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문제 유형
1. 사도시대의 특성과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가 될 수 있었던 요인을 써라.
1) 특징 :
A.D 30년 ~100년 까지는 보통 사도시대라 하는데 기독교 역사상 가장 강력한
① 성령의 역사시대로써
② 기독교가 이스라엘 범위를 넘어 세계로 확산되며
③ 신약성경이 다 쓰여짐으로써 기독교의 기초가 놓여진 시대였다. 특히 베드로, 요한 바울을 중심으로
④ 사도들의 활동이 왕성했으며 신도의 삶 또한
⑤ 성령이 충만한 창조의 시대였고 많은 사람들이 순교한 시기였다. 지상의
⑥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예배하였고 신학의 중심은
⑦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었으며,
⑧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가 결정되었다.
⑨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교회가 하나라는 개념이 확립되었으며
⑩ 복음이 디아스포라에 의해 전파되어 로마제국 아래
⑪ 기독교의 박해가 시작된 시기였다. 또한 기독교의
⑫ 이단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기독교를 변호하는 초대교부들이 나타나는데 클레멘트, 이그나티우스,폴리갑,파피아스,헤르마스가 대표였다.
2)박해
(1) 원인 :
64년 로마의 화재원인을 네로가 기독교인들에게 전가시킴으로써 ① 기독교는 조직적으로 박해받기 시작한다.
계속되는 박해의 원인은
② 종교상의 이유로서 오직 야웨만을 섬기고 타종교의 신을 우상으로 취급했던
③ 기독교의 배타성과 기독교의
④ 성만찬의식을 오해하여 피와 살을 먹는 식인종의 혐의를 받고 야밤에 비밀리에 이 의식을 행함으로써
⑤ 음란집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주된 원인은
⑥ 병역의무를 기피하고 로마제국 통일정책의 하나였던
⑦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이며, 로마제국은 영원하다고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이 곧 멸망한다는
⑧ 종말사상을 가짐으로써 사상상의 부조화 문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속에서 당시의 당시의 천재지변을 기독교인들이 다른 신들에게 제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보면서 핍박을 가하였다.
(2) 박해수단 : 기독교인들을
① 기존사회에서 추방하고
② 생업,직업을 방해하고
③ 신체적 징벌을 가하고
④ 우상에게 제물을 드렸다는 증명서를 살 것을 강요하고 ,
⑤ 성명이나 성물을 당국에 비치하도록 배교를 종용했다. 결국 A.D 112년 트리얀 황제때 기독교를 불법종교로 인정하고 기독교인을 처형하기로 했다.
3) 결과
로마제국의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① 고난과 죽음을 진리로 이겨내며, 무력이나 폭력을 쓰지않고
② 문서를 통해 그들을 방어하였으며,
③ 순교를 각오함으로써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임이 증명되었다.(노예 포로등 낮은 신분 전도 -> 기독세력이 뻗어나감. 노예도 형제와 같다는 사상을가지게 함) 또한 박해로 흩어진 기독교인들이 사도의 말을 듣기 어렵게 되자 정경형성을 서두름으로써
④ 성경형성이 촉진되었고, 국가와 교회의 구별이 확실하게 되었다. 결국은 A.D 313년에 콘스탄틴에 의해
⑤ 기독교가 공인되고 A.D 392년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로마국교로 인정된다.
2. 기독교와 로마제국과의 관계를 설명하라.
1) 로마제국은 B.C 753년 Romulus,Remus 두 형제에 의해 건국되어 30 B.C 옥타비아누스가 천하를 통일하고 3년후 로마를 다스리는 신이라는 뜻에서 Pontifex Maximus 대제관으로 군림했다. 27B.C ~ A.D 180년은 Pax Romana 시기로 약 200년 동안 이교도의 침입이 없고 상업이 번창하고 문예가 발달한 평화의 시기였다. A.D 64년 로마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을 방화범으로 몰아 박해를 하면서 최초의 조직적인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고 A.D 70년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가 된다.
A.D 180~285년 군사적 위기의 시기로 변방에 야만인들이 기승을 부리고, 67년간 29명의 황제가 바뀌고 경제적인 파탄속에 교회의 박해가 극성했던 시기였다. 313년 기독교가 밀란칙령에 의해 인정, A.D 330년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하였으며 392년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는 국교로 공인되었다. 395년 로마는 동서로 나뉘어 지고 A.D 176년 게르만족에 의해 서로마는 완전 멸망하게 되며 동로마는 1453년까지 지속되었다.
2) 기독교 시작 당시의 로마배경
Pax Romana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속으로 오셨고 이 시대에 기독교가 선교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 당시 로마는 최대의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고 여러 종족이 많이 모여있었으며 자연자원이 풍부하였으며, 라틴어가 공식어로 통용되었으며 시민들은 휴식과 오락을 즐기는 생활을 하였으며 특히 도로망, 통신이 발달되고, 단일 문화속에 다양한 종교사상, 통일된 군사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3) 로마통치가 기독교 선교에 제공한 好조건. 넓은 영토는 국경을 넘어 어려움이 없이 구라파,아프리카,소아시아로 선교할 수 있게 했으며 교통의 편리함으로써 여행의 자유가 보장되어 복음을 전하기에 좋았다. 또한 라틴어,그리스어등 통일된 언어사용과 통일된 군사조직은 안녕과 질서를 확립,치안유지를 가능하게 했고,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로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교회를 세우는 선교의 계기가 되었으며, 도덕적 윤리적 타락과 이종교가 범람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이 참 종교를 갈구하게 된 배경이 기독교 선교에 도움을 주었다.
3. 초대교회 이단운동 3가지의 특징과 악영향과 이단으로 규제된 표준에대하여 논하라.
1)영지주의 (Gnosticism)
135년~ 160년 최대 영향력을 가졌고 초대교회를 가장 괴롭힌 이단인 영지주의는 페르시아의 이원론,동양의 신비주의 종교, 바벨론의 점성술, 헬라철학(플라톤의 이원론)등에 기독교 교회는 혼합절충시킨 종굥철학으로 영을 선한 것으로 물질을 악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Gnosis는 영적이고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지혜를 가리키는 말로써 이 지식을 전수받은 사람은 우주의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게 되고 악한 물질세계로부터 구원받게 되며 이 지식은 단순한 앎이 아니라 영원자의 계시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신비적 조명이다. 이들은 우주에 왜 죄가 있는가. 인간의 구원, 신구약의 상충성에 의해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이원론에 따라 해결하고자 한다. 이들은 최고의 신에게서 다른 에온들(Aeons)이 하향적인 과정을 걸쳐서 생산되고, 마지막으로 가장 열등한 불완전한 하위신-데마우르고스(Demiurgos)가 물질세계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주는 불완전하고 죄가 있으며 물질세계를 악하며, 세계를 창조한 구약의 하나님은 하위신에 불과하다. 또한 차선의 신인 예수 그리스도는 물질세계가 악하므로 육체를 가진 인간이 될 수 없고, 영적으로만 이세상에 왔다간 가현적 존재이다. 이들중 반렌티누스 학파는 인간을 구원의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영적인간, 어느 정도 구원이 가능한 정신적 인간, 구원의 가망이 없는 물질적인 인간으로 삼분했다. (Gnosticism은 기독교의 역사적인 요소를 과소평가함으로써 예수의 생애(탄생, 삶, 죽음, 부활)을 부인했으며 물질계와 정신계를 대립시킴으로써 기독교에 이원론 영향을 끼쳤으며 구약의 가치를 약화시킴으로써(신약만 성경으로 인정) 심각한 위험을 가하였다.
2)Marcionism
최고의 교회 개혁자인 마르시온이 악과 고통의 문제에 충격을 받아 이 세상의 신과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된 자비의 신을 대립시키는 극단적인 이원론을 주장하면서 유대교와 율법주의를 공격하며 바울만이 복음을 신앙적으로 이해했던 유일한 사도라 하며, 인간이ㅣ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순복음(Primitive
Gospel - 바울서신과 누가복음: 구약의 글을 모두 배제한)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들은 구약의 신은 피흘리는 것을 좋아하는 전쟁의신, 복수의 신, 무자비한 율법의 신이라 했고, 진정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감추어졌는데, 그리스도안에 가현적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문서수집으로 기독교에 큰 영향을 주었으나, 기독교를 역사적 배경에서 분리시키고, 성육신을 부인하며, 구약의 하나님을 비판함으로써 악영향을 끼치며 148년 교회에서 축출당하고 5세기 말까지 존재했다.)
3) Montanism
성령의 특별한 섭리에 대한 사상과 임박한 종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몬타니즘은 교회에 증대하는 세속적인 영향에 대한 반발운동으로 2세기경 몬타누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을 성령이 말씀하실 때 사용하는 성령의 대변자라 하며 프리기아(Phyrigia)에 새 예루살렘이 설립되고 거기서 그리스도가 천년동안 통치하신다고 하며 임박한 종말을 대비하여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강조하며 세속주의에 대항했다. 단시일 내에 상당한 세력을 확보했고 터툴리안도 이 운동에 가담하여 몬타누스주의자가 되었으나 160년 최초의 교회 공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Montanism은 성령,예언,신유등의 이적의 은사를 강조하며, 교회 감독 또한 이러한 은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감독의 권위를 부인했고, 천년왕국설을 주장함으로써 교회 조직을 거부,약화시켰고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함으로써 계
시가 최종적으로 끝났다는 교회의 주장을 위협했다. 그러나 엄격한 금욕주의는 후세의 도원주의에 영향을 끼쳤다.)
4) 이단에 대한 교회의 반응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12사도, 속사도로 이어지는 Apostolic succession 사도적 전승을 강조하는 감독정치를 강화하였고 성직의 전통을 부인할 때 이단으로 규정했으며 신조를 만들어 신조를 받아들이지 않는 교회는 이단교회(교회의 정통성에 있어)로 정죄했다. 또한 성서에 있는 것을 부인하거나 첨가할 때 이단으로 규정하는 표준을 세웠다.
4. 노바티안니즘과 도나티즘에 대하여 비교설명하라(유사점과 차이점)
300년동안 기독교의 박해가 황제에 따라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소에 순교자도 있었지만 순교를 부인하는 배교자(Apostacy)들도 많이 배출된다. 노바티아니즘(교회의 순수성에 관하여)과 도나티즘(성례의 효율성에 관하여)은 배교자들에 관련된 문제들이다.
1) Novatianism
3세기 Decius 황제 박해후 배교자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려고 할 때 교회의 수용문제로 의견이 갈라졌다. 로마교회 Callitus는 진정한 회개는 용서 받을 수 있다하여 일정한 참회기간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여 Cornelius감독은 배반자들을 수용하려고 했으나, 로마교회 장로인 노바티안은 교회의 순수성을 강조하면서 변절자에 대한 극단적 징계를 주장하였다.
노바티안은 살인,간음,거짓증거 다른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으나 교회를 배반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Cornelius와 정면대립하지만 교회는 배교자들을 받아들일 것을 결정했고, 이에 노바티안은 성자들의 모임을 만들어 분리되어 나가 313년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노바티아니즘은 교회 순수성에 관한 문제로 교회 구성원들이 신앙적,도덕적,윤리적 순수함에 의해서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짐을 강조한 사건으로 여기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진정한 신도들만 모여있는-교회, 눈에 보이는 - 진정한 신도와 그렇지 못한 자가 함께 있는 -교회 개념이 생겨난다)
2)Donatism
4세기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후 북 아프리카 카르타고에 배교자였던 감독이 다시 감독으로 선출되자,도나투스는 배교자 감독이 세례를 집행했을 때 효력이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성례의 효율성에 관한 문제가 일어났다. 아우구스투스는 성례의 효율성은 감독의 신앙적, 도덕적 권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성부,성자,성령 3위의 이름으로 교회법에 따라 적법하게 시행하는데 그 효력이 있다고 하였다. 아프리카인들의 지역감정까지 편승해 많은 동조자들이 도나투스파를 형성하였으나 314년 Arels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3)차이점
노바티아니즘은 3세기 로마교회에서 교회 순수성에 관한 논쟁이었고, 도나티즘은 4세기 카르타고 교회에서 성례효율성에 관한 논쟁이었다.
4) 유사점
둘다 분파주의로 나갔으며 그 근본원인은 대다수의 도덕적 방종으로 생긴 불만이었으며 박해시기에 배교자들의 관대한 처사에 대한 방항운동이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를 비교하라.
1) 알렉산드리아 학파
알렉산드리아시는 로마제국의 제2의 도시요, 상업도시로서 헬레니즘적 유다이즘의 본고장. 특히 이 도시의 지적생활은 출중해서 도서관은 가장 유명했다. 교리문답학교(Catechetical school)가 있었고,클레멘트,오리겐,아타나시우스등을 배출했다.
(1) 클레멘트 - 교리문답학교(Catechetical school) 교장역임, 계시와 철학은 상반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철학의 진리와 기독교 계시와의 조화(철학+신학)에 노력했다.(부르너,틸리히,판넨베르그에 영향을 줌) Allegorical interpretation을 처음 시도했다. (어거스틴,스피노자,헤겔등에 영향)
(2)오리겐 - 6천여권의 저서가 있고 클레멘트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에서 가르쳤다. 인간을 세가지로 (육영혼-Trichotomy)로 분류한 최초의 조직신학자이다. 인간 출생이전에 영혼의 선재설을 주장했고, 아버지와 아들 영원한 출생( Eternal generation)으로 보면서 삼위일체를 최초로 주장함
저서 - ①Hexapla(헥사플라,성서6가지 역) : 27년동안의 대작으로 구약 히브리어 원전과 LXX,다른 번역서들을 대조하여 LXX의 정확성 규명을 위한것.
② De principiis(제 1원리) : 영지주의를 반대하기 위하여 쓴 최초의 조직신학책, 사변적, 합리적, 논리적,이성적인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 총 4권으로 되었고, 1권은 영적인 것, 2권은 물질세계와 인간, 3권은 자유의지,악마와 싸움, 선의 궁극적 승리, 4권은 성경
2) 안디옥 학파
안디옥시는 로마제3의 도시이며, 최초의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이 여기서 불려졌고 문화적 언어적으로 예루살렘과 가까워 히브리 영향을 받았다. 대표자는 사모사타의 바울이다. 유일신을 강조하였으며 삼위일체를 반대했다. 말하자면 단인신론적(Monotheism) 경향이었으며,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물이다.”고 주장하여 결국 이단으로 정죄받았다.
5. 니케아 회의와 칼케돈 회의를 비교 설명하라.
1) 니케아 종교회의
① A.D 325년 콘스탄틴 황제가 아리우스 논쟁의 종결과 부활절 일자문제와 교회의 일치를 위해 니케아에서 소집하여 열린회의이다. 이 회의 논쟁의 초점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동일본질(Homo ousia) 인가, 유사본질(Homoiousia)인가에 있었는데 아리우스 장로가 “그리스도는 최초의 피조물”이라는 발언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약화시킴으로써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더 감독과 그의 뒤를 이은 아타나시우스는 “성자는 영원하사 성부와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며 창조된 일이 없는 존재”임을 주장함으로써 회의는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여 추방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이시요 완전한 인간임이 결정되었다.
②결의사항 :
부활절 날짜 결정(춘분후 만원 다음주일),
감독 임명시 3명 이상의 감독이 안수해야 함,
사순절 기간을 40일로 결정,
성직자의 고리대금업 금지.
③의의 : 예루살렘회의후 첫 회의로서 니케아 종교회의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이단을 극복하였으며 니케아 신조가 교회의 정통신앙으로 남아있게 되었고 교회의 문제 특히 신학적인 문제를 회의를 통해서 다루로 결정하는 교회회의주의(Consiliatism)가 나타났다. 그러나 황제의 영향이 교회에 들어옴으로써 교회는 국가가 구별이 없는 국가교회 형태를 취하게 되어 교회가 영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수도원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2) 칼케돈 종교회의
①A.D 451년 칼케돈에서 Marcianus 황제가 소집,600명의 Bishop들이 참석함. Eutyches가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의 통일성을 강조하기 위해 성육신 할 때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어 신성만 나타내고 그리스도는 우리 육체와 같지 않다는 단성론을 주장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간의 논쟁을 결정지었다.
②결의사항 :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에 있어 완전하여 참 하나님이고 참 인간이다.
신성은 성부와 같고 인성은 우리와 같으나 죄가 없으시다.
그리스도는 한 인격안에 두 본성을 가지고 계시며, 이 두 본성은 서로 혼동되지 아니하고(Infusedly), 서로 변하지 아니하며(Immutably), 서로 분열되지 아니하고(Inseparably), 분리되지 아니한다는 칼케돈 신조를 결의했다.
③반웅(약점) :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업(Work)은 다루지 않고, 누구인가(Person)만 다루었고 후에 동방교회에서는 바로 수용되지 못하고 분열을 가져왔으며, 콘스탄티노플등 큰 교회는 받아들였으나, 에집트 Coptic 교회, 시리아 Jacobite church, Armenia교회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단성론적으로 나갔다.
6. 기독론 논쟁에 대하여 논하라.
1)“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다.”라는 니케아 회의의 결정에서 예수님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이 기독론논쟁의 초점이다.
논쟁의 발단은 플라톤 사상에 영향을 받은 Apollinarius가 플라톤의 3분설을 도입하여 인간이 육과 혼과 영으로 구성되었다면 그리스도는 영대신에 하나님의 로고스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러한 구분은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고 하여, 완전한 인간이 아닌 그가 어떻게 인간의 죄를 속할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야기된다. 이에 대해 갑바도기아의 그레고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아는 로고스이지만 이 로소스는 완전한 인성을 섭취하고 동화하였다고 반박함으로써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제 2차 에큐메니칼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된후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에 있어서 양성이 완전히 계시된분“이라고 결의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지역과 안디옥 지역간에 논쟁이 벌어졌다.
2) 안디옥의 Nestoius는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kos)라고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는 신이 아니고 로고스가 임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알렉산드리아의 Cyril은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그리스도를 하나님보다 낮게 평가하며 Homousia를 부인하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반박하며 마리아를 Theotokos라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의 동일성과 연속성을 주장하였다. 431년 제 3차 에큐메니칼 회의에서 Nestorius파를 정죄하여 추방한후에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라고 결정했다.
3) 그러나 시릴의 뒤를 이어 Eutyches는 “그리스도는 양성으로 되어있지만 성육신하신후에는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어 하나님의 성으로 되었다는 단정론(Monophysitism)을 주장하여 안디옥의 Nestorius의 뒤를 이은 Flavian 과의 논쟁이 계속되었다. 449년 에베소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Dioscoros는 자기파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하여 Eutyches를 지원하여 안디옥 수령을 쫓아내고 Eutyches 의 정당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451년칼케돈회의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에 있어서 완전하여 참 하나님이고 참인간이다. 신성은 성부와 같고 인성은 우리와 같다. 죄가 없으시며, 한 인력안에 두 본성을 가지고 계시며 이 두 본성은 서로 혼동되지 아니하고 변하지 아니하며, 분열되지 아니하고, 분리되지 아니한다는 칼케돈 신조를 채택함으로써 단성론을 주장한 Euthches
4)결론 : 이 회의를 통하여 니케아 회의후 계속 논쟁되어 오던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 지역의 기독론의 논쟁은 종결을 짓고, 논쟁의 중재자의 역할을 했던 서방교회의 로마 감독의 위치가 상승되었으며 일부동방교회에서(에집트,시리아,에디오피아)는 단성론을 계속 지지하는 반응을 보였다.
※ 제 7차 에큐메티칼 회의에서 화상논쟁에 대하여 논하시오.
동방제국의 황제 레오 3세가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하여 교회에서 미신을 숙정하는 운동을 요하여, 종교그림 숭상을 폐지하고, 725년에는 예배에서의 성상사용을 금지하여, 성상논(Iconoclastic controvercy)을 불러일으켰다. 교황과 수도승, 평민들이 황제의 입장을 대항하여 종교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교황 그레고리 3세는 그의 주재로 731년 로마에서 곧 회의를 열어 성화반대자들을 파문하고, 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청함으로써 영원히 동방제국과 관계를 끓으려 했다. 그러나 황제 콘스탄틴 6세가 동방교회로서는 동서방이 함께 모이는 ( )후 총회 제 7차 에큐메니칼 회의(787)을니케아에서 개최하여 성자,성모,성화,십자가, 복음서등을 “마땅히 응당한 경의와 존경을 받을 것들이지만 그것들이 자체적 신성을 지닌 것은 아니므로 진정한 예배의 대상은 될 수 없다. 성상에 드려지는 경의는 그것이 표현하고 있는 존재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며, 성상에 경의를 표하는 자는 성상속에 표현된 주체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공표했다. 따라서 성육신의 경우처럼 물질세계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승리한 셈이다. 결국 동서방 모두 성상숭배를 인정하게 되었다.
7. 수도원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그것이 교회에 끼친 공적과 과오에 대하여 쓰시오.
1)배경
금욕주의 이상과 기독교 도덕의 2중표준(청빈,독신)은 콘스탄틴시대 이전부터 오랫동안 교회내에 성장해오다가 고대 철학속의 금욕주의 경향의 도움으로 더욱 발전하게 된다. 특히 기독교가 국교가 된후 세속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금욕생활, 경건생활,도덕적 생활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교회가 조직적,규칙적, 기구적으로 됨에 따라 개인의 영적 활력소의 부족된 생활에 대한 반발과 동양 이원론 사상이 교회에 침투되어 물질을 떠나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욕망이 작용함으로써 수도원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2) 방법 : 수도원 운동의 시조는 안토니였고, 이 운동을 개선한 사람은 파코마쿠스로 최초의 기독교 수도원을 설립함으로써 이성적인 기독교,공동체 개념이 발생하였다. 후에 수녀원(Nunnery)도 설립하였다.
파코마우스를 계승하여 소아시아에서는 바질이 노동,기도,성경읽기를 중심으로 이 운동을 전개하였고,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세상에 소개된다. 서방수도원 운동의 개혁자는 베네딕트로 이는 예배,노동,독서중심으로 극단적인 금욕주의가 아닌 엄격하지만 이성적인 신앙훈련을 할 수 있도록 수도원을 운영하였다.
3) 고대수도원이 교회에 끼친 영향.긍정적 영향 : 최선의 신자들이 모여 신앙공동체를 형성함으로 선교사,신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미개한 촌락등에서 학교구실을 함으로써 문맹퇴치와 교회학문향상에 기여했으며, 교부들의 결사본을 출판하는 출판사 역할을 했고, 주민들의 병원,양로원,고아원,구호소 역할을 하였다. 또한 수도원 자체의 자영농업을 통한 농업기술의 개발과,보급과 수도원 건축으
로 건축기술이 향상되었다.
부정적 영향 : Celibacy 원칙대로 결혼기피로, 수녀와 수사간의 문란한 관계로 도덕적 이중성을 갖게하고 (고아원의 시초) 금욕주의에 입각한 구원관(공덕 사상)을 강조함으로써 미신적인 신앙풍조를 조장했으며, 세상사람들을 격멸하고 수도원의 치부를 말미암아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나태,게으름,성직매매,수도원간 분파형성을 야기시켰다.
※반 어거스틴주의에 대해 설명하고 그것이 로마교회와 개신교에 어떤 교리적 영향을 주었는가 ?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 펠라기우스주의가 정죄되기는 했지만,모든 카토릭교도들이 아우구스티누스와 의견이 완전히 일치를 본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자유의지에 반대하는 선택의 문제를 둘러싼 논쟁의 터전이 John Cassian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이 생소하다고 했으나 몇몇 사람들은 여전히 아우구스티누스 견해를 지지하게 되었다.
Arles의 감독은 529년 오렌지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원죄를 긍정했으나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선언했다. 반면에 이 회의는 우리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행동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 믿음의 시작 및 믿고자 하는 의욕이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로운 선물이외에서 올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도 우리가 의를 택할 수 있다는 것을 긍정하는 사람들을 정죄했다. 그러나 불가항력적 은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인간의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언명하지도 않았다. 또한 이회의는 어거스틴이 세례를 중시했던 것 보다 더욱 중시했다. 그래서 오렌지회의는 세례 때에 받은 은총을 통해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충실히 노력했다면 그리스도의 도우심과 뒷받침에 의해, 영혼의 구원에 속한것들을 행할 수 있고 또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선언했다. 따라서 인간의 의지는 아담의 타락 때문에 전적으로 손상되어 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은총에 의해 고침을 받고, 그리스도에 의해 도우심을 받기만 하면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순수한 어거스틴주의가 약화된 전통적 어거스틴 주의라 할 수 있고, 여러 세기를 통해 내려온 로마적 기독교의 특징인 공덕사상이 여기서 나온다고 볼수 있다. 오렌의 공회의 결정은 반 펠라기우스니즘이란 성격을 띠고 있으며 따라서 중세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으로 시작하나 펠라기우스에 의해 인간의 제한적 선행 가능성을 두고 있다. 이러한 사상에서 중세 로마카토릭신앙의 기초를 형성한 공덕사상이 나타났으며 칼빈은 인간의 노력, 공적이 인간의 구원사역에 동침할 가능성이 1%도 없다고 본다.
8.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의 주요쟁점을 쓰시오.
1) 어거스틴
초대교회에서 중세교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활동하였던 신학자 어거스틴은 초대교회 신학을 집대성했고 중세교회의 문을 열었으며 바울이래 가장 깊고 영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어거스틴은 원죄는 유전되며 아담의 모든 후예는 선을 택할 자유가 없고 다만 인간의 자유의 죄를 짓는데만 자유롭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즉, 구원은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예정에 속한 것으로 인간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하며,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죽음과 유아세례문제에 대하여서는 죽음은 인간의 타락의 결과
이며 유아도 죄가 유전되기 때문에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간의 도덕적 노력을 제거시키고, 인간이 선하게 되려고 노력하지 않음으로써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 중세 공덕사상이 나온다.(인간의 책임성을 부인)
2) 펠라기우스
영국의 수도사로 에베소의 장로가 된 펠라기우스는 원죄를 부인하며 아담과 이브의 죄는 그들에게만 작용하고 후손에게는 유전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인간에게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어서 개인의 노력과 의지에 의해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예수 없이 세례를 통하여 죄사함을 받을 수있고, 율법도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한다고 주장하며, 죽음은 죄와 관련없는 자연적인 것으로 유아는 죄가 없기 때문에 유아세례는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431년 3차 총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3) 반 펠라기우스 주의(Sem-Pelagians,Semi-Augustinians)
카톨릭교회에 의해 펠라기우스가 정죄를 받았지만 모든 카토릭교도들이 어거스틴의 의견에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제롬은 은초이 구원에 불가결하다는 것은 인정하였으나, 하나님의 은총이 불가항력적이라는 생각은 없었고, 인간의 의지가 회심에 한 몫의 역할을 담당한다고 생각했고, 빈센트는 은총과 예정에 대한 어거스틴의 교리가 카토릭전통에 근거가 없는 새로운 주장임을 밝혀 공격하였다. 이 동조자들은 16세기에 와서 모든 점에서 어거스틴과 의견을 같이 하지만 예정설과 불가항력적인 은총을 부인하였기에 Semi-Pelagians,Semi-Augstinians)라고 불렀다. 이에 529년 오렌지 회의가 소집되어 반 펠라
기우스 논쟁이 끝을 맺는데, 그 결정사항은 원죄를 긍정하고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가려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돌아갈수 있다고 했다. 또한 인간이 선을 행할수 있는 능력은, 예수를 믿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온다고 하였으나, 예정과 불가항력적인 은총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결과적으로 Augustine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 같지만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부인하지 않음을 보여 주었고,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은총의 전수를 세례에 국한 시켜 은총의 세례전적 특질과 선행의 공덕을 표면에 내세움으로써 어거스틴 사상은 승인하였으나, 대중적인 카토릭 종교 개념의 방향으로 수정을 겪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런 사상에서 중세 로마 카토릭 신앙의 기초를 형
성한 공덕사상이 나왔으며, 칼빈은 인간의 노력, 공적이 인간의 구원사역에 동참할 가능성은 1%도 없다고 본다.
9. 스콜라 철학에 대하여 설명하고 기독교에 끼친 영향을 서술하시오.
① 스콜라 철학은 중세신학에 최대한 업적을 남겼으며,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확립시켰고, 기독교의 진리를 철학과 이성으로 논증하려고 노력한 중세신학의 한 흐름이다. 스콜라 철학의 주요 논쟁은 보편(universal)이 실재론(Realism)인가 유명론(Nominalism)인가의 논쟁을 다룬 보편 논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때문에 중요성을 지닌다. 즉, 그리스도의 사역은 전인류를 위한 것인가를 생각할 때 실재론은 인류의 개념이 실재로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전 인류를 위한 것이고 개체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며, 유명론은 말은 있지만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즉 보편의 개념이 없다고 하여 개별자를 강조한다.
② 실재론의 대표학자는 안셀름,토마스 아퀴나스가 있으며 유명론자는 John Duns Scotus,William Occam 이 있다. 안셀름은 극단적 실재론자로 진정한 변증법은 신학적 진리를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신앙과 이성은 충돌하지 않고 상호 협조한다고 했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존재를 존재케 하는 존재이며 궁극적인 선이며, 완전이며, 그는 사고에서와 동시에 실재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논문 “속죄에 관한”(왜 하나님이 되셨나)에서 인간은 죄로 하나님과 분리된 존재이므로 죄의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데, 어떤 인간도 죄를 대속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없는 인간이 되셔서 대신 죽음으로써 인류의 죄를 보상했다고 주장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 개념을 기독교 신앙
에 조화시켜 스콜라 철학을 종합 집대성을 시킨 교회 신학의 중심을 이룬 사람이다. 그는 중세의 최대 조직신학서라 할 수 있는 신학대전을 집필하여 “하나님은 자연과 계시의 근원이기 때문에 이성과 믿음은 둘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기독교의 일부 진리들은 이성에 의해 뒷받침 받을 수 있고, 다른 진리들은 믿음에 의해 도달할 수 있지만, 이성과는 양립할 수 없다.”고 한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자유롭고 값없는 은총으로 가능하며, 은총은 오직 성례전을 통해서 오게 되며, 이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수난의 덕이 지체에 전해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례전의 효능은 집례행위 그 자체에서 발생한다고 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독교 신학이 튼튼한 지적 기반위에 설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지만, 은총과 공덕(성찬,고해) 두 개념을 중요시 여김으로써 후에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해 주었다.
John Duns Scotus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비판을 가하면서 신앙과 이성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하나님은 완전한 자유시고 이성에 구해받지 아니하시며 그래서 하나님 행동은 이성과 모순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의 의지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지 이성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이성에 모순되는 모든 진리를 우리가 수용하는 것은 교회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며, 모순이 되더라도 교회의 권위이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실재론자였지만 보편자보다는 개별자를 강조했다.
William Occam 은 이성과 신학 결렬을 더욱 격렬하게 주장했는데, 그는 스코투스의 제자로 실재론을 맹렬히 공격했다. 사물 자체에 대한 실재적인 지식은 사람을 가지지 않고 오직 정신적인 개념만 가진다고 생각함으로써 어떠한 신학적 교리로 철학적으로 가능하지 않음을 주장했다. 즉 그는 이성을 통해서 기독교가 증명되는 것을 반대하고 기독교 신앙은 교회가 가르치고 성서가 말하기 때문에 그것은 교회와 성서의 권위에 입각하여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후 종교개혁 직전까지 유명론이 지배적인 신학적 입장이었고 14,15세기에 점점 더 신비주의로 행하여 스콜라 학문이 제공해 주지 못했던 지적 종교적 위안을 어거스틴에게서 찾으려 하였다.)
③ 스콜라 철학의 평가.
ⅰ공헌 : 기독교 발전에 노력하여 다양한 신학방법론이 나타났고, 기독교 진리를 합리적 철학적 방법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했으며 기도교 진리를 규명하는데 오류방지에 영향을 끼쳤다.
ⅱ. 약점 : 성서의 진리를 철학과 무리하게 합하려고 시도하여 사변적, 궤변적 논쟁을 위한 논쟁을 일삼았고, 성서나 교회역사에 전혀 근거없는 이론을 끌어들여 자기 주장 실현에 급급했으며, 이단을 뒤집어 정통이라는 독단을 만들어 냈다.
ⅲ. 교훈 : 스콜라적인 방법, 즉 변증법적인 방법으로는 기독교 진리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10. 동서방 교회의 분열 요인에 대하여 서술하시오.
1) 분열과정 : 서방교회 LeoⅨrk 동방교회 구역인 시실리와 이태리 남부쪽을 자기 구역으로 선정하기 위하여 결혼한 성직자들을 반대하는 운동을 실시하여 결혼한 성직자들을 다 쫓아내라고 하였다. 이 때 동방 Constantinople 의 Michael cerularius가 콘스탄티노플과 불가리아쪽의 라틴계 수도사들은 축출하고 수도원을 폐쇄시킨다. 서방의 교황 LeoⅨ는 1054년 7월 16일 추기경 Humbert를 Constantinople에 보내어 M.Cerularius에게 파문장을 전달하고, 동방교회는 이 파문장을 불태우고 서방교회와 형제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고 하여 최종적으로 분열하였다.
2) 분열 원인 : 395년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은후,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었고, 특히 동서방교회의 종족과 언어가 달랐기 때문이다. (동방은 희랍계 헬라어, 서방은 라틴계 라틴어). 더 실질적인 분열원인은 동서방 교회모두 니케아 신조를 믿었지만 서방교회가 니케아 신조에 filioque라는 말을 첨가한데 있다. 즉 동방교회는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온다 Holy spirit proceeded the father.라고 하였고 서방교회는 여기에 and from the son(filioque)을 첨가하였는데, 성령이 성부로부터만 나왔다고 하면 성자의 위치를 약화켰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서방교회는 희랍철학에 익숙했기 때문에 삼위일체 동의가 쉬웠지만 동방교회는 일신교, 일원론을 주장했다. 3번째 원인은 여러 가지 교리와 관련된 차이에 있다. 토요일 금식문제에 있어 동방교회는 금식을 안했지만, 서방교회는 금식을 하고 동방교회는 사순절 기간동안 일체의 육식을 금하고 빵에 누룩을 사용하고 개교회 신부들이 결혼이 가능했으며, 수염을 기르고 장로들이 죽어가는 자에게 종부성사할 수 있었지만 서방교회는 사순절 기간동안 밀크, 버터,치즈사용이 가능했고, 무교병을 사용했으며, 모든 신부는 결혼해서는 안되며, 수염을 깍았으며, 종부성사는 성례이므로 장로들이 할 수 없다는 동서방 교회의 차이를 나타내었다. 마지막으로 불가리아 교회의 소속문제가 분열의 원인이었다.
11. 중세교회사에서 교황청, 십자가 운동, 종교재판, 탁발승단의 출현, 신비주의 운동으로 이어지는 맥락속에서 찾을 수 있는 중세게 기독교 신학의 중요 원리등을 설명하시오.
①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후 로마 교황이 세속사까지 관여하게 되었고, 590년 그레고리가 교황으로 선출됨으로써 로마 교황청의 교권을 확립하여 영국선교에 나섰다. 이로써 야만족속의 개화, 교화를 위한 본격적인 선교가 시작이 되었다. 중세 선교의 특징은 상하의 개종,강압적 집단적인 선교방식이었다. 이시기에 평신도 서임권 논쟁으로 속권과 성직의 우위다툼이 전개된다.
②십자군 전쟁은 동방교회 특히 예루살렘 성지가 회교도의 손에 들어가 순례자들이 괴롭힘을 당하자 교황 우르반 2세에 의해서 시작된다. 글 결과 교황의 사면권(Papal indulgence)교리가 형성되었고 피흘리지 않는 이방인 선교, 영혼구원을 위한 전쟁의 교훈을 얻었으며, 자결주의적 기초가 형성되었고, 유럽이 개화,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황의 사면권은 후에 루터가 종교개혁의 원인으로 삼았다.
③중세의 이단은 성서에의 충실보다 교황의 명령에 충실했는가에 따라 결정되었다. 왈도(Waldo)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경을 가르치며 로마교리를 공격했으며, 알비파는 물질로부터의 구원을 거부했으며, 성서를 자국어로 번역하여 보급하였다. 따라서 중세의 대표적 이단들은 종교개혁의 봉화가 되었다. 교회내의 이단은 척결을 위해서 로마교회가 종교재판을 하였으나 교회가 진리를 떠나면 죽은 조직이란 진리를 남겼다.
④탁발승단은 중세의 프란시스칸, 도미니칸, 카멜라이츠 및 어거스틴 수도단을 의미한다.초기의 수도원이 세속을 떠나 은거한데 반하여, 중세의 수도원은 도시 근처에 살며도시인들과 더불어 탁발로 살았다. 이는 교회의 타락과 세속화의 영향으로 수도사의 길을 통해 완전한 기독교인의 삶을 살려는 건전한 교회내 운동이었다. 이것은 종교개혁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⑤중세의 신비주의는 교회가 생명력을 잃어 제도적, 기구적인 것에 몰두했을 때, 하나님과 신자가 직접 상통하는 신앙의 상태를 갈망하는 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주로 독일에서 많이 나타났으며, 에르하르트와 타울러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외식적 의식이 아닌 하나님과의 내면적인 관계가 높은 신앙경지라 볼 수 있다.따라서 이들 신비주의자들은 혼자의 영혼구원을 위했으나 루터는 개혁교회로 출발했다.
결과적으로 중세교회는 1000년동안 성직 상하의 교권제도가 확립되고 교황권의 증대로 선교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또한 탁발승단, 신비주의자들의 대두로 교회에 영성이 제공되어 개혁운동의 터전이 되었으며, 십자군 운동은 폭력적으로 기독교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의도가 실패되었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이단을 규제할 수 없음을 볼 수 있다. 이로써 개혁운동의 기초가 놓이고, 교황의 권위와 속권의 끝없는 갈등은 교회와 국가권리를 나누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2. 십자군 운동의 원인, 과정, 배경, 영향에 대하여 논하시오.
11~13세기에 걸쳐 예루살렘을 셀주크 터어키루부터 탈환하기 위한 전쟁으로 200년간에 걸쳐 8회의 전쟁이 일어났으며, 이들은 휘장에 십자가를 표시한 것이 유래가 되어 그들을 십자군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그들의 운동은 전적으로 종교적인 것은 아니었다.
1) 원인 : 10~11세기 심한 흉년으로 정치,경제적으로 불안해 짐으로써 사람들은 삶의 현장보다 내세 지향적으로 흘러 성지순례를 통한 종교적 위안을 찾고자 했다. 동방제국 황제들이 성지를 이슬람으로부터 회복해 달라는 로마 교황청에 구원을 요청한 이 도 있었지만, 계속 기독교지역에 확대되는 이슬람교도들의 세력을 막고 기독교를 회복하기 위해 십자군 운동이 일어난다. 638년 모슬렘 손에 예루살렘이 빼앗긴 이래 순례에 대하여는 실질적으로 방해를 받지 않았으나, 1071년 셀주크 터어키의 예루살렘 점
령으로 순례가 불가능해지고 순례지를 확대하며 통행세를 징수한데서 원인의 시발점을 찾을 수 있다.
2) 과정 : 십자군 원정은 8차에 걸쳐 행해지나 1차와 6차에만 승리했을뿐 기독교 세력 의 패배였다.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가 프랑스 교회회의에서 성지회복을 호소함으로 써 그는 참가하는 자에게 완전 면죄부를 약속하고 기독교인들의 참가를 호소했다.
1096년 출정, 1099년 예루살렘 탈환에 성공했으나 십자군의 후퇴로 다시 이슬람교도들 에게 빼앗겨 버린다. 그후에도 7차례에 원정이 더 있었으나 처음 원정과는 달리 뚜렷 한 전과를 세우지 못했다.
3) 실패원인 : 교황에게 군대의 통솔권이 없었고, 출정한 왕,기사,귀족들의 목적이 서로 달랐다. 또한 종교적 열정이 식고 물질 탈환의 목적으로 기울어졌으며,더우기 십자군은 오합지졸이었고 이슬람군대는 훈련된 군사였다.
4) 영향
- 종교적 영향 : 초대교회는 인간을 죽일 수 없었으나, 하나님을 위해서 사람을 죽이게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이슬람 교도의 개종의 어려움을 주었다. 교황의 권위가 저하되고 대사면으로 인해 면죄부 등 중세신학에 영향을 끼쳤다.
- 군사적 영향 : 이슬람 군대의 서방진출이 좌절되고, 영주 기사의 군사력이 약화됨.
- 사회적 영향 : 봉건제도의 해체를 초래했고, 중산층 계층의 지위가 상승됨.
- 정치적 영향 : 왕권이 강화되었고 중앙집권이 강화되었다.
- 경제적 영향 : 상공업, 해운, 도시의 발달. 화폐제도가 발달되었다.
- 문화적 영향 : 서방문화, 비잔틴 문화, 이슬람문화의 교류가 촉진됨으로써 르네상스 의 기틀을 마련했다.
끝으로 십자군 운동은 유럽사회의 변혁의 계기였으며, 기독교 전도가 영토적인 확 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구원에 있음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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