의 전통적 해석 가운데 하나는 루터와 가톨릭 교회와의 결별은 거의 필연적이었다는 것이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은총을 통해 주어진 내면적 믿음의 소산이라는 새로운 구원론은 전통 교회로서는 추호도 수용할 수 없는 파격적 교리였고, 루터의 이러한 신학적 깨달음은 이미 1517년 이전부터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95개 논제」의 부착을 포함하여 그 후 루터가 취한 행보는 근본적으로 ‘이신칭의(以信稱義)’로 집약되는 그의 개혁신학이 일관되게 표출되는 과정이었으며 따라서 기존 교회와의 단절 역시 당연한 결과라는 것이다.

루터의 새로운 구원론과 타협의 집요한 거부가 가톨릭 교회와의 결별에 결정적으로 작용하였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루터파 종교개혁은 처음부터 결별을 염두에 둔 준비된 거사가 결코 아니었다. 루터의 개혁신학은「95개 논제」를 부착할 당시에 완성된 것이 아니었고, 「95개 논제」가 일으킨 종교적 파장은 오히려 그를 당혹케 했으며, 그는 그후로도 상당기간 동안 가톨릭 교회의 충실한 일원으로 자처하였다. 요컨대 그가 애초에 지향한 것은 새로운 종파의 창출이 아니라 기존 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일부 그릇된 관행을 수정하는 것이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루터의 행각은 결과적으로 기존 교회와의 결별 그리고 나아가 기독교 세계의 재편으로 이어졌지만, 1519-1520년까지는 루터 자신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의도하지도 예상하지도 않았다. 루터 신학의 발전과정과 루터가 일으킨 종교적 소요의 초기 진행양상은 이러한 시각에 훌륭한 단서를 제공한다.

먼저 루터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그는 사망하기 1년 전인 1545년 3월 자신이 개혁신학을 깨닫게 된 경위를 포함하여 그 동안 종교개혁가로서 걸어온 길을 술회하였다. 그의 회고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초기의 루터는 새로운 기독교 세계의 건설을 마음에 품은 급진적 개혁가가 전혀 아니었다는 점이다. “내가 [나의] 주장을 시작할 당시 나는 수도사였고 가장 열성적인 교황주의자”였으며 “내가 이러한 소요에 빠져들게 된 것은 내 의지나 의도가 아니라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3)는 고백은 이를 여실히 예증한다. 그는 또한 「95개 논제」에서 자신이 공격한 것은 면벌부 제도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본연의 목적을 벗어나 “부끄러운 이득”을 위해서 판매되는 잘못된 관행이라고 밝히고 있다.  1517-1518년에 저술한「95개 논제」,「면벌부에 대한 설교」,「95개 논제에 대한 설명」에서 “나는 교황의 명예를 위해 사실은 면벌부가 저주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상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4) 즉, 면벌부의 왜곡을 척결해서 그 취지를 온전히 되살리고 그것을 제도화한 교황의 권위가 손상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루터의 진정한 의도였고, 이 점에서 그는 전통의 토대 위에 서있었다. 그러나 면벌부 판매를 둘러싼 루터의 주장은 그의 의도를 벗어나 “하늘을 부수고 땅을 태우는”5) 커다란 사태로 비화되었고, 단순한 동기에서 출발한 루터 자신도 교회 지도부의 단호한 대응으로 궁지에 몰리면서 점차 급진화되었다. 비록 정확한 시기가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루터의 기억에 따르면 그가 ‘이신칭의’의 완전한 의미를 터득하게 된 것은 1518년 10월 추기경 카예타누스(Cajetanus)에게 소환되어 그 동안 펼쳤던 주장을 철회하라는 준엄한 명령을 받은 지 몇 개월 후의 일이었다.6) 요컨대 “나는 내 자신이 완전히 새로 태어나고 또한 열린 문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갔다는 것을 느꼈다”7)라는 이른 바 ‘다락방 경험(tower experience)’은 면벌부의 부적절한 판매를 비판한 이후 점차 가중되는 교회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던 시기의 경험이었다. 따라서「95개 논제」를 부착할 당시의 루터는 ‘항의자(Protestant) 루터’가 아니라 여전히 ‘가톨릭 루터’였으며, 그의 목표는 전통과의 단절이 아니라 자신이 소속된 가톨릭 교회의 부분적 개혁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만일 마인츠의 그 사람8)이 내가 처음에 충고했을 때. . . 내 조언을 받아 들였다면, 문제가 이렇게 큰 사태로 번지지 않았을 것이다”9)라는 그의 회상 속에 그려진 초기 루터의 모습은 원대한 포부를 품은 혁명가와는 아직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이와 같은 당사자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은 1517년의 루터는 이미 기존 교회와 양립할 수 없는 위치에 서 있었고 추후 그가 밟은 도정은 오래 전에 결정된 노선에 입각한 것으로 진단한다. 루터의 ‘다락방 경험’이「95개 논제」부착 이전의 일이라는 해석10)은 물론이거니와 그가 주창한 개혁신학의 기본골격이 1517년 이전에 형성되었다는 견해들11)의 대부분은 면벌부 파동으로부터 가톨릭 교회와의 결별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비록 다양한 역사적 변수들과도 맞물려 있지만 그 대세는 당초부터 예정된 것으로 파악한다. 종교개혁사 학계에서 상당한 무게를 지니고 있는 이 시각12)은 루터가「95개 논제」를 작성하기 전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담당했던 신학강좌의 강의노트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13)

1513년 말부터 시편강의를 시작한 루터는 시편 72편에 이르러 최초로 ‘신의 의로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신의 의로움은 불의를 배격하고 징벌하는 데 있다는 전통적 교리와 수도사로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자신은 결코 의로와 질 수 없고 따라서 신의 징벌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인식 사이에서 오랜 세월 고뇌해 왔던 루터는 비로소 신의 의로움은 불의하고 가련한 피조물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데 있다고 판단하였다.14) 이러한 판단은 분명 예사롭지 않은 판단이었고 거시적으로 보면 프로테스탄티즘의 여명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 루터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가톨릭 구원론에서 일탈하지 않았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과 무관한 창조주의 무조건적 선물이라는 훗날의 해석과는 달리 루터는 시편강의 곳곳에서 인간의 겸허함을 신의 은총을 받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제시하였고 또한 자기 자신에게서는 찾을 수 없었지만 인간의 내면에는 꺼지지 않는 ‘선의 불씨(syntereris)’가 남아 있다고 강조하였다.15) 즉, 신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자발적 노력이 필요하고 또한 인간에게는 선행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아퀴나스 이래로 확립되어 온 가톨릭 구원론의 정수를 십분 반영하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과거의 답습이라 할 수 있다. 신의 의로움에 대한 그의 새로운 해석은 종교개혁의 신학적 기원이 된 중대한 사안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전환점으로 보기에는 아직은 전통의 위세가 너무나 완연하다.

1515년 봄부터 세 학기 동안 로마서를 강의하면서 루터의 신학은 한층 숙성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선의 불씨’에 대한 종전의 견해가 확연히 변모한다. 인간은 선험적으로 신을 사랑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신을 향한 인간의 사랑마저도 궁극적으로는 자기중심적이며 따라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본질적으로 불의하다는 것이 루터가 새롭게 인지한 내용이었다.16) 이러한 인식은 시편 강의에서와는 달리 신 앞에서의 겸손조차 절대자가 부여하는 수동적 겸손이라는 사상으로 연결되었고, 이는 1518년말 또는 1519년 초 그의 개혁신학이 확고히 정립되는 데 교두보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17) 그러나 유념해야 할 점은 인간의 본성과 ‘신의 의로움’에 대한 신학적 진일보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그 후 몇 년간 거기에 내재한 중대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루터가 ‘이신칭의’에 입각하여 성례, 교회조직, 교황의 권위를 포함하여 기존 교회가 수립해 온 다양한 규범을 본격적으로 질타하기 시작한 것은 1519년의 일이었다. 그 이전까지 그의 공격의 주 대상은 면벌부 판매였고, 그가 면벌부 판매를 처음에 비판한 것은 이신칭의라는 새로운 깨달음의 논리적 귀결이 아니라 그 오․남용이 일으킨 물의에 자극받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러한 비판은 루터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15세기 초의 후스 그리고 에라스무스를 비롯하여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 사이에 공유된 것이었다. 즉, 1515-1516년의 루터 신학은 가톨릭 교회의 일상적 메카니즘의 근원에 깔려 있는 핵심적 교리와 제도에 대한 부정으로 연결되지 못했고, 이 점에서 그것은 여전히 미완의 개혁신학이었다. 루터의 개혁신학은 그가 「95개 논제」를 부착할 당시 분명 그 윤곽이 형성되었지만, 루터는 한 동안 자신의 신학에 잠재된 혁명적 파장의 가능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95개 논제」를 부착한 1517년 가을부터 1520년까지 루터가 취한 행보 역시 그의 개혁이 사전에 준비된 것이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우선 루터가「95개 논제」를 라틴어로 작성하고 대학의 게시판 역할을 하였던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부착한 것은 교내의 교수들 그리고 외부의 학자들과 학문적 토론을 위한 것이었다.18)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달리「95개 논제」가 즉시 독일어로 번역되고 신속한 속도로 독일에 퍼지면서 루터는 세간의 이목과 교회의 우려 섞인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교회 지도부가 공식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자신의 생각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릴 필요성을 느낀 그는 이듬해 초 「95개 논제에 대한 설명」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19) 루터는 이 글에서 면벌부 뿐만 아니라 면벌부의 바탕이 되는 고해성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죄가 사면되기 위해서는 고백자의 진정한 내면적 회개와 믿음이 우선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는 성사 자체가 신의 은총을 가져온다는 기존 교리와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는 것이며 또한 루터의 신학적 관심이 점차 본질적인 문제로 전이되고 있음을 반영한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의 견해가 가톨릭 전통과 합치한다고 생각하였고 이를 서두에서 명료히 밝히고 있다. 즉, 자신의 주장은 성경과 교부들의 저작 “그리고 로마 교회에 의해 수용되고 또한 교회법과 교황의 교서들 속에 보존된 것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20) 즉, 루터는 아직 자신이 가톨릭 교회에 등을 돌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1518년 8월에 출간된 이 글은 교황 레오 10세에게 헌정되었다.

루터의 신학적 입장이 위험수위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95개 논제에 대한 설명」이 출간된 후 교회 당국의 반응이 강경해지면서부터였다. 면벌부 판매를 한사코 비판하는 루터의 태도는 점차 면벌부를 제정한 교황의 권위와 교황이 대표하는 제도권 교회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고, 이제 그의 이단성을 의심하게 된 교황청은 그의 사상을 공식적 차원에서 점검하고 또한 의견철회를 강요하는 적극적 대처에 나서게 되었다. 1518년 10월 추기경이자 아퀴나스 신학의 당대 최고봉인 카예타누스는 루터를 아우구스부르크로 소환하였고, 상대의 완강함을 직시한 그는 교황의 권위 문제를 거론하며 루터를 곤경으로 몰고 갔다. 가장 중대한 사안에 직면한 루터는 면벌부를 제도화한「우니게니투스(Unigenitus)」의 경우와 같이 “교황의 교서가 때때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반발하였지만 교황의 권위를 직접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고, 그의 답변은 전반적으로 교황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원론적 차원에 머물렀다.21) 그러나 기대했던 수확을 거두지 못한 교황의 사절 카예타누스는 파문의 위협과 함께 루터를 내쫓았으며 며칠 후 루터의 후원자인 현명공 프리드리히(Friedrich der Weise)에게 노골적 불만을 표출하였다. 기존 교회와의 간극이 점차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두 달 후(1518년 12월 13일) 교황에게 면벌부를 발행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재천명하는 교서가 공포되자 루터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고, 1519년 초 프리드리히는 이제 루터를 로마로 보내든지 아니면 작센(Sachsen)에서 추방하라는 압력에 봉착하게 된다. 로마와 작센 측의 치열한 줄다리기는 공개토론회의 개최로 합의되었다. 사태가 급박하게 전개되면서 궁지에 몰린 루터는 이 시기를 즈음하여 그의 인생의 분수령이 되는 ‘다락방 경험’을 하게 되었으며, 그 후에 나타난 루터의 행보 속에는 가톨릭 교회와의 결별이 단계적으로 가시화된다. 공개토론을 위해 교서(decretals)의 연구에 몰입하던 루터는 중대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다. 줄곧 교황의 충직한 신하로 자처해 온 그는 1519년 3월 13일 막역한 동지인 슈팔라틴(Georg Spalatin)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밀이지만, 나는 교황이 그리스도의 적인지 아니면 그의 사도인지 알 수 없다”21)라고 토로하였다. 가중되는 압력이 그를 또 다른 차원으로 몰고 간 셈이다. 그 해 6월에 출판된 「교황의 권위에 대한 설명」에서 루터는 이제 교황의 수위성(首位性)에 시비를 걸었고, 예정되었던 7월의 라이프치히(Leipzig) 논쟁에서는 교황과 공의회를 포함하여 제도권 교회의 모든 권력주체를 통렬히 비난하면서 결별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1520년 6월 24일 공포된 교서「주여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는 최후의 통첩이었고, 파문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루터는 마침내 가톨릭 교회의 상징인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선언하였고 이로써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22)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루터의 결별은 애초부터 예정된 것은 아니었다. 「95개 논제」를 부착할 당시 루터는 자신이 파문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치 못했고 또한 그렇게 생각할 하등의 이유도 없었다. 이신칭의라는 개혁신학의 골격은 분명 1513년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지만 그것의 숙성과 완성은 적지 않은 시간을 요했다. 가톨릭 교회와 단절한 지 십여년 후인 1532년 가을 루터는 한 식탁대화에서 “나는 나의 신학을 한번에 배우지 않았다. 나는 그것에 대해 계속해서 그리고 점점 깊게 숙고해야만 했다”고 자평하였다.23) 또한 그로 하여금 자신의 신학에 대해‘계속해서 그리고 점점 깊게 숙고’하게 만든 것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굴러간 역사의 수레바퀴였다. 대수롭지 않은 동기에서 낸 자그마한 목소리가 엄청난 메아리로 되돌아 왔고, 이는 점차 그를 극단의 양자택일로 몰아 세웠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루터는 자신의 신학에 내재된 대의명분을 서서히 키워갔고 마침내 1520년에 이르러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단순한 개혁의 의도가 가톨릭 교회와의 결별로 치닫게 된 셈이다.


Ⅱ. 형성되는 정체성


1521년 1월 3일 파문된 루터는 이제 제도권 교회로부터 축출된 처지가 되었지만, 그는 그 동안 그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구축하였다.  무엇보다도 기존 교회에 불만이 누적된 대중들이 그에게 힘을 실어 주었고, 교회개혁의 타당성과 시급성을 공감했던 많은 휴머니스트들이 아낌없는 갈채와 환호를 보냈으며, 작센의 군주이자 選帝侯(Kurfürst)로서 한 때 황제의 물망에 오르기까지 했던 실력자 프리디리히는 교황청과의 알력을 불사하면서 후견인 역할을 기꺼이 자임하였다. 모종의 연대감이 다양한 계층에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며, 이는 무명의 수도사 루터가 난공불락의 로마교회에 패기만만하게 도전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였다.

그러나 루터와 그의 측근들은 1520년대에 접어들어 아주 미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기존 교회와는 뚜렷한 선을 그었지만, 자신들의 지지세력을 차별화된 집단으로 규합할 수 있는 체계적 대안이 마련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까지 개혁운동은 줄곧 공격일변도로 전개되어 왔다.  「95개 논제」부터 1520년 후반 자신의 개혁사상을 집대성한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서한」,「교회의 바빌론 유수」,「기독교인의 자유」에 이르기까지 숱한 저술과 설교를 통하여 루터는 개혁의 당위성을 알리고 기존의 교리와 관행을 규탄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을 뿐 그것들을 대체할 만한 세부적 규범을 제정하는 데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즉,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대전제 하에서 과거청산에만 여념이 없었고 결국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기 위한 구체적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앞을 내다보지 못한 투쟁이었기에 일상적 신앙생활의 준거틀이 되는 새롭고 세부적인 교리와 의식이 갖추어지지 않았고, 그것은 바로 루터파의 정체성 결여를 의미하였다. 갑자기 찾아 온 결별이 낳은 부작용이었다.

건설적 대안의 부재라는 뜻밖의 사안에 직면한 루터파의 지도부는 1520년대에 들어와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루터파 고유의 정체성 확립에 나서게 된다. 신앙생활의 일상적 규범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미사)였고, 루터는 1523년 비로소 예배형식의 실제적 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는 우선 1523년 1월 작성한「교회 예배의 형식에 관하여」라는 팜플렛을 통해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과 예배의 기본방향을 제시하였다.24) 그러나 보다 상세한 지침에 대한 요구가 쇄도하였고, 특히 절친한 관계에 있던 츠비카우(Zwickau)의 하우스만(Nicholas Hausmann)의 거듭된 촉구는 루터로 하여금「비텐베르크 교회의 예배와 성찬식의 형식」을 집필케 하였다.25) 1523년 12월에 출판된 이 글은 새로이 채택되어야 할 예배와 성찬식의 형식을 단계적으로 조목조목 기술한 최초의 예배 지침서였다. 그러나 여기에 규정된 예배는 여전히 라틴어를 사용하는 예배였던 반면 포르차임(Pforzheim), 로이트링겐(Reutlingen), 베르타임(Wertheim),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슈트라스부르크(Strassburg)를 포함하여 당시 개혁의 대열에 합류한 여러 지역에서는 일반 회중을 위한다는 취지하에 다양한 형식의 독일어 예배가 도입되었고, 이에 따라 적지 않은 혼선이 곳곳에서 빚어졌다.26)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루터파 인사들은 또 다시 그들의 지도자에게 독일어 예배지침을 요청하였고, 루터는 이에 부응하여 1526년「독일어 예배와 예배의 형식」을 저술하였다.27) 비록 루터파 지역에서는 그 후에도 다양한 예배형식이 채택되었지만,「독일어 예배와 예배의 형식」은 전체적인 기준을 제공한 하나의 전범으로서 루터파 예배의식을 정형화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루터파는 가톨릭 교회의 7성사 가운데 세례와 성찬만을 인정하였고28), 따라서 이 두 의식은 예배 다음으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였다. 세례에 있어서 루터파는 가톨릭 교회와 두드리진 차별성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다른 모든 의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세례의식 자체가 신의 특별한 은총(sacramental grace)을 동반한다는 기존 교리가 배격되고 또한 믿음없이 수행되는 세례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점이 강조되었지만, 세례의 형식과 절차는 거의 가톨릭 전통을 고수하였다.29) 한편 1520년대 초 영아세례 대신 성인세례를 실시해야 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발흥한 재세례파를 통렬히 몰아 세운 것도 루터파의 정체성 고양에 큰 기여를 했다고는 볼 수 없다. 성인세례의 거부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불문하고 당시의 모든 기독교 종파가 공유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1523년과 1526년 두 차례에 걸쳐 상세한 세례규정이 만들어졌고, 루터파의 지도부는 이를 통해 교구민들에게 세례에 대한 나름대로의 태도를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29) 비록 형식적 차원에서는 과거와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새로운 해석에 입각한 구체적 규범의 제정과 시행이 구성원의 결속력 강화와 공동체의 정체성 확립에 한 몫을 했음은 틀림없다.

루터파의 색채를 가장 현저하게 부각시킨 의식은 성찬이었다. 루터가 성찬에 대한 그의 견해를 체계적으로 제시한 것은 1519년의 일이었다.  그는「성스럽고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신성한 성례」에서 평신도들도 빵 뿐만 아니라 포도주를 받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성찬식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여전히 화체설 (化體說 : transubstantiation)을 인정하였고, 이 점에서 그가 아직 과거와 미래의 경계에서 배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30)

성찬과 관련하여 루터가 가톨릭 전통으로부터 본격적 일탈하게 된 것은 제도권 교회에 완전히 등을 돌린 1520년부터였다. 1520년 말 저술한「교회의 바빌론 유수」는 성찬에 관한 루터파 교리의 토대를 마련하였고,31) 1520년대 초반 점차 정교해진 루터의 견해는 1523년「비텐베르크 교회의 예배와 성찬식의 형식」을 통해 실질적 개혁으로 이어졌다. 한편 성찬에 관한 츠빙글리의 독자적 해석과 이에 대한 루터의 신랄한 비판은 당시 사회에 루터파의 정체성을 더욱 뚜렷하게 노정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가톨릭 교회를 성토하는 데 한 배를 탔던 츠빙글리가 1524년부터 기념설(紀念說)을 공개적으로 표명함에 따라 개혁세력간에 혼란이 난무하였고, 이를 우려한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보다 명확히 밝혀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32) 그는 결국 1526년「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한 성례: 광신자들에 대항하여」를 통해 자신의 공재설 (共在說 : consubstantiation)을 재차 확인시켰고, 이로써 비텐베르크와 취리히의 관계는 더욱 벌어지게 된다. 비록 개혁세력의 통합을 희구했던 헷센의 백작 필립(Philipp von Hessen)이 1529년 10월 양자의 회합(‘Marburg Colloquy’)을 주선하여 의견절충을 모색하였으나, 그들은 서로의 차이를 좁히지 못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같은 개혁세력간의 간극이 만천하에 드러났지만 이는 오히려 루터파의 정체성을 한층 강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520년대 초 독일의 대중들로 하여금 새로운 종파의 출현을 가장 직접적으로 실감케 하였던 것은 아마도 결혼한 성직자의 등장이었을 것이다. 가톨릭 교회와의 단절이 명약관화해진 1520년 8월에 출판된「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루터는 최초로 성직자의 결혼을 언급하였다. 체계적인 신학적 설명이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교황은 물론이고 하늘의 천사라 할 지라도”33) 성직자들을 독신생활에 속박해서는 안된다는 그의 선언 속에는 곧 다가올 중대한 변화가 예시되어 있었다.  루터파 지도부가 성직자 결혼문제에 비상한 관심을 모으게 된 것은 1521년 발생한 한 사건 때문이었다. 마그데부르크(Magdeburg)와 마이쎈(Meissen) 교구에서 봉직하고 있던 세 명의 사제가 실제로 결혼을 감행하게 되자 루터파의 사령부인 비텐베르크에서 논란이 일어났고, 이에 따라 바르크부르크(Wartburg)에 은신하고 있던 루터는 물론 칼슈타트(Andreas von Karlstadt),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등 루터파의 핵심인물들은 성직자 결혼에 대해 보다 명확한 입장을 밝히게 된다. 이들이 제시한 근거들은 서로 적지 않은 차이를 보였고 특히 오직 결혼한 자들만이 성직자가 될 수 있다는 칼슈타트의 급진적 주장에 루터는 난색을 표명했지만, 성직자의 결혼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기본 원칙에는 그들 모두 한 목소리를 내었다.34) 이 기본원칙은 즉각적이고 대대적인 반응을 일으키면서 현실 사회속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비록 신성로마제국에서 루터파 성직자의 결혼은 1548년에 이르러서야 승인되었지만, 그것은 새로운 제도의 창출이라기보다는 이미 기정화된 현실에 대한 불가피한 승복이었다. 루터가 한 때 수녀생활을 했던 카타리나(Katarina von Bora)를 아내로 맞이한 것은 1525년 6월 13일의 일이었고, 그 당시 루터파 개혁가들의 절대다수는 이미 가정을 꾸미고 있었다.34) 성직자의 결혼은 뚜렷한 변혁이었고, 그 변혁 속에 새로운 종파의 등장은 유감없이 과시되었다.

1520년대 초․중반 루터파의 정체성이 윤곽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는 사실은 인문주의자들이 루터파에 보인 태도의 변화에서도 여실히 반증된다. 주지하듯이, 루터가 일으킨 자그마한 소요를 대대적 교회개혁운동으로 발전시킨 주체는 바로 북방 인문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95개 논제」의 취지에 가장 먼저 호응을 보인 집단이었을 뿐만 아니라「95개 논제」를 독일의 여러 지역에 유통시킨 장본인이었다. 즉, 그들은 “보잘 것 없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희미하게 존재했던 교회개혁운동을 루터의 의도와 달리 광명으로 이끌어 내는 데 결정적”35) 역할을 수행했고 동시에 초기 개혁운동의 성공적 진행에 그야말로 일등공신이었다. 에라스무스, 로이힐린(Johannes Reuchlin), 빔펠링(Wimpfeling)을 위시하여 상당수의 북방 인문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루터를 지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면벌부 판매의 비판을 자신들이 추구하는 ‘계몽된 경건(enlightened piety)’의 발현으로 간주하였고, 성서의 유일한 권위를 한사코 주장하는 루터에게서 ‘원전으로 돌아가자(ad fontes)’는 그들의 슬로건이 재확인되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스콜라 신학자들의 현학성에 대한 루터의 따가운 질책에서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studia humanitatis)’의 밝은 미래를 예견하였다. 루터는 손색없는 동지였고 루터의 개혁운동은 자신들의 숙원사업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1520년을 전후하여 루터의 태도가 개혁에서 결별로 돌변하면서 루터파에 대한 북방 인문주의자들의 입장도 후원에서 주저로, 주저에서 공격으로 전환된다. 기존 가톨릭 체제 내에서 교회의 불합리한 관행과 모순을 점진적으로 개선하고자 했던 그들에게 있어서 가톨릭 교회를 총체적으로 부정하고 동시에 낮선 종교적 규범을 확립시키면서 기독교 세계의 분열을 조장한 루터파는 이제 동역자가 아니라 적이었고 그 행보는 더 이상 축복이 아니라 차라리 저주였다. 루터파와 북방 인문주의자들의 관계는 점차 경색되어 갔고 마침내 1525년 인간의 자유의지와 예정론을 둘러싼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격렬한 공방에서 회복불능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근본적으로 전통 교회의 수호자였던 대다수의 북방 휴머니스트들에게 1520년대 중반의 루터파는 가톨릭의 일원이 정녕 아니었고 교리와 제도에 있어서 어엿한 구색을 갖춘 별개의 종파였다. 그들의 태도변화는 루터파의 독자적 정체성이 형성되었음을 시사하는 뚜렷한 증거이다.


Ⅲ. 정체성의 대중적 구현


1520년대 중반 루터파 개혁운동은 또 한번의 국면전환을 맞이한다.  기존 교회와의 결별후 정체성 확립에 매진해 왔던 루터파의 수뇌부는 이제 새로이 정립된 규범들을 사회 저변에 정착시키지 않고서는 진정한 개혁이 이루질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일선의 성직자들은 새로운 규범들을 그들의 목회활동에서 제대로 적용시키지 못했고, 교구민들 역시 익숙하지 않은 교리와 의식을 쉽게 이해하지도 못했고 또한 흔쾌히 수용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일부 지역에서는 ‘이신칭의’를 모든 종교적 규범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인식하는 부작용이 발생하였다.36) 이러한 문제점이 도처에서 드러나게 되자, 정체성의 대중적 구현은 루터파 지도부의 가장 절실한 현안으로 대두된다. 결국 개혁운동의 방향은 창업에서 수성(守成)으로 선회하게 된다.

1520년대 후반에 도입된 교구시찰(visitation)은 이 점에서 각별한 주목을 끈다. 새로운 규범을 대중들의 일상적 삶 속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각 지역 교구의 구체적 실상을 본격적으로 조사하는 사전작업이 필요했고, 교구시찰이 채택된 것은 바로 이러한 취지에서였다. 1525년 10월 루터는 프리드리히의 뒤를 이어 작센의 군주이자 선제후가 된 요한(Johann der Beständige)공에게 교구시찰의 승인을 최초로 요청하였고, 그후 거듭된 그의 촉구는 1527년 2월 비로소 결실을 보게 되었다.37) 루터, 멜란히톤, 슈팔라틴, 부겐하겐(Johannes Bugenhagen) 등이 몸소 시찰관으로 나서고 작센을 네 구역으로 분할하여 수개월 동안 진행된 이 교구시찰의 결과는 그야말로 참담하였다. 8월 20일 멜란히톤이 다른 지역을 시찰하고 있던 부겐하겐에게 보낸 편지는 당시 상황을 가히 짐작케 한다.


나는 [앞으로] 나에게 심사를 받지 않은 자는 누구도 어떤 장소에 파송하지 않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엉터리로 가르치고, 루터와 다른 훌륭한 사람들의 글들이 얼마나 서투르게 모방되는지 당신은 실로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38)


이듬해 실시된 교구시찰에서도 상황은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 충격적이지만 엄연한 현실 앞에 멜란히톤은 자책조로 한탄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사람들을 엄청난 무지와 어리석음 속에 방치하여 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책임져야 할 것인가! 이 불행한 사태를 목격하면서 나의 가슴은 피를 흘리고 있다. 우리가 한 지역의 조사를 마치고 나면 나는 종종 구석으로 가 눈물을 흘림으로써 나의 마음을 달래곤 한다.39)


한 마디로, 루터파 지도부가 어렵게 확립해 놓은 정체성은 대중들에게는 한낱 공허한 메아리였고, 십여년 간 숨가쁘게 달려 온 개혁운동은 그저 일부 계층에 국한된 의미 없는 투쟁이었다.

1527년 처음으로 실시된 교구시찰은 또 다른 문제를 드러내었다. 당초 시찰관들은 현장에서 무엇을 어떻게 지시해야 하는 지에 대한 체계적 지침 없이 시찰에 나섰고,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극심한 혼란을 수습할 길이 막연하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체감하였다. 당혹스러운 결과는 교구시찰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켰고, 교구시찰의 효율적 수행은 구체적 방침의 제정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가져왔다. 루터파 지도부는 결국 숙고와 수정을 거듭한 끝에 1528년「교구시찰관을 위한 지침서」를 만들어 냈고, 그후 매년 정기적으로 실시된 교구시찰은 이 지침서에 입각하여 정체성의 대중적 구현이라는 절대절명의 과업에 선봉장으로 나서게 된다.40)

루터가 서문을 작성하고 멜란히톤이 본문을 작성한 이 지침서의 내용은 교구시찰의 목적과 그것이 어떻게 수행되었는지를 극명히 보여 준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신의 은총과 자비에 의해서 복음이 우리에게 다시 찾아 왔다”면서 먼저 개혁운동의 일차적 성공을 거론한 루터는 그러나 개혁운동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교구시찰의 제도화가 불가결했음을 강조한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얼마나 통탄스럽게 혼란에 빠지고, 흐트러지고, 상처를 입었는지 보게 되었고, 따라서 이러한 절실한 필요에 의해서 우리는 진정한 감독의 직무와 교구시찰의 제도를 다시 설립하였다”는 것이다. 교구시찰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 넉넉히 보답해 줄” 중차대한 제도이며, 그 우선적 목표는 무능한 성직자들을 “타작 마당의 왕겨처럼” 가려내고 그들을 적절히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들을 대중들에게 명확하고 정확하게 제시”하도록 하는 것이었다.41) 이 지침서의 내용을 보면, 기도의 방법과 십계명의 의미와 같은 가장 기본적인 사안으로부터 구원에 있어서 믿음과 선행의 차이, 새로이 수립된 예배, 세례, 성찬의 의미와 시행방법, 그리고 교구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교수되어야 할 학습과목에 이르기까지 루터파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가르치고 배워야 할 핵심적 내용이 망라되어 있다.41) 이러한 구체적 지침에 입각하여 시찰관들은 일선 성직자들의 자질과 능력을 점검하고, 일정수준에 미달한 자들에게 훈계와 처벌을 통해 각성하고 유념해야 할 사항을 주지시켰으며, 다음 시찰에서 개전과 변화의 여부를 확인하면서42) 루터파의 교리와 의식을 일반인들의 삶 속에 구현하였다. 1527년 작센에서 시작한 교구시찰은 그후 전쟁과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17세기 초반까지 전 루터파 지역에서 매년 실시되었다. 1528년「교구시찰관을 위한 지침서」를 쓰면서 작센의 교구시찰이 “독일의 다른 모든 군주들이 건설적으로 모방할 수 있는 좋은 예가 되기를 바란다”43)는 루터의 염원이 실현된 것이다.  정기적으로 지역 교구의 상황을 진단하고 걸맞는 해결책을 제시한 교구시찰은 개혁의 토착화를 위한 가장 장기적이고 효율적인 제도적 장치였다.

1520년대 후반 루터파의 지도부는 교구시찰 뿐만 아니라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개혁의 사회적 정착을 수행해 나갔다. 그들은 루터파 교리를 쉽고 재미있게 요약한 훈육집을 저술하고 이를 각 지역 교구에 배포하였으며, 부모들은 가정에서 이 훈육집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도록 독려되었다. 또한 초기 교구시찰의 참담한 결과에 크게 자극 받았던 루터는 1529년 어린이들과 지적 수준이 낮은 자들에게 기본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소 교리문답서(Der kleine Katechismus)』를 집필하였다.44) 5월에 출판된 이 교리문답서는 즉시 루터파 교구의 거의 모든 라틴어 학교에서 학습되었을 뿐만 아니라 1533년부터는 소녀들을 위한 여학교(Mädschenschule)에서도 교재로 사용되었다.45) 한편 각 지역교회의 운영을 세부적으로 명시한 「교회운영지침(Kirchenordnung)」의 제정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46) 요컨대 1520년대 중반 지역교구의 실상은 그 동안의 개혁이 새로운 규범의 창출에 국한된 함량미달의 개혁이었음을 여실히 드러냈으며, 이를 통감한 루터파 주도세력은 이제 자신들이 그리고 있던 새로운 세계를 단순한 신학적․규범적 차원을 넘어 대중적․인습적․문화적 차원에서 건설하는 데 나섰던 것이다. 진정한 개혁이 비로소 시작된 셈이다.


세월의 건너편에 서 있는 역사가의 작업은 필경 주어진 결과를 놓고 원인을 찾아내는 과정일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는 추후의 결과에 단초가 되는 지점을 색출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독일 종교개혁의 연구자들이 루터의 신학강의 노트에 초미의 관심을 보여 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단초가 나중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결코 직선적이지 않으며 그 과정에는 수 많은 역사적 변수들이 묘연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1530년을 전후한 시기까지 루터파 종교개혁이 걸어온 길은 이를 잘 예증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계획된 개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신의 의로움에 대한 새로운 의미에 어렴풋이 눈을 뜬 1513년의 루터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칭하는 자를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고, 「95개 논제」를 부착한 1517년의 수도사 루터는 배우자와 여섯 명의 자녀를 거느린 한 집안의 가장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하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된 일련의 사태 속에서 희미했던 개혁신학이 점차 명료해진 것이었고, 그 결과는 애초에 의도하지 않았던 가톨릭 교회와의 단절이었다. 예상할 수 없었던 결별이었기에 앞날에 대한 정연한 준비가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결별은 한편으로는 정체성 형성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정체성의 형성과 개혁의 완수 사이에는 현격한 괴리가 있음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었고, 1520년대 후반 루터파 지도부는 이 괴리를 좁히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고 실시하는 데 온갖 노력을 경주해야만 했다. 루터파는 결국 1530년경에 이르러 독일 사회의 저변에 어엿한 한 종파로 안착하기 시작했지만, 그 과정은 기정화된 신학과 구체적 청사진에 입각한 일관된 행보라기 보다는 오히려 뜻밖의 도전에 대한 응전의 연속이었다. 루터파 종교개혁의 초기 도정을 바라보는 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출처 :Theological

출처 : 한국신학교 광주분교
글쓴이 : 모 세(Moses)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