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신대 신학 교수 교실/박충구 교수 교실

박충구 교수 칼럼 - 세월호와 한국교회

류성련 2014. 11. 2. 23:34

박충구 교수 칼럼 - 세월호와 한국교회

오래전 한신대 대학원에서 한 학기 강의를 부탁받아 출강한 적이 있었다. 첫 강의를 하기 위해 수유리 한신 교정을 들어섰을 때, 한신대 대학원 가을 퇴수회 현수막에 쓰여 있는 표어가 눈에 들어왔다. “예수 그는 누구신가?” 신학대학 대학원생들이 “예수가 누구신가?”라는 질문을 내심 다시 해야 하겠다는 뜻이었으리라. 이 질문에 대해 손쉬운 답을 찾으려면 우리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억하면 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한신대 대학원 학생들은 이것을 몰라 다시 묻고 있었을까? 요즈음 내 가슴에서 무수한 질문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국가란 무엇인가? 대통령이란 무엇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목사란 누구인가? 그리고 이 글을 읽는 그대의 예수는 누구신가?’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가 하고 싶은 것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번번이 종용받아왔다. 아니 우리는 존중과 사랑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 자신이 원하는 존중이나 사랑이 아닌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중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으로부터 모욕적인 언사나 매나 따귀까지 맞은 이들도 부지기수 있었으니. “해라. 말아라. 공부해라. 밥 먹어라. 일어나라. 일찍 자라” 등등. 하여 어린아이 시절부터 우리는 여간해서 진정한 우리 자신으로 살기 어려웠다. 심지어 대학의 전공을 선택하거나 결혼 상대를 선택할 때에도, 신혼집을 마련할 때도 자신이 아닌 외부의 결정이 깊이 개입한다. 주변의 권유나 명령에 익숙한 우리는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자유를 상당 부분 박탈당해 온 셈이다.
지난 4월 제주도 뱃길에서 세월호에 타고 있었던 아이들이 기울어져 가는 배 속에서 들었던 마지막 말도 “가만히 있어라!” “조용히 하라!”는 명령이었다. 좋은 학생, 말 잘 듣는 학생들은 아마도 그 순간에 순종적으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을 것이다. 많은 아이는 자기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어른들이 요구하는 대로 순종하고 따랐다. 신앙이 좋아 권위에 복종하기를 잘하는 기독학생들은 아마도 더욱 조용히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 많은 이들이 세월호 사건은 지난 일이니 이제 잊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내게 세월호 사건은 우리를 향하여 명령하는 권위체제에 대하여 근본적인 의심을 불러오게 하는 항구적인 사건이다.
왜 그들은 가라앉는 배에서 “가만히 있어라”는 요구를 받게 된 것일까? 추측건대 위기의 순간에 가만히 있을 것을 요구한 자들은 아마도 수백 명의 생명이 위기를 인지하고 생사를 향한 필사의 탈출을 시도할 경우 일어날 혼란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질서만 아는 이들은 자신들의 통제에서 벗어난 집단이 불러오는 혼란을 두려워한다. 더구나 오랜 군사독재 하에서 일사불란함을 요구하는 군대문화에 깊이 오염된 우리 사회 특성상 권위와 지시에 복종하는 데 익숙했던 이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선원들의 지시에 따라 행동했을 것이다. 학생들만이 아니라 통제와 질서 편에 서 있던 선생님들은 아마 앞장서서 통제와 질서의 매개자가 되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 배에 타고 있었다면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가오는 위험에 대처해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할 줄 모르는, 권위를 가진 이의 명령에 복종하는 데 익숙한 우리 역시 아마도 차가운 물속에 수장됐을 것이다. 오직 가만히 있으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자신의 생명에 위기를 느껴 필사적으로 탈출한 이들만이, 그리고 다행히 탈출에 용이한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너무나 많은 어린 생명이 무책임한 어른들의 질서와 통제 때문에 희생을 당한 이 사건은 진도 앞바다의 비극만이 아니라 나는 우리 사회와 심지어 교회의 현실을 비추고 있는 거울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는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며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어거해 나가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거대한 체제 안에서 주어진 질서와 교리와 교조적 훈련에 길든 존재들인가?
대부분의 성실한 크리스천들은 질서와 복종에 익숙하다. 동시에 순종과 감사의 미덕을 예찬하는 신앙의 세계에서 거역과 저항과 반항의 의지나 주체가 거세당한 사람들이기 쉽다. 교회는 교리교육과 찬양과 예배에서조차 우리를 획일적인 일치에 익숙한 사람들로 만드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간혹 신앙적이라는 말은 체제 순응적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된다. 이렇게 길든 이들은 내외적인 혼란과 복잡함을 두려워한다. 비정상이라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어진 질서에 자신을 편승시킴으로 안주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히틀러 치하의 게슈타포들 역시 주일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고 교향악단을 구성해 하모니가 넘치는 클래식 음악을 즐기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주어진 질서에 복종하는 것은 미덕이었고 의무였다. 적어도 누렘베르크에서 재판을 받았던 아이히만은 그런 교양인이었다. 주어진 명령에 복종하는 의무에 충실했던 그는 주어진 질서에 맞추어진 인간, 탈 주체화된 인간이었다.
그런데 탈주체의 길은 사실 예수의 길과는 절망적으로 정 반대의 길이다. 이성복 시인의 시에 이런 말이 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참으로 무서운 표현이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이니 얼마나 무서운가? 세월호가 침몰하는 데 조용히 있었다는 말과 같이 무섭다. 한국교회를 한번 보자. 교회를 사고팔고, 부자간에 교회를 주고받고, 80% 이상의 목회자들이 주체적으로 설교를 준비하지 않고 남의 설교를 베낀다. 심지어 박사학위 논문조차 표절하고서도 수치와 부끄러움을 모른다. 어느 목회자는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을 제 것인 양 펑펑 쓰고, 부유한 기업가와 다름없이 거대한 차를 타고 다니며 위세를 떤다. 천문학적인 돈 선거를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교회법은 있으나마나해 법을 지키지 않는 선거로 인해 교단이 수년째 어지러운데도 아무도 아프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맘몬이 지배를 해도 아무도 저항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시를 써야 할 지경이다.
맘몬이 지배하는 배를 타고 있는 우리는 어떤 권위의 요구를 받으면서 신앙과 신학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인가? 어떤 이는 “아무도 아프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문화”에 오염되어 그리스도의 지배를 마몬의 지배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맘몬의 지배는 그리스도의 길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우리의 이기적 본능과 오만의 욕구를 통하여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가 이기적 본능에 복종하면 탐욕이 우리를 지배하고, 오만의 욕구를 받아들이면 부와 명예를 하나님의 축복인양 구하게 된다. 이기성과 오만에 빠지면 우리는 본능적 쾌락만을 선호하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된다. 이런 이들은 성직자가 되어도 성직의 외피만 걸쳤을 뿐 내면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 과연 예수가 우리에게 짐승의 길을 가르친 분이신가? 짐승의 길은 이기적 본능과 생리를 따를 뿐이니 신앙의 길이라 할 수 없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찾아와 말을 건넸다: “선생님은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동문서답하듯 대답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그러자 니고데모가 다시 물었다: “나는 이미 어른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모태로 돌아가 다시 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시인의 글을 빌어 이 논의를 이어본다면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다: “입으로 먹고 항문으로 배설하는 것은 생리며, 결코 인간적이라 할 수 없다. 사랑은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배설하는 방식에 숙달되는 것이다” 이기적으로 욕망하는 것, 그래서 거대한 교회를 세우고, 세습하고, 교회를 사고파는 것 그것은 본능이며 생리를 따르는 길이다. 그러니 그것은 거룩한 사역이나 신앙의 행위라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신학의 길, 신앙의 길, 성직자의 길은 이성적인 욕망 충족의 길이 아니다. 비록 앞에 “거룩”이라는 말을 붙여 교묘하게 거룩한 욕망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불러도 그것은 이미 거짓이며 위선이다. 신앙의 길, 신학의 길, 성직자의 길, 제자의 길은 욕망을 거꾸로 가지는 길이다. 예수께서는 모두가 가는 그 넓은 길을 버리고 좁은 길을 가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합리적 안전, 이성을 배려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에게 생리를 넘어서라고 요구하신다. 아비의 제사를 지내고 따르겠다고 했던 제자를 향해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하신 분이다. 그 대신 비이성적으로 낮아지고 겸비하여 고통을 겪는 이들과 동행하는 길을 몸소 가셨다. 십자가의 길이다. 부유하고 높아지려는 합리적 계산을 따라 동물적 생리를 따르는 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길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길은 위대한 사도가 되는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었다.
나는 광화문에서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징조를 본다: 단식하는 이들과 폭식하는 이들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합리성을 가지고 이해하기 어려운 천민처럼 빈한한 목회자들과 고뇌하는 평신도들, 그리고 귀족과 같이 부유한 목회자들과 묵종하는 평신도들이다. 광화문에서는 생명의 안전띠를 만들어 우리 사회의 생명을 지켜야 하겠다는 이들과 이들을 조롱하며 기존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 교회에서는 “우리가 모두 병들었다”고 외치는 이들과 “아무도 아프지 않다“고 외치며 ”조용히 하라”는 이들이 있다. 질서와 복종과 순응의 길에 익숙한 이들은 모두가 병들어도 “아무도 아프지 않으니 조용히 하라”고 한다. 심지어 세월호 안에서처럼 죽어가는 길에서도 그렇게 교사하는 셈이다. 우리는 어느 편에서 우리 사회의 미래를, 더 나은 우리 교회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을까?
신앙의 길은 “진리와 길과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편협한 종족주의에 빠진 유대교에 순응하지 않으셨다. 그는 맘모니즘의 장터가 된 성전을 정화하셨다. 그는 화려한 권위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획일화된 질서에 편승하기 위하여 정치하지 않으셨다. 성공과 승리와 긍정의 길을 일러주며 우리의 욕망 본능을 일깨워주는 예수도 아니다. 우리가 흠모하고 사랑하는 예수는 시인의 말을 빌리면 입으로 먹고 항문으로 배설하는 누구나 다 알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생리를 따르는 길이 아니라, 이기적 본성을 합리적으로 수용하는 우리의 이성을 가지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길, 그래서 거듭난 자라야 가는 길을 가라 하는 분이시다. 그들만이 하나님 나라를 불 수 있다고 하신다(요3:3). 그대들은 이 어지러운 시대에서 하늘나라를 목격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생리를 따라 사는 이들인가? 세월호 같은 한국교회 안에서 그대들은 침묵하며 웅크리고 있는가 아니면 생명의 길을 찾아 몸부림치는 자들인가?

 

 

 

 

 

 

 

 

출처- 감리교신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