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부들의 가르침 (37) 암브로시오 / 장인산 신부
이단에 대항, 정통신앙 보호 앞장
가톨릭신문 : 2003-07-27 [제2358호, 13면]
생애
암브로시오는 성인이며, 주교, 학자이며, 아우구스티노, 예로니모, 그레고리오 대교황과 더불어 라틴(서방)교회의 전통적인 4대교부로 꼽히는 인물로서 339년 현재 독일 서쪽 도시인 트리어에서 출생하였다. 암브로시오의 생애는 그가 남긴 저서들을 통해서 모습이 비쳐질 뿐만 아니라 그의 사후에 밀라노의 파울리노가 쓴 전기(聖 암브로시오의 생애 : Vita S. Ambr osii)덕분에 잘 알려져 온다. 갈리아의 지방장관으로 재직하던 부친의 별세 후 어머니는 암브로시오를 포함한 삼남매를 데리고 로마로 돌아갔다. 로마에서 누나 마르첼리나는 수녀가 되어 교황 리베리오로부터 머리수건을 받았고, 형 사티로와 함께 암브로시오는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공부하는 학교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수사학, 철학, 법학 등을 배운 암브로시오는 일찍 관직생활에 들어가서 황궁이 있던 도시 밀라노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 도시는 에밀리아-리구리아지역의 수도로서 암브로시오는 그 지역의 주지방장관이 되었다.
당시 밀라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던 아리우스주의 이단을 추종하던 아욱센시오 주교가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가 죽은 후에 후임주교를 뽑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가 작용하시어 암브로시오가 밀라노의 주교가 되었다.
교회-국가간 문제 다뤄
암브로시오 주교는 주교품을 니체아 공의회의 정통교리를 옹호하는 주교로부터 받은 후 단호하게 아리우스 이단을 대항하여 가톨릭 교회의 정통신앙을 보호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리하여 서방교회에서 니체아 신앙이 확고하게 자리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암브로시오는 교회와 국가간의 문제를 정식으로 다룬 최초의 교부이다. 교회가 그 고유한 영역에서는 최고권을 가지며 도덕의 수호자라는 사실을 황제에게까지 인식케 하였다. 국가의 권력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대처함으로써 교회의 권리와 가르침에 대하여 황제의 간섭을 단호하게 물리침으로써 교회지도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교회와 국가간의 문제를 정식으로 다룬 최초의 교회학자였다. 또한 교회가 그 고유한 영역에서는 최고권을 가지며 도덕의 수호자라는 사실을 황실에서도 인식케 하였다.
탁월한 강론가
암브로시오는 주교가 된 직후 이렇게 고백하였다. 『학생도 되기 전에 스승이 되었구나. 배워야 할 내가 가르치게 되었구나!』 그는 열심히 성서공부에 몰입하였다. 바쁜 사목활동 중에서도 그는 늘 성서를 읽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아우구스티노가 증언한다(고백록 6, 3, 3).
암브로시오 주교는 특히 동방교부들의 저서를 심취하여 읽었고 그들에게서 많은 영감을 전해 받았다. 필로와 오리게네스와 같이 성서의 3중(重)적인 의미(자연적, 신비적, 윤리적)를 받아들였다. 특히 윤리적, 유비적 해석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는 성서의 각 사건 안에서 깊은 의미를 추구하였고, 신앙과 생활에 유익을 가져다주는 가르침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필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암브로시오 교부는 「Philo Christianus」(그리스도교적 필로)라고 불리운다.
암브로시오 주교가 성서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여 열심히 준비한 강론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감명을 심어주었다. 아우구스티노도 그의 강론을 듣고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개종하는 은혜를 받은 사실은 유명하다(고백록 6, 4, 6). 그는 이단으로 갈라진 신자들을 화해시키고, 성직자들과 신자와 비신자 군중들 모두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는 동방신학을 서방교회에 소개하고 자신의 교구 사제들이 주교관에서 공동으로 모여 기도하고 생활 할 수 있도록 배려함으로써 교구참사수도회의 시조가 된 사목자들의 아버지였다고 볼 수 있다.
성직자들의 모범이 된 목자
암브로시오는 주교가 된 후 곧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희사하였고, 자신은 수도자와 같이 청빈과 극기의 생활을 하면서 사목활동에 전념하였다. 주교관을 개방하여 원하는 사람들은 항상 그를 만날 수 있었고, 따라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줄을 서서 그를 찾았다.
암브로시오 주교는 성서에서 가르치는 대로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과는 함께 우는 사람이었다. 죄인들에게 항상 동정심을 가지고 대하였던 그는 교회 사목자들의좋은 모범이 되었다. 『매번 죄를 고해하러 사람들이 그에게 올 때마다 그는 항상 같이 울곤 하였습니다. 그는 죄에 떨어진 사람과 함께 자신도 범죄하였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죄의 고해를 들은 그는 항상 주님만을 신뢰하며 기도해 주곤 하였습니다. 그분은 이와 같이 후대 사제들에게 좋은 표양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제들은 사람들을 책망하고 고발하는 자세보다는 하느님께 그들을 위해서 전구해 주는 자세로 일해야 합니다』(전기 39).
암브로시오는 주님께 베드로의 눈물을 자신에게도 내려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눈물의 죄를 씻는 효력과 사람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영적 효과에 대하여 강조하면서 이런 종류의 눈물을 「좋은 눈물」이라고 불렀다. 그의 영향은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지대하였다.
저술활동
암브로시오는 주교로서 사목활동에 여념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을 위해 실천적이며 교육적인 목적으로 많은 저서들을 남겼다. 그의 작품들은 라틴교부 문헌 총서인 PL전집 14~17권에 수록되어 있고, 그 외에 CSEL, CCL과 SC 전집에 들어 있다. 성서에 대한 많은 주해서와 윤리-수덕에 관한 저서들과 교의신학적 저서들, 그리고 연설문, 서간과 찬미가들을 남겼다. 특히 치체로가 아들을 위해 쓴 저서 「직무론」의 틀 안에 자신의 영적 아들들인 교구 사제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교 신앙과 성직자의 직무를 담아서 완성한 「성직자들의 직무론」(De officiis ministrorum)』은 라틴교회의 첫 윤리신학 총서로 꼽히는 작품이 되었다. 또한 「찬미가」들을 지어서 신자들에게 부르게 한 공로로 암브로시오 주교는 서방교회의 성가작곡의 창시자로 불린다.
암브로시오의 정직하고 헌신적인 삶은 고대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후대를 위해서는 정신세계에 기반을 닦아놓은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사도적 사명감을 가지고 헌신하던 암브로시오는 397년 4월 4일, 성주간 성토요일에 선종하여 그의 밀라노 주교좌 성당에 안치되었다. 교회는 그의 축일을 12월 7일에 지낸다. 암브로시오 주교는 「엘리아와 같이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제왕들과 권력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꺼리지 않은」 모범적인 주교였다(전기 47, 3).
장인산 신부(대전가톨릭대 교수)
출처 : 지상의 나그네
글쓴이 : 잔꽃송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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