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703년 영국 잉글랜드 링컨셔 주 에프워스
사망 1791년 영국 런던
국적 영국
학력 옥스퍼드 대학교
직업 감리교회 창시자, 설교가, 신학자, 사회운동가
종교 감리교
부모 부친은 새뮤얼 웨슬리, 모친은 수산나 웨슬리
친척 동생 찰스 웨슬리
존 웨슬리(Rev.John Wesley, 1703년 ~ 1791년)는 감리교 운동을 창시한 영국 성직자이다. 감리교와 성공회에서는 그의 회심일인 5월 24일을 기념하고 있다.
생애
성장 과정
1703년 6월 17일 링컨셔 주 엡워스(Epworth)에서 성공회의 보편교회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앵글로 가톨릭 전통의 성공회 사제인 새뮤얼 웨슬리(Rev.Samuel Wesley)의 아들로 태어났다.[1] 새뮤얼 웨슬리는 40년간 교구 일을 맡아 본 성실한 성직자였으며, 자녀들의 교육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부친 새뮤얼 웨슬리의 영향으로 존 웨슬리는 기도, 신학공부, 성례전에 따른 엄격한 신앙생활을 주장하였으므로, 훗날 존 웨슬리와 그의 동지들의 감리교 운동을 메소디스트(규칙주의자)라고 부르게 되었다.[2] 그의 어머니 수산나는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에 능통할 만큼 빈틈없는 학문 실력으로 19남매를 직접 가르쳤으며, 아이들이 규칙적인 생활과 기도를 하도록 하였다. [3]영국교회사에서 존 웨슬리라는 지성적이고 활동적인 신학자가 나온 것은 부모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생 시절
1720년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처치에 입학한 존 웨슬리는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논리학, 윤리학, 철학, 물리학, 웅변, 시와 노래, 신학 등 다양한 학문을 익혔으며[4], 성적도 우수하였다. 웨슬리가 복음주의 운동으로써 영국 성공회와 사회를 변혁한 것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하는 지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복음주의 운동
존 웨슬리는 1725년 영국 성공회 부제로 서품되었으며, 1726년에는 링컨 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진로 문제로 고민하던 존 웨슬리는 중세 영성가 토마스 아 캠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죽음》의 영향으로 성직자가 되어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회심
1728년 9월 사제품을 받은 존 웨슬리는 1729년 옥스퍼드대학교에 돌아와, 동생 찰스 웨슬리(1707년 12월 18일생)가 결성해 놓은 거룩한 모임[5]의 지도자가 되었다. 존 웨슬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로 청중들을 감화시켰는데, 이는 신학생 시절 신학과 웅변을 성실하게 공부한 덕분이었다. 1738년 5월 24일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우연히 들은 마르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 회심후 그는 존 웨슬리는 조지 휘트필드 신부의 영향으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를 돌아다니며 직접 민중들에게 전도하였는데, 죽을 때까지 40만km나 여행했다고 한다. 1739년 미국 뉴저지주에서 선교를 하고 있던 부제에게 성공회가 사제서품을 주지 않는 것에 반발해 자신이 스스로 사제서품을 줌으로서 사실상 성공회에서 감리교회가 분열되었다. 하지만 존 웨슬리 사제 자신은 자신을 성공회 사제로 인식하였다. 왜냐면 그의 존 웨슬리 사제의 복음주의 운동은 사회적인 영향을 상실한 성공회를 갱신하려는 신학운동일 뿐이지,새로운 교회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6]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제제
영국 성공회의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제제는 복음주의자들의 국가교회 저항에 대한 정신을 주관적인 종교경험으로만 국한한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복음주의 운동은 국가교회인 영국 성공회가 보기에 국가교회와 국가질서를 혼란하게 한다고 여겨져서, 복음주의 설교자들의 설교를 금하였고, 교회내 복음주의 성직자들을 파문하였다. 웨슬리도 파문에 포함된 성직자였다.
감리교회에서의 활동과 별세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성공회의 제제로 교회에서 목회를 할 수 없게 되자, 존 웨슬리는 그 자신이 이룬 영국내 복음주의 운동이었던 감리교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감리교회가 영국내에서 활동하고, 기독교 윤리적으로 무기력하던 성공회 내부에서 복음주의적 변혁의 힘이 되길 바랐다. 그래서 그는 감리회의 대표이며 동시에 직무를 박탈 당했어도 파면된 성공회 성직자의 자격은 남았다. 1791년 3월 2일 친지들에게 "평안히 계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복음주의 운동의 영향
존 웨슬리를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Evangelical) 운동은 개인적 복음과 사회적 복음의 입장을 지닌 감리교회로 발전하였고, 영국 성공회에는 국가교회인 영국 국교회로 안주하는 것에 반대하는 복음주의적 생명력을 심었다. 이러한 존 웨슬리의 복음주의 운동은 교회의 전통, 예전, 성사를 중요하게 생각한 옥스퍼드 운동(Oxford Movement)과 함께 성공회의 전통으로 존중되고 있다. 전자는 저교회파(Low Church), 후자는 고교회파(High Church)로 불리기도 하였다.[7]
신학
존 웨슬리는 개인적 회심, 성공회 기도서에 따른 철저한 신앙생활(감리교를 뜻하는 Methodist가 원리원칙에 철저히 따르는 사람들을 뜻함), 성례전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례전적 신앙생활의 회복,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8],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칭의(稱義)론을 기독교인이 성령에 의해 거룩한 사람으로 자라가기 위한 전제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적극적인 복음전파, 거듭남의 은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경외, 죄를 멀리 하는 거룩한 마음,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사회참여
존 웨슬리는 신약성서의 희년사상(누가복음서 4:18-19)에 근거한 사회운동을 고민하였던 실천하는 신학자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회개혁사상을 주장하였다.
고용안정:실업은 빈곤의 원인이므로 고용이 안정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부당성 : 자본주의는 실업증가, 가난, 사회적 불평등, 독점화를 가져온다고 지적하고,재산을 공유한 고대교회의 사회주의 사상을 주장함.
세금제도 개혁:부자감세 반대,민중감세 주장(민중들의 세금부담 감소)
상속반대: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만 상속.
노동으로써 정직하게 번 돈으로 이웃을 도와야 한다.
돈의 위험성 지적:돈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한다.만약 교회가 부자가 되면 성령께서 떠나신 교회가 될 것이다.웨슬리는 그를 따르는 설교자들에게 부자들을 비평하는 설교를 하여야 한다고 했다.
연대실천:억눌린 자를 변호하고 고아를 위로하며 과부에게 남편이 되어 주어 마음속에서 기쁨 의 노래가 나오도록 도와야 한다.[9]
[1] 성공회 복음주의 활동가 존 웨슬리 신부의 삶-성공회 분당교회 이주엽 신부의 강의
[2] 성공회 복음주의 활동가 존 웨슬리 신부의 삶-성공회 분당교회 이주엽 신부의 강의
[3] 《기독교교육》2008년 6월호,기독교교육과 신학-복음주의 부흥운동가,요한 웨슬레,배성산, 대한기독교교육협회
[4] 대구성서아카데미 칼럼-신완식의 런던이야기
[5] 원어는 Holy Club이며, 신성 클럽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6] 《성공회의 역사》/대한성공회 선교교육원
[7]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새로운 나,우리》/홍영선 지음/대한성공회 p.136
[8]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9] 웨슬리의 희년운동
경건주의
敬虔主義
Pietism (독)Pietismus.
17세기 독일 루터교에서 시작되어 많은 영향을 끼친 신앙개혁운동.
교회의 세속화에 반대하여 개인적 신앙을 강조한 경건주의는 곧 다른 나라들에 퍼졌고, 시간이 감에 따라 사회적·교육적 관심사들도 강조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해서 신앙이 경험에서 멀어지게 될 때마다 그에 대한 반동으로 경건주의 운동들이 일어났다. 17세기초 루터교는 로마 가톨릭과 종교개혁권 내의 반대파들과 논쟁하는 데는 유용했지만 영적인 양식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는 스콜라주의적 체계로 굳어져버렸다. 30년전쟁으로 폐허가 된 독일에서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부흥의 징후들이 나타났고, 경건문학과 신앙적 신비주의 전승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다. 리처드 백스터, 존 버니언을 비롯한 여러 저자들의 작품이 번역되면서 영국 청교도사상의 영향이 대륙에 미쳤다. 신앙적인 이유에서 네덜란드로 추방된 사람들, 그중에서도 윌리엄 에임스는 독특한 네덜란드 경건주의를 일으켰는데, 그것이 곧 독일에 확산되어 독일 루터교권에서 이미 '개혁 정통주의'로서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 개혁운동의 일부가 되었다. 이들 정통파 루터교인들의 '가슴과 심장의 신학'은 요한 아른트(1555~1621)가 쓴 책들로 가장 잘 대변되었고 또 폭넓게 소개되었다. 또한 루터교가 그 시기에 쓰던 찬송가도 영적인 부흥 분위기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여러 갈래의 부흥운동은 필리프 야코프 슈페너(1635~1705)의 삶과 활동을 통해 하나로 수렴되었다. 슈페너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행정목사로 있으면서 그 도시의 타락한 삶을 보고 고민하던 끝에 최초의 ' 경건자들의 모임'(collegia pietatis)을 조직했고,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이 그 안에서 정기적으로 만나 성서를 읽고 영적 깨달음을 나누었다. 이런 모임은 곧 그 운동의 특징이 되어 그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경건주의자라고 불렀다.
슈페너는 자기가 쓴 책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경건한 소원들 Pia Desideria〉(1675)에서 당시의 정통파를 무력하다고 평가하고 개혁을 위한 제안들을 내놓았다. 그 제안들은 다음과 같다. ① 개인적·공적으로 성서를 더 많이 사용할 것, ② 평신도들에게 신자의 제사장적 책임들을 더 많이 지게 할 것, ③ 살아 있는 신앙의 실천적인 열매들을 맺는 일의 중요성, ④ 논쟁보다는 경건과 배움을 중시하는 목회자 훈련, ⑤ 교화를 목적으로 한 설교 등이다. '경건자들의 모임'은 이러한 개혁을 실행하기 위한 이상적인 도구였다.
독일 경건주의의 지도권은 슈페너로부터 할레대학교의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에게로 넘어갔다. 프랑케는 유능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할레대학교를 경건주의의 유력한 제도적 중심지로 만들었고 그 대학교와 관련하여 수많은 자선단체들이 생겼다. 할레대학교가 배출한 유명한 인물들 가운데는 아메리카 식민지에 루터교를 조직한 헨리 멜키오르 뮐렌베르크(→ 뮬렌버그가)가 있다 (→ 색인 : 뮬렌버그가).
할레대학교가 배출한 또 하나의 인물인 니콜라우스 루트비히 카운트 폰 친첸도르프(1700~60)는 작센에 있는 자신의 영토에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은 모라비아교도 난민들을 대상으로 모라비아 교회를 세웠다. 할레파 경건주의자들이 참회를 요구한 데 반해 친첸도르프 추종자들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구원을 위해 유일한 필수조건이라고 설교했다. 경건주의가 독일 밖에서 직접적이고도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아마 친첸도르프의 노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감리교를 세운 존 웨슬리는 모라비아교도들에게 유익한 영감을 받았으며, 구원의 은혜를 강조하는 등 중요한 경건주의적 요소들을 당시 갓 시작한 복음주의 운동에 첨가했다. 다른 교단들은 목회신학·선교활동·예배형식에서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경건주의운동이 절정에 달한 것은 18세기 중엽이었지만 이 운동은 그후로도 계속되었으며 현재도 독일의 여러 지방과 그밖의 나라들의 모라비아 교회에 뚜렷이 남아 있으며, 일반 복음주의적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에서 내면적으로 남아 있다. 19~20세기의 신앙부흥운동들은 직접 또는 간접으로 경건주의와 연관되었으며, 반대로 경건주의도 그 부흥운동들로부터 자극을 받았다.
경건주의 초기역사 : F. Frnest Stoeffler, 송인철·이훈영 공역, 솔로몬, 1993
기독교사상사개설 : 김희보, 대한기독교서회, 1992
경건주의 : 마틴 슈미트, 구영철 역, 성광문화사, 1992
경건주의자들과 그사상 : 피터 C. 어브, 엄성옥 역, 은성, 1991
독일의 경건주의 : 주도홍, 기독교문서선교회, 1991
경건주의 이해 : 데일 브라운, 오창윤 역, 생명의말씀사, 1987
German Pietism During the Eighteenth Century : F. Frnest Stoeffler, 1973
Pietism as a Factor in the Rise of German Nationalism : Koppel S. Pinson, 1934(reissued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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