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신학대학원5·6교실/초대수도원운동교실

[스크랩] 사막 교부들과 서방 수도원 운동의 영성및 발전 과정에 관한 연구-심선진 목사

류성련 2016. 5. 19. 01:09

(안토니, 마카리우스, 파코미우스, 암브로시우스, 어거스틴을 중심으로 )

        목 차

    1. 들어가는 말
        1) 연구의 의의
        2) 역사적 배경
   
2. 수도생활의 유형들
        1) 이집트
        2) 시리아(柱上 修道)
        3) 소아시아 (知的-예전적 수도원 운동)
        4) 팔레스틴
    3. 주요 교부들
        1)안토니(251-365)
            (1) 안토니의 생애
            (2) 수도 생활의 특징
        2) 마카리우스
            (1) 마카리우스 영성의 특징
            (2) 마카리우스의 사상
        3) 파코미우스(Pachomius. 286-346,7)
            (1) 파코미우스 수도원 운동의 특색
    4. 사막 영성의 특징적 요소
    5. 수도원 운동의 발전 및 전개 과정
        1) 카파도기아 학파
        2)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Evagrius of Pontus,345?-399)
        3) 존 카시안(John Cassian, 360-432년경)
        4) 이탈리아에서는 베네딕트(Benedict, 480-547년경)
        5) 켈트 전통 안에서의 기독교적 창시자 성 페트릭(saint Patrik, 389?-46l?)
        6) 이디오피아

    6. 서방 수도원 운동의 시작 및 전개
        1)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39-397)
            (1) 암브로시우스의 생애
            (2) 암브로시우스의 교권의 확립
            (3) 어거스틴과 암브로시우스의 만남
        2)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1) 어거스틴의 생애와 [고백록]
            (2) 펠라기우스(Pelagius)논쟁
            (3) 어거스틴 영성의 특징
            (4) 어거스틴 수도원의 특징
            (5) 어거스틴이 서방에 끼친 영향
   
        나가는 말
        -동•서방 수도원 운동의 영성과 오늘의 교회
 

        참고문헌


1. 들어가는 말

1) 연구의 의의

콘스탄틴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받아 가던 시대에 기독교는 오늘 한국의 기독교가 겪고 있는 것과 같은 물량주의, 세속적인 권력과의 결탁, 해이한 신앙의 문제, 기독교인은 늘어나지만 참된 예수의 제자는 줄어드는 영적인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외적인 순교가 지나간 시대에 영적인 순교로서의 수도적 삶에 대한 동경이 일부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광야, 혹은 사막은 이들이 거처하던 곳이고 이들의 신앙이 성숙, 고양되던 곳이었다. 그들은 복음을 철저히, 조건 없이 단순하게, 온전히 실천하려는 실천적 삶을 살았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제자도를 실행하려 했던 것이다.
이들의 운동은 한마디로 평신도 운동에서 출발하였다. 이들 평신도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길이 아니라 세상적인 권세와 영예를 누리며 세속과 타협하는 경향을 거부하고, 그것을 악마적인 것으로 생각해서 거룩한 삶을 추구했던" 사람들이다.
일명 사막교부들(Desert Fathers)로 불리어진 이들의 영성생활을 연구함은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의 삶과 연관이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크리스천의 덕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신화(Theosis.神化)의 추구는 초대교회 이래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가치 있는 삶이며 궁극의 목표이기도 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의 의의는 사막 교부들에서 수도원 운동의 태동과 파코미우스의 원시 수도원 운동까지의 모습을 살펴보고 이 수도주의 운동이 어떻게 지리적으로 퍼져갔는가를 살피고 이러한 수도주의 운동이 서방의 수도원 운동과 만나게 되는 교차점 즉 암브로시우스의 교권확립과 어거스틴의 등장으로 인한 서방 수도원 운동의 새로운 방향 정립까지를 살펴 봄으로써 동방과 서방의 영성의 특징을 규명하고, 고대와 현재를 가로지르는 영성의 깊이를 고찰하는데 있다.

2) 역사적 배경

이 시대는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형성의 시대였다. 특히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인정하면서, 로마 제국에는 많은 명목적인 기독교인들의 범람으로 이완되고 대중적인 신앙이 퍼져 나갔다, 이에 대해, 바로 그 이전의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아 전적으로 헌신된 종교 생활을 선택한 무리들이 이집트의 사막에 찾아와 거대한 수도원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제자도, 희생정신 그리고 가난의 각오에 다양한 단계나 종류가 있을 수 있고 또 있어야 한다
는 생각이 살아 있었음"은 간과할 수 없는 수도원 운동의 시작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어찌되었든 4세기에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틴, 아라비아 등은 기독교 수도원 운동의 온상이었다.
모든 형태의 수도 생활, 온갖 종류의 실험, 온갖 극단적인 일들이 시도되었으며 사막의 지혜, 즉 이러한 생활 방식에 대한 이해가 수백 년 동안 기독교적 삶의 중심적 근원이 되었으며 서방 수도원 운동의 뿌리가 되었다.
교회로부터 이탈하여 은둔적 삶을 사는 이런 형태는 초기에는 개인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적 접촉을 끊어 버리는 고립된 생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생활은 "만일 당신이 이전에 세상에서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못했다면, 당신은 홀로 사는 은둔의 삶 역시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금언과도 상통한다.
오리겐이 말한 바와 같이 '동정(童貞)은 순교에 비견할 만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사상은 순교 시대가 지난 후 최고의 영예로 간주된 금욕주의를 낳게 하였다. 이러한 금욕주의 운동은 사막교부라고 일컬어지는 초기 수도원 운동의 맹아에서 쉽게 발견되는데 순교자들은 '피로써 증언한 자'라면 금욕가들은 매우 혹심한 궁핍 속에서 하나님 곁에 매우 가까이 있고, 그것이 행복의 원천임을 믿었던 것이다.
이들은 오랫동안 수도적이고 금욕적인 규율 안에서 살면서 체험한 것을 토대로 한 실질적인 충고의 기록을 남겼는데 이 교부들의 금언들은 원래 콥트어나 그리스어로 말하여졌지만, 기록은 콥트어, 시리아어,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로, 그리고 후대에 라틴어와 슬라브어등으로 기록되었고, 초기 수도원 운동의 전통은 주로 카시안의 저술들을 통해 서방세계에 전해졌으며 제롬, 루피누스, 팔라디우스의 저술들을 통해서도 서방에 알려졌다.
사람들이 최초로 자신이 동경하는 금욕생활을 보다 완전하게 실천하기 위해서 사막에 들어간 것은 이집트에서였으며, 그 관습은 신속하게 아시아와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최초에 사막으로 들어간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안토니(Anthony, 250-353년경)이다.

2. 수도생활의 유형들

1) 이집트

기독교 수도원 운동의 중심지는 이집트였다. A.D. 400년경에 이집트는 은자들과 수도사들의 땅이었다. 그곳에는 세 가지 유형의 수도생활이 있었는데, 그것은 대체로 지리적 위치에 따라 구분되었다.
이집트 수도원 운동의 특징은 원시적인 평신도 운동으로서 단순 소박하고 철저한 그리스도인 됨을 추구한 데 있다. 이들은 삶을 전적으로 복음과 그리스도 모방에 바쳤고 기도생활, 관상, 형제애, 이웃환대, 겸손과 순종의 사랑 등을 구체적인 삶에서 보여 주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막이야말로 신(神)을 찾고 수도생활을 하기 위한 이상적 장소였다. 사막은 인적이 없고 태고의 영원한 고독과 침묵 속에 수도하기에 알맞고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곳이었다.
초기 수도사들을 일컫는 일반적인 말은 'Anachoret'(은자)였는데 이는 그리스어 'anachorein(=뒤로 드러나다)으로부터 유래했다. 'Eremit'(은자)라는 이름도 그리스어 'eremos'(=광야, 고독)로부터 유래한 말이다. 또한 라틴어 '모나코스'라는 말도 '고독하게 사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수도사 (monk)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하였다. 이러한 단어들은 원어의 의미대로 도시 세속의 죄, 폭정, 소음, 죄의 유혹, 타락한 종교, 거짓된
인간을 피하여 도망친 사람, 숨어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집트 은둔자들이 모여 살던 중심 지역은 "나일강 삼각주 지역의 북서쪽인 스케티스(Sketis), 니트리아(Nitria), 켈리아(Kellia)와 북부 이집트에 있는 테바이스(Thebais)지역"이었다.
(1) 은수사 생활(하부 이집트, Lower Egypt) 은수사 생활의 원형은 고대 이집트 기독교의 평신도였던 성 안토니(Anthony the Great)이다. 그는 부유한 농민의 아들로서 무식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교회에서 그는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자신에게 주신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269년경에 그는 일상적인 기독교 사회에서 뭍러났으며, 나중에는 더 깊은 사막으로 들어갔다 안토니는 356년에 105세로 사망했다. 그는 지금도 "수도사들의 아버지"라고 여겨지고 있다. 그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모방하여 살았다. [사막 교부들의 금언]증 많은 부분은 안토니와 이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2) 공주(共住) 수도원 운동(상부 이집트, Upper Egypt)

이집트의 그리 외딴 곳이 아닌 지역에서 발생한, 사회와의 근본적인 결별은 하부 이집트에서 발생한 것과는 다른 형태를 취했다. 파코미우스(Pachomius, 290-347)는 테베의 타벤니시(Tabennisi)에서 조직적인 수도원 운동을 시작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영적 교부를 중심으로 하여 은수사들이 모인 것이 아니라. 형제들이 연합하여 일하고 기도하는 공동체였다.
이 지역의 것으로서 현재까지 보존되어 온 금언은 거의 없지만 파코미우스의 경험은 수도원 운동의 발달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3) 금욕 고행자들의 집단(이집트의 Nitria & Scetis)

나일 텔타의 서쪽 지역인 니트리아, 그리고 니트리아에서 남쪽으로 40마일 거리에 있는 스케티스에서는 세 번째 형태의 수도 생활이 전개 되었다. 그곳에서는 몇 명의 수도사들이 한 사부(abba)의 제자로서 함께 생활하는 lavra, 또는 스케테 형태가 발달되었다. 니트리아는 알텍산드리아와 가까웠고, 스케티스로 가는 자연적 통로 역할을 했다
그곳은 세상과 사막 사이에 위치한 만남의 장소로서, 존 카시안(John Cassian)과 같은 방문객들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사막의 전통에 접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소수의 교육받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형태의 다소 지적인 수도원 운동이 발달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Evagrius Ponticus, 345-399)이다. 모세(Moses), 팜보(Pambo), 아브라함(Abraham), 시소에스(sisoes), 존 콜로보스(John Colobos), 두 명의 마카리우스(Macarius) 등의 사부들과 관련된 많은 금언들은 이곳에서 비롯된 것이다

2) 시리아(柱上 修道)

이집트의 수도사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기풍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주위 환경과 결별하고 기도와 육체 노동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집단들을 구성했다. 그러나 시리아, 에뎃사(Edessa)와 안디옥(Antioch) 주변 지역, 그리고 특히 Tur 'Abdin산맥에서 발달된 금욕적 운동은 또 다른 형태를 취했다.
시리아 수도사 들은 대단한 고독주의자들이었으며,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일들을 스스로에게 부과했다. 그들은 벌거벗고 쇠사슬을 묶고 생활했으며, 숲에서 발견하는 것을 먹으면서 정착되지 않은 생활을 했다. 그들은 인간 본성의 한계선에서의 생활, 동물이나 천사들이나 귀신들과 가까운 생활을 선택했다
5세기에 이들을 전형적으로 대표하는 사람들로 주상(柱上) 성자들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오랫동안 기둥 꼭대기에서 생활했다. 이러한 생활방식을 최초로 택한 사람은 주상 성자 시므온(Simeon stylites)인데, 그는 안디옥에서 40년 동안 15피트 높이의 기둥 위에서 살았다.

3) 소아시아 (知的-예전적 수도원 운동)

카파도키아(Cappadocia) 지방의 교회와 도시에서는 보다 지적이고 예전적인 수도원 운동이 발달되었다. 이 지방의 중심 인물은 대 바실(St. Basil the Great, 330?-379)이다. 바실과 그의 추종자들은 이집트의 수도사들처럼 단순한 수도사들이 아니라 신학자요 저술가로 알려져 있었다

4) 팔레스틴

5세기 수도 운동의 중심지는 팔레스틴이었다. 팔레스타인은 수도원 제도에서 이집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지역의 최초 수도원은 380년 실바누스(Silvanus)가 거라사 지방에 세운 수도원이다. 유대 광야 특히 가자(Gaza) 사막 주변에는 이집트 전통 안에 있는 많은 신령한 교부들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바르사누피우스 (Barsanuphius)와 존, 도로테우스(Dorotheus), 유티미우스(Euthymius) 그리고 사바스(Sabas)등이 있다.

3. 주요 교부들

1)안토니(251-365)

수도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안토니는 A.D.251년경에 이집트 중부에서 기독교인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269년경에 그는 교회에서 복음서를 낭독하는 것을 듣고서 그 말씀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가서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는 자기가 사는 마을 근처에 있는 은둔자의 지도하에 금욕생활에 전념했다. 285년경에 그는 완전한 독거생활을 하기 위해서 혼자 사막으로 들어갔다. 그의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그가 사는 곳 근처에 정착하였다. 305년경에 그는 그들의 영적 교부로 활동하기 위해 자신의 은거지에서 나왔다. 그는 최소한 두차례 알렉
산드리아를 방문했다.
한번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진행 중일 때였고, 또 한번은 이단과 싸우는 아타나시우스 주교를 돕기 위해서였다. 그는 105세에 사망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의 전기를 저술했는데 그것은 기독교 세계에 수도 운동의 이상을 퍼뜨리는 데 대단히 큰 영향을 주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유배 기간 중 이집트 사막의 수도사들과 동거하기도 했는데 이런 경험을 토대로 안토니의 생애를 저술했다. 그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수도원 운동을 신학적으로 잘 판단하여 모든 교회에 정착시키기를 원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를 예수 그리스도 다음의 모델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를 가장 닮은 사람으로 보려 했다.

(1) 안토니의 생애

제1기 - [안토니의 생애](The Life of Anthony) 는 안토니가 부모님이 사망한 후에 금욕적인 생활을 시작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교회에서 "네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복음서의 말씀을 읽는 것을 듣고는 즉시 그대로 실행했다 그는 경제적인 능력을 부인 하고서 금욕의 길을 아는 사람들과 함께 훈련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마을 가까이의 은수사들을 찾아다녔고 사람들의 주거지를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 그것은 생활 수단의 조달이 비교적 쉬운 까닭과 광야를 악마들의 거주지로 여겼기 때문인데 광야의 뱀이나 맹수 등을 악한 영의 출현 형태로 보았기 때문이며 사단의 여러 가지 모양은 모두 자기 마음의 상태가 형상화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제2기 - 안토니가 무덤에서 생활하면서 죽음의 권세들이 그에게 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극복한 시기이다. 첫 시기의 성공 후에 더 높은 금욕과 격심한 악마와의 투쟁의 시기이기도 하다.
안토니는 이 시기에 무덤에서 분투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 안토니를 구해주신 경험을 하게 된다.
안토니의 경험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죽음과 마귀들을 정복하신 승리자였다

제3기 - 안토니는 사막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 버려진 성곽 안에서 생활했다. 안토니의 시대에는 사막은 마귀와 그의 부하들의 거처라고 믿었다. 안토니는 그 싸움에 시간과 정력을 모두 기울였다. 다른 수도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생계를 위해서 노동을 했으나 또한 암송한 성서를 묵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제4기 - 약 20년의 수도 후 그는 수도사의 아버지, '압바'(Abba)로 불려졌고 아직 완전히 조직되지는 않은 다소 자유로운 공동체-하나의 머리를 가진 순수한 은둔소-에서 생활하였다.
그의 최종적 체류지는 수에즈로부터 대략 남쪽으로 100km, 흑해(수에즈만)로부터 40km 떨어진 곳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105세에 사망했다.

(2) 수도 생활의 특징

안토니의 생애는 엄격하게 자신을 연단하는 생활이었을 뿐만 아니라 온유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생활이기도 했다. 그는 은둔자로서 완전히 단순화된 생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충고하고 화해시켜 주고 병을 치료해 주고 용기를 주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생활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적 영성 생활, 즉 수도생활을 만들어 냈다. 그는 세계 최초의 수도사는 아니었지만 특별히 기독교적인 동기를 가지고서 사막 깊숙이 들어간 최초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안토니의 수도 생활의 특징은 세상적인 삶으로부터의 전적 이탈과 초인적인 자기 훈련을 통해 악한 정욕과의 싸움을 싸워 그것에서 자유하게 되는 영적 진보를 나타냈다. 이것은 현재적 성취를 넘어서 계속 나아가는 역동적인 것이었다. 그 결과 그가 도달한 경지는 인간성의 완성 또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형성이며, 새사람 됨의 자의식이 선사된다. 그 수행은 성경과 기도, 사랑과 자비의 행위, 손노동, 가장 가난한 삶을 통한 단순화이다. 이것은 덕과 실천의 연합을 의미한다.

그의 수도 생활을 세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기도 - 안토니가 권한 일상적 형태는 기도와 노동을 번갈아 하는 것과 자연스러운 몸의 욕망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나. 노동 - 노동을 기도생활에 방해되는 행위로 생각한 일부와는 달리 그에게 있어 노동은 진정한 기도의 긴장과 기도의 정서를 유지시켜 주는 것이었다.
다. 가난 - 개인의 원칙적인 가난과 무소유는 후일 수도원 운동의 주춧돌이 되었다.
라. 순종 - 당시의 은둔 수도원이나 공동생활하는 수도원에서도 영원히 구속하는 서약은 없었으나 선생 (압바,암마)에 대한 절대적 순종은 수도의 길에서 자칫 망가지기 쉬운 정신적 육체적 퇴락을 막는 중요한 과제였다. 곧, 순종은 영혼의 한 지도자에 대한 전적인 복종으로서 그러한 불행을 방지하는 보장된 수단이었다. 때때로 선생으로부터 주어지는 비상식적 요구나 수모, 시련 들 꿋꿋이 견디고 그의 영적인 아버지의 도움을 받은 자는 결국 초자연적 투명함에 이르게 된다고 믿었다.
마. 장소 - 원칙적으로 한 장소 즉 수도실 안에 머물러 있는 일이 중요했으나 안토니는 그의 생애에서 여러 번 이동이 있었다. 이것은 중요한 필요에 능동적인 대처를 위함이었는바. 박해기에 알렉산드리아에 머물며 순교를 기다렸고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감금된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했다.
또한 아리우스 논쟁과 관련하여 수도에 나타나 정통주의를 옹호했다.
바. 참회, 겸손, 사랑 - 사람이 구원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영적인 업적이나 기적을 통해서도 아니고, 더욱이 일차적으로 금욕을 통해서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겸손을 통해서이다. 자신의 의를 의지하는 자는 낭패를 볼 것이다. 이것은 자신에 대한 참회의 심정으로 타인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 신관 - 하나님의 신비를 캐내려고 하는 것은 참된 수도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분명히 명해지고 말하여진 것으로 만족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일 뿐이다.
아. 성서관 - 성서를 많이 암기할 수 있으나, 학문적이거나 이성적인 설명을 위하여 힘쓰지 않고 내적인 깨달음을 기다리거나, 그의 무지를 고백한다.

2) 마카리우스

성자 대(Great) 마카리우스(300-390)는 이집트의 프티나폴(Ptinapor)에서 태어났다. 그 곳은 니트리아(Nitria) 사막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마카리우스는 안토니(Anthony)의 제자요, 벗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생애에 관한 여러 기록은 역사적인 정확성을 다소 결여한다고 여겨진다. 마카리우스는 평범한 출신으로 소년 시절에 목동이었다고 전해지지만, 이로 인해 고독하게 명상에 잠기는 많은 시간이 허락되어 후에 그를 위대한 신비가로 만들었던 것 같다. 그는 어릴 때 친구들과 함께 남의 무화과를 훔쳐먹은 것을 일생 동안 통회했다고 할 정도로 예민한 양심의 소유자였다 부모의 뜻에 따라 결혼을 했으나. 마카리우스에겐 다른 삶에의 동경이 있었고, 그의 젊은 아내가 얼마 후 세상을 떠나자, 곧 속세를 떠나 한 금욕 수도사를 스승으로 삼아 마을 가까이에서 고행의 삶에로 떠났다. 마카리우스는 50편의 [신령한 설교]를 남겼는 데 그는 자기 낮춤의 고귀한 영성을 지녔다고 전해지는 바 '하나님과 일치된 기도와 자기 부정의 극기를 통한 고요(평정)'는 [사막교부들의 금언집]에 나오는 것처럼 마귀가 그의 겸손만은 능가하지 못한다고 말할 정도의 경지였다.

(1) 마카리우스 영성의 특징

마카리우스는 동방교회 전통에서 마음의 영성을 대표하고 있다. 이 말의 뜻은, 어떤 지성적인 관상이나 사변적인 체계와 대조시켜, 영성의 장소를 인격의 중심인 마음 또는 영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을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 또는 감지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마카리우스의 영 성은 한마디로 성령 중심의 체험적 영성(spirituality of experience)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적인 세상의 정욕과 모든 명예, 이기심 등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평온함과 초탈의 자유는 마카리우스를 겸손하고 자비한 그릇으로 만들었으며. 그는 죄인을 있는 그대로 죄인으로 보았으나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랑하고 용서함으로써 하나님과 같은"지상의 신"으로 불렸다.
마카리우스의 영성을 개괄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타락과 원죄의 결과는 심각하며, 영혼이 마귀의 권세 아래 속박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과 유사성으로 창조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영이 거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구원은 성령과 마귀 사이의 싸움에 처한 영혼의 상황에 의해 설명된다. 성령을 받아들이고 입고 마시며 그와 합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빛을 받게 된다. 그렇게 될 때 인간은 변모, 신화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 신화된 인간은 그리스도와 연합 때문에 원 아담보다 더 승하다. 즉 새창조는 원 창조보다 뛰어나다. 그에게 이 신화는 완전한 사랑을 의미하며 정욕에서 해방된 순결해진 상태, 은혜로 충만한 상태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더 높은 성화의 단계에 이르고 이에 이르기 위한 인간의 갈망, 훈련, 고난의 과정, 수고, 노력은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여 성령의 협력에 의해 구원을 이룬다.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님이 낮아지심에 참여하여 그를 좇는 제자의 삶이므로 참 신자는 나그네와 이방인처럼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초탈함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살며, 가난과 고난을 겸손과 인내로 겪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2) 마카리우스의 사상

가. 기독론 - 마카리우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항상 눈앞에 현존하는 신앙의 현실이었으며, 그 때문에 인간과 신의 관계성은 영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역사적 과거로서보다는 그의 영(성령)적 현존 때문에 현재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인간의 원래성(본성)을 기초한다.

나. 신론 - 마카리우스가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그의 무한하신 지-비와 인내, 용서와 기다리심을 강조한다. 바로 이 자비 때문에 하나님은 신성과 인성과의 무한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낮추고 작게 하여(변모) 인간의 육이 되셨다. 그러나 그 이유는 그로 인해 영혼이 하나님께 합 당한 불멸의 존재로 화하여 그와 한 영이 되도록 변모할 수 있는 존재론적 기초를 놓기 위함이었다(神化).

다. 인간론 - 인간은 지극히 존엄한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과 같이 그와 닮은 불멸의 영혼이다. 순수하고 (신적)영광과 빛으로 가득한 인간의 본래적인 인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원래의 인간은 선택과 의지의 자유를 선사 받았다. 여기서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의 기쁨이었던 것이다.
이 신적 자유는 인간의 빼앗길 수 없는 본성이므로 은혜는 고취하고 돕는 것이지 강요하지 않는다. 또한  죄 역시 이 자유를 소멸할 수는 없다.

라. 죄론 - 인간은 타락하여 죄와 어두움의 세력에 처하게 되었다. 인간의 영혼 속에 죄와 악의 영이 성령과 투쟁한다는 사상은 마카리우스의 가장 특징적인 사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성만으로는 결코 이 어두움과 죄에서 해방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 영적 싸움을 통해서만 자유와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 관계에서 중립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악한 어두움의 권세가 영혼을
꿰뚫고 지배하는 한 구원은 불가능하며, 영혼이 악과 섞이지만 그것은 영혼의 본성을 잃고 자유를 전적으로 상실 당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배당하는 것이다

마. 구원론(신인 협동론) - 인간은 자유의지로서 구원을 위해 죄와 투쟁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은혜가 임하지 않고는 새로운 존재로 변모되어 신성에 참여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갱신, 회복할 수 없다. 마카리우스의 구원론에서 가장 주된 요소의 하나는 신인의 협력(synergy)이다. 구원은 오직 인간의 높은 결의와 의지의 자유로운 추구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되어 협력할 때에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협력의 가능성은 성령의 역사에 놓여 있다.

바. 성령론 - 그는 성령에 참여하거나 성령과 섞이는 체험을 빛으로 변화하는 신화(神化)로 설명한다. 신화란 말의 의미는 성령을 통한 신성에의 참여 또는 하나님과의 충만한 교통을 말한다. 물론 이는 단순히 신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새 존재가 되어 거듭날 때 인간은 영안이 열리고 성령의 불, 신성의 빛에 의해 다른 세계로 옮기워진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신성으로 충만하셨다면,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은
신성에 참여하며 그리스도의 완전에 이르는 것이다. 이 완전의 단계에 도달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심이 되는 것은 주님에 대한 순결한 마음의 사랑이다 아름답고 완전한 사랑 속에서 영혼의 본성이 변형되어 주님과의 신비적 연합을 이룬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인치시며 영혼 안에 거하신다 이 모든 것이 은혜의 변모 역사인 것이다

사. 영적인 진보와 성장 - 마카리우스의 수도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차원은 영적인 진보와 성장이다. 완전은 단시일에 도달되는 경지가 아니므로 끊임없는 금욕생활에 있어서 오랜 수도의 실천적인 내적 투쟁이 요구된다. 무엇보다도 앞서 하나님을 다함없이 사모하면서 은혜를 간구하는 쉼없는 기도가 있어야 한다. 또한 자기와 세상을 부인하고 초탈하며, 정욕에서 자유케 되려는 의지의 노력이 계속 강화되어야 한다.
세상에 대한 사랑과 정욕 대신에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야 되기 때문이다.

아. 기도 - 기도를 통해 수도사는 금욕의 열매인 덕을 쌓고 그리스도를 닮게 된다. 이러한 덕의 획득에는 주님의 계명을 성취함으로써 그의 자유의지 전체를 거기에 일치시키는 노력과 수고의 정진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갈망을 증진시킬 때, 신앙의 성장과 함께 성화의 진보가 나타난다.
물론 시련을 통해 갈등과 유혹을 극복하면서 소망 중에 인내하며 자신을 제어하는 근면한 경주가 있어야 할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을 마음 가득히 채우고 완전에 이르기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교만이나 나태, 부주의로 인한 타락의 가능성이 언제나 따라온다.

자. 신화 - 은혜로 충만한 완전한 성령의 사람의 상태는 평정과 균형, 무한한 자유와 순결이다.
성령에 가득 취하여 때로 몰아경에 들어가면 신비의 세계가 열려서 천국의 수많은 집들을 하나씩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인류에 대한 사랑과 긍휼 때문에 눈물로 통회하며 자신을 모든 신학보다 더 비화시켜 가장 작은 자로 여긴다. 평화와 기쁨 속에서 그에게는 하늘의 지혜와 감추어진 신비들이 빛 속에 드러나며 영혼의 형상을 볼 수 있게 되고 모든 사람을 꿰뚫고 이는 은사를 받는다 환상을 통해, 투시를 통해 보지만, 중요한 것은 내적인 지각, 관조이다. 이 내적인 눈을 통해 주를 보는 것은 황홀한 몰아의 세계여서, 영혼은 하나님으로 인해 녹아 버리고 성령의 바람이 영혼의 본질 전체를 관통한다.
마카리우스는 후일 웨슬리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이는 '성화와 완전사상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카리우스에 의하면 "성화는 순결하고 완전한 사랑의 충만에 이르기까지 긴 일생에 걸쳐 수도적실천의 노력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이 수도적 실천은 금욕이라고 부르는 차원에 집중되어야 한다. 금욕(askesis)은 인간의 죄된 정욕을 깨끗이 정화하여 무욕(無慾), 즉 아파테이아 라고 칭하는, 정욕에서 자유롭고 순결한 경지까지 정진하는 자기 제어(克己 ;self mastery)의 영성 훈련을 말한다. 이러한 완전을 향한 영적
진보와 성장의 과정에는 높낮이가 있으며, 타락과 회복이 포함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웨슬리의 현저한 특징 중의 하나인 신인협동론을 찾아볼 수 있다.
곧 완전에 이르는 성화의 길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노력이 협력(synergia)하여 추구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 주도적으로 선행(先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아무 응답이나 노력도 없이 그저 수동적으로 있기만 해서는 않된다. 오히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영의 역동적 역사에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능동적으로 응답하며, 무한한 노력과 실천을 통해 자신의 성화에 정진해야 한다" 는 것이 그것이다.

3) 파코미우스(Pachomius. 286-346,7)

파코미우스는 안토니의 생애기간 중에 활동했고 안토니보다 10년 전에 사망했다. 그는 고(高) 이집트 (Theben)에 살았던 비 그리스도인 부모의 아들이었다. 그는 군 생활 중 나일강의 배 위에서 자신의 몸을 보살핀 그리스도인들의 자선활동에 감명을 받았고 복무를 마친 후 세례를 받고 금욕의 길을 선택하여 수도사 팔라몬(Palamon)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320년에 이집트 테바이스(Thebais)지역의 타베니시(Tabennisi,고에집트)에 첫 수도원을 설립하여 정형화된 수도원의 시조가 되었는데 "은둔자들이 함께 모여서 사는 수도원적 형태를 처음 시작한 사람으로 지금까지 개인적이며, 필요에 의해서 함께 모이던 은둔자들을 함께 모아서 공동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공동생활 속에서 수도사들을 돕고, 방문자들에 대한 상담을 위한 은둔 수도사의 성숙한 인격과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식견을 갖추는 등 '사람들에 대한 봉사' 차원에서 공동생활을 추구했다. 이것은 그들이 공동생활의 근거를 행 4:32-33에서 찾은 데 있다.

(1) 파코미우스 수도원 운동의 특색

수도사들이 개인 방에 거한 일, 꾸준한 개인 기도의 의무, 토, 일요일에만 성찬을 행한 일, 압바에 대한 순종의 의무등은 다른 수도자들과 동일 선상에 있지만, "이 공동체에 가입하고자 하는 인물은 누구나 전 재산을 완전히 포기하고 상사에게 절대 복종할 것을 서약했으며 구성원들은 모두 육체 노동을 해야 했으며 그 어떤 사역도 거부할 수 없었다. 기본 규칙은 상호 봉사였으므로 비록 명령하는 위치에 있는 자라도
절대 복종의 서약에도 불구하고 하급자들을 섬겼다."
그의 수도원 운동에는 다음과 같은 특색이 있었다.

가. 규율의 도입 - 압바에 대한 수도사의 관계와 수도사들 사이의 관계는 자유로운 계산과 순간적인 영감에 맡겨지지 않고 확실한 규율에 의해 규정되었다.
이들 공동체들은 스스로를 '거룩한 공동체'에 속했다고 생각했으며 수도사들에게 요구되는 수도원 규칙의 준수라는 동일한 규범이 있었고 질서를 중요시 여기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수도사의 삶의 형태가 자리잡게 되었다. 이는 조직 내적 질서와 순종을 강조하는 것이었고 순종의 대상과 권위는 규칙에 있게 되었다.

나. 공동생활 - 이 규율의 제정은 확고한 규정 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공동체의 건설을 의미한다.
규정은 하나님이 계시한 질서로 간주되었고, 파코미우스는 수신자와 중개자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이런 생활 형태에서 원시 그리스도교의 한 혁신,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의 철저한 제자도를 실현시킬 가능성을 보았다.

첫째, 이런 내적 일치성은 건축상의 일치성을 통해 외형적으로 보존되었다.
둘째, 개인 명상의 의무 - 감독장에 대한 절대적 복종과 순종에 의해 개인주의와 독단의 위험은 견제되었다.
셋째, 공동식사 - 공동식사는 매일 두차례 이루어졌으며 침묵 속에서 그리고 확고한 좌석규정 속에서 행해졌다.
넷째, 기도로 이루어지는 예배는 매일 두차례 드려졌으며
다섯째, 공동노동으로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분업화한 노동을 수행하였다.

다. 훈련의 엄격성 - 수도원 내에서는 철저히 엄격한 훈련을 해야 했고 단지 수도원을 떠나는 자에게만 이 훈련은 완화되었다. 그러나 한번 수도원을 떠나면 돌아오기가 쉽지 않았고 이는 수도원 내에서의 일정하고도 보장된 삶과 삶의 의미를 제공받는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이들은 또한 교육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여 새로 입회하는 자는 모두 주기도문과 일정한 수의 시편을 배울 의무를 가진다. 모든 자에게 독서의 의무가 있었고 강의와 시편 낭송이 예배 모임에 필수적이었다.
라. 가난 - 광야의 금욕가들은 가난하게 살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가난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즉 가난의 정도와 범위를 스스로 결정했다. 하지만 수도원에서 사는 수도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개인의 소유는 전혀 없었고 기본적인 삶에 필요한 것들은 수도원 자체에서 해결하였다. 이는 수도원이 갖고 있는 소유물들은 "그리스도의 재산"(Eigentum Christi)이라는 사고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류의 사고는 후
일 정치적이나 사회적 혼란기에 수도원의 재산을 노리는 사람들과 세력에게 유력한 방어 수단이 되기도 했다. 그들은 수도원의 소유는 그리스도에게 양여된 재산이고, 이 재산으로 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엄격함 속에서도 파코미우스는 지나친 금욕은 반대했다. 극단적인 금욕은 그가 설립한 공동체 생활에 명백히 배치되었다. 단지 그의 수도원 운동의 특색은 집단적 통솔을 받는 운동이었다는데 있었다.
은둔자들과 수도원 주의자들은 때때로 삶의 방식에 대하여 긴장 관계에서 논쟁하거나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어느 것이 더 완전한 삶인가에 대하여 실제적이고 이론적인 면에서 논쟁을 하였다. 은둔자들은 자신들이야말로 금욕적 삶의 양식에서 모범이며 은둔에서의 금욕이 완전으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고, 수도원은 금욕적 삶의 첫 과정으로서 수도원은 많은 수도사들을 대상으로 가능한 방법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수도원주의자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징인 거룩함과 완전함을 보여주는 삶의 양식이 곧 수도사의 삶"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후일 자신들의 의도와는 달리 경제적으로 큰 단위가 되었을 때 그 결과는 경제적인 면과 함께 권력과 부유함을 초래하기도 했다.

4. 사막 영성의 특징적 요소

1) 삶 전체로서의 영성

본질적으로 교부들은 사막의 영성을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 터득한 것이며 삶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사막 교부들의 영적 가르침이나 기도의 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결정적인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사막 교부들은 체계적인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께 대한 몸과 정신과 혼의 모든 양상을 재정립하기 위해 일생 동안 분투하면서 여러 가지 경험을 했으며,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행하는 기도는 매일 몇 시간 동안 행하는 활동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하는 삶 자체였다. 그런 면에서 아가톤(Agathon)은 "기도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지속해야 하는 힘든 일이며 투쟁이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금욕 고행에서는 수실이 매우 중요했다. 그들은 "수실에 들어가 앉으라 그러면 그것이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만일 사람이 자기의 수실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 몸은 수실 안에 머물러 있지만 생각은 바깥 세상에 가 있다면, 그는 이미 그곳을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사막 교부들은 인간의 영적 생활과 본성적 생활 사이의 연결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기도 생활의 일부가 되는 몸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이 행한 충고에는 무엇을 먹으며, 어디에서 잠을 자야 하며,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지,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특히 마귀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등과 관련된 것이 많다.
마귀들과의 싸움은 사막에서의 주요 관심거리였다. 사막은 마귀와의 최종적인 싸움의 장소였으며, 수도사들은 성벽에서 파수를 보는 파수꾼들이었다 수도사들은 항상 마귀를 직접 대면하여 만났다."
동방교회의 원천적인 신학적, 교리적 가르침은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응답을 요구하고, 인간의 응답이 하나님의 은헤와 더불어 역사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은혜 일변도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신비주의나 영성은 인간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의 신학적, 교리적, 신앙적 구조는 믿음과 행위, 신앙과 소망과 사랑의 조화로운 일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에는 칭의 만이 아니라 수도 정진을 통한 성화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수도 정진의 시련과 고난은 성화를 이루는 방편인 것이다. 안토니의 생활은 광야와 세상을 왕래하는 것이었고 후일 자발적으로 세상에 들어와 은사적 지도자로, 영적 아버지로 사역했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한 존재였으며 완전한 수도인, 금욕인의 표시로서 아파테이아의 평형, 순수성에 도달했다. '아파테이아'는 영어로 'passionlessness'로 번역된다.
'passion'이란 성경에서는 정욕, 또는 욕망을 말한다. 그러므로 아파테이아는 무정욕, 무욕을 말한다. 이것은 인간적인 것을 초탈한 것, 곧 인간의 완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성, 로고스가 지배하는 것, 인간이 자기의 인격을 제어해서 평형, 균형에 도달하여 치우치지 않고 무질서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온전한 상태를 말하며, 즉 성화된 상태이다.
동방교회의 중요한 특징은 인간성과 신성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의 교통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고, 인간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타나시우스의 안토니에 대한 평가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2) 영적인 아버지와 어머니 (abba, amma)

이처럼 기도의 삶 전체의 맥락에서, 영적인 아버지 혹은 어머니인 "사부"의 역할이 중요했다. 다시 말해서 사부들은 생명을 주었다 사부(abba,amma)란 자신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실제로 알고 있기 때문에 아들들을 위해 진실되게 하나님께 중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실체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은 생명을 주었다.
사부란 후대의 서방 세계에서 처럼 영적 지도자를 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사부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잉태한 아들들(제자들)의 아버지였다.
영적 지도자들로서 압바, 암마는 제자들이 먼저 선택하여야 할 사부였다. 스승에 대한 겸손한 순종을 통해 영적 목표에 도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막에서의 스승은 주요한 정진의 조력자였다.

3) 금욕주의

사막영성의 특징은 금욕생활에 있다. 이들의 금욕생활(아파테이아)의 목표는 인내, 극기를 통한 그리스도인 된 인격적 고결(덕)의 배양, 영적 생기와 힘을 얻는 자기 수련을 통한 사랑의 완전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 수도생활의 모토였으며 자기를 제어하여 인간성에서의 일그러지고 타락한 면이 변형되어 그리스도의 인격과 동화되는 것이 금욕생활의 목표였다.
자기의 영과 몸이 통전 속에서 평정을 얻으며 영혼의 자유를 누리고 자기를 정복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육의 문제를 단순하게 천시하거나 무시하고 학대해야 영이 잘된다는 식의 개념은 없다.
몸을 잘 다스리고 순화시켜서 정욕의 도구가 되지 않고 순수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와 영을 좇는 삶에 지배되도록 하는 것이 금욕의 목표였다. 이렇게 됨으로써 영혼은 육에 속박 당하지 않고 죄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성령 안에서 아파테이아의 평정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발언된 말의 중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에 말을 절제하고 서적들에 대해 매우 경계하였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기억에만 의존하여 성경 전체, 특히 시편과 신약을 서로 가르쳤다. 또한 이들은 가장 존경받던 은자들로부터 비롯된 지혜의 말씀과 권덕이 되는 일화들을 서로 나누기도 하였다."

4) 일상적 생활

사막 교부들은 일상적인 사회를 벗어나 고독한 사막을 찾았다. 이것이 그들의 "영성"의 첫 단계였다. 그 다음에 그들은 영적인 아버지들 밑에 들어갔다. 그 다음에 영위하는 그들의 일상생활은 곧 그들의 기도였으며, 철저하게 단순한 생활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자 이상적인 삶은 인간 이하의 삶이 아니라 초인간적인 삶, 즉 거룩한 삶이었다.
그들은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게속적인 기도와 명상, 성경에 대한 암기, 반추와 묵상을 하였고 시편과 더불어 기도하며 경성하는 삶을 살았다.

(1) 기도생활

사막의 교부들은 기도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향해 조정된 삶이 곧 기도였다. 그들의 일반적인 기도 형태는 주중에는 시편을 차례로 암송하면서 밧줄을 꼬는 것이었으며 때때로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짧게 기도하는 화살기도를 드렸다. 그들의 기도의 목표는 물이 지극히 잔잔하여 태양의 모습을 비칠 수 있을 만큼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 즉 hesychia에 도달하는 것이
었다.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 안에 거하는 것,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 곧 거룩한 삶이요 신령한 생활이요 수도 생활이자 수도사의 목표요 길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는 생활이었다

(2) 육체노동

노동은 그들의 의무였으나 이것은 자신의 삶을 위한 최소한의 것을 얻는 수단인 동시에 다른 사람을 구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는 예배와 최소의 생활에 필요한 물건의 조달을 위해 행해진 보조 수단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여전히 기도에 수행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또한 노동은 영육간의 균형에 있어서 중요했는데 그들의 '육체노동'이란 말은 "손노동뿐만 아니라 육체적 고행, 기도에 따르는 언동, 음식과 수면의 절제도 포함된 말로 사용했다. 은수사는 세상, 세속일, 직업을 버리고 사막 속에 들어와 지극히 검소한 생활과 노동 속에 영혼의 안정을 얻었고 겸손과 일치된 노동을 통해 영혼의 안식에 도달하려 했다.

5) 수도의 목표

(1) 사랑

수도사들의 삶의 목표는 금욕 고행이 아녀라 하나님이며,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사랑이었다.
사막에서의 온유한 사랑은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의 핵심이었으며, 그들의 생활 방식을 시험하는
기준이었다. 그 사랑은 완전하고 전적인 것이어야 했다.
사막 교부들은 방문객들을 환대하였는데 특히 안토니는 "나의 삶은 내 형제와 함께 한다"라고 말했으며, 두 번이나 도시에 갔었다. 한 번은 역병 때문에 죽어 가는 사람들을 구제해 주기 위해서였고, 또 한 번은 이단에 대항하여 신앙을 옹호하기 위해서였다, 사막의 교부들은 손님들을 그리스도께서 영접하시듯이 영접하려 했다. 그들은 지독한 금욕 생활을 했지만 방문객이 찾아오면, 자신의 금욕 생활을 감추고 그들
을 환대했다.

(2) 덕

덕이란 성령이 열매를 맺는 인격적 성숙이다. 이것은 삶의 문제, 인격 성화의 문제, 인간성이 온전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승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전인적이며 자기 비움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와 일치될 때에 진정한 덕, 그리스도의 품성을 입게 되고 그리스도의 인격과 동화되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발전하다.
이러한 영적 수행의 목적은 사랑이다. 이것이 온전한 성화이며 영적 상승과 진보는 세상적, 육적 세력으로서의 악마와의 투쟁, 믿음과 계속적인 기도에 의하지만, 승리는 인간의 노력에 의존하지않고 주님의 도우심과 현존에 의존한다. 여기에는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 중요한 덕목이 된다.

(3) 신화(神化)

수도교부들은 죄는 반드시 용서와 사랑에 의해 치료되고 정복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죄와 유혹과 환란을 통해서 우리의 인격이 정화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수도운동은 영적 성화운동이며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격에 도달하려는 운동이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다가가는 운동이다.
그들은 어떤 성스러운 부름을 받기보다는 먼저 자기 자신의 구원을 갈망하였다. 이것은 이승에서부터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려는 것이었다.

5. 수도원 운동의 발전 및 전개 과정

안토니가 실천한 개별적이거나 은둔적인 수도에 반대하여 공동체로서의 수도 운동이 역시 이집트 사막에서 파코미우스에 의해 이룩되었다.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수도원 운동을 창시한 가장 유력한 인물로는 지중해 유역 헬라어를 사용하는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에서는 가이사랴의 바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제국의 서쪽에서는 루니시아의 베네닉트를 들 수 있다.

1) 카파도기아 학파 - 로마 제국의 동부, 오늘날의 터어키 지역에서는 가이사랴의 바실(Basil of Caesarea,330-379)이 수도원 운동에서 유력한 인물이었다. 공동체적 수도원 운동의 우월함에 대한 강력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바실은 두 개의 수도원 규율 집을 저술했다.
그는 전체적인 감사의 생활, 영적 은사, 그리고 이기심을 공격하는 데 있어서 순종의 중요성 등을 강조했으며 영적 성장, 혹은 성화의 전 과정은 곧 우리의 첫 조상 때문에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바실은 그보다 앞서 아타나시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터툴리안의 교리를 옹호했으며 그는 성령의 완전한 신성과 콘스탄티노플에서 결정된 니케아 신경을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주장하는 데 있어서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보다 일찍 활동했던 알렘산드리아인 오리겐의 영향도 받았다.
바실의 영적 가르침은 오리겐의 가르침과는 달리 어두움에서 신적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빛에서 신적 어두움으로 인도한다.
바실은 은둔자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는 "공동체에 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그의 이론을 전개했는데,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혼자 있거나 거친 존재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사회적 존재로 창조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의도하고 있는 것은 공동생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또한 바실이 보기에 이 공동체의 규범과 정도는 바로 성경이고 자신이 만든 규칙들은 개별적으로 부딪히는 문제들이나 공동체 생활에서의 금욕에서 나타나는 특별한 경우에만 적용할 것을 말하고 있다."
동방교회의 수도원은 바실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후일 바실은 '동방교회 수도원의 아버지'라고 불려진다.
바실에게는 함께 작업한 두 명의 동료가 있었다 그들은 닛사의 그레고리(바실의 형제)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그의 친구)였다. 이들 세 사람은 소아시아에 있는 카파도키아(cappadecia)라는 지명을 좇아 카파도키아 교부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세 사람 모두 니케아 신경을 수용 했으나 각기 다른 은사들을 가지고 있었다 바실은 조직자요 감독이요 수도원장이었고, 닛사의 그레고리는 지적으로 가장 탁월했으며, 나지
안주스의 그레고리는 유창한 웅변가였다 바질과 닛사의 그레고리의 누이인 마크리나(Machna)는 이들 두 사람에게 대단히 많은 영향을 주었다.

2)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Evagrius of Pontus,345?-399)는 카파도키아 교부들과 후대의 저자들, 특히 동방과 서방의 수도사들을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 고리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이들 카파도키아 교부들을 알고 있었으며, 또 이집트로 가서 그곳의 사막에서 생활했다 그는 오리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고, 그 만큼은 아니지만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의 영향도 받았다 그는 플라톤이 발달시킨 철학의 계보를 이어
기독교적 플라톤주의자가 되었다. 비록 그는 후일 오리겐과 함께 정죄되었지만 그의 가르침은 익명이나 가명으로 널리 유포되었다.
에바그리우스에 따르면, 인생의 목표는 최초의 타락 때에 잃어버린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이성적 영들의 통일을 회복하는 것이다. 기독교적 삶에는 실질적 단계, 본성적 단계, 그리고 신학적 단계가 있다 에바그리우스는 기독교적 삶에 대한 위험을 여덟 가지로 분석했다 나중에 존 카시안은 이것들을 일곱 가지로 정리했으며, 그것이 "일곱 가지 대죄"가 되었다; 에바그리우스가 열거한 목록에는 탐식, 욕정, 탐욕, 우울, 노염, 낙담, 허영, 교만 등이 포함된다.
에바그리우스가 볼 때 무정념(Apateia ; 정욕이 없는 상태, 혹은 정욕에서의 자유)은 영혼의 능력을 건전하게 발휘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바람직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기독교적 삶의 목표는 아니었대 그는 기도의 목표는 마음을 적나라한 상태로 만드는 것, 무념(無念) 무상(無想)의 순수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에 대해 잃어버린 지식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3) 존 카시안(John Cassian, 360-432년경)은 에바그리우스의 가르침을 서방으로 가져갔다 그는 이집트에서 에바그리우스와 알고 지냈으며, 마르세일레스(Marse]es)로 가서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많은 책을 저술했는데, 그 중에는 Conferences도 포함되어 있으며, 거기에는 그가 이집트의 수도사들, 특히 에바그리우스에게서 배운 것들이 반영되어 있다: 베네딕트는 이 문선(文選)을 수도사들이 읽어야 할 성전(聖典)으로 삼았다. 존 카시안은 이집트 수도원 운동에서 오리겐파의 이상을 다른 문화권에 전해 준 인물이었다.

4) 이탈리아에서는 베네딕트(Benedict, 480-547년경)가 베네딕트 수도회를 세웠는데, 그것은 지금도 가장 큰 카톨릭 종교 공동체이다. 베네딕트는 홀로 독거 생활을 한 후에, 상호 토론과 충고를 주장하면서도 수도원장에게 많은 권위를 부여하는 수도원 조직법을 만들어 냈다 그의 [규율](Rules)의 기본적 영성 원리중 하나는 기도와 육체적 노동을 결합한 것이다 그들의 표어는 "노동은 기도다"이다 육체 노동, 절도있
는 식사와 수면이 적절히 배치된 상태에서 하루에 일곱 차례 행하는 기도의 리듬은 오늘날까지 서방 수도사들의 기준이 되고 있다.
베네딕트 역시 매일 4시간씩 성경을 읽을 것을 규정했다. 수도사들은 성서와 초대 기독교 작가들의 저서를 읽고, 조용히, 혹은 일을 하면서 그것들에 관해 묵상해야 했다(하루에 6시간 노동을 한다). 그는 침묵을 덕이라고 여겨 칭송했다.
베네딕트 이후에 수도사들과 수녀들이 행하고 있는 수도 서원은 베네딕트의 [규율]에는 정의되어 있지 않으나, 거기에는 그의 영향이 반영되어 있다. 가난(淸貧), 순결(純潔), 순명(順命)등을 서원하는 것은 공동생활을 가능하게 만드는 영성 훈련의 형태로 의도되어진 것이다.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바 재산에의 속박을 푸는 방법이다 순결, 즉 누구와도 성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독신생활을 하는 것은 공동체에 봉사하기 위해서 성적인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의도를 가진 것이다
베네딕트는 순명을 가장 강조했다. 그것은 다른 사람 즉 수도원장에게 순종하여 자신의 뜻을 꺾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겸손하게 다른 사람의 뜻을 위해서 자기의 뜻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기독교인의 복종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5) 켈트 전통 안에서의 기독교적 창시자 성 페트릭(saint Patrik, 389?-46l?)

그는 켈트 사회에서 유력한 여인들을 개종시키고 아일랜드 전역에 수도원들을 세웠다.
아일랜드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패트릭은 선교사가 되어 돌아왔다.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인 켈트족 신자들은 처음부터 수도원운동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들은 이집트의 콥트족 수도사들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안토니의 생애]라는 책도 잘 알려져 있었다. 교회는 감독보다는 수도원장의 지휘를 받았다. 남성과 여성을 위한 "이중" 수도원이 흔했으며, 때로는 여성이 지휘하기도 했다. 아일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성인인 브리지드(Brigid)가 그러한 수도원장이었다 아일랜드의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영성 안에 ananchara, 흑은 "영적 친구"(soul fiend)라는 개념을 중시했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적 삶을 살아 갈 때에 혼자가 아니며, 친한 동료가 동행하면서 격려해 주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아일랜드의 종교 운동도 고대 시리아의 수도원 운동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엄격한 금욕주의를 실시했다. 날마다 150편의 시편을 낭송하는 관습이 보편적이었고 어떤 사람은 차가운 물 속에 서서 기도했다 그들은 날마다 금욕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는 흰 순교, 피 흘려 죽은 붉은 순교 그리고 죄를 보속하는 행위인 푸른 순교 등에 대해 말했다.

켈트족의 영성의 특성은 첫째, 개인적인 죄고백을 실천하며 특정의 죄에 대한 보속 행위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고해 규정서] (Penitentials)라는 책에는 특정의 죄에 대해 행해야 하는 보속행위가 기록되어 있다. 둘째, 금욕주의의 또 하나의 특징적 형태는 자기의 집이나 수도원에서 스스로를 추방하여 유랑하는 것이었다. 아일랜드 수도사들에게는 자기들이 자라 온 집을 떠나는 일이 흔히 있었다. 이러한 여행은 간접적으로 북유럽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결과를 낳았다.

6) 이디오피아

기독교 수도원운동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는 이디오피아에 있었다. 4세기에 기독교는 악숨(Axum) 왕국의 종교로 공표된 이래 480년에 그곳에 도착하여 수도원적 가정을 통해서 신앙을 전파한 각기 다른 국적의 아홉 명의 성인에 의해 성취되었다. 그들은 성경을 번역 했고, [안토니의 생애]와 파코미우스의 [규율집]도 번역했다.

6. 서방 수도원 운동의 시작 및 전개

서방 교회에서 가정 금욕이나 경건 활동이 수도원의 체제로 형성되어 정형화된 것은 4세기 후반이다. 이 시기 수도원 운동을 살핌에 있어서 암브로스와 어거스틴의 역할은 지대하다. 특히 암브로스 혹은 암브로시우스에 의해 어거스틴으로 정착된 흐름은 서방 수도원 운동 고찰 함에 있어서 중요한 노정인 것이다.
당시의 방랑 금욕가들은 동방적 금욕가들의 생활 형태를 그대로 배워 온 것으로 세상을 방황하면서 소위   Imitatio Christi의 이상을 좇는 삶을 이상으로 삼았다. 이런 와중에 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을 비난하면서도 금욕적 생활의 필요를 느꼈고 이들은 이러한 필요에 따라 방랑 금욕가들을 "정주"시켜 한 곳에 머물면서 금욕적 생활을 하는 체제를 만들고자 했다. 이런 활동은 가정에서의 금욕이나 교회 내적 금욕으로
나타났으며 많은 귀족 계급의 부인들이 동참하거나 신학자나 수도사들을 도와 수도원을 세우는데 중요한 조력을 하기도 했다. 또한 금욕의 이상은 기졌으나 따라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도시 안에서 가능한 은둔과 고독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도시 안에 있는 대 저택이 수도원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로 인해 "도시 수도원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바탕에서 출발한 서방 수도원 운동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방 수도원은 수도사의 덕목 중에 겸손과, 공손함, 가난함, 순종을 강조하였다.
둘째, 주교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이것은 수도원이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셋째, 유연성을 지니고 있었다. 금욕적 이상은 일치했으나 교회의 중요한 위치로 인하여 자신의 독자성을 확보하지 못하였고 거의 교회 조직의 일부가 되어 갔다.
넷째, 고립, 은둔의 모습이 동방에서보다는 현저히 약화되었으며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은둔의 이상이 실현된 것으로 받아들였다.

1)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39-397)

(1) 암브로시우스의 생애

암브로시우스는 명문출신으로 교직에 들어가기 전 이미 고위 집정관이었다. 그는 339년 갈리아의 집정관인 아우렐리우스 암브로시우스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로마에서 교육을 받고 365년에 집정관이 되었다. 370년경 북 이탈리아지방의 총독이 되었으며 이때 밀란의 공석중인 감독직의 선출문제에 개입하게 되었다. 아리우스파였던 밀란의 감독 아욱센티우스가 죽자 회중은 암브로시우스를 그 후임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기독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나 당시의 관습에 따라 세례를 연기 하였었지만 373년 11월 24일에 세례를 받고 12월 1일에 밀란의 감독이 되었다. 397년 그가 죽기까지 감독의 위치에 있으면서 당시 로마의 수도였던 밀란의 감독으로서 그라티안 황제(375-383), 발렌티니안 2세(375-392), 섭정 유스티나, 데오도시우스 황제(379-395)등의 여러 황제에 대하여 압도적인 정치적 영향을 끼쳤다.

(2) 암브로시우스의 교권의 확립

중세 카톨릭주의의 교권이 성립된 것은 서방에서와 같이 강력한 교회 지도자의 출현과 더불어 유약한 황제들이 오히려 교회의 손에 들어와서 국권이 교권 밑에 병합되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암브로시우스는 이와 같은 의미에서의 카톨릭주의를 발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암브로시우스에게 있어서 교회의 영역과 국가의 영역은 분리되는 것으로 전제되었다. 그는 황제들이 교회의 일에 대하여 간섭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전젠군주하에서 군주로 하여금 감독의 일에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은 그 권위의 서열에 있어서 군주가 감독의 권위 밑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황제들은 신자로서는 평신도로서 언제나 감독 아래 있고, 감독의 교훈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처럼 암브로시우스는 황제를 하나의 평신도로 보고 그에 대하여 감독으로서 신앙적 입장에서 의견 지시를 하고 만일에 불응할 경우에는 성체를 거부 함으로써 응수하였다.
그는 황제의 법률을 하나님의 법 위에 놓지 못하게 하였으며 황제는 오직 하나님의 교회를 모든 모독의 더러운 것들로부터 정결케할 의무이 있는 것이다.

암브로시우스의 국권에 대한 이상의 관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와 교회는 원칙적으로 분리되므로 황제가 교회 일에 간섭함을 불허하였다. 더욱이 평신도로서 감독에 대하여 가르친다든가 권고 하는 일을 불허하였다.
둘째, 황제도 신자이므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야 한다. 황제가 평신도인 한 감독은 그를 가르치고 필요한 일을 요구할 수 있다.
암브로시우스는 "황제는 교회 안에 속한다"(9Imperator intro ecclesiam est)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하여 암브로시우스는 교황도 아닌 일개 감독의 지위에서 서방교회의 교권을 국권에서 독립시킴과 동시에 국권 위에 올려 놓아 카톨릭주의의 하나의 기초를 세워 놓았던 것이다.

(3) 어거스틴과 암브로시우스의 만남

주교였던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97년 사망)는 수도사가 아니면서도 수도원의 위대한 스승으로 불려졌다. 그는 밀라노와 주변 지역을 주요한 수도원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는 금욕적인 생활로 인지도가 높았으며 수많은 영적 저작을 낳았고 특히 여성 지원자들의 위격을 높여 주었다.
그의 저작들은 금욕적 삶의 방향과 필요한 내용들에 대한 조언을 담고 있으며 수도사의 이상을 가지고 은둔의 세계에서 관상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인공 광야로서의 은둔의 삶을 가능케 해 주었다.
어거스틴은 381년 그가 로마로 가기까지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교사 생활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악의 근원과 본질, 기원에 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진채였고 일년 후 그는 뛰어난 수사학자이면서 그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암브로시우스 주교가 있는 밀라노로 갔다. 암브로시우스의 설득력있는 화술은 어거스틴의 마음을 움직여 마침내 그리스도께 귀의하도록 하였다.
암브로스는 어거스틴이 갖고 있던 기독교에 대한 반대가 신앙의 오해에 근거하였음을 깨닫게 해준 것이다.

2)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1) 어거스틴의 생애와 [고백록]

어거스틴은 354년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의 타가스테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한때 마니교에 심취하였으나 악의 근원과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해결치 못한 채 384년 밀라노에 있는 암브로시우스 주교에 의해 그리스도께 귀의하여 전향하였다.
386년 그의 나이 32세에 회심한 삶을 시작 [참회록]을 쓰고 430년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어거스틴의 체험적인 영성의 틀을 알려면 그의 [고백록]을 보아야 한다.
그는 수사학을 공부하면서 항상 진리에 관심을 두었다. 그의 영적 세계와 진리에 대한 탐구는 어릴 적부터 그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었던 기독교적 사고에서는 만족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진리를 찾는 작업의 일환으로 마니교에 심취하였으나 마니교의 스승 파우스트에게서도 실망하여 9년 동안의 마니교 생활을 청산하였다.
이 때에 그가 만난 것이 신플라톤주의였다.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 계열의 철학으로서 플로티누스가 종교화한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종합종교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의 글들을 통하여 비물질적인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 신은 한 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한 분이신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이 비롯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이 플라톤 철학의 인도를 받아서 바울서신에 접근하게 되었고, 성서에 접근하게 되면서 신앙으로 몰입하였고 33세에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어거스틴이 저술 한 대표적인 저서 [고백록]은 하나님과 자신의 내면생활을 이야기한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과거를 재구성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으신 방법을 찾아내었으며, 자신은 훨씬 위대한 힘에 이끌려 왔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 책은 이집트 수도사들이 사용했던 원리들과 금언들 몇 가지를 현실화했다. 이집트의 안토니에 대한 이야기는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옛 생활을 완전히 버리고 새생활을 하게 하였다.
[고백록]은 하나님을 향한 개인적인 갈망이 결국은 충족되어졌음을 증거한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생애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고 경건한 신자였던 어머니 모니카와 아버지 트리키우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마니교에서의 생활과 그 교훈의 무의 미성을 간파하였고 수사학 교사로서의 삶 그리고 후기 플라톤 철학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삶을 담을 틀을 마련하였고 성경을 믿기 위해
지적인 자살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는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확신을 얻었으며 '어린아이들의 "들고 읽어라"하는 노래를 듣고 롬13:13-14를 읽고 회심하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회심을 겪고 난 후 고향 근처에 있는 카씨키아쿰에 머물면서 수도원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조용한 산책, 성서묵상, 기도하는 생활 등으로 이어졌으며, 이러한 칩거는 그가 힙포의 감독으로 부름을 받을 때까지 이어졌다.
한편 그는 도나티스트들과의 논쟁에서 하나님의 객관적인 약속과 소속된 교회 성례전의 '객관적인 효용성'(Ex Opere Operate)을 주장하였는 데 이는 배교자들이 베푼 세례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어것은 성서적 카톨릭주의가 교회의 주체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이 세상을 흡수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그의 확신에 근거한 것이었다.
어거스틴이 힙포의 감독으로서 저술과 복음 전파에 진력하고 있는 동안 북아프리카는 반달족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로마제국의 영향권 하에 있었던 카르타고, 힙포등이 점령되었다.
그때 어거스틴은 주교들에게 양떼를 절대 버리지 말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삼개월 후 반달족은 힙포 시가지를 석권했고 어거스틴은 439년 8월 28일 그의 나이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2) 펠라기우스(Pelagius)논쟁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죄가 단지 아담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치고 인류 전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원죄는 부정되었으며, 유아들은 죄의 성향을 갖고 태어나지 않으며, 죄없이 무죄하게 태어난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반면에 어거스틴은 모든 인간이 죄의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며,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그로 하여금 죄를 지을 소지를 심어 준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들어 이 이단을 반박하였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의지에 미치는 죄의 영향을 세 가지 주요 단계로 구분하는데 첫째, 죄를 안 지을 수 있었던 타락 이전의 아담의 상태 (Posse non peccare),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타락 후의 모든 인간의 상태(Non Posse non peccare), 죄를 지을 수 없는 하늘에 있는 구속받은 사람들의 상태(Non posse peccare)가 그것이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와의 싸움에서 구원의 방편은 의인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펠라기우스는 기독교적 삶에서의 도덕적 싸움을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반발했다. 펠라기우스는 은혜만 의지하고 인간의 노력을 의지하지 않는 것은 도피 행위라고 보았다.
이것은 기독교 영성에서 근본적인 문제로서 후일 교회 안에서 가톨릭과 개신교도들을 분리하는데 일면을 하였다.
기독교적 삶에서 구주이신 하나님의 역할, 그리고 행위자로서의 인간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어거스틴은 자신의 삶에서 선한 것은 모두 자신이 성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옛 생활에서 구출되었다.
결국 가톨릭 교회는 종교회의와 공의회의 결정을 통해 어거스틴의 편을 들었지만 구원을 이루는데 있어서의 인간의 의지의 역할이 강조되게 되었고 개신교에서는 "은혜"에 대한 강력한 주장을 낳게 하였다.

(3) 어거스틴 영성의 특징

어거스틴은 영혼 안에 내재하는 세 가지 요소 즉 진리(veritas), 사랑(caritas), 영원성(aeternitas)가 있다고 보았다. 영혼에는 진리를 사모하는 열정이 있고, 사랑하려는 의지가 있고, 영원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으며 이 세 가지가 영혼의 기능(faculty)이라고 보았다.
후에 그는 [삼위일체론](De Trinitate)에서 이것을 삼위일체의 모형이라고 말하였다.
어거스틴은 영혼의 기능을 기억과 이해와 의지로 설명하는데 영혼의 세 기능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즉 기억 안에는 영원성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성을 반향한 것이며, 이해 속에는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성육신의 진리를 반영한 것이다. 의지는 성령의 역할을 하는데, 성령은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연결하는 역할이 성령에서 비롯되고, 또 성도들을 연결하는 끈이 성령인데 그것은 곧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인간은 본래 진리, 사랑, 영원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제대로 회복되면 인간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영혼의 기능은 삼위일체의 형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았다. 즉 그의 양혼 혹은 영성생활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다. 그의 영성생활에서 가장 선행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 안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거기서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성의 특징의 이와같은 내면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고를 균형있게 보려면 그가 말하는 하나님과 인간의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이며, 도덕적인 거리를 알아야 한다.
그는 역설적으로 내재적인 하나님을 발견함으로써 그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다시 인식한다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물질세계 속에만 갇혀 있을 때 하나님과의 거리감은 필연적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유사성(likeness)보다는 비유사성(unlikeness)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거리감과 비유사성을 불행이라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얻지 못하고 무지 속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거스틴의 영성을 살필 때는 내면적인 하나님과 초월적인 하나님의 변증적인 역동성에 의해 파악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혼 깊은 곳으로의 내림(descnte)이 곧 하나님 그분 자신으로의 상승(ascnte)이며, 하나님과의 만남의 길" 이기 때문이다.

(4) 어거스틴 수도원의 특징

북 아프리카 지역을 라틴어권 즉 서방 수도원과 함께 다루는 것은 힙포의 어거스틴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이 특징적 수도사 거주 지역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서방 수도원에 미친
영향에서도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다른 수도사나 수도원들의 잘못이나 수정해야 할 점들을 수정하고 보완하면서 자신의 독자적 수도원 형태를 만들었다.
어거스틴은 수도원의 기원에 대한 고전적 근거인 행 4:32-35를 해석하면서 '힌 미음과 한 정신'(cor unum etanima una)의 이상은 수도원의 삶에서만 가능하고 교회의 삶에서는 부족하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수도원을 세운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으며 이에 따라 규칙들도 제정되었다.

어거스틴 수도원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수도원 이상과 생활 양식들이 대부분 그의 신학적 성찰의 결과를 반영하고 있으며
둘째, 교부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는 바 그의 개종에 안토니의 저작들이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셋째, 금욕적 삶과 성직자 공동체에 함께 살면서 성직자의 삶의 양태와 수도사의 삶의 양태가 결합되었다.
넷째, 특히 어거스틴은 수도사의 삶과 신학적, 교회론적 자극이 담겨 있었다.

(5) 어거스틴이 서방에 끼친 영향

어거스틴은 라틴어권 교회에게 혼합된 유산을 남겨 주었다. 그는 플라톤주의의 철학적 전통과 성경의 진리를 결합하였고 시편과 바울을 강조한 지성인이었다. 그는 1세기부터 4세기에 이르는 동안에 그리스와 라틴 저술가들의 진리의 정통적 이상에 대한 근본적 통찰들을 결속시켜 종합한 사람이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육욕을 버리고 합일의 대상이신 사랑 많으신 하나님에게로 가는 것을 새롭게 표현한 체류자였다.
그는 악한 양심, 건전치 못한 성욕, 원죄를 강조함 등으로 말미암아 서방 영성의 많은 부분에 우울하고 여성을 혐오하는 태도라는 유산을 남겨 준 교사였다.
어거스틴에게는 많은 과오가 있었지만 그의 최후의 말은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힙포의 주교로 사역을 하는 동안(391-) 그는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의 참회록이 완성되던 397년 무렵 그는 성경을 관통하는 영적 지식으로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어둠에서 빛으로의 그의 삶의 전향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되었고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은 값없이 주어진 선물이라는 진리를 설파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실체와 그의 창조,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악의 실체 등에 대해 가르쳤다. 그의 그러한 가르침은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루터와 칼빈도 그에게서 영향을 받아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을 주창하였다.

나가는 말

맺는 말 : 동•서방 수도원 운동의 영성과 오늘의 교회

본 연구는 위에서 초기 사막교부들의 영성과 수도원 운동의 전개과정을 살피고, 이 동방의 수도 운동이 어떻게 서방으로 이어져 수도원 운동으로 정형화되었으며 4세기 후반의 위대한 서방의 대표적 신학자이며 수도사인 어거스틴에게까지 이어졌는지를 추적해 보았다. 동방의 안토니와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에게서 대표적으로 양대 세력권의 영향을 고루받은 어거스틴은 오늘날 개신교 영성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소 논문이 의도했던 바 수도원 운동의 역사적 줄기를 잡고, 어떻게 그 흐름이 이어져 왔는지를 살피며, 각각의 특징들을 개괄하는데에 중심을 두었다.
사막교부 특히 수도원의 영성을 살펴 볼 때 금욕주의는 그들의 삶과 사상의 대표적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들의 금욕주의를 살펴 볼 때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이 있다.
"극단적인 금욕주의는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좋은 선물들, 우리의 몸과 우리 주위의 세계를 무시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율법적인 금욕주의는 개인의 공로를 중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시하는 데로 기울어진다. 그러나 성경적인 금욕주의는 보다 선하고 고귀한 것을 위해서 선한 것을 거부할 수 있는 건전한 의식으로 이끌어 간다."
이런 점에서 사막 교부들의 영성은 변질되기 이전의 금욕주의 곧 인간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배제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안토니는 "그대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해야 할 일이라고 발견되는 것이 있으면 그대로 행하라.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당신 자신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했다. 이처럼 아무런 숨김이나 꾸밈이 없이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으로 성실하게 행하는 것
이 사막 영성의 정수이다. 모든 금욕적 노력, 개인 관계들, 온갖 양상을 지닌 삶을 서서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과 중심 관계 안에 가져와야 한다
이 목표에 이르기 위해 사용되는 모든 방편들은 방편일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것들을 필요에 따라 바꾸거나 버릴 수 있었다. 사막 교부들의 금언은 그것들이 발언되어진 정신 안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의 참된 가치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들은 그저 흥밋거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철저한 단순함과 온전함이 사막 교부들의 목표와 목적이었다. 사막의 문헌을 기독교 수도원 운동의 정수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도사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그것은 모든 기독교인들과도 관련이 있다. 사막 교부들의 금언들은 우리 시대에 복음을 제대로 해석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말은 특별한 상황을 지닌 오늘날의 삶 안에서 되살아날 수도 있을 것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수도사란 모든 것으로부터 이탈하며 동시에 모든 것과 연합하는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광야의 교부들은 그들 스스로가 제도가 되어 세상의 제도에 적응할 위험을 피했다. 그들에게는 진정한 제자도의 가능성이 존재했지만 후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제자도를 실현할 수 있는 장이 수도원의 제도화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 수도 운동이 사회적 활동을 통해 부분적이지만 세상 안에서의 봉사를 실행하였고, 갱신된 참된 사회의 모델을 제시했다는 데에 긍정적인 역할이 있었다 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안토니의 다음과 같은 격언은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우리의 생명과 죽음은 이웃으로부터 나온다. 다시 말해서, 만약 우리가 형제를 얻게 되면, 하나님도 얻게 되는 셈이다. 만약 우리가 그에 반해 형제에게 화를 내면, 그리스도에게 죄를 지은 셈이다."
한편 이러한 동방의 수도원 운동 즉 사막 교부들로부터 이어져 온 수도원 운동은 서방 신학자로 분류되는 힙포의 어거스틴에게서 집대성되었다.
어거스틴은 고대 문화를 축약하고, 그 유산을 기독교 신학과 조화시키는 일에서 어떤 라틴인 보다도 뛰어난 능력가였다. 그는 고대 철학의 유산과 기독교의 사사에 깊이 뿌리를 박고 그 종합을 이루어 냈다
"어거스틴의 신학적 입장은 초대교회의 그것과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 그는 적어도 서방교리 부분에 관한 한 이의 완성을 가져다 준 인물이다. 그는 기독교 전통을 모아서 이들을 조리있게 정리해 나간 동시에 새로운 전통을 부여하기도 했다.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어거스틴은 신 플라톤주의자다. 이 학파의 사상은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했지만, 이로부터 파생된 사상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기독교 신앙적 표현
을 결코 빼놓지 않았다. 그는 기독교를 당시의 사상들과 연결시켜 놓았는데, 이 사상들의 대부분은 신플라톤주의적 색채를 띄고 있었다. 이미 형식적 의미에서 간파되었듯이, 어거스틴의 신학은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적 사상 형식을 종합한 것이었으므로, 그의 신학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기본 개념들 속에는 이 종합의 흔적이 역력히 담겨져 있다.
또한 어거스틴의 생애를 통해 드러나는 그의 가르침은 '인간', '신' 그리고 '세상'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회심 후 그는 주로 영혼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자유의지', '악의 기원' 그리고 '고백' 등의 형식을 통한 인간 심리의 분석에 주력했으며 그후 '삼위일체', '산상수훈' 그리고'갈라디아서' 등의 성서 주석을 통한 신이해에 주력하였다. 또한 고트족을 이끈 알라릭이 세 번째로 로마를 침공(A.D 410)하는 장면을 목도하면서, 국가의 흥망, 역사의 의미, 신의 섭리 등으,로 그의 관심의 폭이 넓혀졌다.


그의 역사관은 '신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이라는 역사적, 도덕적 이원론의 변증법에서 나타나는데 이것은 '신을 사랑하는 것'과 '자기를 사랑하는 것'의 표상이며 이러한 두 종류의 인간형 혹은 사회의 존재를 암시했다. 그의 이러한 사고에서 종말이란 가라지는 불타고 알곡만 영원히 존재하는 종말인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어거스틴의 삶 속에서 잉태되고 투영되고 집대성되었다. 그의 신학은 단순히 이론적인 신학이거나 동방 수도원운동 특히 사막교부들의 경험적, 감성적 수도주의에 머문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영성은 '현장의 영성'이었고 '목회적 영성'이었다.
우리가 어거스틴의 영성에 접근해가려 하면 할수록 오늘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은 우리를 4세기 후반의 한 영성에 자꾸만 천착하게 함을 부인할 수 없다.오늘의 현대 교회에, 특히 한국의 교회에 가장 필요한 참된 영성은 결코 배타적이지 않으면서도 혼합주의에 물들지 않고 다원화된 이 사회 속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옹골차게 세워갈 수 있는 용기있는 영성이라 하겠다.
이 영성은 현대에 급조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전통에 면면히 배태되어 내려오는 영성의 깊이를 체내화(體內化)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기독교 영성의 동질성(Identity)을 회복하고, 성서중심의 개혁자적 전통에 입각하여 끝없이 재개혁하기를 멈추지 않는 유연성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참된 영성, 즉 오늘과 오는 세계에 알곡으로 결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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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은산 (隱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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