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아 편지로 보낸 아시아의 7교회는 현재 터키 남부 지역 일대에 위치해 있다. 당시 7교회 이외에도 골로새, 갈라디아, 히에라볼리 교회등이 있었다.
<두아디라교회>
티아티라고 하며 현재명은 아크히사르이다. 당시 이 도시에는 트림나스라는 무당이과 무녀(巫女)들이 많아 기독교인들을 유혹했고 또한 시장 조합을 중심으로 우상 숭배와 음란한 제사들이 행해지고 있었다
두아디라 염색 기술, 두아디라는 옷감 기술이 뛰어난 곳으로 빌립보의
루디아도 두아디라 출신으로 자주 옷감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되었다
<버가모교회>
버가모왕국에는 토지와 풍산의 여신 데메테르 신전터가 남아있는데 기원전 3세기 초에 세워졌으며 로마시대에 개조 되었다. 이곳에는 "알지못하는 신에게" 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버가모왕국 입구를 들어서면 왼쪽으로 보이는 것이 아타로스1세와 유메네스 2세의 헤론 (신성한 지역)이다. 헤론 앞의 것들은 가게들이었다. 그 앞을 지나면 제우스 신전터가 나오는 데 지금은 불행히도 소나무 3그루만 있다. 제우스 신전(로마명으로 쥬피터)은 주전 180년에 유메네스 II세에 의해서 건축된 신전으로서 세계 7대 명물 중의 하나였다. 이 신전은 길이 27m, 높이 12m나 되는 웅대한 신전으로 온통 고대 조각예술로 장식되었다. 이 곳의 유물은 독일의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굴이 되었기 때문에 이 신전의 유물들은 모두 동베를린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헬라 신화에 의하면 제우스 신은 신 가운데 최고의 신이고 전 인류의 통치자이며 기후를 주관하는 신으로 여겨지고 제우스 신의 출생지가 바로 버가모라고 알려지고 있다
이 신전은 페르가몬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으로 기원전 4세기 경에 지어졌다. 이 신전은 유메네스 2세에 의해 북쪽과 동쪽면에 2층의 화랑을 갖게 되었다. 신전으로 통하는 입구는 동쪽 화랑의 남쪽 끝에 위치해 있었는데, 현재 이 대문의 조각들을 사용해 베를린에 그대로 복원되어있다. 이것을 근거로 해볼 때 화랑의 아래층 기둥은 도리아식이고 위층은 이오니아식의 기둥으로 되어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기둥의 석가래에 "유네메스 왕으로부터, 그에게 승리를 내려준 아테나 여신에게"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신전 마당의 중앙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조각이 세워져 있었다고 전해지며 마당에는 갈라티아인들로 부터 노략한 전리품들을 진열했다고 한다.
제우스신전을 돌아서 오른 쪽으로 가면 극장이 나온다. 이 극장은 10,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극장의 제일 밑의 오른쪽 방면으로 디오니소스의 신전을 볼 수 있다. 연극이 원래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에 대한 축하의식에서 발생한 것이기에 일반적으로 디오니소스 신전은 극장 가까운데 세워지기 마련이다. 또한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동물을 희생시켜 행해지는 제사의식도 이 신전에서 거행되었다. 이 신전은 카라칼라 황제가 원정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에 배의 사고로 다쳐 아스클레피온에서 치료를 받고 완쾌된 후 그 보답으로 지어진 것이다.
버가모왕국 트라얀 황제신전, 당시 버가모는 소아시아 지역 수도였고 아크로폴리스(왕국)안에는
여러개의 신전(제우스, 디오니소스 등)과 함께 트라얀 로마 황제 신전이 있었다.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로마명은 옥타비안) 황제를 신격화하기 위해서 주후 30-40년 사이에 아시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세워졌습니다. 트라얀 황제의 신당은 주후 98년에서 117년 사이에 건축되었고, 세베투스 황제를 숭배하기 위해 서 주후 193-211년 사이에 건축이 되어졌습니다. 하드리안 황제 때 완공한 이 신전은 지형상 깍아진 V자 형의 절벽사이에 걸쳐 짓게 되었다. 따라서 지형을 평평히 고르기 위해 신전 앞부분에 축대를 쌓을 수 밖에 없었다. 주위의 다른 건축물들이 회색이나 분홍의 대리석을 사용한 반면 이 신전은 선명한 흰 대리석을 사용함으로써 산 밑의 평원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나 보인다. 신전의 3면은 모두 기둥으로 둘러싼 화랑이 있었으며 신전의 안쪽 마당에는 제단이 세워져 있고 제단의 양쪽 끝에는 황제의 조각을 세워 놓았으나 오늘날에는 그 모습이 남아있지 않다.
버가모 시내에 있는 세라피스 신전은 원래 이집트 신이기 때문에 "이집트신전"이라 불리기도하며 신전 건물이 붉은 벽돌로 지어져서 "붉은 궁전(The Red Hall)"이라고도 한다. 나중에 기독교가 공인된 후 요한 계시록의 버가모교회에 바쳐지기 위해 바닥을 높여 교회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붉은 교회(The Red Basilica)" 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신전의 26m x 60m 로 되어 있으며 오늘날 건물의 상층부가 붕괴되어 있지만 남아있는 벽의 높이가 19 m에 이르는 대형 신전이었다. 신전의 동쪽 끝에 남아있는 2개의 도움양식은 로마시대에는 보기 드문 건축 양식으로써 오늘날한 쪽은 이슬람 서원으로, 다른 한 쪽은 박물관의 창고로 사용하고있다. 이 신전의 가장 중요 부분은 3면이 기둥으로 둘러 싸여 있는 데, 이색적인 것은 이 기둥이 당시에 흔했던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이 아니라 등을 서로 맞대고 있는 기둥으로 되어 있는 점이다. 이 조각 중 하나는 남성의 모습 하나는 여성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이집트의 신인 이시스와 세라피스 신으로 추측된다. 또 한가지 특징은 강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즉 이 신전 밑에는 대각선으로 셀리누스 강이 흐르고 있는데 직경 9m의 토관 2개를 묻어 강물이 흐를 수 있도록 했고 그 위에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평평하게 했다. 이 건물은 기독교 공인 후 바닥을 높여 버가모 교회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약 1~2m 높이의 벽만이 옛날의 교회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세라피스(Serapis)
세라피스는 마케도니아 통치시기(BC.305-30)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국가신이다. 그는 머리 위에 바구니를 얹은 곱슬 머리에 턱수염이 있는 남자로 묘사되어 있다. 멤피스의 아피스 수소에 대한 예배에서 유래한 세라피스 숭배의 주된 중심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의 학문과 상업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였다. 그곳에 있었던 세라페움(Serapeum : 세라피스의 신전)은 세계의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혔으며, 기적적인 치료법을 찾아나선 순례자들을 먼 지역으로부터 끌어들였다. 세라피스는 첫째로 질병의 치유자이며, 운명을 초월하는 신이고, 오시리스로부터 지하세계의 신격을 계승한 신이다
세계 최초로 정신치료를 실시한 아스크레피온(ASKLEPION) 병원이다. Asklepions은 아폴론의 아들로 건강과 약의 신이었다. 버가마에 있는 Asklepion는 이 신의 이름의 딴 의료센터를 말하며 초기 에게문명을 꽃 피웠던 페르가몬의 중요한 의료센터였다. 이 곳은 다른 병원들과는 치료방법이 다르다. 물과,진흙,스포츠,연극 그리고 도서관 등으로 병을 고쳤다. 그래서 이 곳에서는 현재도 매년 연극이 공연되고 있다. 입구 근처의 좌측 건물은 Asklepions 사원이다. 이 사원은 AD 150년에 건강의 신의 이름으로 기증되었다. 지붕은 돔으로 되어있으며 신전의 벽은 무려 3M나 될 정도로 두텁다. 내부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BC 4세기에서 AD 세기까지 번성한 이 병원은 대지진으로 파괴되었으며 아직도 유적이 남아 있다. 166년경 전염병이 이 페르가뭄을 휩쓸었을 때 제우스 제단 근처에서 발견된 한 비문에는 "오, 위대한 제우스 신이여, 아스클레피우스(건강의 신)를 섬기는 우리 도시를 파괴하는 이 재난을 쫓아 주옵소서"라고 써있었다. 발굴과정에서 발견된 많은 비문들은 당시의 치료법을 자세히 적고 있다. 하드리안 황제시대 만들어진 양쪽에 기둥이 늘어선 화려한 대리석 도로가 있는데 폭 20m, 길이 820m로 길 양편에는 15m의 석주(石柱)가 세워져 있다. 이 길은 소위 "성스러운 길"이라 불렀다. 환자들은 아스클레피온에 들어오면 우선 맨발로 성스러운 길의 대리석 바닥을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이 과정이 벌써 치료의 시작이다. 죽음의 신인 하데스로부터 멀어지고 건강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신에게 가까이 간다는 믿음 때문에 안도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정원 한 가운데서 흘러나오는 샘물로 목욕을 한다. 지금도 흐르고 있는 이 물의 성분을 조사한 결과 치료에 도움이 되는 방사능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이 판명되었다. 목욕이 끝나면 환자는 지하터널을 통해 치료실로 들어 가는데 80m 길이의 이 지하터널은 매우 조용하고 어두우며, 샘물에서 물이 지하터널의 입구 계단을 따라 흘러 들어 오면서 작은 소리를 냄으로써 신비로운 분위기가 연출된다. 게다가 천정에 나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의사들이 작은 소리로 환자들에게 속삭인다. 즉, 환자들에게 생의 의욕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다. 또 의사들은 환자들의 꿈을 해몽해 주기까지 하는데 이 경우도 역시 치료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말한다. 사티로스나 갈레누스와 같이 유명한 의사들이 이곳에서 활약했으며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Hypocrates)도 이곳에서 출생했다 한다.
버가모 아크로폴리스의 대형극장
필라델피아는 현재명으로 알라세히르이다. 주님께 칭찬만 받았던 교회로 초대
교회 당시 교회는 크지 않았으나 디오니소스 신전과 황제 숭배의 핍박을 이겨낸 교회였다. 현재의 유적은 동 로마 제국 비잔틴 시대(AD600년경)에 세운 것으로 성 요한의 교회로 세워졌다.
현 빌라델비아 지역 시내, 어린이날을 맞아 시내 학생들이 모두 모여 행사를 하기위해 행사장으로 고적대와 학생들이 가고 있다
사르디스라 하며 현재명은 살리히리이다. 사데 교회는 1세기 중반에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사도 바울의 제자이며 일곱 집사 중의 하나였던 클레멘트가 사데 교회의 첫 감독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사데 교회는 이 도시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크게 부흥 하였다가 나중에는 쇠퇴하는 우여곡절을 경험한다. 사도 요한이 사데 교회에 편지를 쓸 당시의 교회지도자는 누구였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처음에는 아데미신전을 빼앗아 예배드리다가(4세기경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권세를 얻었을 때쯤)후에 신도의 숫자가 작아져 아데미신전 담 밖에 돌담을 싸놓고 예배드린 것 같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 당시 신도 수는 매우 많았으나 영적으로는 미약하였다. 때문에 "너는 살아있다고 말하나 실은 죽어가고 있다!"란 책망을 받았다. 사데 지역은 황금이 많은 지역으로 재물의 유혹이 있었고 또한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어 신앙생활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현재의 사데교회 유적은 아데미 신전 뒤편에 비잔틴 시대에 벽돌로 지은 교회이다.
라오디케아는 현재명도 라오디케아 이다. 당시 라오디케아는 양모가 풍부하고 안약 등 의약품이 유명했으므로 재물의 유혹과 생활의 편안함으로 미지근한 교회로 책망을 받았다. 특히 라오디케아 지역은 물이 좋지않아 멀리 히에라볼리 파묵칼레로 부터 관을 통해 온천수를 공급받았고 또한 골로새로부터는 냉수를 공급받았으나 오는 도중 물이 식어 미지근 하게 되었다.
스미르나 라고 하며 현재명은 이즈밀 이다. 터키 남부의 미항으로큰 도시이다. 현재의 교회는 아시아 7교회 중 유일하게 건물이 있는 곳으로 황제 숭배를 거부해 순교한 서머나 감독 폴리캅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이다. 당시 서머나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고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잔학하게 탄압하였다. 또한 로마 황제 숭배 거부로 서머나 교회는 많은 재정적 궁핍을 겪었다. 그럼에도 서머나교회는 모든 핍박과 유혹을 물리치고 열렬한 신앙을 지켜 가장 모범적인 교회로 칭찬을 받았다.
폴리캅은 사도 요한의 직계 제자였으며, 그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았던 폴리캅은 115-116년까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다. 156년에 서머나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지방 총독인 스타티우스는 빌라델비아 등지에서 잡아 온 11명의 기독교인들을 원형 경기장에서 야수의 먹이로 희생시켰다. 이때 폴리캅은 밀고로 체포된 상태에 있었는데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스타티우스는 그를 살리기 위해 그의 신앙을 부정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폴리캅은 '86년간 나는 그분을 섬겨 왔고, 그분은 나를 한번도 모른다고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나의 주님을 모른다고 하란 말인가?' 하고 거절하였다. 군중들은 그를 사자밥이 되게 하라고 외쳤으나, 총독은 경기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이에 성이 난 군중들은 물러가지 않고 그를 장작더미에 올리라고 외쳐댔다. 할 수 없이 화형에 처했는데 군중들은 '이 사람은 우리 신의 파괴자다. 기독교인들의 아버지다' 라고 외쳤다는데 지금 생각하면 기독교인으로서 최대의 찬사가 아닐까? 오늘날에도 그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그가 세웠던 교회 위에 현대식으로 폴리캅 기념교회를 세우고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서머나 시내
에페소스 라고 하며 현재명은 셀주크이다. 물론 에베소 유적지는 따로 있다. 당시 에베소는 실질적인 소아시아 지역의 수도라 할 만큼 교역과 교통, 정치와 종교의 중심도시였다. 로마의 독립 행정관이 다스렸고 순회재판소도 있었다. 에베소 유적지에는 수천명이 들어가는 야외 음악당과 셀슈스 도서관, 법원, 병원, 사우나 탕과 아고라 지역이 있었고티베리우스, 트라얀, 하드리안, 도미시안 등 로마 황제 신전과 함께 아테나, 아데미 신전도 있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시 3년을 머물러 세운 교회로 현재의 에베소교회 유적지는 셀죽에 있는 사도 요한 무덤교회를 말하고 있다. 셀죽성 아래에 자리잡은 사도요한 무덤교회는 아래쪽에 아데미 신전터가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다. 비잔틴시대에 세운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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