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3·6교실/감리교회사 교실

[스크랩] 존 웨슬리 생가 올드 랙토리 (영국)

류성련 2015. 5. 1. 21:49

1789년 초상화 (Romney)

 

존 웨슬리 (1703-1791)

 

 

1. 존 웨슬리의 고향 올드 랙토리

 

 

올드 랙토리 정문        출처- 감리교 기독교타임즈

 

존 웨슬리 가족이 살았던 올드 랙토리(Old Rectory)를 좌측 정원에서 촬영

 

존 웨슬리 생가 올드 렉토리 (웹워쓰)


영문으로 'Epworth'라고 쓰는 이 지명이 읽으면 읽을수록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까?  초기한국감리교회사에 종종 등장하는 발음하기도 뻑뻑한 '엡�청년회'때문이었을까. 선교사들의 권유로 탄생한 '엡�청년회'(Epworth League, 현 기독교대한감리회청년회)의 ‘엡�’(Epworth)은 존 웨슬리의 출생지인 바로 이곳의 지명을 딴 것이 맞다.  그 뜻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남"이라하니 청년회의 이름으로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엡워쓰에는 존 웨슬리의 생가이며, 아버지인 사무엘이 죽던 1735년까지 가족들이 살았던 올드 랙토리(Old Rectory)로 불리는 붉은 벽돌로 지은 3층(다락방포함)의 목사관이 있다.  물론 지금은 웨슬리의 숨결을 찾는 방문객들을 맞는 박물관으로 바뀌어있다. 정문을 지나 1층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웨슬리의 사진, 괘종시계, 부모의 초상화, 열쇠 등이 전시된 거실이 있다.  오른편으로 연결된 방은 현재 기념품 판매소로 쓰이고 있는데, 당시에는 어머니인 수산나가 아이들을 가르치던 공부방이었다고 한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다보면 복도에 걸려있는 팔 벌려 한 폭은 됨직한 그림이 눈길을 사로잡는데, 1907년 올드 랙토리를 전소시켰던 대형화재사건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의 첫 기억이 있기 마련이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첫 기억이 개인의 생애유형 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우리는 그 그림에서 웨슬리의 첫 기억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존 웨슬리가 평생 스스로를 ‘타는 불에서 꺼낸 부지깽이’(A brand plucked out of the burning)라고 여겼던 그 이야기를 들으면 그의 인생의 출발점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2. 웹워쓰 목사관 화재사건

 

웹워쓰 목사관 화재사건을 그린 그림. 생가 2층 계단 복도에 걸려있는 그림이다 

 

1907년 2월 9일 수요일,  깊은 밤,  다섯 살 된  존 웨슬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자욱한 연기는 방안을 이미 독한 냄새로 채워가고 있었다. 목사관에 화재가 발생한 것을 처음 발견한 것은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 “불이야!”라는 소리에 놀라 일어난 그는 황급히 아내와 딸을 깨웠다. 하녀도 급히 육아실로 달려가 아이들을 집밖으로 대피시켰다. 그러나 웨슬리 가족은 아무도 존 웨슬리가 집안에 남겨진 사실을 알지 못했다. 존 웨슬리는  “살려달라”  울부짖기 시작했고 이 외침은 사무엘에게 들렸다. 사무엘은 목사관으로 들어가려 시도했지만, 이미 불계단으로 변해있었다. 사무엘은 현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존 웨슬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긴다’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존 웨슬리는 포기하지 않고 침착하게 살 방도를 찾고 있었다. 그는 방안에 있던 테이블(혹자는 궤짝)을 창가로 밀어 놓고 그 위에 올라가 껑충껑충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밖에서 서성이던 한 사람이 웨슬리를 발견한다. 인간사다리를 만들자는 제안에 인간사다리를 만든 뒤 창문을 통해 존 웨슬리는 구출 되었고 그 순간 목사관 지붕은 폭삭 내려 않았다.  1753년, 웨슬리 나이 50세 때, 그는 의사로부터 죽음을 준비하라는 통보를 들을 정도로 깊은 병이 들었다.  존 웨슬리는 미리 자신의 비문을 준비하는데, 자신의 이름 다음에 ‘A brand plucked out of the burning...’(타는 불에서 꺼낸 부지깽이)로 뒷 말을 이어간다.  ‘타는 불에서 꺼낸 부지깽이’ 존 웨슬리. 그에게 이 화재 사건이 어떤 의미 다가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화재 당시의 나무조각

 

3. 자녀 양육의 장(場) 식당

 

올드 랙토리 1층에 있는 공부방 역할을 했던 식당

 

처음 올드 랙토리(Old Rectory) 앞에 섰을 때, 목사관치곤 예상보다 큰 게 아닌가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웨슬리 가족이 자녀만 열아홉(이중 아홉 사망)의 대가족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 정도 규모는 되었어야 했겠다는 생각도 든다. 수산나는 1690년 첫 자녀 사무엘(주니어)을 시작으로 거의 매년 출산했다. 그리고 이 자녀들 가운데서 요한 웨슬리(15번째)와 찰스 웨슬리(18번째)같은 세계적인 인물이 배출됐다.  수산나는 이 많은 자녀들을 바로 식당에서 훈련 시켰다. 7~8평쯤 돼 보이는 식당 이곳이 수산나의 자녀 양육의 장(場)이었다. 정갈한 베이지색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커다란 주전자가 걸려있는 벽난로가 보이고, 벽난로 양 옆으로는 채광이 잘되는 창문이 바깥 경치를 담아내고 있었다. 식당 한복판에 자리 잡은 식탁 위에는 당시에 사용했던 금속제 접시와 주전자, 컵, 양념통, 포크와 나이프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좌측 먼 구석 쪽에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입구와 밤색 장판으로 덮인 계단이 보였다. 이 장소는 단순히 식사만 했던 부엌이 아니었다. 잿더미가 된 사제관은 당시 4백 파운드의 공사비를 들여 1년 동안 재건축됐는데, 특히 수산나의 활동공간이었던 부엌은 식당뿐만 아니라 공부방으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절반을 막아 기념품 판매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바로 이곳에서 수산나는 하루 6시간씩 규칙적으로 자녀들을 철저히 교육했던 것이다. 웨슬리는 이때 받은 교육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는 1732년 어머니에게  자신에게 사용했던 교육방법을 알려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수산나의 교육은 자녀 대에서 끝나지 않고, 홀리클럽, 나아가 존 웨슬리를 따르는 회원들의 규칙 속에 면면히 반영되어 흐르게 된다 

 

4. 수산나의 교육방법과 내용

 

수산나웨슬리 (출처- 웨슬리 스토리)

 

수산나는 엄격한 규율과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철저히 자녀를 양육했다. 아이가 태어 난지 석 달만 지나면 어김없이 그녀는 정한 시간에 요람을 흔들어 아기를 재우고, 깨우면서 규칙적으로 잠을 자도록 훈련했다. 말문이 트인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날 때와 밤에 잠잘 때 꼭 주기도문을 외워야 했다. 또 주일이 보통 날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별하도록 가르쳤다. 일 년에 한번씩  목사관에는 “알파벳잔캄” 이라는 행사가 있었는데, 다섯 살을 맞은 자녀가 알파벳을 처음 배우는 날이었다. 이때부터 자녀들은 오전 9~12시, 오후 2~5시까지 매일 여섯 시간 이상 공부방인 주방에 모여 공부했다. 하루 만에 알파벳을 배운 자녀는 다음날부터 창세기를 보면서 철자법, 독법, 서법 등을 배우고, 산수, 문법, 역사, 지리도 차례로 익혀나갔다. 수산나의 교육방법 중 특별한것은 일주일을 단위로 매일 순서를 정해 아이들과 한 시간씩 대화를 나누는 개별상담이다. 그녀는 매일 저녁, 시간을 정해 놓고 요일별로 돌아가며 모든 아이들을 개별적으로 상담하고 기도해 주는 신앙의 어머니였다. 존 웨슬리는 목요일에 면담시간을 가졌는데, 이 은밀한 시간이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경건의 훈련을 받았다. 수산나는 자녀들이 꼭 지켜야 할 여덟 가지 원칙 세칙을 정했는데 첫째, 잘못을 범했더라도 누구든지 솔직하게 자백하고 고칠 것을 약속하면 매를 맞지 않도록 한다. 둘째, 거짓말, 좀도둑질, 교회에서 또는 주일에 장난치는 일, 불순종, 말다툼 등의 죄 된 행위는 반드시 벌을 주어야 한다.... 넷째, 순종하는 행위의 표시는 모두 칭찬하고 그 동기의 공로에 따라 자주 상을 준다.... 일곱째, 약속은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수산나는 매를 통한 죄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 자신의 의지를 꺾는 순종의 소중함, 규칙생활을  자녀들에게 심어주려 노력했다.

 

 

수산나웨슬리

 

수산나웨슬리 묘지, 런던 번힐 필드

 

번힐 필드 무덤은 수잔나 웨슬리가 묻혀있어 중요한 무덤이 되었다. 이 무덤은 성공회 신자가 아닌 비국교도의 무덤으로 수잔나의 남편은 성공회 사제였으나 존 웨슬리와 촬스 웨슬리가 감리교 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번힐 필드에 묻히게 되었다. 수잔나의 비석은 1828년에 세워졌으며 미국 메릴랜드 프레드릭에 있는 수잔나 주일학교에서 도움을 주어서 1978년 다시 복구되었다. 이곳에는 존 번연, 다니엘 디포우 등이 묻혀있다. (출처- 웨슬리 스토리)

 

런던 번힐 필드

 

 

5. 올드 랙토리 1층 기념품 판매소

 

 

올드 랙토리 1층에는 웹워쓰 관련 기념품 판매소

 

과거엔 식당이었지만 지금은 벽으로 분리돼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는 백발의 자원봉사자들이 ‘웹워쓰’관련 물품을 판매하고 있다. 엽서, 액자, 책갈피, 올드 랙토리 정원에서 자란 나무로 만든 십자가 같은 소품들, 각종 서적과 CD등이다. 진열된 서적중에는 플라스틱 링으로 제본한 B5 9쪽 분량의 ‘Educating the Family'라는 수산나의 교육을 소개한 소책자도 있다

 

2층 웨슬리 부모  침실

 

전시물

 

내부 그림

 

내부 웨슬리상과 초상화

 

내부 웨슬리상과 초상화

 

내부 웨슬리상과 초상화

 

웨슬리 책상

 

웨슬리 부모

 

사무엘 웨슬리  

 

사무엘 웨슬리 저서

 

6. 3층 다락방과 유령사건

 

올드 랙토리 3층에 있는 유령이 출현했다는 다락방

 

어린시절 존 웨슬리의 누이가 입었던 옷도 전시되어 있다

 

방바닥 한 쪽에 사각형으로 구멍을 뚫어 대들보를 직접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유령사건


3층으로 난 계단을 올랐다.  ' To Old Jeffery's Chamber '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는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서자 정적이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면에 난 창은 방 전체를 밝히기엔 턱없이 작았지만,  조명과 진열장에서 스며 나오는 빛이 포근하게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방 우측에는 누이들이 어린 시절에 입었던 옷가지와 도자기 류 생활용품이,  뒤편에는 웨슬리 흉상과 소품이 가지런히 진열돼있었다. 특이하게 방 앞쪽 바닥을 가로세로 30센티 정도로 걷어내고 유리를 씌워 방문객이 대들보를 직접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아마 1709년에 있었던 대화재 사건 이후 집을 재건축할 때 사용했던 자재가 당시 파선된 배에서 나온 목재였음을 보여주기 위함인듯하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웨슬리가의 사정을 짐작케 한다. 목사관의 유령 출몰이 과연 사실일까?  유령에 대한 보고는 마샬이라는 하녀가 남자가 죽어가며 내는 신음소리를 들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어 에밀리(23세)도 병이 깨지는 소리와 석탄덩어리가 부엌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았으나 어떤 증거물도 없었다고 한다. 반신반의했던 사무엘 부부도 며칠이 못돼 유령의 소리를 직접 듣게 된다. 어떤 밤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의 상황도 겪게 된다.  저녁식사 중 사무엘의 접시가 식탁 위에서 춤을 추는가 하면,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밀침을 당하기도 한다.  일의 심각성을 느낀 사무엘은 급기야 축사(exorcism)의 은사를 가진 동료 사제 조셉 훌을 초청해 유령의 존재를 확인하기도 했다. 유령의 잦은 출몰로 사무엘의 딸들은 오히려 유령소동을 즐기는 지경까지 갔다고 한다. 한번은 세 자매가 육아실에 있을 때 침대가 공중에 뜨자 앤니가 침대 위에 올라타 놀았을 정도였다니 필자의 상상력이 바닥을 드러낸다. 에밀리는 이 유령에게 제프리(Old Jeffrey)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안내인의 설명에 따르면 제프리는 이전에 올드 랙토리에 살았던 정원사였다고 한다. 이런 유령소동은 1715년 12월 초에 시작되고, 이듬해 2월초까지 지속되다가 특별한 이유 없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유령출몰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유령사건의 전모를 알려주는 웨슬리가의 서신을 소장하고 있는 조셉 프리스틀리 박사는 집안 하인들이 외부인과 짜고 저지른 일일 것이라는 합리성에 바탕을 둔 설명을 한다.  딸 중 가장 용모가 빼어난 19세의 헤티에게 구애하는 마을 청년들의 장난이었을 것이라는 또 다른 추측도 있다. 하지만 당시 고향을 떠나 런던에 유학 중이었던 존 웨슬리는 자신이 유령소동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지만,  어머니와 자매들의 편지로 상세히 유령소동을 접하고는 이 사건이 환각이나 환청, 사람에 의한 조작이 아닌,  유령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합리성이 고개를 드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웨슬리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그의 기독교 신앙의 이해가 보이는 것 너머의 것도 포괄하는 균형감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출처- 감리교 기독교타임즈 곽인 기자)

 

감리교의 기원과 한국감리교의 역사  (김홍기 교수, 감신대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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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회 웨슬리는 18세기가 시작되는 초엽 1703년에 태어나서 18세기가 끝날 무렵 1791년에 소천하였다. 거의 한 세기를 장수한 건강하고 의미있는 삶이었다. 그의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Samuel Wesley)는 성공회 사제였고, 증조부 바돌로매오 웨슬리 (Bartholomew Wesley)와 할아버지 존 웨슬리(John Wesley: 감리교창시자 존 웨슬리와 이름이 같음)도 청교도 목사였다. 그러니까 웨슬리는 4대째 목사가 된셈이다. 외할아버지 사무엘 아네슬리(Samuel Annesley)도 청교도 목사였다. 1703년 6월 17일 존 웨슬리가 사무엘과 수잔나의 19자녀중 15째로 출생하였다.(9명의 자녀들은 일찍 사망하고 10명의 자녀만 성장하였는데 7자매들은 불행한 생을 살았고, 형 사무엘2세와 동생 찰스와 존의 삼 형제만 사회적 교회적 기여를 하였다. 1720년 6월 24일 장학생으로(40파운드) 옥스포드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Oxford University Christ Church)에 들어갔다. 고전문학, 라틴시, 희랍어신약성서, 희브리어구약성서, 신학서적 탐구하였다.(신학교가 따로 없었음) 1725년 9월 19일 집사사제(준회원) 안수를 포터(Potter)감독으로 부터 받았다. 존이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er)의 저서를 통해 완전성화를 추구하기도 하였다. 여태까지는 1738년 5월의 올더스게이트가(Aldersgate Street) 사건이 존 웨슬리의 회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고, 1725년은 그저 잠간 언급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웨슬리는 생애 후기에 옥스포드에 있을 때인 1725년부터 그의 신앙과 개인적 헌신을 심화시켜 준 몇 가지 영향력들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 웨슬리는 자신이 1725년에는 '종의' 믿음을 가졌던 반면, 1738년 후에는 '아들의' 믿음을 가졌다고 직접 쓰기도 하였다. 그는 매일 5시에 기상하고, 여섯 시간 일하고, 내적 성결을 위해 기도하고, 1-2시간 종교적 명상을 갖고, 매주 수요일 금식하고, 대화를 개혁하고, 독서에 심취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훈련하였다. 또한 1728년 경 말 윌리엄 로우의 [크리스쳔 완전]과 [엄숙한 부르심]을 만나면서 경건하고 신비적인 생활에 힘쓰게 되었다. 셀리 커크햄과 헤어진 후 1725년 4월부터 매일 영적 상태를 점검하는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다. 옥스퍼드 대학교는 매시간 종을 친다. 종을 칠 때마다 시편을 찬양하고 명상기도를 하였다. 하루에 몇 번을 잊어버리고 몇 번을 기억하고 기도하였는지를 점검하였다. 매일 매일의 삶이 영적으로 몇 점짜리의 삶인지를 반성한 것이다. 1726년 존이 3월 17일 옥스퍼드 대학교 링컨 칼리지(Lincoln College)의 교수로 선발되었다.(Fellow).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윌리암 로(William Law) 등 신비주의자들로부터 성화와 완전사상에 영향받아 경건한 삶을 추구하고, 주일은 신학공부, 월요일과 화요일은 고전공부, 수요일은 논리학 공부, 목요일은 어학공부, 금요일은 형이상학과 물리학공부, 토요일은 수사학과 시문학 설교와 편지 쓰기로 정함.  1729년 옥스퍼드대학생 동생 찰스가 '신성 클럽'(Holy Club)을 창립하였고, 1728년 9월 28일 존이 영국성공회 정회원 사제로(elder) 안수받은 후(엡� 교외에서 2년간 목회한 후), 11월에 존이 옥스포드로 돌아와서 신성 클럽의 지도자가 되었다. 신성클럽(Holy Club)으로 잘 알려져 있는 옥스포드 대학생 단체를 결성한 사람은 존이 아니라 찰스였고, 따라서 최초의 감리교도라는 자격을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찰스이다. 1729년 5월5일 편지에서 찰스는 최초의 감리교도를 윌리암 몰간(William Morgan), 로버트 커크햄(Robert Kirkham),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등 세 명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 신성클럽에서 그들은 신약성서를 희랍어 원본으로 열심히 읽었고,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금식하였으며, 주 1회 교도소를 방문하여 죄수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성경을 가르쳐 주었다.  1735년 사무엘 웨슬리가 죽었고, 웨슬리 형제가 조지아로 해외선교를 떠나게 되었는데, 존의 나이는 32세였다. 1735년에 존은 제임스 오글도르프(James Oglethorpe) 장군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군(軍)과 자선사업계 양쪽에서 흔치 않은 방식으로 성공적 경력을 쌓아온 놀라운 인물이었다. 1732년 미국에 조지아(Georgia) 식민지를 창설하였다. 아버지 사무엘은 이미 오글도르프와 서신을 통해서 접촉하고 있었다. 그 장군은 식민지에 목사가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리고서 두 형제에게 접근하였다. 그들은 그를 따라가기로 동의하였는데, 존은 식민지 이주민들의 목사로, 찰스는 그의 개인비서 자격으로 가게 되었다. 1738년 2월 1일 존이 영국에 돌아왔다. 찰스와 함께 그들의 영적 지도자 모라비안 피터 뵐러(Peter Boehler)를 만나서 영적인 상담을 자주하게 되었다. 뵐러는 존과 찰스를 루터의 신앙의인화의 신학에 근거하여 상담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1738년 5월 1일 피터 뵐러와 웨슬리가 함께 페터레인신도회(Fetter Lane Society)를 조직하였다. 1738년 5월 21일 챨스가 회심을 체험하였다. 형보다 먼저 회심을 체험하였으므로 형을 더욱 영적으로 갈망하게 만들었다. 1738년 5월 24일 존의 회심이 일어났다. 그는 가기 싫은 올더스게이트 모라비안모임에 갔다가 윌리암 홀랜드(William Holland)란 청년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많은 목회자들이 로마서 강해 서문이라고 하는데 로마서 강해에는 서문이 없고 루터가 희랍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한 로마서에 서문을 달았다)을 듣는 가운데 이상하게 그의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리스도만을 신뢰함으로써 죄에서 해방되는 확신과 함께 의롭다하심과 거듭남을 동시에 체험하였다. 1738년 9월 존이 모라비안교도의 센터 독일 헤른후트 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많은 것을 배우고 특히 소규모 영성훈련 조직을 통하여 속회와 밴드 등의 영성훈련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모라비안의 정숙주의(quietism) 혹은 신앙제일주의(solafideism)의 경향에 실망을 느껴서 결국 모라비안과 함께 시작한 페터레인신도회의 분열을 가져 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739년 4월 1일 존이 브리스톨에서 산상수훈강해로 야외설교를 시작하였다. 최초의 감리교 모임이 브리스톨에서 모이기 시작하여 5월 9일 감리교운동의 최초의 센터인 새회당(New Room)을 브리스톨(Bristol)에서 지었다. 1738-39년에 니콜라스가(Nicholas Street)와 볼드윈가(Baldwin Street)에서 시작된 조모임(band)을 이 새회당에서 활성화시켰고, 1741년에 이르러 조모임을 더욱 강화하였다. 1739년 7월 킹스우드스쿨(Kingswood School)을 시작하였다. 읽고, 쓰고, 배우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고 철저히 영성을 훈련하는 학교를 만들었다. 킹스우드학교는 어머니 수잔나에게서 배운 철저한 청교도식 교육방법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중산층이 아니고 성공회교인이 아니면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시킬 수 없었다. 웨슬리는 과감하게 민중의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학교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감리교회목회자를 키우는 중요한 학교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1739년 12월 런던신도회(London Methodist Society)를 조지 휫필드(Jeorge Whitefield)와 함께 시작하였다. 그러나 칼빈적인 이중예정론의 입장을 강조한 휘필드를 날카롭게 비판함으로 결국 나뉘어 지게 되었다. "값없이 주시는 은총"(Free Grace)이란 설교를 통하여 예정된 자들만을 위하여 주시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for all) 모든 사람들 안에서(in all)나타나는 속죄의 은총임을 강조하였다. 1740년 4월 런던의 씨티 로드(City Road)에서 파운데리신도회(Foundery Society)를 조직하였다. 연합신도회(The United Society)도 파운데리에서 시작하였다. 1740년 7월 18일 모라비안교도들과 함께 시작한 페터레인신도회(Fetter Lane Society)가 신학적 논쟁으로 분열되었다. 1742년 선장 포이(Captain Foy)의 제안에 따라 새 회당의 빚을 갚기 위해 속회(class)가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성화훈련을 목적하여 감리교회를 성장시키게 된 중요한 조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6월 6일 아버지 사무엘의 교회를 방문하였으나 설교를 영국성공회가 허락하지 않자 예배당 밖에 있는 아버지 무덤 위에서 설교하였다. 7월 30일 어머니 수잔나가 사망하였다. 1744년 6월 25일 첫 번째 감리교 연회가 모였다. 첫 연회의 주 목적은 평신도 설교가들로 하여금 감리교회신학과 교리를 교육시키고 훈련시키려는 데 있었다. 1745년 최초의 평신도설교가 맥스필드(Thomas Maxfield)와 세�(John Cennick)을 비롯하여 평신도설교가(lay preacher)를 50명 세웠다. 평신도설교가들을 세운 이유는 영국성공회로부터 분열되지 않기 위해서 안수를 베풀지 안고 평신도들을 설교가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감리교회운동에 참여한 영국성공회에서 안수받은 성직자들은 불과 6명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평신도 설교가들을 세웠다. 1766년 1월 31일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평이한 해설"(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을 출판하였다. 이 저서는 그의 완전성화론을 가장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정리한 논문이다. 여러 번 수정하여 이해에 완전히 완성품을 만들었던 것이다. 1777년 런던 씨티로드에 '웨슬리예배당'(Wesley's Chapel)을 봉헌하였다. 이것이 세계감리교회 어머니교회(Mother Church of World Methodists)가 되었다. 그 이유는 최초로 세워진 '새회당'이 칼빈주의적 감리교도(Calvinistic Methodist)의 소유가 되었다가 최근에 감리교회가 매입하였으므로, '웨슬리예배당'이 세계감리교회의 어머니 교회의 명목을 이어 오게 되었다. 1784년이 웨슬리와 감리교회의 중요한 해였다. 2월 28일 감리교회 독립 조직 선언문을 작성하였다(Deed of Declaration). 9월 1-2일 미국 선교를 위한 성직안수를 베풀었다. 이미 영국성공회에서 사제안수를 받은 토마스 콕(Thomas Coke)에게도 미국선교를 위한 감리사(General Superintendent)로 임명하기 위한 안수를 존 웨슬리 자신이 베풀었는데 이것이 사실상의 감독안수가 되었다. 웨슬리는 콕이외에 와트코트(Whatcoat)와 베이지(Vasey)에게도 목사안수를 베풀었다. 12월 24일 웨슬리에 의해 감리사로 파송된 토마스 콕이 크리스마스연회를 개최하고 프란시스 에즈베리(Francis Asbury)에게 준회원 안수, 정회원 안수와 함께 제3일에는 감리사로 안수함(내용상의 감독)으로 미국감리교회가 조직되었다. 감독이라고 부른 것은 에즈베리가 처음 시도한 것이다. 웨슬리는 에즈베리를 교만하게 생각하였으나, 나중에는 미국의 현실을 수용하였다. 웨슬리의 기도서 개정판 인쇄하여 미국감리교회의 예배를 위해 보냈다. 웨슬리의 이후의 감리교회를 책임질 일백명의 대표를 웨슬리자신이 임명한 "법적 대표 백명(The Legal Hundred"를 구성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영국감리교회는 감독을 선출하지 아니하고 이 백중을 대표하는 회장을 선출하는 회장제를 선택한 것이다. 1787년 1월 8-12일 런던의 빈민을 위해 노구를 이끌고 299파운드를 모금하기도 하였다. 1788년 3월 29일 평소에 지병이 많았던 챨스 웨슬 리가 형보다 먼저 죽었다. 1790년 7월 30일 존이 정치가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에게 흑인 노예해방을 위한 서신을 보냈다. 1791년 2월 1일 미국 감리교도들에게 최후의 편지를 보냈고, 2월 22일 최후의 설교와 편지를 썼다. 2월 24일 윌버포스에게 노예해방을 위해 계속 정진할 것을 촉구하는 편지를 쓸만큼 그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흑인노예해방을 위해 노력하였다. 3월 2일 존 웨슬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하여, 3월 9일 런던의 씨티로드의 웨슬리예배당 뒷뜰에 묻혔다. 당 89세(만 87세 8개월)을 장수하였다. 그의 키는 160CM, 몸무게 55kG였고, 50년을 말을 타고 다니며 마상전도를 하였으며, 40만킬로 이상 전도여행을 하였고, 4만 2천회 설교하였으며, 200권이 넘는 저술을 남겼다. 웨슬리는 그의 생의 가장 마지막에 그의 아버지 사무엘같은 내적 증거의 영적 고백을 두 번이나 외치고 죽었다: "내 생의 모든 것 중의 최선의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다."(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존의 영적 내적 확증의 신앙은 물론 사도 바울의 롬8장에서도 영향받았고, 모라비안으로부터 마음의 종교(religion of heart) 의 영향도 받았지만 아버지 사무엘의 영향도 강하게 받은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성령이 나의 영으로 더불어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해 주시는 영적, 신비적, 내적 확증의 은혜를 웨슬리는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함께 헨리 아펜젤러가 한국감리교회역사를 시작하였다. 아펜렐러역시 웨슬리, 에즈베리에게서 나타난 복음주의 신앙, 의인화와 거듭남과 성화의 영성을 강조하는 신학을 갖고 한국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함으로써 한국교회를 웨슬리적 경건주의의 교회를 형성하였다. 새벽기도회, 속회 및 구역예배, 부흥회, 철야기도회 등 뜨거운 마음의 종교로써의 한국교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블로그 > Mitsein)

출처 : 성화사랑
글쓴이 : bae sung hw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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