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3·6교실/감리교회사 교실

[스크랩] 존 웨슬리 고향 엡워스 (영국 엡워스)

류성련 2015. 5. 1. 21:48

당시 엡워스 일대 상세지도

 

출처- 1990년 한경수 감독이 번역하신 『수산나 웨슬리의 생애』(레베카 라마르 하몬 저)에 있는 자료, 당시 엡워스는 질척질척한 늪지 였는데 지금은 작은 강들은 대부분 메꿔지고(지금도 길 옆으로 수로가 있다) 구불구불한 길은, 쭉 뻗어 달리다가 갑자기  꺾어지는, 전형적인 링컨셔 도로로 바뀌었다. 지도상으로 루트 마을과 엡워스마을이 잘 나와있다. 지도 맨 밑 오른쪽에 로마숫자 MDCXXVI 는?  M - 1,000, D - 500, C - 100, X - 10 이니까 1626년의 배수로를 표시한 지도인 것 같습니다. 사무엘 웨슬리는 1662년 태어났고 엡워스에 도착한 건 1697년입니다 

 

<루트교회>

 

루트 교회 웨슬리 안내 그림, 1727-1729년에 시무한곳임을 알 수 있다

 

루트 교회

 

존 웨슬리 때의 이 교회 이름은 "The church of Wroote" 였고 현재는 St. Pancras Church 이다. 이 교회는 사무엘 목사님의 Fenland parish 교회 였고 존 웨슬리 목사님은 이곳에서1727-9까지 아버지를 도와 사역했다

 

루트교회 

 

존 웨슬리가 준회원(deacon) 사제 안수를 받고 정회원(elder) 사제 안수를 받기 까지 1727-1929년에 목회하였던 루트(Wroot)교회(St. Pancras Church)는 허허벌판에 세워진 작은 교회이다. 현재도 작은 숫자의 성도가 예배를 드리고 월 2회(1, 3주) 성찬식을 하고있다

 

루트교회 내부

 

루트교회, 웨슬리 목사가 8살 때 부터 사용하던 성배

 

<웨슬리 기념교회>

 

웨슬리 기념교회   (출처- 감리교교육국 CD, 존 웨슬리의 발자취를 따라서) 

 

웨슬리 기념교회

 

웨슬리 기념교회

 

교회 내부 

 

웨슬리형제 기념교회 스테인드 글라스

 

1882년 웨슬리 감리교회 연맹 측은 엡워쓰에도 웨슬리 형제를 기념하는 교회가 세워져야 한다고 결의했다. 그 후 1888년부터 89년에 걸쳐서 6,500 파운드를 투자해서 웨슬리 기념 교회를 지었다. 웨슬리 기념 교회는 외부도 아름다웠지만 그 내부는 더욱 고상하다. 특히 제단 정면에 스테인드 글라스로 설치한 웨슬리 형제의 초상은 유리창을 통과하는 영롱한 햇빛과 더불어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성전 뒤쪽의 벽면에는 웨슬리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유명한 말 "이 세상에서 최고로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가 새겨진 배너가 걸려 있었다.

 

웨슬리형제 기념교회 스테인드 글라스  

 

웨슬리형제 기념교회 성찬대

 

웨슬리형제 기념교회 성찬대

 

웨슬리형제 기념교회 성찬대

 

웨슬리형제 기념교회 창문

 

2003년 웨슬리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여 생가 인근에 세워진 기념 동상

 

웨슬리 생가로 가는 길에 존 웨슬리 탄생 300주년을 기념해 웨슬리기념교회가 중심이 되어 2003년에 세운 동상이 있는데 왼손엔 성경을 들고 오른손으로 제스처를 하면서 설교하는 모습이다. "Epworth: I still love beyond most places in the world." "I look upon all the world as my parish." "엡워쓰, 아직까지 세계의 그 어느 곳보다도 더 사랑하는 곳." 이란 웨슬리의 말이 새겨져있다.  웨슬리가 얼마나 고향을 사랑했는지, 선교적 열정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2003년 웨슬리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여 생가 인근에 세워진 기념 동상

 

탄생 300주년 기념 동상 기념문

 

웨슬리형제 기념교회 목사관

 

성 안드레교회 위치도

 

성 안드레교회 입구

 

 

 

 

 

세인트 안드레 처치(St Andrew's  Church) (출처- 기독교타임즈)


사무엘 웨슬리가 39년 동안(1696-1735) 소천할 때까지  목회하던 세인트 안드레교회는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있었고,  오르막길은 좌우에 아름드리 가로수와 허리 높이의 가로등, 이름 모를 노란 꽃이 어우러진 호젓한 산책로 같았다. 13세기에 세워진 석조건축물에서는 중후함과 함께 오랜 풍상을 견디어낸 인내의 냄새가 풍겨났다.  예배당을 둘러친 안전망에 붙어있는  팻말과  건물 바로 옆에 즐비하게 늘어선 이끼 낀 묘비들이 풍기는 음산함은 이방인인 나에겐 낯설게만 느껴졌다. 3백 명쯤 앉을 수 있을 것 같은 예배실에는 서너 명의 인부들이 낡은 벽면을 뜯어내고 있었다. 어린 시절 존 웨슬리를 비롯한 사무엘의 자녀들이 세례를 받았던 팔각형 돌 세례반, 성례전을 위해 사용했다는 수산나의 의자,  벽 쪽에는 웨슬리와 관련된 내용과 웨슬리탄생 3백주년에 이곳에서 벌어졌던 행사들이 병풍처럼 전시돼 있었다.  웨슬리가 여덟 살이 되어 최초로 성찬을 분급 받았을 때 사용했다는 은으로 된 성배는 루트교회로 옮겨져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1696년, 바로 이곳에 사무엘과 수산나 부부는 네 자녀들을 데리고 부임하여 1735년 그의 나이 72세 때까지 무려 39년을 사제로 섬겼다. 반평생을 바친 교회, 웨슬리 가족에게 이 교회와 교구가 그렇게 매혹적이고 행복했었을까? 웹워쓰는 당시 성직자들에게 고약한  곳이었다. 사방이 강으로 둘러 싸여 마치 섬처럼 고립된 황량하고 소외된 시골마을이 웹워쓰였다.  대가족을 꾸리기엔 턱없이 부족한 박봉, 늘어만 가는 부채는 살림을 맡은 수산나의 애간장을 녹였다. 게다가 명문 옥스퍼드 대학을 나온 학자 사무엘과 웹워쓰 주민들과는 지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지만,  그것 이상으로 정치적인 입장에서 간격이 벌어져 있었다. 사무엘은 국교도를 지지한 반면 마을 사람들은 비국교도 성향을 지니고 있어 갈등이 빈발했다.  이 대립은 단순히 감정싸움 정도로 그치지 않고 무수한 적대행위로 표출되곤 했다. 사무엘은 자주 위협을 받았고, 가족들도 폭언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심지어 사무엘은 정치적 입장 차이가 근원에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는 빚을 갚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1709년에 발생했던 목사관 대화재사건도 이들의 소행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일 정도다. 이만하면 진절머리를 치고 야반도주라도 할 상황이 아닐까. 샬프 대주교는 난폭하기 이를 데 없는 이곳 주민들을 잘 아는 터라,  이들을 치리하기 위해 다른 목회자를 파송할 요량으로 사무엘을 설득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고 한다. 도리어 사무엘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 이곳에서 뭔가 선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을 떠나는 것은 마치 적군의 화염이 저를 에워쌀 때 진지를 버리고 도망치는 겁쟁이와도 같은 일입니다"라고 회신을 보냈다고 하니, 오기에 가까운 그의 헌신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세인트 안드레 처치

 

공사중인 교회내부

 

내부

 

제단

 

강단의자, 수산나웨슬리가 1735년 엡워스를 떠날때 교회에 기증한것이다.

 

강단의자

 

세인트 안드레교회의 사무엘 웨슬리 무덤

 

사무엘 웨슬리의 무덤

 

사무엘 웨슬리는 첫 임지인 세인트안드레교회에서 평생토록 사역하고 그곳에 묻혔다. 존 웨슬리는 고향을 깊이 사랑했기에 순회설교여행 중에 자주 이곳을 방문했다. 1742년, 고향을 방문한 존 웨슬리는 당시 세인트안드레교회 교구담당사제인 롬리(Romley)에게 주일오후예배 때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웨슬리의 활동을 영국국교회의 전통과 규율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롬리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러나 순순히 포기할 웨슬리가 아니었다. 그는 한 평 남짓의 아버지 무덤 위에 올라가 설교를 하기로 결심한다. 성도들이 교회에서 나오자 존 테일러는 저녁 6시에 교회 묘지에서 존 웨슬리가 설교할 것이라고 외쳤다. 사무엘의 무덤은 웨슬리 가문의 사유지였기에 롬리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날 웹워쓰 역사상 가장 많은 청중이 설교를 듣기위해 모여 들었다. 웨슬리는 8일간 아버지의 무덤 위에서 설교했고, 마지막 집회는 3시간이나 계속됐는데, 너무 은혜로워서 마치 천국이 내려 온 것 같았다고 한다. 존 웨슬리는 말했다. “나는 아버지의 강단에서 3년을 설교하는 것보다 그 분의 무덤에서 3일 설교하는 것이 링컨 지역교구민들을 위해 훨씬 낫다고 확신한다”고.     (기독교타임즈 곽인 부장)

 

사무엘 웨슬리의 무덤

 

사무엘 웨슬리의 무덤

 

 무엘 웨슬리의 무덤위에서 설교하는 존 웨슬리

 

마켓크로스

 

마켓크로스

 

마켓크로스에서 웨슬리가 설교했다는 안내판

 

Market Cross, 설교하는 웨슬리 모습  

 

마켓크로스와 레드라이언 호텔

Market Cross , 존 웨슬리가 야외 설교하던 곳과 레드라이언호텔

 

레드라이언 호텔

 

웨슬리 당시의 레드라이언 호텔

 

존 웨슬리가 자주 묵었던 Red Lion Hotel 19호실, 객실앞에 웨슬리의 기념표시가 있다

 

Red Lion Hotel 곳곳에는 그림을 비롯한 웨슬리의 흔적들이 있는데 특히 웨슬리가 머물렀다는 19호실, 찰스웨슬리와 플래쳐(John Fletcher) 등과 함께 묵었다는 4호, 16호도 있다

 

웨슬리가 머물었던 2층 방

 

웨슬리가 머물었던 2층 방 19호실 내부 

 

존 웨슬리가 묵었던 19호실

 

레드라이언호텔 1층 펍(pub)

 

작은 건물 두 동을 연결시켰지만 호텔이라 하기엔 조금 소박해 보이는 레드라이언은 1층에는 간단한 음식과 음료를 제공하는 영국식 명칭으로 펍(Pub)이라고 불리는 카페로, 2층은 30여개의 숙소로 꾸며져 있었다. 1층 펍 벽면에 드문드문 걸려있는 액자에는 사제관에서 보았던 대화재사건, 존 웨슬리가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고, 따뜻한 조명아래 마을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맥주와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기독교타임즈)

 

 

엡워쓰


"엡워쓰, 아직까지 세계의 그 어느 곳보다도 더 사랑하는 곳." 탄생 300주년을 맞아 지난 5월 18일 엡워쓰의 웨슬리 생가 근처에 세워진 동상 밑에 새겨 넣은 웨슬리의 말이다. 요한 웨슬리는 1703년 6월 17일 엡워쓰의 사제관(올드 팩토리)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는 1714년 런던의 기숙학교 차터하우스에 진학하면서 고향 엡워쓰를 떠났지만 그 후 무려 34 차례씩이나 엡워쓰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만큼 웨슬리에게 엡워쓰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서린 영혼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엡워쓰는 런던에서 자동차로 한 다섯 시간 이상 북동쪽으로 가야하는 낙후된 시장 마을이었다. 웨슬리 시대에는 겨우 1,500 여명 정도 밖에 살지 않았고 지금도 전체 인구가 5천 명을 넘지 않는 소읍이다. 엡워쓰 사람들은 자기 마을이 낳은 세계적인 인물 웨슬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 보였다.  사무엘과 수산나 부부는 네 자녀들을 데리고 1696년 엡워쓰의 성 안드레 성당의 사제로 부임했다. 그 후 사무엘은 1735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39년 간을 엡워쓰에서 목회했다. 사무엘이 이곳에 왔을 때 엡워쓰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불학무식했으며 야만적이었다. 그러니 옥스퍼드 출신의 인텔리로서 야망에 부풀어 있었던 자칭 대시인이요 대학자인 사무엘과 맞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엡워쓰는 퀘이커 교도들이나 침례교도들과 같이 국교회에 반감을 가진 비국교들의 세가 유달리 강한 곳이기도 했다. 국교도에 거의 맹신적인 충성심을 가졌으며 엄격한 규율가요 비타협적인 뚝심가이기도 했던 사무엘과 비국교들이 사사건건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1702년에 사제관이 부분적으로 불탔고 1709년 겨울 전소된 사건은 전부 다 사무엘에게 증오심을 품었던 비국교도들의 만행인 것으로 추정된다. 1709년 화재로 다섯 살 먹은 요한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져서 '불에 타다 남은 막대기'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잿더미가 된 사제관은 약 400 파운드의 돈을 투자해서 1년 간에 걸쳐서 신축이 되었는데 웨슬리 일가가 이 집을 떠난 1735년부터 세계 감리교회 협의회에서 웨슬리 박물관으로 성역화 했던 1954년에 이르기까지 다른 후임 사제들의 거처로 계속 사용되었다. '옛 사제관'(Old Rectory)으로 불리는 웨슬리 생가는 거듭된 복구 작업으로 원형과는 다소 거리가 생기게 되었지만 그 옛날 웨슬리 대가족들의 생활 풍경을 연상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곳이었다. 사무엘이 주임 사제로 시무했던 성 안드레 성당은 오랜 풍상으로 많이 낡았지만 고즈넉한 기품만큼은 잃지 않고 있었다. 이 성당 안에서 가장 주목을 끌었던 것은 요한 웨슬리가 나이 여덟 살이 되어서 최초로 성찬을 분급받았을 때 사용했던 은으로 된 성배였다. 또한 16세기에 만든 제단이며 나무 의자, 헌금함으로 쓰였을지도 모르는 큰 나무 궤짝과 세례반 등이 역시 두드러지게 보였다. 사무엘은 시인으로서 대학자로서 목회자로서 웅대한 꿈을 가졌지만 그 꿈을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한 채 엡워쓰에서 눈을 감았으며 자신이 반평생을 섬겼던 성당 바로 곁에 묻혔다. 1742년 웨슬리가 엡워쓰를 방문했을 때 성 안드레 성당의 사제는 웨슬리에게 설교권을 거부해버렸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아버지의 무덤 위에서 옥외 설교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엡워쓰가 생긴 이래 최고의 인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사무엘의 무덤은 개인 소유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성당 측에서도 막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엡워쓰에는 웨슬리 기념교회가 하나 서 있었다. 1882년 웨슬리 감리교회 연맹 측은 엡워쓰에도 웨슬리 형제를 기념하는 교회가 세워져야 한다고 결의했다. 그 후 1888년부터 89년에 걸쳐서 6,500 파운드를 투자해서 웨슬리 기념 교회를 지었던 것이다. 웨슬리 기념 교회는 외부도 아름다웠지만 그 내부는 더욱 고상했다. 특히 제단 정면에 스테인드 글래스로 설치한 웨슬리 형제의 초상은 유리창을 통과하는 영롱한 햇빛과 더불어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연출했다. 성전 뒤쪽의 벽면에는 웨슬리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유명한 말 "이 세상에서 최고로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가 새겨진 배너가 걸려 있었다.

 

사진, 글 출처 (sola-gratia, 웨슬리 신학, 역사 연구원)

 

사무엘 웨슬리


1691년 결혼 직후 사무엘과 수산나 부부는 링컨셔 주의 남 오름스비(South Ormsby)의 교구를 맡아서 본격적인 목회를 시작했다.   이 교구는 36 가정에 260여명의 주민들로 구성된 작은 교구였다.  이곳에서 영아기에 사망한 세 명의 자식들과 세 딸들이 태어났다.  (맏아들 사무엘 2세는 이곳으로 이사오기 전 이미 런던에서 태어났다.)  이 시기에 사무엘이 비록 국교로 전향했다고는 하나 청교도적인 가문의 배경에서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요한의 회고에 따르면 사무엘이 자신의 교구에 사는 노르만비의 후작(the Marquis of Normanby)--실상은 '캐슬바의 백작'(the earl of Castlebar)이 맞는데 요한의 착오였던 것 같다.--의 정부(情婦)가 사무엘의 집을 방문하여 수산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서는 대경실색하여 손을 잡아채 밖으로 쫓아낸 일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무엘은 적어도 성윤리에 있어서는 청교도적으로 칼같이 준엄했다. 사무엘은 간통죄를 저지른 교인을 반드시 주일 아침 교회에 나오도록 명했다.  그런 뒤 죄인 된 사람을 삼 주일 연속으로 교회 정중앙의 축축한 진흙바닥에 신발이나 양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서 있도록 했다.  그리고 참회의 표시로서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흰옷을 걸친 채 추위에 떨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벌은 다른 사람들에게 성범죄를 사전에 경고한다는 의미를 가졌다.  이것은 사무엘 시대의 전형적인 참회 예식이었지만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이와 같이 가혹한 방법을 포기한지 오래였다.  그러나 사무엘 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목회자는 기본적으로 교인들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무엘의 신념때문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전제적이고 율법적인 자세는 자연히 적지 않은 교인들로부터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사무엘은 1696년 경, 남 오름스비를 떠나 평생의 목회지가 된 엡워쓰 지역으로 교구를 옮겼다.  (오름스비를 떠나게 된 이유도 사무엘이 신자인 제임스 손더슨, James Saunderson, 의 정부를 교회 안에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엡워쓰는 후에 우르트(Wroot) 지역을 병합하게 되었는데 사무엘은 이곳에서 1735년 은퇴할 때까지 39년 간 목회하게 된다.  반평생 이상을 엡워쓰에서 보낸 셈이다.  엡워쓰는 요한이 태어날 당시만 해도 전체 인구가 1,500 명이 넘지 않는 매우 낙후된 시장 마을이었다. 엡워쓰의 사제관은 지역적인 낙후성에 비추어 볼 때 결코 허름한 건물은 아니었다. 목재와 회반죽으로 지어진 3층 짜리 초가 지붕집으로서 엡워쓰에서 단연 돋보이는 건축물이었던 것이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이 사제관은 1702년 화재가 나서 부분적으로 불탔다가 다시 수리되었으며 1709년 또 한 번의 화재가 일어나 전소되어 버렸다.  그 후 튼실한 벽돌집으로 다시 지어지게 되었다. 특히 1709년의 화재는 다섯 살 먹은 요한이 기적적으로 구출되어서 어머니 수산나를 비롯해서 요한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인상을 남겼던 사건이었다.  좌우지간 바로 이 엡워쓰 사제관에서 사무엘 부부는 19명의 자녀들 가운데 살아남아 장성한 3남 7녀의 자녀들을 길러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엡워쓰야말로 요한과 촬스 형제가 잊을 수 없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요 사상적 요람이었던 것이다. 사무엘은 결코 나쁜 남편이나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유능한 목회자는 아니었다.  한 마디로 세상일에 아주 둔감했는데, 특히 사람과 돈을 다루는 일에는 거의 잼병에 가까웠다.  특히 국교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가히 맹목적이라고 할 만큼 철저하고 과격했다.  사무엘은 엡워쓰 교구내의 비국교도들을 가혹한 자세로 대해서 뿌리깊은 증오심을 샀으며 두고두고 많은 골칫거리를 초래하게 된다. 그 당시 엡워쓰와 같이 고립된 지역의 사람들은 문명 세계와 멀었기 때문에 야만적이었고 공격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당대 최고의 인텔리겐치아에 속했던 사무엘과는 너무 거리가 먼 생각들을 품고 살았는데 사무엘은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엡워쓰 주민들은 늪지대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17세기의 영국 제도는 거의 1년 내내 물로 둘러 쌓여있기가 일수였다.  1626년에 코넬리우스 버뮤덴(Cornelius Vermuyden)이 배수기를 만들어 냄으로서 비옥한 땅을 꽤 많이 확보할 수 있었지만 겨울철이 되면 삼면이 강물로 둘러 쌓인 영국 제도는 홍수 때문에 늘 골머리를 앓았다.  문제는 배수 문제로 불거진 이해관계가 웨슬리 가족에게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배수 사업이 업자들에게는 큰 이득을 주었지만 지역 주민들에게는 큰 손실과 집단적 분개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세상일에는 타고난 숫보기였던 사무엘은 지역 주민들의 원성이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읽지도 못한 채 주민들의 이익에 반하는 정치적 입장을 종종 피력했다.  거기에다가 비록 소수이기는 하나 백 명 남짓한 비국교도들--주로 침례교도들과 일부 퀘이커 교도들--을 사사건건 홀대함으로서 지역 정서를 더욱 자극시키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배수 시설 문제로 피해 의식에 가득찬 일부 지역 주민들은 비국교에서 국교로 전향한 사무엘이 자기의 뿌리를 잊은 채 비국교도인 자신들에 대하여 잔인할 정도로 비타협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에 더욱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러 차례에 걸친 사무엘과 지역 주민의 충돌 중에 주목할 만한 사건은 다음과 같다. 1705년에 지방 의회 선거가 있었을 때 사무엘은 토리 당원이요 국교의 이익을 대변했던 존 쏘롤드(John Thorold)와 다이모크(Dymoke) 두 사람을 지지해서 런던으로 달려가 그들에게 표를 던졌다.  그러나 본래 사무엘은 자신의 좋은 친구였던 위치코트(Whichcott)와 보스톤(Boston)을 지지하기로 약속했던 터였다.  나중에 이들이 비국교도들의 이익을 대변할 뿐 아니라 장로교를 확산시킬 위험이 있다는 소문을 입수하자 지지 약속을 즉각 철회하고 국교 후보자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정치적 입장을 바꾸었던 것이다. 이렇게 사무엘이 국교 후보자를 지원하는 것을 알아차린 엡워쓰의 비국교 주민들은 밤마다 목사관으로 달려가 온갖 욕설과 위협을 퍼부어 댔다.  이들은 심지어 수산나가 누워있던 침대 옆 창문으로 다가가 항아리와 냄비를 두들기거나 권총을 하늘로 발사하기 조차했다.  한번은 20 여명의 비국교 폭도들이 사무엘에게 "성(城) 마당에서 당신을 잡을 수만 있다면 창자를 모조리 비틀어 뽑아 버리겠다."는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또한 사무엘의 자녀들에게는 "오, 악마의 새끼들이여!  우리는 곧 너희 모두를 문밖으로 끌어내어 쪽박을 차게 만들어 버리겠다."고 위협을 가했다.  이와 같이 몸서리치는 맹폭한 소동으로 말미암아 사무엘 부부는 소동이 일어났을 당시의 막내둥이까지 잃어버리는 비극을 겪게 된다.  유모가 연일 계속되는 폭동 때문에 새벽 한 시나 두 시까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파김치가 되어버린 유모가 막내 아들을 깔고 정신없이 잠이 든 나머지 비고의성 압사를 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 때 아직 두 살이었던 요한은 하나님의 섭리로 이 와중에도 잠을 잘 잤다. 사무엘의 수난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 후에도 사무엘의 목회관과 정치관에 반감을 가진 지역 주민들은 무수한 적대 행위들을 서슴지 않았다.  이를테면 사제관을 몰래 공격하기도 했으며 사제관에서 기르는 가축들을 병신으로 만들기도 했으며 사제관 소유의 아마 밭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오겠지만 엡워쓰의 사제관에서 일어난 총 세 차례의 화재도 사무엘의 목회에 반감을 가진 교구민들이 저지른 소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적대적인 지역주민들과의 갈등은 마침내 사무엘의 투옥으로까지 이어질 정도로 질기고 잔인했다.  사무엘의 연봉은 160 파운드 정도 되었는데 나중에 우르트 지역이 교구에 합병됨으로서 60 파운드를 더 받아서 약 220 파운드--220 파운드가 오늘의 화폐 가치로 환산할 경우 어느 정도가 되는지를 계산해 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방면에 권위있는 학자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또 필자 나름대로의 리서치를 통하여 1,800년대 영국의 10,000 파운드는 오늘날의 미화로 환산할 경우 약 700,000 달러 정도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200 파운드는 약 15,400 불 정도가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사무엘과 같은 대가족들이 1 년 동안 생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가 아닐 수 없었다.--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사무엘은 박봉과 타고난 경세적(經世的)인 무능함 때문에 만성적인 부채에 시달렸다.  (사무엘은 1731년 6월 4일, 마차에서 떨어져 큰 부상을 입어서 결국 1735년 4월 25일, 엡워쓰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 때에도 많은 빚을 안고 있었다.  이처럼 죽을 때까지 사무엘은 무거운 빚짐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사무엘이 앞서 언급한 1705년의 선거 때 국교도 후보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엄청난 곤혹을 치른 사무엘은 부채 문제로 또 한번의 시련을 맞게 된 것이었다. 사무엘에게 적지 않은 증오심을 품었을 비국교도 후보자 위치코트의 친척인 핀다(Pindar)라는 사람의 고발로 사무엘은 30 프랑의 채무 불이행을 이유로 교회 문 앞에서 체포되어 버렸다.  실로 적대자들은 사무엘이 빚 갚을 돈을 마련하는데 필요한 몇 시간도 허용해주지 않은 채 런던 감옥으로 직행하도록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백은 좀처럼 꺾이지 않았다.  그는 태연히 선언했다.  "비록 양떼들을 이리떼 틈에 놔두게 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나는 이제 오랫동안 동경해마지 않았던 안식처에서 마침내 쉬게 되었다!  감옥은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살았던 인생에 비하면 낙원인  셈이다…"  사무엘은 석 달간이나 런던 감옥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홀로 집에 남아서 어린것들을 돌보던 수산나는 허기진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결혼 반지는 물론 그 때까지 지니고 있었던 모든 패물들을 팔아 식량을 사야만 했다.  감옥 밖에 있는 식구들의 비참한 소식을 접한 사무엘은 요크의 대주교 존 샬프(John Sharpe)에게 구원을 호소하는 편지를 썼다.  샬프 대주교는 즉시 손을 써서 사무엘의 빚을 다 갚아주었다.  결국 사무엘은 런던 감옥으로부터 석방이 되어서 하루 하루의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궁색해진 엡워쓰의 가족들 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것으로서 사무엘의 무능으로 인한 궁상(窮狀)이 종언을 고한 것은 아니었다.  엡워쓰에서 목회가 지속되는 반생 동안 크고 작은 실수와 불행이 끊이지 않았다. 상처를 입었지만 여전히 더 공격적이고 전의에 불타서 목양지 엡워쓰로 돌아온 사무엘을 기다리는 것은 이에 비례해서 경계와 증오심을 풀지 않고 또 다른 반격을 노리는 교구 사람들이었다.  사무엘과 가족들의 안전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차제에 목회지를 바꾸어보라고 권하기도 했지만 사무엘은 요지부동이었다.  특히 샬프 대주교는 난폭하기 이를 데 없는 양무리들을 치리하기 위하여 다른 목회자를 파송할 요량으로 사무엘을 설득했지만 사무엘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사무엘은 도리어 확신에 차서 이렇게 회신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 이곳에서 뭔가 선한 일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을 떠나는 것은 마치 적군의 화염이 저를 에워쌀 때 진지를 버리고 도망치는 겁쟁이와도 같은 일입니다.  원수들은 저에게 상처를 입혔을는지는 몰라도 저를 결코 죽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실로 사무엘의 반생에 걸친 엡워쓰 목회를 궁상맞게 한 것은 세상 물정에 어두운 타고난 천성과 국교에 대한 과도한 충성심 때문이었던 것이다.  사무엘은 지역주민들이 비타협적인 독선이나 엄격한 훈련보다는 이해를 동반한 관용과 위로를 더 원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비록 그의 집필과 지적 편력이 이와 같은 곤궁으로부터 탈출해서 때때로 시름을 잊게 해준 유일한 출구였지만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나중에 수산나는 친정 오라버니에게 쓴 사신에서 사무엘을 매우 동정적인 입장에서 안스러워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사무엘과 같이 학구적이며 시인적인 재질을 타고난 인텔리가 엡워쓰와 같이 야만적이고 낙후되고 고립된 시골 마을에서 목회 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던가를 충분히 헤아리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사무엘에게 수산나라는 현모양처가 없었더라면 온가족들은 쪽박을 차고 차가운 거리로 내몰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던 것이다       출처 (sola-gratia, 웨슬리 신학, 역사 연구원)

출처 : 성화사랑
글쓴이 : bae sung hw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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