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유산 - 미래를 위한 약속?


 
크리스토프 슈뵈벨 튀빙엔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종교개혁의 신학적 유산을 상고하려면 우선 종교개혁이 새로운 고백을 하는 교회를 설립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그것은 기독교 전체를 개혁하려는 의도였지, 루터가 루터파 교회를 세우려 한 것이 아니었고, 캘빈이 캘빈주의의 시조가 되려 한 것이 아니었다. 개혁자들의 목표는 기독교 전체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중세 말에 그들이 경험한 기독교는 초대교회의 원 기독교대로 다시 만들어지고 재형성되어야 했다. 개혁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들이 나타난 것은 교회 개혁의 소명을 소위 구교 신자들이 보편적으로 따르고 있지 않을 때였다. 구교 신자들은 기존 가톨릭교회의 교리 구조와 경건함, 교회 조직을 유지하기 원했고, 개혁의 요청을 거절했으며, 대신 로마 교회의 제도적 형태를 안정시키고 강화시키려 했다.
루터에게는 분명한 사실이 있었다. 유일하고 거룩하며 보편적인 기독교 교회는 지상의 모든 신자들의 회중이라는 것이었다. 개혁자들이 문제로 여긴 것은 그동안 존재해 온 교회에 참 신자와 위선자들이 섞여 있다는 것이었다. 교회는 교리적으로 바벨론 포로 상태에 있었고,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없는 교회 조직에 갇혀 있었다. 거기서 벗어나는 것은 교회 개혁의 한 방법으로 되지 않았다. 중세에도 교회 구조를 개혁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해방이 이뤄질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구원의 유일한 근거로 다시 지향하는 것이었다.
개혁(Re-formation)이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화한다는 것은 영성 형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따르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토머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는 그것을 알았다. 그리스도의 삶의 패턴을 모방하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존재의 패턴으로 화해 가는 수동적인 과정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와 합치되는 것이 중심이 되어 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 엄밀히 말해서, 개혁은 인간 활동의 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통하며, 하나님의 행하심을 접할 때 겪게 되는 경험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수동적으로 다루어지는 경험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향해 방향을 조정하게 되는 모든 인간 행동의 원천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유산을 이해하려면 개혁자들 안의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그 시작이다.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교회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공적인 사회생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참여에 관한 그들의 관점을 재구성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운동
종교개혁의 유산에서 첫째가는 중심 요소는 하나님 말씀의 재발견이다. 루터는 베드로전서 해석에서 하나님 말씀의 특징을 ‘설교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한 절규이며, 그 은혜와 자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위해 만들어지고 얻어진 것’이라고 묘사한다. 거듭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구두(口頭) 소통 행위의 특징을 갖는다. 살아있는 말씀이 인간의 말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한다.
그리스도 재림의 핵심은 하나님 말씀의 역사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공개적으로 선포될 것이다. 그것은 직접 구두로 전해질 것이다. 그 말씀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역사의 정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의 정점인 이유는 하나님과 그 백성 이스라엘의 관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만백성에게 열리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관계에 참여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하나님 말씀의 내용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하신 역사이다. 그것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으로 인해 깨진 관계를 회복시키셨다는 기쁜 소식이다. 중요한 것은 개혁자들이 하나님 말씀의 내용과 형식을 분리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오심의 핵심은 복음의 지속적 선포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복음이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의 약속으로서 만민에게 선포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에서 정점인 그리스도의 삶의 증거를 보면 하나님 말씀의 지속적 선포로 나타났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만 전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달 형식과 분리된 주제에 대한 참된 진술들만이 아니라, 소통의 내용과 형식이 굳건한 연합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말씀의 약속으로 세상을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창조하는 실체가 그 내용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의 용서에 대한 정보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의 용서를 약속하시고 실제로 용서해 주신다.
따라서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임재의 형태로 이해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임재하신다. 말씀을 구두로 설교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청각적 형태로 임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설교 행위를 이용하셔서 인간의 설교 속에 임재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와 성례의 말씀 안에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나타내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셨고, 영원한 말씀이 인간의 말이 되셨는데,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계속된다. 그 증거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속 거하신다. 그 성육신은 인간의 소통 수단이 성화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소통적 임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가 소통적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처음에 잠잠하시다가 나중에 말씀하기 시작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존재하시는 것과 말씀하시는 것이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루터는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의 삶을 지속적인 대화로 묘사했다. 그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하나님을 대화로 이해하는 것은 존재론적 진술이다.
 
1. 율법과 복음으로 주어진 말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하나님의 의사소통과 별개로 인간을 정의하려는 모든 시도는 헛될 뿐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주장하려 한다면 그 시도는 산산이 무너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자가 모든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창조자의 말씀에 대항하여 피조물이 자기주장을 하려는 모든 시도는 무의미하고 공허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과 복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율법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계명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복음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고, 무엇을 하고 계시며, 무엇을 하실 것인지 약속한다.
개혁자들이 매우 분명히 인식했던 것은 우리 자신의 독립적인 의지나 독립적인 존재에 근거해, 우리 자신의 수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따를 수 없다고 하나님의 말씀 중에 율법이 계시한다는 것이었다. 율법은 인간이 자기주장을 하려는 모든 시도의 헛됨을 드러냄으로써 그것을 정죄한다. 율법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모든 시도가 무의미함을 드러낸다. 창조자 하나님을 떠난 피조물은 아무것도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과 친교하는 인간의 존재를 약속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복음은 존재를 소통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되는 것의 무가치, 인간의 자기주장의 무가치를 극복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교이다. 우리가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가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건의 결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피조물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럴 자격이 있어서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적이어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하신다. 따라서 사랑이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모든 존재의 원천과 질서와 에너지인 하나님과의 친교 안으로 우리를 이끎으로써 소통하신다.
 
2. 믿음을 창조하는 말씀

개혁자들의 관점에서, 믿음은 하나님 말씀의 약속에 대한 실존적 신뢰로 이해된다. 믿음은 일차적으로 앎의 형태가 아니다. 믿음은 무엇보다도 존재,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존재의 형태이다. 신뢰로서의 믿음은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존재하는 용기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무조건적 신뢰로서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소통되는 존재에 대한 절대적 의존 행위이다. 그것에는 앎도 포함된다. 믿음의 신뢰로 하나님을 무조건적으로 의존하는 것에 함축된 것은 다음과 같은 믿음의 지식이 있다. 그는 우리를 무에서 부르셔서 존재하게 하시고, 둘째로, 그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창조자를 대적하여 허무해진 타락한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화목케 하는 자이시고, 셋째로, 하나님은 피조물들과의 친교를 완전하게 하시려고 화목케 된 피조물들을 하나님의 영생에 참여시키신다.
개혁자들에게 믿음은 인간 마음의 변화이고, 인간의 핵심, 곧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의 변화이다. 캘빈(J. Calvin)은 이 과정을 「기독교 강요」 2권에서 필요한 만큼 자세히, 신학적으로 썼다. 독자적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 변화되어 무조건적 신뢰로 하나님과 관계하게 된다. 마음이 매여 있는 곳, 바로 그곳이 정말로 어떤 사람의 하나님이라고 루터는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을, 루터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에게 존재를 약속하시는 참 하나님께 매이게 한다.
개혁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성경 말씀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과 분리시키려는 광신의 유혹을 거부한다. 복음서에서 전달하는 내용은 직접적 영감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성경 해석 속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단순한 질문이 개혁자들에게 완전히 정확하진 않았다. 성경 말씀이 약속으로 선포되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성경 말씀의 진정성을 입증하실 때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된 글이 아니라, 항상 살아있는 의사소통의 행위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독교 신앙을 구성하는 요소,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의 특징적 요소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시공의 특정한 사건 안에서 행동하시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 특별한 방법으로 세상과 관계하신다. 그 특정하고 특별한 것들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하실 때,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말씀하신 특정한 사건들 속에서 이스라엘에서 어떻게 행하시고 말씀하셨는가는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정체성의 한 요소이다. 하나님의 정체성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라는 일시적 행하심과 연관된다. 하나님의 일시적 말씀과 행하심의 사건들이 하나님의 정체성을 정의한다.
그리스도 사건이 결정적인 것은 종말론적 최후성과 그에 따른 반복 불가성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구원이 단번에, 영원히 달성되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반복될 필요가 없고 반복될 수도 없다. 다른 종교들에서는 중심 되는 구원의 사건이 거듭 반복될 수 있어서, 가령 어떤 종교에서는 새해가 시작되는 등 시간 사이클이 돌아오면 반복하는 반면에, 기독교의 구원 사건은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반복되지 않는 사건에 대한 증언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정체성이 이야기의 세부 사항들과 관련되므로 그 증언은 세부 사항들을 담은 기록된 증언이어야 한다. 그 세부 사항들을 보편적인 진리들로 바꿀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세부적 이야기가 설교로 선포되게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통하신 이야기를 보편화하신다. 따라서 말씀의 내용이 성경의 증언에 담겨 있고, 하나님의 정체성이 성경 증언에 보존되어 있으므로, 성경 해석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부름 받았으므로 성경 말씀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접근 가능해야 한다. 모든 신자들이 제사장이므로 성경 말씀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손에 있어야 한다. 그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를 소통한다.
 
말씀의 피조물: 믿음의 사회적 형상인 교회

하나님 말씀의 재발견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개혁의 유산의 첫 요소라면, 교회가 하나님 말씀의 피조물임을 이해하는 것은 둘째 요소이다. 개혁자들이 보는 교회의 핵심은 특정한 제도적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교회 내 직위의 위계질서로 정의되지 않는다. 교회가 존재하게 된 것은 구체적 소통 과정을 통해서였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 교회의 시작, 존재, 그리고 끝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 안에 존재하는 공동체이다. 루터는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 없이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 없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교회는 매우 특수한 형태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소통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교회는 소통의 문화로서, 하나님의 말씀 선포 덕에 존재하게 되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다시금 존재를 받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선포에 초점을 맞추는 공 예배와 성례의 시각적 언어를 통해 드려지는 소통 행위는 교회의 생명의 원천이다. 개혁은 종교적 개인주의가 진리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발견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인간 각각에게 말씀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은혜의 말씀, 용서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소원해 있는 우리 개인 각자에게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개인적인 것은,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가 지적했듯이, 우리를 하나님과 다른 인간들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죄는 항상 우리의 삶에서 가장 개인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의 말씀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 우리와 동료 인간들의 관계를 회복시킨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의 공동체인 교회는 첫째, 용서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의 특징은 종교적 개인주의일 뿐 아니라 종교적 사회주의이기도 하다. 그 새로운 형태의 사회성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으로, 인간의 의사소통과 사회성을 새롭게 구성함으로써 창조되었다.
그러나 이 의사소통의 공동체는 소통하는 내용으로, 다른 공동체들과 구별된다. 따라서 교회는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의 지평에 해석하고, 세상을 하나님 말씀의 지평에 해석하는 해석 공동체이다. 교회는 성경 말씀을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다. 개혁자들에 따르면 성경의 증거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소통되는 방법이므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진리가 우리를 위한 진리의 약속일 수 있다는 기대 속에 성경에 접근한다. 기독교 공동체가 성경 말씀을 해석하려 시도할 때마다 당황스러운 발견을 한다. 즉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성경의 증언을 해석하려 할 때마다, 성경이 우리를 읽고 우리의 삶을 해석하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성경을 해석할 때 해석자의 역할과 해석의 대상이 뒤바뀐다. 우리는 성경으로 해석되는 대상이 된다. 기독교 교회가 해석의 공동체라는 것은 교회가 성경을 해석하려 할 때 교회의 삶이 성경에 의해 해석된다는 것을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개혁자들이 또한 강조한 것은 복음의 지평 안에서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교회의 특징이 정해진다는 것이었다. 캘빈은 우리가 성경의 안경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 한, 세상을 올바로 해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그 안경을 쓰면 우리의 세상을 훨씬 더 분명하게 잘 볼 수 있다. 성경 해석은 세상을 해석하기 위한 진단적 도구가 된다. 우리 기독교 교회는 세상을 해석하기 위해 다른 훈련들을 차용할 필요가 없다. 루터 당시에 그 다른 훈련들이란 철학이었고, 우리 시대에는 사회학이나 심리학의 방법을 차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의 안경을 통해 세상을 읽는 것은 현실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진정한 방법이고, 이 틀을 통해 우리는 심리학이나 사회학에서 배우는 것처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시대와 상황을 성경을 통해 해석하는 것은, 개혁자들이 만든 교회에 대한 필수적 이해의 임무이다.
그러나 그 해석은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교회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널리 선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가장 참되게 존재하는 것은 교회의 담을 넘어설 때이다. 교회가 담 안에 갇혀 있다면, 복음 진리의 보편성에 의문을 갖게 할 위험이 있다. 구체적인 의사소통의 내용을 받는 의사소통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행동의 공동체로서 존재가 표현된다. 하나님 말씀의 구체적인 내용이 있고,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설교와 외침’이라는 사실이 교회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운동’으로 이끈다.
여기서 개혁자들이 ‘선행’의 의미가 무엇인지 새로 해석했던 것이 큰 의미를 갖는다. 종교개혁은 중세 교회가 가졌던 선행의 개념을 혹독히 비판했다. 우리는 선행으로 하나님과 관계하지 않는다. 우리는 선행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온전히 은혜일뿐이다. 그것은 순전히 받는 것이다. 은혜는 무조건적이므로 선행이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조건이 될 수 없다. 이것은 무조건적인 약속의 의사소통 형태로 표현되는 복음의 내용이다.
따라서 선행에 대한 이해가 급격히 달라진다. 우리는 선행으로 하나님과 관계하지 않는다. 우리가 선행으로 관계하는 것은 은혜와 자비가 필요한 세상과 이웃이다. 선행의 방향을 세상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개혁자들이 강조한 것은 선행이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운동의 일부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세상에 전하신다. 따라서 항상 디아코니아(diakonia)는 의사소통과 성경 해석의 공동체 코이노니아(koinonia)인 교회 존재의 한 측면이다. 이것은 개혁의 유산 세 번째 특징으로 이어진다.
 
공적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의 삶: 자유와 섬김

종교개혁의 특징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종교적 삶에만 바쳐진 수도원처럼 특별한 공동체 속의 세상과 단절된 삶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개혁자들에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 수도사와 수녀가 특별한 지위를 갖지 않고,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특별히 접근할 수 있지 않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 소원해져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으로 동등하게 다루어진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과 분리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 안의 세상 속에 있다.
세상 속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은 그 논리가 세상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의 논리에 규정되지 않는다. 세상의 논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가치를 사회 속의 지위나 사회생활 속의 성취로 규정하는 논리이다. 개혁자들은 복음의 재발견 속에서 세상 논리의 기본 법칙에 의문을 제기했다. 세상의 논리에 따르면 한 인간은 하는 일과 성취한 것으로 규정된다. 그것은 성공의 논리이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이나 무능력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논리는 다르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하는 일로 하나님 보시기에 은혜와 인정을 받을 만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취에 근거해서가 아니고, 우리의 일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일에 근거해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세상을 구원하신 ‘성취’에 근거해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에게 그의 은혜를 값없이 약속하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들을 은혜로 사랑하시는 능력은 우리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는 무능력을 능가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특징은 노력으로 얻을 필요가 없고, 값없이 약속된 자유이다. 우리는 스스로 노력해서 인정받으려는 모든 시도로부터 해방된다.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으로 은혜롭게 우리를 인정하시고, 가치와 소중함을 값없는 선물로 주신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해방시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자유로운 지배자로서,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말했듯이, 세상의 삶을 하나님께 공로를 인정받아야 할 장으로 보는 데서 해방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공로가 있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의 이 해방과 자유는 세상 속에서 세상을 위해 섬김으로써 실행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만인을 위해 순종하는 종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시각에서 세상을 보면, 세상의 모습이 바뀐다. 더 이상 세상을 공로를 세우기 위한 노력의 장으로 볼 필요가 없고, 세상을 위해 봉사하며 자유를 구가할 수 있는 장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세상의 필요를 인식할 수 있게 해 준다. 왜냐하면 세상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한 도구가 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관점이 그런 구체적 실재성을 열어 준다. 세상의 모든 활동 영역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측면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위한 활동의 장이 될 내재적 가치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하나님의 은혜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오용하지 말아야 할 소명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필요에 부응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의 도구가 되도록 부름 받았다.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실행은 특정한 직업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특정 활동 영역에만 국한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모든 직업과 모든 활동 영역에서 실행될 수 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실행할 구체적 일은 세상의 필요에 따라 정해진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의 종교적 가치를 따지지 않고, 세상을 자유 안에서 섬길 수 있다. 따라서 개혁자들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세상을 위해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느냐이다. 세상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섬김이다.
  
크리스토프 슈뵈벨(Christoph Schwoebel) 독일 마르부르크대학교를 나와 동 대학교와 런던대학교, 킹스컬리지, 키엘대학교,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등에서 조직신학 교수를 역임했고 지금은 튀빙엔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와 해석학 및 문화 간의 대화연구소 소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