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교육의 선구자 메리 F. 스크랜톤 선교사(1832-1909)
양화진 제1묘역에는 이화학당(현 이화대학교) 설립자이며, 한국 여성교육의 선구자 메리 F. 스크랜톤(Scranton, Mary Fletcher Benton, 1832-1909) 선교사 묘지가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 벨처타운에서 1832년 12월 9일 출생하여, 1855년 윌리암 T. 스크랜톤(William T. Scranton)과 결혼하였고, 외아들을 낳았다.
1872년에 남편과 사별하고 1884년 52세의 늦은 나이에 미국 감리회에서 한국에 파송하는 여성 첫 선교사가 되었다.
아들 윌리암 B. 스크랜톤과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의료선교사로 파송된 희귀한 역사’를 이룩하며 한국에 왔다. 입국 경로는 1885년 2월 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2월 27일 일본에 도착, 잠시 머물었다가 1885년 6월 20일 내한했다.
1886년 5월 31일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으로 이화학당을 설립했다. 당시 학생은 1명이었다. 김부인이라는 어느 고급관리의 작은댁으로 왕비의 통역관이 되려는 야심을 갖고 입학했으나 석 달을 못 채우고 학교를 떠났다. 그 후 ‘별단이’라는 학생이 입학했다. 1886년 11월에는 한옥 교사(校舍)를 완성하여 이사했다.
1887년에는 학생수가 7명이 되어, 민비는 교육사업의 의의를 인정하고 정부가 승인한다는 의미에서 김윤식을 통하여 “梨花”라는 교명의 편액(扁額)을 하사했다.
학생수가 늘면서 2층의 붉은 벽돌집을 다시 지었다. 이 건물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화제가 되었으며 스크랜톤 선교사를 대부인이라 호칭했다. 1908년 5월 31일에는 이화학당 초대 ‘메이 퀸’으로 추대되었다.
이화학당은 표면적으로는 교육기관이었으나 선교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정동제일교회 초대 여성교인은 거의 이화학당 학생이었다. 상동교회에서 전도부인을 대상으로 단기 성경교육을 시작 한 것이 후일 협성신학교로 발전했다.
1903년에는 수원 삼일학교(매향학교)를 설립하므로, 수원, 공주지역의 지방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교회가 설립되었지만 여성들을 교육할 인력과 시설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여성 선교사업을 계획하고 이에 대한 인력을 지원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스크랜톤 대부인은 한국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여성교육에 진력했다. 그의 저서(단행본)로는 《그리스도 셩교문답》《지구 약론》등이 있다.
1909년 10월 8일 새벽 상동 자택에서 77세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사-7)되었다. “한국의 젊은 여성을 위한 사업(교육, 선교)의 선구자중 한사람이었다. 다년간 충실히 봉사하고 그가 선택한 한국에서 많은 좋은 일들의 향기와 기억을 남겼다.”고 에비슨 박사는 추모했다.
비문에는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 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톤 여사가 이화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진 출처: 다음(Daum) 및 연합뉴스
◇ 상동교회와 정동병원을 설립한 윌리암 B. 스크랜톤 선교사(1856-1922)
스크랜톤 대부인의 외아들 윌리암 B. 스크랜톤(Scranton, 施蘭敦)선교사는 1856년 5월 29일 미국 코네티컷 뉴해븐에서 출생하여 예일대학(1878)과 뉴욕 의과대학(1882)을 졸업했다.
루리 W. 암스(Loulie Wyeth. Arms)와 결혼하여, 오하이오주 개업의사로 활동(1882-1884)하다가, 1884년 미국 감리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목사 안수를 받고 1885년 5월 3일 내한했다.
한국에서 왕립병원(제중원)의 봉사를 시작으로, 1885년 9월 10일 최초의 민간병원 ‘정동병원’을 설립하여 독자적으로 의료 활동을 했다. 제중원에 이어 두 번째 병원이었다. 1886년 6월 병원 시설을 확장했으며, 1887년 고종 임금은 “施病院”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1890년에는 상동병원(현 남대문시장 상동교회 자리)을 설립했다. 그 후 거주지와 활동지를 상동으로 옮겨, 상동교회를 설립했다.
선교부에서는 미국 감리회 조직을 위해 앞장섰고, 회계와 선교부 관리자로 서울 경기 지역의 감리사로 폭 넓게 활동했다. 성서 번역위원으로 위촉되어 성서사업에도 공헌했으며, 로마서 에베소서를 주로 번역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후 1907년 6월 서울에서 열린 ‘감리회선교연회’에서 선교사직을 사임했다. 사임한 뒤에도 귀국하지 않고 독자적 의료 활동에 힘썼다. 만년은 일본에서 보내다가 코베에서 1922년 3월 쓸쓸히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코베 캇가노 묘지에 묻혀있는 것으로 전해지며 아직 양화진에 안장되지는 못했다.
출처 : <양화진 선교회>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선교문화신문 기자 2004-09-12 (120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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