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1224~1274.3.7)
1224~1225년:이탈리아 로카세카성에서 란돌포의 9남매중 7째 아들로 출생
1230년:베네딕트수도회소속 몬테카시노수도원 수업
1244년:도미니크회 수도사
1256년:파리대학교 신학교수
1265년:로마수도원 교수활동
1268년:파리대학교 신학교수
1272년:나폴리대학교 도미니크수도회연구소설립,초대소장
1274년3월7일:파사노바 시토 수도원에서 사망
저서:
명제집주석(Scriptum super Libros Sententiarum, 1252-56)
대이교도대전(Summa contra gentiles, 1259-1264)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I, II 1266-1272, III 1272-73, 미완성)
진리주제토론집(Quaestiones disputatae de ueritate, 1256-1259)
신의전능주제토론집(Quaestiones disputatae de potentia dei, 1265-1266)
영혼주제토론집(Quaestiones disputatae de anima, 1266-1267)
영적피조물주제토론집(Quaestio disputata de spiritualibus creaturis, 1267-1268)
악에관한토론집(Quaestiones disputatae de malo, 1270(1-15문)/1272(16문))
덕에관한토론집(Quaestiones disputatae de uirtutibus, 1271/1272)
육화될말씀의결합관한토론집(Quaestiones disputatae de unione verbi incarnati, 1272)
이사야서주해,예레미아서주해,예레미아애가서주해,이사야서주해(1252),욥기(1261~65),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요한복음주해(1265~68),바울서신주해(1265~73),시편강연록(1273)
(1)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생애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기독교의 대표적인 신학자로서 토마스 학파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1224~1225년,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탈리아의 나폴리 인근지역 로카세카 성(Roccaseca) 아퀴노(Aquino)지방에서 영주 란돌포의 9남매중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출생연도에 관한 기록은 전무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으나 가장 많이 사용되는 연도를 수용하여 1224년과 1225년을 함께 분류하였습니다 롬바르디아 출신의 아버지와 노르만족의 후예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토마스 아퀴나스는 남부이탈리아 내전으로 인하여 부모가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게 되자 1230~1231년, 5~6세의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몬테카시노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성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원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부모는 토마스가 성장하여 수도원장이 되기를 기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239년, 토마스 아퀴나스는 정치적 상황으로 인하여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학업을 중단하고 프레데리쿠스 2세의 후원으로 명문대학으로 성장한 나폴리대학교에 입학하여 논리학,수사학, 대수학, 기하학, 음악학, 천문학,문법학을 수학하였습니다 1244년, 도미니코회의 수도사로 들어간 토마스 아퀴나스를 못마땅하게 여긴 부모님은 학업을 중단시키고 그를 1년동안 설득하며 탈퇴를 요구하였으나 1245년, 토마스 아퀴나스는 베네딕트회 소속의 명문 수도원을 뒤로한 채, 나폴리의 신생(新生) 도미니코회 소속의 생자크수도원으로 되돌아갔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당대의 지성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1193~1280)의 지도를 받으며 학업을 계속했습니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독일의 신학자와 스콜라 철학자로서 연금술사인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전하려 하였으며, 신학과 철학 사이에 명백한 경계선을 표시함으로서 철학이 지니는 자율적인 가치를 분명히 하였습니다 1248년, 도미니코회는 독일 쾰른에 "수도회 대학"(Studium Generale)을 설립하고 초대학장에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를 임명하였으며 그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알려졌습니다
1245년 이후 1248년까지 토마스 아퀴나스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파리대학교와 새롭게 설립된 탁발수도회에서 종교적 소명을 가진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384~322)의 철학과 디오니시우스(Saint Dionysius of Alexandria)의 신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복음과 중세시대의 사상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하나의 카테고리로 연결시키려 하는 과정에 있었으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기독교 사상에 통합시킨 것이었습니다 봉건사회의 전통과 베네딕트수도원의 기득권에서 이탈하여 보다 개혁적이고 혁신적이며 새로운 가치중심의 수도원을 통하여 개개인의 삶과 교회 문화적, 영적 쇄신과 각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시도를 통하여 실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1251~1252년,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도미니코회 명문 파리대학교 교수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추천하였습니다 도미니코회 총장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재능과 탁월한 지적학자력은 인정하지만 그의 나이가 27세라는 점에서 난색을 표하였습니다 그러나 생 셰르의 위그(Hugues de Saint Cher) 추기경의 추천서를 통하여 토마스 아퀴나스는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1095~1160)의 "명제집"(Quatuor libri Sententiarum)강독자로서 신학강의를 하였으며 명제집 주석집필을 하였습니다
1256년, 토마스 아퀴나스는 파리대학교 신학교수로 취임하였습니다 파리대학교는 수도회 출신 교수와 재속성직자 교수들간의 깊은 알력으로 분열이 극심한 상태로 있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 대표적인 중세 신학자이며 프란체스코 수도회 총회장과 알바노의 주교 추기경으로 알려진 보나벤투라(Bonaventura) 역시 신학교수 취임자격으로 2년간이나 제재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지성과 모범적이고 규범적인 삶을 바탕으로 수도회 교수들을 궁지로 몰았던 재속성직자의 대표인 기욤 드 생따무르(Guillaume de Saint Amour)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반박함으로서 대학자로서의 길을 열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1259년, 파리대학교의 저명한 석학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렵게 성취한 신학교수직을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파리를 떠나 아냐니에서 교황청 강독자로서 일하였습니다 1261년,오르비에토에 체류중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대이교도대전"(Summa contra gentiles, 1259-1264)의 집필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삭발수도회 대표자와 신학자 및 성직자로서 "욥기주석"(Expositio super Iob ad litteram, 1261-65), "디오니시우스의 신명론 주석"(Super Librum Dionysii de diuinis nominibus, 1261-65 혹은 1265-68), 원인론주석(Super librum de Causis, 1261-65 혹은 1265-68), 등을 집필하였습니다
1265~1268년, 로마의 수도원에서 교수로 재직중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I, II 1266-1272, III 1272-73, 미완성)을 집필중에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신의 권능"(Quaestiones disputatae de potentia dei, 1265-1266), "영혼"(Quaestiones disputatae de anima, 1266-1267), "영적피조물"(Quaestio disputata de spiritualibus creaturis, 1267-1268)에 관한 정규토론집을 발간하였습니다 기욤 모어베크(Guillaume Moerbeke)의 아라스토텔레스 번역본을 사용하여 "영혼론"(Sententia Libri de anima, 1267-68)과 "감각과 감각물에 관한 주석"(Sententia Libri de sensu et sensato, 1268-69), "자연학주석"(Sententia super Physicam, 1268-69)등의 주석을 집필하는 등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적 지적 학적 탐구력은 대석학 이상의 놀라운 업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1268~1272년, 파리대학교 사상 최초로 2회에 걸쳐 교수직을 역임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랍의 아리스토텔레스철학자 아베로에스(Averroes,이븐 류수드Ibn Rushd,1126~1198)주의자들과 지성의 단일성 문제로 논쟁하였고, 보나벤투라의 제자 요하네스 페캄(Johannes Pecham,영국 프란치스칸 철학자,1230~1292)과 창조된 세상의 영원성의 철학적 입증가능성의 문제와 실체적 형상의 단일성 문제로 논쟁은 계속 되었습니다 이러한 파리대학교 내의 신학적 논쟁은 파리대주교 에티엔 텅피에(Etienne Tempier)에 의해 13개 명제가 정죄되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리까지 그 대상으로 지목되는 공방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시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세계의 영원성에 관하여"(De aeternitate mundi, 1261-65 혹은 1265-68)를 집필하며 수도회 대표와 성직자이며 교수로서 책임감과 정당성을 표현하였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논쟁의 시기에 마태복음을 비롯하여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등 "4대복음서 주석"(Glossa continua super Evangelica, Catena aurea, 1265-68)을 집필하였고, "마태복음강독"(Lectura super Mathaeum, 1269-70)과 "요한복음 강독"(Lectura super Ioannem, 1270-72), "바울서신 주석 및 강해"(Expositio et Lectura super Epistolas Pauli Apostoli, 1265-73)등을 집필하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집필생활로 인하여 수면은 언제나 부족하였고 피로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많은 저서를 집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적 완성도는 기적이라고 할 만한 업적이었습니다
1272년, 토마스 아퀴나스는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 나폴리로 갔으며 1273년까지 바울서신과 "시편주해"(postilla super Psalmos, 1273) 등의 집필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127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오스 축일 미사 중 어떤 환상에 충격을 받은 후 저작활동은 완전히 중단되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비서 레지날드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집필중단의 이유를 여쭈었을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내가 본 것에 비하면 내가 쓴 것들은 모두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성 니콜라오스 축일 미사에서 본 환상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로부터 그의 건강은 빠른 속도로 악화되었습니다 그로 부터 얼마후인 1274년 3월7일, 파사노바 사토수도원에서 수백명의 수도사와 신자들의 배웅속에 영면에 들어갔습니다
생애의 대부분을 집필에 힘을 쏟았고 그의 저서들 대부분은 후대 신학자들의 탁월한 참고서가 되었으며 "토마스학파"가 설립될 만큼 거대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사후 50년, 1323년 7월18일 카톨릭교회의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중세 최고의 지성이자 기독교 최대의 신학자로 추앙받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성과 신앙, 철학과 신학은 구별되는 선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 부터 도래하는 필연적인 조화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자연이 은총에 의해 조화를 이루듯 이성은 신앙으로 나아가는 봉사의 단계로 보았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은 오늘에 이르기 까지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2) 구원론
토마스 아퀴나스의 구원론은 그가 집필한 "신학대전"(Summa theologiae,1265~1273)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학대전은 신론과 인식론을 중심으로 인간론과 윤리, 성례전 문제등이 설명되었습니다 신학대전은 유신론(theism)의 기초가 되었고 지성과 신앙의 조화를 합리화 하였습니다 신학대전의 1부는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을 다루는 신론과 신학의 학문성 문제, 창조와 피조물 세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2부는 인간의 행복론, 윤리론, 덕론, 은총론, 믿음, 소망, 사랑의 3원덕(三元德)과 지혜,용기, 절제, 정의의 4원덕(四元德)을 다루고 있으며, 3부는 그리스도론, 마리아론, 성사론을 다루고 보론(補論)은 결혼, 죽음, 종말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즉, 신학대전은 하나님에 대하여 논하고,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움직임에 대하여 논하며, 우리가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논하는 것과 그 질문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고백이었습니다
신학에서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의 관련속에서 탐구되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존재와 작용은 하나님의 영향을 미치는 과정과 노선위에 있으며 그 구조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초자연적, 초월적 존재로서 현존하고 있으며 인간은 언제나 창조와 육화 가운데 현존하고 있으므로 은총을 입은 사람들의 역사가 곧, 구원의 사역이라고 설명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죄보다 은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속죄의 필요성을 낮은 단계에서 관찰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사랑과 순종으로 겪은 고난을 속죄의 근거로 보았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향하는 문제보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였습니다 이것은 인문주의나 휴머니즘적 측면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에 관하여 어떤 관계속에서 어떤 삶이 화목을 이루는가 하는 많은 질문과 답변을 반복하였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질문과 답변은 어떤 문제에 대하여 명확하고 분명한 의지의 해석이라기 보다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신앙의 고민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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