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2·6교실/2·6학기과제교실

[스크랩] 영국의 종교 개혁

류성련 2014. 11. 1. 19:53

 영국의 종교 개혁

영국종교개혁은 대륙의 개혁과 다른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의 반대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정치적인 문제로 진행되었으며, 한 사람에 의해서 주도된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서 많은 사람이 조금씩 개혁 쪽으로 이동되어 갔다. 따라서 영국의 개혁은 신학적인 이론에서는 자연적으로 대륙의 개혁자들의 신학을 받아들였으며, 그것도 주로 스위스 개혁자들의 사상으로 흘렀다.

 헨리 8세

리치몬드의 공작이었던 헨리 7세는 영국 내부의 결속을 어느 정도 다진 다음에 종주국이었던 에스파냐와의 우호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에스파냐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 사이의 셋째 딸인 캐서린을 맞이해서 큰아들 아더와 결혼시켰다. 1501년 11월 14일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으나 1502년 4월에 신랑이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사벨라는 강력한 압력을 가해서 아더의 도생 헨리 8세와 재혼시킬 것을 요구했다. 만일 듣지 않으면 결혼 지참금을 회수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캐서린은 1509년 시동생인 헨리 8세와 결혼하였다. 철이 들면서 헨리 8세는 어쩔 수 없는 결혼이었지만 아들을 낳아서 왕위를 계승하려고 했으나 캐서린과의 사이에는 딸만 낳았고 그것도 다 죽고 오직 메리 튜더만 살아남았다.

이런 과정에서 헨리 8세는 궁녀 앤 볼렌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아이를 갖고 만다. 따라서 자신이 캐서린과의 결혼은 불법이므로 이혼하고 앤과 함께 결혼하기를 원했다. 월시 추기경은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 영국을 떠난다. 그러나 헨리 8세의 이혼 요청은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불허로 거부되었다. 이에 월시는 그 책임을 물어 실각되고 그의 뒤를 이어 토마스 크랜머가 영국의 실권자가 되었다.

토마스 크랜머는 헨리 8세의 요구에 따라 교황권 제한령과 사전 보호법을 발동시킨다. 이 두 가지 법으로 교황의 권한이 영국 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국왕의 허가 없이 교황에게 항소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헨리8 세와 앤과의 결혼이 적법하다고 공포되고 앤은 왕비가 되었다.

1533년 9월 앤이 공주 엘리자베스를 낳고 1534년 국왕의 영국 성공회 수장법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영국 성공회에서 국왕은 형식적인 지도자이지, 실권을 갖고 있지는 않는다. 그리고 1536년에는 수도원 해산법을 통과시킴으로써 6세기이후 로마교회의 지배를 받던 영국교회 즉, 영국 성공회로마교회에서 독립하였다.(일부에서는 성공회를 헨리 8세가 결혼하려고 만든 교회라고 오해하는데, 영국교회 즉, 영국성공회는 종교개혁이전부터 존재했다. 즉,헨리 8세는 정치적인 동기에서 영국교회를 로마교회에서 독립시킨 사람이지, 성공회 창시자는 아니다.)이에 교황청은 격노하여 헨리 8세를 비롯해 앤 볼렌, 크랜머 등을 파문하였다. 앤의 두 번째 임신과 더불어서 왕위 계승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누구든지 왕자를 낳으면 계승권을 가지고 그 다음으로는 메리,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엘리자베스라고 명기 하였다.

1536년 앤이 두 번째도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헨리 8세는 간통죄를 적용해서 처형시키고 그의 눈길은 세 번째 여인인 제인 시모어에게로 향했다 그는 아들 에드워드 6세를 낳고서 죽고 만다. 그 후 헨리 8세는 클리부스 앤과 결혼하였으나 이혼하고 크랜머도 참수시킨다. 이제는 보수파에서 캐서린 하워드를 왕비로 내세우면서 로마 가톨릭 6개 조항을 발표시켰다. 그러나 보수파도 얼마가지 못하고 헨리 8세는 캐서린 하워드를 간통 혐의로 처형하고서 마지막 여섯 번째 부인인 캐서린 파르와 결혼하였다. 1547년 헨리 8세가 죽음으로써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오른다.

헨리 8세는 6번을 결혼하면서 각 권력의 암투에 휘말리면서 개혁보다는 권력 유지에 부심했다. 즉 개혁을 향한 의지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고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해서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래서 영국 성공회는 교회의 전통이나 예전을 무시하는 극단이 아닌,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간의 중용(Via Media)입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6세

에드워드 6세는 10세에 왕위에 오르면서 너무도 어린 나이에 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히 외척이 힘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삼촌이었던 헤르포드의 백작은 섭정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서머싯 공작으로 승진 하여서 국가의 총사령관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실권을 장악한 서머싯은 개신교 추종자였다. 국가의 교회 종속은 속속 진행되었다.

  • 로마 가톨릭 6개 조항을 파기시킴과 더불어서 모든 가톨릭과 관련된 법을 파기시켰다.
  • 국회는 성체성사 집전시 보혈과 성체의 분배를 허용하였다. 또한 성직자의 결혼을 금하는 법령을 무효화 시켰다.
  • 에드워드 제1기도서가 작성되었다.
  • 영문성서의 출판과 판매의 자유가 허락되었다.
  • 에드워드 제2기 도서가 마련되었다.
  • 영국 성공회의 대헌장이라고 할 수 있는 42개 조항이 발표되었다. 물론 이 헌장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절에 영국 성공회 39개조 신조(The Thirty-Nine Article of Religion)로 대체되기는 하였으나, 영국 성공회의 근본적인 신앙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 새로운 헌금법을 발동하여서 모든 헌금을 국왕의 수입으로 함으로써 교황청의 재정을 압박하였다.

이상과 같은 변화가 영국에서 일어나자 유럽으로 피난 갔던 개혁추진파들이 급거 귀국하였으며 동시에 유럽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영국으로 망명 오는 사람들로 있었다. 이렇게 해서 대륙으로 피난하였던 사람들이 새로운 학문과 개혁적 전통을 영국 교회에 소개하기 시작함으로써 영국의 대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메리 1세의 반동

에드워드 6세의 사망은 영국의 왕위 계승 문제를 야기시켰다. 영국인들은 메리에게 눈길을 돌렸으며 왕위에 오른 메리는 자연스럽게 영국의 가톨릭화를 추진하였다. 메리 1세는 한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었다. 그래서 그녀는 헨리 8세의 시절과 에드워드 6세의 시절 법령을 상당 수 번복하였다.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은 적법한 것이었으며, 메리 자신은 적법한 왕위 계승자라고 선포하였다. 에드워드의 6세의 모든 종교적인 법안을 폐기시켰으며, 헨리 8세 시절의 반-교황적인 법을 무효화 시켰다.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서 메리 1세는 중세적인 예배 전통을 그대로 복구하였으며, 성공회의 감사성찬례가 아닌 로마 가톨릭 미사를 다시금 실시하였다.

메리 1세는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와 결혼하였다. 그와 동시에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이 속속 복귀하였으며, 교황청 사절이 공식적으로 다시 파견되었다. 교황청 사절은 순종법을 발동시킴과 동시에 이단 규제법도 발동시켰다. 이때부터 개신교도와 성공회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메리 1세는 피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많은 개신교 지도자들과 토머스 크랜머 주교 등의 성공회 성직자들을 처형하였으며, 불운한 삶을 살았던 여인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수습

엘리자베스 1세(1559년- 1603년)의 즉위 이전부터 영국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개신교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1559년 1월 15일 대관식을 거행하고서 왕위에 올랐으며, 1603년에 이르기까지 영국과 영국 성공회를 개신교 쪽으로 이끌어 갔으나 어느 한 쪽으로도 과도하게 흐르지 않았다. 종교 개혁이후의 종교대립을 막기 위해 엘리자베스 1세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간의 극단을 피하는 중용노선(Via Media)을 걷기 시작했으며, 이에 반발한 청교도들이 발생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여러 번의 반대를 물리치고서 4월 29일 여왕의 영국 교회 지존법을 통과시켰다. 이렇게 해서 모든 성직은 여왕에 종속되었다. 이 권한을 바탕으로 영국 교회 통일법을 통과시켰다. 그래서 성직자의 복장과 교회의 장식을 비롯한 모든 것을 통일시켰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63년 두 번째 의회 소집으로써 제2차 통일령을 통과시켰는데 이번에는 훨씬 더 종교 개혁을 강하게 추진하였으며, 많은 점에서 칼뱅 유형의 개혁 교회 형태로 기울어져 갔다. 에드워드 6세의 42개 조항을 39개 조항으로 개정하였다.

그러나 1563년 두 번째 의회는 영국 성공회의 통일법을 가지고 분열을 초래하였으며, 청교도 측의 패배로 끝났다. 교황청은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시켰으며 여기에 맞선 엘리자베스 1세는 반 교황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1585년 예수회 사람들을 영국에서 강제로 추방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무찌름으로써 교황권과 로마주의로부터 영국을 보호하였으며, 동시에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써 화려한 대영제국 건설의 기초를 마련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 종교 개혁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실천이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국 성공회는 신학적으로는 개신교의 영향을 받았으나, 예전과 신앙은 초대교회의 그것을 따르고 있다.

출처 : 둥근달
글쓴이 : 둥근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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