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신대 신학 교수 교실/선한용 교수 교실

어거스틴의 사상과 신학

류성련 2014. 11. 15. 00:28

어거스틴의 사상과 신학

선 한 용 교수(前 감신대)

강의에 앞서서: 인간이 가장하기 힘든 것 세가지
방금전에 김경재 교수님께서 저에 대해서 과분한 소개를 해주셨는데 거기에서 60%는 과장입니다. 목사님들이 자주 범하는 죄가 있다고 할것같으면 그것은 과장의 죄입니다.(웃음…) 그런데 저를 소개할 때 상당한 과장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과장이 지나치다보니까 목사님들이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40%는 맞는 것 같습니다. 처칠이 어느 연설석상에 인간이 가장 하기 힘든 것이 세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벽돌을 쌓는 사람이 앞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 벽돌을 끝까지 쌓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둘째는 무엇이냐? 키스 안할려고 하는 여자를 강제로 키스하기가 어렵다. 마지막으로는 점심식사후에 강연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입니다. (웃음…) 왜냐하면 대개 잠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자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고 좋게 생각합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한 중년신사가 잠든 것을 보고, 대단히 기분이 언짢아서 그옆에 앉아있던 잔이라는 꼬마에게 말했습니다. "잔, 그사람을 깨워라!" 그러니까 잔이 말했습니다. "싫어요. 목사님이 재웠으니까 목사님이 깨우세요!"라고 했답니다. (웃음…)
그러나 저는 예배시간에 자는 것을 좋게 생각합니다. 토요일날까지 사업문제 가정문제 인생문제로 잠을 못잔 사람이 교회에 와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안정되서 잠들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설교시간에 교인들이 자도 내버려 둡니다. 하나님의 은혜니까요. 그러나 강의시간에는 못자게 합니다. 왜? 은혜받는 시간이 아니거든요.(웃음…)

어거스틴의 생애:옛사람이며 새로운 사람
어거스틴은 옛사람이면서도 새로운 사람입니다. He is a old and new. 어거스틴에 대한 논문이 일년에 400개나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354년에서 430년까지 북아프카에서(지금의 알제리아) 살았던 고대교회의 교부입니다. 그러니까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까지 살았던 사람입니다. 354년에 태어나서 386년에 회심을 했고 391년에 사제안수를 받았으며 395년에 힙포에서 감독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수사학 교수를 하다가 나중에 밀라노에 있는 황실에 수사학 교수로 초빙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암브로시우스 감독을 만나서 회심하게 됩니다. 또한 암브로시우스 감독을 인도해던 심프로시우스라는 사제는 플라톤주의 철학자입니다. 그래서 암브로시우스가 자연히 플라톤의 영향을 받게 되고 어거스틴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후 386년에 회심을 하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수도사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힙포시에서 강제로 사제 안수를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신학대학이 있던 것이 아니라 똑똑한 사람이 있다거나 지도력이 있으면 강제로 사제 안수를 주곤 했습니다. 그당시의 사제 안수는 씻을래야 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보았습니다. 즉 은혜를 하나의 실체(substance)로 보았습니다. 어거스틴은 미사를 드리려고 뒤에 서있다가 발레리우스 감독이 늙은 자기를 도와줄 사제 하나를 선출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온교인이 일어서서 "저뒤에 어거스틴이 서있다"고 해서 강제로 잡아다가 안수를 받게 했습니다. 386년부터 책을 쓰기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117권을 썼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쓸 수 있었을까? 라이프니쯔라는 철학자가 말하기를 어거스틴이 펜을 들고 글을 쓰기 시작할때는 그펜이 번개처럼 날랐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쓰면 번개처럼 날랐다고 할까? 한 번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기록하는 사람들을 5,6명정도를 두고 그대로 말을 하면 정확하게 기록되고 나중에 자기고 교정을 해서 책을 냈다고 봅니다. 카시안이라는 그의 제자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책을 다 읽었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그정도로 많은 책을 썼습니다. 너무 많이 썼기 때문에 다 읽을 수 없다는 것이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왜 어거스틴인가? 서양사상이 말하려고 하는 모든 것의 기초
그러면 왜 어거스틴이냐?에 대해서 어거스틴의 중요성에 대해서 몇가지 이야기해 봅시다. 폴 틸리히가 기독교사상사에서 어거스틴을 평가하는 말중에 이런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거스틴에 대해서 논하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354년에서부터 430년까지 살았던 사람이다." 자 영어로 읽겠습니다. "His influence overshadows not only the next thousand years but all periods ever since. 어거스틴은 이후에 중세기 1000년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모든 세대에 영향을 준 사람이다. Augustine is the foundation of everything the west had to say.어거스틴은 서양 사상이 말할려고 하는 모든 것의 기초가 된다. 종교개혁가들이 가톨릭교회에 싸울 때 어거스틴을 업고 싸웠다." 다시 말하면 루터와 칼빈은 어거스틴을 그대로 업고 있습니다. 특히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어거스틴의 사상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I would say, almost unambiguously, that I myself, and my whole theology, stand much more in the line of the Augustinian than in the Thomisitic tradition." 폴틸리히 역시도 어거스틴의 신학전통에 서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에 대한 오해: 눈물의 자식(?)
어거스틴이 고백록 11권에 시간론에 대해서 길게 썼는데, 그래서 시간과 영원이라고 하는 것은 고백록 11권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훗설이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이라는 책의 첫 페이지에 이렇게 말합니다. "시간관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사람은 반드시 어거스틴 고백록의 11권을 읽어보아야 한다" 이정도로 어거스틴은 신학뿐만 아니라 서양사상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보통 교회에서 어거스틴이 누구냐? 하면 젊었을 때 방탕하고 바람 좀 피우던 놈이 어머니의 눈물어린 기도로써 회개하여 성자가 되었단다는 식으로 안다고 하는 것은 외람된 것입니다. 사실 어거스틴은 서양철학의 뿌리입니다. 이것만 알아도 오늘 여기 온 값을 한것입니다. (웃음 )

어거스틴의 사상: 체계와 체계화
어거스틴의 사상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그의 사상의 특징은 체계와 체계화라는 두가지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칸트의 철학, 헤겔의 철학들, 이것은 하나의 체계화입니다. 그래서 철학자에 대한 생애를 몰라도 그사람의 책만 보면 그사람을 대략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나 어거스틴의 사상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어떠한 관계라고 하는 하나의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모든 사상전체가 체계로 엮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사상을 갖다가 open system이라고 합니다. 어거스틴의 사상을 초기의 작품만 읽어서는 어거스틴의 전 사상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사상은 체험과 시간에 따라서 변형되기 때문에 그의 사상을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초기에는 플라톤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말기에 가서는 성서적인 것에 더욱 치중을 해서 바울의 은총론이나 예정론같은 것을 아주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시기만을 가지고 이것이 어거스틴이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불안의 극복을 위하여: 행복론
두 번째는 행복론입니다. 고백록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때는 하나님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본래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하나님에게 향해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불안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다른 방향으로 돌렸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하면 우리가 행복해 질수 있느냐?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안에서 살 때, 쉴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0권에도 행복에 대해서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오, 주님 그러면 내가 당신을 어떻게 찾을 수 있습니까? 내가 당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은 행복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내영혼이 살기 위하여 당신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육신은 영혼으로 말미암아 살고있고 내영혼은 당신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 영혼, 육신의 3중구조가 나옵니다. 이것이 행복론의 특징입니다.



은총론: 신중심의 은총
세 번째는 신중심입니다. 하르낙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어보면 어거스틴이야 말로 하나님에 취해있는 하나님 의식에 가득 차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에 중심을 맞추고 있습니다. 네 번째는 의지론입니다. 의지론의 반대는 주지론입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과 같은 사람이 주지론자입니다. 그런데 고대에 철학사에 있어서 처음으로 의지의 중요성을 주장했던 사람이 어거스틴입니다. 이것은 제가 한말이 아니고 한나 아렌트라고 하는 유명한 유태인 철학자가 한말입니다. 다섯 번째는 은총론입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이나 말기의 책을 읽어보면 죄에 대해서 많이 말합니다. 그러나 죄를 논할 때 언제나 따라 다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어보면 죄가 주렁주렁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또 읽어보면 은혜가 죄와 함께 열려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은총이 아니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나는 술고래가 되어본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많은 술고래들이 당신의 은혜로 술을 끊고 온전하게 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한 번도 술고래가 되어 본적인 없다는 것도 당신의 은혜요, 어떤 사람이 술고래였으나 이제는 아니라고 하는 것도 당신의 은혜이며, 또한 이 두 사람이 당신의 은혜로 이렇게 되었다고 알게되는 것도 당신의 은혜입니다. '(웃음 )

어거스틴의 회심과 습관의 폭력
8권에 회심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들어 보세요. '당신은 여러모로 당신이 말씀하신 것이 진리임을 나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진리를 확신하면서도 잠깐만 잠깐만 더 자도록 내버려 두시오라고 잠꼬대처럼 말하는 것 이외에 할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잠깐만 잠깐만은 이제가 아니였고 더 자도록 내버려두시오를 오랫동안 끌고 나갔습니다. 그러므로 내 지체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있는 죄의 법아래로 나를 사로잡았을 때, 내가 속상함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였음은 헛된 일이었습니다. 그 죄의 법이란 다름아닌 습관의 폭력으로써 이로인해 인간의 마음은 자신의 의지에 역행해서까지 붙잡혀 있기도 하고 가기도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내 지체안에 있는 죄의 '법이라고 하는 것을 어거스틴은 심리적으로 해석했습니다. 다시말하면 습관은 내 자유의지가 행사함으로써 이루어진 결과인데 한 번 습관화된다고 하면 그것은 객관적인 힘이 되어서 나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습관의 폭력에 사로잡혀서 완전히 자유함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렇게 붙잡히게 된것도 처음에는 스스로 원해서 습관화된 것이니 핑계를 댈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노력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서 너무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웃음) 여러분이 생각하기보다 여러분 자신은 더 나쁨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원을 받으려면 목사나 교인이나 할것없이 은혜밖에는 없습니다. 이 은총론이 나중에 예정론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은총론을 이야기하지 않고 예정론으로 갈수는 없습니다.

homo interior or home interior
그다음에 여섯 번째로 중요한 것은 내면성(homo interior) 입니다. 제가 어느 잡지에다가 내면성(homo interior)에 대해서 말을 했더니, 그 편집하는 사람이 고쳤어요. 무엇이라고 고쳤느냐 하면, 홈(home) 인테리어라고 고쳐났어! (웃음) 어거스틴은 모든 신학적인 대답을 인간의 내면에서 찾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인간의 심리분석을 통해서 신학의 해답을 찾았습니다. 예를들어 보통 하나님이 존재하냐? 존재하지 않느냐?하는 것을 논할 때, 아퀴나스같은 사람은 하나님을 제1원인으로 봅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외적인 것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자기 마음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체험과 의식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식에서 출발해서 하나님의 존재로 가는 것이지,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핫숀이나 틸리히도 이것을 인정합니다. 아퀴나스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면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하나님은 단지 물질적인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악의 문제: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은 악
하나님의 존재 증명에 덧붙여서 한가지 더 말한다면 악의 문제입니다. 악의 문제만큼 어거스틴이 고민한 것은 없습니다. 일생동안 악에 대한 문제를 고민했고, 그래서 마니교와 싸웠으며 나중에는 인간안에 있는 죄와 싸웠기 때문에 펠라기우스와 논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어거스틴 이전의 교부들은 인간밖에서 악을 찾으려고 했지만, 어거스틴은 인간의 내면에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의지의 왜곡을 악으로 보았습니다. 고백록1권에 배따먹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집 포도밭 근처에 배나무 한그루가 있었습니다. 주렁주렁 많이 열리기는 했으나 그 열매가 맛이나 색깔에 있어서 따먹고 싶을 정도는 안되었습니다. 어느날 밤 늦게(죄는 다 밤늦게 짓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따 가져와서 겨우몇 개 맛을 본 다음 돼지에게 던졌습니다. 이런일을 하는 것이 즐거웠으니 하지말라는 것은 환원적이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이렇게 짓는 것입니다. 악한 일을 할 때 악한일을 하도록 자극한 동기는 바로 악한 의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악의 원인은 많은 사람들이 인간 자유의지의 밖에서 찾으려고 했던 시대에 어거스틴은 인간 내면속에 왜곡된 의지가 바로 악의 원인이라고 보았습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
그다음에 삼위일체론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동방교회 교부들은 주로 삼위일체론을 설명할 때, 요한, 야곱, 베드로가 각각 다른 제자이지만 인간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것 처럼, 성부, 성자, 성령도 다르지만 신성의 본체는 같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이렇게 설명하다가 자칫잘못하면 삼신론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안에는 사랑, 사랑한자, 사랑받는자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삼위일체를 갖다가 인간의 한 마음에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내면적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했습니다. 인간의 한 인격체속에 심리적인 이해를 통해서 삼위일체에 접근하는 것도 어거스틴 신학의 한가지 특징입니다.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는 고향에 가는 것이다: 안식의 문제
안식에 대한 문제도 어거스틴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 문제입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가 불안을 극복하고 안식할 수 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백록 13권 9장을 읽어보아야 합니다. 지금 난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물체는 자체에 무게로 인해 제자리를 향해서 움직입니다. 무게는 반드시 밑으로만 내려가는 것이 아니고 제자리를 향해서 움직입니다. 예를들면 돌은 밑으로 불은 위로 제각기 자기의 무게로 인하여 제자리를 찾아 운동합니다. 물속에 부은 기름은 물위로 떠오르고 기름위에 부은 물은 기름밑으로 가라 앉습니다. 그것들이 제자리를 벗어나면 불안정해지고 제자리로 다시 돌아가면 안식하게 됩니다. 나에게 있어서도 나의 사랑이란 나의 무게입니다.' 왜 불안하냐?하면 제자리를 못찾았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물체는 완성을 향해서 움직인다고 했는데 어거스틴도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예를들어 사과가 왜 떨어지느냐?하면 우리는 보통 만유인력에 의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뉴톤이전의 사람들은 모든 물체가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사과에는 무엇이 제일 많으냐? 할 것 같으면 사과에는 흙의 요소가 제일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고향은 흙이며 꼭지가 떨어지니까 고향으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혼의 제고향은 어디이냐? 하면 그 자리는 하나님 안에서 쉴때입니다. 하나님을 행해서 하나님 안이 인간의 제자리입니다. 아름다운 숲이나 놀이나 노래가 있는곳에도 향기나는 정원이나 훌륭한 잔치나 향락의 침실에도 안식은 없습니다. 아름다운 숲은 시각이고 노래는 청각, 향기나는정원과 잔치는 미각이며, 향락의 침실에도(청평의 러브호텔?) 즉 촉각이며, 글과 시는 지적인 즐거움을 말합니다. 지금 현대과학은 감각적인 것에는 매우 발달했으나 영을 만족시키는 것에는 대단히 뒤떨어져 있습니다. 이런곳에서는 만족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더 불안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하나님안에 있는 것이라고 어거스틴은 보았습니다.

사랑의 왜곡과 사랑의 질서
그렇다고 어거스틴은 세상것은 무조적 사랑하지 말라고는 않았습니다. 어거스틴은 금욕주의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좋게 창조했으므로 모든 것은 다 좋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금욕주의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세상 만물을 다 사랑해야 하지만 그 사랑에는 순서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질서를 이야기 합니다. 사랑의 질서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Uti(use)와 Frui(enjoy)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감각적인 것을 즐긴다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인격의 만남에서 오는 그 즐거움을 말합니다. 내가 다 늙으신 어머니와 함께 이야기할 때 그때가 바로 즐거움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사랑하되 존재의 계층에 따라서 사랑을 해야 한다고 어거스틴은 생각했습니다. 존재의 계층은 제일 높은곳에서부터 하나님, 인간, 동물, 식물, 광물의 순서입니다. 존재의 계층에 따라서 가치의 계층이 결정된다고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여기에는 생태학적인 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비판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것처럼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완동물을 사랑하지만 인간보다야 사랑해서는 안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순서가 바뀌어 질 때 의지의 왜곡 사랑의 왜곡이 일어납니다. 요즘 한국 사람들 한국의 부인네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에요? 광물 광물이에요.(웃음) 이것이 가치관의 전도입니다. 여기에서 불안이 생기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한 부부가 이혼을 했는데 이혼을 한 이유가 부인이 개를 더 사랑하고 남편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인이 법정에서 무엇이라고 말했냐 하면 나는 개에게서 사랑을 받지 남편에게서 사랑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이혼을 허락했습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사랑의 왜곡입니다. 그다음에 사랑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안에 이웃을 사랑해야 이웃사랑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웃사랑자체가 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버리면 잘못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백록 4권에 나옵니다.

어거스틴은 금욕주의자인가?
어거스틴의 사상에는 약간 금욕주의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에 대해서 제가 말하겠습니다. 4권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나는 빛에게는 등을 돌리고 있었으므로 내얼굴은 그 빛이 비치는 것들만 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빛이 비추이는 것들만 보고 있던 내얼굴은 빛을 받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잘알지만 자기가 누구인지는 모르는 격입니다. 세상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지식입니다. 세상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나를 알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지혜(wisdom)라고 했습니다. 지혜를 소홀히 했던 자기의 시대를 한탄했는데, 어쩌면은 오늘날 우리의 시대와 똑같은지 모릅니다. 오늘날 그렇거든요. 자기와 하나님을 잃어버린, 그러나 세상의 정보는 컴퓨터 키하나만 누르면 되는 세상이 되버렸어요. 이것이 우리의 삐뚤어진 현실이며 실존이라면 어떻게 해야 겠습니까? 세상에 등을 돌리고 세상은 죄악의 것, 나쁜 것, 악마가 많은 곳이라고 설교하고나서 나중에 다 일어나서 참아름다와라 주님의 세계는 찬송을 부르면 앞뒤가 안 맞지 않습니까? (웃음) 어거스틴은 세상은 좋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어거스틴의 인간의 참된 형상(true picture)은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에게서 빛과 열을 받는 정오와 같은 인간 위치를 말합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정오사상입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 하나님에게는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다고 했는데 바로 정오에 그림자가 없습니다. '내가 대낮관계에 하나님과 들어갈 때 그때에 하나님에게서 빛과 열을 받습니다.' 빛은 조명을 말하고 열을 받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세상을 부정하는데로 나가지 않고 세상을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재긍정하는 면을 어거스틴은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one and many: 급진적인 일신론(radical monotheism)
그리고 어거스틴에게서 또한가지 중요한 것은 시간과 영원에서 지적이 되었지만, one과 many 입니다. 제2권 1장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나는 하나이신 당신을 떠나 여렇인 세계로 떨어져서 산산조각이 나 흩어져 버렸으니 이제 나를 거두어 모으소서.' 그래서 저는 하느님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어거스틴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에게서 하나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니버가 말하는 radical monotheism(급진적인 일신론)입니다. 여기에 두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흩어진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모은다는 말입니다. 흩어지라는 말은 분산(scatter)입니다. 창세기 1장에 최초에 혼돈, 물, 흑암이 있었는데 이것은 흩어진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흑암을 부르셔서 모은 것이 창조입니다. 창조란 형태(form)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분산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기억과 같은 것으로 쪼개어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심리적으로 시간을 파악했지, 운동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흩어진 나가 통합(integration)될 수 있는가? 여러분 거라사땅의 귀신들린자 있지요? 귀신들린자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무덤사이에서 잤지요. 인간이란 본래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살아야 하는데 이사람은 무덤사이에서 살았습니다. 또한가지 특징은 밤엔 소리를 지른다는 것입니다. 밤엔 자야 하는데 잠을 자지 않습니다. 그 다음 특징은 쇠고랑도 끊어벼렸지요. 사회적인 법규에 제약을 받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했더니 군대라고 했습니다. 군대란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인격체가 여러개로 쪼개어 졌다는 것이지요. 이와같이 쪼개어 떨어진 경험을 어거스틴은 분산이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의 현실은 시간속에서 분열되어 있습니다. 하나이신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많은 것을 향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분열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분열된 것에서 어떻게 모아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말과 연관해서 교회론을 봅시다. 다른말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나 빵으로 표현합니다. 어거스틴이 자기 편지에 이런 말을 쓴일이 있어요. '빵이 되기 위해서는 사방에 흩어진 밀알이 거두어 모아져서 물로 반죽이되고 불로 구워져서 빵이 된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사방의 흩어진 사람들이 불러 모아져서 세례의 물로 하나가 되고 성령의 불로 구워져서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