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아펜젤러·스크랜턴 선교 13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움
일시 : 2015년 3월 16일 (월) 오후 2시
장소 :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
주제 : 한국 감리교회 개척선교사의 영향과 교훈
전용재 감독회장
“내한 주재 선교 130주년을 바라보며”
올해는 국가적으로는 광복 70주년이요, 교회적으로는 한국 감리교회 선교 131주년이면서 아펜젤러, 스크랜턴 선교사의 내한 선교 1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감리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기도하며 연합하여 사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사업을 준비하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한 사업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885년 조선의 개신교 선교사부터 시작해서 감리교회의 태동과 성장은 우리나라의 암흑기인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장 큰 수난을 겪은 시기에 감리교회는 고난에 동참하고 아픔을 돌보며 하나님께 이 민족의 눈물을 중보하며 자라났고 민족 계몽과 독립을 위한 선봉에 섰습니다. 이것이 감리교회를 보내시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이었고 맡겨주신 역할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이것이 바로 한국 감리교회의 정체성입니다.
따라서 선교 130주년 기념사업은 한국 감리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세워주신 정체성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이를 다음 세대 감리교인들에게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즉 감리교회의 성도들과 교회학교 학생들이 우리 감리교회가 어떤 선구자적 역할을 감당했는지 제대로 알고 이를 바탕으로 감리교인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는 기회로 삼아야합니다.
특별히 기념사업에는 130년 전 아펜젤러와 스크랜턴의 선교가 개화기 한국사회의 빛이 되었듯이 한국 사회와 북한지역에 빛의 소망을 주기 위하여 130명의 시각장애인들이 각막이식수술로 시각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북한 나무심기, 북한 진료소 설치를 준비하고 있으며, 학술심포지움을 시작으로 기념예배, 선교문화탐방, 선교사대회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합니다.
환영인사 : 여우훈 감독(서울연회)
“우리의 역사와 정체성을 깨닫고 미래로 나가는 시간을 갖자”
진행 : 조경열 목사(아현교회)
기도 : 김상현 감독(중부연회)
제1발표 : 이덕주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매클레이의 선교사역
매클레이는 부인과 일본인 요리사를 대동하고 1884년 6월 8일 영국 상선 테헤란호로 요코하마를 출발 나가사키로 가서 거기서 조선인 통역을 구하였다. 그리고 난징호로 갈아타고 6월 19일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6월 20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배가 부산에서 하루 반을 머물렀던 관계로 매클레이 부부는 부산에 상륙하여 그곳에 책방을 내고 성경을 팔고 있던 일본 매서인(賣書人) 나가사카(長板)를 만나 대화와 기도를 나누었다. 그리고 부산을 출발하여 43시간 항해 끝에 6월 23일 오후 1시 인천에 도착하였고 이튿날 아침 하선해서 일본영사 고바야시의 영접을 받은 후 작은 배를 타고 한강으로 해서 6월 24일 오후 6시에 서울에 도착했다. 이로써 매클레이는 ‘공개적으로’ 수도 서울에 들어온 첫 번째 프로테스탄트 선교사가 되었다.
매클레이는 서울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인 6월 30일, 김옥균을 만났다. 매클레이는 “최대한 격식을 갖추고 기독교의 진정한 정신을 담아” “한국에 들어와서 일하고 싶다는 것과 한국에서 첫 번째로 하고 싶은 사업의 내용을 약술한” 제안서를 김옥균에게 주면서 국왕에게 전달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사흘이 지나 7월 3일 매클레이는 다시 김옥균을 만났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김옥균은 “전하께서 어제 밤 당신 편지를 세밀하게 검토하셨다. 당신이 제안한 학교와 병원 설립을 가납하실 것으로 보인다.”며 “자세한 내용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당신은 곧바로 일에 착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그 날(7월 3일) 저녁, 김옥균은 매클레이를 다시 만나 국왕에게 올린 의향서가 ‘가납되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해주었다. 그러면서 축하의 인사와 함께 “즉시 사업을 시작해도 될 것이다. 나도 최선을 다해 돕겠다.”는 뜻을 표하였다. 이러한 매클레이와 김옥균의 면담은 미국공사관 공관 안에서 이루어졌다. 푸트 공사와 통역관 윤치호가 동석하였음은 물론이다.
1885년 개척 선교사들(스크랜턴 가족과 아펜젤러 부부)이 서울에 들어가면서 한국선교회 관리자(장로사) 직책을 아펜젤러에게 넘겨주었지만 매클레이는 여전히 ‘어른’ 선교사로서 이 모든 개척 과정을 지도하고 후원하였다. 그는 이후에도 일본에 머물면서 한국에서 일하는 선교사들과 미국에서 후원하는 선교회를 연결하는 ‘중계자’로서 역할을 감당하였다.
매클레이의 ‘전폭적인’ 기도와 후원을 바탕으로 한국 선교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선교 착수 1년 만에 정동 선교부에서 아펜젤러는 남학교(배재학당), 스크랜턴 부인은 여학교(이화학당), 스크랜턴은 병원(시병원)을 각각 설립하고 본격적인 선교사역을 추진하였다.
제2발표 : 김칠성 교수(목원대학교)
한국감리교회의 주춧돌을 놓은 아펜젤러 선교사
- 아펜젤러 한국선교 130주년을 기념하며
아펜젤러는 1885년 27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에 와서 17년 동안 사역을 하다가 그가 44세 되던 1902년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선교개척자(missionary pioneer)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감리교회, 아니 한국교회 전체, 나아가 한국사회 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아펜젤러는 보고서에 “아펜젤러 부인이 작은 배에서 내려 바위 위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었다.
Mrs. Appenzeller first stepped from the sampan upon the bare rocks.”
즉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주일 오후 3시에 인천 제물포에 함께 도착한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 중에 아펜젤러 부인(혹은 부부)이 먼저 한국 땅을 밟은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아펜젤러의 삶을 세 가지 측면(영적, 사회적, 정신적)에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영적으로 그는 진정한 회심을 경험하고 구령의 열정을 가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둘째, 사회적으로 아펜젤러는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마음 따뜻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셋째, 정신적으로 그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순응과 저항의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로운 인물이었다.
아펜젤러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가지고 ‘기다려야 할 때, 나아가야 할 때, 그리고 싸워야 할 때’를 분별할 줄 알았던 참으로 지혜롭고 용맹한 사람이었다. 아펜젤러의 뜨거운 영성, 따뜻한 사회성, 냉철한 시대정신이 2015년 그의 한국선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한국감리교회 안에 다시 한 번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제3발표: 하희정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그녀를 기억하며 : 감리교의 ‘오래된 미래,’
메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
1. 감리교의 선교적 정체성 : ‘가라, 가난의 땅으로 고난의 현장으로’
매리 스크랜턴은 1885년 개척선교사로 내한하여 1909년 77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24년간 한국선교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매리 스크랜턴이 감리교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드러낸 것은 안정된 기반에 안주하지 않는 ‘선교정신’과 중심이 아닌 변방에 늘 시선을 두는 ‘선교방향’이다.
1886년 정동에 이화학당을 세워 여성교육을 처음 시작할 때도 그의 첫 학생들은 거리에 버려지거나 가족에게 버림받은 가난한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매리 스크랜턴은 호기심으로 찾아오는 한국여성들에게 자신의 집을 기꺼이 개방하였다.
매리 스크랜턴은 가는 곳마다 교회의 기초를 세웠지만 그곳에 안주하지 않고 교회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변방의 민중여성들을 쉬지 않고 찾아다녔다. 그는 “풍성한 수확”을 탐내지 않았다.
2. 사람이 미래다 그리고 희망이다
선교사역을 위한 전문교육을 받지 못한 것이 매리 스크랜턴의 선교사역에 장애가 되지는 못했다.
매리 스크랜턴은 전문교육을 받지 않은 개척선교사와 전문성을 갖춘 선교사의 역할이 달라야 함을 정확하게 인지했다.
매리 스크랜턴은 미국의 해외여선교부에 선교지 여성들의 교육을 체계적으로 이끌 수 있는 전문지식을 갖춘 여선교사가 필요하다고 지속적으로 요청했다.
그리고 자신은 연륜과 지혜가 필요한 현장으로 갔다. 대표적인 예가 그가 시작한 지방 교회들의 매일학교 사역이었다.
3. ‘포용’과 ‘협력’ 정신 : 리더십을 넘어 파트너십으로
매리 스크랜턴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가 ‘홀로’ 주도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배려하고 ‘여럿이 함께’ 노력하고 협력하는 파트너십을 몸소 실천해보였다.
남북감리회는 공평한 재정분담과 인적 자본의 공유를 바탕으로 합동운영을 시도하는 한편, 매리 스크랜턴이 세운 감리교부인성서학원도 1921년부터 양 감리회가 공동운영하는 ‘협성여자신학교’로 새롭게 출발하며 감리교의 ‘협력’ 정신이 남자신학교와 여자신학교 모두 각각 하나로 만들고 통일된 신학적 정체성을 생산해내는 공간으로 자리 잡게 한 셈이다.
감리교의 정체성과 신학의 통일은 교회들 간의 협력으로 이어졌고, 교회의 협력은 조직의 통합으로 이어져 1930년 마침내 ‘기독교조선감리회’가 탄생할 수 있었다.
양감리회는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처음으로 3년간의 실험과정을 거쳐 남녀공학제를 정착시키는 열매도 얻게 되었다. 협성신학교와 협성여자신학교가 하나로 통합하여 ‘감리교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로 재탄생한 것이다.
교회의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매리 스크랜턴의 ‘가라, 아픔과 고통이 있는 곳이 곧 교회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말없는 가르침은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선언하며 거리의 민중들을 찾아 나섰던 존 웨슬리의 가르침에 다름 아니었다.
‘리더십을 넘어선 파트너십’의 실천은 변화의 기로에서 ‘홀로’ 이룰 수 있는 역사는 없음을 보여주며, 역사의 강은 ‘여럿이 함께’ 어우러져 ‘흐름’을 만들어내고 ‘물꼬’를 터가는 것임을 스스로 증명해낸 감리교 정신에 다름 아니었다.
상대를 인정하고 배려하며 평화로운 공존과 아름다운 화합을 만들어내는 ‘포용’과 ‘협력’의 파트너십이 필요하다.
역사를 미래의 자산으로 삼기 위해서는 비판적 사고도 더 없이 소중하다.
감리교회의 정체성과 정신을 새롭게 회복하고 가다듬어 이를 미래의 새로운 도전으로 삼는 실천적 사고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제4발표 : 서영석 교수(협성대학교)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한국 선교의 문을 연
윌리엄 B. 스크랜턴
스크랜턴의 한국 선교에 대한 의미
1. 의료 활동 통해 최초로 한국 선교를 시작하고 효과적인 사역을 펼친 인물
선교 초기 당시 아직 기독교 선교가 자유롭지 못했던 시기에 한국인들에게 다가가 마음을 열 수 있었던 방법은 의료 활동을 통한 치유와 돌봄 사역이었다.
스크랜턴은 자신의 개인병원 개설을 통해 자유롭게 환자와 만나고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최초의 주한 정주 선교사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스크랜턴의 의료행위의 성공이 그와 함께 내한한 개척선교사들인 아펜젤러, 스크랜턴 대부인과 장로교의 언더우드가 교육활동을 통해 활약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의 의료선교는 곧 섬김과 베풂, 자기희생을 통해 한국 땅에 실천되었다. 즉 기독교의 의료 선교정신을 구현하면서 스크랜턴의 표현대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병원 역할을 해 나갔던 것이다.
2. 헌신적 활동을 통하여 실천 신앙정신을 구현해 낸 인물
그는 소외당하고 병이 들어 있는 아이를 돌보면서 진정 따뜻한 보살핌과 사랑으로 치료하는 의술은 물론 인술 즉, 기독교 사랑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였다. 예를 들면 그의 사랑으로 치유된 사람들 중에 한 구걸하던 여인은 스크랜턴 태도에 감동되어 예수를 믿고 그의 집안에서 일을 돕는 사람이 되었고, 버려졌던 아이 ‘별단이’는 스크랜턴의 도움으로 공부하여 이화학당을 졸업하여 간호사가 되어 여성병원인 보구여관에서 일하게 되었다. 구걸하는 사람, 버려진 아이를 돌보는 스크랜턴의 활동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 아니고는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사역이었다.
3. 교육목회와 인재양성에 힘쓴 인물-상동파를 기르고 한국교회 성격 형성에 기여
스크랜턴의 지도를 받으며 예수를 영접하게 된 토착인들은 그의 인품과 언행일치의 모습에 감동받았고 그의 가르침을 받아 한국 기독교와 민족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게 될 인물들로 성장하였다. 예를 들어 전도자와 목회자로 성장한 노병일과 이은승, 전덕기, 을미의병 의병장 출신의 전도자 구연영,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1인으로 참여하여 감리교회를 대표한 이필주 등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훈련받아 전도자로서, 또한 한국교회를 책임지는 지도자로 양성되었다.
이러한 인재양성에 대한 관심과 그의 교육목회는 결국 스크랜턴이 담임하는 교회에서 상동파들이 배양되는 결과를 만들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스크랜턴이 세운 교회에서 이러한 신앙실천을 통한 민족구원의 큰 흐름을 만들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4.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과 선교
스크랜턴의 병원을 통한 환자 돌봄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기독교의 중심사상을 실천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가 내포되어 있었다. 특별히 그의 사역은 매우 열악한 환경 속에 있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스크랜턴은 결국 예수께서 말씀하신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의원이 쓸 데 있느니라”(마태복음 9:12)는 가르침을 그대로 한국인들에게 실천하며 한국선교 초창기에 구체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당한 자들에게 의료 사업을 실시하였다.
스크랜턴의 병원사역이 인정받아 고종으로부터 시(施)병원이라는 사액현판을 하사받게 된다.
그는 병원 이름을 “만인에게 시혜(施惠)를 베푸는 병원”이라는 차원에서 ‘만인 구제 병원’(Universal Relief Hospital) 혹은 ‘일반구제병원’(General Relief Hospital)으로 풀이하였다.
5. 뜨거운 구령열과 토착교회 설립 의지를 가지고 힘쓴 인물
그가 의사로서 한국 땅에서 환자를 돌보며 치료하는 사역을 처음 시작하며 선교사직을 수행했지만 그의 사역의 궁극적인 목표는 복음전도를 통하여 예수를 믿고 영혼이 구원 받는 것이었다. 즉, 그의 병원과 시약소를 통한 활동은 환자들이 육신의 질병을 치료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영혼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변할 수 없는 선교의 최종의 목적은 ‘영혼 구원’이었기에 그는 늘 구령열에 불타 있었다.
스크랜턴은 서울 동대문교회와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목회하면서 동시에 선교 관리자로서 의주와 평양, 원산, 대구, 전주, 공주 등지를 순방하면서 감리고 선교 사업을 지휘, 감독하였다.
그의 복음전도의 특징은 노구이신 어머니 스크랜턴 대부인과 동행하며 전도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순회전도를 행할 때 세례를 주고 교회를 세웠는데 토착인 전도자들을 세워 교육하고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병행하였다.
스크랜턴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관리나 지휘를 받지 않고 스스로 독립하여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독립한 ‘토착교회’를 지지하였다, 스크랜턴이 지향하였던 한국교회의 미래는 한국인에 의한 한국교회의 완성이었다. 즉 교회 조직과 목회는 한국인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크랜턴은 ‘자립 의지’를 지닌 토착교회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논찬
김흥규 목사(내리교회)
이덕주 교수의 ‘매클레이’와
김칠성 교수의 ‘아펜젤러’ 강연에 관한 논찬
황병배 교수(협성대학교)
“한국감리교회의 주춧돌을 놓은 아펜젤러 선교사”에 대한 논찬
조은하 교수(목원대학교)
그녀를 기억하며 :
감리교의 오래된 미래,
메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에 대한 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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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국제학술 심포지움
일시 : 2015년 4월 6일 (월) 오후 2시
장소 :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
주제 : 한반도 평화통일과 선교의 미래적 방향
기조발표 : 세계감리교회의 동향과 정의·평화 실현을 위한 한국감리교회의 파트너십
- Ivan Abrahams감독(세계감리교회협의회 총무)
제1발표 : 한반도 평화통일 문제와 한국교회의 과제와 역할- 허문영 박사(통일연구원)
제2발표 : 한반도 화해와 교류를 위한 한.미 교회의 선교협력의 과제- 정희수 감독(UMC 위스콘신 연회)
논찬 : 유관지 목사(감리교북한교회 연구원), 박충구 박사(감신대)
기독교대한감리회 아펜젤러·스크랜턴 모자 선교 130주년/광복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본부 선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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