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시대를 어떻게 읽어야 하나? 세상에 나타나고 이루어지는 ‘모든 것’ 속에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이 내재되어 있음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두 눈 크게 뜨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현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창 1:1, 롬 12:2, 딤전 4:4). 특히 요즘처럼 혼탁하고 어수선하며 사리판단이 어려운 때일수록 그러하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표적’, 즉 ‘때의 징조’는 무엇인가?
최근 “월가를 점령하자!” 외치며 반년 넘게 진행된 반(反) 월가 시위 현상을 예로 들어보자. 이를 두고 1%에 대한 99%의 분노와 저항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자본주의가 지니고 있는 태생적 한계인 빈부격차, 소득과 분배의 양극화 현상으로 인한 사회적 불만과 분노가 중산층마저 거리로 나오도록 만들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세계 3위의 미국 부자 워렌 버핏이 “부자인 자신에게 보다 높은 세금을 부과해 달라”고 요구한 데서 생겨난 버핏세가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부자세’로 번역되어 정부 여당에서도 도입여부를 놓고 갑론을박하고 있다.
여기에 2012년 한국 총선과 대선 판도와 오랜 세월 여의도를 지배해온 정치 환경을 일거에 뒤집어놓을 수 있을 결정적 요인으로 등장한 안철수 현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정치 신인은커녕 정치 입문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재의 반(1500억 원)을 사회에 환원한 것 외에는 한 일도 없는데 왜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하고 지지를 표하는가? 그리고 무상급식 문제로 야기된 정치적 논쟁의 뒤 끝에 치러진 서울시장 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2040세대의 절망과 욕구는 과연 무엇인가?
결국 요즘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정치·경제·사회 현상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 위기 상황이다. 붕괴까지는 아니라도 공고했던 자본주의 체제와 질서에 균열이 생기고 그로 인한 사회적 갈등과 불안이 야기되고 있음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사회 안정과 평화는 불가능하다. 이런 자본주의 폐해로 인한 사회적 불안과 갈등에 기독교도 자유롭지 못한 것은 역사적·신학적으로 자본주의 형성과 발전에 기독교, 특히 개신교회가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개신교회는, 일제 강점기 자본주의 형성 과정에서 이 시기 내한 선교사 중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서구 자본주의 이론과 행태가 유입되었으므로 ‘미국식’ 자본주의가 한반도에 정착하는 데 일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에 대해서는 류대영의 「초기 미국 선교사 연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참조). 또한 해방과 분단과 전쟁을 거친 후 남쪽에 친미, 반공주의,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기독교가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자본주의 문제점과 폐해를 극복하고 ‘건강한’ 자본주의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과 시도에서 기독교의 책임과 역할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결자해지 차원에서 기독교가 자본주의를 재해석하고 그 문제와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 할 시점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오늘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와 한계는 무엇이며 과연 한국 기독교회가 그것을 극복하고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청교도 자본주의와 천민자본주의
기독교, 특히 개신교와 자본주의의 상관관계에 대한 논의는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명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으로부터 풀어나갈 수밖에 없다. 이미 기독교 고전이 된 이 책에서 베버는 건전한 기업 활동을 통한 이윤창출을 합리적 자본주의로 인식하고 개신교, 그중에서도 칼빈주의 신앙과 윤리의식이 자본주의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음을 밝히려 하였다.
특히 베버는 칼빈주의 신앙 중에서도 ‘금욕’을 중시하는 청교도 윤리를 주목하였다. 그는 금욕을 세속적 노동 욕구의 촉발 요인으로 보았다. 육체적 쾌락을 죄악시하는 청교도는 노동을 금욕의 수단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세속적 직업을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으로 인식하였다. 노동자로서 정해진 환경과 시간에 맞추어 성실하게 일하는 것은 신자로서의 미덕일 뿐 아니라 하나님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신앙수련이기도 하였다. 베버는 이런 청교도의 직업관과 노동윤리가 자연스럽게 노동과 기업의 이윤 창출로 이어졌고 그것이 자본주의 성장과 발전의 기반이 되었음을 지적하였다. 결과적으로 베버는 청교도의 금욕적 노동관과 직업에 대한 윤리적 소명의식이 서유럽 기독교 국가들의 자본주의 체제 정착과 발전의 촉진 요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자본주의에 대한 베버의 평가는 지극히 긍정적이다. 그는 합법적 수단이나 정당한 경쟁이 보장된 기업 활동과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윤 추구와 자본의 축적을 선한 것으로 보았다. 베버는 이런 기독교적 신앙관과 윤리의식에 기반을 둔 ‘건강한’(?) 자본주의를 ‘합리적’(rational) 자본주의, 혹은 ‘청교도적’(puritan) 자본주의라 불렀다. 그렇다고 베버가 모든 자본주의 체제와 문화를 지적한 것은 아니다. 그도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을 지적하였다. 즉 ‘청교도’ 자본주의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천민’(pariah) 자본주의를 제시하면서 이를 ‘유태인’ 자본주의로도 불렀다.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베버의 설명이다.
영국 청교도들이 볼 때, 당시 유태인들은 전쟁에 개입하거나, 정부와 계약을 맺고 국가 독점사업에 참여하거나, 지방 제후들의 건축 및 금융 관련 투기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는데 이런 행위들은 청교도들이 지극히 혐오하는 것들이었다. 이런 [청교도와 유태인 사이의] 차이점을 간단하게 정리한다면, 유태인 자본주의는 투기적 천민자본주의(speculative pariah-capitalism)인 반면 청교도 자본주의는 부르주아 노동조직(bourgeois organization of labour)이라 할 수 있다.
베버는 노동조직을 산업구조의 기본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는 친(親)부르주아 자본주의 관점에서 전쟁 무기 생산과 수출, 정부와 국가권력과 결탁하여 이루어지는 독점 및 투기사업을 천민자본주의로 지칭하며 이를 경계했다. 베버가 비판한 천민자본주의의 전형은 세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유태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세 신분사회에서 변두리(성 밖)로 밀려나 ‘천민’으로 분류되었던 유태인들은 주로 상업과 금융업 분야에서 활동했는데 이미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비천한’ 계급으로 분류되었던 유태인들의 경제활동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비천한’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이런 식으로 베버는 청교도의 이름을 빌려 노동을 신성시하고 투기를 죄악시하는 기독교적(개신교적), 경제적 가치관을 피력하였다. 그로부터 도덕적 합리성을 상실하거나 사회적 공익을 추구하지 않는 이기적이며 탐욕적인 자본주의 경제 질서와 환경에 대해 ‘천민자본주의’란 비판적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특히 베버가 전쟁 무기 생산과 수출, 금융과 부동산 투기, 국가권력과 결탁한 독점 사업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현대 자본주의 폐해와 부조리를 일찍이 천민자본주의란 이름으로 경고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이런 베버의 용어 선택과 개념 설명에도 한계는 있다. 무엇보다 천민자본주의와 유태인 자본주의를 동일시함으로 독일인 특유의 반(反)유태적 정서를 보여주는 대목은 인종적 편견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또한 중세 귀족 중심의 신분사회에서 성 밖으로 쫓겨난 민중계층(파리아)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극히 제한적이었다는 사회경제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이들이 취할 수밖에 없는 직업에 ‘비천’이란 수식어를 붙인 것은 베버의 관점이 성 안의 주류(부르주아)와 기득권층 중심의 가치관을 반영한 것임을 방증한다.
따라서 그의 경제윤리는 자칫 ‘가진 자’와 기업가에게 유리하지만 비주류, 노동자 계층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여지도 없지 않다. 또한 노동 가치를 극대화한 청교도 직업윤리가 소득과 생산, 즉 성장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를 수립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소득 이후에 제기되는 문제, 즉 사회 안정의 기본이 되는 활용과 분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는 한계가 있음도 사실이다. 금욕과 희생을 강조하는 청교도 자본주의 이론이 사회경제적 소외계층, 빈곤계층을 배려하고 대변하기엔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세계 각국에서 야기되고 있는 정치사회적 갈등과 충돌의 근저에 부와 자본의 독점과 그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 문제가 깔려있음을 감안할 때 분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자본주의 원리가 필요하다. 투기와 독점의 탐욕스런 천민자본주의나 생산과 소득 중심의 금욕적 청교도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한계와 문제점들을 극복하고 사회 안정과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제3의 기독교적 자본주의 원리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의 경제활동 3대 원리
막스 베버보다 3세대 앞서 살았던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의 설교에서 그런 제3의 자본주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영국의 전통 성공회 사제 집안에서 출생하여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한 ‘엘리트’ 계층의 웨슬리는 18세기 산업혁명으로 인한 급격한 사회변동과 그로 인한 사회경제적 불평등 상황을 직접 목격, 경험하였다. 그는 산업혁명으로 부를 축적한 자본가와 기업가, 귀족들의 향락문화와 광산과 공장 노동자 및 도시 빈민의 열악한 생활 환경을 동시에 목격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기독교 신앙과 가치관에 입각한 경제활동 원리를 모색했고 그런 고민의 결과를 “재물 사용법”(The Use of Money)이란 설교에서 피력하였다. “불의한 재물로 이웃을 사귀라”는 누가복음 본문을 바탕으로 하였는데 여기서 재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3대 원리를 제시한다.
그 첫 번째 원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벌라’(Gain all you can)다.
세상에서 어떤 직업을 갖고 있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가장 위대한 규칙으로 여기며 살기로 결심하였다면, 누구든 당연히 재물에 대하여 생각할 것은, ‘할 수 있는 대로 벌라’는 것입니다. 정직한 기업 활동으로 할 수 있는 대로 버십시오. 당신이 받은 소명대로 가능한 한 열심히 노력하십시오.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당신 자신과, 하나님 그리고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알면 아낄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에게 부여된 특별한 소명이 무엇인지 깨닫는다면 팔짱을 끼고 있을 시간이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웨슬리는 근면과 성실을 바탕으로 한 경제활동을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로 보았다. 게으름과 낭비는 신앙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경계해야 할 악이었다. 이런 근면한 경제활동이 소득과 이윤을 창출하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웨슬리가 무작정 생산과 소득을 장려한 것은 아니다. ‘정직한 기업’을 전제로 깔았다. 이주민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거나 저울을 속이는 방법으로 소득을 올리지 말라는 것이다. 이처럼 웨슬리는 기독교인의 경제활동 제1원리를 근면과 정직을 바탕으로 한 생산과 소득 활동에 두었다. 베버가 말한 청교도 자본주의를 웨슬리도 지지했다고 할 수 있다.
웨슬리의 기독교인의 경제활동 제2원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아끼라’(Save all you can)다.
정직한 지혜와 지치지 않는 근면으로 가능한 한 많이 벌었다면, 그 다음으로 분별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두 번째 원칙은, ‘할 수 있는 대로 아끼라’입니다. 당신의 그 귀한 재능을 바다에 던지지 마십시오. 그런 어리석은 짓은 이교도 철학자들이나 하게 버려두십시오. 재물을 어리석은 일에 쓰지 마십시오. 그것은 바다에 던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지 마십시오. 그처럼 소중한 재능을 단지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일에 허비해서 안 됩니다. 그 어떤 종류든 감각적 쾌락을 얻는 일에, 특히 입맛의 쾌락을 줄기는 일에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잘못하면 ‘Save all you can’을 ‘할 수 있는 대로 저축하시오’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웨슬리의 의도가 아니었다. 웨슬리는 은행이나 금고 얘기는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를 악으로 규정하였다. 그가 강조한 것은 재능과 물질을 허망한 곳에 쓰지 말라는 것이다. 정직과 성실로 번 돈을 감각과 정욕을 만족시키는 것에 쓰지 말라는 것이다. 술과 음식만이 아니다.
웨슬리가 경계한 것은 당시 영국의 상류 귀족층 교인들이 즐기던 소위 ‘고상한 쾌락주의’(elegant epicurism)였다. 당시 귀족과 자본가들이 은밀하게 자기네들끼리 즐기던 고급스런 사교 문화, 영국의 ‘빅토리아 귀족 문화’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웨슬리는 구체적 예로 귀부인들의 화려한 몸치장, 비싼 가구와 미술품, 서적, 장식품으로 집안을 꾸미는 것, 정도 이상으로 화려하게 정원을 가꾸는 것 등을 지적하였다. 이런 귀족 문화는 정상적인 것으로 위장하고 침투하여 서서히 개인과 가정, 사회를 파괴한다. 이런 사치와 향락 문화를 피하고 검박한 생활과 절제의 소비생활을 하라는 것이 웨슬리의 두 번째 경제 원리다. 이 대목 역시 청교도 신앙 원리와 일맥상통하면서도 베버가 강조했던 생산(노동) 원리가 물질의 소비(생활) 원리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세 번째 원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주라’(Give all you can)는 것이다.
첫째 할 수 있는 대로 벌었고, 둘째 할 수 있는 대로 아꼈으면, 그 다음은 ‘할 수 있는 대로 주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원칙대로 살아야 할 이유와 근거는 여기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소유하고 계신 분께서 그대를 지으셨고, 그대를 이 세상 가운데 두시되 소유주가 아닌 관리자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그분은 온갖 종류의 물질을 그대에게 당분간 맡겨두신 것이므로 그 소유권은 여전히 그분께 있고 그분을 떠나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대 자신도 그대 것이 아니라 그분 것이며 그대가 즐기는 그 모든 것도 그분 것이기 때문입니다.
웨슬리는 물질의 궁극적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는 그 관리자일 뿐이므로 소유주인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사용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이것을 “할 수 있는 대로 주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결국 기독교인의 경제활동 제1원리(근면 생산)와 제2원리(소비 절약)는 제3원리(물질 선용)를 위한 준비 단계임을 알 수 있다.
줄 줄 아는 교회, 나눌 줄 아는 교인
웨슬리의 설교를 요약하면, “1) 정직하고 근면하게 노력해서 가능한 한 돈을 많이 벌어라. 2) 그렇게 번 돈을 사치와 향락, 헛된 곳에 쓰지 말고 검박하게 생활하라. 3) 그렇게 해서 모은 돈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눠주라”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여기서 기존 생산과 소득 중심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나눔과 분배 중심의 자본주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물질과 자본에 대한 청지기 개념에서 자발적 나눔과 베풂을 구현하는 기독교적 자본주의(Christian capitalism)로 나아간다면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천민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소득 불균형과 자본 독점,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적 갈등과 불안을 해소하는 데 진전이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중국 만주에서 유랑민 목회를 했고 해방 후에 강원도 산골에서 초대교회를 모형으로 한 ‘흘리공동체’를 조성했던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교) 설립자 이호빈 목사는 평생 청빈과 맑은 영성의 실천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았다. 그가 남긴 “가을의 교훈”이란 설교의 한 대목이다.
교회는 받는 일보다도 줄 줄 아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천국을 받는다든지 개인이 잘사는 일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받는 것만을 목표로 할 수 없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의 축복은 받는 데만 있는 게 아닙니다. 받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받는 축복도 크지마는 줄 줄 아는 축복이 더 큰 것입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되다’는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받는 일만으로서는 완전한 만족은 아닙니다. 줄 줄 알 때 좋은 물질, 좋은 교육, 좋은 생명이 될 수 있습니다.
‘줄 줄 아는 교회’, ‘나눌 줄 아는 교인.’ 지금까지 자본주의가 자유와 경쟁을 바탕으로 한 생산과 소득에 초점을 맞추어 운용되어왔다면 이제부터는 (사회주의의 가치와 과제이기도 한) 나눔과 분배에 보다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태생적 한계와 문제인 소득 불균형과 빈부격차, 양극화 현상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과 불안을 해소하고 공동체적 평화와 협력을 구현할 수 있는 대안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나눔’(diakonia)을 신앙생활의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는 기독교인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ubi caritas et amore deus ibi 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