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신대 신학 교수 교실/이덕주 교수 교실

[스크랩] 독일 루터의 행적을 따라서

류성련 2016. 5. 9. 19:30

지난 7월 19-22일 독일을 다녀왔습니다.

미국 워싱턴 웨슬리신학대학원 아시아디민 수업의 일환으로

루터의 행적을 더듬는 여행이었습니다.

 

루터가 출생하고 별세한 아이슬레벤으로 시작해서

루터가 10대 소년 때 라틴어 공부를 한 아이제나하,

 대학 공부를 하다가 천둥 경험을 한 후 어거스틴수도회에 들어간 에어푸르트,

신학교 사역을 하던 중 95개조 논제를 붙인 비텐베르크,

카를 황제의 제국의회에 소환당해 심문을 받은 후 추방령을 당한 보름스,

작센 선제후의 보호를 받으며 성경을 번역한 바르트부르크 등을 다녀왔습니다.

 

종교개혁에 대해서,

신학자로, 목사로,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소중한 여행이었습니다.

 

찍은 사진 몇 장을 올립니다.

 

 

1483년 11월 10일 루터가 태어난 아이슬레벤 집터, 뒤에 보이는 교회가 세례를 받은 성베드로 바울교회,

 마침 주일예배 중이었다. 십자가 아래 보이는 세례대에서 루터는 난지 하루만에 세례를 받았다.

 

 

 

루터가 10대소년 때 라틴어공부를 하기 위해 아이제나하에 가서 하숙했던 코타 하우스(좌)

루터가 소년 성가대원으로 활약했던 성게오르게성당, 2백년 후 이 성당에서 바하가 세례를 받는다

 

 

루터가 24세 때 입학하여 다녔던 에어푸르트대학(좌) 에어푸르트대학에서 1505년 법과 석사학위를

받은 후 고향에 다녀오다가 천둥 번개를 맞으며 수도 서원을 하고 찾아간 어거스틴수도원

 

 

루터가 1512년 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강의했던 비텐베르크대학과 비텐베르크 성채교회(오른쪽)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5개조 논제를 붙였던 성채교회 정문, 그 때 루터 나이 34세였다.

비텐베르크 광장 건너편에 루터가 개혁 설교를 했던 성마리아교회가 보인다.

 

 

 

루터가 살던 비텐베르크 집(전 어거스틴스도원), 루터가 1520년 교황의 파문장을 찢은 오크나무 정원

 

 

1521년 4월 루터가 제국의회 심문을 받은 보름스 성문, 보름스 성베드로성당 오른쪽이 심문받은 장소

여기서 그 유명한, "Hier stehe Ich, Ich kann nicts anderes, Gott, helfe mir."를 외쳤다.

 

 

보름스에서 루터를 지지하는 첫 설교가 이루어진 성마그누스교회와 보름스 외각의 루터나무(오른쪽)

루터가 보름스에 와서 심문을 받을 때 주민들 사이에 찬반 논쟁이 벌어졌는데, 루터를 지지하던

한 여인이 논쟁을 하다가 "루터가 옳다면 이 지팡이에서 싹이 날 것이다." 하면서 잡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았는데 그것이 싹이 나서 거목이 되었다는 전설의 나무

 

 

1868년 완성된 보름스 종교개혁 기념공원, 루터를 비롯하여 발도, 위클리프, 후스, 사보나롤라 등

 앞선 종교개혁자들과 루터를 도와 종교개혁을 이끈 멜랑히톤, 작센 선제후(프리드리히),

 헤센 방백(필립) 등의 동상이 서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개인의 의지와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12세기 프랑스에서 이단으로 화형당한 발도의 작은 불꽃이 4백년 만에 유럽 전체를 불태운

 불길이 되었다.

 

 

보름스의회에서 추방령을 받은 루터를 작센 선제후가 300일 동안 보호한 바르트부르크성 여관과

루터가 머물던 방(오른쪽), 그곳에서 루터는 신약성경을 6주 만에 민중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1546년 2월 18일 아이슬레벤의 루터가 별세한 집(왼쪽), 루터가 태어나고 죽은 아이슬레벤의 루터 광장

태어난 곳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것은 또 다른 축복이었다.

 

 

루터가 죽기 사흘 전 마지막 설교를 했던 아이슬레벤 성안드레아교회 설교대(왼 쪽),

루터의 시신(묘소)은 비텐베르크로 옮겨져 그가 평소 설교하던 성채교회 설교대 아래 안장되었다.

설교자(목회자)는 목숨을 걸고 설교할 것과 말씀의 자리에 뭍혀야 한다는 점을 느끼게 한다.

 

 

 

 

출처 : 한국교회사학회
글쓴이 : 이덕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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