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36호(2013. 4.20), 15-22에 게재
믿음과 행함의 통일
- 행함 있는 믿음(fide cum opera)의 제2종교개혁이 필요한 한국교회 -
임 태 수
(호서대 명예교수 ‧ 제2종교개혁연구소 소장)
1. 한국교회의 현황
이번 호의 특집 주제를 “한국 교회에 대한 진단과 처방: 표층 기독교에서 심층 기독교로”정한 것은, 한국 기독교가 표층 기독교여서 오늘의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이 표층 기독교를 해결하는 처방으로 심층 기독교를 제시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한국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한국교회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데 모두 다 공감할 것이다.
2010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발표한 여론조사에서는 한국인이 가장 신뢰하는 종교는 가톨릭이 41.4%, 불교가 33.5%, 개신교가 20.0%로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격차가 아주 크게 나왔다. 2012년에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를 해서 2013년 1월에 그 결과를 발표를 했는데1), 그 결과 가운데 비종교인들이 보는 종교별 신뢰도는 개신교 18.9%, 천주교 26.2%, 불교 23.5%로 나타나서, 개신교가 18.9%로서 한국의 3대 종교 가운데 개신교의 신뢰도가 가장 낮게 나왔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은, 신앙의 실천 부족 31.0%, 지나친 양적 성장 추구 27.6%, 목회자의 자질 부족 14.8% 등으로 나타났으며, 한국교회 신뢰 회복을 위한 우선 개선 필요 사항으로는, 교인과 교회 지도자들의 언행 불일치가 48.6%로 나타났다. ‘신앙과 일상생활의 일치 정도’를 묻는 문항에서, 일치하는 편이라고 대답한 교인은 13%이고, 목회자는 2.6%에 불과했다. 이 조사결과는 한국 개신교인들과 목회자들의 언행불일치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에 와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신앙의 실천 부족’이나 ‘언행불일치’는 행함에 관한 일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인들이, 개신교인이나 목사들의 문제점으로 지적한 것은 ‘믿음’에 관한 일이 아니다. 그들의 기도나, 교회참석, 헌금 등이 잘못됐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실천과 행함’에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결과는 한국 개신교의 문제를 정확히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한국 개신교인과 목사들의 ‘삶과 행함’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이런 결과로 나타나는 것일까? 그리고 이를 개선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1)“2012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요약보고서”, http://www.kpastor.org.
2010년에 ‘뉴스앤조이’에서, “비기독교인인 당신은 왜 개신교를 싫어하십니까?” 하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댓글이 509개가 실렸다. 이 509개의 댓글을 뉴스앤조이 담당자들이 7개의 범주로 요약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2) 첫째, ‘개신교인은 말 따로 행동 따로’다. 둘째, ‘개신교인은 사랑은 없고 욕심만 가득’하다. 셋째, ‘개신교인은 권력과 결탁되어 있다.’ 넷째, ‘개신교에는 수준 미달의 목사들이 많다.’다섯째, ‘개신교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타종교에 배타적’이다. 여섯째, ‘개신교는 헌금을 강요하고 재정을 불투명하게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개신교는 끼리끼리 놀고, 끼지 못하는 사람은 왕따시킨다.’ 비기독교인들이 지적한 7개의 사항들이 대부분 기독교인들의 행함과 관련된 것들이다.
이와 같이 한국 개신교인들과 목사들이 비윤리적이요 비도덕적인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들을 찾아보자. 우리는 연세대학교 채플에서 설교한 한 대형교회 목사의 말에서 그 이유 가운데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대형교회 목사는 자기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이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은 백화점 세일에 사람이 많이 모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것은 값싼 상품을 많이 내놓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는 믿음만을 말할 뿐, 삶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는 수 없이 말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예수를 믿는 사람에 걸맞는 바른 삶인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하지 않습니다. 지난 일주일 어떻게 살았든 상관없고, 또 앞으로 일주일 동안 어떻게 살게 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만 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하지요.3)
이 목사의 말 속에 많은 한국 개신교인들이 기독교인답게 살지 않는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예수를 믿는 일만을 강조하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가르치지 않는 목사가 어찌 이 대형교회 목사만이겠는가? 한국의 많은 목사들이 이렇게 “믿음만”을 설교하고, “삶과 행함”에 대해서는 설교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한국 개신교인들과 목사들이 비윤리적이요 비도덕적인 또 하나의 이유에 대하여 한인철 교수는 이렇게 분석한다.4)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예수를 살지는 않는 이유
2)이 결과는 한인철, “종교개혁에 터한 한국 개신교 신앙양식의 허와 실”,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가 2012년 11월 16일에 기독교회관에서 주최한 “두번째 종교개혁은 가능한가?”에서 발표한 자료집 p. 1에서 재인용.
3)한인철의 윗 논문 p. 2. 손봉호 교수도 기독교학술원이 주최한 “제26회 월례기도회 및 발표회”에서 발표한 논문 “한국교회의 윤리와 세습” p. 17에서 이와 비슷한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믿음 외에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정직하고 공정하게 살 것을 요구하는 것은 교인들에게 너무 큰 부담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교회의 수적 성장에 방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윤리적 삶은 교회의 설교와 교육에서 강조하지 않는 것이 교인을 편하게 하고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물론 교역자들에게도 윤리적 삶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윤리를 강조하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도 편리했다.”
4)한인철, “종교개혁에 터한 한국 개신교 신앙양식의 허와 실”, p. 5-6.
를 한인철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분류하여 지적한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지적이라고 생각하여 좀 길게 인용한다.
첫째, 한국 개신교인들은, 기독교인은 근본적으로 예수처럼 살 수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예수처럼 살려는 노력을 포기한다.
둘째, 한국 개신교인들은, 기독교인은 굳이 예수처럼 살 필요도 없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예수는 예수처럼 살지 못하는 우리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이미 모든 것이 용서된 마당에 굳이 예수처럼 살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셋째, 한국 개신교인들은, 기독교인은 예수처럼 살려고 해서도 안 된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이 예수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율법적인 신앙과 같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믿음만 강조하고 행함이 결여된 설교를 한 결과, 비윤리적이요 비도덕적인 기독교인을 양산한 한국교회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3대 종교 가운데 공신력이 최하위에 머물고 있고, 교인은 날로 줄어들고 있고, 비어가는 교회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한 이유, 이런 위기를 초래한 이유들은 무엇일까? 이를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루터의 ‘믿음으로만’(sola fide)
한국교회를 붕괴의 위기에 봉착하게 한 데는 사회적, 문화적, 신학적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들 가운데 신학적인 핵심 이유는 루터의 ‘믿음으로만’(sola fide)이라고 생각한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구원얻는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 사상을 주장하였다. 1520년에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5)라는 논문을 썼다. 이 논문에서 루터는 “믿음으로만”(sola fide)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성경에 행함, 의식(儀式), 율법에 대한 기록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어떻게 행함 없이 믿음만이 의롭게 하며, 우리에게 큰 은혜의 보화를 줄 수 있는 있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고 당신이 묻는다면,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렇다: 첫째, 행함 없이 믿음만이 의롭게 하고 자유하게 하고 구원한다("Faith alone, without works, justifies, makes free and saves.”)고 말해지고 있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다.6)
5)
"The Freedom of a Christian", in H.J. Grimm (ed.), Luther's Works, American Edition, Vol. 31 (Muhlenberg Press, Philadelphia, 1976),6)Ibid., p. 348. “Should you ask how it happens that faith alone justifies and offers us such a treasure of great benefits without works in view of the fact that so many works, ceremonies and laws are prescribed in the Scriptures, I answer: First of all, remember what has been said, namely that faith alone, without works, justifies, makes free and saves.”
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얻는다”는 사상은 종교개혁의 핵심사상이 되었다. 이 이신득의 사상은 5세기가 지난 오늘까지도 개신교회 신학의 핵심사상으로 개신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종교개혁사상은 개신교회에 행함을 배제하고 공허한 믿음만을 남겨 둔 결과를 낳았고, 실천과 윤리적 차원이 결여된 개신교회를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루터는 1520년에 “선행에 관하여”(Von den guten Werken)7)라는 긴 설교를 썼다.8) 이 글에서 루터는 개신교의 윤리에 관하여 광범위하게 설명하였다. 루터는 이 “선행에 관하여”에서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이 결코 선행과 행함을 배제하려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였으며, 또 다른 글에서도 이 사실을 누누이 해명하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루터 당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을 “선행과 행함은 기독교인에게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로 오해 내지 곡해하고 있다.9)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이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루터의 해명은 극히 일부 사람들에게만 제대로 전달이 되었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선행과 행함을 배제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일방적인 믿음 우위의 신학의 폐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화되었고, 그 폐해는 5세기가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엄격히 말한다면 루터의 진의를 잘못 이해한 책임은 오해한 사람들에게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책임이 반드시 곡해한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곡해를 할 수밖에 없는 주장을 한 루터 자신에게 보다 더 근본적인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행함부재, 윤리부재의 책임이 모두 루터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한 한 루터의 책임은 매우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구호가 행함배제의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10)
16세기 종교개혁으로부터 5세기가 흐른 지금, 21세기에 살고 있는 개신교인들의 기억 속에는 루터 하면 ‘ale음으로만'(sola fide)이 생각날 정도로 루터의 신학은 완전히 "믿음으로만’의 신학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위에서 인용한 루터의 글에 의하면 ’믿음으로만‘의 신학은 우리의 구원에서 행함을 배제하는 것인데, 과연 이
7)WA 6, 196-276.
8)K. Bornkam & G. Ebeling(hg.), Martin Luther Ausgewählte Schriften, Band 1(Insel Verlag, 1982), 38-149.
9)Hans Georg Fritzsche는 루터에게 있어서 행함(Werke)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동료인간을 위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이 게으르지 않기 위한 육체의 훈련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행함(Werke der Frömmigkeit)은 과일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처럼 결과적인 것(die konsekutive)이지, 결코 조건적인 것(die konditional)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루터에게 있어서 행함은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구원의 조건은 될 수 없다는 해석이다. 이런 Hans Georg Fritzsche의 말은, 행함이 루터의 칭의론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정확하게 지적해준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Hans-Georg Fritzsche, Lehrbuch der Dogmatik, Teil IV (Vandenhoeck & Ruprecht, 1988), 218 참고.
10)임태수, “행함 없이 구원없다-제2종교개혁을 위한 새로운 구원이해-”, 「제2종교개혁을 지향하는 민중신학」 (대한기독교서회, 2002), pp. 216-217 참고.
’믿음으로만’의 신학은 올바른 신학인가? 이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마태복음 7:21과 25:31-46을 중심으로 생각해보고자 한다.
3. ‘행함 있는 믿음으로’(fide cum opera)11)
마 7:21에서 예수는 산상수훈을 마감하면서 다음과 같이 행함을 강조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여기에서 예수는 “나더러 주여 주여(kyrie kyrie)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한다. 루터의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맞다면,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는 예수를 믿는 자이므로 구원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라도, 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루터의 “믿음으로만”의 주장은 맞지 않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그 사람은 예수를 주(kyrios)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임과 동시에, 21절 하반절에서 말씀하는 조건, 즉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마 7:21은 “행함 있는 믿음”(fide cum opera)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이 말씀하고 있다.12) 마 7:21에서 루터의 “믿음으로만 구원”이라는 구원론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마 25:31-46은 최후심판 때 일어날 사건에 대한 비유이다. 인자가 심판주로 나타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세계 모든 민족을 두 편으로 갈라서, 양은 그 오른 편에, 염소는 그의 왼편에 세운다. 이 두 집단의 사람들은 모두 인자 즉 그리스도를 주(kyrios)로 고백하는 사람들이다(37절, 44절). 이 두 집단 가운데서 인자가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축복을 베푸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주’13)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며,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며,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었기”(35-36절) 때문이다. 반대로 왼편에 있는 염소와 같은 사람들은 이런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저주를 받아 영벌을 받게 된다(42-46절). 이 비유에서 “행함있는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 되고 있음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도 루터의 “믿음으로만 구원”이라는 구원론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11)임태수, “행함 없이 구원없다-제2종교개혁을 위한 새로운 구원이해-”, pp. 226-230 참고.
12)H. Windisch, The Meaning of the Sermon on the Mount, tr. S. MacLean Gilmour (Philadelphis: The Westerminster Press, 1951)는 산상수훈은 실행가능한 윤리이며,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윤리로 보았다.
13)마태복음에서 주(kyrios)는 신적인 권위(divine authoriy)를 가진 그리스도론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J. D. Kingsbury, Matthew:Structure, Christolgy, Kingdom (Fortress Press, 1978) 103-113.
어거스틴은 행위보다는 믿음의 우선권을 강조하였지만, 공로를 상당히 중요시하면서 공로 즉 행함이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함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루터와는 달랐다.14) 어거스틴은 은총이 구원받을 자 안에서 활동하면 그는 선행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이 선행이 공로가 되어 최종적인 구원으로 인도해준다고 생각했다.15) 잘 알려진 대로 존 웨슬리는 루터의 신앙제일주의(solafideism)와 정숙주의(quietism, stillness)를 비판하면서 성화를 강조하였다.16) 웨슬리는 성화를 이루기 위하여서는 행함과 선행의 실천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고17) 거룩함이 없이는 구원의 완성(final salvation)을 이룰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18) 어거스틴과 웨슬리 모두 행함이 구원에 필요함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마 7:21과 25:31-46에서 예수가 구원에 행함이 필수조건임을 강조한 것과 일치한다. 우리 한국 개신교인들이 배워야 할 신학이다.
4) 하나님의 은혜(grace)가 믿음과 행함을 가능하게 한다.19)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이해한 반면,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인간의 공로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행함으로 의로워야 한다는 말은 인간의 공로주의가 아니냐 하는 문제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은 것이라면, 믿음 안에서 행하는 행함도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불가능하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행함은 결코 인간 단독의 열매가 아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행함은 불가능하다. 인생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일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것은 더더욱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선물이다. 이 이신득의의 결과로 행함의 결과가 나오는 것이므로, 행함 또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아니라고 누가 강변할 수 있겠는가? 행함은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요 결단의 결과인 것이다. 인간의 적극적인 결단과 의지 없이는 행함의 열매는 불가능하다. 인간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신 선물이요, 죽음의 존재가 생명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 또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며, 이러한 존재가 하나님 말씀을 행할 수 있는 힘 또한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인간 존재가 하나님이 명령한 행함을 했다고 해서 자신의 공로를 내 세울 것이 있겠는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이므로, 주
14)후스트 L. 곤잘레스, 이형기‧차종순 공역, 「기독교사상사(II)」, (서울: 대한기독교장로회 출판국, 1990), p. 67.
15)「은총과 자유의지에 관하여」(De gratia et libero arbitrio), 2. 후스트 L. 곤잘레스, 이형기‧차종순 공역, 「기독교사상사(II)」, (서울: 대한기독교장로회 출판국, 1990), 67에서 재인용.
16)김홍기, “구원의 과정에서의 믿음과 선행의 관계”, 한별 임태수 박사 화갑기념논문집 편집위원회 편, 「제2종교개혁을 향하여」, (천안, 민중신학연구소, 2004), p. 93.
17)김홍기, “구원의 과정에서의 믿음과 선행의 관계”, p. 98.
18)김홍기, “구원의 과정에서의 믿음과 선행의 관계”, p. 99.
19)임태수, “행함 없이 구원없다-제2종교개혁을 위한 새로운 구원이해-”, pp. 237 이하 참고.
신 달란트대로 최선을 다해 일 한 다음,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종처럼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하고 고백할 것뿐이다(눅 17:7-10).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한 것뿐이다. 행함을 자기 공로인양 자랑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갈 2:20).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은총(grace)이 구원받을 자 안에서 활동하면 그에게 선행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20)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행한 행함을 어찌 인간의 공로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자기의 행함의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한 행함은 믿음의 결과요,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서 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공로사상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구원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은총의 활동이다.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믿음도 행함도 불가능하다.
3. 결론: 믿음과 행함의 변증법적 통일21)
믿음과 행함은 상반된 것이 아니고 상호보완적이며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믿음과 행함은 변증법적인 통일을 이룬다. 예수 안에서 믿음은 행함을 전제하고 행함은 믿음을 전제한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 2:26)이라고 말했다. 옳은 말이다. 반대로 믿음이 없는 행함은 인간의 자기과시요 자랑일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늘 분리해서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기를 좋아한다. 이는 잘못이다. 믿음과 행함은 늘 함께 있어야 할 필수불가결한 통일체다. 믿음과 행함은 구원의 두 기둥이다. 믿음과 행함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배제할 것이 아니라 서로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변증법적인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믿음 없이 구원을 얻을 수 없듯이 행함 없이도 구원얻을 수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결론이다. ‘행함 있는 믿음’(fide cum opera)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조건이다.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이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사는 길은, 더 이상 “믿음으로만”(sola fide)의 신학에 집착하여 윤리와 도덕이 결여된 교회가 되지 아니하고, ”행함 있는 믿음” (fide cum opera)을 회복하는 길 뿐이라고 생각한다.
20)후스트 L.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II)」, 66-67.
21)임태수, “행함 없이 구원없다-제2종교개혁을 위한 새로운 구원이해-”, pp.238-239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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