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 신학
- 선한용 교수-
Ⅰ. 서론
1. 왜 어거스틴인가 ? (어거스틴 사상의 중요성)
어거스틴의 사상은 “행복론”이다 : 인간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
P.Tillich는 기독교 사상사에서 어거스틴에 대해서 “이제 한 사람을 공부할텐데, 그 사람은 어느 누구보다도 서양사상의 대표자이다. 어거스틴은 서양사상이 말하려는 모든 것의 기초이다. 어거스틴은 앞으로 다가올 중세기 1000년뿐 아니라 자기 이후 모든 세대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개혁가들이 없고 천주교와 대항한 사람이다. 어거스틴은 현대철학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틸리히는 “거의 확실하게 내 자신이나 내 전신학은 어거스틴 사상의 계열에 속해있다.”
다니엘 윌리암스 - 서양기독교 사상사는어거스틴을 인용하는 주footnote밖에 안된다.
에드먼드 훗셀 - 어거스틴이야말로 시간의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한 사람이다. 시간의 문제에 절망했던 사람이다.
인간의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어야 한다. 시간의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은 어거스틴의 경계선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수 없다.
어거스틴은 프로이드 이전의 프로이드요, William Hordein - “개신교 신학입문”에서 “ 어거스틴과 같은 사람이 천년에 한번씩 나온다면 세상은 달라진다.
어거스틴의 중요성 - 어거스틴의 사상은 고구마 줄기와 같다.어거스틴은 모든 계열의 사람이다. 모든 문제를다룬다.
2. 어거스틴신학연구의 단절.
1) 어거스틴의 저서가 방대하다. 총 177권을 썼다. 어거스틴의 제자“ 어거스틴의 책을 다 읽었다는 사람은 거짓말쟁이 다.”
수정록 - 어거스틴이 죽기전 자기가 쓴 책의 수정부분을 쓴책.
2) 어거스틴의 사상은 고정된 체계가 아니라 진전해 나간다. 진전해 나가면서 쓰고 쓰면서 진전해 나간다.
초기 - 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로마 카토릭이 좋아하는 시기
중기 - 성서,바울신학연구, 초기에서 다루지 않은 부분.
후기 - 펠라기우스 논쟁을 통해 “은총과 예정”에 관해서 다룸
초기에서 후기의 문제 해답의 강조점이 다를뿐 사상이 다른 것은 아니다.
3) 다루는 문제가 다양하다.
여성신학자들은 어거스틴을 싫어한다. 그러나,어스틴에게는 여성의 이미지가 중요하다. 어거스틴에게는 모니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모니카는 하나님의 섭리를 대표하는 상징이다. 단테에게 삐아트리체처럼.
어거스틴의 회심이후 여자(카르타고,모니카의)품에서 여자(교회)의 품으로 가는 것이다.
4) 어거스틴에 관한 연구,논문이 너무 많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연구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3. 어거스틴의 사상적 특징.
(어거스틴이 말했다보다는 어거스틴이 왜 이렇게 말했는가가 더 중요하다)
1) 실존주의적 해석이 농후하다.
예를 들면, 초기 작품에서 독백록(soliloquia)2권7장 “나는 하나님과 영혼에 대해 알고자 한다. 그 이외에는 알고 싶지 않다.”
내가 어떻게 이 불안을 극복할수 있겠는가 ? 하나님 당신은 나를 당신을 향해 살도록 하셨기에 하나님 품안에 안길때까지 난 평안하지 않습니다.
고백록 16장 “나는 지금 하늘의 별들의 거리를 쟤는것도 아니며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2) 내면성 (Homo Interio)
(1) 신학적 문제에 대한 답을 인간영혼의 내면에서 찾으려 했다. 신학의 문제 답을 심리학적으로 찾으려 한다. “너는 밖으로 나가지 말라. 너 자신안으로 들어오라.”내적 인간안에 진리가 거한다.“
하나님의 현존을 자신안에서 찾는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과 진리와의 접촉점이다.
(2) 악이라는 것도 그 원인을 인간 마음의 왜곡,선한의지의 왜곡에서 찾으려 한다.
죄성을 나밖(환경,부모)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3) 시간의 문제
어거스틴이전에는 시간은 운동(공간에서의)이다. 어거스틴이후에는 시간의 문제의 해답을 인간문제의 내면에서 찾는다. 예를 들면, 미래는 소망에서 과거는 기억에서 포착한다.
(4) 삼위일체 - 도 인간 내면에서 찾는다. 사랑하는자 - 사랑받는자 - 사랑
3) 신중심 - 신과 나
4) 의지론 (≠주지론) voluntarism 철학사상에 있어서 의지의 문제를 사상의 중심에 놓았다. [자유의지론]
5) 행복론 : 인간이 어떻게 행복할수 있는가. 시간은 무상, 시간안에서는 항상이란 것이 없고 무상만 있을뿐이다. 행복도 없어진다. 고백록 10권 20:29:“내가 당신을 찾는다고 할 때, 행복을 찾는것입니다. 내가 행복하다고 말할때까지 행복하지 않습니다.”
Ⅱ. 역사적 배경
1.어거스틴의 생애
Thagaste에서 출생(354년 11월 13일) 부친 patricius 어머니 모니카사이에 .
북아브리카는 남자는 억세고 부인을 잘때리는데, 어거스틴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리지 않았다고 한다. 말년에 부인의 영향으로 회개한다.
어거스틴이 18세에 아버지는 사망.
남동생 Nevigius 여동생 Perpeua(수녀가 됨).
6대 도시를 중심으로 그의 생애가 펼쳐진다.
카시키아쿰에서 6개월 명상. 저술(4권 :초기작) - 플라톤 사상이 농후하다.
① 회의론 반박
② 독백록
③ 질서론 (섭리론)
④ 행복론
387년 4월 25일 암브로시우스 감독에게 세례를 받고 모니카와 함께 돌아오다가 신비체험을 한후 어머니는 사망한다.
로마에서 자유의지론 1권을 저술한다.
고향에 돌아와 자활수도원을 세우고 [교사론; 아들과 산책하면서 대화한 것을 그대로 책으로 옮김,참된종교]
히포의 감독 Valerius가 라틴어를 못해 강제로 어거스틴에게 안수한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울었다고 한다. 수도원에서 명상이나 하려고 했는데, 감독에게 성서를 공부할 수 있게 해줄것과 어거스틴이 운영하던 수도원을 옮길 것을 부탁했다.
감독들만이 설교할수 있었고 사제는 할수 없었는데 어거스틴에게는 설교할수 있는 특권 주었다.
그는 달필에다가 기억력이 좋았으며 문장가였다.
395년 감독으로 안수받는다. 한교구에 두 감독이 있는 것은 불법(395년 니케아 회의)이었는데 396년 Valerius가 사망함으로 아프리카 교구전체에 어거스틴이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도나티스와 논쟁. 펠라기우스와 논쟁 - 하나님의 은총, 죄, 성도의 문제.
어거스틴은 말년에 있었던 일 - 375년 훈족이 고트족을 서방으로 압박
378 로마 물리치고 블란서로 진격
410년 고트족 장군이 로마를 점령. [신국론]집필 (413-426) - 신의 도성
428년 반달족이 라인강을 진격 - 스페인 점령
많은 사제들이 어거스틴에게 피해야 합니까 ? 머물러야 합니까 ? 하고 물을 때 어거스틴은 “그대로 있어라 그러나 교인이 다 가면 그때 떠나라.”고 하였다. 어거스틴은 히포로 피난온사제와 함께 기도했다.
기도제목은 ① 이 난에서 우리를 구하소서② 만약 구원받는 것이 당신의 뜻이 아니라면 이길 인내력을 주십시오 ③ 나를 당신의 나라로 불러 주십시오.
2. 고백록 - 어거스틴이 히포의 감독이었을 때 저술한 책이다.(397-400)
1) 고백록의 저술동기
(1) How to become Christians : 교인,후대에게 가르쳐 주기위해 기록했다. 380년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면서 로마시민이면 모두 크리스챤이며 세례를 받았다. 누구나 기독교인이 된다. 그러나, 회심의 경험없이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cf) 키케골은 “모든 인간이 기독교인이지만 기독교인은 없다.”
하나님의 자녀는 있어도 하나님의 손자는 없다. 우리는 회심을 통해 1세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결심,회심없이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
(2) How to live -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를 통일하면서 기독교 박해가 없어졌다. 박해전 가르침 - 어떻게 순교할것인가를 가르침 , 순교자 숭배가 대단했던 시기.
박해후 가르침 - 어떻게 기독교인답게 살것인가를 가르친다.
교회의 가르침이 이렇게 달라졌다.
(3) 죄의 문제 - 죄의 문제 심각하게 다뤄진 것이 어거스틴에 의해서이다.
박해시 기독교인의 적은 로마였고 사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로마가 기독교에 들어오면서 마귀는 어디로 갔는가 ? 바로 내안에 들어왔다. 내안의 죄와 어떻게 싸울것인가 ?
(4)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 신앙과 내용을 가르치기 위해서 - 이야기 신앙. 어거스틴의 신학이 고백록속에서 이야기 형식으로 나타난다.
Ⅲ.고백록 (confessions)
1. 서론
:복수로 쓴이유는 고백록이라고 할 때 참회록 이상의 뜻을 품고 있다.
1) 제목의 이유
① Confessio Laudis 찬양의 고백이다. ② Confessio peccatorium 죄의 고백이다 - 내면의 죄의 고백.그 누구의 죄도 아닌 자기의 죄를 고백한다. ③ Confessio fidei신앙고백 - 자기교회로 오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서 신앙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신학서설이다.
박해받던 기독교가 기독교 시대(Tempora Christiana)가 되던 상황에서 물밀 듯이 교회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가르쳐야 하기에 자기의 과거를 이야기 하면서 기독교 신앙에 대해 가르친 책이다. 따라서 고백록은 신앙고백의 책이다. 이야기 신학의 패러다임이다.
2) 어거스틴이 자기의 마음의 회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어머니의 회심,예수님을 믿어 시간이 가면서 믿게되는 아버지의 회심, 제자 알리피우스의 회심등 모든 사람들의 회심을 말하고 있기에, 오늘 우리의 전향을 향해서 썼기에 복수로 썼다.
어떻게 해서 우리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가 ? 로마시민으로 태어나면 기독교인이라고 이해했을 때, 어거스틴은 고백록을 써서, 나와 같이 눈물의 회심,내적결단이 없이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
3)콘스탄틴이전에 기독교인은 박해에 대한 순교를 가르쳤다. 그러나 이제는 핍박이 없기에, 이 세상에서 어떻게 기독교인답게 사느냐를 가르쳐야 한다.
cf)한국기독교의 문제 샤머니즘 - 윤리가 없다.모든 것이 귀신의 장난이다.
돈,뇌물,헌금만 하면된다.
박해시에는 마귀가 적이다. 로마박해시는 로마뒤의 마귀가 적이다.
박해가 끝나자 마귀는 인간의 마음속으로, 그리고 사막으로 갔다.
악한일을 하게된 배후에 무엇이 있느냐를 파헤쳤다. 깊은 심리분석이 있다.
4) 자기고발이다. 자기고발을 통해서 병든 자기가 치유되는 것이다. 이 자기고발이 없는 참회는 피상적이다. 로마 감독인, 모든 사람이 숭앙하는 어거스틴은, 당시 도나티스들이 어거스틴을 책잡으려고 하는 때에 어거스틴은 자기의 죄를 고발한다.
“13살짜리 여자와 약혼을 했는데, 결혼적령기 2년을 기다려야 했는데, 나는 기다릴수가 없어서 다른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5) 내가 이렇게 고백을 하고 , 후대 사람이 이 책을 읽음으로써 피차간에 감명을 주고 도움이 된다는 목적에 의해서 고백록을 썼다.
2. 고백록의 구조
고백록은 13권(Books)으로 되어있다.
Ⅰ. 1-9권 : 과거 - 태어났을때의 출생. 과거를 돌아보면서 썼다.
Ⅱ. 10 : 현재 - p.310. 현재에 대한 직관
Ⅲ 창조에 대해서 말씀 하신다.
11 시간안에서 창조? 시간밖에서 창조? 시간의 본질, 방향을 썼다. 시간론
12-13 : 미래 - 창조론. 미래에 대한 안식. p.521.
p.19."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 살도록 하셨기에 “ : 안식
어거스틴은 면밀히 정확하게 자기의 구상을 썼다.
1권 : 출생 ---------------- 9권 : 영적 출생
2권 : 죄.배나무------------ 8권 : 무화과
3권 : 진리 ---------------- 7권
4권 : 친구 ---------------- 6권
5권
2권 배나무(선악과를 사과나무로 이해하지만, 제롬이 쓴 불가타 성경에 의하면 선악과가 배나무로 나와있다.)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는 재미)
8권 무화과 -십자가를 상징. 십자가 밑에서 새로 태어난다. 죄를 저질르고 무화과 나무로 가리운 이유 . 이레니우스“ 무화과 나뭇잎은 껄끄럽다. 아프다. 이것은 참회를 말한다. 참회를 통해서 얻어진 것은 하나님의 자비이다.” 어거스틴의 회심은 무화과 나무 십자가 밑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3권 : 진리에 대한 사랑이 움터. 철학에 대한 관심 키케로.
7권에서 플라톤주의자와 만나, 지적인 회심을 한다.
4권 - 친구. 마니교 신자가 되어, 마니교의 감독 파우스투스를 만나자, 마니교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밀라노에 가서 암부로시우스를 만나게 된다.
4. 어거스틴의 신학적인 배경
콘스탄틴황제가 로마제국을 통일했다. 324년에 완전히 통일.(어거스틴이 태어나기30년전). 기독교가 정치적 세력과 연관을 갖게된다. 사제와 감독은 정치력을 행사, 감독은 정치권까지 행사, 교회는 세금은 면제되면서 헌금으로 인해 부해진다.
제도화되고 이교도가 기독교에 박해를 받는 상태에 이르게된다.
Tempora Christiana 기독교 시대.
이제 박해에서 풀려나 황제와 연회하는 자리에서 유세비우스가 환상을 본다. 이것이 메시야 왕국의 전제라고 보게된다. 콘스탄틴 황제를 통해 이땅에 메시야 왕국이 도래한다고 보게 된다.
미래를 향한 종말론적인 완성을 바라보고 나가는 공동체인가 ?
이 당시에는 교인들이 거룩해야 교회가 거룩하다는 논쟁이 많았다.
이때에 어거스틴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거룩함 때문에 거룩한 공동체이다.”교회에 대한 본질 규명이 새로이 되었다.
부도덕한 성직자의 세례가 정당한가 ? 도나투스들은 재세례주장.
어거스틴은 “거룩한 사제만이 세례를 준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세례를 줄사람도 받을 사람도 없다. ”
그 다음에는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다.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참기독교인은 광야로 떠난다.
신학적인 배경 - 삼위일체 논쟁이, 325년(1차회의) 318년(2차회의) 니케아 회의 에서 거의 종결.
교회는 하나요, 거룩하고,보편적이요, 사도적이라는 문구 첨가.
어거스틴은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해석만 한다.
3차 4차에 걸쳐서 기독론 논쟁 - 예수의 인성,신성문제.
성자안에서 인성과 신성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 451년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으로 확정.451년 칼케돈 회의는 어거스틴의 사상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어거스틴은 4가지의 논쟁을 했다. 어거스틴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는 신학이다.
마니교와의 논쟁 - 악이 어디에서 왔는가? 선한 것은 선한것에서 왔고, 악한 것은 악한것에서 왔다. 내가 악하게 한 것은 악마가 한 것이다.
유일신 사상을 말하고 악의 근원, 선한 창조를 말한다. 악은 선의 결핍이다.
도나투스 논쟁 -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 교회안에는 가라지와 밀알이 함께있다.
펠라기우스 논쟁 - 인간의 악의 근원은 인간의 내부 의지에 있다. 의지의 왜곡이 악의 근원이다. 인간의 결단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내가 의지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그렇게 의지할수 없다. 내 자유의지는 그 안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지 않는 자유의지는 그릇된 방향으로 간다.
기독교 변호 - 기독교 신을 믿고 로마신을 버렸기에 로마가 멸망한 것이다 <---->
신국론을 써서 기독교의 역사관을 수립한다.
어거스틴이 어린이에대해서 이야기하는 신학적인 이유는 어린이도 죄가 있음을 말한다.
교회에서 이어받은 전통(세례)는 죄의용서의 전통으로 준 것이다. 원죄의 문제게 제기된다. 원죄를 말하기 위해 어린이의 이야기를 하게되었다.
어린이를 관찰해보니, 나누기를 싫어하고 질투하는 것을 보라. 저것이 원죄의 외적인 증거이다. 모든 어린이들은 유아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죄가 씻겨진다. 그러나 그것으로 죄가 도말해지는 것이다.
◈ 제 1 권 - 소년시절 ◈
어거스틴에게는 어머니가 셋이다. 내 육신을 낳아주는 어머니, 내 영혼을 낳아주는 교회 , 하늘에서 내 영혼을 품어줄 예루살렘.
어머니는 상고를 두 번 치른다. 육신을 낳기 위해,영혼을 낳기위해서.
세례이후의 죄는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 교회의 전통.
초대교회에서 논쟁이 일어나,터툴리안은 두 번까지 용서해 주자고 했고, 계속죄를 짓자 카톨릭에서는 고해성사를 받게했다.
그래서, 모니카는 어거스틴이 죄를 저질를 것 같아서,세례를 받지 못하게 했다.그런데, 복통이 나서 세례를 받게 하려고 했는데, 복통이 나서 세례를 받지 않았다.
후에 아버지는 죽기전에 세례를 받고 세상을 떠났다.
[디다케]문서에서 세례 - 흐르는 물이 없으면, 다른 물로 주어도 상관없다고 했다.
두번째로,유아세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께서 받아준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부모가 자녀를 대변해서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결단과 결심이 우리의 구원을 결정하는가?
어린이가 결단하기까지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가 ? 세례는 하나님의 선행은총이다.
인간이 결단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은총을 베푸신다. 그것의 구체적인 표현이 세례이다.
그리스도의 형상 -
감 솜씨 멋
자료 동인 형상
혼돈 영,말씀 아름다운세계
진흙덩어리 세례/말씀 그리스도의 형상->기독교인
(주하나님 지으신 모든세계,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어거스틴은 창조론과 인간론이 같이 따라간다. 창조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
말이 고삐가 없으면 방향을 잃어버린다.
우리에게는 고삐가 필요하다. 하나님에게는 한계가 없지만 우리에게는 한계가 필요하다.
p45 주님 당신을 찬양하니
넝쿨이 뻗어나갈 틀을 짜주지 않으면, 난폭하게 아무곳이나 뻗어나가듯, 우리도 form이 필요하고 한계를 정해주는 고삐가 필요하다.
진흙덩어리같은 나를 그리스도의 형상이 필요했는데, 그 때 세례를 안 받아서 고삐가 풀렸고, 세파에 끌려갔고 그래서 혼돈에 빠졌다.
당시의 학교제도는 3가지
초등하교 - 셈하기 읽기 쓰기
문법학교 -
수사학학교 -
p.44. 허망한교육
p.46. 사람들이 문법이 틀리면 야단하지만,행동이 그르쳤을때는 가만 있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Ad Te 당신을 향해서 (하나님을 향했다)
Abe Te 하나님으로부터 (당신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하나님을 떠났다 소외를 말한다.)
감독이 된 어거스틴은 이야기속에서 자신을 재통합시킨다.
내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은 Ad Te이다.
하나님을 good이라고 할 때는 목적,
Abe Te 멀리떨어지는 것이다. 어두움이고 분열이다.
존재의 구조를
제일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God
Soul
Body
영 때문에 몸이 살고 하나님 때문에 영이 산다. 내가 육으로 갈 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 혹은 몸이 하나님과 영상이에 끼여서 어두워지게 한다.
원죄의 표현이 나타나는데, p47. 거짓말을 하고 도둑질을 한다.
거짓말까지 하면서 부정직한 승리라고 말한다.
ex) 미국에서 미식축구시합이 있었다.온미국사람이 보고 있었다. 네브라스카 팀이 펜실베니아에 3점 뒤졌다. 그런데 볼을 가지고 터치다운시켰다.역전시켰다.
모든 관객이 이겼다고 흥분하고 있을때,그런데 코치가 한발이밖에 나갔다고 말함
p49.나의 즐거움 명예 진리을 하나님에게서 찾지않고 나 자신, 세계, 다른것에서찾자 즐거움은 슬픔으로 떨어지고, 명예는 혼돈으로 진리는 오류로 떨어졌다.
◈ 제 2 권 청년기의 죄 ◈
나 스스로 내 죄를 용서하지 못할 때 가장 괴롭다. 그때는 자신이 자신의 죄를 심판한다.
**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사랑의 질서 Order of Love
[Agape & Eros] [Amor Dei]
고전적인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플라톤을 이해해야 한다.
누가 자신을 소유한 것을 사랑하겠느냐 ?
사랑은 자기가 소유하지 않을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요구이다.
틸리히 - 소유하려고 하는 욕구는 연합하고자 하는 하나의 충동이다.
사랑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어디로 향하는가에 따라 사랑의 성격이 정해진다.
사랑(Amor)은 혼의 무게이다. 그 무게에 의해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 제자리를 대상이라고 한다.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내 사랑이 향하되 이 사랑을 성애(Caritas 聖愛=Agape) 하나님의 사랑을 토대로 이웃을 사랑할 때 성애이다.
그 사랑이 자신을 향할대 Amor Sui 自愛라 한다.
내 마음이 세상의 제물을 향할 때 Cupiditas (탐욕)
모든 사랑에는 대상이 있다.
세계는 존재의 질서가 있다.
하 나 님 |
존 재 의
질 서 |
인 간 (혼, 육체) | |
동 물 | |
식 물 | |
광 물 |
존재의 계층은 선의 계층을 설정한다. 존재의 질서에 따라서, 가치가 결정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범위내에서 인간을 사랑해라.
사랑은 존재의 질서와 선의 아름다음에 따라서, 좋음의 계층에 따라서 질서지어 져야 한다.
동물을 사람보다 더 사랑하는 사회, 광물(다야몬드)를 더 사랑하는 사회.
가치가 전도되었다.
사랑의 방법
어거스틴은 Frui와 Uti(Use)를 말한다.
Frui(Enjoy) - 인격과 인격의 만남. 하나님과 인간은 Frui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그외의것은 uti 가되어야 한다. 칸트 - 사람은 목적이 되어야지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과 통한다. Frui는 목적이다. uti는 수단이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제약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복의 수단 Uti 가되었고, 세상사물을 소유하는 것이 Frui가 되었다.
Frui와 Uti의 혼돈이 있는 곳에 사랑의 질서가 왜곡된다.
에로스는 자기 무게로 인해서 일어나지 못한다. 플라톤의 [페드로스]에서는 “사랑하는 자에게만 날개를 달자.” 이에 반해,
어거스틴은 “아무리 인간이 사랑의 날개를 치고 올라간다해도 하나님께서 은혜의 공기를 날개밑에 주지 않으면 인간이 에로스의 날개를 쳐봤자.”
p.54. 인간의 사랑은 안개 : 안개속에서는 알쏭달쏭, 혼란을 말한다. 사랑의 질서를 몰랐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침묵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강한 침묵이
말씀을 통해서 나타난다. (변증법적)
p.56. 에피소드. - 배도둑질
어거스틴을 도와준 사람 - Romanianus
“하나님을 향해서”
심리적인 이원론이지 존재론적인 이원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인간의 말로 나타난다. 모니카를 통해서.(변증법적)
p.58. 주님의 형상 -form 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누구냐 ? 그리스도는 모든 형태의 형태이다. 말씀에서 나왔다는 것은 모든 원형이 그리스도에게서 나왔다.
배도둑질 : 선천적으로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졌다.
사람들은 악한 일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으려고 한다. 자유의지는 다 버리고 필연,결정론적으로 말한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매력이 있다 : 사랑의 조건이 된다는 말이다.
죄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의 남용이다. 더 사랑해야 할 것을 덜 사랑하고 덜 사랑해야 할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즐긴다고 하는 Frui 안에서 물건들을 사랑해야지 같이 사랑해서는 안된다. 생태학자들은 인간을 위해서 자원을 남용해서 생태계가 파괴되었다고 말하지만, 어거스틴은 분량에 따라서 사용하라고 했다. 가치의 계층은 인정할수밖에 없다. 왜 나락을 베고 소를 잡아먹는가 ?
과거의 신학이 너무 인간중심의 신학이었다. 그래서 자연을 도외시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은 아름다운 창조, 선한창조가 있다. 선하게 창조된 인간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1) 인간중심
2) 생명중심 - 슈바이처
3) 존재일반 - 모든 것의 구원을 말하는 신학을 하자. 니이버.
어거스틴의 신학에는 세상에 나쁜 것이 없다.
범행이 행해지는 이유는 하층에 속한 것을 가지려고 하는 욕망과 잃지 않으려고 하는 욕망 때문이다. 모기도 존재의 이유가 있다.
아담과 이브의 타락 선악과 나무 배나무(2권)
------------------ = ----------- = -----------------
이브의 구원의 가능성 생명나무 무화과 나무(8권)
나무는 인간의 의지를 말한다. 여기서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자기 생애를 통해서 재확인한다. 아담의 이야기는 내 개인의 이야기다. 인류의 이야기이다.
p.62. 2권 - 원죄를 설명하려고 한다.
p.65.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죄 - 내면의 죄.
p.66. 병과 죄를 같이 본다.약은 믿음이다. 믿음은 약이다. 의사는 그리스도요, 죄는 병이요 믿음은 약이다.
도둑질 - 악을 존재론적으로 말한다.
“나 혼자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악이란
1)첫째로, 악한 의지의 왜곡이라. 하나님께 가야할 것이 자기에게로 돌아온다. 자기가,세상이 사랑의 대상이 된다. 회심은 구부러진 의지의 방향을 펴는 것이다. “도둑질은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 : 혼돈된 사랑의 질서. 의지의 방향이 틀린 것이다.
2) 무, 선의 결핍 : 두 번째로 존재론적인 해석을 한다. 악은 신비이다. 인간의 지식으로 풀수 없는 신비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문제이다. 풀리지 않아도 계속 풀려고 노력한다.
악이 해명되면 악은 없다. 악이 악으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풀리지 않는다.
풀릴수 없는 것을 도둑질은 본래 없는 것이다고 말함. 악은 선의 결핍,존재의 결핍이다. 왜 신비인가 ? 어두움을 볼수 있는가 ? 어찌 어두움을 볼수 있으며 , 침묵을 들을수 있으며 무를 이해할수 있을까 ? 신비이다. 존재론적으로 보면 악이라고 하는 것, 도둑질이라고 하는 것은 선의 결핍이다. 실체가 아니다. 악이 실체라고 하면 하나님이 악의 창조자가 된다.
존재의 무, 선의 결핍. 어두움은 실체가 아니다. 빛의 결핍이 어두움이다. 어두움이 빛의 결핍인것처럼, 선의 결핍이 어두움이다. 사람들이 보통 나는 나쁜일을 않했기 때문에 선한사람이라고 할수 없다. 선한일을 하지 않았으면 악한 사람이다.
본래 없는 것 - 습관은 본래 없는 것이다. 그런데,그것을 자유의지의 결단으로 행할 때 습관은 선한힘으로 나타난다.
3) “ 나 혼자였으면 않했을 것이다.” - 악은 집단성을 가지고 있다.
4) 심미적 - 공간적인 것 (時)
- 시간적인 것 (종말론적 )
어떻게 무를 보며 어떻게 침묵을 들을수 있는가? 악에 대해서 인간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이 그림을 그리는데 좋은 색만 쓰지 않고 보기 싫은 검정색도 쓴다. 검정색을 왜 쓰는가 ? 그림을 다 그리고 보니까, 검정색도 미에 공헌하더라.
종말론적인 희망을 시사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을 악용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악도 선용하신다.
도움은 밖에서 온다.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
악은 무다. 악의 성격은 사회성,집단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라는 말을 항상쓴다. 죄를 짓게된 동기를 말하고, 사회성을 말한다(9장).
10장 - 우리는 가치관을 혼란을 겪고 있다는 말이다. 자기가 풀수 없다. 자기가 얽혀있기 때문이다. 도움은 외부에서 와야 한다. 하나님을 바라본다. 안식의 하나님.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졌으니, 이제 할 일은 돌아갈 일. 누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황폐해졌다.
죄는 같이 저질른다고 하는 것이 3권에 나온다.
◈제 3 권- 카르타고의 학생시절과 마니교◈
1장 - 카르타고는 압구정동과 같은, 제비족이 많은 곳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가증한 사랑으로 가득찬 프라이팬이 내 주위에서 ~”
사랑하기를 사랑하고 - 어거스틴은 심리분석가. 행동을 했으면 그 행동을 하게 한 의지가 있었고 의지를 움직이게 한 것은 의지, 의지의 원인은 의지이지 하나님에게 책임돌릴수 없다. 의지(사랑)이다.
행동 <------ 의지(사랑) <----- 의지
어거스틴은 과정으로 본다. 사랑의 배후에 사랑,의지 뒤에 의지가 있는
하나님이 무로부터 창조했기 때문에 하나님반대편에 있는 것은 악이 아니라, 무이다. 무에서 왔기 때문에 이 세상의 피조물들은 무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피조세계가 있는 것은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기 때문이다.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무가 된다. 있음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낸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중성적인 존재이다. 아모르는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언제나 대상을 추구한다. 대상이 없는 사랑은 불안하다. 결혼할때까지는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다. 사랑이 끓고 있으면, 대상을 빨리 찾아야 한다.
사랑의 대상을 영적인 대상일때는 영적인 것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영적인 인간이 대상을 감각적인 것에서 찾는다. 감각적인 것은 영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감각적인 것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자기가 카르타고에 가서 어떤 여자를 만나 육체를 탐닉(성적 관계)를 가졌다. 친구와 함께 죄를 짓는다. 여자와 사귀면서 아들을 낳는다.13년동안 동거했다.
아이는 어떻게 하나만 낳았는가 ? 피임법을 알고 있었다. 마니교 신봉자가 되었다. 마니교는 자식낳는 것을 영광스럽게 보지 않기에 , 자식 낳지 않는 법을 알려주었다. 아들이름을 Adeodatus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 했다. 16세에 죽었다.그 아들과 대화를 나눈 것을 그대로 책을 쓴 것이 [교사론]. 아들의 머리에 어거스틴도 놀랐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쾌락에는 쓸개의 경험이 있다. 너무 결혼을 이상화할 필요 없다.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
죄의 세가지 양태를 말한다. 1장에서 정욕을 말한다.
요일2:16에 죄의 3가지 양태가 나온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이것을 어거스틴은 말한다 . 1장에서 사랑에 빠진 육신에 정욕, 2장에서는 안목의 정욕을 말한다(연극관람)이것도 친구와 함께 간다.
사람들이 함께 엉키어서 안목의 정욕에 빠진다. 안목의 정욕이라고 하는 것이 10권에서 나온다.
3장 - 그리고 세 번째는 학우들의 난폭한 행위를 말한다. 교만 권력, 지배하려는 욕심, 이것이 이생의 자랑이다. 그것이 학생시절에는 교만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목을 빼며( 교만, 이생의 자랑)
이생의 자랑 : 법정 투쟁에서 교활하면 교활할수록 유명, 맹점을 자랑, 수석, 뽐내 며, 자랑.
지방질이 폭튀어 나왔다 : 교만.
외적으로 나타난다. - 뒤집어 엎는 자들 (상급학생들이 하급학생들을 괴롭히는 것)
:지배욕 .
10권 30 장 - 요일 2:16 의식에 있을때는 물리칠수 있지만, 무의식중에 죄악을 말한다. 무의식이 강하다. 깨어있을때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몽중에는 어떻게 할수 없다.
10권 358쪽 안목의 유혹 - 경건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 (삐삐,핸드폰)
10권 35장 - 알려고 하는 것, 알아서 지혜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
안목의 정욕은 호기심에서 온 것이다.
10권 36장 - (59)
-> 인간개인을 어지럽히는 세가지 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카르타고에 가서 몸소 실현.
3권 회심 - 어거스틴은 기독교인이 된 후에라도 회심은 계속된다고 말함. 죄짐을 지고 성화의 과정을 밟으면서 하나님에게로 나간다.언제나 기독교인은 절름발이로 나간다.
4장 - 제일 처음 자기에게 전환점을 가져다 준 것은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이다.
이 책은 지금 없다.키케로(Cicero b.c 106-43) : 로마의 정치,철학자.
[여러신들의 본성].- - - -
육욕에 빠져 있던 어거스틴이 전향을 하게된 책.
웅변술 :교만을 :
당신에게 향하고 : 감각적인 것에서 진리를 추구하라는 철학에로의 권유, 어거스틴은 진리와 하나님을 같이 본다.
책의 내용 - 진리를 사랑하라. 그것이 철학의 내용이었다.
철학을 궤변술로 삼아서는 안된다.
이 책이 자기 마음을 진리에로의 열망은 타오르게 했으나, 자기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지 못했다 : 1)그리스도의 이름이 없었다.2) 진리를 추구하라고 하고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어거스틴은 후에 진리와 하나님을 같이 본다.
5장 (9) 교만한자들에게는 이해가 힘들고 : 그 마음이 완악해서.
어린아이에게는 확실치 않고,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을 정리, 교회의 혼란과 병폐를 막아준다.)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1장에서 나오는 “어린아이” - CHILDISH 유치함 / CHIDLIKE 순수함.
6장 - 마니(Mani)교 (216-277):
기독교인들 중에 은연중에 이원론을 믿고 있기도 하다. 유대교도 기독교도 유일신을 말한다. 마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마귀도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초월할수 없다.
manichaeism 페르시아 사람 마니가 만든 교이다.
마니의 생애 216년 4월 14일에 출생. 부모의 이름은 바테크, 마리암사이에서 절름발이로 태어났다. 왜 마니가 인간의 몸을 악한 것으로 보았는가 ? 벌써 자신이 신체적인 제약을 받고 있다. 귀족가문 출신. 아버지는 세례를 주는 영지주의 수도원에서 지냈다. 그러므로 아들인 마니도 영지주의 영향을 받았다.
이단과 정통을 구분하는 것은 이단은 나누고 정통은 합한다.
영지주의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을 나눈다.
두 번째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데 있어서 환각설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온 것을 부인. 참하나님이요 참인간인 것을 부정. 신성과 인성을 분리한다. 예수님이 이세상에서 육신을 입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재로 진 것은 아니다. 십자가에 달린 것은 구레네 시몬. 성육신, 수난을 부인한다.
세 번째 특성은 인간의 혼과 육을 분리시킨다. 혼은 좋은 것 육은 나쁜 것으로 본다. 건강을 해칠정도로 금식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초대교회에서 금식을 한 것은 덜 먹고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였다. 40일 금식하다가 죽은 사람이 많다.
마니주의도 이원론적인 영향을 받았다. 마니는 두 번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13,24살 때. 자기가 최후의 예언자, 예수의 사도,성령의 보혜사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도에까지 영향을 하여 불교의 영향을 받았고 페르시아왕 샤바르와 친교를 맺어 자유롭게 선교를 할수 있었다. 로마황제 발레리안이 체포되었었다.
샤바르왕 밑에서 자기의 교세를 확장. 샤바르가 죽자 둘째아들 호르미스드
(Hormizd )을 왕으로 지명. 왕이 된지 1년후에 페르시아 조로아스터 사제들에게 독살되었다. 첫째 아들 바흐람 1세가 왕이 되었다. 조로아스트교가 국교를 해친다고 고발해서 마니는 즉시 체포가 되어서, 26일간 수난을 당한다. 쇠사슬에 묶여 돌기둥에 매달린다. 2월 26일에 기진맥진해서 사망 했다. 이기간을 마니의 십자가의 수난이라고 말한다. 마니가 죽은 후 그 시체를 산산조각내서 외국의 여러 땅에 뿌렸다. 추종자들이 수거해서 그의 교향 그테시퐁에장사했다. 추종자들이 마니교를 전해 중국,인도에까지 포교, 로마제국, 지중해 연안에 확산되었다. 여기서 어거스틴이 마니교와 접촉하게 된다.
기독교인들에게 악을 설명하는데 문제가 있다. 좋으신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은 좋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창조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그러면 악은 어디서 왔는가 ? 좋게 창조된 이 세계에 악이 왜 생겼는가 ?
하나님이 무능해서 악이 생기게 되었는가 ?
마니교는 이 우주에는 두 신이 있는데, 하나는 선한신, 악한신이 있다.
마니교의 설명으로 간단히 해결된다.
마니교 1) 마니교는 기독교,불교,조로아스터교,유대교,영지주의를 종합한 것이다.
조로아스터교에서 이원론을, 불교에서 엄격한 금욕주의와 환생설을 이어받고, 기독교에서 예수를 존경하고 따르는 것을, 영지주의에서 물질과 육을 악하게 보는 것을 이어받았다. 2) 마니교는 이원론이다. 우주적 이원론이요 인간학적 이원론이다. 이 우주에는 두신 악한신,선한신이 있다. 인간안에도 두 혼이 있다. 선한 혼, 악한혼.
빛의 왕국
----------------
어두움의 왕국
. 빛의 왕국에는 빛의 아버지가 있고 왕자가 있고 왕자주위에는 천사가 있다.
어두움의 왕국에는 다섯가지 요소가 있다. 첫 번째는 어두움 두 번째는 흙탕물 세 번째는 거센바람, 네번째는 삼킬듯한 불, 다섯번째는 검은 연기.
어두움속에는 뱀, 흙탕물속에는 물고기가, 거센바람에는 새들이, 삼킬듯한 불속에는 네발동물, 검은 연기속에는 두발동물
동물들 사이에는 지배자가 있다. 이 지배자가 마귀이다. 제일밑에 두발동물의 leader가 모든 동물들의 리더로 마귀중의 마귀이다.
빛의 왕국은 평온하다. 어두움의 경계선에 빛이 비치니까 마귀가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빛에 현혹된다. 마왕이 중심이 되어 공격한다. 빛의 왕이 첫 인간을 보낸다. 이것은 아담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존재이다. 그 공격을 막아내려고 한다. 그 첫인간을 도와주는 요소(어두움의 다섯가지 요소에 상반되는 다섯가지 요소- 빛,물,바람,불,공기)를 함께 보낸다.
이 다섯가지 요소를 마귀들에게 집어삼킴을 당한다. 그래서 처음으로 빛과 어두움이 혼합된다. 빛의 요소들은 자기들의 정체성을 상실할 위기에 놓였다. 그래서 빛의 아버지가 첫 사람과 다섯요소를 해방시키려고 한다. 이 구원의 사신이 생명의 영이다.이것이 창조신에 해당한다. 이 생명의 영은 첫째 인간을 구원하고 나머지를 구원코자 혼합된요소들로부터 이 세계를 창조한다.그래서, 이 세계는 빛과 어두움이 혼합되어 있다.
해방된 빛을 가지고 창조한 것이 해. 그 다음으로 이 요소를 달을 만들었다.
달은 이 세상에서 혼합된 세계에서 해방되지 아니한 영들을 매달 14일까지 자기에게 태워 가득차면 빛의 세계에 운반해주고, 다시 달이 세상에 와서 가득실고 해에 있는 곳에 가져다 준다.
(마니교는 채식주의자) 식물은 악마의 정욕. 악마가 빛을 잡아먹었기 때문에 빛을 받은 식물이 빛의 농도가 진하면 꽃이 되고 열매가 된다.
동물은 타동물의 악마의 유산으로 생긴것이기에 동물은 악하다. 동물은 채식을 하기 때문에 약간의 선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두혼이 있다. 그런데 둘다 악마의 씨에서 왔다. 아담은 빛의 요소가 많고 하와는 어두움의 요소가 많다. 그래서, 롬8:7,7:23의 바울의 해석 내안에 있는 다른 법은 두 영으로 간주를 한다. 육에서 해방을 못하기 때문에 결혼을 않하는 것이 좋다.
마니교의 윤리 - 세가지의 행동을 자제하라.
1)입조심 (1) 말조심- 훼방거짓 맹세 하지 말것
(2) 먹는 것을 조심 - 고기 생선 술 먹지 말 것, 산짐승 먹지 말 것, 계란 우유에 는 짜내진 우유는 빛이 없다. 채소 과일 열매는 좋다. 빛을 해방 시켜주기 때문에.
2) 손조심 - 살인과 전쟁을 피하라.동물을 식욕, 나무를 뿌리나 뽑지 말 것.
물을 교란시키지 말 것.- 목욕하지 말 것. 손으로 일을하지 않는다. 재물을 소유하지 않는다. 하루의 양식으로 족한다. 옷은 1년입을 옷한벌.
공직 명예 원치 않는다.
3) 가슴 조심 - 정욕을 말한다. 악을 출생시키는 것을 금하는 것이기에 종족 번식 을 금하는 것이다. 모든 성교를 반대. 결혼은 악마가 시키는 것. 아버지가 되는 것을 부인했다.
마니교의 조직
선택받은자(집사,사제,72감독,12스승,마니의 계승자) 그리고 경청자 (평교인,)
선택받은 자는 종말론에 가서 모든 계율을 지킨자들이다. 빛의 세계에 들어간다. 항상 그들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 다닌다. 이것이 거룩한 생활의 표이다.
그에게 모든 과일을 먹고 빛을 해방시킨다.
이사람들은 구원을 얻는다.
어거스틴은 경청자. 보통 신앙고백하고 해와달을 숭배,사제들을 모방하면된다. 술마시고 고기먹어도 되고 결혼,시민 공직해도 된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마니교도이면서 수사학교수. 음식은 타교인에게 주지 않는다. 그대신 돈을 주라고 한다.
왜 ? 육신이 나쁜데 육신을 기르는게되니까.
좋은 경청자 - 환생해서 선택받은 자로 태어나 후에 구원을 받는다
나쁜 경청자 - 식물로 태어나 선택받은자가 먹으면 해방된다.
더 나쁜 경청자 - 동물로 태어나 선택받은자가 먹지 않기 때문에 구원에 소망이 없 다. 이 나쁜 경청자 중에서도 무식한 자,무례한 자 사악한자로 나눈다. 무식한 자는 회개하면 용서받고 구원가능, 무례한자도 가능, 사악한자는 구원가능없다.
결론 -
1) 마니주의는 이원론이다. 선과 악,빛과 어두움의 이원론이다. 두 영혼이 있다고 하는 이원론이다.
2) 금욕주의를 통한 구원의 종교이다.
3) 기독교의 이단이다. 기독교적인데 성경을 반대한다.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해 놓고 독사의 자식들이라 할수 있는가 ?
4) 결정론이다. 내가 악을 행한 것이나 선을 행한 것이나 우주적인 실체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다.
5) 마니교는 선교하는 종교이다. 그렇게 빨리 확산되었다.
6) 책의 종교였다. 마니가 여섯권을 썼다. 글자 그대로 중요시했다.
7) 마니교에서는 모든 실체는 물질로 보았다. 물질중에서도 섬세한 물질 -빛의신, 영, 조잡한 물질 - 어두움의 신.
11장 어머니의 꿈 .부모가 어거스틴을 카르타고에 유학을 보내면서 좋은 기독교 신자가 되어라. 공부를 열심히해라. 공부는 수석, 그런데, 여자와 동거, 마니교 신자가 되었다.
371년 -374년동안 공부, 375년에 고향 다가스로 돌아온다. 이때 어머니는 어거스틴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가라고 한다.
영적으로 죽은 어거스틴.
** 어머니가 자(Rule, Regula) 위에서 울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기독교 신앙을 Regula fide 라고 한다. 어머니의 신앙은 기독교의 신앙의 잣대이다.
어거스틴은 어머니가 불원간에 마니교도가 될것이라고 꿈을 해석했다.
배가 파선하려고 할 때도 모니카는 사공을 위로한다. 어거스틴이 회심하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꿈 때문에.
12장 (21) - 창조주 하나님을 말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어머니가 잣대에 서서 울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단서는 8권(30)에 나온다.
83 p
高
↑ |
6) 하나님 5) 영혼 4) 육체 3) 사물(실체) 2) 영상(IMAGE OF SOMETHING ) - 사물에 대한 이미지 1) 환상 - 사물이 없다 |
低
올라갈수록 확실하고 실체성이 있다. 영혼은 육체의 생명이며,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 따라서,하나님이 없는 영혼은 죽은 것이다.
마니주의는 허황된 이야기로 되어있다. 마니교는 환상을 다룬다. 우리는 실체를 다루어야한다.
모든 것은 다 변하고 무상하지만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다. 사물과 육체는 시간과 공간속에 존재한다(지배를 받는다) . 우리 영혼은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체험은 있다. 영혼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영원하신 영원자.
마니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신학을 표현하고 있다.
84 P.당신은 내 자신의 깊은 내면보다 더 깊은 내면에 계시며 내가 도달할수 있는 높이보다 더 높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완전내재요 완전초월이다.
하나님이 완전히 내재한다고만 하면, 신과 세계를 같이 보는 범신론으로 떨어진다.
하나님이 완전히 초월한다고만 하면, 理神論.나와 관계가 없게된다.
솔로몬의 비유 (잠9:17) 여기서 여자는 마니교를 말한다. 마니교는 보이는 것에서 어거스틴은 보이는 사물에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했다.
“도둑질한 물이 달고 ~ ”마니교의 진리는 기독교에서 훔쳐나간 것이라고 말한다.
7장 -
1) 악의 근원 - 악은 어디서 오느냐
2) 신인동형론 하나님도 머리털 ~ 하나님도 사람인가 ?
3) 족장들의 구약의 윤리문제(이스라엘 족장들의 결혼 일부다처 - 마니교는 결혼 부인) 에 대해 어거스틴은 답을 한다.
1) 악이란 선의 결핍. 악의 실체란 없다. 신정론(하나님을 어떻게 악의 실체에 대해 옳다고 정당화할수 있는가?)그렇다고 어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악은 존재한다. 우리를 끓임없이 괴롭힌다. 그러나 실체하는가? 하나님의 창조와 실체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강하게 실체인 것처럼 경험한다.
하나님은 실체이시다. 실체이신 하나님에게 배반하고 도전할때는 그 도전한 행위가 실체성을 띄게 된다. 그러나, 그 자체는 실체성이 없다. 습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본래 창조한 것이 아니다.그러나, 자유의 남용으로 습관을 끓지 못해 습관이 필연성이 되어서 우리를 압박하는 객관적인 것으로 실체로 존재하게 된다. 악이란 실체성은 없지만 객관적인 실체를 띄고 나타난다.
2)하나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정의하지 말라.
3) 진정한 내적 정의 - 하나님의 정의 : 하나님의 정의가 상황에 따라서 적절하게 적용이 된다. 그 당시에는 인구가 없어서 땅이 황폐해졌다. 그때의 다혼은 지금의 첩과는 다르다. 정욕의 희생물일 뿐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불변이다. 적절하게 적용되는 것은 변한다. 상황에서 정의에 적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의 정의를 사랑이라고 하고 ,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상황에 적용이 된다. 적용을 할 때, 시간과 공간과 상황에 따라서 달리 적용된다. 그러므로 적용하는 것에 있어서는 변하지만 사랑은 불변이다.
태평양에서 배가 나침반을 잃었다. 방향을 찾기위해서는 북극성을 보아야 한다. 불변하기 때문에. 변하면 GUIDING STAR가 되지 못한다. 자체에서는 변하지 않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변한다. 북극성도 배가 가는 방향으로 따라가야 한다.
사랑은 그 자체에 있어서는 불변하고 적용하는 상황에 있어서는 변한다.
8장 - “그 임금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죽이라는 것은 비도덕적인 행위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보편적인 계율이 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순복했다. : 우리의 관습에 위배되지만 최고의 존재자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서 우리가 사는 것이 마땅하다.
키케로 - 목적론적인 윤리의 중지 . 목적을 위해서 당시의 윤리를 중지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이삭이 죽느냐 ? 오히려 도덕적인 윤리가 중지로 인해서 도덕이 다시 살아난다.
9장 - “당신이 주신 명령을 알고 행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주는 명령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고, 명령을 알고 지키는 것은 더욱 복이 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복을 받지만 ,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알고 믿는 것은 더욱 복이 있다.
10장 - “알게 모르게 ~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은 인간의 무지를 뛰어넘어 이야기 하신다.
◈ 제 4 권- 마니주의에 빠짐 ◈
1장 - 9년동안 마니교 신자가 되었다. 상황윤리가 나온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아주 거만한 어거스틴. 수사학은 속이는 학문. 공직생활은 수사학을 말하고 개인생활이라는 것은 마니교 신앙생활을 말한다.
오류를 회상하게 하시고 회상 (Recall )Recallection
흩어진 나를 거두어 모아 주소서. 흩어진 나를 모으는 것이 회상이고, 모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통합이다. 이것이 고백의 목적이다.
2장 -
1)지배욕-다른 사람을 굴복시키는 재주.수사학.시낭송대회에서일등하려고 하는 것.
2) 정 욕 -
3장 점성술 - 어거스틴이 카르타고 있을 때, 귀한 수저를 잃어버린적이 있다. 어떻게 잃어버린 수저를 찾을수 있을까 고민. 제자 니켄티우스를 시켜서 수저를 찾으라고 시켰다. 그런데, 그 점성술가가 맞혀서 수저를 찾았다. 그후로 어거스틴이 점성술에 매혹되어 점성술책을 탐독하게 되었다. 어거스틴에게 이것은 안목의 정욕이다. 마니교의 윤리는 숙명론. 마니교와 같이 점성술도 별의 운동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결정론.
기독교는 운명론. 기독교는 하나님에 의해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별도 피조물인데, 창조주 하나님에게 죄를 고백하고 의논해야지 왜 피조물에게 의논하는가 ?
내머리는 병들어 있었다. 교만으로 가득차서. 총독이 점성술을 버리라고 충고.
거짓인줄 알면서도 빠져나오지 못한다. 점성가들의 책에 매료되어.
(7권18장에서 점성술은 거짓말이라는 것을알게된다.)
예언 -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예언을 미래에 대해 점치는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미래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현재를 경고했다.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말한다. 문제는 현재 하나님에게 충성하는가이다.
하나님이 예탁하신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위탁을 받고 말씀을 전해야 한다.
별의 움직임은 순환을 한다. 이것을 결정론이라고 한다. 한국인은 사주팔자에 갇혀 나오지 못한다. 시작도 끝도 없고, 구원의 확실성도 없다. 완성이 없다.
(기독교는 순환하는 시간관을 깨뜨리고 직선으로 펴는 것이다. 시작이 있고 종말의 완성이 있는 역사관으로 바뀌었다.)
순환은 악한 것이다. 자유가 없다. 창조론, 구원론도 없다. 니케는 순환론을 부활시키려고 했다.
점의 성서적인 것
1. 동방박사 - 마태복음에 나와있는 예수 탄생의 설화. 동방에서 왔다고 했는데 그날 왔다? 몇 년 걸렸을 거리인데. 별이 갑자기 없어졌다.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의 거리는 15마일밖에 안된다. 베들레헴 예수 나신곳에서 멈춘다. : 초대교회가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예수의 신분을 밝혀주는 기독론이다.
크리스마스의 별은, 별은 별인데
1) bigger 크다.다른 모든 별보다
2) brighter 밝다. 다른별은 있으나 마나
3) 그렇기 때문에 이방사람(세임금)까지도 인도하는, 그리고 세 왕을 인도할 만큼,그리고 세 왕의 경배를 받을 만큼의 왕중왕
별은 별이다( 참인간이다) 그러나 다른 별 (참신):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다이아 몬드와 숯의 요소는 모두 탄소. 탄소는 탄소인데 하나는 숯인데 하나는 다이아몬드. 예수님은 다이아 몬드이고 우리는 숯이다.
연속성과 비연속성 - 참 하나님이요 참인간이라는 것을 크리스마스의 별을 통해서 이야기 한다.
별점이라는 것 - 터툴리안 : 동방박사들의 선물 세가지는 점치는 궤로, 그것을 그리스도 앞에 바쳤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함께 숙명론은 깨어졌다. 더 이상 별점은 필요없다.
2)운명과 숙명의 구별
숙명(fate ->) - 목적이 없다.순환. 별의 운동과 동일시 해. 별의 지배하에 있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함께 거기에서 벗어났다.
운명(destiny) - 직선 어느 목적을 향해 가고 있다.
숙명론을 펴서 운명론으로 편 것이 그리스도의 오심이다.
※숙명론을 극복한 기독교
①창조론
②그리스도의 오심 - 일회성: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순환론이 깨어진다.
③종말론 - 끝이면서 동시에 완성이다. 목표를 향해서 가는 것이다.
④구원의 확실성 - 반복하는 것에는 구원의 확실성이 없다. 언제 타락할지 모르고 다시 올라갈지 모르는 것이다.
4장 - 친구의 죽음
성령으로 맺어준 사랑으로 우정이 완성되는 것이지, 그것없이 맺어지는 것은 우정이 아니다. 틸리히 - 성령으로 맺어지지 않은 우정은 선택적인 배타적인 사랑이다.
마니교 신자로 만들었다.
죽기전에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세례를 받았다.
신학적이 결론 108P 유한한 것은 유한하게 사랑해야 하고 무한한 것은 무한하게 사랑해야 한다. 이것을 혼돈하게 되면, 비참한 실존을 알게된다.
죽을 사람을 안죽을 것처럼 사랑하면 자기의 비참한 모습을 알게된다.
109 p 아리스토텔레스 “우정이란 두 몸에 있는 하나의 혼이다.”
“ 그의 반쪽은 나마저 죽으면 ~”- 죽기전에 쓴 수정록에서 제 2권 62에 “내가 고백록에서 그 말을한 것은 어리석은 말이었다.”
아름다운 숲(눈,안목의 정욕) 노래(귀) 향기나는 정원(후각) 잔치(입맛) 침실(촉감) 글과 시(지적인 즐거운 이성) 이 모든 것이 변한다. 주님께 이 짐을 맡겨야 했다.
정신적인 고민을 해결하려고 장소를 바꾸면 된다고 하지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수 없었다. 늘 자기가 따라다니므로.
111 p 안죽을 사람처럼 사랑하기에 내 영혼이 흔들리지만, 영원한 하나님을 사랑하면 불별하는 하나님이시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Frui(목적)와 Uti (수단)
세상 사물은 uti사용한다는 점에서 사랑하고
인간사랑은 목적으로서 사랑하되 하나님을 위해서는 수단으로 사랑하라.frui + uti
하나님은 전적으로 Frui 그 자체가 목적이다.
세상사물
하나님
|
|
|
|
|
|
|
|
|
나
만물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아름답게 창조한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러나, 이것에 감각적인 사랑으로 이것에 달라붙게 마소서.
P.117 (19)
창조 그리스도 그리스도
↑
말씀 ↓ ↓
↑
흑암, 혼돈 죄 인 흙탕물(어거스틴)
흑암에서 말씀을 통해서 흑암을 불렀다. 1번째 call. 플라톤주의에서는 신이 이세상에서 올수 없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흑암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Recall)
어거스틴은 자기를 비유. 자기가 흙탕물에 있을 때,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Recall,Reform(개혁)한다.
13장 어거스틴은 세상에서 명성을 떨치려고 했다. 명성을 떨치려면 명성을 떨친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 왜 사람들이 히에리우스를 좋아했을까? 다른 사람이 좋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표준에 따라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표준으로 사람을 좋아한다.
p125. 어거스틴은 플라톤 계열에 서 있다. 아리스토 텔레스를 은근히 비판.
아리스토텔레스의 10범주 : 어떤 사물이 있을 때 , 이것을 인식하는데 10범주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10범주의 인간의 인식내에 하나님이 들어오지 못하는데, 하나님을 인간의 이성으로 알수 없다.
p126. *** “나는 빛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으므로 ~”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 비교.
해
↙
↙
사물
세상에 대한 정보,지식은 알고 있지만, 내 얼굴은 빛을 받고 있지 못하다. 세상을 독차지 하고도 자기를 잃어버렸다. 지식은 많지만 지혜(sapientia,wisdom)은 없다.
어거스틴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당신은 회전의 그림자도 없으십니다.”
p.314,442,479 정오사상 (Highnoon) 하나님과 해와 인간이 가장 가까이 있을 때 -정오. 해가 바로 인간의 머리위에 있을 때 해와 가장 가까이 있을때로 그때는 그림자가 없다. 하나님과 인간이 가장 가까이 있어 죄가 없다. 하늘의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과 늘 가까이 있기 때문에 어두움이 없어지고 정오의 빛과 같이 비추인다.
신학자들을 계열별로 나누면, 플라톤계열의 신학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계열의 신학자로 나눌수 있다. 플라톤 계열은 개신교신학자들이 많고 아리스토틀을따르는 카토릭계열이 많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을 도입하여 기독교 신학을 조직하려 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이원론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틀은 이원론을 수정한다. 어거스틴은 플라톤의 이원론이 기독교신학을 설명하는데 좋다고 한다.폴리히 “플라톤 철학은 고대 기독교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퀴나스의 신학은 감각적인 경험에서 출발한다. 감각적인 경험은 이 세계에서 출발한다. 이 보이는 세계를 분석해보니, 결과다. 이 결과의 원인은 제일원인은 하나님,제일 운동자는 신이다.
어거스틴의 신학은 감각적인 세계에서 출발하지만 마음에서 체험된 하나님에게 출발해서 하나님에게 도달한다.
아리스토틀
비약
A -----> B ------> C ------> 하나님
감각적인 경험에서 출발하면, 감각적인 것으로 도달한다.
비약이 없이는 c의 원인은 c와 같다. 물질적인 원인을 하나님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지식이다. 나를 알고 하나님을 아는 삶,경건을 지혜라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데서 얻는 것이 지식이요, 나를 알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이다. 정보습득에는 주력하지만 지혜를 습득하는데는 더디다.
어거스틴에게 전환점을 이루는 5권
◈ 제 5 권 로마와 밀라노에서 ◈
3장(3).파우스트스는 로마에서 감독으로 있다가 북아프리카로 온 사람.
사물을 인식하는데 있어서는 아리스토틀의 철학이 좋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된다.
(4) 우리가 세상 사물에 대해서는 잘 알면서도 자신의 일식(달이 이지러지고 해가 이지러지는 것을 경험하는 일식,시간과 함께 지나가는 우리의 삶)은 알지 못한다.
시편을 읽을 때, 처음에는 읽은 것이 작고 읽을 것이 많다. 시간이 갈수록 읽은 것은 적고 읽은 것은 많다. 젊은 우리는 어디에 와있을까? 처음부분일까 ? 그반대일수도 있다.
하루를 산 나이의 아이도죽기에는 충분한 나이를 먹었다.
창조주를 인정하지만 예배를 드리지는 않는 과학자.
(5) 인간이 하나님에게 올라가려면 길을 알아야하는데, 그 길은 성육신하신 우리의 중보자,말씀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에서 신론을 말할때는 기독론을 떠난 신론을 말하지 않는다. 기독론을 떠난 신론은 신론이 아니다.
막역하게 제일원인 인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을 논할수 는 없는 것이다.
(6) 마니교비판 근거 - 철학자들은 수학적으로도 관찰의 근거로도 맞다.
마니교가 무너진 것은 수학적인 이론과 관찰에 근거해서 마니교를 떠나기로 한 것이다.
4장 .
(7) 자연철학,지식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수 없다. 성경을 과학인것처럼 증명하려는 사람이 있다. 종교는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북두칠성의 궤도를 아는 지식이 나의 경건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과학적인 지식이 사람이 사람되게 못한다.
만물을 수와 양과 도에 의해 : 지혜서11장에 나온 말을가지고 어거스틴이 자신의 신학을 정리한다.
Mensura (측정) Numero Pondus 무게
Modus species ordo
limit form
한계를 정하고 수와 종으로 질서지우고 유지
물질의 중량을 달면서도 만물을 수에따라 형성하시고 질서지우시고 무게로 유지하심.
5장. 지식이 경건성과 연관되는 것은 아니다.
6장. (10) 수사학의 형식만 가지고는 안된다. 내용,메세지가 중요하다. 목사들이 옷만잘입고 강단에 올라간다고 은혜를 끼치는 것이 아니다.
내적 성령에 의해 내적 감화 : 내적교사가 그리스도이다. 사물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하다. 영계에 있어서도 내적교사인 그리스도에 의해서 진리를 판명할 수있다.
감신설교학교수 “너희들의 설교가 준비가 안됬으면 소리를 높이고 단을 두드려라.”
언어는 그릇이다. 그릇보다 메시지가 중요하다.
7장. 창조자를 떠나서는 창조자에게 나갈 수 없다.
Create / Recreate Make / Remake Call / Recall Form / Reform
루터나 칼빈이나 다 Reformer 이다. 그런데, Form이 있어야 Reform이 있다.form이 잘못되었기에 reform한 것이다.
Form은 이데아. 나무라고 하는 일반개념(이데아)이 있기 때문에 , 참나무,소나무 개체를 말한다.
개혁이라고 할 때는 form을 보고 있기에 현실을 인식하고 개혁한다.
우리 나라가 이러면 안된다고 할 때는, 이러해야 한다는 form이 있다.
플라톤의 공화국 - 소크라테스와 제자들의 대화 “선생님이 이상적인 공화국에 대해서 말했는데 어디에 있습니까?
- 하늘에 있다. 하늘의 공화국을 바라볼수 있는 사람이 땅에 자기의 공화국을 잘 다스릴수 있다. 표준(form)을 볼수 있어야 개혁을 할수 있다.
옳은 것과 그른 것
ex) 20년전에 남아프리카에서 한 할아버지가 교환에게 계속 몇시인지 묻는다.
교환 - 왜 자꾸 묻습니까 ?
나는 12정각에 싸이렌을 울리는 사람이기에 정확한 시간을 알려고 묻는다.
교환 - 이상하네요 나는 그 싸이렌에 내 시계를 맞추는데.
이 사람 저사람이 표준시간을 잃어버리고 서로 맞추다보니 표준,form을 잃어버렸다. 어거스틴은 이 표준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cf) 먼지가 날때는 가만히 있는게 좋다.
시편-너는 가만히 있어 나의 하나님 됨을 알라.
8장. (14) 좋은 학생들을 만나기 위해 로마로 떠남.
내가 컨닝을 해서 벌을 받지 않지 않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컨닝이 습관이 되어 ,계속 컨닝을 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벌이다. 습관형성 그것이 벌이다.
나쁜 것을 계속하는 것, 그것이 벌이다.
카르타고에서 떠나도록 한 채찍 : 마니교를 로마제국에서 교회자체내에서 이단으로 불법화해서 마니교도 체포령을 내렸다.
로마에 온 사람들 중에 카르타고 출신이 많다. 정열적이기에.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어거스틴에게 로마로 가라고 권한다.
어거스틴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돈,명예,여자이다. 그런데, 후에 알고보니 이것은 죄의 세가지 양태이다. 현대말로 Money , Power , Sex.
시험에 말려들어갈 여건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감독이 된후로는 감독이라는 여건이 죄를 짓지 못하게 했다. 자기 약함을 알기에 어거스틴은 자기방에 여자들이 못들어 오게 했다. 여동생조차도. 여자가 들어올때는 사제와 동행.
인간은 하나님의 선을 악용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악도 선용하셔서 자기의 뜻을이루신다. 로마에서 헛된 행복 - 돈 , 명예, 결혼
(15) 성서의 ‘물’의 상징 : 세례의 상징, 위험이라는 뜻도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흑암, 수면이 있었다. 호흡=성령=바람.
물위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물은 혼돈.
노아의 홍수때 바람이 물을 마르게 해.
모세때 홍해가 동풍으로 갈라짐.
계시록에 새하늘과 새땅은 바다가 없더라. 위험이 극복.
우린 지금 물속에서 살고 있다.
지중해를 건너야 로마로 간다.
어머니의 눈물 ,강, 세례, 기쁨의 눈물, 영생의 샘물(161,292p)
10장.
선한용 “나는 아하 라는 소리를 제일 좋아한다. 가다가 활짝 열리는 것을 포착해야 한다. 그것을 계시라고 한다.”
(19) 아카데미파 : 회의론을 말한다. 플라톤이 철학을 강의하던 학교이름이 아카데미이다. 플라톤 학파를 old 아카데미라고 한다. 확실성을 중요시했다. 이데아는분명히 있다.new 아카데미에서는 확실성을 알수 없고 , 개연성을 알뿐이다고 함(회의론).
의심은 맹목성에서 벗어나게 하고 계속 추구하게 한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회심후에도 계속연구할수 있었다.
[독백론,행복론,질서론,회의론반박]을 썼다.
회의론 반박 : 모든 것을 의심한다. 그러나, 의심할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의심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를 앞선다.
(20) 악도 악령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물질이라고 본다.
12장. 로마학생들도 싫다. 떠나고 싶다 : 불안한 상태의 어거스틴.
톨스토이는 안정된 사람,도스도예프스키는 불안한 사람.
13장.
(23) 황실이 밀라노에 있었다. 북쪽에서 야만인이 침략하기에 황제가 지켜야 한다. 조정에서 수사학교수를 두려고 함. 그때, 밀라노에는 암부로시우스 감독이 있었고 로마에 심마쿠스시장이 있었다. 밀라노의 감독의 암부로시우스아 심마쿠스는 이종사촌. 심마쿠스는 로마의 옛 이교도 사상을 회복시키려고 강연시키려던 사람. 북쪽의 암브로시우스는 전통적인 기독교를 세우려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둘은 사이가 않좋다. 심마쿠스가 왜 어거스틴을 택해서 암브로시우스에게 보낸이유는, 마니교도인 어거스틴을 보내면 암브로시우스도 넘어가려니 했기에.
370년에 총독으로 임명받은 암브로시우스. 정치인이다. 371년에 밀라노의 감독 Auxentius 가 죽었다. 그 자리를 매꾸려 하면, 경쟁이 심해 밀란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래서 암부로시우스에게 군대를 이끌고가서 감독선거를 인도하라고 명했다.
감독선거중에 어떤 소년이 “암부로시스를 감독으로” 소리치자, 모든 교인들이 이것은 하나님의 소리라고 믿고 암브로시우스를 세웠다. 암부로시우스는 세례를 죽을때까지 안받았었는데, 세례도 안받은 암브로시우스를 감독으로 세우자, 교황이 내일 세례주고 사제 안수 주고 조금있다가 감독안수를 주었다. 기독교 역사상, 둘도 없는 인스턴트 감독이다. 그런데도,서방교회에서 유명한 감독을 뽑으라면 암브로시우스, 어거스틴, 대 그레고리를 뽑을 정도이다.
어거스틴이 밀라노에 가서 황제를 만나기 전에 감독을 만난이유 : 당시 감독이라면 황제도 무릎꿇을 정도의 권력. 암부로시우스가 극장에서 살인을 한 데오도시우스황제의 성만찬을 제지하자, 데오도시우스가 무릎을 꿇자 그제서야 성만찬 참여.
어거스틴은 설교를 잘한다고 하는 암브로시우를 보고자 했다.
목사의 제일 자격은 “친절이다.” 처음부터 어거스틴은 암브로시우스에게 넘어갔다.
암브로시우스의 [목회서신] 야만민족의 이탈리에서 북방민족과 싸우다가 로마군인이 포로고 많이 잡혀갔다. 포로를 빼내오는 일을 감독이 했다. 돈이 없으니까 교회 성물(금잔,은잔)팔았다. 사람들이 성구를 판다고 비판하자,이에 대해 암부로시우스는 “주님을 위해서 금을 많이 가지고 있는것보다 사람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낫다. 지금 교회는 금을 소유하고 있다.그것은 궁핍한 자를 위해 쓰기 위함이다. 금,은과 같은 성구보다, 살아있는 성구인 사람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 낫다.”
14장 (24) 이때까지 마니교에서 성서에는 서로 대치되는 부분이 많다.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했다고 해놓고 요한복음에서 독사의 자식들아 하지 않았는가 라고 말했다.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는 은유적해석이다(알레고리). 종교적인 언어와 과학적인 언어는 다르다. 종교적인 언어는 유비적 상징적이요, 과학적인 언어는 사실적, 서술적인 언어이다.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통해 겉으로는 모순적인 것이나, 영적으로 풀어주니 이치에 맞았다. 사실적으로 풀다보니 모순적인 것 같았으나 은유적으로, 영적으로 보니 맞는 말.
(25) 자연과학자의 말도 맞았다. 회의론도 어거스틴을 도왔다.
성서에 대해서 -
1) 문자적 :
(1) 비유 -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신학을 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문자적 으로 믿고 있다. 문자적으로 우리가 읽을 때는 문제가 생긴다. 글자 그래로 믿으 면 문제가 많다.시23편에서 우리는 양이고 하나님은 목자라고 한다면, 목자가 양을 기르는 목적은 무엇인가 ?
유비(비유) 하나님은 나의 목자와 같으시니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예수님께서도 천국을 말하실 때 “이와 같으니”라고 하셨다. 이와 같지 않다는 말도 포함되어 있다.
유비라고 하는 것은 이세상에서 경험한 것이다. 종교적인 언어는 저세상의 것이다. 그런데, 저세상의 것을 말하기 위해 이세상의 것을 비유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니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어느 면에서는 하나님은 목자와 같다 : 인도,보호.
그러나, 목자가 양을 결국가서는 잡아먹는 것을 하나님과 비유할수 없다.
그러므로, 유비의 언어는 긍정적이고 동시에 부정적이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면서(보호,인도) 세상의 목자와 같지 않다(식용은 아니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종교적인 언어는 문자적으로 받아들일때는 고난적이다.
유비적인 것은 맞는 부분도 있고 않맞는 부분도 있다.
(2) 은유 - 은유라고 하는 것은,여기서도 저기서도, 이 세상 저세상에 다 맞다. 이 성경법을 알레고리적 해석법이라고 한다. 누가 먼저 나왔는가 -에서 야곱. 야곱이 늦게 나왔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다. 새로운 이스라엘을 교회라고 한다. 야곱이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오는데, 먼저 손이 나오고 머리가 나온다. 그리고 몸이 나온다. 손은 구약 머리는 그리스도 몸은 교회를 말한다.
교회란 사방에 흩어진 밀알이 거두어져 물에 저어 구워져 빵이된다. 사방에 흩어진 사람들이 불려져서 세례의 물로 하나가 되어 성령의 불로 구워져서 빵이되고 교회가 된다. 은유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문자 넘어에 신비적인 것을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 은유이기 때문이다.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성서와 어긋나기 때문이다.
2)역사적 - 성서는 진공상태에서 주신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인물을 통해서 주셨기에 역사적 배경,인물,사건을 알아야 한다. 문자적인 것을 피하고 역사적인 해석을 해야 한다 . 그러나 역사적인 것만으로는 안된다.
3)주관적인 해석을 피해야 한다.
교회에서 서로 의견을 묻는 성경공부,연구(병자끼리 진단하는것과 같다).
어거스틴은 주관적인 해석을 막기위해 역사적인 것을 연구,그리스도중심을 떠나지 말 것, 교리중심으로 해석을 할것.모든 해석이 사랑의 왕국으로 인도되도록 할 것.주관적인 해석 - 교수가 술이 좋지 않다는 것을 가르치자고 하여, 지렁이 위에 술을 두방울 떨어뜨리고 무엇을 배웠느냐고 묻자 “술을 먹으면 우리 뱃속에 지렁이가 죽는다는 것을 배웠습니다.”성서의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적인 해석이 주관적인 해석을 막아내고, 어거스틴이 말한 교리중심,그리스도 중심의 해석이 주관적인 해석을 막는다.
동방박사는 사실적인 사건인가 ? 아닌가 ?
요셉의 꿈에 관한 것 - 마태복음에 계보가 나온다. 마태복음의 족보와 누가복음의 족보가 다르다. 성서를 정경화했던 교부들이 복음서를 4개를 택했다. 성경안에도 다원주의적 요소가 있다. 서로 보안하도록 했던 교부들의 지혜와 신앙은 존경할만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요한복음 메시지는 같다. 마태복음 기자가 신학적인 배경이 있다. 마가 누가의 신학과 다르다. 족보가 다른 이유는 그것이다. 동방박사는 마태복음에만 나온다. 그러면 재미있는 것은,
애굽으로 내려간 요셉, 그런데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다시 불려내온 사람은 모세. 마태복음의 기자는 애굽으로 내려간 요셉(예수의 아버지)이 예수님의 구원으로 이어진다.
마태의 신학적인 관점은 옛이스라엘을 불러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려는 것이 불순종으로 실패하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옛이스라엘 실패한 것을,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재시도 했다.
꿈 율법
구약 : 야곱 - 요셉 - 애굽 - 모세 - 홍해 - 광야(40년)
신약 : 야곱 - 요셉 - 애굽 - 예수 - 요단강 - 광야(40일 시험)
산상보훈
◈ 제 6 권. 어거스틴의 고민.◈
1장.어거스틴을 찾아온 어머니.
어거스틴은 어머니를 피해 갔는데 어머니는 쫓아온다. 성서의 해석에 관한 문제가 나온다.
(1) 아무리 지중해 파도가 몰아쳐도 어머니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아무일이 없을 것을 확신했다.
모니카는 어거스틴의 회심을 확신.어머니의 확신과 어거스틴의 불확신이 대조된다.
바닷물 = 위험, 세례 = 용서의 물, 흙탕물 =마니교, 죄, 기쁨의 눈물,영생의 샘물.
자신의 회의를 질병으로 어머니의 회심의 확신을 건강으로 말한다.
병에서 건강으로 회복되는 상태를 위기라고 한다. 불확신성을 위기라고 한다.
2장. 낡은 관습을 버리는 모니카
낡은 관습 = 북아프리카는 극단적인 순교자에 대한 숭배가 있었다. 순교자의 명단에 오르는 것이 명예이기에 과격적으로 순교를 자청했다. 축제에서 순교자에게 술을 드리는 관습이 있었다.(Laetitiae )
그래서 모니카는 순교자의 사당에 와서 북아프리카의 관습을 계속하려고 하자, 모니카를 제지하는 암부로시우스.
후에 어거스틴이 감독이 되어 북아프리카에서 이 관습을 없애느라 고생 - 그래서,어거스틴은 지금 이런 관습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러면 안된다는 말을 은연중에 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순종을 말하면서, 북아프리카에서 이런 관습을 지키는 사람드에게 교육용으로 말하는 것이다. (참회록을 쓰던 당시 북아프르카에 감독으로 있었을 때이다)
cf) 한국에서의 제사,추도식 문제. -> 기독교적 추도식의 문제.
동방교회에서는 성자들을 섬기는 숭배라고 하는 것이 있다.
Dulia - 숭배 (존경을 의미) 성자들에게만
Latria - 예배 하나님에게
서방교회에서 희랍어를 옮기지 못해서 이 두말의 차이를 몰라서 분리하지 않아서 박해가 일어난다.
동방교회의 전통을 이었다고 한다면 제사와 예배의 문제가 어긋나지 않을 가능성이 열린다.
어머니는 항상 좋은 일을 하셨고 신앙생활에 열심, 교회생활을 했다.
기독교인은
①선한일을 해야하며
②신앙생활에 열심해야 하며
③교회생활도 해야 한다 :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교회공동체에 참여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샤머니즘 때문에 윤리없는 종교로 타락했다. 신들의 장난이니까 제사만 잘하면되 --> 교회만 잘 다니고 헌금만 내면 되는 교회생활로 이어졌다.
3장.암부로시우스의 말씀과 모습.
세상사람들의 행복의 표준 = 명예, 돈, 여자.
이 셋중에 특별히 암부로시우스에게 빠진 것이 여자. 그래서 어거스틴은 암부로시우스가 독신인 것이 어거스틴에게는 의아했다.
암부로시우스가 분주한 이유 : 325년 니케아 회의때 콘스탄틴황제가 “몰수한 재산은 돌려주어라, 박해중지, 크리스마스제정, 성전건축,감독에게 재판권허락.”
감독의 권한은 신앙의 아버지뿐만 아니라,사법권,행정권을 갖고 있다.
암부로시우스의 정독 : 사제들 공부 열심, 小食,
노회별로 모여 책읽고 토론 하고 발표하는 것도, 목회하면서 계속공부하도록 돕는 방법.
(4) 암부로시우스를 하나님의 신탁이라고 했다.암부로시우스의 설교를 들으면서 성서해석의 길이 열렸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하나님도 인간의 모습? 그렇다면, 하나님도 제한을 받고 있는 것으로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높이 계시며- 초월하시는 하나님,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 내재하시는 하나님
초월의 극단 = 무신론 , 완전내재는 범신론으로 세계 = 하나님.그래서, 이것도 무신론으로 떨어진다.
기독교에서는 둘을 같이 써야 한다. 나라고 하는 영혼은 신체 각부분에 현존, 하나님도 세계에 현존해계시면서도 손톱은 내손톱이 아닌
4장. 문자와 그 정신
문자에 매달리는 근본주의. 마호멧이 근본주의. 기독교의 근본주의도 마호멧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학자도 많다. 문자주의, 근본주의 오류 -> Holy War
근본주의가 하나의 원리를 굳게 잡고 나가는 것, 그것에 자기의 정력을 다받치는 것은 좋지만 자기가 잡고 있는 것이 옳은지는 검토해야한다.
글자는 두가지가 있다.
What is said ? 무엇이 말해졌는가 = 문자 경문
What is meant? 무슨 의미인가 ? 의미 영 고후 3:6
(6) 성서를 읽을 때 어렸을 때 보던 것을 버리세요.신앙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나이에 협소한 이해는 버려라. 어린아이때 가진 생각이 자랄수 있도록.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신비를 다 알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할수 있는한 이치에 맞게 신학을 해야한다. 유리창은 4장이 깨졌는데, 내가 가진 것은 3장.
그래도 막아봐야지. 가만 있을수는 없다.
성서해석의 규범 = 고후3:6
※ (요엘 3:10)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어라
사 2:4 (미4:30) 칼을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것이며
베트남전때 자기 사상에 맞게 말씀을 플랭카드로 만들었다. 우리는 조명을 받는것이지 조명을
알면 믿을 필요가 없다. 믿은 것을 알게 된다. 아이는 처음에는 엄마를 믿고, 나중에 커서는 알게된다.
어거스틴은 사7:9을 사용.믿고 안다 -> 안셀름은 어거스틴을 따른다.
덮어놓고 믿는 것은 아니다. 믿는다고 할 때, 믿는 이유는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거스틴의 입장 “나는 믿고 안다.
왜 믿어야 하는지 안다.“그래야 맹신,광신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다 따라간다. 믿는다는 위험성을 벗어난다.
안다 믿고 -> 안다 |
이성의 눈이 안질로 이해할수 없어, 믿음이라는 약으로 이성의 눈이 나아서 알게된다.
신앙경험을 전제로 하지 않는 신학은 있을수 없다. 그러나, 이해로써 신앙생활의 내용을 충실하게 한다.
5장. 성서의 권위
어거스틴이 직면한 문제나 우리가 직면한 문제나 같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성서에 나온 것중에 과학에 맞지 않는 것은 논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성서에 어떤 것은 맞는 것이 있지않은가. 이것은 은유적인 의미가 있다.
자유주의 신학자 하르낙은 어거스틴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싫어한다.
하르낙에 의하면 어거스틴처럼 성서에서 살았고,성서를 인용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자기책에서 4/5를 성서인용.내용의 2/3가 성서에서 왔다.
성서해석에 대하여 쓴책은 ①마니교도들을 반박하는 창세기 주석
②신앙의 효율성③ 미완성 창세기 강해④로마서 주석 ⑤문자그대로의 창세기 강해
⑥복음서 저자의 일치성⑦ 시편강해 ⑧ 요한복음강해등이 있다.
성서해석학에 대하여 쓴책은 De Doctrina Christiana 기독교 교의학(그리스도교 교양)
** 성서가 중요한 이유
첫째는, 인간은 유한하기에 완전한 지식 확신에 이룰수 없다.
인간의능력도 제한되어 있어서 신비의 밑바닥을 젤수 없고 부분적으로 알 수밖에 없다. 대부분은 믿음을 통하여밖에 살수 없다.
둘째는, 인간은 미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지식은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서서히 성숙한 과정에 이를 수 있다.
내적으로 고증,성서의 인도와 도움을 필요. 외적으로는 그 권위를 받아들이는 믿음이 필요하다.
셋째는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죄인이기에 인간은 올바른 이해에 도달할수 없다. 인간의 죄성은 본성의 왜곡이기에 진리를 올바로 이해할수 없다.
죄는 인간의 유한성이나 미숙성이 아니고 영혼의 병이다. 인간의 눈병과도 같다. 그러므로 믿음을 통해서 치료가 되어야 한다.
“어거스틴의 성서해석학의 원리는 오랜세월동안 지배적인 이론으로 지배해왔다.”
A. 첫 번째는 기호론 (sign)을 말하고,
B. 두 번째는 성서해석의 원칙,
C. 세번째는 성서해석의 실례.
A. 어거스틴에게있어서는 성서해석은 기호론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한다.
모든 가르침은 사물에대한 가르침이거나 기호에 대한 가르침이기에. 기호라고하는 것은 사물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가리키는 것이다. 기호에는 두가지의 기호가 있다. 자연적인 기호와 의도적인기호가 그것이다. .
1)자역적인 기호 : 인위적인 의도없이 사물을 알도록 해주는 것 - 연기는 아무의도없이 불을 가르친다. 짐승들의 발자국 사람들의 얼굴,성낸얼굴, 웃는 얼굴
2)의도적인 기호 : 생명체들이 자기의 정신상태나 인식한 것을 타자들에게 주고받는 기호이다. 인간언어,문자이다. 의사소통하는 것, 성서에 포함된 여러기호도 여기에 포함된다.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해준 것이 성서이기에.
의도적인 기호는 문자적인 기호와 상징적인 기호로 나뉜다.
(1)문자적인 기호 : 알레고리, 어떤 단어가 제정된 고유의 의미대로 사물을 가리 키는데 사용된 기호 (동물인 소)
(2)상징적인 기호 : 문자적인 표식의 자체를 말하지 않고 그것을 통해 그것을 통해 다른 것을 가리키는 것을 말한다. (딤후5:18 곡식을 밟아떠는 소
여기서 소는 주의 종을 말한다. 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
문제가 되는 것이 기록된 문자의 언어가,상징적인 기호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 ?
기록된 문자로 이해되지 않는 언어 : 알지못한기호 (미지의 기호),애매한 기호 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서언어 대한 지식을 익혀야한다. 성서번역의 문제에 있어 뜻이 이해되지 않을 경우, 이전의 번역으로 들어가 잘못된 번역이 있지 않은 지 확인, 문맥을살펴 글자의 뜻을 알아가야 한다고 한다.
실로암의 못이라고 하면, 실로암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고, 성서의 글자가 말하는 사물을 살펴봐야 한다. 뱀같이 지혜롭고 마10:16을 이해하려면 뱀의 성격을 알아야한다. 공격을 받을 때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온몸을 노출시키듯 , 우리도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수 있어야 한다.
허물을 벗을 때 작은 구멍으로 들어가 벗고 새로운 힘을 얻는다고 하는 것을 알면 우리도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
상징적인 기호를 이해하려면 수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한다.
어거스틴도 수에 대해 관심한다. 40이라는 숫자를 이해해야 예수의 시험이해.
성서이해에 애매한 기호가 나올때는 역사적인 연구,문맥연구, 성서해석의 기준에 위배되는 일없이 해석해야 한다.
B. 그러면, 어거스틴의 상징적인 성서 해석의 기준은
1) 상징적인 성서해석을 할 때 모든 것을 알레고리로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의미가 분명할때는 상징적으로 해석할 필요없다.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
2) 성서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사자의 말이 상스러운 말이 나올때는 상징적으로
이해해라. 예를 들면 호세아의 이야기. 창녀를 아내로 받아들인 것.
3) 모든 상징적인 해석은 사랑의 왕국으로 수렴되도록 하여라.
사랑에 위배되는해석은 하지 말아라.
4) 하나님의 말씀이 악과 범행을 조작하는 것처럼 보이는 곳은 상징적으로 해석을 해라.
예)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 그대로 받아들이고
숯불을 그위 놓는 것이 되리라 - 상징적으로 받아들이라
성만찬도 상징의 의미.
** 어거스틴은 상징적으로 이해할것인가 문자적으로 이해할것인가의
한계성을 정해준다.
첫째로, 그리스도중심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리석고 맛없는 책이
둘째로, 상징적인 해석은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 록 해야한다.
셋째로,교회에서 증거하는 신앙의 기준,교리에서 벗어남이 없도록 해석을 하여라.
C. 성서해석의 실례.
1) 은유적인(알레고리,상징적인) 성서해석
구약의 기록은 주님의 오심을 상징한다.
야곱의 출생을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야곱이 출생할 때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 손이 나왔고 머리가 나왔고,
시간적으로는 손 - 머리 - 몸이 지만
전존재론적으로는 머리가 손과 몸보다도 앞선다.
머리는 그리스도 손은 구약 몸은 교회
요3:29 세례요한의 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성서의 다양적인 해석은 어거스틴에게서 나왔다.)
해석 : 이 본문은 죄를 고백하는 인간의 고백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요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 - 요한은 목베움을 통해 낮아졌지만 예수는 십자가로 높아졌다.
예수는 낮이 길어질 때 출생, 낮이 짧을 때 출생한 요한
예수님의 세례는 전세계에서 행해진다.
세례요한의 어머니는 생의 마지막에 요한을 출생 마리아는 처녀때 출생,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사라졌지만, 예수의 말은 하나님의 말로 사라지지 않는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여리고로 내려간 사람은 아담/예루살렘은 평화로운 하늘나라/강도들은 마귀들과 추종자들 / 옷을 벗기는 것은 불멸성제거/ 때리는 것은 죄를 짓도록 설득 /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간 것은 영적으로는 죽었으나 영적으로 하나님의 지식이 조금 남았으므로 아직 죽은 것은 아니다/ 제사장은 율법을 레위인은 예언자 사마리아인은 그리스도를 말한다 / 기름은 희망의 위로/ 포도주는 영적일을 하라는 권면/
짐승은 그리스도의몸/ 주막은 교회 / 두데나리온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
주막주인은 사도바울/ 사마리아인이 돌아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성서해석의 다양한 가능성을 시도한다.
12권 18장 (27) 12권 27장 (37) 31장 (42), 25장
결론 : 어거스틴이 채택한 상징적인 해석은 배후에 긴역사를 가지고 잇다.
구약에서도 랍비에서도 이 해석이 유행했으며, 유대사상과 헬라철학을 절충하려던 필로도, 바울도 갈4:22고후3:14에서 알레고리 해석을 했다.
오리겐에게 강하게 드러났으며, 암부로시우스도 오리겐을 따랐으며, 어거스틴도 체계화하여 후대에 영향을 주었다.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입장의 맞추어 한 성서해석은 아니다.
그의 성서해석은 그리스도 중심, 신앙의 기준, 사랑의 덕에 인도받고 있다.
어거스틴의 성서해석은 신앙적인 반성이라고 본다.
역사비평은 성서가 그때 무엇을 의미했었는가에 초점한다면 ,
알레고리해석은 지금 여기에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초점한다. 상징적인 해석은 텍스트의 지평과 독자가 지금읽고 있는 지평은 융합하는 것이라고 할 때 오늘 우리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수 있다.
영지주의가 기독교를 제일 위협 :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의 하나님을 분리했다. 인간예수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분리해서 인간적인 요소를 기독론에서 제거해서 성육신을 부인. 십자가 죽음도 없다. 구레네 시몬이 죽었지 예수는 죽지 않았다.
우리의 성서관도 영지주의와 같이 받아들일수 있다. 성육신과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적인요소, 언어 문화적인 제한성이 있다. 하나님의 보배가 인간의 질그릇에 담겨있다는 바울의 비유가 인간의 주관을 배제하지 않은 것은, 우리도 영지주의에 빠질 위험이있다.
예수 교회 인간 성만찬 설교
Letter 인성 문자 보이는 육 떡,포도주 인간의 말 상대적
spirit 신성 의미 불가시적 영 그리스도의 현존 하나님의 말씀 절대적
둘이 같이 있어야 한다. 분리하면 안된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질그릇통해 전해진다.
(7)
1) 믿지 않고는 살수 없다. 이것을 맹목적인 신앙,동물적인 신앙.
2) 믿음 없이는 알수 없다. 공리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는 지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전제를 받아들이고 지식이 성립한다. 옆에서 말해주는 사람의 말을 통해서 나의 어머니임을 받아들인다. 이것을 역사적인 믿음이라고 한다.
화이트 헤드가 [자연의 개념]에서 “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 첫째로 사는 것이다.(동물적인 신앙) 두 번째로 잘살아야 한다.(역사적인 믿음) 세 번째로 더 잘살아야 한다.(실존적인 믿음)”
3) 믿지 않고는 할수 없다. 실존적인 믿음 .신뢰라고 한다. 요한복음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너희로 살게하기 위함이요 풍성하게 하려고 함이다.
믿음이 없이는 살수도 알수도 할수도 없다.
한국교회 신앙의 위험
맹신은 덮어놓고 믿는것(눈감고 믿는 것)
미신 - 잘못 믿는 것
광신 - 정신빼놓고 믿는것(개구리 신앙, 어디로 뛰는지 몰라, 뛰는 힘은 있는데 방향이 없다)
불신 - 정신병, 신경과민, 그 병들을 치료해주어야 한다.
* 어거스틴은 신앙을 세가지로 말한다.
1) Credere Deum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말. 이것은 안다는 것을 통한다.
2) Credere Deo 하나님에 대하여 믿는다.
가르치는 것 증거하는 것을 믿는다.
설교할 때 “믿습니까” 이 말은 내가 증거하는 것을 믿는 것을 믿습니까 -한국교회의 설교형태는 여기서 왔다. 이것은 수용이다. 동의합니까 ?
3) Credere in Deum 하나님을 신뢰한다. 인격을 믿는다.
교회가 가르친것에 대해서 , 암부로시우스가 설교할 때 맞다고 받아들이는 믿음이 사람을 치료해준다. 그래서, 교회가 보장해주지 않는 것은 내가 성서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성서의 권위를 받아들이고, 존재를 믿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6장. 헛된 행복의 추구
(9)어거스틴은 명예,돈,결혼을 말하는데,
틸리히는 교만(명예), 불신앙(돈), 정욕(결혼)으로 말했다.
어거스틴은 명예,돈,결혼세가지를 추구하지만, 거지는 술만을 추구하고,
어거스틴은 세가지의 행복추구에서 깨어나지못하지만, 거지는 그래도 술에서 깨어나지않는가.
거지는 즐겁지만 자기는 근심중에 빠져있다.
거지는 자신에게 적선을 하도록 함으로 다른 사람이 천국에 가게 하는데, 어거스틴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한다.
거지는 솔직하다. 술한잔 받고 축복을 해주고 술을 먹는데, 자신은 명예,재물,성공에 급급해 황제 앞에서 수사학 연설을 한다. 거짓말인줄 알면서 박수를 치는 청중들.
거짓말 하는 설교를 해도 교인들은 박수를 친다. 그러나, 설교자는 진리와 함께 기뻐해야한다. 상담을 많이 하는 사람이 거짓말을 많이 한다. 상대의 병을 고치려고 거짓말도 동원한다. 설교준비에서 과정법이 지나치면 거짓말이 습관된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 50대 람이 되는 사람이 자서전을 쓰는데, 자서전을 쓰다보면 자신을 미화하게 마련이다.
7장. 다가스테의 알리피우스.
(11) 후에 다가스테의 감독이 된다. 그래서, 공부를 하려고 로욜라의 감독 파올니우스라고 하는 감독이 있는데, 알리피우스가 파울니우수에게 편지를 써서 유세비우스의 교회사를 빌려달라고 했다. 파울니우스가 알리피우스에게 자신을 소개해보라고 하자, 알리피우스가 어거스틴에게 부탁을 해서 자신을 파울니우스에게 소개해달라고 한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알리피우스를 소개한 글이 여기 게재된 것이다. 그런데, 그 글이 너무 좋아서 파울니우스가 어거스틴에게 어거스틴자신에 대해서도 글을 써보라고 권면 -> 고백록을 쓰게되는 계기중의 하나가 된다.
회개하고도 계속 죄를 짓는다. 그래서, 성화의 과정을 밟아나가기 위해 끓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12) 회개도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철저하게 원인이다.
내 목사님의 화살과도 같은 말씀은 나의 머리위를 살짝 지나가 내 이웃에게 간다.고 하며 자신에게 말씀을 적용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알리피우스는 어거스틴의 말을 자신에게 주는 말로 받아들인다.
나도 모르게 : 인간의 역사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자주 말한다.
cf) 이현필 - 절제생활.
8장. 알리피우스와 투기경기.
(13) 2권에 친구들과 함께 배를 훔치던 이야기와 상관하여, 죄의 집단성,사회성,연대성을 말하려고 한다. 친절한 폭력.
인간은 자신에 대해 자신하면 안되는데, 큰 상처를 받은 사람은 투사가 아니라, 알리피우스였다.
습관의 폭력 -> 알리피우스는 다른 사람을 끌고 오기까지 하게 된다.
어거스틴과 함께 알리피우스는 같은 시각,같은 장소에서 회심을 하게된다.
인간의 심리를 파헤친다.
9장. 알리피우스와 도둑.
(14) 이글 9장을 쓴 것은 왜냐하면 그 당시 감독에게는 재판권이 있었기에 , 경솔하게 재판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려고 한다.
자기도 누명을 쓰고 도둑이 될뻔 했다. 피상적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려고 한다.
10장.밀라노에 온 알리피우스와 네브리우스
(16) 알리피우스에게 특혜를 요구하지만 거부한다. - 외적인 시험은 극복했다.
거짓말,뇌물,특혜가 없어지면 한국은 일어선다. 외국기자 “투명성이 없어서 그런다.” 사과박스 겉에만 멀쩡한 사과.
그러나, 내적인 시험을 받는다. 자신의 책 사본을 만드는데, 특별공정가격으로 지불하고 싶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특혜를 이용해서 자기의 일을 정부의 돈으로 하는 많은 일이 있다.
어거스틴의 결론:그를 금하는 공평성이 자신의 직책이 부여하는 특권보다 더 유익.
한국교회는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느냐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어떻게 기독교인답게 사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17)진리를 붙들어야 세상의 것을 버린다.
11장 . 어거스틴의 자기성찰.
(18) 어거스틴은 이제 자신에게 눈을 돌린다.
(19) 진리를 파악했으나, 진리를 추구하며 살지 못한다. 세상과 인연을 끓고 진리에로 헌신할려고 하니까 유혹이 다가온다. 황제와 친구가 되었다. 그러니, 총독쯤은 문제 없다. 어거스틴이 추구하던 것은 명예 (PRIDE ) 돈 (탐욕) 결혼,여자(정욕). 도지사가 되면 명예가 획득되고, 그러면 돈많은 여자와 결혼해서 돈,정욕문제가 해결된다.
(20) 너무 자신의 힘에 의지했음을 말한다.
12장. 독신과 결혼생활.
(21) 한가한 - SCHOLE
한가하다는 말에서 SCHOOL이라는 말이 나왔다. 한가해야 공부한다. 여러 가지 일에 매달리지 말아라. 돈이 없어도, 공부해라. 돈은 오지만, 기회는 오지 않는다.
습관의 폭력
(22) 틸리히 - “충족에 접근하는 길은 반복하는 것이다.”충족되지 않으니까 계속한 다.충족될수 없는 정욕.
13장. 어거스틴의 약혼.
(23) 카르타고에서 만난 여자는 천민 출신. 명문의 가문의 딸과 결혼을 해야 명예를 얻는다. 그래서, 어머니는 계속 어거스틴에게 결혼을 종용. 모니카도 완전회심한 것은 아니다.
어거스틴은 꿈을 믿었지만, 어머니의 허황된 꿈은 믿지 않았다. 신앙에 도움되는 꿈은 믿고, 도움되지 않는 꿈은 믿지 않는다.
북아프리카 사람은 성숙해서 12살쯤되면 결혼할만큼 성숙하다고 한다.
14장. 공동생활의 설계와 이해.
(24) 원시공산주의와 같은 공동생활을 추구.
로마니아누스가 돈을 대서 어거스틴을 카라트고에 유학시킨 사람.
공산주의는 이상적인 것이지 현실적인 것은 안된다.
“우리중에 어떤 이는 ~ ” : 인간은 욕심이 있기 때문에 순수한 공동생활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고자 함.
15장. 어거스틴의 동거인.
(25) 모니카가 잘못한 것이 이것이라고 본다. 자식까지 있는 여자와 결혼시켰으면 좋았을 것을. 어거스틴은 모니카가 자기와 동거인을 떠나보냈다고 하는데, 라틴어로는 칼로 “잘라냈다”고 한다.
잘라냈으니 어거스틴은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린다.
정욕의 노예 - 여자와 살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노예가 되었음을 말하려고 한다. 자유의지가 노예가 되었다는 말이지 자유의지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죄에 대한 불감증을 말한다. - 곪아서 질병을 의식하지 못함.
16장. 죽음과 심판을 두려워 함.
(26) 어거스틴의 쾌락의 브레이크 - 죽음과 하나님의 심판.
어거스틴은 조명설을 믿는다. 우리의 육신의 눈이 사물을 식별하기 위해서는 햇빛이 필요하다. 우리의 영계의 세계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진리의 빛을 영계에 비춰준다. 우리의 영혼은 눈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빛으로 조명해주실때 진리를 식별하게 된다. 교사론에서 조명설에 대해서 설명한다.
행복은 육체적 쾌락, 우정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생각했다. 암부로시우스를 통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서 고민한다.(아 이 구부러진길) 그래서, 하나님에게 향해야 할 영혼이 구부러져 나에게로 향한다.
내 영혼이 등으로 옆으로 누워도 불편 : 불면증.
젊었을 때 불면증에 걸려보지 않은 사람은 바보이고, 늙었을 때 까지 불면증에 걸려보지 못한 사람은 천치이다.
수학자 화이트헤드 50대에 불면증 걸려 신학서적 다 읽었다.그래서, 하바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게 되었고,거기서 [과정과 실체]라고 하는 책을 썼다.
불면증에 걸린 사람에 대한 책을 다 읽어 보니 “불면증으로 인해서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사람이 왜 자는지 줄은 지금도 잘 모른다. 잠 안자고 쉬는 사람도 있다. 불면증이 있으면 안자면된다. 잠이 안오면 잘려고 할 필요없다.
달린다고 목적지까지 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셔야 한다. 우리의 힘으로 된다는 것은 도덕주의요 펠라기우스 주의가 된다.
◈ 제 7권.신의 본성 악의 본질 기독론 문제에 대하여 ◈
성서안에는 절대적인 것이 증거되어 있다. 그러나 그 증거의 수단은 절대적인 것, 영원한 것이 아니다. 예수가 이세상에 오셨을때는 제한성에 들어온 것이다. 성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성을 받아들인 것이다. 영지주의에서는 신성만 인정하고 인성배제한다.
성서안에 언어,문화, 세계관은 상대적인 것이다. 성경의 내용이 모두 절대적인 줄 알았다가, 성경안에서 상대적인 것을 발견했을 때, 성서안에 모든 것이 동등하기에 절대적인 것까지도 상대화시켜 버리게 되면 성경은 성경이 아니게 되며, 신앙을 저버리게 된다.
하늘의 영원한 보배가 인간이라는 질그릇에 담겨져 있기에 충돌될 필요가 없다. 질그릇은 성서의 내용을 보호하고 증거하는 것이다.
신학은 일관성과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
일관성(consistancy) : 기독교 신앙의 체계에 대해서 내용의 합리성(이치에 맞아 야한다). 성경안에 이런 저런 내용이 서로 합리적으로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연관성(coherency) : 하나님은 이 세계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신다. 세상의 만물을 다루는 학문과도 연관성이 있다. 이것을 신학이 다루어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논의가 신학이라고 한다면 만물을 연구하는 학문과 연결 을 짓는 것이 좋다. 방향을 전해주고 가치를 주는 신학으로 지향해서 우리의 눈을 넓혀야 한다.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주라고 한다면 만물에 대한 연구를 두려움 없이 시도되어야 한다.
1-7 장 에서는 부적절한 신론
8-14장 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아서 참다운 신론에로 인도
15-21장 플라톤주의 결여된 점
1장.신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
(1) 인간의 형체를 가진 하나님 처럼 생각했다. 마니교 때문에 눈으로 보이는 형체외에는 생각할수 없었다. 교회에서는 신인동형론을 용납하지 않는다.
(2) 하나님은 큰 실물적인 실체로 모든 것에 침투해 있다고 생각.
나중에야 영적인 존재로 이해하였다.
3장. 자유의지와 악의 문제.
(4) 하나님은 창조주임을 믿었다. 하나님을 불변하는 존재임을 믿었다.
그들이 악의 원인을 탐구하지만 ~ : 마니교의 이원론
(5) 악은 자유의지 때문에 생겼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Credo ① ut intelligam ② 신앙하고 이해하려는 노선위에 어거스틴도 서있다. 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또 원하고 있는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의지의 주체는 나다.” 의지를 악용하는 것이나 왜곡하는 것은 나의 자유의지이다.
내가 원치 않는 그것을 할 경우 그것은 자유의지의 남용에 대한 심판.
4장. 하나님은 최고선이시다.
(6)
안셀름의 존재론적 증명
ⅰ. 가장 위대한 존재 하나님보다 더 위대한 존재를 생각할수 없다.
“하나님은 그 이상 생각할수 없는 완전한 존재.” - 이것이 전제.
안셀름은 사물에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출발한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하더라. 어리석은 사람을 빼놓고는 하나님은 더 이상 위대할수 없는 존재이다.
아퀴나스 : 제일원인이 하나님이다. 사물의 원인을 찾아가는 것이다.
ⅱ. 우리 마음속에만 존재하느냐 객관적으로 존재하느냐 ?
마음안에만 계시다면, 더 위대한 존재를 생각할수 있다. 마음밖에도 계시고 마음안에도 계신 존재가 더 위대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안에만 존재하면 더 위대한 존재를 생각할수 있기에, 더 이상 위대할수 없는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도 계시고 객관적으로 계시다.
우리의 개념으로만 존재한다면 더 위대한 존재를 생각할 수 있다. 그렇기에 실재로도 계시는 최고 존재가 하나님이다.
능력과 뜻이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는 존재가 먼저 있고 그것을 알게된다.존재가 전제되고 알게된다.
하나님은 앎으로써 존재케 한다. 하나님은 아시고 존재한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창조주이다.
5장. 악의 원인을 찾아서.
(7) 악을 나 밖에서 찾는다. 자기가 책임을지지 않으려고.
이태까지 내가 악의 원인을 찾지 못한 것은 방법이 잘못되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전능하시니까 악이 존재할수 없다.
“본래부터 어떤 악한 질료가 있었는데~”.플라톤의 “Timaeum 의 요수”라는책에 나오는 창조설
태초에 하나님이 데미오고스가 세상을 창조 했다. 이데아가 있고 질료가 있다.
데미오고스(목수) ---> 이데아 (청사진)
↖ ↗
↖ ↗
질료 (재목, 구약의 혼돈과 같다)
이미 있었던 질료를 이데아에 맞추어서 창조했다고 하는 것이다.
문제 : 목수는 청사진대로 집을 지으려고 하지만 청사진 처럼 안된다. 재료 때문에. 재목은 집을 짓는 조력자가 되지만, 완전한 청사진에 대한 저항세력도 된다.
플라톤의 신은 재목에 제한을 받는 유한한 하나님이 된다. 재목이 저항못하도록 형상화했으면 이 세상에 악이 없을 것이 아니냐고 어거스틴이 질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다면 모든 것을 좋게 만들텐데, 전능하시다면 악한 질료가 거슬리지 못하도록 하지 못하셨을까 ?
7장. 악의 원인에 대해 어거스틴의 고민.
(11)
부인 : 행복이란 낚시줄을 드리우고 참는것처럼 나에게도 참는 것
내가 말을 할 때 신문을 읽지 않는 것이다
남편 : 행복이란 내가 신문을 읽을 때 내 부인이 말을 걸지 않는 것이다
했던 말을 또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악에 대해 계속 반복하는 이유 : 악에 대한 해결되지 않는 신비때문에.
존재 / 불변 /심판/ 구원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론 /구원을 보장하는 성서의 증거를 믿었다. 전통적이다. 그러나, 악의 원인에 대해 고민.
인간의 내면성 : 하나님과의 접촉점이 마음인데 마음밖에서 찾으려 했다.
하나님
인간
사물 - 육체
내가 하나님께 의존하고 사물을 들을 인간에게 종속시키는 관계가 될 때 안정이 되고 주님이 나의 기쁨이 된다.
이것이 본래적인 삶인데, 하나님과 나의 사이에 틈바구니에 사물이 들어왔다.
하나님
사물
인간
8장. 치료해 주시는 하나님
불안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자극이다.
9장. 성서와 플파톤파의 철학
(13) Marius ,Victorius 회심이후 삼위일체론 썼다. 플로티니우스 책을 번역했다.
이 책을 어거스틴이 구입했다.
(14) 플라톤주의 책과 성서의 책이 거의 같았다.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언급한다.
플라톤주의자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실은 절대적인 하나님이 상대적인 세계에 못들어 온다는 것이다. 성육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데아가 질료에 들어오지 못한다.
(15) 황금- 애굽에서 출애굽을 할 때, 애굽에서의 보배를 가지고 나오라고 했다. 애굽에 있지만 황금은 황금이다.
아덴 - 희랍철학,플라톤철학. 2세기에는 플로티니우스(애굽의 알렉산드리아 사람)철학으로 이어진다.
황금은 플라톤주의를 말한다. 어거스틴은 플라톤철학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신학의 방법으로 삼았다.
플라톤 철학을 신학의 방법으로 쓸수는 있으나, 종교를 만들지 마라.
황금은 좋으나 황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지는 말아라.
10장. 신적인 빛에 의한 진리로의 접근
(16) 플로티누스 -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자신으로 들어간다” - 플라톤 철학 : “당신의 인도하심을 받아” -기독교적이다
안에서 들어가 위를 바라본다. 위는 초월.
※ 어거스틴 사상의 기본적인 틀
“오 영원한 진리여! 참다운 사랑이여! 사랑하는 영원이여!”
영 원 |
진 리 |
사 랑 |
영원한 존재를 말한다. 하나님은being이다(출3:14)
나는 존재한다. 내가 안다고 하는 내 존재의 원인은 하나님 존재 자체이다.
->내 존재원인을 다루는 것을 창조론에서 다룬다.
성부 존재론 I am (신국론) |
truth .빛을 말한다.
나는 안다.본다.
-> 조명설.
성자 인식론 I know (그리스도를 통한 조명- 교사론) |
Love
나는 사랑한다 .나의 의지
-> 어떻게 행복하느냐 하면 사랑의 대상을 발견함으로써 행복해진다. 이것을 행복론에서 다룬다.
성령 도덕철학 I love (행복론)
|
우리는 삼위일체의 영상으로서 I am / I know / I love 하나님을 이해.인식.
진리의 빛에 의해서 인식을 하고 , 내 존재의 원인을 통해서 신을 인식한다.
신국론 11권24절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세계에 계시되었다. 우리가 세계에 대하여 근원을 물을 때 신이 창조되었다고 대답한다. 지혜가 어디서 오는 가 물으면 신이 조명했다고 묻는다. 축복이 어디서 오느냐고 신이 보낸다고 말한다.
신의 생명이 , 신의 진리의 빛이, 그의 선하심이 우리의즐거움이 된다.
11장 . 참존재 비존재 존재
틸리히 1권 이성과 계시 being I am 존재의 문제
존재와 신의 문제를 다룬다
2권 실존과 그리스도 truth I know 인식의 문제
3권 생명과 영
역사와 kingdom of god love I love 사랑의 문제
신과 인간의 문제는 co relate
?������ ( 하나님 )true being , being itself
?������ (세상) nothing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니 To be(being) 無에서왔으니 not to be(non -being) |
참으로 존재하는 것 = 존재 자체true being , being itself 영원한 존재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못한 것을 창조하셨다 = 창조자와 피조자의 차별성
낳다 -> 동일성 성부 - 성자
창조 -> 차별성 하나님 - 인간
참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 = 無 nothing
무에는 두가지가 있다 prope nihil 거의 무 상대적인 무/ 무형의 물질/가능태
/흑암
omnino nihil 절대적인 무
절대적인 무에서 -> 거의무(흑암)를 창조하셨고, -> 상대무에서 세상을 만드셨다.
12권 8장 / 13권33장(519쪽)
하나님께서 절대무에서 세상을 창조가 아니라, 거의무에서 창조. 창세기의 흑암도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오해할까봐 사45:7에는 나는 빛도 어둠도 창조했다.
cf)슐라이에르 마허는 무로부터 창조의 의미를 절대의존으로 말한다.(감정으로 설명)
어거스틴은 존재론적으로 설명한다 .
존재라고 하는 것과 비존재라고 하는 것이 섞여 있다. 이 세상의 존재는 유한한데 그것은 to be와 not to be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고무줄을 한쪽에 묶고 잡아 당기면(not to be -> to be), 잡고 있는한 to be 이다. 그러나 고무는 제자리로 돌아가려는(not to be) 경향이 있다. 이것을 어거스틴은 모든 것은 not to be 無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인간으로 말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내가 to be라고 하는 것은 존재자체이신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무로부터 왔기 때문에 무로 되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잡고 있는한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붙드시는,보존해 주시는 분이시다.
to be를 의지하고 not to be를 물리쳐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시간속에서 나타난다. 시간은 미래에서 오고 과거로 남는다(to be -> not to be)
따라서, 나(I am) 는 하나님( being ) 에 의존되어 있다.
◉ Creatio ex nihilo ◉
누가 집을 지었다고 하면 - 두가지 질문이 가능.
질문 1>무엇으로 지었는가 ? 라고 할 때
세가지의 가능성을 본다 -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는가? 고백록13권519쪽 (1) non de te 당신으로부터가 아니요(유출설을 거부)
플로티누스 -‘유출설’ : 일자,완전자는 말로 표현할수 없다. 너무 완전하기에 창조하지 않는다. 완전한 것은 산출한다. 정신이 흘러나왔고 -> 영혼 -> 물질이 흘러나왔다.
유출설을 받아들이면 우리도 하나님이된다. 범신론에 빠진다. 모든 것이 신성을 가지고 있다. 범신론이 가면 만물 숭배로 빠진다. 창세기는 바벨론의 만물숭배(모든 것이 신들이라는) 사상을 뒤엎는다. p문서기자는 하나님이 창조했으니, 신으로 섬기지 말라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
(2) non de aliquia 질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맞서있는 것에서 하나님이 노력해서 세계를 만든 것이 아니다. 이것은 플라톤의 제작설을 말한다.
플라톤의 timaeus 라는 책.
데미오고스라는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이데아가 있었고 질료가 있었는데, 질료를 이데아에 비춰 형성해서 세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목수가 자료를 청사진에 의해 집을 짓듯이, 데미오고스가 하나님전에 있었던 질료를 가지고 세상을 창조했기에 악과 혼돈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것도 아니라고 한다. - 목수가 청사진대로 집을 지을 수 있는가? 질료는 목수를 도와주는 질료도 되지만, 제한하는 세력도 된다. 자기 뜻대로 지을수 없는 데미오고스의 신세, 유한한 하나님이 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질료까지라도 하나님이 만드셨다. 무로부터 만드셨다.
(3) 무로부터 창조했다.
무로부터의 창조의 신학적인 의미 -
①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말한다. 신과 세계의 차별성을 두면서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차별성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는 세계관.
피조물은 하나님에게 의존한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은 좋다. 기독교 신앙에서 무는 나쁘다.
“무가 되는 것보다는 지옥에서 타는 것이 낫다.” 지옥에 타기 위해서는 존재해야 한다. 존재가 좋다. 하나님은 존재자체이기에. 존재 하는한 존재자체에 참여한다.
②의존성은 가변성 - 가변성이기에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좋다
③하나님이 창조한 것은 다 좋다. 본래는 좋다. 창조의 존재론적 구조는 좋다. 악은 존재 구조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에서 생긴 것이다.
④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것은 한 목적이 있다.
질문 2> 언제 지었는가 ?
언제 세상이 창조되었는가 ? 신국론 11권 하나님은 세상을 시간안에서 창조하지 않으시고 시간과 함께 창조했다.
@ 시간안에서 세상 창조했다고 하면, ⅰ.창조이전에는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라는 질문이 나온다.( 마니주의 교도들의 질문) ⅱ.하나님과 시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존재가 된다. 하나님은 몇살 ? 어거스틴에게는 하나님은 시간이 없다. 영원자. 창조이전에는 시간이 없다.
@창조는 절대시간,시작에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다. 왜냐면, 시간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이 창조, 다스리는 분이시다.
절대시작이 있기에 언젠가는 종말,완성이 있다. 종말은 하나는 끝finis 을 의미하고, 하나는 완성teros 을 의미한다.
@무로부터의 창조가 성서적인가 ?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 명령한다. 무로부터 창조했다. 절대주권자이다. 하나님의 세력에는 도전하는 것이 없다.
사45:7, (마카비2권 7장 28절)여기서 처음으로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한다. “하나님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한줄 모르느냐”
쉐퍼드 “목회서신” - - - 어거스틴이 무로부터의 창조를 정착시킨다.
12장 . 모든 존재는 다 선하다.
(본래는) 좋은 것이 나빠졌다 하더라도 다시 좋아질수 있다 = 구원론.
창조 자체는 좋다. 존재론적 구조는 좋다. 역사적인 사건의 잘못으로 인해서 나빠졌다. 그러므로 다시 좋아질수 있다. 나빠지게 된 것이 역사적인 사건의 사건의 잘못으로 나빠졌으니, 역사적인 사건(그리스도의 성육식)을 통해서 좋아질수 있다
그래서 첫째 둘째 아담이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는 선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은 아주좋은 선이 아니라, 중간적인 선이다. 그러기에 타락할수 있고 좋아질수 있다. 나빠진다고 하는
아주 좋은 것이 타락하면 아주 나빠진다. corruption of best is worst
존재와 선은 일치한다. 좋은 것을 다 상실하면 존재도 상실한다. 좋은 것과 존재란 같다. Whatever is, is good .*존재하는 것은 좋다.
천사의 타락이나 아담의 타락이나 같다. 선하신 하나님에게 등을 돌렸기에.
하나님이외에 존재론적 질료,세력 인정하지 않는다 = 절대유일신사상
리챠드 니이버“극단적인 유일신사상과 서양문화라는 책에서 존재하는 것은 다 좋다”
모든 것을 동등하게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존재의 계층과 선의 계층은 같이 간다
존재의 계층에 따라서 선의 계층이 있다. 이런 것이 함께 있으면 좋다.
13장.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함.
(19) 다 조화된다. 생태계의 조화를 말한다. 불필요한 것이 없다. (모기도 필요하다) 어떤 면에서는 공헌을 하고 있는지, 어디에서는 조화되는지 모른다.
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화가 된다 .
라이프니찌히 - 하나님이 창조할수 있는 것중에서 제일 좋은 것이다.
14장. 온전한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피조물을 다 즐거워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 창조의 피조세계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먹이사슬.
우리가 잘못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 자연악 .
악은 두가지(자연악 / 인간악)이 있다. 자연악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인간의 잘못으로 생태계도 파괴되었다.
어거스틴은 말년에 가서는 인간의 타락을 심각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예정론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15장. 시간과 영원 .
하나님이 붙들고 지지해 주기에 존재한다. 틸리히 “하나님은 존재의 기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 -> 성전을 위로 짓는다.
하나님은 땅에 계셔 -> 지하 성전을 짓는다.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이기에 지나가는 시간이 없다.
하나님의 영원아래서 시간은 흐른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
16장 .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음이 악이다.
빵이 문제가 아니라, 병든이 입이 문제다. 빛이 문제가 아니라 병든 눈이 문제다.그런데 사람들은 병든 눈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빛에 대해서만 말한다.
창조의 계층이 여러개 있는데
높은층에 있을수록 하나님과 닮음이요
낮은 층에 있을수록 하나님과 덜 닯음
인간은 중간에서 하나님과 더 닮아야하지 않겠는가 ? 인간답게 살아라.
17장. 무엇이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방해하는지
아름답다는 표준이 있으니 이 꽃은 아름답고 저 꽃은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표준이 안된다. 그 표준에 의해서 이것은 이렇다 저렇다 판단한다. 내 위에 어떤 표준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내면성의 원리 : 밖에서 시작해서 관찰하는데서부터 자기 안으로 들어오고(내면성) 자기 밖으로 초월한다(신비주의) - 플로티누스의 영향 .
플로티누스는 일자에서 유출해서 多에서 위로 올라간다(신비주의).
7권 신비주의 - 플로티누스 적이요 개인적인 신비주의
9권 10장에도 기독교적인 신비주의 체험이 나온다. 기독교적인것
10권 25,27,28장은 신비체험 =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체험한다. 은혜로 말미암아
물체에서 감각으로 감각에서부터 영혼으로 감각을 평가하는 지각에 다다랐다.점점 하나님께 올라간다.
습관의 세력에서 벗긴다 :
신비주의에는 3단계 :
(3) 교제 하나님과 연합 union 교제의 신비 (communion)
(2) 명상 concentration (하나에 집중한다)
(1) 정화 purification
냄새는 맡았다. 그러나 맛을 보지 못했다.
기독교인은 already - Not yet
아직 먹지 못했다. 그러나 향기는 맡았다. 구원의 확신을 어느정도 얻었다. 냄새를 맡은 것은 먹은것과 거의 같다. 그래서 당신을 즐기는데 알맞는 힘은 중보자 = 그리스도.
18장.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
기독론을 말할 때 두가지를 생각한다. 삼위일체론과 연결된다.
person (who 인격)
work (what 사역)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때 삼위일체론 확정. 어거스틴은 논쟁적이지 않다.
325-381년에 정착했기에 이미 정착된 것을 어거스틴이 다룬다.
삼위일체론 = 하나님과 예수그리도의 관계가 무엇인가 ?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의 동질성을 말한다.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기 위해서 삼위일체논쟁. 삼위일체론이 확정되자 예수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451년칼케돈 회의때 기독론 결정. (430년 어거스틴 사망) 어거스틴이 451년 기독론 확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요10:31 아버지와 나와 같으시다. 14:28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 하나는 동질성을 하나는 차별성을 말한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
어거스틴 : 예수그리스도의 인품을 두가지로 본다(빌2장) 하나님본체로서의 아들 종의 형체로서의 아들.
희랍성경 : (하나님의 본체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아들 = 영원한 아들 로서의 로고스를 말하는 것이다. 이면에서는 아버지와 나는 같다.
그러나 종의 형상을 입고 태어난 아들 이것은 성육신 하신 아들이기에 아버지가 나보다 크다고 함.
영원한 형상으로서의 아들 (신성을 의미) 종의 형태로서의 아들 (인간성을 말한다.
20장. 플라톤주의 자들의 책을 읽음
마니교의 영향으로 물질적인 것으로 보던 견해에서, 영적인 것으로 실체를 보는데 눈을 뜨게 된다. 유물론을 극복하게 된다.
플라톤주의 자들은 교만하다.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의 차별을 말한다.
플라톤주의는 겸손이 없다. 철학은 교만하고 기독교는 고백한다.
플라톤과 기독교의 차이를 말하고자 한다
1) 무로부터의 창조
2) 플라톤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아 못들어온다. 로고스가 이 변화무쌍한 세상에 들어오신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기독교의 역설적인 진리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플라톤 : 이데아의 세계를 아는 것은 예지 지혜 /형상의 세계를 아는 것은 역견
위에서 출발
기독교 :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심 .아래로부터(믿음이) 출발이다.
3) 가치를 찾아가는 것 : 하나님이 먼저오시는 그래서 우리의길이 되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온다.
4)우리의 몸,세계가 중요하지 않다 : 본래 좋은 것이다. 세계와 우리의 몸을 부정적으로 봐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금욕주의는 말이 안된다.
5) 윤회적 시간 : 직선적인 시간
6) 교만 과 겸손의 차이. 겸손은 고백을 말한다. 플라톤주의에는 고백이 없다. 회개의 눈물, 성만찬이있었는가 ?
이론(7권)을 다 다루었지만 회심에로 인도되지 않는다 .회심은 이론의 문제가 아니다. 의지의 문제이다.
◈ 제 8 권.어거스틴의 회심 ◈
8권은 하이라이트이다. 어거스틴의 회심을 말하면서 의지의 왜곡을 말한다.자유의지의 왜곡을 알고자 한다면 8권을 보면된다.
1. 장.고민 끝에 심플리키아누스 사제를 찾아감.
(1)마니교에서는 결정론(신이 우리의 행동을 이미 결정했다)을 말한다.
어거스틴의 예정론은 결정론인가 ? 본래 자유스러운 인간의 의지가 죄의 쇠사슬에 의해서 노예화in Bondape 되었다(의지의 노예화). 노예의 상태가 되었다. 묶여 있는 것이다. 은혜가 와서 사슬을 풀어주었다. 마니교의 결정론은 영원히 결정되었다. 그러나 예정론은 그렇지 않다.
1)intellectual conversion : 어거스틴은 7권에서 지적인 확신intellectual conversion ,지적인 회심은 어느정도 되었다.
2) Existential conversion : 하나님을 지적으로 용납하였다고 해도 하나님을 실존적인 확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8권에서는 실존적인 conversion 을 말한다.
어거스틴은 신앙적인 고백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하게 했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복음주의라는 것은 인간의 결단을 대단히 중요시한다. (ex 빌리그래함)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결단의 중요성을 말했다. 그런데 등을 졌던 사람들이 결단에 있어서 배를 맞춘다. 결단에 가서는 한침대에서 잔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결단도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다고 한다.
심플리키아누스를 찾아간 이유는 암부로시우스가 너무 바빠서, 암부로시우스를 보좌하는 심플리키아누스를 찾아갔다.
교황이 암부로시우스의 스승 심플리키아누스를 밀라노로 보내서 암부로시우스를 보좌하도록 했다.
심플리키아누스는 신플라톤주의 학자이다. 밀라노에 와서 신플라톤주의 학파를 세웠다. 그래서 암부로시우스의 설교에 플라톤주의색이 나오기에 어거스틴이 관심하게 된 것이다.
(2)이전에 어거스틴을 사로잡았던(명예 돈 )으로부터는 풀려났다. 여자로부터는 헤어나오지 못했다.
사실 기독교에서는 독신을 강요하지 않는다. 마19 나면서 홀로된 사람이 ~
예수님, 바울도 그렇다.
중세기 동안에 교회가 너무 타락을 하게 되었다. 그런
기독교 천년의 역사를 한국교회 100년이 반복하고 있다. (목사가 자기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있고, 총회장당선되기 위해 돈을 쓰고 있다.)
그래서 라튜란 종교회의에서 사제들 독신을 법제화했다.
2장. 빅토리누스의 참회에 대하여
3-4세기의 유명한 교부이다. 어거스틴의 빛에 가리운 사람 .[삼위일체론]
플로티누스의 책을 희랍어를 라틴어로 번역. 아리스토틀의 10범주 번역. 이사람하고 심플리키아누스와 친구. 심플리키아누스 때문에 교회로 오게되었다.
어거스틴이 심플리키아누스와 접촉하게 된 것은 플라톤주의에 접촉하게 된 것이다.
(3) 왜 심플리키아누스를 찾아갔는가 ?
학자들은 “자기의 구부러진 인생길을 고쳐보려고 /플라토니즘을 더 알기 위해서“ 라고 말한다.
어거스틴의 고백은 자기만의 고백만이 아니라, 제자, 부모님의 삶의 고백, 빅토리아누스의 고백을 말한다. 그래서 고백록이 복수(고백들)로 되어있다.
(4) 빅토리아누스는 기독교 책을 읽고 기독교 진리가 옳다고 생각하기에 자신은 기독교 인이라고 한다. 이것은 intellectual conversion 을 의미한다.
심플리키아누스는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하나가 될 때 교인이라고 한다. 어거스틴 너도 신플라톤책을 읽고 이해했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빅토리아누스의 대답 “교회의 벽이 교인을 만드는가 ? ”
세례는 공동체 예배 석상에서 받아야 한다. 공동체와 연합하는 것이 세례이기에 신앙공동체 앞에서 세례를 주어야 한다. 병원에서 임종직전에 세례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교회를 대표하는 장로님 한분이라고 가야 한다.
5장. 내적 투쟁.
빅토리누스의 이야기를 듣고 어거스틴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 243p.
빅토리누스는 어떤 사람인가 ?
아프리카 사람이다.
플라톤 철학자이다.
수사학자이다 .
어거스틴과 너무 같은 점이 많다. 그러나, 빅토리누스는 수사학을 버리고 세례를 받은 것이 다르다. 어거스틴은 빅토리누스와 같이 되고 싶은 마음이 불같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것이 안되는 이유를 말한다. 자기 의지의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의지(선택)의 자유① 왜곡된 의지에서 ->② 욕심(libido)-> ③ 버릇(습관)cosuetudo -> ④필연(의지의 노예,종 : 여기는 자유가 없다)
** 번역에서 빠진부분 243p
이것들은 쇠사슬의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어(그래서 나는 그것을 쇠사슬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를 노예(종)의 상태에 강하게 붙들어 매어 놓았습니다.
.왜곡된 의지 앞에는 의지의 자유,선택의 자유가 있다. 선택의 자유가 있기에 의지의 왜곡이 있는 것이다. 의지의 자유가 탐욕으로 빠지고 이것을 계속함으로 버릇이 생기고, 이것을 반복함으로 굳어져 숙명같은 필연,쇠사슬에 묶인다. 여기는 자유가 없다.
중독자는 스스로 결단해서 빠져 나올수 없다. 중독에서 빠져나갈수 있는 것은 밖에서의 도움으로 가능하다. 이 밖에서의 도움을 어거스틴은 은혜라고 한다.
펠라기우스의 논쟁에서 어거스틴은 세가지 라틴어를 사용한다
①posse non peccre (able not to sin) - 의지의 자유 아담 타락이전
②non posse non (not able not to sin) - 타락이후 모든 인류는 필연 중독 상태 어쩔수 없이 죄를 지을수밖에 없는 상태
③non posse peccare (not able to sin) - 구원받은 사람, 죄를 지을수 없는 상태
펠라기우스 : 모든 아이가 태어날때는 아담타락 이전의 상태로 태어난다고 했지만
어거스틴은
이것들은 쇠사슬의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어(그래서 나는 그것을 쇠사슬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를 노예(종)의 상태에 강하게 붙들어 매어 놓았습니다. -243쪽 빠진 문구
‘쇠사슬의 고리’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 아담이후에 세대들이 역사적으로 고리처럼 연결되어서 우리 인간을 노예상태에 강하게 붙들어 놓았다. 이것을 원죄라고 한다.
@ 개인적으로 실존적으로 어거스틴이 죄를 저질를 선택의 자유가 있었으나 의지의 [왜곡 -> 욕심-> 버릇 - > 필연]이라는 종의상태에 놓여있다. 인류를 말하기도 하고 자기를 말하기도 한다. 인류역사에서 반복되고 있다.
어거스틴은 인류가 죄에 있어 죄의 상태에 있을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구원의 소망은 은혜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11) 진리인식은 이미 되어 있지만 그것갖고는 안된다.
(12) 결단을 말하려고 하는데, 이것을 잠에 비유한다.
습관의 폭력은 자기가 만든 것이다. 자기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간다. 그러나 처음은 자기가 한 것이다. 자기 힘으로 안된다. 은혜의 부상.
어거스틴 이전에는 도덕적인(율법적인)해석이 많았다, 어거스틴에 와서는 기독교를 도덕적으로 해석(펠라기우스)하지 않고, 은혜의 종교로 말한다.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에게 졌다면 기독교는 도덕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은혜를 통해서 살아나면 도덕이 완성된다. 사랑안에서 율법이 완성되는 것처럼.
어거스틴을 처음 회심으로 인도한 것은 빅토리누스의 이야기.
두 번째는 안토니우스 이야기이다.
6장. 안토니우스(251~356)에 대한 이야기.
(15) 아타나시우가 쓴책이다. 5인가6 번인가 유배를 당했다. 그래서 애굽의 사막으로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성 안토니를 만났다. 아타나시우가 다시 블란서로 유배를 가게되서 안토니우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서방에 수도원 운동이 일어난다.
7장. 자기성찰.
안토니우스의 이야기를 듣고 어거스틴은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자기를 성찰하게 된다.
“I seek in order to find
and I find in order to seek.“
자유의지론 3권을 쓰는데, 회심후 돌아올 때 로마에서 쉬면서 1권을 쓴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제2권을 쓴다. 1권과 2권에 사상의 차이가 보인다.
가장 악한 악은 선한 의지라는 가면을 쓰고 저질러진다.
소크라테스가 사형장으로 가면서 아테네의 사람들에게
“검토(성찰)되어지지 않은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자신으로부터 나와 자신의 신앙,삶에 대해서 reffledct 해야 한다.
(16) 날개 = 사랑의 날개
“내가 날개를 치고 하나님께로 가고자 해도 하나님께서 은혜의 공기를 날개아래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께로 갈수 없습니다.”
8장. 정원에서
정원 = 동산
어거스틴의 책에서 정원이라는 말이 나올 때, 그것은 수도원을 의미한다.
(20) 자기분열
?������?������?������wish (will) =본질 .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할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 그 ?������ 러나 우리의 삶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할수 없다.
?������?������?������I can't = 실존
하나님은 본질과 실존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 불면증이다. 시험공부하려고 하면 더 졸려.잠을 자서는 안되겠다 하면 졸려. 반대로 잠안온다 생각한다 할지라도 그 뒤의 생각은 안자려고 하는 마음이 있기에 그것도 해답이 안된다.
9장. 두가지의 의지.
자기분열의 원인을 말한다.
문제해결에 있어서 하나님의 개입을 바란다.
내가 원하는 것을 왜 할수 없느냐 ? 쇠사슬에 묶여 있기에. 왜 쇠사슬에 묶여 있는가 ? 전적으로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분열 때문에 100% 원하지 않는다 . 이것은 의지의 병이다. 아담의 후손의 죄로 인해서 그러는지.
습관과 애인을 같이 말한다. 습관이 애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유혹된다.
11장. 영과 육의 싸움.
(26) 습관을 인격화시켜 여자에 비유했다.
(27) 인간의 노력을 암시.
12장. 어거스틴의 참회
(28) 배나무밑에서 죄인인 어거스틴.
무화과 나무 = 십자가의 나무. 새사람으로 바뀐다.
(29) “들고 먹어라.” 뱀이 “따먹어라.” 라고 한 것.
어린이는 은근히 아기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어거스틴은 “은혜의 박사.Doctor Gratia ”라고 불리운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은총을 일생동안 설명하고 신학적인 기초를 놓았기 때문이다.
그가 회심후에 카시키아훔(밀라노에서 70km)에 가서 6개월 동안 4권의 책
(회의론 반박, 행복론, 질서론, 독백론)을 썼다.그리고 나서
암부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았다(알리피우스, 아들과 함께)
1) [자유의지론]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로마와 오스티아에서 배를 기다리다가, 해안이 봉쇄되어 1년연기되어 어머니는 죽고 , 로마로 가서 자유의지론 1권(LiberaDoctor Gratia)을 썼다.
고향으로 가서 사제가 되기 직전에 2권을 썼다. 396년에 감독이 된 후에 3권을 끝났다. 쓰는 과정에서 사상이 변한다.
1권은 대화의 형식,2,3권은 서술형식으로 썼다.
2) [심플리키아누스에게 보낸 제 문제에 대한 답]
396년 감독이 된 후에 회심을 도와준 심플리키아누스의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해준다.
3) 고백록 8권
1) 자유의지론
악이란 두가지 인간이 행하는 악(자연재해) / 인간이 겪는 악이다.
인간이 겪는 악은 인간이 범한 악에 대한 벌이다. 두가지 다 인간의 의지의 남용으로 인해 생긴 벌이기에 두가지 다 자유의지에 결과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악의 원인을 인간의 외부에 있는 객관적인 실체로 보지 않고 인간의 내적인 욕심,탐욕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그래서, 악의 원인은 내적동기에서 찾아볼려고 한다.
존재의 가층이 있듯이, 가치의 계층이 있는데 가치의 계층에 따라서 사랑을 해야 하는데, 악인은 상층보다는 하층의 것을 사랑하고, 선인은 상층의 것을 사랑해서 최고의 것을 사랑한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의지이다. 이것은 자유결정의 능력을 의미한다. 그런고로 이 의지가 어디로 향하는가에 따라서 선한의지/악한 의지가 된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의지에 의해서 동기가 부여되고 결정된다는 자유의지의 결정론을 말한다. 그것은 곧 영원한 진리에 등을 돌리고 가변적인 상황으로 돌리는 가변적인 의지. 자연사물이 악한 것이 아니라 전도된 의지의 상황의 결정이 악을 행하게 된다.
: 원하면 의지는 상승할수 있다는 것이다. 1권에서는의지와 능력을 구분하지 않는다. 악이란 높은 가치에서 돌아서서 밑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
괴로움,고난등은 악한의지의 결과이다. 인간의 책임이다.
2권에서는 하나님이 왜 죄를 범할 의지를 주셨는가 ?
자유의지는 오용할 가능성이 있으나 의지 자체는 선한것이라고 한다. 자유의지가 없으면 선을 행할수도 없다. 악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의지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인간의 의지를 중간적인 선이라고 한다. 위로 올라갈수도 밑으로 내려갈수 있는 선이라는 것이다.
선용할수도 악용할수도 있기에 중간적인 선이라고 하는 것이다. .
중간적인 선은 최고의 선은 아니다. 상하로 선택하여 전향할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선을, 이러한 의지의 방향전환은 강제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되어지는 것이기에 벌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의지전향의 원인은 무엇인가 ? 알기 힘들다고 말한다.
무로 향하는 의지는 결핍의 운동이다. 무를 잘 모르는 것처럼 , 무로 향하는 의지는 결핍의 운동으로서 잘 모른다. 결핍의 운동은 무에서 유래된다고 말한다.
그러한 결핍은 의지적이기에 인간능력의 한계에 주어진 것이다. 이러한 결핍의 운동으로 본성이 파손되고 훼손되고 결함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파손과 결함을 낳는 것이 악덕이다. 악덕속으로 떨어진 인간은 자력으로 서지 못한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구원을 얻게된다는 것을 말한다.
어거스티은 처음으로 죄를 범한 인간의 현실성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3권 - 자유의지가 쉽게 선을 원하게 되지 않는다.
인간의 의지는 악에로의 의지이지 인간의지의 현실성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아담때는 최고의 선을 자연스럽게 사랑할수 있었다.그러나 타락이후 하층의 선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강제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선택했기에 책임이 있다. 선을 안다는 것과 선을 행한다고 하는 것을 구분한다. 아담의 타락이후 최고의 선을 행할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의지의 실존상태는 비참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죄에 대한 벌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비참은 원죄의 결과이다. 원죄에서 인간의 비참이 생기고 비참의 결과는 무지와 곤란이다. 무지는 당연히 해야할 일에 대한 지식의 결여,곤란은 해야할 일을 할수 없는 나약성이다. 이것은 도덕적인 나약성이다. 인간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알수 없고 알아도 할수 없다, 이것이 벌이다.
인간의 본성은 습관의 폭력에 의해 부패되어 제2의 천성으로 만들어 졌다. 그 결과 우리의 현실은 1무지로 인해서 선을 알지 못하고,/ 2혹은 알아도 행하지를 원치않으며,/3 원해도 그것을 행하지 못한다.
마니교에 결정론의 반대하여 자유의지의 비결정론을 주장해고
인간의 현실적인 비극적인 상황을 통찰하므로써 , 원죄를 주장하게 된다.
원죄를 어떻게 극복할수 있을까 ?
우리는 위에서 원죄로 인한 무지와 곤란을 말했는데,
아무 어려움 없이 무엇을 할수 있었던 때에 그것을 바로 행하지 않으면, 인간은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무엇을 행해야 하는 당위를 가지고 있더라도 행위를 동반하지 않으면 지식을 상실하게 된다.‘
지식과 자유의지도 행하지 않으면 ,무지와 태만으로 빠진다.
의지의 태만은 인간의 고유의 죄다.
무지와 곤란에서도 완성에로의 출발로 삼아야 한다.
무지와 곤란이 있더라도, 인간은 더욱 선과 악을 구분하고 하나님을 향해 전진하면 유덕할수 있다.
태만이라는 부덕이 있더라도 완성과 행복으로 향할수 있는 위대한 존엄성이 있다.
이것은 펠라기우스의 경향은 아닌가 ? 이에 대해 이것은 오해라고 한다.
자기는 자유의지론에서 악의 기원을 논했지 악에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재고록에서 펠라기우스파 사람들은 우리들이 자기들의 견해를 지지했다고 생각하나 그들의 생각은 무익하다. 실재 자유의지란 죄를 범할, 선을 행할가능성을 말한다.
2) 심플리키아누스에 대한 제문제에 대한
396년 감독이 된 이후에 썼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재평가를 한다.
책2권을 보낸다. 1권에 나온 두답을 한다.
1번째 답은 로마서 7:7-25절을 토대로 답한다.(성서해석)
불트만의 해석과 거의같다. 2번째 답은 9:10-21절로 답한다.
1번째 답 - 롬7장의 인간의 상황은 영적인 사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인간,쾌감으로 악을행하도록 끌려가는 인간을기술하고 있다. 누구든지 금지된 것을 알면서 행하는 자는 노예이다. 1권17에 나온다.
노예된 인간이란 ?율법에 대한 지식과 수행하는 행동을 구분한다.
그는 율법의 지식에 관한한 율법에 동의하지만 행동에 관한한 죄에 굴복한다 .
노예는 자유가 없다. 바울은 이것을 “내 속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하는 것은 내게 있으나~” 어떻게 인간이 노예상태에 있음을 알수 있는가 ? 바울은 어떻게 자신안에 선한 것이 없는 줄 알았는가 ?하나는 원죄의 유산으로 이어받은 본성, 하나는 쾌락에 심취되는 습관이다. 죽음은 원죄에 대한 벌이요 쾌락에로의 심취는 죄를 반복함으로 생긴다. 우리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쾌락에로의 심취를 증가시킨다. 인간은 그것을 극복할수 없게 된다. 그런 인간에는 자유의지가 없는 것인가 ? 롬7:18 자유의지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의지자체가 있기 때문이다. 선을 행할수 있는 현실적인 능력이 무력해졌다.무력한 의지는 원죄에 대한 벌의결과이다. 죽을수밖에 없는 인간의 제2본성이라고 말한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나 현실적으로 죄와 죽음을 반복하는 습관에 압도되어 선을 행할수 없다. “노예가 된 인간”이라고 말한다. 1권1장14절
죽을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자유의지의 한가지 사실은 원하는 대로 의를 행할것이 아니라 의를 행할 수 있는 분에게로 회심해야 한다. 회심의 가능성은 will.
자유의지가 죄에 노예가 되었어도 ,하나님에게 향할수 있는 것도 자유의지이다.
선을 행할수 있는 능력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이 의는 신앙을 통해서 획득되어진다. 1권 제 2문제에 대한 답.
2번째 질문 답 : 롬9:10-29 예정과 선택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나 자유의지와 은혜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1권에서는 신앙에 의해서 은혜가 획득되어진다고 했으나, 2권에서는 신앙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이 배경에는 인간의 원죄설이 놓여있다. 온인류는 죄덩어리이다. 근거는 두가지. 하나는 바울의 성서해석통한 신학적 통찰 두 번째는 자신의 견해이다.
신앙의 은혜는 선한행동에 대한 보수로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선행한다.
은혜는 선한행동을 선행하는 것이지 선한행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앙을 통한 은혜없이는 선한행위도 할수없다. 선한행위는 내적인 곤고와 외적인 곤고로 인한 것인데, 외적인 곤고는 성례,설교, 내적인 곤고는 성령의 감화.
외적, 내적 곤고가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신앙도 하나님의 먼저 부르시지 않으면 생기지 않는다.
부름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부름과 선택은 다르다.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사 부르시는 것이다. 이 부름에 따라 신앙이 생기고, 이 신앙으로 의롭게 되며, 그 결과로 능력을 받아 선한행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선택하신다.
◉ 자비(은혜) -> 부르심 - > 신앙 -> 의롭게 됨 -> 선행 -> 택함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자비가 선한 행위에 철저히 선행한다.
어거스틴은 고전 4:7말씀을 늘한다.
신앙과 자유의지와의 관계
신앙을 야기시키는 것은 부름(외적 : 성례,설교 내적 : 성령의 감화)로 주어진다.
신앙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겸허하게 받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택함으로 가느냐는 의지문제이다.
많은 사람이 부름받으나 택함받은 사람은 원하지 않고는 되지 않는다.
그런데, 롬9 장16절을 인용하여 인간 의지의 참여를 부정한다.
“하나님의 자비가 없으면 우리의 원하는 바가 아무 소용없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의 의지가 동의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비가 소용없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하나님의 자비가 결정적이라는 말이다.
우리안에서 우리가 원하는 바를 행하도록 하는 분은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는 자유의지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그러나 자유의지를 행하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이다.
선한의지는 하나님의 선을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이 선행한다.
부르심이 없이는 원하지도 못한다. 1권 2문제 12절
이상의 인용구를 보면, 어거스틴은 신인협동설을 배격한다.
cf)신인협동설 - 아퀴나스,에라스무스.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는 나의 의지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이
결단하게 하는 것이다. - 어거스틴, 칼빈 .
도덕론 - 웨슬레
왜 어거스틴이 그렇게 말했을까 ? 네번째로, 어거스틴의 신학적 견해
(고전 15:22) 인류는 죄인의 집단, 죄의 덩어리이다. 이말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현실적으로 죄의 노예상태이다. 이런 노예상태에서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은 성령의 선물,은혜의 주입이다. 인간의 의지를 내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회심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점에서 어거스틴은 “오직 은혜로”라는 말을 드러낸 교부신학자이다.
7권 17장(23) 내 자신의 무게 = 이것을 어거스틴은 육체의 버릇이라고 말한다.
플라톤적인 이분법이 아니다. 여기서 육체라는 것은 인간의지의 존재방식이다. 의지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서 인간의지의 존재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의지의 존재방식에 의해서 악이 규명된다.
이것을 나중에는 의지의 쇠사슬이라고 말한다.
8권 5장 (10) 왜곡된 의지 -> 욕심(Libido) -> 버릇 -> 필연
이것은 서로 연결되어 노예로 만든다.
역사적으로 실존적으로,개인적으로 말할수 있다.
역사적 : 타락이후 인간의 모든 행동은 쇠고리처럼 연결되어 우리까지 왔다.
아담안에 내가 있고 내안에 아담이 잇다. 온 인류가 죄의 덩어리이다.
개인적으로도 내안의 죄는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죄된 행동은 본성에 변화를 일으키어 버릇이 생기고 필연이 생긴다. 제 2의 본성이 생긴다. 인간의 노예상태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필연은 자유의지에 의해서 성립된 것이다.
영과 육의 싸움 : 육의 의지와 영의 의지
하나님을 향한 영의 의지와 습관의 폭력에 의한 육의 의지의 싸움이다.
이것을 혼의 병이라고 한다. 그 원인을 자신안에 죄라고 표현을했다. 자발적으로 죄를 지은 아담으로부터 온 것인데, 어거스틴도 아담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 신학적인 인간론 : 내 자유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다.
회심이전에는 옛의지의 압력에 의해 노예상태에 있었다. 그것을 잠에서 깨어 나고 싶어도 깨어날 수 없는 상태로 비유.
◈ 제 9 권.어거스틴의 세례와 모니카의 죽음 ◈
1장. 죄에서 해방된 영혼
(1)행동에 죄
말,혀의 죄
의지의 죄 - 여기서 다 터져나온다.
그렇게 안되는데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 낙관론
자유의지가 살아나온다. Enabling 강제로 시키지 아니하고 스스로 원하도록 했다.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불러서, 하나님의 자비에서 call이 나오고 거기에서 신앙이 나온다.
욕심이 3가지 - 명예와 이득과 정욕(결혼)
필연이라고 하는 것은 결정론이 아니다. 결정론은 어떻게 할수 없다. 변화가 없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말하는 필연은 노예화된 의지,쇠사슬에 묶인의지를 말한다. 쇠사슬을 끓으면 자유의지가 힘을 발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즐겁게 하게된다.
인격적인 관계 - 어린아이 같은 어거스틴 : 하나님
2장. 교수직의 사표를 고려함.
(2) 수사학 - 언변을 파는 시장.
(4) 폐가 약해져 - 웅변을 잘하려면 폐가 건강해야 하는데, 폐=수사학을 못하도록 하심.
4장. 카시키아쿰에서
학자들은 어거스틴이 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 아직도 어거스틴은 학문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회의론 비판, 행복한 생활, 질서론, 독백록- 6개월동안.
6장. 세례를 받음 (387.4.25 or 26)
회심은 세례와 연결되어야 한다. 세례는 외적인 증거이다.
10장. 오스티아에서 본 비젼.
정원 : 하나님과 자기와의 1:1로 대화할수 있는 조용한곳.
7권에서의 신비체험은 플라톤적인 체험.개인으로 말한다.
신비체험 - 회심하고 기독교인이 되어 체험.개인으로 말하지 않고 “우리”라고 말한다. 미래적인 연합을 기다린다. 성도의 교제 그리고, 미래에서 기대하는 것.
11장. 모니카의 죽음 .
하나님에게는 먼곳이 없다. 원근법이 없다. 영원한 현존앞에 인간은 같은 거리에 있다.
12장. 모니카의 장례와 어거스틴의 애도.
왜 눈을 뜨고 죽었는가? 열병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장례 - 어머니는 불쌍하게 죽은 것도 아주 죽은 것도 아니다.
이 증거는 어머니의 선한생활,믿음,이성 이 세가지가 영생을 증거한다.
1) 선한생활은 반드시 보상을 받는다 (칸트). 보상을 해주기 위해서는 신이
존재해야 한다.
2)영생에 대한 믿음
3)이성 : 인간은 가치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이성의 근거.
기독교인의 장례는 축제여야 한다.
*① 하나님의 자비 ②하나님의 부르심 ③믿음 ④칭의 ⑤선행 ⑥선택(함)
왜 선택이 선행다음에 오는가 ? 택함이 의롭게 함을 선행하지 않는다.
ACC 심플리키아누스에게 보내는 논설(396년 초기작품) - “따라서, 사람은 선택되지 않았다. 선한행동을 위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고, 선하게된 것은 선한행동을 하도록 해가지고 선택되었다.”
후기(428~9)에가서는 - [성도의 예정] 펠라기우스 주의도 아닌, 어거스틴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므로 쓴 책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도 선택받은 자만부르신다. 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하기 위해서 노력했으나 하나님의 은혜가 승리하고 말았다.
예정 - 그런고로 하나님의 예정은 은혜를 받도록 준비시킨다. (따라서,칼빈은 어거스틴의 후기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 은혜라고 하는 것은 예정의 결과이다. 진실로 하나님은 예정된 자들을 부르셔서 예정하신 그 아들에 멤버로 삼으셨다(32장).
34장 - 그런고로 그들은 예정에 의해서 예정과 함께 만세전부터 선택되었다.
{예정 -> ① 하나님의 자비 ②하나님의 부르심 ③믿음 ④칭의 ⑤선행 ⑥선택(함)}
하나님이 먼저 예정하시고 그리고 그들을 부르셨다. 부르실때는 선택된 사람들을 부르셨다. 따라서, 선한 것은 예정과 부름의 결과이다.
◈ 제 10 권.기억의 신비 ◈
10권의 테두리 : 10권부터는 현재를 고백한다.
2장. 모든 은밀한 것을 아시는 하나님
하나님의은혜 - 내 공로는 없다.
3장 고백의 효용.
(3) 고백록이 기록된 이후 사람들이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말한 것이 진실인가 아닌가를 말한다. 이것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한마디로 대답한다. 이 고백은 신앙공동체의 형제들에게 하는 것이다.
(4) 무슨목적으로 고백을 하는가 ? 현재 나는 기독교인,감독이 되었지만 역시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또 죄를 짓게될 여건속에서 모든 시험을 받게 된다.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성화의 과정을 밟고 있다.
4장. 고백의 목적
(6) 현재는 10권 미래에 대해 있을 일은 11-13권에서 말하려 한다.
5장. 제한된 인간의 지식.
(하나님을 알게되어 가는 과정을 말하고 하나님과 가까이 가는 모습, 그리고 나중에는 이세상에서 시험을 받게 되는 것을말한다)
하나님의 조명하심이 없이는 나 자신을 알지 못한다.
나에게 어두움은 남아있다.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정오)때까지 .
6장.하나님의 존재와 그 인식 (어떻게 하나님을 알수 있는가 )
(9) 세상의 사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니다.
조화와 미는 창조주가 만들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밖에서부터 세상사물에서부터 인간의 마음안으로 들어간다.
외부(피조물)에서부터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온다. 영혼이육체보다 낫다. 인간을 말할때는 영혼을 말한다.
“내 시선의 특사” - 감각적인 것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찾을 수없다. 내적인 영혼으로 들어와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7장. 감각만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함.
외부 -> 인간의 내면 -> 상승에로 초월(신비주의와 거의 같다)
영혼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이기 때문에 영혼을 통해야 위로 올라간다. 지각의능력은 동물도 가지고 있다. 지각만 가지고는 하나님을 알수 없다. 내면의 세계로 들어오면,기억이라는 것이 있다.
8장. 기억의 힘.
우리는 흔히 기억이라 하면 과거에 대한 기억을 말하는데, 10권에서 기억이라함은 의식계와 무의식계를 총 망라해서, 영혼의 내적인 모든 것을 종합해서 기억이라 한다.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서 상상을 통한 개념들이 들어있고, 수학적인 원리같은 모든 것이 들어 있어 내가 원할 때 불러오는 의식계를 말한다. 과거에 대한 기억뿐 아니라, 의식계,무의식계를 총망라해서 기억이라 한다. 기억이라는 창고에서 불러내오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플라톤의 개념이다.
기억을 초월한다는 것은 인간의 의식을 초월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찾아간다 할 때, 여기에 행복(진리)가 있다.
20장. 모든 사람이 찾는 행복.
하나님추구 = 행복추구 = 진리추구
“내 육신은 영혼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고, 내 영혼은 당신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다.” 왜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느냐 ? 행복했다가 행복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다시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행복을 알지 못하면 찾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 아니냐. 모든 인류가 아담의 타락한 죄에 참여한 것처럼, 아담이 한때 행복했었던 것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아담이 잊어버린 행복을 찾으려고 하고 있다.그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요 진리를 찾는 것이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25장. 기억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마음은 변하기에 인간의 마음에도 없다.
27장.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랑
완전한 합일은 아니다. 왜냐면,목말라 하니까.하나님과 우리가 합일을 한다는 것은 미래 종말론적으로 오는 것을 말한다.이미(순간적인 것) 미래에 연합하게 될것이다.
29장.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자비
신비의 경험을 비추인다. 겸손을 자랑하는 것도 교만이다.
40장.비참한 인간의 실존
10권의 요약이다. 인간의 혼으로 들어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42장. 거짓중보자.
내가 하나님에게 상승해도 습관의 무게로 떨어진다. 그래도 가능하면 하나님께 가고자 하면 중보자가 필요하다. 중보자를 통해서 하나님께 갈수 있다.
죄인,적대자라 함은 우리가 하나님을 못본다는 말이다.
“중보자는 하나님과 같아야하고 동시에 인간과도 같아야 한다” CF(칼케돈 신조)
** 안셀름 [만족설] 왜 만족이라고 했는가 ?
속죄론은 교부가 없다. 어거스틴 사상과 안셀름의 신학에 나온다. 왜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는가 ?해서 안셀름이 쓴책이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
안셀름은 어거스틴 계열의 사람.
※ 속죄론에서 3가지 유형
1) 이원론 : 어거스틴 이전의 교부는 이원론에 근거해서 속죄론을 전개했다.
인간은 하나님께 속했는데 자기를 악마에게 넘겼다고 하는 것이다. 본래 하나님에게 속해있기에 다시 하나님께 오려면 악마에게 보상을 해주고 인간이 올수 있다. 예수를 대속물로 속해주고 인간을 풀어주었다.
하나님과 악마와의 대립에서 그리스도를 대속물로 주었다.
2) 만족설 : 여기서는 악마를 제거시킨다. 하나님은 악마에게 빚을 갚을 필요가 없다. 여기에서 충돌은 하나님과 악마와의 충돌이 아닌 하나님안에서 정의와 자비가 충돌한다. 정의와 자비를 어떻게 해소시키는가? 여기서 안셀름의 속죄론이 나온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빚을 졌다. 하나님이 왜 인간을 창조하셨을까 ? 인간으로 하여금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했는데, 현실은 하나님을 배반해서 불행하게 되었다. 불복종,배반으로 빚을 졌다. 하나님께 갚아야한다.
①행복은 하나님께 복종해야 오는 것인데.
②죄(배반,불복종)
③빚은 갚아야 한다. 인간이 갚을수 없다. 죄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죄를 지었다고 했을 때 인격과 권위와 정비례한다. 평행한다.개를 보고 발길로차면 아무 관계없다. 개라고 하는 존엄성은 없기에. 그러나 학생한테는 똑같은 행동이라도 하면 안된다. 왜냐면, 학생은 존엄성이 있기에. 죄는 권위와 인격에 정비례한다.
내가 하나님에게 지은죄는 빚은 하나님은 무한하기 때문에, 무한자에게 짓는 빚은 무한하다. 유한한 인간이 도저히 갚을 길이 없다.
④인간은 빚을 갚을 수 없다.
⑤누가 갚아야 하는가 ? 인간이 빚을 졌기에 인간이 갚아야 한다.
⑥누가 갚을수있느냐 (능력)? 무한자.하나님만이 하실수 있다.
⑦우리와 화해하실 분은 죄를 갚아줄 분은
참 하나님이여야 하고 참 인간이여야 한다.
◈ 제 11 권. 시간과 영원 ◈
2장.성서를 잘 이해할수 있도록 기원함
(3)“나 자신만을 위함이 아니요 ~ ”
리차드 니버 교회의 목적이 무엇인가 ? “교회의 목적은 사람들사이에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사랑을 증진시키기 위함이다.”
3장. 천지창조에 대하여.
(5) “나의 시작에”대해서도 말하고 “우주의 시작에 대해서도 말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 ” 신학은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해를 하되 합리적으로, 체계적으로 이해를 하는 것이다.
4장. 피조물이 창조자를 증거함.
CONTIN GENCY 우발적인 존재이다. 전에 없었던 것이 있고, 지금 있는 것이 없어진다. TO BE 와 NOT TO BE 가 섞여 있다.
하나님이 존재하기에나도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름답기에 내가 아름답다. 그러나, 똑같이 수평선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대문자로 인간은 소문자로
God is - Being - Good
I am - being - good
5장.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공작
시간과 공간인데,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디서, 언제 만드셨는가 ?
어거스틴의 대답은 천지창조 이전에는 공간도 시간도 없다. 세상을 창조할때는 ㅅ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창조했다. God Alone 극단적인 유일신 사상.
창조는 말씀안에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을 시간안에서 창조하지 않으시고 시간을 함께 창조했다.”
시간안에서 창조하셨다면 시간의 지배를 받게되고 영원자가 되지 않는다.백발 하나님이 된다.
6장. 하나님의 말씀과 창조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과 다르다.
공간을 통해 들려오는 말과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말씀은 다르다.
9장.하나님의 지혜
태초에 라는 말을 어거스틴은 두가지로 쓴다
1) 시작에. 시작이라는 말을 말씀으로 해석한다. 말씀안에서
2) 시간의 첫 번,태초
말씀안에서 / 태초에 라는 두가지 뜻이 있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것을 사모하는 사랑” like and unlike 내가 하나님과 어떤 면에서는 같기에 불타지만,가까이 하고, 같지 않기에 두려워 떨고 있다.
10장.창조이전의 시간을 묻는자
하나님은 영원한 존재이시다. 세상창조이전에 아무것도 없었다. 도중에 창조하시기로 하셨다. 한때 없었던 것을 창조하겠다고 하셨는가 ? 창조하겠다는 생각이 영원부터 있었느냐 ?
한때 없었던 것을 하겠다고 하신다면, 없었던 것(의지)가 있게 되는 것 아니냐,하나님 안에도 없었던 것이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 변화가 있는 것 아닌가 ?
어거스틴 “내 능력밖이다.”
틸리히 “우리는 현실적으로는 영원하지 않지만 잠재적으로서는 우리는 영원하다.
우리는 시간적인 존재지만 잠재적으로는 영원하다. 왜냐면, 하나님의 이데아에 영원히 있었기 때문이다.“
11장.영원과 시간은 질적으로 다르다
“영원이란 항상 머물러 있는 것”
지금 사람들은 영원이란 무한히 흐르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NO라고 한다. 영원은 항상 머물러 있는것이지만 시간은 항상 머물러 있지 않은 것이다.항상 흘러가는시간이다. (무상)
영원에 대한 정의 : “동시적/ 현재적/”
하나님의 영원안에서 시간이 흐른다. 하나님의 영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12장. 창조 이전을 묻는 자에게 주는 대답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
절대시작에서 시간을 창조하신것이아니라 창조와 함께 시간을 창조하셨는데, 절대시간에 하나님이 창조이전에는 시간이 없었는데, 시간밖에는 “이전”이란 말이 없는데 어떻게 창조이전을 묻는가?
13장.창조이전의 시간이란 없다.
영원은 무한한 시간이 아니면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
무한한 시간의 연장이 영원이 아니라, 영원의 탁월성(시간을 초월해있다)
천사의 시간이 있는가 ? 천사는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시간을 잊는다.
하나님
천사
인간
질료(무): 시간이 없다. 무시간성 : 천사, 질료
14장 . 시간이란 무엇인가 ?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 만일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묻는 자가 있어서 그에게 시간을 설명하려고 하면 나는 모릅니다.”
시간이라 하면 시계의, 시계바늘의 운동을 본다.시간을 못보고 공간화된 시간을 본다. 그것은 바늘의 운동, 공간이다. 시간에 대해서 설명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다 .답을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찾는다. 인간밖에서 시간을 찾으면 ,시간밖의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눈을 안으로 돌려(묻는자가 없으면) 자기가 의식의 세계에서 시간체험을하고 있다.시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말로 표현하면(누가 물어서 밖에서 찾으려고 하면) 시간아닌 다른 것으로 표현하기에 모르는 것과 같다.
시간체험 : 경험세계에서 체험된 인간의 삶의 시간(이것을 시간성이라고 한다)이다. 시간성이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인 시간의 흐름을 체험하는 내적체험을 말한다.
시간성을 분석해보니 ①과거는 이미 없다. What is time? 이라 할때 시간의 본질은 무엇what 이다. 현재 is이다. 그러나 이미 없다. is가 아니다.
②미래는 아직 없다. not yet 과거로 흘러가지 않으면 영원이다. 영원은 머물러 있는 것이기에. 시간이란 non being로 흘러간다.
③우리에게 현재란 있는가 ? 없다. 과거와 미래와 교차되는 순간(현재)가 있는데, 너무 빨리교차되어 없다.
그러면, 시간이란 없는 것인가 ? 있다. 우리가 말하고 있지 않은가 과거현재 미래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다. 시간은 없는 것이지만 , 있기에 시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닌가? 밖에서 찾지 아니하고 내면의 세계에서 찾을 때, 시간은 이미 없지만 과거는 우리의 기억속에서 포착되고 ,미래는 기대속에서 포착되고, 현재는 지나가지만 직관속에서 파악되는 것이다.
“영혼안에서 (삶과 관계된,체험적 시간)존재”
"과거일의 현재 현재일의 현재 미래일의 현재" :
기억, 기억 기대,직관은 현재의 form이다. 이렇게 시간을 내면에서 포착하면 현재로 들어온다. 영원한 하나님도 현재라고 한다면 우리도 시간내에서 기억,기대,직관이란 현재적인 것을 체험한다고 하는 것은하나님과 접촉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현재는 하나님의 현재와는 다른 쪽에 떨어진 영원(과거의 현재,현재의 현재,미래의 현재) 아니겠는가 ? 그러나 이 현재라는 것은 기억이라는 것에 기대라는 것에 직관이라는 것에 떨어지기에 인간은 불안하다.
이 불안한 증상을 무엇이라 하는가 하면 ?
인간의 시간의식이 기억,직관,기대라는 것으로 흐트러진 것을 Distentio animae(심리적인 묘사가 강하다)영원의(혼의) 분열(팽창)이다. 현재가 기억과 직관 기대라는 것으로 분열, 쪼개졌다.그래서 이 세계속에서 인간은 비참하다.
기대하는 것이 직관을 통해 기억으로 떨어지기에 인간의 삶은 불안정하다.
Dissilatio animae (실존적으로 불안)
29장.많은것에서 한분에게로
인간은 시간속에서 영원한 세계를 직관함으로 영원한 현재를 맛볼수 있을까 ? 우리는 안된다. 그리스도안에서 가능. 영원자이시면서 시간적인 존재이기에, 시간적인 존재와 접근을 하고 영원자에게 갈수 있다. 예수님이 나를 붙잡았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나를 붙잡은 것을 내가 붙잡아야 한다.
영원의 분열Distentio animae,Dissilatio animae 을 극복하는 방법은 영원에 집중,지향성이다. 하나님과 연합할 때 분열을 극복할수 있다.
31장.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의 지식.
영원한 하나님은 모든 것을아신다. 미래와 과거와 현재가 현재로 있으니까 전지하시다.
Ⅰ. 도나투스 논쟁.
(1) 역사적인 배경.
초대교회는 기독교에 적대적인 세력이 많았다. 고대교회 감독들은 대개 순교로 마쳤다. (요새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면 감독,노회장 되려고 애쓰지는 않을 텐데)가장 큰 박해는 64년에 네로의 박해이다. 이때 베드로,바울이 순교했다.
이 박해는 로마시에 한정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95년 도미시안황제박해는 제국전체의 박해이다. 이때 기록된 책이 계시록이다. 250년경의 로마 황제의 상에 제사를 드려라. 제사를 드리지 않은 기독교인은 순교, 제사를 드린 사람은 직명을 받았다. 배교한 사람은 어떻게 할것인가 ? 문제가 제기되었다. 303-305년의 Dioclentia황제가 기독교를 없앨려고 했다.모든 성서를 당국에 바치게 했다(성서가 없어지면 기독교가 자연히 없어질것이라고 생각)
성서바친 사람을 배교자(Traditor )라 하고 박해후에 배교했던 사람이 교회로 돌아올 때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뉜다. 강경파에 속한 사람이 도나투스파이다. 교회는 본래 거룩한 공동체이다. 배교자가 있으면 거룩한 공동체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2) 직접적인 요인 : 카르타고 교회의 분열이다.311-312년 (콘스탄틴황제가 서방교회 통일312년)에 카르타고의 감독 Mensurianus 가 죽어 후임으로 Caecillianus 이 감독으로 세워진다. 문제 발단은, Lucilla 라는 돈많은 여자 (사제로 있을때)가 순교자의 뼈를 교회성당에 가져와서 입에 맞추고 뺨에 뼈를 대고, 이 사제가 무안을 주었다. 그때 이 여자가 앙심을 품고 있었다. 감독이 되자, 이 여자가 그 지방의 70인감독을 자극시켜 Caecillianus 의 감독직을 무효화 시키려했다. 감독이 되려면 3사람의 감독이 안수를 주어야 하는데, 안수를 준 사람중의 한 사람 felix 이 성서를 바친 배교자이기에 안수는 무효라고 주장. 그리고 자기들의 감독으로 Majorinus를 세웠는데, 일년도 못되서 세상을떠났다. 그후의 감독으로 선임한 사람이 도나투스이다. 40년동안 감독으로 있으면서 전통 카토릭과 싸웠다. 그래서, 도나투스파 교회가 탄생.
*특징은 북아프리카 지방에만 제한된 지역파 교회이다.
반 로마제국감정과 함께 퍼져갔다.
라틴어를 쓰지 않고 , 베르베의 지방언어를 쓰는 사람으로 이루어졌다.
*콘스탄틴과 도나투스파와의 관계
콘스탄틴황제가 312년에 서방 로마를 통일하고 박해를 중지시키고 교회에 혜택을 준다. 문제는 카르타고 교회가 두 개이다. 정통적인 카토릭과 도나투스파교회.
콘스탄틴황제가 기독교를 통해서 로마를 통일시키고자 했는데, 기독교 때문에 제국이 분열된다. 호시우스를 보내서 상황을 조사하게 한다.호시우스 감독은 정통적인 카토릭파이기에 Caecillianus 감독의 교파의 교회가 정통이라고 보고해, 콘스탄틴은 Caecillianus 교회에만 특혜를 주게 되고, 도나투스파 교파는 콘스탄틴황제에게 탄원서를 보내게 된다. 두봉투를 가져왔다 . 봉한 고발 봉투위에는 탄원서제목이 쓰여있었고, 봉하지 않은 봉투위에 글은 “황제에게 호소합니다. 각하의 부친께서는 다른 황제와 달라 박해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가울지방에서 판사를 보내 우리의 분쟁을 해결해 주십시오.”
황제가 메시지를 받고 처음에는 대단히 분노했다가, 종교회의를 열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로마 라테란 궁에서 카토릭 11명, 도나투스파 11명, 가울(블란서)지방 3명,이태리 15명, 교황 1인이 모여 종교회의 개최.(315년 니케아 회의 이전의 312년 최초의 교회회의)이다. 결과는 “페릭스이 성경을 바친 근거가 없다. 도나투스파 교회는 재세례를 준 교회이다. ” 주의를 주고 회의는 마쳤다.도나투스파들은 그것이 승복하지 않았다. 회의를 요청하고 회의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황제에게 호소하여 라테란 교회회의 무효화,페린의 성경바친 것을 조사해달라고 호소. 알레스 회의를 열어서 결론을 내린다. “페릭스감독은 성경을 바친적이 없으며, 페릭스 감독 고발한 사람은 징계, 배교한 사람이 발견되면 사표를 내게하지만 감독직은 그대로 두게하라.”
황제 개인이 나서서 문제 해결해 달라고 다시 요청. 소요사태가 날 가능성이 있어서 내려가지 않았다. 밀라노에서 결정을 내렸다.
“Caecillianus 감독은 무죄하다. 반대파는 중상자이다.
알레스 교회회의에 승복하지않으면 엄벌에 처한다.”
317년 도나투스파 유배,재산몰수명령. 카르타고에 대성전을 지어주었다.
도나투스파가 폭력배들을 보내 교회를 탈취했다.
폭력배 (circumcellion) 사당에서 제사있을 때, 주변에서 기거하면서 떡을 얻어먹 는 사람들. 칼을 들지 말라고 했기에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사제를 치고 성전을 빼앗고 소금물로 다시 씻는다. 그들의 구호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이들의 지도 자는 도나투스파 사람들이다.
이렇게 나오니까, 카르타고의 카토릭계통의 감독들은 황제에게 간섭해 달라고 호소한다. 처음에는 어거스틴은 참석하지 않았다가, 후에 참석
405년에 호놀리우스라는 황제가 교회통합의 칙령을 내려 재세례를 금하고 도나투스파교회를 정죄. 이단과 분열을 같이 보게한다.
마셀리우스를 카르타고에 보내 회의(411년6월)를 열게한다. 카토릭 286명, 도나투스파 279명참석하여 목욕탕강단에서 3일간 회의를 열었는데, 바울이 이단과는 앉지도 말라해서 도나투스파가 서서 하기에 모두 서서회의를 했다.
412년에는 교회 일치칙령에 복종할 것, 국가의 힘에 의해서 교회분규는 끝이 나고 강제로 통합되었다.
(3) 어거스틴과 도나투스파들의 신학논쟁
니케아 회의 325년
콘스탄틴노플회의 381
에베소회의 431
칼케돈회의 451 - 기독론
marks of the church - “ 교회는 one ,holy ,Catholic,apostolic"
도나투스파는 이 네가지 중에서 거룩에만 중심,어거스틴은 모두에 중심
391년에 감독이 되어 히포로 돌아간다. 히포시(3만명)의 사람들이 대부분이 도나투스파교인들. 카토릭교인에게는 빵도 안파는 분위기였다. 처음에는 시를 만들어 보급을 했다.-> 도나투스파의 역사적 배경, 신학적 타당성 알려주고,-> 회의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글을 통해서 -> 감독회의를 통해서 국가에 해결요청.
◈ 논 쟁 ◈
1. 교회란 무엇인가 ? (교회의 본질)
1) “교회는 하나여야 한다. 결코 분열되어서는 안된다. 단일성 일치성을 가지고있다.단일성은 그리스도의 옷이 한폭으로 되어있듯이 결코 찢어서는 안된다.
하나됨은 교회의 연합,일치성,사랑에 근거한 것인데, 도나투스파는 사랑의 본질을 위배한 것이다. 분열은 배교자체보다도 나쁘다.
2) 거룩성 - 초대교회부터 흠과 티가 없는 교회를 말해왔다. 초대교회에서 세례이후의 죄를 어떻게 할것인가 ?터툴리안 “한번은 용서해주자. ” 용서받을수 없는죄 우상숭배, 간음, 배교
온건파에서는 일정한 과정을 거쳐속죄하게 해주자는 주장도 있었다.
배교자가 있는교회가 어떻게 거룩할수 있는가 ? : 도나투스파의 주장
(1)도나투스파의 거룩은 -사회적으로 경험적으로 현실적으로 거룩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거룩치 못한 너희들 -----> 분리
거룩한 우리들
현실적으로 너희들 거룩치 못해 구원 없다. -----> 분리
우리는 거룩해 구원받는다
교회가 거룩하기 위해서는 교인들이 거룩해야 한다.
(2) 어거스틴의 거룩
- 도나투스파의 폭력배의 행동은 거룩한가 ?
- 성경을 바치지 않은것에 거룩성을 두는 것은 너무 협소하다.
- 교회의 거룩함은 교인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이룩한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 교회는 밀알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있는 밭이다.누가 가라지를 뽑을 것인가 ? 추수때까지 기다리라. 분리시킬때는 종말때요, 뽑을 분은 하나님이시다. ”
어거스틴 이전의 감독 시플리안은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 교회는 방주다.교회밖에 있으면 홍수에 죽고 교회 안에 있으면 산다” -> 교회밖에 있는 사람, 교회안에 있는 사람 둘로 나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수정해 “방주안에도 정결한 짐승과 정결치 못한 짐승이 섞여 있다. 교회는 거룩한 거룩치 못한 교인이 섞여 있다.” 거룩한 공동체는 100% 이룩하지 못한다는 말. 교회는 종말론적인 공동체이다.
교회는 현실적으로 완전한 하늘 나라의 불완전한 이미지이다.
교회는 불완전해도 거룩하지 못해도 괞찮은가 ? 그것은 아니다.
“머리가 거룩하기 때문에 몸도 거룩해지도록 노력,성화의 과정의 필요하다.
따라서, 교회를 거룩한 너희와 거룩치 못한 우리 구별,분리하지 말라.
교회와 세계를 분리시키지 말라.“ 모든 사람을 세계를 포괄하는 교회관을 수립한다.
3) 보편성 (전세계적)
도나투스파들은 북아프리카에만 한하기에 거룩성만 주장하다가 보편성도 거룩성에 들어온다. 거룩성과 보편성을 같이 본다.
어거스틴은 보편성에 대해서 “교회는 세계적이여야 한다. 세계에 널리 퍼져 있으면서도 단일성을 유지하고 모든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다. 이것이 카토릭교회이다. 행1:8을 인용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아프리카 교회의 지방색에 끌려 들어가지 않고, 카토릭적인 세계적인 것을 주장했음이 놀랍다)
4) 사도성.
도나투스파들이 말하는 교회의 본질은 거룩성에만 두기에 사도성은 중요시하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사도성을 중요시한다. 도나투스파는 로마교회의 사도계승족보에 포함되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로마교회의 사도성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방의 사도적 교좌(바울이 세운 아시아교회)도 포함한다.
2. 세례
도나투스파 : 교회는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거룩하지 못한 배교한 사제들에 의해서 준세례는 거룩하지 못하기에 무효이기에 다시 받아야 한다.
어거스틴의 대답 : 역사적으로 교회는 재세례를 허락하지 않았다.
세례의은혜는 인간의 생활과 행동으로 부패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례를 둘로 나눈다. 타당성(validity )과 효과성을 말한다.
타당성 :세례의 타당성이 인간의 거룩성에 있다면 세례줄사람도 받을 사람도 없다.
세례는 사제의 거룩성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에 근거한다. 삼위의 이름으로 준 모든 세례는 객관적으로 타당하다.
효과성 : 사랑의 덕으로 줄 때 그 효과가 나타난다.
어거스틴이 하고자 하는 말은 도나투스파들이 준 세례도 타당하다. 용납한다. 그들의 세례로 교회가 통일되는데 장애가 되지 않게 한다. (에큐메니칼적이다)
3.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를 논할 때 도나투스 논쟁을 설명해야 한다. 어거스틴을 비판하는 교회사가는 교회 문제를 해결하려고 국가의 힘을 빌린 처음 케이스라고 비판한다.
1) 어거스틴이 국가의힘을 빌린 두가지 이유는
(1)어거스틴은 마니교와 싸울 때, 국가의 세력을 빌리지 않고 합리적인 설득,방법으로 이해시키고 극복할수 있었다.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도 글,토론,회의를 통해서 해결할수 있으리라 믿었으나 실패했다.
(2)폭력단의 등장으로 설득을 포기했다. 어거스틴이 교회설교하러 가다가폭력당들 이 길가에서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안내자가 어거스틴을 잘못 인도해서 목숨을 부지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마지막으로 다른 감독들이 황제에게 호소하자고 할 때 싸인을 했다. 나중에는 적극적으로 황제에게 호소한다.
2) 국가의 힘을 빌린데 대한 어거스틴의 변증
(1) 황제에게 제일 먼저 호소한 사람은 도나투스파들인데, 황제가 듣지 않자 자기 들은 황제와 상관없다고 했다. (어거스틴이 먼저 황제에게 호소한 것이 아니다)
(2) 폭력당들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힘만 가지고는 안된다. 교회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할수없이 국가의 힘을 빌리지 않을수 없었다.
어거스틴의 국가관 “ 하나님은 목자를 주었지 왕을 주지 않았다.원래는 목자의 역할이었는데, 인간이 악하다 보니까, 국가가 형성되고 왕에게 권리를 주어서 악한 사람이 더 악한일을 못하도록 제어하는 소극적인 방법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보았)다. 인간의 악함을 전제로 하고 제어하는 수단으로 국가의 힘을 말한다.
(3) 국가의 개입으로 도나투스파의 폭력이 무서워 눈치를 보던 교인들이 자기 결단으로 카토릭으로 넘어왔다. 교인들의 자유결단을 위해서 국가 개입을 요청했다.
(4) 국가개입으로 교회가 평안해지니까, 어거스틴은 보다 적극적으로 눅15:16 “사람들로 강권해서 내집을 채워라”는 말씀을 인용해서 국가의개입을 강하게 요청하고 강제로 끌고 들어가며, 신학적으로 정당화시킨다. 강압에서 타성과 습관에서 벗어나 교회가 평안해지니까 정당화시킨다.
(5) 당시의 국가권력의 개입은 외부의 압력의개입이 아닌, 교회 자체가 행한 교회의 훈계라고 본다. 황제도 교인이다. 황제가 교회밖에 세속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안에 있다. 황제에게 호소하는 세속에호소하는것과 다르다. 교회일원황제에게 호소함으로 길잃은 양떼들을 교회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국가의 개입은 이교도들을 강제로 교회로 들이는 것과는 다르다.
객관적인 타당성 -> Ex opere operato
“내적인 마음자세로 인함이 아니라, 의식자체로 은혜가 내려진다.”
효과성 -> Ex opere operatio 로 발전한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의 개입으로 인간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된다고 주장할수도 있다. 너무 자신의 교리만을 주장할것이 아니다. (카토릭과 개신교의 일치성)
Ⅱ. 펠라기우스 논쟁
.도나투스 논쟁이 마무리 될무렵 어거스틴은 다른논쟁에 휘말린다.
도나투스 논쟁은 북아프리카에 한정.펠라기우스 논쟁은 전 기독교 세계,그리고 지금까지 논란이 되어온 것이다.
이 논쟁에서 은총론, 예정론, 원죄론이 나오게 된다. 어거스틴 이전에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1. 역사적인 배경.
펠라기우스는 390년경에 영국에서 로마로 왔다. 로마의 부패를 개혁하려고 한 수도사였다. 많은 로마사람이 존경했고 추종했다. 그는 도덕론자요 윤리적 기독교를 주장한 사람이다. 펠라기우스와 생사를 같이한 변호사 Caelestius 와 감독 줄리안이 펠라기우스와 평생을 같이 했다.
오트족이 로마를 침략하자 410년경 Caelestius 와 함께 로마를 떠나 북아프리카로 갔다. 북아프리카의 어거스틴을 만나려고 갔었지만, 어거스틴은 도나투스 논쟁으로 카르타고에 가 있었다. 다시 카르타고로 가서 어거스틴을 멀리서만 보았다. Caelestius 는 카르타고에서 안수받아 자기 이론(펠라기우싀의 이론)을 설파하려 했다.412년 카르타고에서는 Caelestius 의 안수를 허락하지 않았고, 펠라기우스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래서, Caelestius 는 에베소에 가서 사제가 되었다. 이때부터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의 위험한주장을 인식하고 글을 내고 회의를 통해펠라기우스를 규탄했다.
415,416년에 아프리카에서는 교회회의를 열어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파문했다. 418년 200여명의 감독이 모여 원죄론, 절대은총의 필요성등 9개교리를 정해 교황에게 보냈고 교황은 그것을 받아들여 교서를 각교회에 시달하였다. 그 내용은 펠라기우스와 Caelestius 는이단이다. 원죄론 주장. 구원에 필요한 은혜, 세례의 효력을 주장했고, 이교서에 모든 감독들은 서명할 것을 명령했다.
남이탈리아의 줄리안감독이 끝까지 서명을 거부해서 위배를 가게된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논쟁중에서 쓴책이 많다.
[유아세례에 대하여 / 영과 경문 / 인간의 본성과 은혜에 대하여 / 인간의 의의 완성에 대하여 / 그리스도의 은총과 원죄/ 결혼과 정욕/율리안 감독 반박/ 은총과 자유의지/ 성도의 예정]
430년 에베소회의를 열려고 할 때, 로마 교황과 어거스틴을초대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430년 8월에 죽었다.그래서, 회의 연기해서 431년에 열어 네스토리우스와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2. 펠라기우스의 주장.
고백록 10권 29장 “당신이 명하시는 것을 행할수 있도록 하게 해주시고.” 이글을 읽고 나서,펠라기우스는 “이러한 글은 기독교인의 윤리적 삶을 위태롭게 한다.”
Caelestius 는 기독교인은 다 책임있는 존재이기에 도덕적으로 온전해져야 한다. 구원에 있어서 자유의지의 결단을 중요하다고 본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선을행할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담의 타락이후에도 인간의 본질적 본성은 손상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고 자유의지가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도 하나의 모범이지 우리의 결단없이는 안된다.
1)은혜 2)자유 의지 3)원죄와 4)세례에 대해서 논한다.
1) 은혜
(1) 하나님이 인간을 선을 행할 능력을 가진존재로 창조했다.
자유의지는 선을 행할수 있는 능력이다. 인간의 능력을 전제했기에 주신 것이다.
(2) 하나님이 율법을 주어서 따름으로 선을 행할수 있게 하셨다. 율법도 은혜이다.
(3) 예수를 보내서 인간을 가르치시고 모범이 되게 하셨다.
(4) 죄의 용서, 약속과 선행에 대한 보상도 은혜다.
비판 : 합리적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만 본 것이다.
2) 죄
(1) 인간의 불가피한 상태나 조건이 아니고, 인간의 자유의지가 잘못선택한 행동이 죄다. 과거의 잘못된 습관이 현재에 영향을 준 것이 죄라고 한다.
“sin as act” 죄란 인간 본성 외부에 있어 죄는 인간본성을 깨뜨리지 않는다.
죄는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요소다.
죄를 철과 녹에 비유해서, 녹은 철의 외적요소인것처럼, 죄가 인간본성을 파괴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금욕, 회개를 통해 죄짓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
기독교인이 말하는 은혜를 새로운 율법이라고 해석한다.
3) 자유의지
(1)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이 지킬수 없는 법을 주시지 않았다. 자유의지란 선을 행할 능력, 가능성을 말한다.
(2) 인간은 태어날 때 자유의지를 갖고 태어났다. 창조때 주신 선물이다.
이 능력을 행사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면 지상에서도 인간은 죄없는 삶을 살수 있다고 말한다.
(3) 하나님은 정의롭기에 편견을 갖고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다.
예정,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부정한다.
4) 원죄, 세례
(1) 모든 인간은 동등한조건에서 출생했고, 인간의 본성은 항상 같다.어린이는 아담의 타락이전의 상태에서 태어난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은 죄를 안지을 수 있다. 아담의 죄는 아담의 죄요 후손의 죄는 후손의 죄다. 후손에게 아담의 죄 책임을 물을수없다. 죄의연대성을 부정한다. 그리고 원죄를 씼는데 세례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원죄는 정의로우신 하나님을 부정한 것이다. 죽음이란 죄값이 아니라 자연현상이다. 아담이 죄를 짓지않았어도 죽게마련이다. 인간은 원래 유한한 존재였다.
비판 : 도덕적, 인본주의적이다
3. 어거스틴의주장 (8권)
어거스틴이 초기에는 마니주의를 반대해서, 선한창조,자유의지를 주장했다.
후기에 와서는 죄로 얼룩진 현실을 통찰하게 된다. 현실은 철저히 타락한 상태이기에 은혜없이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된다.
1) 죄
(1) 펠라기우스의 은혜는 은혜가 아닌, 도덕적인 교훈정도이다.
어거스틴이 말하는 것은 “sin as state ”이다.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
우리는 악한 상태에 있다. 따라서 펠라기우에게 있어서 은혜는 외적이다. 그리고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행위를 단절된 비연속성으로 본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죄를 연속된 쇠사슬로 본다. 8권 5장. 습관은 본성에 변질을 가져온다.(녹이 철을 망가뜨리는 것처럼) 선한 의지를 계속 사용하지 않으면 힘을 잃는다. 죄를 지으면 그 결과 일방적인 방향으로 나빠진다. 다시 상승,호전할수 없게 된다. 인간은 타락하는 자유밖에 없다.
죄를 짓지 않을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인간은 스스로의 결단을 통해 그 상태에서 빠져나올수 없다. 이러한 불가능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본성을 내면에서부터 치료해 변화시킨다. 의지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동인(EnablinGrace) 본질적인 변화를 준다. 이것을 선행은총이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이지 인간의 노력의 결정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온 인류는 죄의 덩어리라고 말한다. 인간은 이러한 상태를 교정하거나 통제할수없다.
원죄로인해 내부로부터 오염되있어 인간자신이 구원할수없고, 하나님의 은총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
2) 은혜
(1)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 펠라기우스의 말에 가깝다.
이말은 “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율법을 주어서 이렇게 하라고 명하신다.” 와 상통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할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고 말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지 못하는 사람을 도우신다.(선행은총)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돕지 못하는 사람을 돕게한다.(협력의 은총) ”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의지를 FORM 형성하고 REFORM 재형성하고 creat 창조하고 recreat 재창조한다. 그래서, 그가 명하는 것을 하게 하신다. 이러한 은총은 믿음을 통해서 받게된다. 믿음을 통해서 의롭게 된 것이다 . (루터는 의롭게 칭한다고했지만)
은혜는 율법을 완성하게 한다.은혜는 자유의지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 자유의지를 바로 세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없이 역사하셔서 우리가 원할수 있도록, 우리 없이 역사하신다. (빌2:13)
그다음에는 우리가 원하면 하나님은 협력하셔서 우리가 원상태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계속 선을 행하게 하신다. - 은혜와 자유의지 34권.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행은총으로 새 의지를 우리에게 주시고, 협력의 은혜로 새의지를 완성시키신다. 내적으로 움직이고 선을 행하게 한다
점점 의롭게 되어 성화의 과정을 밟아 간다. 그러나, 기독자는 회심후에도 성화의 과정에서도 이 세상을 살아갈때 시험과 유혹과 싸우며 걸어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를 지을수밖에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죄를 지을수 없는 상태는 하늘나라에서 가능한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맥락에서 새로운 교회관을 말한다
도나투스는 흠없는 교회를 말하고 펠라기우스는 도덕적 사회,교회를 말하지만,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온전한, 거룩한 사회는 불가능하다.
도나투스,펠라기우스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식민지와 같은 교회이다.
그 안에서 금욕생활을 하는 분리된 종파로서의 교회를 말한다.
어거스틴은 전세계에 퍼져있는, 밀알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완전히 거룩하지 않은 카토릭적인 교회, 역사적인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요양을 병원과 같은 것으로 서 원시교회가 말하는 것과 같은 순수한 교회를 말하지않는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펠라기우스는 고대교회의 마지막 대표자와 같다. 율법적인 종교 . 그러나, 어거스틴은 도덕적인 것을 초월하는, 고대교회로 돌아가려는 노력이 아닌, 계속해서 성화시키고 치유하는 대리자로서의 교회를 말하고 이것이 16세기 종교개혁에서 다시 나타난다.
3) 예정론
(1) 필연적으로 예정론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되었기에 예정론으로 귀결될수밖에 없다. 펠라기우스주의자는 어거스틴을 마니교(결정론자)라고 비난한다.
어거스틴은 자신은 바울사상에 근거해있다고 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택한 것이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다. 보편적 구원은 없다. 야곱은 택하고 에서는 택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신앙이란 것도 하나님의 부름에 인간이 응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의지를 변화시켜 믿게 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정의로운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왜 의로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을 버리셨는가 ?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은 그런 일을 행하시지 않는다고 한다.
어거스틴은 예정은 하나님의 정의에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관계된 것이라고 한다. 모든 인간은 야곱,에서 할것없이 멸망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자비가 멸망받을 사람중에 택하셔서 구원받게 하신다.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인내를 주셔서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신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실까 ? 라고 질문한다.
이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되 묻는다.
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멸망시키지 않으셨을까 ?
선 한용
ⅰ 어거스틴의 예정론은 신앙고백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어거스틴개인의 삶의 토대로서 이해해야한다. 어거스틴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택했음을 어거스틴은 고백한다.
어거스틴이 설교를 하다보니까 설교를 듣는 사람은 듣고 , 안듣는 사람은 안듣는다.여깃 예정을 선택한다.
ⅱ. 성서적이다. 성서에 근거한 것이다.
ⅲ. 그리스도인에게 격려하는 희망의 메시지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택했다고 하는 예정론은 어거스틴 당시 불안한 시대를 사는 사람에게 격려와 희망을 준다.
좋은 의도에서 예정론이 쓰여졌다.
폴 틸리히 : 만일 어거스틴이 아닌 펠라기우스가 승리했다면, 기독교는 도덕적 종교로 전락했을 것이다.
어거스틴이 싸운 것은 마니주의,도나투스,펠라기우스.
이 세부류가 관통하는 것(공통점)은 도덕주의, 금욕주의(인본주의 사상).
초기에 마니주의를 비판한 어거스틴에게서 도나투스,펠라기우스파와의 논쟁을 예견할수있다고 하는 것이다.
출처 :Hopes&Joys - 미국 플로리다주 잭슨빌의 신앙인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 JaxHopes
'감신대 신학 교수 교실 > 선한용 교수 교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어거스틴의 고백록, 선한용교수 번역, 대한기독교서회 (0) | 2014.11.15 |
---|---|
어거스틴의 사상과 신학 (0) | 2014.11.15 |
[스크랩] 어거스틴의 고백록, 선한용교수 번역, 대한기독교서회 (0) | 2014.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