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배경과 선구자들-정준기 교수
종교개혁은 서양사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에 지대한 영향력을 준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중세 유럽의 방황, 즉 정부의 혼란 · 대중 교육의 결여 · 전반적인 미신숭배가 정리되고, 계몽된 믿음의 삶이 열리게 되었다. 개혁자들의 정열적인 주장과 설득에 따라 교권주의가 도전 받고, 그 대신 만인제사장주의가 표출되었다. 만인제사장주의란 사제에게나 교회 전통에 의존하지 않고, 세계와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구속자이신 유일한 하나님과 그의 계시로 기록된 성경 말씀만을 의지하여 개개인이 하나님과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을 수 있다는 뜻이다.
루터를 위시한 개혁자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를 설파하고, 특히 믿음으로 칭의 되는 성경적 원리와 이 원리를 정립한 사도 바울과 성 어거스틴의 신학을 재발견하였다. 이러한 칭의 교리는 중세의 세계관―한 교회, 한 신앙, 한 세례―밑에서 포괄적 국가 종교로 군립한 로마 카톨릭에 대항했을 뿐만 아니라, 중세의 성속(成俗)의 이원론을 붕괴시켜 모든 직업이 거룩하다는 새로운 직업관을 탄생시켰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개혁이야말로 참으로 근대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장은 종교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과, 종교개혁의 신학적 기반을 제공한 선구자들을 선별하여 거론하고자 한다.
Ⅰ . 종교개혁 배경
1. 정치적인 면
교황의 명령과 권위보다 국왕들의 관심과 권위에 의해서 그들의 직무를 수행할 독립 국가들이 형성되었데, 이들은 교회 주권 중심에서 국가 주권 중심으로 권력의 핵심을 이동시켰다(국가주의의 등장).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은 명확한 지리학적 경계선을 갖고 있었고, 자국어로 대중을 통합시키는 공통된 의식을 제시했으며, 지방의 영주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중앙집권적인 권력 구도를 확립하였다.
영국의 경우, 경쟁적인 귀족들간에 벌어진 장미전쟁(1453)은 영국을 피로 얼룩진 무질서의 상태로 몰아갔으나, 1458년 헨리 7세가 대중들의 불만을 해결하고 봉건 세력을 타도하면서 튜터왕조를 확립했다. 헨리 8세는 신실한 카톨릭인 아내 캐더린이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자, 로마 교황 클레멘트 7세에게 이혼을 청구하였다.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챨스 5세의 고모인 캐더린이 이혼을 당하면 이탈리아가 유린당할 것이라는 공포심 때문에 헨리는 이혼을 거부하였다. 과거부터 로마 교황의 전횡에 반감을 가졌던 헨리는 이 때의 절호의 기회를 삼아, 영궁르 로마 교황청의 세력으로부터 독립시켜 버렸다. 1533년 영국은 교황에게 하는 항소를 금하는 항소제안법령(Act in Restraint of Appeals)을 통과시켰다. 이 법령의 전문을 보면, “영국령은 제국이니 … 이 제국은 … 왕위와 위엄을 가지신 최고의 수장인 국왕에 의하여 통치된다. 그 영적 · 세속적 상태에 따라 각종 계급으로 나뉜 국민들을 총괄하는 정체는 오직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우선 국왕에게 있고, 따라서 국민들은 마땅히 국왕에게 겸손하게 복종할 의무가 있다.” 헨리는 이어서 자신이 임명한 크랜머 대주교 입회하에 캐더린과 이혼하고 앤블린과 결혼했음을 공포했고, 1534년에는 정식으로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반포하여 영국 교회에 대한 국왕의 통수권을 규정하였다.
스페인은 오랫동안 무어족들을 그 땅에서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치렀다. 1469년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와 카스틸의 이사벨라가 결혼함으로써 스페인은 국가주의의 초석을 깔게 되었다. 이 후 스페인의 국가적 영광과 권력은 신성로마제국의 챨스 5세이기도 했던 챨스 1세(1516-56) 치하에서, 또한 필립 2세(1556-98)의 영도하에 획기적으로 신장되었다. 그러나 챨스가 통치했던 영역은 너무나 광범위했다.
독일은 명칭상으로는 신성로마제국의 통치 영역이었지만, 실제로는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황제는 세습제가 아닌 지역의 선제후들이 뽑는 선거제에 의해 선택되었다. 선제후들을 위시한 각 지역의 왕자들은 거의 독자적인 자치권을 행사했는데, 독일 연방에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가 생길 때는 제국 의회가 소집되었다. 챨스 5세 황제는 이러한 제국 구조 속에서 그가 가진 “한 황제, 한 교회, 한 국가”의 이념을 달성하려 하였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처럼 그는 처음부터 어려운 문제를 봉착해 있었던 것이다. 황제는 카톨릭 신자로서 루터와 같은 개혁주의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제후들의 협력 없이는 루터를 처리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제후들의 협력 없이는 루터를 처리할 수 없었다. 1521년 4월 18일 “저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며, 철회할 수도 없습니다. … 제가 여기 섰으니, 하나님이여 도우시옵소서. 아멘!”이라고 말하는 루터의 말을 듣고도 황제는 루터를 즉각 처형하지 못했다. 단지 “그 녀석이 아무리 지껄여도 나를 이단자로 전향시킬 수야 없지!”라고 말할 뿐이었다. 물론 루터는 교황과 챨스에 의해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선포되었지만, 독일 국민들과 제후들, 특히 선제후 프레드릭의 비호를 받고 있는 루터를 황제는 함부로 손댈 수가 없었다. 챨스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챨스는 합스부르그(Habsburg)가의 태생으로 당시의 독일, 스페인,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부르군디, 알사스, 카스틸, 아라곤, 나폴리, 시실리와 스페인의 해외 식민지까지 차지한 대제국의 군주였다. 그는 이 대제국을 지키기 위해 일생 동안 투쟁해야만 했다. 그의 앞에는 날로 강성해가고 있는 프랑스와 영국이 있었고, 배후에는 강력한 통치술과 종교로 위협하는 이슬람의 오토만 터키인들이 있었다. 황제가 제국에서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형성하려면 제국에 남아서 이일을 도모해야 했었다. 그러나 1521년부터 1530년까지 루터의 종교개혁의 불길이 유럽에 급속도로 확산되어 가고 있을 가장 중요한 때에 황제는 독일을 떠나 있어야 했다. 프랑스와의 전쟁 및 오토만 터키와의 전쟁을 치루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이러한 민족주의의 발홍과 전쟁 중에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파하였다.
2. 경제 · 사회적인 면
십자군 운동 이 후 봉건사회는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고, 농업 경제가 상업 경제로 옮겨지는 과도기에서 사회의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지리적 발견으로 세계 무역이 가능해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곧바로 부의 분배에 있어서 변화가 뒤따랐다. 자본주의적 질서의 융성과 함께 부자와 가난한 자가 생겨났으며, 도시 내의 무산자 계층도 형성되었다. 이 계층은 농촌 지역에서 몰락한 불만 세력을 유입하였다. 부의 증대, 사치 생활, 도덕적 타락은 16세기 초반 25년 동안 도시 생활에서 절정에 달하게 되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부유한 도시민과 가난한 노동자 사이에는 증오심이 심화되었다. 결국 경제의 불균형적 성장이 정치 위기를 조장하였던 것이다.
3. 문화적인 면
르네상스(Renaissance, 약 1350-1650) 운동은 유럽의 지적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이 운동은 그리스 · 로마(Greece · Roman) 시대의 고전 문화를 연구하는 것을 시발점으로 하여 나중에는 모든 “근원으로 돌아가자”(Ad fontes, 원래의 자료들로)는 운동으로 발전함으로써, 문화의 전 영역―건축, 그림, 조각, 문학, 철학, 종교 등―으로 확대되었다. 이 운동의 부정적인 영향은 하나님 없는 인본주의를 진작시킨 것이다. 인간들이 그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관심의 영역은 초자연에서 자연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 결과 신학의 비중이 약화되고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비중이 높아지게 되었는데, 북유럽 대학가는 인문주의의 온상이 되었다.
긍정적으로는 고전 연구를 통하여 성경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켰다. 에라스무스는 여러 종류의 성경 사본을 교부들의 저술과 비교하면서 헬라어 신약성경을 편집하였다. 영국 개신교첫세대 지도자이며 후에 순교한 틴데일(William Tyndale, 1495-1536)은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과 루터의 독일어 성경에 의존하여 1525년 훌륭한 영어 성경을 출판하였는데, 이 성경은 1526년 영국으로 유입되었다. 스페인의 추기경크시메네스는 히브리어-헬라어-아람어-라틴어 대역 성경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성경 원전의 출현으로 로마 교황청의 교리 체계는 비판되기 시작하였으며, 르네상스로 말미암은 새로운 학문열은 교부 신학자들의 저서와 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 연구를 가속화하게 함으로써 결국 종교개혁의 사상적인 면을 제공하게 되었다. 유럽의 인문에 붙인 라틴어로 된 95개 조항을 몇 주 안에 독일어로 번역하여 신성로마제국 방방곡곡에 돌렸다. 확실히 루터는 그의 종교개혁 초기에 인문주의 집단으로부터 정신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들과 루터는 순수 근원을 찾는 관심, 스콜라 철학에 대한 염증, 전통 종교의 탈선과 부패에 대한 비평, 그리고 교육의 부흥이란 측면에서 같은 사상을 표출했던 것이다. 바젤의 인문자의자이며 출판업자인 프로벤(Johannes Froben)은 루터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 내가 출판한 당신의 전집 600권을 프랑스와 스페인으로 발송했습니다. 이들은 파리에서 판매되어, 솔본느에서 읽히고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파비아(Pavia) 출신의 서적 도매상 클라부스도 상당한 양을 이탈리아 전역의 도시들에게 팔기 위해 가져갔습니다. 영국과 브라방 지방에도 이들을 발송하였으며, 현재 재고는 10권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 학식이 높은 사람들일수록 당신을 더욱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나타난 서책들은 활자체의 발명과 인쇄술의 발달로 필사본의 하자를 제거하고 원문에 충실할 수 있었다. 저렴한 가격의 서책들은 급속히 사회 비평의 도구가 되었다. 1518년에서 1523년까지 비텐베르그 지역에서만 600여 종의 서책이 출판되었고, 같은 시기에 영국에서도 300여 종의 인문 · 종교 서적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루터 추종자들인 인문주의자들은 에라스무스를 필두로 루터에게서 돌아섰다. 루터가 독일 남부의 농민 반란(1524-25)에 대해 무력 진압을 주장한 것, 인간의 합리적 정신보다 성경과 믿음만으로의 주장, 그리고 <교회의 바벨론 유수, 1520> 등에서 로마 교회에 대한 과격한 공격에 대해 인문주의자들은 반발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일부 성경적 인문주의자들은 오히려 더 열렬히 루터를 따르게 되었다. 부겐하겐(Johannes Bugenhagen of Pomerania, 1485-1558)은 루터의 <교회의 바벨론 유수>를 읽고 감동하여 1522년 비텐베르그로 달려왔다. 그는 곧 루터의 동역자가 되어 1523년 비텐베르그 시의 목사로 봉직하면서 인근 도시인 부른스벅, 함버그, 뤼�에 루터교회를 세웠고, 1537년에는 덴마크에 루터교회를 소개하였다. 그밖에 바젤 대학 교수인 카피토(Justus Jonas), 도미니칸 수도사였다가 나중에 스트라스부르그 종교개혁자가 된 마틴 부처(Martin Bucer)도 루터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4. 종교적인 배경
교황청의 권위는 오랫동안 불신임을 받고 있었다.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에 이주한 사건(1309-77), 로마 교황청과 아비뇽 교황청 간의 오랜 대분열(1378-1417)은 교황청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게다가 교황의 부패와 타락은 날로 가속화되었는데,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요한 22세는 각종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유명하였다.
둘째, 알렉산더 6세가 성직자의 축첩제도를 제도화하자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98)는 이를 반대했다. 그러자 교호아의 사보나롤라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처형시켰다. 사보나롤라는 이탈리아의 페라라(Ferrara)에서 출생하여 인문주의와 의학에 심취하다가, 이러한 추구가 덧없음을 깨닫고 1474년 도미니칸 수도사가 되었다. 그의 열정적인 설교와 경건 생활은 플로렌스(Florence)시에 영향을 주었고, 1491년 플로렌스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았다. 그는 카톨릭에 잔류하면서 개혁을 부르짖었다. 공정한 세금 부여, 빈민 구제, 시정의 공정 무사한 행정 처리와 깨끗한 법정이 플로센스에 일시적으로 찾아왔다. 그는 교황청도 플로렌스와 같은 개혁이 이루어지기를 염원하여 교황에게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였다. 교황은 플로렌스 시민 전체를 종교재판에 넘겨 파문하겠다고 위협하였고, 여기에 놀란 플로렌스 시민들은 사보나롤라를 교수형에 처하고 말았다. 사보나롤라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로 시민들을 사로잡아 때로는 그들에게 가혹하리만큼 엄격한 윤리를 요구했다. 이탈리아 개혁을 위해선 외국 군대(특히 블란서)의 협조도 사양치 아니했으며, 교황을 탄핵할 때는 공격적이었다. 그는 교황 외에도 플로렌스의 지배층 시민과 프란시스파 수도사들에게도 과격한 인물로 주목받아 그의 개혁은 중도에 멈추고 말았다.
셋째, 레오 10세는 사냥과 오락을 즐기는 도박꾼이었다.
넷째, 속죄권 판매 외에도 성직 판매가 성행되었고, 신부들의 해이하고 문란한 독신생활은 사회적으로 많은 지탄을 받았다.
다섯째, 양떼들을 돌보는 교구 담당 사제가 부재시(不在時)에는 그 지역의 세금까지도 교황청이 차지하였다.
스콜라 신학의 붕괴도 종교개혁 이전의 중요한 종교현상이었다. 이 말은 중세시대의 사상적 지주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 유명론 등에 의해 붕괴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유명론(nominalism)은 로스켈리누스(Roscellinus)에서 시작하여 피터 아블라, 오캄 같은 신학자들에 의하여 발전되었다. 유명론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전체로서가 아니라 개체적이고 구체적인 통로를 거쳐 구원 문제를 설명하려 했다. 중세의 실재론은 전체적이고 보편적 교회인 카톨릭을 지지한다. 그러나 유명론을 따르면 존재 기반의 중심점이 카톨릭의 전체보다도 개체로써의 지교회로 옮겨진다. 더 나아가서는 만인제사장의 이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후기 스콜라 신학은 그 자체의 무리한 신학 체계와 지나친 교리의 복수화로 복음의 본질을 오도했다. 그것은 또한 형식적인 예전주의와 미신적인 신앙을 조작하여 성도들에게 가중된 죄책감을 유도했다.
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남: 중세 교회의 제도화와 교회 생활의 의식화에 따라 신앙생활의 활력을 찾으려는 신비주의적 경건운동이 벌어졌다. 신비주의적 경건운동은 대중들을 탈교회화는 데 이바지하였다. 독일 신비주의는 라틴적 사상에 대한 불만의 표시임도 아울러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카톨릭의 내부적인 도전: 프랜시스 수도원 수도사들의 일부는 교황청의 무절제를 비난했고, 이탈리아 법률가인 마르실리우스(Marsilius of Padua)는 교회의 재원은 국가가 통제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교황 등 성직자의 비행을 탄핵했다.
경건운동: 종교개혁 전야의 종교 상황을 고찰하면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성직자의 부패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평신도들의 신앙은 중세 어느 때보다도 고양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역사가들은 종교개혁이 발발하기 1세기 전에 유럽 전반에 걸친 종교적 열정이 홍기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물론 흑사병의 공포와 터키 이슬람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이 종교심의 증가를 부추긴 것은 사실이나, 일반적인 평신도의 종교적 영성 또한 고양되어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캔터베리, 스페인의 콤포스텔라 등지의 성지순례와, 병사들의 수호자로 인정된 성 죠오지(St. George)와 성 마틴(St. Martin), 정원사를 후원한다는 성 도로테아(St. Dorothea), 마리아의 어머니 성 앤(St. Anne)과 같은 성자숭배, 그리고 마리아 숭배가 열기를 띠었다. 새로운 기도문과 묵주(rosary) 사용도 인기를 끌었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뜨거웠고, 어느 누군가가 설득력 있는 영적 방향을 제시하면 즉각적으로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교회 지도부내에서는 이러한 군중을 지도할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다. 독일 시민들은 이름이 없으나 영적이고, 소박하면서도 강력한 언어를 구사하는 루터가 나타났을 때 환호하였는데, 이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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