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1·6교실/교회사1교실

[스크랩] 3.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

류성련 2015. 10. 8. 12:34

3.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

 

 

 

 

 

740년4월2일:벨기에 리에주 인근 프랑크왕국 왈롱나 주 에르스탈에서 피핀 3세와 레온 출신 베르타의 장남으로 출생

 

751년:부친 피핀3세는 자카리아의 승인으로 메로빙거왕조 군주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프랑크회의에 의해 왕이 되었으며 이 과정을 유년기에 목격

 

754년:교황 스파르타 2세는 롬바르드족의 공격으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알프스를 넘어 프랑크 왕국을 방문할때 카롤루스는 피핀3세 국왕의 장자 자격으로 교황을 영접,

 

스파르타 2세는 피핀3세와 아들, 카롤루스, 카를로만에게 왕호 수여

 

부왕 생전 귀족가의 딸 이멜트루다와 결혼했으나 그가 기형아인 곱사등이 피핀을 낳자 랑고바르트왕국의 왕 데시데리우스의 차녀 기셀라와 재혼

 

768년9월24일:왕위계승, 아우스트라시아와 북부지역을 승계하고 프랑크왕국의 왕(Rex Francoeum) 취임

 

769년:부친, 피핀3세와 함께 카롤루스는 롬바르드족을 축출하고 아키텐에서 피레네 산맥까지 영토를 확장

 

771년:데시데리우스가 동생 카를로만 2세의 왕위경쟁에서 동생 카를로만의 손을 들어주자 카롤루스는 데시데리아를 폐하고, 히스파니아 백작의 딸 힐데가르트와 재혼

 

동생 카를로만 2세의 사망으로 부르군트,프로방스,네우스트리아를 병합하여 단일 통치자가 됨

 

랑고바르트왕국과 이탈리아 점령후 이탈리아 일부를 교황에게 기증 

 

772년:작센족 정벌

 

774년:교황 스파르타 2세의  청으로 북이탈리아 랑고바르트 왕국 멸망후 합병

 

777~778년:사라센 토벌, 이베리아반도 원정참패

 

794년:독일 남서부의 아헨에 궁정과 왕실교회 설립, 수도로 사용

 

800년:교황 레오3세로 부터 카를대제 칭호 수여, "유럽의 아버지"로 칭호

 

801년:바르셀로나 함락

 

802년:사라센 족 토벌,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드왕국 정복, 스페인 국경 변경령설치,

 

바이에른, 케른텐 병합, 아바르족,벤드족 정복, 서유럽지역 통일달성

 

814년1월28일:사망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는 740년 4월2일, 벨기에 리에주 인근 프랑크 왕국 왈롱나 주 에르스탈에서 프랑크왕 피핀 3세와 레온 출신 베르타사이에서 왕자로 출생하였습니다  카를로스는 유년기부터 권력에 대한 욕구가 있었고 영토확장에 대한 의지도 누구보다 앞서 있었습니다 754년, 교황 스파르타 2세는 롬바르드족의 공격으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알프스국경을 넘어 프랑크 왕국을 방문하였을때 카롤루스는 국왕의 태자 자격으로 교황을 직접 영접하였습니다  교황 스파르타 2세는 피핀3세와 장자인 카롤루스와 차남인 카를로만에게 왕호를 수여했고 롬바르드족의 정벌을 위해 피핀3세 왕은 전쟁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760년부터 아키텐과 피레네산맥까지 진출한 원정에는 항상 카롤루스가 동행하였고 그의 정벌전은 계획대로 성사되어 갔습니다

 

 

 

카롤루스는 이멜트루다와 결혼하였으나 기형아를 출산하자 랑고바르트 왕국 데시데리우스 왕의 차녀 기셀라와 재혼하였습니다  그러나 771년 데시데리우스가 자신과 동생과의 왕위경쟁에서 동생을 지지하자 카롤루스는 기셀라를 폐위시키고, 히스파니아 백작의 딸 힐 데가르트와 재혼하는 등 네 명의 부인과 다섯명의 첩을 두는 등 여러번의  결혼을 거듭하였습니다 768년 9월24일 피핀3세가 임종하자 카롤루스는 아우스트라시아, 북부지역을 통합하여 왕위를 계승하였고 동생인 카이져 소제 2세는 부르군트,프로방스,네우스트리아 지역을 상속하였습니다 그러나 3년후인 771년, 동생 카를로만 2세의 사망으로 부르군트,프로방스,네우스트리아를 병합하여 카롤루스는 프랑크왕국의 단일 통치자가 되었으며 이탈리아 점령후 일부를 교황 스파르타 2세의 영토로 기증하였습니다

 

 

 

772년, 작센을 정벌하고, 774년에는  교황 스파르타 2세의 요청으로 북이탈리아 랑고바르트왕국을 멸망시키고 합병하였습니다  801년에는 바르셀로나를, 802년에는 사라센 족을 병합하고, 스페인 국경에 변경령을 설치하였으며, 바이에른과 케른텐을 병합하고 아바르족과 벤드족을 정복하는 등 서유럽 전역에 걸쳐 통일을 달성하였습니다  803년, 판노니아외부지역의 크로아티아부족을 병합하고 자치권을 주었으며, 813년 경건왕 루트비히 1세를 후계자로 지명한 후 814년 1월28일 아헨에서 늑막염과 우울증 등 오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768년9월24일, 카롤루스가 왕위를 계승하고  아우스트라시아와 북부지역을 승계하며 프랑크왕국의 왕(Rex Francoeum)에 취임한 이후  794년, 독일 남서부의 아헨에 궁정과 왕실교회를 설립하여 수도로 사용하였습니다  800년, 교황 레오 3세는 카를대제 칭호를 수여, "유럽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카롤루스는 그가 점령하는 지역에서 우상숭배와 토착신앙을 파괴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카톨릭 선교사들을 파견하여 교회와 학교와 수도원을 설립하고 전도활동을 최우선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카롤루스의 선교활동은 전쟁을 통하여 지역을 점령해 감으로서 이루어 졌으며 때로는 무참한 살인과 폭력을 동반하여 진행한 흔적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점령지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후 바로 세례식을 거행하였으며 정신적개조학습은 세례를 베푼후 진행하는 강제적인 방법을 동원하였습니다  

 

 

 

카롤루스는 노섬브리아왕국 요크 출신의 잉글랜드 스콜라철학자이자 교회학자인 알퀸(Alcuin, 730년대 또는 740년대 ~ 804년 5월 9일)을 스승으로 섬기며 카롤링거법정의 교수와 성 마르당 수도원 원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알퀸은 신학교리를 세우고 교회의 육성에 중점을 두었으며 십일조 헌금제도를 시행하여 교회의 재정을 굳건히 하는데 초석을 이루었습니다 알퀸과 함께 롬바르디아의 라바누스 마우루스, 아인하르트 등 당대의 신학자들을 초빙하여 교회 신부들의 신학저술과 고대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는 왕실도서관을 설립하고 궁정학교를 신설하였습니다

 

 

 

카롤루스는 올바른 신앙관념과 도덕성을 중시하여 모든 수도원학교와 카톨릭학교를 통해 라틴어와 라틴문학을 집중적으로 가르쳤으며 각 지방의 통치 또한 종교적 영향력이 강한 주교와 백작과 후작에게 통치권을 일임하여 신앙관 중심으로 지방편제가 구성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왕의 사절단에도 고위관리와 고위성직자를 반드시 함께 보내었으며 이러한 관례를 통하여 로마제국이 신앙적 결속력하에 관리되도록 육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롤루스는 다양한 민족과 부족의 전통적 권리를 원칙적으로 존중하는 한 편, 프랑크왕국의 법령집을 기록하여 많은 부족들을 원활하게 통치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말년에 늑막염과 극심한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아헨으로 은퇴하여 여생을 보내는 가운데 814년 1월 28일 아헨의 성당에 묻히며 그의 생애는 마감되었습니다

출처 :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교회밖 교회- 엘로힘 쎄이영
글쓴이 : 쎄이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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