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7일,
권명수(한신대교수, kwonms@hs.ac.kr)
“보아라, 내가 문 밖에서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계 3:20, 새번역)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마음이 청결한자는 하나님을 볼찌라”(마태 5:8).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주님 보시는 앞에서 살렵니다”(시 116:9, 새번역).
1. 기도란?
‘기도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다. 가장 자주 듣게 되는 대답은 ‘하나님께 인간의 간구와 소원을 아뢰는 행위’라는 말이다. 이 말은 기도의 한 면만을 잘 드러내준다. 다시 말해 인간이 하나님께 고하는 측면이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독교인은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기도하는 민족이라고 알려져 있다. 수요기도회, 새벽기도회, 심야기도회, 철야기도회, 특별기도회 등 여러 기도회들은 신자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내용을 주님께 간구하는 모임들이다. 이런 기도 이해는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측면이 부각되고 있다. 그러기에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시고 응답하시는 측면이 간과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필요하다. 곧, 기도의 이해에 있어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부분이 일반 기도 모임에서 부족한 측면이 된다.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말은 신자가 주님께 아뢰는 측면과 주님께서 인간에게 사랑으로 응답하시는 측면인 양자간의 활동 영역이 잘 드러나야 한다. 한국의 신자들에게 부족한 면이라고 하면, 기도의 두 번째 측면인 주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말씀을 듣고자 하는 부분이다. 온전한 대화는 쌍방이 적절하게 주고 받음에 있다. 주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신자들에게 해주시려는 내용들이 많이 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측면에 대한 관심이 보다 더 요청되어야 하겠다. 그래서 온전한 기도란 두 측면이 조화롭게 공존하여 양쪽의 대화가 잘 소통되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온전한 기도를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경청하는데 우리의 관심이 집중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여 기도를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곧 아뢰는 기도와 듣는 기도로 말이다. 먼저, 아뢰는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께 간구와 청원을 하는 행위이다. 통성기도, 상상적 기도(imaging prayer), 능동적 기도와 인간의 마음과 이성을 사용하여 기도하는 명상(meditation) 기도가 있다. 그 다음으로는 듣는 기도로서, 경청기도, 가슴(heart) 기도, 비우는 기도. 수동적 기도가 이에 속한다. 곧, 기도자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보다는 수동적인 자세를 강조하는 기도이다.
2. 한국 종교인구의 변화 개괄
필자가 관상기도를 강조하게 된 동기 중의 하나가 한국 종교 인구의 변동과 관계가 있다. 통계상으로 볼 때, 한국 종교인구의 변화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대한민국 일반 국민에게 비친 한국 기독교인의 이미지를 통계 자료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1997년 갤럽여론조사에 의하면, 종교인 가운데 16.2%에 해당하는 약 370만명이 다른 종교로 개종한 경험이 있다. 이 자료에서 지금의 종교로 개종하기 전에 가졌던 종교가 불교=32.8%, 천주교=9.6%, 기독교=58.4%로서 얼마나 많은 개신교인이 개신교교회로부터 떠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종교가 없다는 비종교인들이 47.9%에 달하는데, 과거에 가졌던 종교 중에, 불교 23.6%인 260만명, 천주교 12%인 130만명, 기독교는 73%인 800만명에 이르고 있다.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개신교에 실망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1997년 조사에 의하면, 비종교인 가운데 앞으로 종교를 갖고 싶은 의향을 가진 사람이 32.9%인 720만명 가운데, 불교는 41.8%, 천주교는 36.7%, 기독교는 21.4%이다. 한국인 대중에게 얼마나 개신교가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2003년 4월 26일에 발표된 한신대 신학연구소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한국 사람의 70%가 개신교를 이기적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2004년에 조사된 『한국교회 미래 리포트』의 보고를 중심으로 위의 현황이 7년 후에 어떻게 변화되었나를 살펴보려고 한다. 아쉽게도 2004년 조사에는 위의 사항을 파악할 수 있는 보고가 없었다. 단지 종교별 전도자수의 증감이 두드러짐을 알 수 있었다. 2004년의 조사에서 기독교인 264명의 신자가 평균 전도자수가 3.2명(괄호 안은 1997년 통계, 3.5명)인데 비해, 불교는 42명이 전도한 평균 전도자수가 3.9명(2.9명), 천주교는 20명의 신자가 전도한 평균이 1.4명(2.0명)이었다. 이 통계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불교계의 전도자수가 대폭 증가했다는 점이다. ‘어떤 종교를 믿고 있느냐?’는 질문에서, 개신교는 98년과 비교하여 0.9%증가하였으나, 불교는 3.2%, 천주교는 0.7% 증가하였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불교인의 증가가 괄목할 정도라는 점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이에 대한 원인 파악이 98년의 통계에서 비춰어보았을 때, 비종교인이 가장 선호도가 높은 종교가 불교인 것을 감안하면 일반인의 예상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무엇이 이를 가능케 한 것인가는 관련된 사람들의 심도있는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교인수 증감에 대한 97년과 04년의 통계는 의미있는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불교 신자의 증가가 6.1%로 개신교의 1.1%에 비해 크게 증가하고 있다.
개신교 불교 천주교
97년 20.3% 18.3% 7.4%
04년 21.4% 24.4% 6.7%
위의 결과에 대한 해석에 대해 어느 목회자는 “불교에 가는 현대인들은 그곳에서 내가 나를 만나는 조용한 시간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시끄러워 견딜 수 없다”고 언급했다. 그의 진술은 한국 종교계 현실을 너무 단순·도식화 해서 과장되게 표현한 면이 있음을 감안한다고 해도, 그가 말할려고 하는 바를 일리있게 표출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한국 불교가 갖고 있는 특성이 복잡다단하고 빠르게 변해가는 삶 속에서 현대인의 영혼이 갈급해하는 면에 대해 충족시켜주기에 적절한 면이 있음을 부인하기 쉽지 않다. 이런 문화 현상 속에서 필자가 관심하고 있는 관상기도의 이론과 실천도 이런 문화적 현상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고백한다.
3. 기독교는 관계의 종교다.
신자의 신앙생활에서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 형성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 혼자만 짝사랑하는 것은 인간 쪽에서 보면 얼마간은 좋을지 모르나 짝사랑은 말 그대로 짝사랑으로 끝나는 것이다. 또한 주님이 우리를 짝사랑하게 하는 것도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게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서로 간에 관계가 형성되어서 각자의 존재를 의식하고 교류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의 교인은 기도를 열심히 한다. 적어도 외적 현상에서는 그렇다. 그래서 교회의 교인수도 늘어나고, 기독교가 부흥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 교인의 인격적 변화는 어떠한가?”란 물음에는 긍정적으로 답하기가 쉽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교인들이 기도를 세계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많이 한다고 하는데 이런 부정적인 결과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많은 이유 가운데 주요한 것은 기도의 방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기도는 간구하는 기도가 많다. 곧, 하나님이 내 뜻대로 움직여주시길 바라고 강청하는 기도는 많은데 비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려는 기도, 곧 주님과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의 질을 높여가는 기도의 다른 측면이 너무 허약해서 생긴 현상이라고 판단한다.
가장 좋은 관계는 쌍방 통행이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기도를 영혼의 대화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대화의 측면인 기도자가 말하고 나서 상대가 말하는 것을 듣는 차원, 곧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필자가 강조하는 관상 기도의 이해는 사귐의 기도로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와 주님께로부터 인간에게 응답하시는 내용을 경청하는 부분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본다. 기도의 두 번째의 부분인 경청하는 기도의 영역에 대한 관심이 오늘의 신앙생활에서 요청되고 있다.
관계로서의 기독교는 기도에서 그 관계가 드러나게 된다. 처음에는 우리가 주님께 인간의 사정을 아뢰거나 주신 말씀에 대해 인간의 감사와 믿음에서 우러난 반응을 한다. 즉 주님께 인간의 주도적 응답을 한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 즉, 주님으로부터 응답을 듣는 사귐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침묵 가운데 이루어진다. 인간의 언어를 없이 한 채, 침묵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 영혼 속에 오셔서 영혼 속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시거나 말씀을 해주시는 일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이런 기도를 관상기도 또는 침묵기도라고 불렀다. 또 묵상(黙想) 기도라고도 부른다. 관상기도는 신자의 영혼의 상태를 비워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주님과의 일치를 지향하는 기도이다. 이런 기도를 아빌라의 데레사 수녀는 기도를 여러 단계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다.
3. 아빌라 데레사의 기도의 단계
아빌라의 데레사는 자신의 글에서 기도의 단계를 7궁방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영성신학자 조던 오먼은 데레사의 7궁방을 9단계로 세분화 하여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1) 구송기도 (vocal prayer). 오먼은 기도를 신자의 덕을 수련하고 닦아가는 수덕적인 것과 인간의 의지의 차원을 떠난 상태인 신비적인 것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초반부의 기도는 덕을 쌓고 수련해가는 측면이 강하다.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영혼의 주의(attention)를 유지하는 것이다. 곧, 기도시작 때 지니고 있던 생각과 자세가 기도를 하는 동안 철회되지 않고 끝까지 연장되는 것이다. 구송기도를 구분할 때, 필자는 대화식 기도와 탄원기도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의 소원을 주님께 단순하게 아뢴다는 면에서 탄원기도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대화식 기도도 이 분류에 속한다고 본다. 먼저 주님께 인간의 간구를 아뢰고 주님께서 답을 주심을 기대한다는 측면에서 구송기도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 묵상(meditation). 이 기도는 추리적 형태의 묵상이고 주의(관심의 집중)는 절대로 필요하다. 지적 목적성, 정감적실천적 목적성이다. 참된 묵상의 본질적 요소는 고찰, 적용, 결심이다. 아무리 바빠도 기도생활을 대치할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이 책의 번역자는 묵상(黙想)이라고 번역하였으나, 필자는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하는 기도 행위는 명상(瞑想)이라고 써야 타당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묵상은 상을 잠잠케 한다는 의미가 있어, 뒤에 나올 ‘단순함의 기도’의 상태를 지칭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3) 정감의 기도(affective prayer). 오먼은 이 기도는 앞의 ‘묵상’과 거의 차이가 없다고 본다. 단 사랑이 우세한 단순화된 묵상이다. 그러나 억지로 애정과 의지 작용을 불러일으키려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사랑이 우러나도록 해야 한다. 이 기도는 감각적 위로를 준다는 면에 유의해야 한다.
4) 단순함의 기도(prayer of simplicity). ‘습득된 잠심의 기도’ 또는 ‘습득된 관상’이라고까지 부른다. 이 기도는 그냥 응시하고 사랑하는 것뿐이다. 필자는 이 기도의 단계가 뒤에서 자세하게 언급할 ‘능동적 관상’(active contemplation)의 단계라고 본다. ‘능동적’ 관상은 뒤에서 좀더 자세하게 다루게 될 것이다.
5) 주부적 관상(infused contemplation). 이 기도는 “즐거움이 뒤따르는 지식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추리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이며 직관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주부적 관상은 카리스마나 비상한 은혜라기보다는 성화 은총을 지닌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바 성령의 은사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기도의 한 단계이다. 관상은 성화를 이루게 하는 은총과 사랑을 전제하는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에서 나오는 결과들 가운데 하나이다.
오먼은 이 기도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1) 하나님 현존의 체험. (2) 영혼에 초자연적인 것이 엄습함 (3) 인간 본성의 노력으로는 신비체험을 할 수 없다 (4) 수동적이다. (5) 하나님에 대한 체험적 지식은 모호하고 혼잡스럽다 (6) 하나님의 활동아래 있다는 안정감과 확신을 관상가에게 준다. (7) 관상가가 은총상태에 있다는 윤리적 확신을 준다. (8) 신비체험은 서술이 불가능하다 (9) 신비적 일치는 변화의 동요를 가져온다 (10) 신비체험은 흔히 신체에 반응한다. (11) 주부적 관상은 덕행실천에 큰 충동을 준다. 이런 주부적 관상의 특징들로 인해 기도하는 신자들은 주님의 은혜를 강렬하게 느끼는 상태를 지향하게 된다. 이 기도의 실천적 지도 원리로서는 첫째로 기다리는 자세 속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주님께 나아갈려는 의도적 노력이 없이 믿음으로 신뢰 가운데 행해져야 간다. 둘째로 영혼의 내적 생활에 자신을 온전히 바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주부적 관상의 다음 기도 단계들은 다음과 같다. 6) 단계 정적의 기도(prayer of quiet), 7) 단계 일치의 기도 (prayer of union), 8) 단계 순응 일치의 기도 (prayer of conforming union), 9) 단계 변형 일치의 기도 (prayer of transforming union)이다. 오먼은 위와 같이 4단계로 세분하여 서술하고 설명하고 있으나, 필자의 판단으론 이런 기도의 단계들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을 초월한 신비적 경지로서 이 단계를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주관적인 내용이라고 판단하여, 자세한 내용은 해당 서적을 참고하길 바란다.
5. 기도의 3 단계.
아빌라 데레사가 다룬 기도의 여러 단계를 필자는 간략하게 아래의 3가지로 분류한다.
1) 구송(口誦) 기도(vocal prayer). 간청하는 기도, 우리들이 소리를 내거나 마음 속으로 주님께 아뢰든지 간에 말로 우리의 의사를 주님께 받치는 것이다.
2) 명상기도(meditation). 이 기도는 인간의 마음(mind)과 이성을 사용하여 주님의 뜻을 추구하고 의지적으로 집중하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기독교 신자들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큐티(QT=quiet time)와 유사하다. 기독교인이 많이 행하는 큐티는 신자의 영성에 매우 중요하다. 필자는 큐티가 끝나고 나서 침묵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머물러 있는 기도의 시간을 갖게 된다면 큐티의 효과는 배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침묵의 시간을 갖는 말씀의 놀라운 능력과 생명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의 지식이 많다고 해도, 영혼이 그 지식에 비례하여 안정되고 활기찬 생명력있는 삶을 담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여기에 알고 있는 지식을 내것화(owning)하는 단계가 필요로 한다. 물론 머리의 영역의 기도도 필요로 한다.
이상의 두 기도는 인간의 간구와 청원의 성격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귐의 기도로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응답을 경청하며 깊은 관계에 들어가는 기도는 다음에 나오는 관상기도라고 할 수 있다.
3) 관상(觀想) 기도(contemplative prayer). 앞의 두 기도가 인간의 언어나 지식을 사용하여 기도한다면, 이 기도는 인간의 이성과 지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관상기도는 주님을 가슴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침묵 속에 머물러 있는 기도이다. 그래서 대 그레고리오는 이 기도를 ‘하나님 안에서 쉼’이라는 뜻으로도 이해했다. 이러한 관상기도는 주님과의 일치(communion, 친교, 합일)를 지향한다. 그래서 관상기도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관상기도와 관상상태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관상기도는 주님과의 친교를 지향한다고 할 때, 관상 상태는 관상기도나 기타 다른 헌신적인 행위들로 인해 주님과의 합일이나 친교에 있는 현상을 의미한다(계 3:20).
관상 기도를 크게 두 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능동적(active) 관상기도이다. 이 단계의 기도는 신자가 의도적으로 시간을 내어 주님께 나아와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신자들이 관상 기도 한다고 할 때 이 단계에 머물러 있게 된다.
둘째는 주부적(infused) 관상기도이다. 이 단계의 기도는 수동적 측면이 중심이 되는 기도이다. 곧, 기도를 하는 가운데, 기도자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데도 은혜가 밀려오는 파도처럼 퍼부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기도의 대표적인 예가 성 프랜시스의 기도에서 볼 수 있다. 하루는 성 프랜시스가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는 중에, 혈색이 않좋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은총의 기도 가운데 있게 되었다. 이 모습을 멀리서 시중드는 수사가 바라보게 있었다. 프랜시스 성인은 ‘한 시간정도 기도했겠지’하고 기도를 끝내고 나오면서, 옆에서 기다리면 수사에게 “내가 얼마 동안 기도했나?”라고 물어보았다. 그의 답은 “4시간 기도하셨습니다”라고 했다. 이처럼 주 앞에 머물러있어 기도하는 가운데 주께서 은총을 부어주셔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주님과 깊은 교제 속에 머물러 기도하는 경우를 말한다.
위의 기도의 3 가지 형태의 기도의 수준을 초중고등 ‘학교’로 구분해볼 수 있다. 구송 기도의 수준을 초등학교라고 한다면, 명상 기도는 중등학교에 해당하는 단계로서 삶과 계시에 대한 성찰과 숙고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기도의 고등학교는 관상기도를 시작하는 곳이다.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에서 배운 것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이곳에서의 기도생활은 하느님의 현존을 자각하는 일과 성령에게 우리 자신을 여는 일을 주도적으로 행하도록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진술은 편의상 기도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론상 구분한 것이지 실제에서는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음을 밝힌다. 어떤 때는 세 가지 기도가 모두 한 기도에 포함될 수도 있다. 초신자가 오래된 신자보다 관상기도에 더 깊이 들어가는 경우가 간혹 관찰되기도 한다. 그래서 기도의 단계나 수준에 문자주의적으로 엄격하게 의존하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기도할 때 무엇보다도 자신의 기도를 인도해주시는 분은 성령님임을 깨닫고, 그분의 손길을 인정하고 겸손히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6. 관상기도의 성서적 근거
이 글의 머리에 나오는 첫 번째 성구가 관상기도를 대표적으로 말하고 있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서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계 3:20, 새번역). 이 성경 본문은 인간 영혼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주님을 우리 영혼 안으로 모시어 들여야 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절이다. 침묵 가운데 행하는 관상 기도는 주님께서 인간의 영혼 속에 임재하시길 기다리며 인간의 의식을 집중하고 현재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또한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성서 구절은 다른 어느 기도보다도 관상기도의 필요성을 드러내고 있다. ‘쉬지 말고 기도’하려면 현실적으로 계속해서 기도하는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권면이 충족되는 상태는 평소 신자의 삶에 주님과의 교제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태가 되어야 가능하다. 이런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은 “마음이 청결한자는 하나님을 볼찌라”(마태 5:8)는 은총의 선물을 받은 것과 같다. 이런 은총의 선물 가운데 생활하는 신자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주님 보시는 앞에서”(시 116:9, 새번역) 사는 성화된 인생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마태 10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짐 자들아 다 내게로 나아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내 멍애를 메고 나에게 나아와 나를 배우라.” 여기서 멍에는, 필자가 이해하기로는, 내가 주님을 따르려면 매어야 하는 멍애나 다른 사람들이 ‘이런 멍애’를 메여야 한다고 말하는 멍애가 아니다. 여기서의 멍애는 “주님의 멍애”를 메고 ‘주께 나아와 나를 배우라’는 의미라고 이해한다. 주님의 멍애는 주 앞에 나아와 주님과의 깊은 사귐과 ‘친교를 나누는 관상기도의 시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필자는 해석한다.
인간은 자신의 관심사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욕심이나 바람이나 기타 욕망에 의해 인간의 의식의 활동이 휘둘려 제한되는 상황에서도 시간을 내어 침묵 가운데 머물러 주님과 함께 친교와 사귐의 시간을 자주 갖으며, 그분의 인도하시는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멍애라고 말이다. 키딩이 말하는 대로 하루에 2번씩 실천할 수 없다면, 하루에 한번씩이라도 마음의 고요 속에 주님의 임재를 초청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침묵 속에서 주님의 임재를 믿음 속에서 의식하고 느끼는 시간이야말로 주께서 신자들에게 원하시는 ‘멍애’이다. 이 일을 다른 어느 것보다 우선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주님과의 관계 유지가 신자의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우선하여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마가 1: 35, 새번역). “그날에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4: 2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리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내 아버지와 나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이상의 성경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기도를 많이 하시고, 또한 그러한 과정을 통한 경험으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 아버지의 뜻 안에서 있다는 확신 가운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확신은 지속적인 관상기도의 실천으로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의 결과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구약 성경의 시편에서도 관상기도에 대해 많이 언급하고 있다. 칼 야리코에 의하면, 관상기도는 구약 성서에 나오는 ‘모든 것을 주님 안에서 안식하고 기다릴 것을 요구’하는 여러 성경 구절들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특별히 야리코는 시편에서 그 전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예를 들면, 시편 46:10; 37:7; 62:1; 131:2; 27:14; 33:20; 62:1, 5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듯이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가 무수히 많이 있다. 그러나 지면 관계상 대표적인 구절만을 언급하였음을 밝힌다.
7. 관상기도의 신학적 근거.
관상기도는 바로 앞의 성경적 근거에서 살펴보았듯이, 초월적 신 이해보다는 내재적 하나님 이해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 이유는 전통적 신관인 초월적 신관이 현대인들에게 설득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판단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 신관인 초월적 신관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으며,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존재하는 질적 차이가 있는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 이와 같은 초월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하나님과 자연 사이의 유기적 연관성을 차단하고 “자연의 탈성화”(desexualizaiton)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래서 종국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과 가깝게 교류하며 친교하는 관점의 신 이해인 내재적 하나님, 하나님과 인간의 부정할 수 없는 근원적 일치를 말하는 신관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내재적 신관에 대한 심층적 논의보다는 관상기도의 이론적 토대를 중심으로 실천적경험적 측면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밝힌다. 내재적 신관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키딩은 관상기도의 입문서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책『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에서 다음과 같이 관상기도의 신학적 근거를 간략하게 서술한다:
오순절의 은총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로서 우리 안에 계심을 확인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각자 안에 각성을 주시는 분으로서 언제 어디서나 계시다. 그분은 살아계신 주님으로서 언제나 우리 안에 사시도록 성령을 보내주시며, 기도와 활동 중에 성령의 열매와 진복([Beatitude, 팔복] 마태 5장)을 경험하고 또 나타내도록 힘을 주심으로 당신의 부활을 증거하게 하셨다.
키딩은 우리의 구세주께서 부활하신 후 영광받으시고 승천하셔서 신자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며 주님의 임재와 은총을 경험하도록 해주셨다는 교리적 진술에 기초하고 있다. 그래서 관상기도를 행하는 신학적 기초는 인간이 우월하거나 특출나서 주님과의 일치와 임재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계신 그분께 사랑과 순종하는 마음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관상기도는 인간의 노력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 이전에 이미 내재하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며 그 앞에 머물러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하는 신앙 행위이다.
8. 관상과 관상 아닌 것의 구별
관상기도가 새로운 영역이면서 영혼의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이기에 이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해하기도 쉽지 않고, 혼동이 오기 쉽다. 왜냐하면, 관상기도는 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이기에 논리적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고 경험으로만이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하는 신자들이 “기도 중에 겪는 경험과 기도의 내용”을 구별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 중에 여러 가지 현상적 경험이 많은 사람이 관상기도를 행하는 사람이라는 오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심리적 경험이 적은 사람은 기도의 수준이 ‘낮다’고 보는 경우도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토마스 키딩은 그의 책『마음을 열고 마음을 열고』1장에서 ‘관상과 관상이 아닌 것’을 구별한다. 그는 관상은 1) 긴장해소 훈련이 아니다. 곧, 동양에서 행해지는 명상의 일종인 요가, 천천히 달리기, 초월적 명상(Transcendent Meditation)이 아니다. 이것들은 마음의 휴식이나 긴장을 완화하는 효과를 목표로 한다. 그러나 ‘향심기도’는 관상 기도라는 사다리의 ‘첫 다리’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깊은 기도를 행하는 신자의 지향이 관상기도의 첫 사다리인 향심기도를 포함하여 그 다음 단계까지를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향심기도’라는 용어보다는 관상기도를 주로 사용하고 있음을 밝힌다.
2) 관상은 은사가 아니다. 관상기도의 선물은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다. 향심 기도는 믿음, 희망, 사랑의 성장을 깊게 해주며, 영혼의 실체와 그 기능들의 정화, 치유, 성화를 도와준다. 향심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순수한 믿음의 수준에 까지 이르도록 해주는 방법이다. 순수한 믿음이란 내 자아가 관여하여 지적인 토론을 주로 하는 명상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을 말한다.
3) 관상은 어떤 현상이 생기기 전에 알게 된다든지, 멀리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안다는 것과 같은 소위 예시의 은사나, 육체이탈경험, 초감각 경험 심리 현상들인 몸밖의 경험(out of body experience), 또는 죽음에 임박한 경험(death experience)이 아니다. 심령의 선물은 “케이크 위의 아이스크림”과 같다. 이러한 선물을 가지게 되면 당사자는 겸손해지기 어렵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전통의 영성지도자들은 이러한 선물을 가능한 한 피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인격의 변형(transforming) 과정은 심리적 신비 경험이나 능력 그 자체 보다는 신앙, 소망, 신적인 사랑의 성장에 좌우된다. 관상 기도는 이러한 3가지가 자란 열매이고 이것들을 더 나아가게 한다. 이에 비해 심리적 경험이나 능력은 하나님과의 거룩함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의 성장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것들을 영적 발달의 표징으로 보는 것은 오해(mistake)이다.
4) 관상은 신비 현상이 아니다. 신체탈혼, 내적 환시, 외적 말씀, 상상으로 주시는 음성, 사람의 영 안에 새겨주시는 말씀 등이 아니다. 순수한 믿음만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가장 지름길인 것이다. 신자는 관상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일치를 지향하는 것에 일차적 관심이 있지, 심리적·신체적 느낌이나 경험에 쏠리게 되면, 목표를 잃어버리기 쉬움을 기억해야 한다.
이상의 진술을 종합해보면, 관상기도를 하는 중에 경험하게 되는 관상 기도의 체험과 관상 기도 그 자체와 동일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관상기도의 정수는 관상 기도를 하면서 무슨 체험적 경험을 했느냐가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내재하신다는 것을 순수한 믿음으로 믿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데 있다. 관상기도 중의 체험은 하나의 부산물과 같은 것이지 관상기도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인간의 체험이나 인식능력으로 영혼에게 다가오는 ‘빛’을 평가하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키딩은 인간은 “자신의 삶 안에 맺어진 열매를 보고 그 현존을 짐작할 뿐”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림, 기도의 현상(Phenomenology of Prayer) 관상기도를 인간의 의식 수준과 비교하여 언급할 수 있다. 인간 의식 수준에서 하는 기도는 구송기도와 명상기도라고 한다면, 관상기도는 인간의 무의식의 상태에서 드려지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관상기도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영혼을 비우려고 하면서, 주님께로 지향하는 기도이다. 신자는 주님께서 비운 영혼 속(의식적인 노력이 부재한 가운데의 상태를 의미한다)에 임재하여 활동함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는 기도이다. 그래서 관상기도 중에 인간의 무의식에서 유래하는, 또는 다른 영적 영역에서 유래하는 신비적 경험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험들은 관상 기도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것임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와 관련해서는 잠시 후에 다시 다루려고 한다.
위 그림 1에서는 기도의 현상을 보여준다. 이 그림은 교회사에서 특정 기독교 전통이나 인물이 어떤 영성적 특성과 계열에 속하는지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그 영역들은 사색적(speculative) 기도, 상상적(Katapatic, imaging) 기도, 감정적(affective) 기도, 비우는(apophatic, emptying) 기도로 나눠볼 수 있다. 수평축에서는 상상적 기도와 비우는 기도가 있다. 수평축에서는 명상의 실천에 있어 상상력을 활용을 강조하는 상상적 기도의 방법과 인간의 모든 이미지와 개념을 부정하고 비움을 강조하는 기도의 방법인 비우는 기도의 방법이 있다. 그리고 수직 축에서는 기도의 실천에 있어 마음(이성)을 강조하는가(사색적 기도) 아니면 가슴(heart)이나 감정을 강조하는 가(감정적 기도)에 따라 분류한다. 독자 여러분이 이미 짐작하셨듯이 관상 기도는 수평축에서 왼쪽에 속하는 이미지나 언어의 개념을 부정하는 침묵 가운데 직관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전통에 속한다.
그림 , 정신구조와 떠오르는 생각들.
조금 앞에서 관상기도는 무의식의 수준에서 드리는 기도라고 말했다. 그림 2에서 그러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관상 기도의 어려움은 침묵 속에서 기도하는 중에 내면에서 마구잡이로 생기는 생각, 이미지, 느낌같은 분심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기도 중에 떠오르는 어떤 생각이나 이미지는 대체적으로 개인 무의식의 영역인 각 개인의 인생 경험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기도 중에 경험하는 내용이 과거의 기억에서 유래된 것일 경우, 기도 중의 경험은 과거의 상처를 보듬으며 치유하는 정화의 과정이 될 수 있다. 이런 일은 관상기도 수련를 지도하다보면 임상적으로 자주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생각이나 이미지는 그보다 깊은 집단 무의식에서 유래할 수 있다[그림2의 가운데 2줄기의 거품들을 말함]. 융이 이해하는 집단 무의식은 특정 인종이나 문화에는 문화 나름의 유구한 역사 속에 형성된 공통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곧, 인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원형적 특성이나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 특정 대륙의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신화적 이미지나 내용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내용들은 매우 강한 에너지를 동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관상기도 중에 매우 강력한 감정적 체험을 동반하는 경우, 그 경험이 집단 무의식적 이미지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도 중에 경험하는 모든 강력한 체험이 다 집단 무의식적인 것은 아닌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신비적이며 내면적인 주관적 경험을 다룰 때에는 매우 조심스럽게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관상기도 중에 겪는 여러 가지 체험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에, 너무 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관상기도의 적절한 실천에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래서 기도 중에 어떤 경험을 하게 되면, 이것을 바라보고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마음의 동요없이 조용히 바라보면서 주님의 사랑의 품 안에 머물러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관상 기도의 효과적 실천에 매우 중요하다.
관상기도의 실천은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에 대한 응답이다. 플랑드르의 신비가인 루이스브렉(Jan van Ruysbroeck)은 관상기도를 실천하는 것은 하나님과 연합에 대한 소망을 갖고 기도하는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것[주님과의 연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모든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역사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서 행하시는 것들 중 첫 번째 것은, 그들 모두를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부르시고 초청하신다”고 말한다. 그래서 주님의 임재를 갈망하고 관상기도를 하고픈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들을 부르시는 은혜의 한 표현이라고 믿고 순종하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럼 관상기도의 다른 표현인 향심기도는 어떻게 유래되었는가? 토마스 머튼의 글을 통해서 살펴본다. 머튼은 압둘 아지즈라는 이슬람 신비주의(수피) 학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당신은 나의 묵상 방법에 대해 질문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나의 기도방법은 단순합니다. 그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임재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향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묵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믿음에 중심을 둡니다.... 나의 기도방법은 하나님을 가장 중요한 분으로 여겨 경모하는 방법입니다. 내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의 무가치함을 인정하려는 큰 갈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기도는 무와 침묵의 중심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찬양입니다.
머턴의 기도 방법은 “무와 침묵의 중심(center)"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부터 향심기도(centering prayer)란 말이 유래하게 되었다. 곧, ‘중심’에서 하는 기도 또는 중심을 지향하는 기도란 말이다. 이 단어는 관상기도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머턴의 진술은 그가 기도할 때 (언어라는 개념과 이미지를 초월하는) 부정의 방법과 수용적 기도를 했음을 의미한다. 머턴은 자신의 은둔처에서 생활하면서 하루에 세 시간 정도 이런 부정의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는 글을 쓰기 전에 침묵 속에 시간을 보내며 내면의 세계에 머물렀던 것이다. 이러한 침묵 속에서 그의 많은 저술들이 생산된 것이다. 그는 침묵에서나오지 않은 글들은 “자기-중심적인 경향”을 지니기 쉽다며 침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키딩은 머턴의 향심기도란 용어를 적용하여 모든 현대인이 쉽게 실천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화 하였다. 그가 중심적으로 제안한 향심기도는 “관상기도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새롭게 하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이 기도는 관상 기도 전통을 현대화된 형태로 제시하면서 거기에 어떤 순서와 방법을 가미한 창조적 시도인 것이다. 필자가 관상기도 집중수련을 인도하면서 실천하는 관상기도는 어떤 의미에서는 키딩이 말하는 ‘향심기도’를 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키딩의 향심기도가 지향하는 바가 관상기도이며, 향심기도는 관상기도의 ‘첫 번째 사다리’라고 말했던 것처럼, 필자는 관상기도란 용어가 향심기도라는 말 대신에 그 다음 단계까지 지칭하기에 ‘관상기도’란 용어를 선호하고 있다.
9. 관상 기도의 실천에 있어 3가지 마음 자세
이제부터는 관상기도를 실천할 때 고려할 사항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관상 기도 지침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기도를 직접 실습해보고 나서 그 다음 논의를 계속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기도는 머리로 배울 수 있는 기도가 아니고 가슴으로 배울 수 있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독자께서는 이 점을 참고해주기 바란다. 신자가 관상기도를 하면서 침묵 가운데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주님을 찬양하는 마음 가운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며, 내면의 분심을 처리하여 영혼을 정화시키고져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관상 기도를 꾸준히 성실하게 실천하노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의 세계가 맑은 호수 같이 고요와 평화 가운데 주님의 뜻을 자신의 삶에 육화시켜가는 삶을 지향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 기도의 실천에 중요한 전제가 있다. 이 기도를 함으로써 주님의 현존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님은 이미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전제하고 있다. 다만, 우리 가운데 이미 현존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깨어 민감한 상태를 준비하는 것이다.
또한 주님은 기도하는 ‘나’를 온전히 아심을 믿는다. 그렇다면, 내가 나를 온전히 의식하기 시작할 때, 주님을 의식할 가능성이 더 있음을 확인하고 관상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의 할 도리를 하는 것이 관상 기도의 실천이며, 기도할 때 성령의 도우심을 요청하며 성령의 이끄심대로 따르려고 해야 한다. 우리 안에 하느님이 임재해 계신다고 믿기에 우리 내면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주님과 투명하게 대면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에, 우리는 관상기도에 관심과 애정을 보이며 이 기도를 행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럼 이 기도를 행하는 마음 자세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믿음과 신뢰. 무엇보다 이 기도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 이 기도가 수준에 이르게 되면, 아무런 기도를 했다는 느낌이 없이 기도를 마칠 때가 많을 것이다. 그럴 때 “내가 기도를 과연 제대로 한 것인가? 아니면 그냥 멍하니 시간만 소비하고 만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이런 느낌이 듦에도 불구하고 관상 기도를 지속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기도는 하나님의 언어인 침묵을 통해 실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도를 지속해서 하려면, 이런 가운데 나와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믿음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그런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만 기도 중에 생기는 여러 가지 분심과 회의를 이겨내고, 주님과 참다운 관계에 들어가도록 인도하는 사귐의 기도를 통해,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기도를 지속해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본다. 마음 속에 “오 주여!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라는 마음으로 기도에 임한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경우처럼, 주님 앞에서 주님을 기다리며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해결해주신다는 믿음과 희망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3) 기도의 시간을 즐긴다. 주님 앞에 있는 이 시간,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 속에 오셨음을 믿고 다른 외부적 일에 조바심, 초조, 불안을 버리고 기도의 시간에 평안하게 그분과 함께 즐기는 것이다. 마치 어린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모든 것을 엄마에게 맡기고 아기 자신은 존재 그 자체를 느끼며 해맑게 살아 가듯이 말이다.
10. 관상기도의 몸가짐
기도는 온 마음과 온 정성과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하기에 마음을 모을 수 있는 기도 자세가 요구된다. 몸에 관하여 동서양의 모든 기도 수련에서 공통되게 추천하는 일관된 원리는 “등을 똑바로 세우지만 긴장하지 않는 것”이다. 다리를 접거나 포개서, 마루나 방석에 앉든, 혹은 똑바로 의자에 앉든 또는 기도의자를 이용해서 무릎을 꿇고 앉든지 간에, 그 기본 의도는 혈액순환이나 호흡을 방해하지 않는 반면에 의식을 적절하게 집중하고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이런 모든 준비들은 나와 친밀하게 현존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한다는 믿음을 확고히 하고 깨닫도록 돕는 수단이다.
그래서 첫째로 중요한 것이 허리의 자세이다. 척추를 곧게 세우면, 내장의 압박이 그만큼 줄고 복압력이 생겨 호흡이 편해지고 정신도 안정된다. 뿐만 아니라, 온 몸의 긴장이 사라지면 마음이 집중되고 스스로 초연해지므로, 피로가 가시고 평온이 유지된다. 이 자세의 가장 중요한 유익은 몸의 자세가 안정되면 마음도 따라 바르게 된다는 점이다. 이때 혈액순환이 원활해져 몸에 생기가 충만해질 뿐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찾는 즐거움도 맛볼 수 있다.
필자는 허리를 곧게 하면서도 기도에 도움이 되는 자세를 제안한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불교에서 행하는 결과부좌는 상당한 수준의 훈련이 되지 않으면 너무 고통스러워 행하기 어렵다. 또한 한국 교인들의 정서상 친화적으로 다가오지 않기도 하다. 그래서 필자는 기도의자를 사용하여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허리를 곧게 펴고, 머리를 곧게 세우고 눈을 감고 침묵 가운데 기도하는 것을 추천한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되면, 기도자의 마음 자세가 겸허해짐을 느끼고 기도에도 더 쉽게 깊이 들어가게 됨을 자주 경험한다. 이런 경험은 양반 자세로 앉아서 기도하거나, 의자에 앉아서 행하는 기도와 기도 의자 위에 무릎을 꿇고 하는 기도를 비교해보면 어느 쪽이 더 수월한지 쉽게 비교가 될 것이다.
필자는 기도의 몸가짐을 다룰 때 기도의 실천에 매우 중요한 호흡도 같이 다루려고 한다. 동양의 명상 수행에는 호흡과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 방식인 수식관(數息觀)과 수식관(隨息觀)이 있다고 말한다. 전자는 선의 호흡법을 대표하는 것으로 호흡을 세면서 하는 방법이다. 즉, 숨을 천천히 들이쉬면서 “하- 나----,” 다 들이쉬고 나서는 다시 천천히 내쉬면서 “두--- 울---”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며 열까지 세고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오는 방식이다. 이에 비해 후자는 호흡만을 의식하여 숨이 들고 남을 따라가는 숨쉬는 사실에만 집중하는 수행이다. 이 두 가지 호흡법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여러 가지 변형이 가능하여 보다 효과적인 자신만의 방법을 창조적으로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전통, 특별히 동방교회의 기도의 수행자들인 헤지키스트들도 호흡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동방 교부들의 영성 작품 모음집 『필로칼리아』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에서는 이렇게 권고한다.
우리는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쉽니다. 호흡은 몸이 살아가는데 기본이 되고 몸의 온기를 유지시켜 줍니다. 따라서 방에 고요히 앉아 마음을 모으고 기도(氣道)를 따라 들이마신 공기를 모두 심장으로 들어가게 한 다음 그대로 있으십시오.... 그리고 다음의 기도를 읊으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계속하십시오.
이들은 몸의 생명 유지에 긴요한 호흡을 따라 우리의 의식을 집중하게 되면, 여러 가지 긍정적인 유익이 많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인도 사람 드 멜로 역시 여러 가지 묵상법 중에 호흡법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숨을 들이쉴 때 하나님의 성령이 자기 안에 들어옴을 의식하고, 숨을 내쉴 때 자신의 온갖 두려움, 부정적인 느낌들을 내보낸다고 상상하면서 기도를 해보라고 권면한다. 또 어떤 느낌들은 드 멜로의 방식대로 호흡을 통해 즉시 표현해보라고 권한다. 내면의 상태가 많이 호전됨을 종종 경험하는 기쁨을 덤으로 받을 수 있다.
11. 관상 기도의 마무리
기도 중에 기도가 끝났다는 신호가 들리거나 이젠 마쳐야겠다는 느낌이 들면, 바로 눈을 뜨지 말고 현실 의식 세계로 돌아오는 준비를 한다. 기도 중에 있었던 경험이나 현재의 영혼의 상태 등을 되돌아 보며 기억하고 되새겨 볼 것이 없나 천천히 회상해 본다. 그리고 자신이 기도 전에 읽었던 성경 구절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며 그 말씀을 다시 한번 경청한다. 그리고 평소에 마음에 두고 행하는 기도 제목이 있다면 기도 제목이나 대상을 마음 속으로 부르며 간략하게 기도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마치고 나서, 이 기도 시간에 나를 인도해주시고 함께 하신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를 표하고 조용히 눈을 뜬다. 그리고 가능하면 기도 끝날 때 마다 그때 그때의 상태나 느낌을 간단하게 영성일기로 써놓으면 기도 생활과 영혼의 성장에 유익이 되는 면이 많으므로 적극 추천한다.
12. 관상기도의 열매: 임상적 실천 효과
관상기도의 열매에 대해 논의할 때 명심할 것은 관상기도를 무슨 특별한 내적외적 효과를 기대하고 기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기도는 어떤 원인(기도를 얼마나 해서)을 제공하여 예상된 결과(또는 드러난 현상)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관상 기도를 꾸준히 실천하게 되면 그 유익이 많음을 깨닫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은 부산물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물론 연약한 인간이 체험적인 면에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기도 중의 체험과 그 효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항상 유의해야 한다.
관상기도를 처음 경험한 학생의 실례를 들어 이 기도의 효과를 간략하게 다루려고 한다. 아래의 내용은 필자가 대학원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관상기도를 수업을 통해 소개하고 집에서 직접 주기적으로 실천해보고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과제를 주었다. 그 중에서 교육적 가치가 있는 한 학생(목회자)의 보고 내용의 주요 부분을 가감없이 발췌한 것이다. 학생은 아래의 글을 “기도를 통한 자기발견”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처음 관상기도를 배울 때 솔직한 마음은 엄청나게 부정적이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까지 배운 개신교 신학적 전통을 비추어 볼 때 그것은 로마 카톨릭적인 전통으로 개혁교회가 마치 퇴보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솔직한 마음은 숙제이고 과제이니 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처음의 순간은 졸음과 무의미한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그때 다시 한번 실망하게 되었다.
과제를 제출하기 위한 반복적인 실시는 점점 관상기도를 통한 자신의 내면을 보는 작은 기쁨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의심의 눈으로 바라본다. 관상기도가 몇 번 진행되면서 관상기도에 점점 마음이 열렸다.
이젠 어려움이 생기면 먼저 관상기도에 들어간다. 내 속에 나타나는 욕심을 하나 하나 걷어내면서 참 내 모습을 들여다보고 나면 자신이 정화된 기분이다.
새로운 임지의 문제로 여러 날 동안 고민하였다. 과연 내가 그곳으로 옮겨야 하는가? 왜 가려고 하는가? 고민한 결과는 답이 없다. 새로운 답을 찾기 위한 방법이 관상기도였다. 내 속에서 나타나는 욕심, 자신에게 일어나는 많은 생각들을 하나 하나 걷어내기 시작하면서 그 내면 속에 감추어진 나를 솔직하게 만나게 되었다. 그때 주님은 내 마음에 부드럽게 찾아오셨다. 그리고 마음에 참 평안을 주신다. 그것은 내가 처음 주님께 부름 받은 그 처음의 소명에 충만함의 시간이었다.
“오 주여, 이만하면 족합니다”라고 소리치며 일어섰다. 주님 안에서 얻어진 평강은 참으로 놀랍다. 이제는 어려움이 생길 때면 먼저 관상기도에 시간을 보낸다. 그때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발견한다.
필자는 이 예처럼 자신의 삶의 문제로 고민하고 고통을 당할 때 주 앞에 나아와 마음문을 열고 주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기다린 사람들이 자신의 인간적 생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지혜들을 얻는 경우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 왔다.
위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관상기도의 방식은 기존의 신자에게 배우고 경험한 바가 거의 없어 익숙하지 않아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어려움이 존재한다. 그래서 이 기도에 대한 많은 오해가 생기고 있다. 예를 들면, 조그마한 신앙체험을 관상기도의 주님과 일치의 체험으로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이런 점에서 관상 기도의 실천에 도움이 되는 이론적 내용을 학습하는 것이 아닌, 실제로 해보면서 부딪치는 문제를 해결해가는 체험적 수련과정인 관상기도 집중수련이 요청되었다. 필자는 지금까지 6회에 걸쳐 2박 3일의 관상기도 집중 수련회를 인도해오면서 이 기도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실천을 생활화해야 할 기도라는 확신이 생겨서, 기회가 될 때마다 이 기도에 대한 강조와 전파하려고 노력해왔다.
필자는 ‘관상기도 2박3일 집중 수련’을 통해 인간의 내면의 변화를 과학적으로 측정하려고 시도하였다. 그 결과가 놀랍게도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들을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특별히 관상기도의 수련이 이 수련 참여자의 대인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졌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관상기도의 집중적 수련을 통하여 참여자의 내면 세계에 자신의 인격의 변화가 긍정적으로 일어나는 성숙이 발생했으며,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무의식적으로 긍정적인 쪽으로 변화가 일어났음을 통계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관상기도가 신학적으로 건전하다고 하는 것은 필자의 경험뿐만 아니라, 이 기도를 추천하는 사람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그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매일의 관상기도의 열매와 은혜는 기도하는 시간에 일어나기보다는 기도 시간 밖에서, 즉 일상생활에서 확인되며, 그렇기에 이 기도는 신자의 세상 속에서의 삶에 의미있는 영향을 주어서 영성적인 삶을 가능하게 한다.
신자 자신의 기도가 빈약하다고 느끼더라도, 기도 시간 밖에서도, 때때로 저절로 하느님의 현존을 기억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삶을 살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해서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하게 될 때가 그런 순간이다. 그리고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 자신 속에 깊은 고요와 평화가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 이 기도를 지속적 실천을 통해 자신의 삶의 과제를 더 잘 수행할 수 있고, 사람들과도 더 원만하게 관계해가게 되며, 주님께 더 충실히 봉사하려고 애쓰고, 그분이 내게 원하시는 것만 할려고 애쓰게 됨을 발견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만족스러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게 원하시는 것”을 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오는 영혼의 기쁨이다.
그래서 키딩은 관상 기도의 평가 기준은 일상의 삶에서 “큰 평화, 겸손과 사랑을 갖게 된 것과 같이 장기적으로 맺어지는 열매들”라고 주장한다. 이 기도로 익은 열매는 기도 시간에서 뿐만 아니라, 바쁘게 움직이는 일상생활에로 돌아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것이라기보다는, 모든 사건이나 현상을 너머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하며 사는 데에 있다.
13. 관상기도의 지속적 실천: 하나됨의 비전을 향하여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영성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루를 관상기도로 시작하고, 삶 속에 함께하는 주님의 현존을 인식하는 삶이 요청된다. 또한 하루의 일과를 마치면서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평범한 일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셨는가를 감사하고 성찰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관상기도를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내적 눈을 항상 깨어있게 하여, 현장에 있는 것을 ‘보고’ 이 실재에 관하여 깨달아가면서 우리는 성장을 지속해가야 한다. 마이스터 엑크하르트는 인간의 외부적인 일에 마음이 집중하는 삶에 대해서 “하나님은 언제나 집에 계신다. 밖에 나가서 돌아다는 것은 우리들이다”라고 말했다. 필자가 강조하는 관상기도는 믿음의 선물을 발전시키면서 이러한 깨달음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며, 이런 인식은 신자에게 현실을 보는 하나님의 비전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영적 성장의 적은 이러한 하나님이 현존하는 현실보다는 자기 중심적 경향인 자기중심성에 있다. 영성 성장을 위해서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 지향에 도전하려고 먼곳에서 그 대상을 찾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대상들은 우리의 가정이나 단체 생활 안에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케하는 우리의 스승은 우리가 처한 바로 현실적 ‘상황임’을 주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자가 추구해야 할 관상은 우리 영혼이 궁극적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가는 움직임이다. 다음의 이야기가 이러한 사실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옛날에 한 랍비가 한번은 제자들에게 밤이 지나고 새 날이 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한 제자가 ”멀리 있는 동물을 보고 양인지 개인지 분간할 수 있을 때 새 날이 아닙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랍비는 대답했습니다. ”아니“ 또 한 제자가 “멀리 있는 나무를 보고 무화과 나무인지 복숭아 나무인지 분간할 수 있으면 새 날입니까?” 랍비는 대답했습니다. “아니” “음, 그렇다면 무엇인지요?”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랍비의 대답은] “너희가 보는 사람들의 얼굴이 다 너희의 자매 형제로 다가올 때, 그 때가 새 날이다. 만약 너희가 이것을 할 수 없다면, 시간이 언제든지 상관없이, 여전히 밤이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모든 남녀’를 ‘형제’요 ‘자매’로 보는 것은 신비가의 믿음의 비전에 함께 하는 것이다. 신비가의 핵심적 직관은 하나님 안에서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일치(unity)하고 하나(oneness) 되는 것이다. 이것은 관상 상태에로의 진전을 통해 나타나는 관상(contemplation)의 은혜로운 효과로서 가능하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야기되기보다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실재(reality)를 보는 우리의 눈을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변형시켜가게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신자가 추구하는 비전은 비현실적이거나 허황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점점 드러나고 있는 산업화·정보화 사회의 진전으로 야기되는 환경적 위기 속에서 지구의 생존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람들과 우주의 모든 존재가 서로 상호 연대하는 일을 실현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이 점점 명백해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 인식은 물질 중심의 세계관에서 종교적인 세계관, 곧 하나님께서 우리 세계에 임재(presence)하여 활동하고 계신다는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경험은 글자 그대로 신비적(mystical)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칼 라너는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은 신비가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전혀 그리스도인으로 있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의미에서 더욱 무게있게 다가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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